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동양사상/한국의 사상/고려시대의 사상/고려시대의 도교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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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의 도교사상〔槪說〕[편집]

후삼국을 통일하여 한반도의 새 주인으로 약 5백년간 계속된 고려는 표면적으로는 신라와 마찬가지로 불교를 국교로 하는 불교국가였지만, 실질적으로 점차로 유·불·선(儒佛仙)과 음양도참설까지 포용하여 동양적인 봉건사상 체제를 이룩하게 되었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불교가 유교·선교·음양도참설을 스스로 포용하는 데서 가능해졌고, 유학의 선비들 또한 도·불과 혼합된 사장문학(詞章文學)·시문학(詩文學)을 발달시키는 데서 더욱 촉진되었으며, 유교도 중엽까지는 불교와 도교를 용인하고, 상호공존의 성격을 띠었으므로 이들 사상간의 교섭과 혼합이 한결 활발해졌다. 먼저 태조 왕건의 건국설화에서부터 이미 고려는 불교·도교·음양도참설을 국책으로 받아들이고 있었으며, 그것이 민족 고유의 신앙과 결합되어 나타난 것이 바로 8선사상(八仙思想) 혹은 8성(八聖) 사상이요, 단군신화·동명왕 설화였던 것이다. 즉 민족 고유의 토착사상과 가장 쉽게 융합할 수 있는 것이 도교와 음양도참설이었고, 이것이 이미 소화된 불교로 각색되어 성립된 것이 바로 우리의 민족 신앙이요, 민족사상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신라의 멸망과 함께 화랑도의 전통은 끊겼지만, 이에 대신하여 민족을 단합시키고 주체성을 확보시키려는 노력이 이들 민족설화와 신불(神佛)에 대한 국가적인 제전(祭典)으로 나타난 것이다. 불교적인 팔관회(八關會)·연등회(燃燈會)를 가지면서도 때때로 도교적인 초제(醮祭)를 지냈고, 중기 이후에는 이를 맡아보는 관청으로 복원관(福源觀)·대청관(大淸觀)을 두었는데 후자는 조선시대까지 전승되었다. 또한 신라말 도선(道詵)에서 비롯한 음양도참설이 창성함에 따라 이들 술사들은 자기 비술의 연원을 불교·도교적으로 조작하여 민중을 현혹시키는 것이 보통이었다. 묘청의 <태일옥장보법(太一玉帳步法)>, 백수한(白壽翰)의 <천지인삼정사의장(天地人三庭事宜狀)>이 모두 도교 이론에 의탁한 것으로 보여지고, 초제를 지낼 때마다 지어올리는 문인들의 초례청사(醮禮靑詞) 또는 도교·불교의 용어를 마음껏 구사하고 있음을 본다. 그러나 고려시대 도교사상의 가장 큰 특징이 하나라면 역시 불운한 선비들의 야인정신(野人精神)이 도교적으로 표현되기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도교의 본고장인 중국에서 이미 도교는 관학(官學)인 유교에 대립하여 비판적인 세력의 귀의처(歸依處)로써 성장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이미 신라시대에도 약간 보여 물계자(勿稽子)·대세(大世)·최치원(崔致遠) 등이 모두 현실에 실망하였거나 불운하였던 사람들이었다. 고려시대에 와서는 외척의 발호, 무신의 장기집권, 사대주의의 등장 등으로 양심적인 관료, 박해받은 문신, 민족주의 세력, 하층민 등의 비판세력이 크게 대두되어 이들간의 세력다툼이 계속 일어났다. 그러나 전자가 유교를 무기로 삼는데 대하여 후자는 대개 유교정치에 실망하고 불교·도교·음양도참 등으로 무장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특히 이른바 강좌 7현(江左七賢)이라는 말로 나타난 무인시대의 문인들은 박해를 피해서 산간에 은둔하고, 청담(淸談)과 시주(詩酒)로 세월을 보내니 이들 사이에서 노장(老莊)의 풍 내지 도교가 크게 환영받았음은 물론이다. 이들을 중심으로 환상적인 설화와 현실도피적인 시가가 성행하니, 한국에 있어서 도교가 뿌리박을 터전이 비로소 마련된 것이다. 최치원 설화를 비롯한 각종 신선설화가 이때에 형성되었고, 한유한(韓惟漢)·최당 등의 은사(隱士)가 신선시된 것도 이때의 현상이었다. 도교가 이처럼 현실부정적인 은사의 사상으로 자리잡고 서민들 사이에 각종 미신이 성행하여 이것과 혼합되자 말기에 이르러서는 정주학(程朱學)으로 무장한 새로운 지식계급으로부터 적대시되어 불교와 함께 배척당하기도 하였다. 공민왕 때 서사호(徐師昊)라는 도사가 왔다고는 하나 그것은 명태조(明太祖)의 정책적인 배려에 그친 것이었고, 말기에는 도교의식과 관청의 존재부터 비판의 대상이 되기에 이르렀다. 이와 같이 도교가 유교에 대립한 야인정신(野人精神)의 귀의처로서 뿌리박는 현상은 다음의 조선시대에 이르러 더욱 두드러졌다.

