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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의 유학사상〔槪說〕
[편집]고려는 건국초에 태조 왕건이 불교를 숭상하여 이를 호국(護國)의 종교로 삼았기 때문에 유학은 충분한 발달을 하지 못하였다. 제6대 성종 11년(992년)에 이르러 비로소 국자감(國子監)을 설치, 경학박사(經學博士)를 두고 유학을 장려하였다. 이로써 고려 유학은 발전하는 길이 열렸다. 그러나 초기에는 사부(詞賦)와 문장(文章) 등 사장(詞章) 공부에만 힘썼을 뿐 명경통사(明經通史-經學)에 종사하는 자는 적었다.
유학의 진흥
[편집]儒學-振興
제11대 문종 때에 최충(崔沖)이 낙성(樂聖)·대중(大中)·성명(誠明) 등 9재(九齋)를 두고 제생(諸生)을 가르쳐 유학을 크게 진흥시켰다. 이와 같이 유학이 최충으로 인하여 크게 번성하자 그를 해동공자(海東孔子)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에 개경(開京)에 있는 유신(儒臣)들 가운데 최충의 9재를 추종하여 사숙(私塾)을 세운 이가 11인이었으니, 이들을 최충의 도(徒)와 합하여서 사학12도(私學十二徒)라 하였다. 이 12도는 하나의 학벌을 형성하면서 고려 유학에 지대한 공적을 남겼다. 한편 제16대 예종은 국자감의 진흥책에 힘썼다. 예종 4년(1109)에는 문무 7재(文武七齋)를 두었고, 동왕 14년(1119)에는 양현고(養賢庫)를 두어 유학생 60명과 무학생(武學生) 17명을 길렀다. 그리고 명유(名儒)를 뽑아 학관(學官)·박사(博士)를 삼고 경의(經義)를 강론하여 교도하니 날로 유학풍이 높았다. 그러나 제18대 의종으로부터 제24대 원종 때까지 약 105년간은 내우외환(內憂外患)으로 유학이 부진상태에 들어갔다. 그러다가 제25대 충렬왕에 이르러 다시 국자감을 중심으로 유학운동이 재건되었다. 국자감은 동왕 원년(1275)에 국학(國學), 동왕 34년(1308)에는 성균관(成均館)으로 그 명칭이 바뀌어졌는데, 이때부터 성균관을 중심으로 송(宋)대의 신유학(新儒學) 곧 정주성리학(程朱性理學)이 처음으로 우리나라에 들어와 문치(文治)의 기운이 일어났다.
정주학의 도입
[편집]程朱學-導入
정주학 혹은 성리학(性理學)은 제25대 충렬왕 때 안향(安珦=安裕)의 제자 백이정이 원(元)에 가서 정주성리의 서(書)를 구하여 돌아온 것이 그 수용의 시초라고 한다. 그러나 그 수입은 안향에서 비롯된 것이다. 안향은 충렬왕 12년(1286)에 왕을 따라 원나라 연경(燕京)에 가서 처음으로 <주자전서(朱子全書)>를 입수하고, 또 공자와 주자의 화상(畵像)을 그려 가지고 돌아와서 주자학(朱子學)을 연구하였다고 한다.
정주학의 발달
[편집]程朱學-發達
안향은 여말의 문묘를 중수(重修)하는 한편 유학진흥에 큰 공적을 남겼다. 그의 문하에서 나온 백이정은 정주학을, 우탁(禹倬)은 정주(程朱)의 <역전(易傳)>을 연구하였다. 그 후 안향의 학문은 정몽주(鄭夢周)·이제현(李齊賢) 등에게 전승되었는데 이제현에게는 이색(李穡), 이색에게는 정도전(鄭道傳)과 권근(權近) 등이 사사(師事)하였다. 이로써 정주학은 하나의 계통을 세워 발전하게 되었다. 정몽주는 당시 상제(喪制)의 문란을 개탄하고 3년상(三年喪)을 행하였으며, 처음으로 <주자가례(朱子家禮)>에 의하여 가묘(家廟)를 세워 조상을 받들도록 하였다. 그리고는 5부학당(五部學堂)·향교(鄕校)를 설치하여 유학을 진흥시키기도 하였다. 이제현(李齊賢)도 역시 유학을 진흥시키는 방법으로 '학교를 넓히고 상서(庠序)를 삼가서 6에(六藝)를 존중하고 5륜(五倫)의 교(敎)를 밝혀 선왕(先王)의 도를 천명할 것'을 주장하였다.
