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동양사상/한국의 사상/고려시대의 사상/고려시대의 사상〔槪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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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세기에서 14세기에 이르는 고려시대는 한국사에 있어서 중세적인 봉건체제의 확립기라 볼 수 있다. 통일신라시대에 면모를 갖추기 시작한 봉건제도가 이 때에 이르러 사회 전반에 깊이 침투되어 사대부 계급이 형성되었고, 봉건적인 가족제도가 이루어졌으며, 관제·토지제도·종교 등 전반에 걸쳐 중국의 당(唐)·송(宋) 대를 모방한 동양적인 봉건사회의 체제가 정비된 것이다. 따라서 통일신라 때까지만 해도 현저하던 토착적인 사회구조와 종교적 사상 및 각 분야의 문화면(面)에 걸쳐 변화된 모습이 자못 뚜렷하였다. 그러나 그 다음에 오는 조선시대와 비교하면 고려시대의 문화 현상 특히 사상면(面)에 있어서는 훨씬 유동적이고 포괄적이어서 조선시대와 같은 형식주의와 편파적인 획일주의에 고착되지는 않았다. 즉 고려시대는 통일신라시대와 조선시대를 잇는 과도기로서 고유사상 내지 유·불(儒佛)사상의 병행과정에서부터 이론화한 유교적 획일주의 정책(政策)으로 넘어가는 사상사상(思想史上)의 일대 전환기요, 시련기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 시대에는 고대의 예지와 독창성이 외래사조의 강력한 영향에 부딪쳐 진통을 겪어야 했고, 이러한 과정이 반복됨에 따라 종교·철학·윤리 등에 있어서도 이론보다는 실천, 내용보다는 의식이나 행사에 큰 비중이 두어졌는데 이러한 사상적 동태는 봉건체제의 강화와 밀접한 관계를 가졌던 것이다. 대체로 이러한 성격을 보여주는 고려시대의 사상을 간추려 보기로 한다.

불교의 융성[편집]

佛敎-隆盛

신라의 불교사상을 계승한 고려의 불교는 여전히 봉건적인 근왕사상과 결합하여 이른바 호국불교(護國佛敎)의 성격을 분명히 하였다. 건국 초부터 계속된 팔관회(八關會)·연등회(燃燈會) 등의 국가적인 행사는 불교의식(儀式)의 토착화인 것이며 국사(國師)·왕사(王師)제를 통한 왕권과의 연결, 국난 극복을 위하여 2차나 이루어진 대장경 판각, 그리고 묘청·신돈 등의 정치활동 등은 모두 이것을 입증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신라 말기에 전래된 선종(禪宗) 불교의 융성과, 태고(太古)·지눌(知訥)·혜심(慧諶) 등 고승의 배출은 고려 불교의 위광을 보여주었고, 천태종(天台宗)을 다시 일으켜 선·교 양종의 화합을 모색하고, 신라 불교의 전통을 재발견하여 후세에 전하도록 한 의천(義天)의 공적은 특기할 만한 것이다. 그리고 유교의 번창이 사대주의의 풍조를 야기시킨 데 대해 불교가 비교적 자주적인 민족정신의 밑거름으로 일관한 것은 후대에 큰 영향을 끼쳤다.

정주학의 도입[편집]

程朱學-導入

이미 신라 중·말기(中末期)에서부터 융성하기 시작한 한문학과 유학이 이 시대에 꽃을 피워 봉건사회의 정신문화로서 자리잡았다. 특히 후기에 이르러서는 새로이 정주학이 도입되어 전통적인 종교와 문학에 충격을 주더니 마침내 진보적인 사상 집단을 형성시켜 조선시대의 이념적 기초가 되었다. 즉 유학은 이미 봉건사회를 배경으로 한 정치·사회·철학·문학 전반에 걸친 이념체계로서 과거제(科擧制), 충효사상(忠孝思想), 명분론(名分論)으로 봉건사회 정비에 기여했고, 중기에는 교육·문학 등에 크게 활용되어 사학(私學)의 융성, 사장(詞章) 문학의 발달 등을 가져 왔으며, 정주학의 전래와 함께 정치·교육상의 혁신사상으로 발전하여 척불론(斥佛論) 또는 척사위정론(斥邪衛正論)이 전개되었다. 요컨대 정주학은 한편으로는 전통적인 토착종교와 미신화한 불교의 적폐를 시정하고 동양적인 합리주의로서 본격적인 철학사상의 선구 역할을 한 점, 사회의 각 부분에 윤리적 가치관을 확립시켜 준 점 등으로 크게 기여하였으면서도, 반대로 모화사대주의(慕華事大主義)를 감염시켜 민족정기를 훼손시켰으며, 지나치게 관념적이고 형식적인 예론(禮論)으로 오히려 종파주의(宗派主義)의 배경이 된 점에서 많은 폐단을 초래하기도 하였다.

민족주의의 형성[편집]

民族主義-形成

사회 구조의 변화에 따라 정치·사회·경제 등 제 분야에서 보수, 진보의 양론이 대립되던 당시에 전(前)시대에선 볼 수 없었던 새로운 현상이 나타났다. 그 첫째는 단일민족, 단일국가라는 국가주의 내지 민족주의가 형성된 것이요, 그 둘째는 사대주의의 감염 속에서도 민족 자주의 기치 아래 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하려는 끈질긴 투쟁이 계속되었다는 것이다. 태조 왕건의 훈요10조(訓要十條)와 광종(光宗)·성종(成宗) 대의 북진정책, 윤언이·묘청(妙淸)의 칭제건원론(稱帝建元論) 주장, 최씨 정권의 강화 항전(江華 抗戰), 삼별초(三別抄)의 항쟁, 공민왕의 실지회복(失地回復), 최영의 요동정벌 정책 등으로 이어지는 정치사상 주전론(主戰論), 전제개혁 등에 나타나는 재정론(財政論), 일연(一然)·이승휴(李承休) 등의 역사의식(歷史意識) 등이 모두 그 표현이었다.

음양도참사상의 유행[편집]

陰陽圖讖思想-流行

신라말 도선이 도입하였다고 하는 풍수지리설이 합리적 사고에 눈뜨지 못한 민중 속에 널리 퍼져 각종 미신적인 비기(秘記)와 도참(圖讖)을 낳았고 이에 중국 전래의 음양5행(陰陽五行) 사상이 서로 어울려서 마침내는 왕도(王都)의 지덕성쇠설(地德盛衰說), 산천압승술(山川壓勝術), 연기설(延基說) 등이 나타나서 마침내는 귀족들의 정권 싸움에까지 이용되었다. 이 사상은 결국 우리 민족의 합리적 사유의 전개를 저해한 한편 정주학으로부터 신랄한 비판을 받으면서도 계속 민중 속에서 명맥을 유지하여 조선시대까지 계속되었다. 요컨대 고려시대는 사대주의의 감염과 민족주의의 형성으로 진통을 겪었고, 불교사상과 유교사상의 공존과 갈등 속에서 유·불이 교체되는 시대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곧 고대사회가 중세 봉건사회로 전환하는 시기라고도 할 수 있겠다.

<金 庠 基>