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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의 도참사상〔槪說〕
[편집]건국과 통일 중심의 도참
[편집]建國-統一-圖讖
나말(羅末) 후 삼국 중에 가장 강력한 태봉국의 수상 왕건(王建)이 부하들에게 추대되어 포악한 국왕(궁예)을 몰아내고 대신 왕권을 장악하는 역성혁명의 주가 되었다. 태조 왕건은 즉위 후 국내통일 즉 삼국통일을 자기의 지상 명령으로 삼아 그의 탁월한 역량과 교묘한 정략으로써 마침내 통일의 대업을 이루었다. 고려는 북방에서 기국(起國)한 만큼 그 건국의 이상이 비단 남방의 나제(羅濟) 두 나라를 합병하는 데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실로 고구려의 옛 땅까지도 회복하려고 했던 것이다. 국호를 고려라 하고, 고구려의 고도인 평양을 서경(西京)이라 하여 그곳을 중심으로 북방개척에 노력한 것을 보아도 더욱 알 수 있다. 물론 거란이란 강대한 나라가 나타나 발해국을 멸하고 만주대륙을 그 지배함에 따라 태조의 이 포부는 실현되지 못하고 말았지만, 고려의 판도는 나대(羅代)보다는 조금 북진했던 것이다. 태조는 무인 정치가로서 전통적 신앙 사상에 사로잡힌 그 시대의 산아(産兒)인 만큼 불력(佛力)신앙과 지력(地力)신앙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그의 훈요10조(訓要十條) 중에도 그 사상이 나타나거니와, 즉 "사찰을 남조하여 지덕(地德)을 손상치 말라"고 한 것이라든지, 서경(西京) 즉 평양은 수덕(水德)이 순조해서 대업만대(大業萬代)의 땅이니 사중(四仲-子·午·卯·酉)년에 순주(巡駐)하여 백일 동안 머무르라는 것이 실려 있다. 여기에는 태조 자신의 신앙뿐 아니라 정략적인 점도 포함되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사찰 남조와 서경 중시에 관한 정략). 고려 초기는 말하자면 신 왕조의 창건과 삼국통일을 달성한 시대였으므로 이 때에 대두하여 유행한 도참도 자연 거기에 관한 것이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저 왕창근(王昌瑾)의 고경참(古鏡讖)과 같은 것은 바로 태조 왕건의 즉위와 국내 통일을 예언한 비기였던 것이다. 종래 사가들은 고경참을 후세인(後世人)의 조작으로 생각하는 이가 많았으나, 필자가 연구한 바로는 즉위 직전에 혁명파에 의해서 그것이 조작된 것으로 생각된다. 그 내용을 보면, 태조 왕건의 유년길흉(流年吉凶)을 말한 일종의 사주(四柱)풀이와 같은 것으로, 왕건이 어느 때 출세하고 어느 때 즉위하고, 어느 때 국내를 통일한다는 등등의 문귀로 나열되어 있다. 그런데 출세 연대는 대개 엇비슷하게 맞으나 즉위 연대라든가 통일 연대는 실제의 그것과 맞질 않는다. 이것으로 보아 그 고경참의 조작이 태조 즉위 전에 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이 고경참은 태조를 추대하여 혁명파에서 즉위 직전에 이것을 조작하여 외국 상인(왕창근)을 통해서 세상에 알리게 되고 이것이 당시 인심을 지배하는 데 큰 효과가 있었다.