척불운동의 전개
[편집]斥佛運動-展開
고려의 국교인 불교는 겉으로는 크게 융성하였으나 내부적으로는 승려의 타락, 사찰의 이원화(利源化), 불사(佛事)의 번다(繁多), 불승(佛僧)의 정치참여, 불승의 과잉 등으로 부패할 대로 부패하고, 이와 때를 같이 하여 성리학이 발흥하니 정주학자들을 중심으로 척불운동이 맹렬하게 일어났다. 이미 초기에 최승로(崔承老) 등의 척불상서(斥佛上書)가 있었고, 안향은 주자학의 입장에서 불교사상을 비판하여 천륜(天倫)에 어긋난 이적(利狄)의 유(類)라 하였으며, 이색은 불교도의 폐해를 지적하고 승려의 수를 제한하고 새로 세우는 사원을 철거할 것을 주장하였다. 더구나 공민왕 때 요승(妖僧) 신돈(辛旽)의 탄핵이 있고, 공양왕(恭讓王)의 불승에의 현혹이 잦아지니 당시 성균관에 모였던 정주학자, 이를테면 안향·이제현·이색·정몽주·정도전·권근 등이 모두 불폐(佛幣)를 상서하기에 이르렀다. 특히 정도전은 주자학의 입장에서 <심기이편(心氣理篇)>을 지어 불교와 도교를 비난하고 유가 의리(儒家義理)의 정(正)을 논하여다. 그후 성균관 박사가 되어 정몽주 등과 정주학을 일으키는 한편 척불운동의 최대 공로자 역할을 하였다.
성리학파의 분열
[편집]性理學派-分裂
척불론을 주장하면서 정주성리학을 신봉하게 된 유신들 간에는 두 가지 파의 흐름이 있었다. 하나는 보수적인 입장에서 정주학의 기본정신을 밑바탕으로 하여, 고려 왕실을 끝까지 지켜보자는 이색·정몽주 등의 일파이다. 그러므로 정몽주는 쓰러지는 여조(麗朝)를 떠받들다가 마침내 선죽교(善竹橋)에서 순절하였다. 다른 하나는 여말의 어지러운 사회를 개혁하기 위해서는 역성혁명(易姓革命)을 통한 유교정치를 해야 한다는 파이다. 여기에는 정도전·권근 등이 속한다. 특히 정도전은 이색·이제현·정도전 등의 온건한 척불론에 대하여 철저하게 불교의 말살을 기도하고 유교로써 정·교(政敎)를 통일코자 하였다. 그는 척불의 근거를 정치적·경제적·종교적·학문적 근거로부터 굳게 파악하여 사상적 혁명의 커다란 사업을 자기의 임무로 여겼던 것이다. 이와 같이 정도전 등은 주자학의 입장에서 불교가 배척되지 않으면 안 될 까닭을 규명하는 동시에 유교의 진흥이야말로 국가의 지상이념(至上理念)임을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이들은 유교적인 개혁운동에 직접 나서서 성리학을 국학으로 삼은 조선 사회의 건설 사업에 제1보의 초석을 놓은 사람들이 되었다. 이로써 여말에 씨(種子)를 뿌려놓은 정주성리학(程朱性理學)은 조선왕조로 넘어갔다.
성종
[편집]成宗 (960∼997)
고려 제6대왕. 재위 981∼997년, 이름은 치(治), 자는 온고(溫故). 981년 즉위 후에 유학자 최승로(崔承老) 등의 건의로 신정(新政)을 단행하고 억불양유(抑佛揚儒)책을 실시한 왕. 그는 숭불(崇佛)의 폐단을 고려하여 팔관회 등 불교적 행사를 금하고, 유교주의를 채택하여 태학(太學)을 확장하고, 서경에는 수서원(修書院)을, 개경에는 국자감(國子監)을 창설하여 국자학·태학·4문(四門)의 학당이 여기에 속하게 하였다. 그는 스스로 '유학을 숭상하여 공자의 풍을 일으키고자 함'을 명백히 하였다. 그는 또 나라 안에 교조(敎條)를 반시(頒示)하고, '6경(六經)'을 본받고, 삼례(三禮-禮記·儀禮·周禮)의 규범을 따르라고 하면서 송나라와의 문화교류도 장려하여 유학생을 보내고 도서를 수입하였다.
