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동양사상/한국의 사상/고려시대의 사상/고려시대의 정치사상
고려시대의 정치사상〔槪說〕
[편집]고려시대(918∼1392)는 정치사적으로 중세(中世) 귀족국가(貴族國家) 단계에 해당한다. 그것은 태조 왕건(王建)의 후삼국 통일이라는 민족통일적 요소와 고대국가이던 삼국의 토호들(분권적 요인)을 여전히 중요한 정치세력으로 삼았기 때문이었다. 이후 고려조라는 중세 귀족국가는 지방분권적인 고대국가의 정치체제를 통일된 군주정치 단계로 극복해가는 과정에서 발전하였다. 따라서 고려조는 무수한 봉건영주들이 병립하고 있던 서양 중세의 분권적 봉건제와는 달리 군주정치(君主政治)의 중앙권력이 군현제(郡縣制)를 재정비해가는 한국사 특유의 중세국가적 성격을 지녔다. 태조 왕건이 왕실의 계훈(戒訓)으로 남긴 <훈요10조(訓要十條)>는 그후의 고려조 정치사상에 다음과 같은 특성들을 남겼다. 즉 첫째는 왕조의 중요한 정치 에너지의 하나를 불교 및 도참사상(圖讖思想)과 연결시킴으로써 정치 속에 종교가 깊이 파고들어 상호작용하는 중세적 교화정치사상(敎化政治思想)을 낳았으며, 둘째는 그러한 교화적 정치사상이 단순한 고대적 정교(政敎)일치 사상이 아니고 호국불교(護國佛敎), 위국기복(爲國祈福)과 같이 그것 자체가 중세적 통일왕조국가를 추진하기 위한 현실적인 에너지의 하나로 활용되었기 때문에 거기에는 민족주의적 정치사상이 담겨져 있었다. 그것이 소위 거란(契丹)과 같은 이민족 풍습을 물리치라는 민족적 요구로 나타났으며, 셋째는 정권의 계승은 왕실의 적자(嫡子) 계승을 원칙으로 하되 그 현·우(賢愚)에 따라서 형제 중 선택을 가능케 함으로써 중세 귀족국가적 성격을 인물본위의 왕실 정통성에서 찾고 있었다. 이같은 훈요10조 등을 통하여 부분적으로 보이기 시작하는 고려의 정치사상은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첫째는 왕실과 귀족, 지방분권제(郡縣制)와 중앙집권(統一王朝)의 조화 위에서 성립되는 중세국가를 발전시키기 위한 귀족정치 사상이요, 둘째는 민족적 통일과 민족의 옛 강토 회복 및 이민족(異民族)과의 대항 등으로 성숙된 민족주의적 정치사상이다. 첫째 중세 귀족정치적 정치사상은 고려 건국 이후 사회의 재조직과 정치의 단계적 발전을 거쳐(궁예 때 골품제도 폐기, 건국초 유교정치 이념의 표방, 광종 때의 선·교 합작 사상체계와 관리등용의 비족벌적 기준의 성립 등), 성종 때 최승로(崔承老)와 같은 유자(儒者)들의 사상과 수정 조화되면서 중앙집권적 귀족국가 이론으로 발전하였다. 최승로의 시무28조(時務28條:22조만 남음)는 불교나 도참의 혹신, 과단정치(果斷政治:광종 때)를 배격하는 유교이념에서 출발하였지만 그것 자체는 중앙집권적 통치질서와 왕실전제를 견제하고, 호족(豪族)과 신흥 중앙귀족들의 연합과 견제를 통해 발전시키려는 고려조 국내 정치사상에 중요한 골간을 확립해 주고 있었다. 그것은 또한 정치의 지나친 중국화(中國化)에 대한 비판을 전제로 함으로써 비록 그것이 유교사상이기는 해도, 독특한 고려조 민족사상으로서 의미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왕실과 귀족의 조화, 불교와 유교의 이념적 합일에서 이루어지는 그같은 귀족정치는 때로 그 균형이 파괴될 때 거기에 따른 동요도 불가피하였다. 불교와 음양도참사상에의 혹신, 개경의 타성적 귀족과 지방(西京)의 신흥세력(귀족) 간의 갈등으로 폭발된 묘청(妙淸)의 난(1135), 문신과 무신 간의 균형파괴로 나타난 근 100년에 걸친 군벌 무단정치(軍閥武斷政治) 및 말년의 왕실의 약화와 귀족세력의 급증으로 나타난 우(禑)·창(昌) 비왕설(非王說)이나 폐가입진론(廢假立眞論) 등은 모두 그러한 부산물이었다. 