중기 이후의 도참
[편집]中期以後-圖讖
그런데 고려 중기에 이르러서는 중쇠(中衰) 관념에 사로잡혀 왕실의 기업(基業)을 연장시켜야 한다는 연기(延基) 사상에서 조작된 도참설이 머리를 들고 유행하게 되었다. 더욱이 당시 서울인 개경의 지덕(地德)은 차차 쇠하여 감으로 지력이 왕성한 길지(吉地)를 택하여 거기에 이궁(離宮) 내지 이경(離京)을 건설하고 국왕이 때때로 순주해서 그 왕기(旺氣)를 받음으로써 기업을 연장할 수 있다는 지리쇠왕설과 역운설(曆運說)에 기인한 것이었다. 그래서 문종 때는 소위 도선의 <송악명당기(松岳明堂記)>에 "태조 통일 후 120년에 이르러 서강변(西江邊)에 신궁(新宮)을 일으키면 국업(國業)이 연장된다"는 문구가 있으므로 해서 서강변인 지금의 개풍군(開豊郡) 서편에 장원정(長源亭)이란 신궁을 세우게 되었던 것이다. 문종(文宗)은 이 장원정뿐 아니라 서경에 좌우궁(左右宮)을 일으키고 지금의 서울에 남경을 설치하기까지 했는데 이것은 다 그 연기사상(延基思想)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런데 이 때 남경은 얼마 안 있어 폐지된 듯하며 그후 숙종(肅宗) 때에 다시 남경 건치의 의논이 일어났다. 숙조 때에 유행한 비기 가운데는 <도선기(道詵記)>와 <도선답산가(道詵踏山歌)> <삼각산명당기> 및 <신지비사(神誌秘詞)> 등등이 있었는데, 여기에는 대개 남경의 건설과 함께 3경(三京-西京·中京·南京)의 중요성 내지 순주설(巡駐說)이 적혀 있다. <도선> 두 글자를 첨가한 비기류는 나말(羅末) 도선의 소작(所作)이라고는 생각되지 않고, 그러한 명인(名人)의 이름을 빌어다 쓴 것으로 볼 수가 있다. 어떻든 여기에 의지해서 숙종 때에는 남경이 재건되고 지금의 경복궁(청와대 부근)에 남경 신궁(新宮)을 세우고 순주를 시험했던 것이다. 다음 예종 때에는 역시 도참설에 의해서 서경(지금의 평양) 을밀대(乙密臺) 부근에 '용언궁(龍偃宮)'이란 유명한 궁을 이룩하고 분사제도(分司制度)(分權制度)를 더욱 강화하여 서경에 완연한 또 하나의 정부가 등장하게 된 것과 마찬가지의 형세를 이루었다. 이것이 후일에 나타나는 묘청(妙淸) 등의 서경천도운동 내지 그 반란을 초래케 했던 것이다. 이 때의 정세를 일별하면 밖으로는 강대한 금(金) 나라가 일어나 북송(北宋)을 멸하고 고려에 압력을 가하고 있었으며 내부적으로는 왕권의 쇠미(衰微)와 함께 권신 이자겸(李資謙) 등의 발호가 있어 시국이 대단히 불안한 상태에 빠졌다. 이자겸은 그 부조(父祖) 이래의 왕실과의 중첩한 외척 관계와 당시에 유행했던 십팔자참(十八子讖-李氏得國의 讖)에 의해서 마침내 모반을 하다가 실패하였다. 십팔자 참설은 본시 중국 남조(南朝)에서 일어났던 것인데, 이 때 고려에서 이씨의 세력이 강대해지자 그것이 대두하게 된 것이다. 음양도참가는 시국에 예민한 편이며, 이 불안한 시국을 이용하여 서경천도 운동을 부르짖으며 일어났던 사람이 서경의 승려 도참가 묘청이었다. 이때 묘청은 일관 백수한 등과 더불어 양경(中京과 西京) 지덕의 쇠왕설(개경은 쇠하고 서경은 왕성)을 논하여 인종(仁宗)에게 진언하기를, 서경 임원역(任源驛)은 음양가에 이른바 대화세(大花勢)에 해당한 곳이니, 만일 이곳에 궁궐을 세우면 천하를 가히 아우를 수 있고 금국(金國)도 저저절로 와서 항복할 것이요, 해외의 모든 나라가 와서 조공할 것이라 했다. 인종은 묘청과 백수한을 성현(聖賢)으로 받들고, 인종은 그 설에 움직여 드디어 그곳에 신궁을 짓고 이름을 대화궁(大花宮)이라 하고 자주 이어(移御)를 실시하였다. 묘청은 이밖에 금국 정벌론, 또 칭제건원론 등을 주장한 일까지 있었으나 그 진심은 무엇보다도 서경을 상경(上京)으로 하여 개경의 부패한 정권을 자기네게로 이식하여 중흥의 다스림을 도모하는 공신이 되려는 데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종종 요술로써 왕의 사랑과 이어(移御)를 일층 더 이끌려 했다. 