최충
[편집](984∼1068)
고려의 유학자·교육가. 자는 호연(浩然), 호는 성재(惺齋)·월포(月圃)·방회재(放晦齋). 1005년에 문과(文科)에 장원한 후로 현종(顯宗)·문종(文宗) 때 실록(實錄) 편찬과 관리의 율령(律令) 교육에 참여했다. 1055년에 치사(致仕)한 후로 사숙(私塾)을 열어 많은 인재를 배출하니 문헌공도(文憲公徒)라 하였고, 다른 사람들이 이에 뒤따라 12공도(公徒)가 나타나기에 이르렀다. 그가 세운 9재(九齋)학당은 악성재(樂聖齋)·대중재(大中齋)·성명재(誠明齋)·경업재(敬業齋)·조도재(造道齋)·솔성재(率性齋)·대화재(大和齋)·대빙재(待聘齋) 등이며, 9경(九經)과 3사(三史)를 가르치고 간혹 선전이 왔을 때는 각촉(刻燭)하여 시를 짓게 하고 등급을 매겨 방(榜)을 붙이니 일종의 모의과거와 같은 것이었다. 뒤에 그로부터 동방학교가 흥기되었음을 찬양하여 그를 '해동공자(海東孔子)'라고 추앙(推仰)하였다.
사학12도
[편집]私學十二徒
고려 중기에 개경에서 번창하였던 12개의 사설학당. 최충이 9재(九齋)학당을 열어 인기를 모으니 이를 본받아 유신(儒臣)들이 다투어서 사학(私學)을 여니 12도에 이르렀다. 여기서는 사제간의 의리가 엄격하고 이론과 예절, 문장을 아울러 가르쳐 과거에 대비시켰다. 인종(仁宗) 때에는 스스을 배반한 유생(儒生)에게 동당감시(東堂監試) 응시를 금한 적도 있고 말기까지 존속하다가 공양왕 3년에 혁파되었다.
안향
[편집]安珦 (1243∼1306)
고려의 유학자. 초명은 유(裕), 자는 사온(士蘊), 호는 회헌(晦軒). 원종(元宗) 대에 관계에 진출하여 충렬왕 11년(1285) 상주판관(尙州判官)으로 있을 때 무당을 금하여 미신을 타파하였고, 원나라에 들어가 <주자전서>를 필사해 와서 주자학을 연구하였다. 그는 국학의 육성과 유학의 진흥을 위하여 충렬왕 30년(1304)에 섬학전(贍學錢)이라는 육영재단을 설치하였고, 국학 대성전(國學大成殿)을 낙성하였으며, 박사 김문정(金文鼎)을 중국에 보내 공자와 그 70제자의 화상 및 제기(祭器)·악기(樂器)·경서(經書) 등을 가져와 비치했다. 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주자학자로 불교사상을 비판하여 "저 부처란 것은 어버이를 버리고 집을 나가 윤(倫)을 없애고 의(義)를 어기니, 이는 곧 이적(夷狄)의 유(類)이다. 배울 것을 배우지 않는 자들이 불서(佛書) 읽기를 좋아하고, 그 묘연(杳然) 공적(空寂)한 뜻을 숭신하니 내 심히 마음 아파한다"라고 하였다. 그의 문하에서 백이정·우탁(禹倬) 등이 배출되니 이로부터 고려 정주학파가 시작되었다.
문묘(고려)
[편집]文廟(高麗)
고려 때 공자(孔子)와 그의 제자 등의 위패를 모셔 제사지내는 곳. 성종 2년(983)에 박사인 임노성(壬老成)이 송(宋)에서 <태묘당도(太廟堂圖)> <사직당도(社稷堂圖)>와 그 기(記), <문성왕묘도(文聖王廟圖)> <제기도(祭器圖)> <72현찬기(七二賢贊記)> 등 도서를 갖고 와 이것을 국자감(國子監)에 안치한 것이 처음이었고, 현종 4년(1013년)에는 최치원(崔致遠)을 13년(1022)에는 설총(薛聰)을 각각 추봉(追封)하여 종사(從祀)케 하였다. 문종 때에 왕이 직접 공자의 상 앞에 제배하는 일까지 있었으나 중기의 역대왕들이 돌보지 않아 황폐된 것을 안향이 개탄하고 다시 원나라에 김문정을 보내 공자와 70제자의 화상·제기 등을 들여오는 한편, 문묘를 중수하니 이로써 유학은 배타적인 종교의 색채를 더욱 명백히 하였고, 이후로 최충(崔沖)·안향 등이 이곳에 배향되니 조선대까지 계속되어 유교사상의 상징처럼 되었다.