그러나 묘청의 난에서는 금(金)이 주는 위협을 물리치려는 배타적 국수주의와 타성적 부패귀족에 도전하려는 진보적 의미가, 그리고 무단정치를 강화하였던 최충헌(崔忠獻, 1149∼1219)의 사상에서는 왕실의 반성과 폐정을 시정하려는 비판(10조 封事) 및 몽고군에 항전하는 민족적 에너지 등이 각각 보이고 있었다. 따라서 김부식(金富軾)의 사기편찬 등에서 보이는 소위 사대주의(事大主義)도 사실상 당(唐)·송(宋) 제도에 의한 중앙집권 군주정치의 제도화, 거란·여진과 같은 변방족의 침략에 대한 혐오에서 오는 정통 한족(漢族)에 대한 상대적 우호감 및 왕실 안정에 의한 정통성의 유지와 같은 시대적 요구의 산물이었다. 다음 민족주의적 정치사상은 신라(新羅)에 의한 삼국의 국가적 통일을 실질적인 민족통일의 단계로 발전시켜 가는 역사였던 고려 정치사상의 가장 중요한 한 내용이었다. 그것은 스스로 고구려의 후신임을 자처하는 태조 왕건의 역사의식과 그 옛 강토를 회복하기 위한 북진정책에서부터 싹트기 시작하였다. 즉 발해 멸망 후 동국인(同國人)의 내투(內投), 여진인의 귀화 등 민족정책은 거란과 여진을 몰아내고 압록강 이동을 확보한 서희(徐熙) 및 윤관(尹瓘)의 6진(鎭)개척 등 본격적인 북진정책으로 발전되었다. 여기서 성장한 민족주의 사상은 더욱 무르익어 몽고의 침략이란 민족적 위기 앞에선 일종의 중세적 의병운동이던 삼별초(三別抄)와 같은 민중적 저항운동과 중 일연(一然)의 <삼국유사(三國遺事)>와 같이 외적을 물리치기 위하여 자기 역사를 더욱 강조하는 민족의식의 형식으로 발전하였다. 이러한 의미에서 요동정벌을 실천하려 한 말기의 최영(崔瑩)의 사상도 결국은 철령위(鐵嶺衛) 문제 등 새로운 불평등을 강요하는 강국 명(明)에 대항함으로써 시드는 왕조의 마지막 종말까지 살아서 비쳐준 민족의식의 생생한 표현이었다.
<崔 昌 圭>
고려 태조의 정치사상
[편집]高麗太祖-政治思想
10세기에 태봉(泰封)의 폭군 궁예(弓裔)를 타도하고, 신라와 후백제(後百濟)를 통합하여 단일민족국가(單一民族國家)로서의 고려(高麗)를 창업한 태조 왕건(王建)(877∼943)의 정치사상. 그의 치적(治績)과 <훈요10조(訓要十條)> 등 문서를 통해 나타난 사상을 요약하면 대체로 다음과 같다. (1) 군왕은 백성에게 포악하게 해서는 안되고, 지나치게 호사로운 생활을 해서 백성을 괴롭히거나, 요술(妖術)로 정도(正道)를 속이거나, 사생활에 있어서도 천륜(天倫)을 어겨서는 안 된다(개국 직후의 詔書에서), (2)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한 것이므로 고구려 옛 땅을 찾아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서경(西京)을 개척하여 장차 이곳을 도읍지로 할 것이다(태조 1년, 15년의 論示와 <훈요10조> 제5조). (3) 이웃 나라와 화친하고 신라를 받들어 위험으로부터 건지려는 것인데, 소리(小利)를 탐내어 신라를 침략·약탈함은 용서할 수 없는 죄악이다(태조 11년에 견훤에게 보낸 答書). (4) 신라가 국운이 다하여 망하였으되, 그 문물제도는 좋은 것이 많으니 이를 따르고, 급진적인 개혁은 삼간다(태조의 대신라정책과 통일 후의 문화정책). (5) 불교(佛敎)를 숭배하고, 음양도참(陰陽圖讖)설을 무시하지 말라(<훈요10조> 제1·2·6·8조) (6) 군왕은 참소(讒訴)를 멀리하고, 백성을 위하며, 상벌(賞罰)을 공정히 하며, 사정(私情)에 이끌려 허록(虛祿)을 누리는 일이 없게 하고, 군사를 잘 관리해야 한다(<훈요10조> 제7·9조). (7) 단일민족국가를 형성하고 북쪽으로 나아가 고구려의 옛 땅을 찾으며, 중국의 문물·예악을 따르되 우리 현실의 특수성을 무시해서는 안 되고, 거란(契丹)과는 사귀지 말라(<훈요10조> 제4조와 발해 유민 포섭정책 및 <자치통감>중 宋白의 설, 태조 25년 거란과의 국교단절). 요컨대 그는 단일민족국가와 북진정책을 표방한 최초의 강력한 국가주의자였고, 정치에 있어서는 유교의 왕도(王道)를 현실 속에서 구현해 보려던 이상주의자였다고 할 수 있다.