그러나 일찍부터 이들과 대립하여 온 일부의 유자(儒者)들, 특히 김부식(金富軾) 일파의 맹렬한 묘청배척운동이 일어나자 묘청은 마참내 서경을 근거로 반란을 일으켜 국호를 대위(大爲), 연호를 천개(天開)라 하고 개경 정복의 반기를 들었다가 마침내 김부식 인솔하의 관군에게 패멸 당하고 말았다. 묘청의 난과 그후 무신 집권시대의 서경 유수(留守) 조위총(趙位寵)의 반란 이래, 서경을 일종의 반역향으로 인식하여 순주3경(巡駐三京)의 관념은 자연 사라지고 그 대신 국왕 순주의 소(小) 3경으로서 등장한 것이 이른바 3소(三蘇)였다. 3소는 좌소·우소·북소를 가리키는 것이니 좌소(左蘇)는 백악산(장단 백악산), 우소(右蘇)는 백마산(개풍군 대성면), 북소(北蘇)는 기달산(신계 동쪽)으로, 각 산하에는 지금도 궁터가 남아 있거니와 명종 때에는 3소궁(三蘇宮)을 짓고, 말기 공민왕 때에는 좌소백악(白岳)에 신경을 일으키고, 다음 우왕 때에도 좌소 또는 북소에로의 천도설가지 등장한 적이 있었다. 그러면 '소(蘇)'란 무엇인가? 그 어의에 대하여 여러 가지로 고찰해 보았으나 필자의 결론으로서는 소는 상(上)·신(神)·봉(峰)·용출(聳出)을 의미하는 국어(國語)의 '수리', '솔', '솟'의 사음(寫音)인 것이라고 생각된다. 송악의 송(松)도 실상 이러한 의미의 솔, 솟의 차훈(借訓)인 것은 송악을 송산(崧山)·숭산(嵩山) 혹은 신숭(神嵩)이라고 한 데서 알 수 있는 것이다. 요컨대 3소는 개경인 송악을 중심으로 하여 우측에 우소, 좌측에 좌소, 북측에 북소란 일종의 신산(神山)에 이궁(離宮)을 짓고 국왕이 순주한다는 것이니 전일의 3경을 축소한 소규모의 3경으로 했던 것이다. 고려의 무신정권은 문신귀족에 대한 타도로써 수립되었으나, 얼마 안 있어 무신 자체 내의 모순과 분열로 인하여 서로 대립 투쟁이 되풀이되다가 결국 최충헌에 이르러 확고한 무신정권이 수립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전도된 체제의 현상과 계급적 변화는 일반 인심에 미친 영향이 커서 지방 대 중앙의 반기, 하층 대 상층의 반항운동을 순치 유도했던 것이다. 이러한 반란이 각처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이 때의 집권자 최충헌은 산천비보도감(山川裨補都監)을 두고 술사(術師)의 설에 의해서 산천의 난주(亂走)한 곳 혹은 역(逆)한 곳을 인공적으로 혹은 불력(佛力)으로써 비보하여 국업의 연장을 도모했던 것이다. 지방 반란에 관련되어 일어난 도참설은 신라 부흥 십팔자참설의 대두였다. 좀더 자세히 말하면 경주 부근에서 김사미(金沙彌)·효심(孝心) 등이 반란을 일으켜 신라 부흥을 내세웠고, 또 무신의 한 사람인 이의민(李義旼)도 십팔자의 참을 믿어 모역을 꿈꾸다가 결국 최충헌 일파에게 멸족당하고 말았다. 고려 말에 이르러서는 대내외적으로 복잡다단한 중, 특히 연년 왜구 등의 침해로 국내 상하가 불안한 가운데 있었으므로 도참설에 의하여 순주 및 천도론이 자주 일어났다. 위에 말한 공민왕의 일시적인 백악(좌소) 신경 천도와 우왕의 북소 천도론과 좌소 천도론이 일어났고, 공양왕 때는 한양 천도론이 일어나 일시 국왕의 거동을 보게 되었지만 실상 이 한양 천도론은 공민왕 때에도 중 보우(普愚)가 도읍하면 36국이 조공한다고 해서 왕은 그 설에 현혹되어 한양 궁궐을 일으키게까지 했던 것이다. 끝으로 고려말 함경도 출신으로서 중앙에 진출하여 신귀족으로 등장한 이성계(李成桂)의 세력이 커지자 그를 추대하려는 일파가 생기고, 따라서 목자(木子, 李氏)가 왕이 된다는 목자 참설이 유행했다. 이 참설은 마침내 사실화하여 이씨가 새왕조를 개창하게 되었지만 이 역시 위에서 말한 십팔자 참설과 같이 시대에 응해서 조작된 것이지만, 이런 참설이 일반 민심에 미치는 영향은 물론이고 영웅을 자극하여 실제로 사실화하는 경우도 있게 되었다.
