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동양사상/한국의 사상/삼국시대의 사상/삼국사상의 일본 전파
삼국사상의 일본 전파〔槪說〕
[편집]삼국시대의 우리나라에서 일본에 사상적 문화적인 전달이 시작된 것은 3세기 후반에 왕인(王仁)에 의한 유교사상의 전달에서 비롯된다. 즉 일본 천황이 사신을 보내 문학사(文學士)를 청함에 백제 고이왕(古爾王)은 왕손인 진손왕(辰孫王)과 함께 왕인을 보내니 서력 기원 285년의 일이었다. 그는 <논어(論語)> 10권, <천자문(千字文)> 1권을 가지고 가서 일본에 전하고 크게 유풍(儒風)을 천명하였으니 일본의 문교(文敎)가 이에서 흥하게 되었다. 처음으로 화가(和歌)를 지어 불러 일본 화가의 아버지로 불리고 있으며 그의 자손들도 대대로 일본의 문운(文運)에 공헌하였다. 불교의 전달은 그보다 훨씬 후인 백제 성왕(聖王) 30년(552)에 성왕이 일본에 불경과 불상을 보냄으로써 이루어졌다. 그러나 불교의 경우는 단순히 교리나 사상의 전달에만 그친 것이 아니라, 백제·고구려·신라 삼국에서 끊임없이 영향을 주어 삼국의 불교문화를 일본 땅에다 옮겨 심어 소위 아스카(飛鳥) 문화를 낳게 하였으며 더 나아가 일본의 불교·사회, 그리고 문화 전반에 걸쳐 비약적인 발전을 보게 하였으니 이제 삼국별로 특기할 만한 것 몇 가지만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일본에 처음으로 불교를 전한 백제의 경우를 보면 첫째로 불교를 전하면서 7명의 중을 보내어서 일본 불교의 향도역(嚮道役)을 담당시켰는데, 수년마다 다른 중들을 보내 먼저 갔던 중들과 교체시키고는 하였으니, 일본 불교의 시작은 백제에서 전적으로 이끌어 줌으로써 가능할 수 있었다고 하겠다. 둘째로 백제에서는 중들만을 일본에 보낸 것이 아니었다. 중들 이외에 불공(佛工)·사공(寺工)·와장(瓦匠)·화공(畵工) 등의 기술자들 또한 대거로 건너 보내 불상을 만들고 탑을 세우며 절을 지어 주는 등, 불교문화를 일본 땅에 옮겨 심는 거창한 작업도 수행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대부분의 일본의 고대 사원의 가람배치(伽藍配置)가 우리의 것과 같다는 것에서도 알 수 있으려니와 특히 일본 사천왕사(四天王寺)의 경우는 그 당탑(堂塔) 배치의 평면도로 보아 부여 남쪽 군수리(軍守里) 절터의 그것과 동일한 설계도에 의한 것이라는 실측조사 결과에 의해서도 이미 증명된 바가 있는 것이다. 셋째로 불교 이외의 다른 문화도 전하였다는 것이다. 즉 602년에 도일한 백제 스님 관륵(觀勒)은 천문(天文)·지리(地理)·역서(曆書)·둔갑방술(遁甲方術) 등의 서적을 전하였고, 또 의술(醫術)에 밝은 그는 일본 의학에 큰 영향을 끼쳐서 오늘날까지도 일본 의학의 기초를 세운 시조로 떠받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는 또한 일본 최초의 승정(僧正)이 되어 일본 불교계의 기강을 세우기도 하였다. 고구려의 경우에는 첫째로 595년에 일본에 건너가 20년간 그곳에 머물면서 성덕태자(聖德太子)에게 사부(師傅)의 예를 받았던 혜자(慧慈)를 들 수 있다. 성덕태자는 그가 섭정한 36년간의 치적을 통하여 일본을 개화의 길로 이끈 영특한 인물로서 일본 역사상 뚜렷한 지위를 점하고 있다. 그는 또 불교학의 연구에도 출중하여 <법화경소> 4권, <유마경소> 3권, <승마경소> 1권 등의 저술을 통하여 불교의 대중화, 생활화에 크게 힘썼고, 17조에 달하는 일본 최초의 헌법을 제정하기도 하였는데 이러한 그의 눈부신 활동은 그의 스승이었던 고구려 중 혜자에게 힘입은 결과였던 것이다. 둘째로는 610년에 도일한 담징(曇徵)이 끼친 영향을 들 수 있다. 그는 불교학은 물론 5경에도 통달하였고, 채색·지묵(紙墨)·연애 등을 만드는 기술이 뛰어났으며, 또 그림에도 능한 스님이었다. 그리하여 물감 만들기, 종이와 붓 만드는 법을 전하는 한편 맷돌 등도 만들어서 일본 문화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뿐만 아니라 회화계에도 큰 영향을 끼쳤으니 그 가장 대표적인 것이 일본의 제1급 문화재인 법륭사(法隆寺)의 금당벽화(金堂壁畵)라 할 수 있다. 이 벽화에 대하여는 담징의 작품이냐 아니냐의 문제로 일본 학계가 반세기 이상 논쟁을 계속한 바가 있고 아직도 의견이 구구하지만 요는 그의 작품이건 또는 그의 화풍(畵風)을 이어 받은 제자들의 작품이건 간에 우리는 일본 미술(회화부문)에 끼친 그의 영향이 얼마나 컸었는가를 넉넉히 짐작할 수 가 있다. 일반적으로 미술부문에 있어서는 다른 두 나라에 비해 고구려의 영향이 컸었으니 담징의 경우가 그러했고 또 최근에 발견된 고구려계 고분벽화의 예에서도 알 수가 있는 바이다. 