훈요10조
[편집]訓要十條
고려 태조가 그의 후손들에게 귀감(龜鑑)이 되도록 남겨준 10개조의 유훈(遺訓). 일명 신서10조(信書十條)·10훈(十訓)이라고도 한다. 943년 4월에 태조가 중신(重臣) 박술희(朴述熙)를 내전(內殿)으로 불러들여 친수(親授)하고 다음달인 5월에 붕거(崩去)하였다. 그 내용을 간추리면 (1) 불력(佛力)의 호위로 나라를 세웠으니, 불교를 장려하되 사원장탈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라. (2) 사원의 창건시에는 항상 음양도참설을 따르고 원당(願堂)을 남조하지 마라. (3) 왕위 계승은 적장자(嫡長子), 차자(次子), 추대된 형제의 순서대로 하라. (4) 중국의 문물·예약을 따르되 구차히 할 필요는 없고, 거란은 절대로 본받지 말라. (5) 산천의 음우(陰佑)를 입어 대업을 이룩하였으니 서경(西京)의 지덕을 중히 여기라. (6) 연등(燃燈)과 팔관(八關)을 시행하되 가감(加減)치 말라. (7) 군왕은 참소(讖訴)를 경계하고, 백성에게 인(仁)을 베풀어 민심을 얻도록 힘쓰라. (8) 차현(車峴) 이남 공주강(公州江) 밖의 사람을 경계하라. (9) 관록제(官祿制)를 공정히 하고, 이웃 나라를 경계하며 군사를 잘 관리하라. (10) 널리 경사(經史)를 모아 옛적을 거울로 삼아 현재도 경계하라. 이것은 곧 고려의 건국이념 혹은 국시(國是)가 도어 5백년간 모든 정책의 노선이 되었다.
최승로
[편집]崔承老 (927∼989)
고려 초기의 명신. 시호는 문정(文貞). 태조·혜종·정종·광종·경종·성종조에 이르도록 관직에 있으면서 자주 상소하여 잘못된 것을 바로 잡도록 하였고, 성종 원년(981년)에는 왕명으로 역대왕 5조(五朝)의 선악득실을 평한 <5조정적평(五朝政績評)>과 서정개혁 방안으로서의 <시무책(時務策)28조>를 왕에게 올려 고려 왕조의 기초 작업에 큰 역할을 하였다. 이제 그의 정치사상을 요약하면, 먼저 <5조정적평>에서 (1) 태조는 성격이나 능력에 있어 이상적인 제왕(帝王)이지만, (2) 광종(光宗)은 과거제를 실시한 결과 정치를 무궤도한 상태에 빠뜨렸고, 불교를 혹신한 나머지 국고의 낭비가 심하였고, 토목공사가 너무 지나쳐 백성이 편할 날이 없었으며, 노비안검법(奴婢按檢法)을 제정 시행하니 노주(奴主)측의 반감과 원성이 컸고, 간신들의 참언(讒言)에 넘어가 탄압·숙청을 일삼으니 공포 분위기였다고 비난하였다. 그의 <시무책28조>중 6조는 현종 원년 거란의 침입 때 일실(逸失)되었고, 남은 22조의 내용을 보면, (1) 군제의 개편, (2) 과다한 불교행사의 중지, (3) 무역의 절제, (4) 지방관제의 확정, (5) 관복의 제정, (6) 승려의 횡포엄금, (7) 공역(貢役)의 균등, (8) 우상(偶像)의 철폐, (9) 신분제도의 확립, (10) 개국공신 후손의 등용, (11) 압록강(鴨綠江)을 국경으로 할 것, (12) 정치와 종교의 분리 등을 건의하고 있다. 성종은 그의 건의를 받아들여 지방에 12목(牧)을 설치하여 중앙집권적인 행정체제를 정비하고, 불교의 횡포를 단속하였으며 중앙관제를 대폭 정비하기에 이르렀다. 요컨대 최승로의 정치사상은 고려의 개국 공신으로서 토착적이고 불교적인 종래의 정치사상에서, 유교적인 정치사상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고 볼 수 있다.
고려의 북진정책
[편집]高麗-北進政策
고려시대에 고구려의 옛땅을 회복하고자 취해진 정책. 태조 때부터 이미 국시(國是)로 채택되어 꾸준히 진행되었으나 거란·금·몽고·명과 같은 강적에게 부딪쳐 큰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 정책은 5백년간 민족주의자와 사대주의자간의 쟁점(爭点)이 되어, 수차의 혼란을 빚었으면서도 고려말까지 그 기본정책이 포기된 적이 없었다. 대략 그 경과를 보면 다음과 같다. (1) 태조는 고구려의 도읍지였던 평양성을 개척하여 서경(西京)으로 하고, 발해 유민을 받아들이면서 거란과의 일전을 결의하고 국교를 단절하였다. 일설 (중국의 <자치통감>)에 의하면 중국의 후진(後晋) 고조(高祖)에게 거란 협공을 제안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2) 정종(定宗) 때 광군사(光軍司)를 설치하고 30만 광군을 양성하였으며, 광종(光宗)은 서북과 동북으로 영토를 확장하고, 거란에 대비하여 요새 지대에 성을 쌓았다. (3) 성종(成宗) 10년에 압록강 밖의 여진을 백두산 너머로 추방하였다. 