태조 왕건의 도참사상
[편집]太祖王建-圖讖思想
신라말의 혼란 속에서 성장하여 신왕조를 개창한 왕건은 당시에 이미 만연되기 시작한 풍수지리설, 특히 도선(道詵)의 비기를 신봉하여 후 삼국을 통일하는 데 최대한 이용하였을 뿐 아니라, <훈요10조(訓要十條)> 등을 비롯한 각종 유문(諭文)을 통하여 도읍지 선정, 사원·탑묘의 축조, 성곽 축성, 인재 등용 전반에 음양도참설을 적용하도록 하였다 이제 그 사상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사원을 건축한 때에는 지덕을 손상시키지 않도록 조심하라(훈요10조 제2조). (2) 내가 삼한을 통일한 것은 산천의 음우에 힘입은 것이요, 서경(西京)은 수덕(水德)이 순조롭고, 우리나라 지맥의 근본으로 대업만대(大業萬代)의 땅이니 이를 잘 보살피도록 하라(동 제5조). (3) 팔관회(八關會)는 천령(天靈) 및 5악명산대천의 용신(龍神)을 섬기는 것이니 이를 어김없이 행하도록 하라(동 제6조). (4) 차현(車峴) 이남 공주강(公州江)외는 산형지세(山形地勢)가 배역(背逆)하여 인심도 그러하니 그곳 사람을 등용하지 말라. 이리하여 그는 개경(開京)의 지덕을 비보(裨補)하기 위하여 필요한 곳에 사원을 개창하도록 하였고, 서경에 대도호부를 두고 나성(羅城)·재성(在城) 등을 쌓았으며 장차 서울을 그곳에 옮길 생각까지 하였으며, 한때는 천안(天安)이 '다섯 마리의 용이 구슬을 다투는 지세(地勢)'라는 술사의 말을 듣고 그곳에 왕자성(王字城)을 쌓고 도독부(都督府)를 두기도 하였다.
예방
[편집]藝方
10세기 인물. 고려초의 술사(術師). 태조 13년(930년) 후백제 견훤과 쟁패하고 있을 때, 왕에게 천안 왕자산(王字山)의 산세가 "삼국의 중심이요, 오룡쟁주지세(五龍爭珠之勢)의 요지이니 이곳에 대관(大官)을 배치하면 백제가 스스로 항복해 오리라"고 상주(上秦)하여 곧 왕자성을 쌓고 10만 군사를 주둔시키며 도독부(都督府)를 두게 하였다고 한다.
도선답산가
[편집]道詵踏山歌
도선이 지었다고 전하는 감여서(堪輿書). 음양지덕(陰陽地德)과 풍수상지법(風水相地法)을 설명하고, 도선의 답산가, 산론수파법(山論水破法) 외에 감여론을 수록한 것으로 고려 문종(文宗)·숙종(肅宗)대에 많이 읽혔다고 한다.