백이정
[편집]고려의 성리학자. 호는 이제(彛齋). 안향의 제자로 1298년 충선왕(忠宣王)을 따라 연경(燕京)에가 10여 년간 머무르면서 주자학을 연구하고 귀국, 이제현(李齊賢)·박충좌(朴忠佐) 등의 제자를 길러냈다.
우탁
[편집]禹倬 (1268∼1342)
고려의 성리학자. 자는 천장(天章)·탁보(卓甫), 호는 역동(易東). 일찍이 영해사록(寧海司錄)으로 있을 때 요신(妖神)의 사당을 철폐한 적이 있었고 원나라를 통해 정주의 역전(易傳)을 연구하여 후진을 가르쳤다.
이제현
[편집]李齊賢 (1287∼1367)
고려의 문신·학자 시인. 초명은 지공(之公), 자는 중사(仲思), 호는 익재(益齋)·실재(實齋)·역옹. 백이정의 문인으로 정주학을 공부하여 충숙왕 1년(1314) 원나라에 있던 충선왕이 만권당(萬卷堂)을 세워 부르자 연경에 가서 그곳의 석학들과 고전을 연구했는데 문장이 뛰어났다고 한다. 그는 학식과 문장을 구사하여 원나라와의 외교적인 문제를 여러번 해결하였고, 유학진흥책을 내놓아 "학교를 넓히고 상서(庠序)를 삼가서 육예(六藝)를 존중하고 오륜(五倫)의 교를 밝혀 선왕의 도를 천명한다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고 주장하였다.
이색
[편집]李穡 (1328∼1396)
고려의 유학자. 자는 영숙(潁叔), 호는 목은(牧隱), 이제현의 문인이다. 1348년 원나라에 가서 국자감(國子監) 생원(生員)이 되어 성리학을 연구하고 귀국하여, 공민왕 1년(1351)에는 전제(田制)의 개혁, 국방계획, 교육의 진흥, 불교의 억제 등 시정개혁안에 관한 건의문을 올렸다. 뒤에 그는 유학에 의거한 3년상의 제도를 실시하게 하였고, 성균관의 학칙을 개정, 김구용(金九容)·정몽주·이숭인(李崇仁) 등을 등용, 성리학 발전에 공헌하였다. 그의 문집(文集) 55권에 나타난 그의 사상을 간추려 보면, (1) 토지제도를 바로잡는 것이 정치인이 먼저 할 일이다. (2) 왜구를 막는 데는 육수(陸守)와 해전(海戰)을 병용해야 한다. (3) 유학의 학풍을 바로잡아야 한다. (4) 불교의 폐해가 극심하니 승려 수를 제한하고, 사원 신축을 금해야 한다 등이다. 그의 문하에서 권근(權近)·김종직·변계량(卞季良) 등이 배출되니 조선 유학의 주도세력이었다.
정몽주
[편집]鄭夢周 (1337∼1392)
고려의 유학자. 초명은 몽란(夢蘭)·몽룡(夢龍), 자는 달가(達可), 호는 포은(圃隱). 젊어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성리학을 연구하여 이색으로부터 '동방이학(東方理學)의 조(祖)'라고 불리었다. 관계에 나가 여진 토벌, 성균관 운영, 왜구 토벌 등에 참가하였고, 명나라·일본 등을 내왕, 이성계 일파의 음모에 저항하다가 죽었다. 그는 상제(喪祭)의 풍속을 바로잡기 위하여 스스로 3년상을 행하였고, <주자가례>에 의한 가묘(家廟)를 처음으로 세웠으며, 5부학당(五部學堂)·향교(鄕校) 등을 세워 성리학 진흥에 공헌하였다. 그는 사대모화(事大慕華) 사상에 빠져 몽고복을 명나라 복제로 고치게 하였고 적극적인 친명책(親明策)을 취하였다.
정도전
[편집]鄭道傳 (1337∼1398)
여말(麗末) 선초(鮮初)의 문신·유학자. 자는 종지(宗之), 호는 삼봉(三峰). 이색의 문인으로 공민왕 때부터 관계에 진출하여 이성계를 도와 조선 개국공신이 되었다. 그는 성리학에 밝아 <심기이편(心氣理篇)> 3장을 지어 불교·도교 배척론을 폈고, <심문천답론(心問天答論)>을 지어 천리(天理)의 필승(必勝)을 다짐하였고, <불씨잡변(佛氏雜辨)>으로 불교이론을 날카롭게 비판하였다.