동왕 12년의 거란의 제1차 침입 때 서희(徐熙)가 적장 소손녕(蕭孫寧)과 담판하여 고구려 옛땅이 오히려 우리의 것임을 주장하고 적군을 철퇴시켰다. (4) 거란의 제3차 입구를 격퇴한 현종 때부터 덕종·정종(靖宗)대에 이르러 국경지대에 천리장성(千里長城)을 쌓고 침입에 대비하였다. (5) 숙종(肅宗) 때 윤관(尹瓘)·오연총(吳延寵) 등이 동북부의 여진을 정벌하고 9성을 쌓았다. (6) 인종 때 묘청(妙淸) 등은 서경천도론과 칭제북벌론(稱帝北伐論)을 주장하다가 뜻을 못 이루자 반란을 일으켰다. (7) 공민왕은 배원(排元) 정책을 세우고 실지를 회복하였다. 동왕 18년에 이성계(李成桂) 등은 동북면으로부터 압록강을 건너 요심(遼瀋) 지방의 동녕부(東寧府)를 정벌하고 '요양(遼陽)은 본래 우리의 국계(國界)'라는 내용의 방을 붙였다. (8) 우왕(禑王)과 최영(崔瑩)이 동왕 14년에 요동 정벌을 우하여 10만군을 출발시켰으나 이성계의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묘청
[편집]妙淸 ( ? ∼1135)
고려의 술승(術僧)·혁명가. 일명 정심(淨心), 서경 출신. 백수한(白壽翰)을 통해 인종의 왕실 고문이 되어 서경천도론·칭제건원론(稱帝建元論)·금국정벌론(金國征伐論)등을 도참설에 근거하여 주장하고, 서경에 대화궁(大花宮)을 세우게 하였으나, 김부식(金富軾) 등 개경 귀족·사대주의자들의 반대로 뜻을 못이루자 1135년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켜 국호를 '대위국(大爲國)', 연호를 천개(天開)라고 하였으나 실패하고 부하인 조광(趙匡)에게 죽었다. 그의 사상으로 칭제건원론과 '8성사상(八聖思想)'은 당시로서는 극히 대담하고 특이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칭제건원론
[편집]稱帝建元論
고려 인종 때 묘청 일파의 서경천도운동 중, 금국정벌(金國征伐) 문제와 더불어 대두되었던 문제로, 우리나라 왕도 황제(皇帝)라 칭하고 연호(年號)를 따로 제정하자는 주장. 이 주장이 이면에는 중국에 대한 사대(事大)의 관계를 청산하고 완전한 자주독립국가로서 대륙으로 진출하려는 강렬한 욕구가 있다. 이미 광종 때에도 개경을 황도(皇都)라고 하고, 연호를 광덕(光德)이라 하여 자주적인 기상을 보이다가 1년만에 후주(後周)의 연호로 돌아간 적이 있다. 1129년 인종이 서경 대화궁에 들어갔을 때 처음으로 제기되었으며, 백수한·정지상 등이 적극 지지하였다. 그러나 김부식 등 사대주의자들의 반대로 채택되지 못하였고, 묘청이 반란을 일으킨 다음에 연호를 사칭(私稱)하였으나 역시 진압되고 말았다.
8성사상
[편집]八聖思想
고려시대 사상사에 있어서 묘청의 사상은 왕조사관(王朝史觀)에서는 '반역'으로 규정되어 돌보지 않았으나, 신채호(申采浩)의 <조선사록(朝鮮史論)>에서 처음으로 김부식(金富軾)의 사대주의사관과 대립되는 민족자주적 명맥으로 재평가되었고, 김부식과 묘청과의 대립을 "조선 역사상 1천년래 제일 대사건(大事件)"으로 사대와 자주의 분기점으로까지 중시하였다. 12세기는 고려의 개경 정권이 안으로 이자겸(李資謙)의 난(인종 4년, 1226년) 이후 사회적 혼란과 서경파(西京派)·개경파(開京派)의 대립으로 국정이 동요되고 있었고, 밖으로 여진족이 금을 건국, 송은 쇠퇴하고 원(元) 왕조가 성립되는 과도적인 시기였다. 당시 동아시아의 국제정세는 세력교체의 과도기로서 아직 명(明)의 중화문화권(中華文化圈)이 형성되기 전이었으므로 여말의 대외(對外) 인식은 서경파의 고구려주의적 북방정책과 개경파의 유교적 사대주의의 양파로 갈라지게 되었다. 이 시기는 몽고의 동아시아 지배를 앞에 둔 시기로서 고려 왕조의 국제적 지위가 불안했다고 할 수 있다. 벌써 인종 즉위 직후부터 부패한 귀족의 소굴로 화한 개경을 버리고 서경으로 천도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커졌다. 원래 왕건 이래로 고려조에는 풍수지리설이 정치사적 사건마다 중요한 역할을 해왔고 서경천도론(西京遷都論)의 근거는 개경이 이미 지덕(知德)이 쇠하고 서경에 왕기(王氣)가 돈다는 참위설에 기탁한 것이었다. 서경파의 중심인물인 묘청은 불승(佛僧)으로서 음양지리설(陰陽地理說)에 능하고 서경천도운동의 주역으로 등장했으나 뜻대로 안 되자 1135년 인종 13년 개경정권에 대해 반란을 일으켜 대위국(大爲國)을 선포, 연호를 천개(天開)라 하고 반란군을 천견충의군(天遣忠義軍)이라 하고 1년 반을 버티었으나 김부식에 의해 평정되었다. 