셋째로는 625년에 도일한 혜관(慧灌)의 경우를 들 수 있다. 그는 이에 앞서 중국에 유학하여 길장(吉藏)대사로부터 삼론종(三論宗)의 깊은 뜻을 물려 받은 바 있었는데 일본에 건너가서 삼론종풍을 크게 떨쳐 결국 일본 삼론종의 시조가 되었으니 여기에서 일본에 끼친 불교 교학(敎學)의 영향의 일단을 엿볼 수가 있다. 신라의 경우는 첫째로 일본의 중들이 신라에 유학을 왔다가 돌아간 일이 많다는 것이다. 그 시기는 7세기 후반이므로 일본 불교가 어느 정도 성장하여 적극적으로 선진국의 불교학 및 불교문화를 배워가게 된 것으로 해석된다. 둘째로는 신라에서 일본에 불교사절을 보낼 때에 일거에 수십 명씩 보냈는가 하면 또 왕자를 보내기도 하였다는 것이다. 그 시기는 대략 신라의 삼국통일 후인 바 이 시기에는 고구려와 백제 분을 묶어서 보냈기 때문에 인원수가 부쩍 늘었다고 보며 또한 신라의 대(對)일본 불교사절의 비중이 그만큼 커졌다고 보아진다. 셋째로는 785년에 이르러 승려와 일반인 남녀 74명이 일본에 건너가 무사시노(武藏野) 한지(閑地)에 신라도(新羅都)를 건설하였다는 것이다. 신라가 당나라 안에 적산법화원(赤山法花院)이란 신라 절을 세우고 포교에 힘썼던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거니와 이 적산법화원과 신라도를 비교해 보면 신라도에도 신라인의 마을과 절이 함께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이것은 곧 신라 불교가 8세기 후반부터 종래의 전달과정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일본에 거점을 확보하고 적극적으로 불교를 포교하는 해외진출 단계에 접어들었음을 말하여 주는 것이기도 하다.
<李 載 昌>
광개토왕릉비와 임나일본부설
[편집]廣開土王陵碑-任那日本府說광개토왕릉비는 장수왕이 그의 아버지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지금은 중국 땅인 만주의 통구에 왕릉과 함께 세운 능비이다. 6m 높이의 거석에 1,775자의 한문을 사면에 새겨 넣었다.
고주몽의 건국신화를 비롯해 광개토대왕에 이르는 대왕의 세계(世系)와 약력, 대왕의 정복활동, 묘의 관리규정이 주내용을 이룬다. 414년에 건립된 장구한 역사와는 달리 고구려가 멸망한 뒤 세간에 잊혀졌다가 1808년에 부분적으로 탁본을 해독함으로써 재발견되었다. 이중 논란이 되는 부분은 본문에 해당되는 부분이다. 본문의 전체 내용은 광개토왕의 업적을 정토의 명분과 결과로 제시한 것으로 전제왕권의 확립을 통한 고구려의 국가성장을 대내외에 과시하고 있다.
본문의 전체 내용은 광개토왕의 업적을 정토의 명분과 결과로 제시한 것으로 전제왕권의 확립을 통한 고구려의 국가성장을 대내외에 과시하고 있다. 여기서 고구려는 백제, 임나(가야), 신라, 부여를 정복대상으로 대하고 왜와 비려 등은 토벌의 대상으로 대하고 있다.
고구려에 있어 백제등은 통일해야 할 동일세력권에의 민족집단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보인다. 또한 당시의 왜가 고정된 거점이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랜 풍상과 함께 일인에 의한 변조, 좋은 탁본을 위한 회토 등으로 인한 비면의 마멸과 오독으로 발견 이후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 미해결의 과제로 남아 있는 부분은 다음과 같다.
倭以辛卵來渡海破百殘 ???ㅺ戴雜? 일본학자들은 이 구절을 '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 백제, 가야, 신라를 물리치고 이를 신민으로 삼았다'고 해석해 임나일본부설의 근거자료로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당시의 한반도 정치상황을 고려하고 이를 다시 주어인 고구려가 생략된 것으로 보아 '백제가 기존의 조공의 약속을 깨고 왜를 불러들여 고구려에 대항하자 이를 물리치고 신민으로 삼았다'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광개토왕릉비에 대한 해석은 왜의 등장에 대한 논쟁에서 벗어난 고구려사를 중심으로 하는 한국 고대사의 발전과정을 밝히는 능비 본연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져야 객관적이고 착실하게 실마리가 풀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