심기이편
[편집]心氣理篇 정도전(鄭道傳)의 저술로, 고려 척불론의 대표적인 것. <심난기(心難氣)> <기난심(氣難心)> <이론심기(理論心氣)> <심문천답(心問天答)>의 4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여기서 '심'은 불교의 수심(修心)을, '기'는 도교의 양기(養氣)를, '이'는 성리학의 이를 각각 의미한다. 첫째 <심난기>에서는 석씨수심(釋氏修心, 佛敎)의 뜻을 말하면서, 노씨(老氏, 道敎)의 그릇됨을 말하고, 둘째 <기난심>에서는 노씨의 양기의 법을 말하면서 석씨의 그릇됨을 말하였다. 셋째 <이론심기>에서는 주로 유가(儒家)의 교리를 논하면서 불교·도교의 그릇됨을 말하고 넷째 <심문천답>에서는 유교가 옳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즉 이 <심기이편>은 그의 양유척불(揚儒斥佛)의 주장을 개론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불씨잡변
[편집]佛氏雜辨 정도전의 저술로 주자학의 입장에서 불교의 교리를 반박한 것. <불씨윤회지변(佛氏輪廻之辨)> <불씨인과지변(佛氏因果地變)> <불씨심성지변(佛氏心性之辨)> <불씨자비지변(佛氏慈悲之辨)> <불씨지옥지변(佛氏地獄之辨)>등 모두 19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는 주자학의 입장에서 불교의 윤회설, 인과설, 자비설, 지옥설 등 교리를 공격한 다음에 민심을 현혹시키는 사교(邪敎)라는 주장을 내세우고 있는데, 특히 선종(禪宗)과 같은 것은 민심을 현혹시키는 마종(魔宗)이라고까지 비난하였다.
권근
[편집]權近 (1352∼1409)
여말선초의 문신·학자. 초명은 진(晋), 자는 가원(可遠)·사숙(思叔), 호는 양촌(陽村). 공민왕 때부터 관계에 나아가 친명파에 가담하였고, 고려 망국 후에 신왕조에 참가하였다. 사병(私兵) 폐지를 주장하여 왕권확립에 기여하였고, 왕명으로 <동국사략(東國史略)>을 찬하였다. 경학(經學)에도 밝아 4서5경(四書五經)의 구결(口訣)을 정하였고, 그의 저서인 <입학도설(入學圖說)>은 후일 이황(李滉) 등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그는 성리학자이면서도 문학을 존중하여 시부사장(詩賦詞章)의 학을 중시하고 장려하여 경학과 문학의 양면을 조화시켰다. 그의 사상을 요약한다면 (1) 도교는 무소위(無所爲)를 원하고, 불교는 무소불위(無所不爲)를 원하니 둘다 타락하면 인의(仁義)를 해치고, 윤리(倫理)에 어긋난다. 오직 유교만이 천명(天命)의 성(性)과 혼연일리(渾然一理)함을 말하니 온전한 가르침이다. (2) 불교, 도교와는 달리 유도(儒道)만이 인륜일용사(人倫日用事)에 구재(具在)하므로 아무리 행하여도 폐가 없을 것이다 (이상 <心氣理>三篇). (3) 4단(四端)은 이(理)의 근원 즉 성(性)의 출발점이니 순선(純善)한 것이요, 7정(七情)은 기(氣)의 근원인 심(心)의 출발점이니 선악이 있다(<입학도설>).
길재
[편집]吉再 (1353∼1419)
여말·선초의 유학자. 자는 재부(再父), 호는 야은(冶隱)·금오산인(金烏山人). 1370년에 개경에서 이색, 정몽주, 권근 등으로부터 성리학을 배우고 성균관 박사가 되어 교육에 종사하다가 물러났다. 고려 망국 후에 신왕조의 부름을 거절하고 고향 선산(善山)에서 김숙자(金叔滋) 등에게 성리학을 가르쳐 그 학통을 잇게 하였다.
입학도설
[편집]入學圖說
여말(麗末)의 유학자 권근의 저술. 주자학의 가장 중요한 문제인 사단(四端)과 칠정(七情)의 관계를 논하여 뒤에 이황(李滉)·이이(李珥) 등의 사단칠정(四端七情)논쟁에 큰 영향을 끼친 것이다. 즉 그는 사단을 이(理)의 근원 성(性)의 발(發)이며 순선(純善)한 것으로 보는 대신, 칠정(七情)은 기(氣)·심(心) 쪽의 것으로 선악의 차별이 있다고 보아 양자를 명확히 구분하고 전자를 우위에 놓아 뒤에 이황의 '사단은 이(理)에 발하므로 순선이요, 칠정은 기(氣)를 겸하였으므로 선악이 있다'는 입장의 선구자 역할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