묘청은 서경천도론과 아울러서 '8성(八聖)사상'을 주장한 점이 우선 주목된다. <고려사> <묘청전>에 보면 묘청은 서경의 임원역(林原驛)이 풍수설상 가장 길한 곳 즉 대화세(大華勢)라고 해서 궁을 그곳에 지으면 금(金)나라가 폐백을 가져오고 36국이 모두 신첩(臣妾)이 된다는 참언을 내세웠고, 그 참언에 근거해서 평양의 임원역에 신당(神堂)을 짓고 그 안에 8가지 신앙 대상 즉 8성을 모셔 '8성당'이라 했다고 한다. 그 '8성'은 대개 다음 여덟 가지다. (1) 호국백두악태백선인실덕문수사리보살(護國白頭嶽太白仙人實德文殊師利菩薩) (2) 용위악육통존자실덕석가불(龍圍嶽六通尊者實德釋迦佛) (3) 월성악천선실덕대변천신(月城嶽天仙實德大辨天神)(4) 구려평양선인실덕연등불(駒麗平壤仙人實德燃燈佛) (5) 구려목멱선인실덕비파시불(駒麗木覓仙人實德毗婆尸佛) (6) 송악진주거사실덕금강색보살(松嶽震主居士實德金剛索菩薩) (7) 증성악신인실덕늑차천왕(甑城嶽神人實德勒叉天王) (8) 두악천녀실덕부동우파이(頭嶽天女實德不動優婆夷) 이 8성당에 대해서 묘청은 성인(聖人)의 업(業)이요, 이국연기(利國延基)의 술(術)이라 해서 불교를 호국이국(護國利國)의 신앙으로 토착화하고 국가의 수호신화(守護神化)하려고 꾀했다. 이 8성은 음양보비설(陰陽補裨說)에 따라 서경의 도읍지로서의 실덕(實德)을 보강키 위해 만든 것이며 우리나라 8대 명산(名山)의 수호신들과 부처의 본신(本身) 중에서 '수적(垂跡)' 즉 여러 분신(分身)을 변작(變作)해서 8위(位)를 만든 것이다. 묘청은 불교의 수적설에 의해 불본지(佛本地)에서 분신을 만들어 국가 융성의 이국(利國) 신앙으로 8성신앙을 만들어 토착화했다. 이와 같은 고구려주의적(高句麗主義的)인 자주사상(自主思想)은 칭제건원(稱帝建元)의 주장으로 나타나 어느 정도 정복주의적인 북벌정책과 반(反)유교적·반(反)명분론적인 주체(主體)론을 전개하고 있다. 칭제건원의 자주의식은 당시 한반도 주변은 강대세력이 교체되는 과도기였고, 사대적(事大的) 명분주의가 자리잡기 전이기 때문에 그 주장은 가능했으나 국력이 이에 미치는 것은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묘청의 칭제건원의 주체사상은 명(明) 이후 보편화된 동아시아의 사대적 명분질서로서 중화주의적(中華主義的) 사대문화권(事大文化圈) 형성 이전의 한민족의 자주적·북방적 의지를 대표했다고 볼 수 있다. 아울러 김부식 이후의 사대주의적 한국사 해석의 부정을 위해서는 묘청의 민족 인식과 신채호의 민족사학(民族史學)이 왕조사(王朝史) 이외의 새로운 민족사적 자주 인식의 2대 초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충헌
[편집]崔忠獻 (1149∼1219)
고려의 무인정치가. 초명은 난(鸞), 본관은 우봉(牛峰), 상장군(上將軍) 원호(元浩)의 아들. 명종 4년에 조위총(趙位寵)의 난 평정에 공을 세워 섭장군(攝將軍)에까지 승진, 1196년 아우 충수와 함께 권신 이의민(李義旼) 일당을 숙청하고 당시 누적된 폐정(幣政)의 개혁을 요구하는 <봉사10조(封事十條)>를 올려 왕의 각성을 촉구하였다. 이어 왕의 측근을 숙청하고 이듬해 공신(功臣)의 칭호까지 받았으나, 왕이 봉사10조를 이행치 않고 국고낭비만 하자, 1197년 9월에 왕을 페위시키고 신종(神宗)을 세워 정국공신 삼한대광대중대부 상장군주국(靖國功臣 三韓大匡大中大夫 上將軍柱國)이 되어 최씨 무단정권(崔氏 武斷政權)을 수립하였다. 이해에 아우 충수의 세력을 꺾어 독재권을 강화하고, 신종 2년(1199)에는 병부상서지이부사(兵部上書知吏部事)로 문무대권(文武大權)을 장악하였다. 1202년에는 도방(都房)을 설치하였고, 1204년에는 신종을 폐하고 희종(熙宗)을 세웠으며, 다음해에 진강군 개국후(晋康君開國侯)에 봉해졌으며, 1209년에는 이규보(李奎報) 등을 발탁하여 문운(文運)을 재흥시켰다. 1209년에는 교정도감(敎定都監)을 두어 무인정권의 핵심체를 만들었고, 1211년에 희종(熙宗)을 폐하고 강종(康宗)을 세웠고, 1213년 강종이 죽자 고종(高宗)을 세우니 그는 2왕을 폐위시키고 5왕을 거쳐 24년간 강력한 독재자로 군림하였다. 그는 정권을 잡는 동안에 이의민·최충수 등을 숙청하였고, 만적(萬積)의 난, 경주별초군(慶州別抄軍)난, 부석사(浮石寺)·부인사(符仁寺) 승려의 모반, 왕준명(王濬明) 등의 살해음모, 흥왕사(興王寺) 승려의 음모 등을 진압하면서 독재권을 강화하여 말년에는 횡포가 심하였다. 그러나 그에 의해 기강의 확립, 풍속의 순화, 문운의 재흥이 이루어진 것은 평가할 만하다.