서경천도론
[편집]西京遷都論
고려 때에 풍수지리설에 따라 개경의 지덕이 쇠하고 서경이 명당자리이니 그곳으로 도읍을 옮겨야 한다고 주장한 입장으로 대략 다음과 같이 나타났다. (1) 태조가 <훈요10조>에서 서경의 수덕(水德)이 순조로워 우리나라 지맥의 근본이요, 장차 도읍할 자리라고 하여 개발을 서둘렀다. (2) 3대 정종(定宗)이 도참을 믿고 서경천도를 준비하다가 승하하여 중단되었다. (3) 6대 성종이 서경을 자주 순행하고 유수(留守)를 설치하였다. (4) 목종(穆宗)·현종(顯宗)·정종(靖宗)·문종(文宗) 등이 계속 궁궐을 짓고 시설을 확충하였다. (5) 16대 예종(睿宗)대에 연기(延基)의 방법으로 김위제(金謂 ) 등의 의견을 따라 서경에 신궁으로 용언궁(龍堰宮)을 짓고 분사제도(分司制度)를 실시하였다. (6) 17대 인종 때에 묘청(妙淸)·백수한(白壽翰) 등의 설을 좇아 서경천도를 추진하다가 김부식(金富軾) 등의 반대로 좌절되자 묘청 등은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였다. (7) 공민왕(恭愍王) 대에 신돈(辛旽)이 도선비기의 송도기쇠설(松都氣衰說)을 이끌어 서경천도를 주장한 일이 있었다.
김위제
[편집]고려 숙종 때의 술사. 1097년에 도선의 도참설을 들어 남경천도를 주청하였고, 1099년에는 숙종이 친히 남경 지세를 답사케 하여 궁궐까지 짓게 되었다. 그는 남경천도와 서경 중시의 근거로 36국이 조공해 온다는 비기설을 내세워 예종조에는 서경 용언궁 창건공사에 참가하였고, 인종조의 묘청의 칭제건원론(稱帝建元論)과 서경천도론의 이론적 근거를 마련해 주었다.
남경천도론
[편집]南京遷都論
고려 중기에 개경의 지덕이 쇠퇴함을 극복해야 한다는 도참설에 따라 지금의 양주(楊州)·서울 등 한강 유역으로 도읍을 옮기거나 별궁을 두어 순주해야 한다고 주장한 입장으로, 대체로 다음과 같이 전개되었다. (1) 문종(文宗)이 이곳에 남경(南京)을 개창하고 신궁을 지었다. (2) 숙종(肅宗)은 음양관 김위제의 상서건의에 따라 남경개창도감(南京開創都監)을 두고 지금의 삼각산 기슭에 남경을 재건 경영하였다. (3) 공민왕은 중 보우(普愚)의 참설에 따라 한양천도를 계획하고 이제현 등으로 자리를 알아보게 하여 궁궐까지 지었으나 윤택(尹澤) 등의 반대를 받았고 불길한 징조가 나타나 중단하였다. (4) 우왕(禑王) 때에 한양천도론이 있었으나 최영(崔瑩)의 반대로 좌절되었다. (5) 공양왕(恭讓王)은 박의중(朴宜中) 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한양천도를 추진하여 한양 궁궐을 수리시켜 일시 천도하였으나 불상사가 일어나 개경으로 돌아왔다. 이 주장은 고려 때 이와 같이 간간이 등장하였다가 사라졌지만 고려 멸망 후에는 곧 조선 태조의 한양천도로 실현을 보게 되었다.
이씨득국참언
[편집]李氏得國讖言
고려 때 이씨가 나라를 얻어 왕이 된다는 참언으로, 고대의 술사 신지(神誌)가 지은 <구변도국(九變圖局)>설에 근거한 것이다. 고려 때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나다가 이성계(李成桂)의 등장에 연결된다. (1) 인종(仁宗) 때 권신(權臣) 이자겸(李資謙)이 이 참설의 일종인 '십팔자(十八子)'의 참을 이용하여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였다. (2) 명종(明宗) 때의 권신 이의민(李義旼)은 십팔자(十八子)가 왕이 된다는 참설을 믿고 모역(謀逆)하다가 최충헌(崔忠獻)에게 살해되었다. (3) 이성계 득세 후에는 <목자득국(木子得國)>의 동요가 유행하였고, 그와 연결된 참문이 조작되어 지리산(智異山) 석벽의 이서(異書)라고 운위되었다.