8선사상[편집]

八仙思想

고려 전기에 있었던 도·불(道佛) 혼합의 8선(八仙) 혹은 8성(八聖) 숭배사상. 고려 건국설화에서부터 묘청·정지상 등의 서경천도론에 이르기까지 산천8신(山川八神)을 숭배하면 국운(國運)이 창성한다는 믿음이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난 바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고려 건국설화 중에 당나라 숙종이 잠저시(潛邸時)에 송악 곡령(鵠嶺)에 이르러 그곳이 8선주처(八仙住處)의 명당자리라고 하였고, 신라 풍수가(風水家) 팔원(八元)도 송악을 팔선이 머물 땅으로 보았다 한다. (2) 태조의 훈요10조에 나오는 팔관회(八關會) 조항에 팔관회는 천령(天靈) 및 5악(五獄) 명산대천용신(名山大川龍神)을 섬기는 것이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팔관회가 불교에서 유래한 본래의 것과는 다른 성격, 즉 도·불 혼합의 형태로 변한 듯한 인상을 준다. (3) 의종(毅宗) 22년에 왕이 서경 관풍전(觀風殿)에서 하교한 반령(頒令) 중에 선풍(仙風)을 받들고 팔관회를 계속 시행하라는 내용이 있다. (4) 고려초에 이미 건국설화에 따라 송악산에 8선궁(八仙宮)을 세워 산천 9신의 사당을 두었다고 한다. (5) 인종(仁宗) 때 묘청·정지상(鄭知常) 등의 주장에 따라 서경에 임원궁(林原宮)을 짓고 그곳에 송악8선과 유사한 서경8성(西京八聖)을 모셔 8성당이라고 하였는데 8성은 호국백두악태백선인(護國白頭嶽太白仙人) 등 8신인 바, 선인의 칭호가 4곳에 들어가 있고, 대개가 도교의 선인, 신인(神人)등과 불교의 보살, 불(佛), 우바이(優婆夷) 등을 합쳐서 호칭되고 있다.

초제[편집]

醮祭

고려시대에 제신(諸神)에게 지대던 제사. 고려에서는 건국초부터 말기에 이르기까지 궁성(宮城)내의 구정(毬庭) 혹은 회경전(會慶殿)이나 내정(內庭)에서 왕이 직접 천지, 산천 등의 제신에게 제사를 지냈는데, 이중에는 도교의 상제(上帝)나 5방산해신군(五方山海神君) 및 성신(星辰)이 모두 포함되었으며 제사의식도 도·불 혼합(道佛混合)식이 아니었나 한다.

복원관[편집]

福源觀

고려 중기에 궁성 안에 세운 도교의 사원. 일명 복원궁이라고 한다. 예종(睿宗)은 송휘종(宋徽宗)이 보낸 도사(道士)를 맞이하여 왕성 북쪽 태화문(太和門) 안에 복원관을 세우고 전내에 3청상(三淸像:도교의 신앙 대상으로 玉皇上帝, 太上老君, 善化天尊을 말함)을 안치하고 왕 자신이 믿으면서 도교를 보급시켰다.

태일옥장보법[편집]

太一玉帳步法

묘청이 인종 10년(1132년) 궁궐공사를 시작할 때 직접 해보인 도가류의 술법(術法). 묘청은 궁궐의 터를 닦을 때 최홍재(崔弘宰) 등 관리들을 차례로 세우고, 장군 4인을 사방에 서게 한 후에 병졸 120명은 창을, 300명은 횃불을 들리고 20명으로 촛불을 들어 둘러서게 한 후에 길이 360보나 되는 흰 삼줄 네 가닥을 사방에 끌어당겨 그 자신이 법(法)을 짓고 스스로 이것은 도선(道詵)·강정화(康靖和)에게서 받은 태일옥장 보법이니 백수한에게 물려주겠노라고 하였다. 이것은 도교류(道敎類)의 술법에 붙여서 연출한 압승술(壓勝術)의 일종으로 보여진다.