봉사10조
[편집]封事十條
명종 26년(1196)에 쿠데타로 이의민(李義旼) 일당을 숙청하고 정권을 잡은 다음, 최충헌 형제가 왕에게 올린 서정개혁안 10개조. 그 내용을 보면 (1) 왕은 정전(正殿)에 들어가 영명(永命)을 받을 것, (2) 무능하고 불필요한 관원을 감축하고 녹봉(祿俸)의 수량에 따라 관직을 제수할 것, (3) 토지제도를 정비하여 부당한 토지겸병(土地兼倂)을 시정하고, 빼앗은 땅을 원 주인에게 되돌려 줄 것, (4) 어진 관리를 가려 지방관직에 배치하여 세력가가 백성의 재산을 착취하지 못하도록 할 것, (5) 제도(諸道)의 사(使)에게 공진(供進)을 금하고 오로지 사문(査問)으로써 직책을 삼도록 할 것, (6) 승려들을 물리쳐 궁전 출입을 금하고 곡식의 이식(利息)을 취하지 못하게 할 것, (7) 지방수령에게 명하여 관리들의 능력보고를 하게 하고, 능한 자는 올려주며 무능한 자는 징계할 것, (8) 백관에게 훈계하여 사치를 금하고, 검약을 숭상케 할 것, (9) 음양관(陰陽官)으로 사원(寺院) 자리의 지덕을 조사케 하고, 비보(裨補) 사찰 이외의 것은 모두 철훼할 것, (10) 측근 관리를 가려 써서 아첨하는 무리를 경계할 것. 요컨대 이것은 태조의 <훈요10조>에 근거한 서정개혁안으로 최충헌의 혁명이념과 정치사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만적
[편집]萬積 ( ? ∼1198)
고려 중기의 노예 출신 혁명가. 당시의 세도가인 최충헌의 사노(私奴)로서 노예해방을 위한 혁명을 꿈꾸고, 1198년 5월 개경 북산(北山)에 공사(公私) 노예를 모아 놓고, (1) 무신정권 이래로 귀천(貴賤)이 없어졌으니 장상(將相)의 씨가 따로 없다. (2) 우리도 악독한 주인들 밑에서 착취만 당할 수는 없다고 주장하여 노예들의 지지를 받았다. 이에 누런 종이 수천 장을 오려 '정(丁)'자를 만들어 표지를 하고 5월 17일에 흥국사(興國寺)에 집결하여 혁명을 일으켜 노예문서를 불살라 없애기로 약속하였다. 그러나 당일 모인 자가 수백명밖에 안 되어 거사일을 21일로 연기하였다가 이 계획이 누설되어 모두 잡혀 죽기에 이르렀다. 비록 그의 혁명은 실패하였지만 천민계급으로서 평등한 권리와 압제·착취로부터의 자유를 의식하고 최초의 노예해방운동을 시도한 점은 높이 평가되고 있다.
민권운동의 태동
[편집]民權運動-胎動
고려 중기에 전국 각지에서 민란(民亂)의 형태로 나타난 민권운동. 동양적인 봉건체제가 정착하기 시작하여 계급분화와 신분차별이 굳어지자 피압박 민중들 사이에서는 문무(文武) 양반계급의 억압과, 지방관리의 탐학, 세도가의 착취에 대항하여 봉건제도를 타파하고 자기들의 생존권을 되찾으려는 민권투쟁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특히 무신정권(武臣政權)의 발호를 보면서 계급질서에 회의(懷疑)를 품고, 지방관의 탐학(貪虐)에 대한 반항이 크게 일어나 수탈의 시정에서부터 혁명을 꿈꾸기도 하였으니, 공사노비(公私奴婢)·승려·농민·병사·부곡민(部曲民)·잡족(雜族) 등 광범위한 하층민이 주축이 되었다. 이제 그 경과를 개관하면 다음과 같다. (1) 명종 4년(1174)에 중흥사(重興寺)의 중 2천여명이 무인 독재자 이의방(李義方)을 죽이려다 실패하였다. (2) 동왕 5년(1175)에는 남쪽에서 석령사(石令史) 등이, 6년(1176)에는 공주(公州)에서 망이(亡伊)·망소이(亡所伊) 등이 천민해방과 왕경(王京) 진격을 시도하였고, (3) 동왕 22년(1182)에는 관성(管城)·부성(富城)·전주(全州) 등지에서 지방관의 탐학에 대한 민요(民擾)가 일어났는데 특히 전주의 두목 죽동(竹同) 등은 관리를 추방하고 자기들이 뽑은 주리(州吏)로 대치시켰을 뿐만 아니라, 관원의 불법처사를 호소하면서 40여 일이나 버티다가 내부분열로 진압되었다. (4) 동왕 16년에는 진주·충주 등지에서 탐학에 대한 반항이 있었고, (5) 동왕 20년(1190)에는 동경(東京-慶州)에서 민란(民亂)이 일어나고, 3년 뒤에는 운문(雲門)의 김사미(金沙彌), 초전(草田)의 효심(孝心) 등이 크게 일어나 신라부흥(新羅復興)을 표방하기에 이르렀다. 다시 (6) 신종(神宗) 1년(1198)에는 사노(私奴) 만적(萬積)의 노예반란이 있었고, 동왕 3년에는 진주(晋州)의 노예반란, 동왕 5년에는 동경의 이비(利備)·패좌( 佐) 등의 민란이 2년이나 끌었으며, (7) 고종(高宗) 4년(1217)에는 서경인(西京人)이 고구려 부흥을, 동왕 24년에 담양(潭陽) 초적(草賊) 이연년(李延年)은 백제 부흥을 각각 표방하였다. 그 밖에도 신종 3년(1200)에 밀성(密城)의 관노(官奴) 50여 명이 운문적(雲門賊)에 합류한 사건, 같은 해에 전주 잡족인의 반란, 신종 6년(1203) 부석사·부인사 승도(僧徒)의 난 등이 있어 당시에 민권사상이 상당히 팽배하였으나 최씨 무인정권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실현을 못보았다.