구변도국
[편집]九變圖局
구변진단지도(九變震檀之圖)라는 참서의 약칭이니, 상고시대의 선인 신지(神誌)의 저서로 전한다. 도선비기와 함께 고려시대에 널리 유행하여 많은 참설을 낳게 하였고, 때로는 도읍지 선택, 혁명예언 등에 이용되기도 하였다. 즉 진단 조선의 도국(圖局)이 아홉번 바뀌는데 그 중에 한 차례 이씨가 입국건도(立國建圖)한다는 참설이 있어 이자겸의 난, 이성계의 등장에 활용되었다.
3소
[편집]三蘇 고려 중기 무신발호기에 개경의 지덕을 연장시키고 비보(裨補)하기 위하여 개경 부근 세곳에 연기궁(延基宮)을 지어 순주케 한 것. 명종(明宗) 때에 도참가의 건의에 따라 좌소(左蘇)를 장단(長湍) 백악산(白岳山)에, 우소(右蘇)를 풍덕(豊德)의 백마산(白馬山)에, 북소(北蘇)를 신계(新溪)의 기달산(箕達山)에 설치한 것이 처음이요, 공민왕 때에는 평양·금강산·충주 등을 3소로 삼으려 한 일이 있으며 우왕 때에는 북소로의 천도설까지 등장한 적이 있었다.
신라 부흥참설
[편집]新羅復興讖說
명종 무신 집정기에 동경(東京) 경주를 중심으로 유행한 고려 멸망·신라 부흥을 내용으로 한 참설로 이것을 이용하여 김사미(金沙彌)·효심(孝心) 등의 민란이 일어나 삼남을 휩쓸었고, 이것과 <십팔자득국참언(十八子得國讖言)>을 연결하여 모역을 꿈꾸던 이의민이 최충헌에게 타도되었다.
최충헌의 산천비보정책
[편집]崔忠獻-山川裨補政策
고려 중기의 무인집권자 최충헌(1149∼1219)이 도참설에 근거하여 실시한 산천비보시책. (1) 명종 26년 집권 직후에 왕에게 올린 봉사(封事)를 통하여 산천의 길흉·순역을 무시하고 남조된 사원의 철폐를 주장하였다. (2) 신종(神宗) 원년에는 문무제신과 술사들을 모아 국내 산천의 비보연기(裨補延基)에 관한 일을 논의하고 산천비보도감(山川裨補都監)을 두어 불교적폐의 개혁과 무비보(無裨補) 사찰의 철폐를 단행하였다. (3) 같은 해에 술사의 건의로 역신(逆臣) 이의민이 쌓은 제방을 파괴하였다. (4) 고종(高宗) 때에 거란인의 내침을 막기 위하여 김덕명(金德明)의 건의대로 후릉(厚陵:肅宗의 능)의 개장을 시도하다가 그만두었고, 술사 이지식(李知識) 말에 따라 건원사(乾元寺)를 파괴하고 좌소 백악에 신궐을 경영하기도 하였다.
장원정
[편집]長源亭
고려 문종 때 도선의 것이라는 <송악명당기(松岳明堂記)>의 도참설을 근거로 해서 연기(延基)의 방책으로 서강(西江:禮成江)변에 세운 소이궁(小離宮). 문종은 "서강변에 군자가 말을 타는 형세의 명당자리가 있으니 태조의 삼국통일 이래 120년 되는 때에 이곳에 이궁을 지으면 국업(國業)이 연장된다"는 참설에 따라 김종윤(金宗允) 등에게 명하여 이궁을 짓고 장원정(長源亭)이라 하였다.
용언궁
[편집]龍堰宮
고려 예종(睿宗) 때 도참설에 의하여 서경 용언 지리에 세운 궁궐로 용덕궁(龍德宮)이라고도 한다. 예종 원년에 태사령(太史令) 음덕전(陰德全) 등의 의견을 따라 음덕전·김위제 등에게 상택(相宅)케 하였고, 2년에 다시 최홍사(崔弘嗣)의 주장에 따라 용언궁 창건에 착수하여 동왕 11년에 낙성을 보고 그곳에서 군신의 조하(朝賀)를 받고 제문(制文)을 내렸다. 그러나 이때 오연총(吳延寵)은 세 가지 이유를 들어 반대의견을 편 것으로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