백수한[편집]

白壽翰 ( ? ∼1135)

고려 때의 일관(日官). 묘청을 스승으로 섬기면서 정지상 등과 같이 서경천도를 주장하다가 실패하였는데 그가 인종 9년에 <천지인삼정사의장(天地人三庭事宜狀)>을 올리니 3본을 만들어 1본은 성(省)에, 1본은 대(臺)에, 1본은 제사(諸司)에 붙여 모두 알게 하였다. 그 내용은 자세치 않으나 아마도 도교에서 말하는 3정설(三庭說)을 본따 천·지·인 3정설을 꾸며낸 것으로 보인다.

초례청사[편집]

醮禮靑詞

고려 때 유행한 초제(醮祭)의 축원문으로, 도가(道家)에게서 온 명칭. 고려의 역대 왕들은 각종 초제를 지내면서 그 때마다 문인들에게 축원문을 작성시켰는데, 도교에서는 축문(祝文)을 푸는 종이에 썼으므로 이것을 청사(靑詞)라고 한다고 한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으로는 김부식(金富軾)의 <건덕전초례청사(乾德殿醮禮靑詞)>를 비롯하여 김극기(金克己)·이규보(李奎報)·정보(鄭譜)·이곡(李穀), 권근(權近) 등이 지은 수십 편이 있다.

서사호[편집]

徐師昊

공민왕 19년에 명태조의 명을 받아 온 도사. 그는 고려에 와서 산천에 제사를 지냈는데, 전도에는 마음이 없고 명태조의 위엄을 선전하기에만 바빠 비석을 회빈문(會貧門) 밖에 세웠다고 한다.

한유한[편집]

韓惟漢

고려 중엽의 전설적인 도사. 이자겸(李資謙)의 행패가 심해지는 것을 보고 화를 입을까 두려워 악양(岳陽)에 은신하였다. 조정에서 관원을 보내 찾았으나 끝내 못찾고 말았다. 일설에 그는 신선이 되어 지리산(智異山) 속에서 최치원의 화상과 냇가 돌벽에 고운(孤雲)이라는 두 글자가 수없이 많이 새겨져 있음을 보았다고 한다. 뒤에 이곳의 산승이 고운의 한시 절구 1수를 발견하여, 뒤에 최치원을 신선으로 보는 청학동(靑鶴洞) 설화가 생겨나게 되었다.

강감찬 설화[편집]

姜邯贊說話

고려의 명장 강감찬의 일생을 도교적으로 윤색시킨 설화. 거란의 대군을 물리치고 나라를 구한 강감찬 장군의 위업을 찬양한 나머지 종교적으로 미화된 설화가 생겨났는데, 그가 태어날 때 대성운(大星隕)이 그의 집에 들어가는 것을 본 송나라 사신이 그의 관상을 보고 문곡성(文曲星)에 연결시켰다든가, 그가 신선이 되어 승천하니 푸른 하늘에 별 하나가 생겼다든가 하는 여러 가지가 전해오고 있다. 이것은 설화 중에서 가장 도교적인 색채를 보여주는 것이다.

최치원 설화[편집]

崔致遠說話

고려 때의 유행한 최치원 신선설화. 신라 말기에 불운하게 강산을 방랑하다가 종적을 모르게 된 최치원(崔致遠)을 도사(道士)나 신선(神仙)으로 꾸며내 만들어진 설화로, 고려 건국시의 참언으로부터 청학동(靑鶴洞) 설화나 재당시(在唐時)의 3원재사(三元齋詞) 설화, 선녀홍대(仙女紅袋) 설화 등 여러 가지가 있다.

최당[편집]

(1135∼1211)

고려 중기의 문인. 명종 1년(1171)부터 관계에 나아갔다가 신종(神宗) 때에 치사(致仕)하고 장자목(張自牧) 등과 기로회(耆老會)를 조직, 시주(詩酒)로 소일하면서 지상선(地上仙)이라 불렸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