최영
[편집]崔 瑩 (1316∼1388)
고려 말기의 명장·정치가 시호는 무민(武愍). 무인으로 왜구토벌, 조일신(趙日新)의 난 평정, 원나라 원병(援兵)으로서의 전공(戰功), 홍건적(紅巾賊) 침입 격퇴, 궁중(宮中) 모반의 분쇄, 제주(濟州) 목호란(牧胡亂) 토벌 등으로 출세하여 우왕(禑王) 때에는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으로 정권을 잡았으나 이성계의 위화도회군으로 몰락하여 참형당하였다. 그의 행적 속에 나타난 사상을 간단히 요약하면, 그는 (1) 청직(淸直)·검약(儉約)으로 생활의 신조를 삼았고, (2) 충군애국(忠君愛國)의 정신이 투철하여, (3) 왕의 황음(荒淫) 유락(遊樂)을 직간하여 만류하였고, (4) 철원천도론(鐵圓遷都論)을 반대하여 중지시켰으며, (5) 사대주의자들을 누르고 요동정벌(遼東征伐)을 추진하였으나 이성계의 반란으로 실패하였다.
근왕사상의 전개
[편집]勤王思想-展開
왕권(王權)을 각종 형태의 압력으로부터 옹호 구제하려는 사상이 고려시대를 통하여 상당히 강화되었다. 이것은 유교에서 온 존왕(尊王)사상과, 전통적인 군주정치(君主政治)의 사상이 결합되어 나타난 것으로 외척(外戚)·무신(武臣)·요승(妖僧) 등의 전횡이 심하였던 고려시대에는 유교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왕권과 사직을 보존·확대시키려는 노력이 나타나 여러번 권세가(權勢家)들의 세력과 충돌하였다. 그 경과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2대 혜종(惠宗)이 왕을 폐립시키려는 왕규(王規)의 음모에 위협당하고 있을 때 개국공신 박술희(朴述熙)가 왕을 옹호하였고, 다음 정종(定宗) 때 왕규의 난이 일어나자 왕식렴(王式廉)이 서경에서 돌아와 이를 진압하고 왕권을 수호하였다. (2) 목종(穆宗) 때 김치양(金致陽) 일당의 야욕을 분쇄하고자 채충순(蔡忠順)·최항(崔沆) 등이 왕의 밀령을 받고 대량원군(大良院君-현종)으로 왕위를 계승시키는 공작을 하였다. (3) 인종(仁宗) 때 외척 이자겸(李資謙)의 참월이 극심하였을 때 김찬(金粲)·지녹연(智祿延) 등은 이자겸을 제거하려 하였고, 최사전(崔思全)은 척준경(拓俊京)을 설득시켜 왕의 편으로 돌아오게 하였다. (4) 정중부(鄭仲夫)·이의민(李義旼) 등의 무신정권시에 폐위당한 전왕(의종)을 복위시키고 역적을 토벌하겠다고 김보당(金甫當), 귀법사(歸法寺) 승려, 조위총(趙位寵) 등이 일어섰으나 실패하였다. (5) 정중부의 횡포에 분개하여 경대승(慶大升)이 쿠데타를 일으켰고, 이의민(李義旼) 일당을 최충헌이 타도할 때도 명분은 철저한 충성이었다. (6) 고종 45년에 유경(柳璥)·임연(林衍) 등이 최의를 죽이고 왕정을 복고(復古)시켰다. (7) 공민왕이 친원파(親元派) 김용(金鏞) 일당, 요승 신돈 등의 압력과 전횡 앞에 위태로울 때, 정세운(鄭世雲)·최영(崔瑩)·이존오(李存吾) 등이 일어나 왕권을 지켰고, 공민왕이 환자(宦者) 최만생(崔萬生) 등에게 피살되자 이인임(李仁任) 등이 그들을 잡아 처형하였다. (8) 공양왕 4년에 정몽주는 이성계 일파의 음모를 분쇄하고 고려 왕실을 지키려 하다가 죽었고, 두문동(杜門洞) 선비들을 비롯한 많은 지식인들이 신왕조에 대한 협조를 거부하였다.
사대주의의 형성
[편집]事大主義-形成
대국(大國, 특히 중국)에 협조하고, 그들에게 굴종함으로써 자신을 유지하려는 태도를 사대주의라고 할 때, 그 싹이 삼국쟁패시의 백제·신라의 외교정책이나, 통일신라시대의 모화(慕華)풍조 속에 있었다고 하나, 그것이 하나의 이론으로 정립되어 국가 정책 결정에 하나의 입장으로 등장하게 되는 것은 역시 고려시대이다. 고려시대는 자주와 사대의 두 기조가 서로 갈등을 일으키며 진행되다가 종국에는 사대주의에 결정적인 승리가 돌아가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사대주의가 유학자들의 정치사상으로 정립되는 과정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태조는 연호를 '천수(天授)'로 하였다가, 대중국(對中國) 외교 때문에 16년만에 폐지하고 후당(後唐)의 연호를 따랐다. (2) 광종은 연호를 처음에 광덕(光德)이라 하였다가 2년만에 후주(後周)의 연호를 따랐고, 11년만에 '준풍(峻風)'이라 하였다가 4년만에 송(宋)의 연호를 따랐다. (3) 성종 때 모든 제도를 중국 유교식으로 개편하였고, 송(宋)의 문물을 수입함과 동시에 송 문화에 대한 모화(慕華) 사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4) 거란 침입 때에 대송(對宋) 사대관계가 문제되었고, 거란에 땅을 떼어주고 항복하자는 주화파(主和派)가 나타났다. 그러나 서희(徐熙)·이지백(李知白) 등이 이를 견제하였다. (5) 거란의 침입격퇴와 화해의 결과로 왕의 친조(親朝)가 문제되었고, 거란의 연호를 쓰게 되었다. (6) 인종(仁宗) 때 여진족의 금(金)이 칭제건원(稱帝建元)하자 이자겸은 백관의 반대를 물리치고 금에 사대(事大)의 예를 표했다. 묘청·정지상(鄭知常) 등이 금국(金國) 정벌을 주장하고, 윤언이 등이 칭제건원을 주장하였을 때 김부식(金富軾) 등은 그것은 금을 노하게 하므로 안 된다고 반대했다. (7) 몽고 침입시에 조숙창(趙叔昌)·홍복원(洪福源) 등이 반역하였고 유승단(兪升旦)은 강화천도를 반대하는 이유로 "작은 나라로서 큰 나라를 섬기는 것은 사리에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고, 불가항력으로 몽고에 굴복하였다. (8) 몽고 간섭하에서 심왕당(瀋王黨)을 비롯한 일부 반역자들은 몽고의 힘으로 국내정치를 좌우하려고 획책하였다. (9) 공민왕 때 명에 대한 사대의 예로 국교를 맺었고, 정주학자(程朱學者)들이 명에 내왕하면서 친명책(親明策)을 유교이론으로 합리화하기 시작하였다. (10) 우왕 때 친원파와 친명파가 대립할 때, 친명파는 송의 후예인 명을 섬길 것을 주장하고, 모화사상(慕華思想)을 강조하였다. (11) 최영의 요동정벌에 반대할 때 이성계는 제1조로 "작은 나라로서 큰 나라를 침은 옳지 않다"고 내세워, 혁명의 명분을 삼았고, 최영을 처형할 때 죄목을 '공요죄(攻遼罪)'라 붙여, 중국을 공격함이 곧 죄악으로 규정되었다. (12) 창왕(昌王)을 폐할 적에 이성계 일파는 명태조(明太祖)가 '폐가입진(廢假立眞)'하라는 지시를 근거로 내세웠고, 우왕(禑王)의 죄중에 '중국을 치려 하여 중국 천자에게 지은 죄'를 강조하였다.
폐가입진론
[편집]廢假立眞論
고려말에 이성계 일파가 우왕,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세울 때 내세운 명분론. 사대주의적인 정주학자(程朱學者)들의 국왕폐립 명분으로 명 태조의 명을 칭탁한 것. 흥국사(興國寺) 회의에서 이성계 일파가 결정하고, 정비(定妃)의 교서(敎書) 형식으로 나타났는데, 그 내용은 창왕 1년 9월 중에 윤승순(尹承順)이 명경(明京)에서 돌아와 명제(明帝)의 성지(聖旨)를 봉접하였는데, 거기에 "고려의 왕위가 공민왕이 살해당한 뒤로는 후사가 끊겼다. 비록 왕(王)씨를 가칭하나 다른 성(姓)으로 임금을 삼는 것은 삼한세수(三韓世守)의 양책이 아니다"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이것도 (1) 우리 스스로 국왕의 임면권을 중국 황제에게 돌린 점, (2) 가(假)를 폐하고 진(眞)을 세운다는 것은 유교적인 정치사상이라는 점, (3) 목적달성을 위하여 사대주의적인 비열한 기만책을 썼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