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동양사상/한국의 사상/삼국시대의 사상/신라의 화랑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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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화랑도〔槪說〕[편집]

화랑도의 본래 이름은 풍월도(風月道), 풍류도(風流道)이다. 그 유래는 "남녀군취 상취가희(男女群聚 相就歌戱)-남녀가 무리지어 모여 서로 좇아 노래하고 논다"하던 옛 풍속의 일단에 두고 있다. 삼국 중 뒤늦게 일어난 신라는 "욕흥방국(欲興邦國)-우리나라를 일으키고자 한다"이라고 목적을 내걸고 그에 필요한 인재를 널리 구했다. 인재는 많은 사람들이 모인데서 그 용모와 행동을 보고 골라야 하므로 "취도선사(聚徒選士)-무리를 모아놓고 인재를 선발한다"라 했다. 사람들을 많이 그리고 자연스럽게 모으기 위하여 실시한 것이 원화(源花)를 선봉(選奉)하는 심미 행사였다 (법흥왕 37년 봄에 처음으로 시행했다). 이것이 뒤에 불상사를 빚어 남자를 화랑(花娘)으로 꾸며 대체하는 미남 선발대회로 바뀌어 화랑(花郞)이라는 외형적 지칭이 생겼다. 그러나 화랑은 바로 국가가 찾는 인재였으므로 이내 개념적인 명명(命名)이 되었다. 이렇게 뽑힌 화랑은 풍류도의 수련도(修練徒)로서 지·덕·육을 겸비한 인격도야를 직분으로 하고 국가목적을 달성하는 데 주역이 되는 기능을 가졌다. 이들은 문벌단위의 화랑을 중심으로 많은 낭도(郎徒)를 거느리고 명산대천을 순례하면서 도의를 닦고 기예(技藝)를 익혔다. 즉 사조직적이고 자유개방된 운영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화랑은 궁극적으로 국가라는 차원에 입각하는 것으로 총화된 국가적 운동이었던 것이다. 이 운동이 전개된 지 약 25년 후(A.D. 601)에 수(隋)나라 유학에서 돌아온 원광(圓光)이 화랑 귀산(貴山)·추항에게 일러준 소위 세속5계(事君以忠 事親以孝 交友有信 臨戰無退 殺生有擇)가 귀산의 장렬한 전사를 계기로 모든 화랑들에게 알려지고 화랑들은 이를 신조로 삼았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화랑5계라고 확정된 것이다. 5계 중 충·효·신은 일상생활의 규범으로서 정적이었지만, 임전무퇴·살생유택 2계는 특히 전쟁 상황에 놓여 있던 신라에 있어서는 큰 작용을 일으켰다. 이는 곧 신라인의 사생관과 전훈(戰訓)이 되어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원동력이 되었다. 사실 임전무퇴계(臨戰無退戒)가 작용하기 전의 신라군은 후퇴와 패배가 많았지만 작용 후에는 후퇴한 기록을 찾아보지 못하고 오직 결사적 정신과 생사·의리의 태도는 정토(淨土), 미륵사상과 함께 이상 국가를 건설하는데 집약되어 삼국통일의 영광을 가져왔다. 그러므로 화랑 5계는 바로 우리의 민족정기요 국가철학이며 인생관이다. 이러한 화랑5계의 사상적 배경에 대하여 혹자는 그의 최초의 설정자 원광이 중이었으므로 일차적으로 불교사상으로 보아야 한다 하고 또 5계 내용이 다분히 유교적이라 하여 유가사상으로 보자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당시 신라의 문화는 어느 1교(一敎)에도 치우치지 않고 회통조화(會通調和)한 이를테면 우리 나름으로 소화해서 창조한 것이었으므로 그를 다시 분해해서 배경을 찾는 것은 잘못이고 최치원의 <난랑비서(鸞郞碑序)>에서 말해주듯이, 이는 어디까지나 우리의 고유사상에 의해 포용되고 소화되어, 그 속에서 시대적 요청으로 창설된 것이라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화랑도를 바로 무사도라고 국한시켜 보는데 이는 국가의 인재를 기르는 것으로서 문무의 구별이 없이 통용된 것이었다. 거기서 길러진 인재는 문(文)에 나가면 문사, 무(武)에 나가면 무사일 뿐 나가기 전에는 구별을 미리부터 지우고 있지 않았다.

귀산[편집]

貴山 ( ? ∼602)

신라의 무장. 사량부(沙梁部) 출신. 어렸을 때 추항을 친우로 사귀어 두 사람은 서로 "우리는 사군자(士君子)와 교유하기로 기약하고, 먼저 마음을 바르게 하고 몸을 바로 잡지 않으면 장차 치욕을 면치 못할까 두려우므로 곧 어진 사람의 곁으로 가서 옳은 도리를 듣기로 하자"고 하였다. 이때 원광(圓光)법사가 당나라에서 돌아와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있음을 듣고 귀산·추항 등 두 사람이 찾아가 계명을 청하여, 원광으로부터 세속5계(世俗五戒)를 받아, 이것이 화랑도의 기본윤리가 되게 하였다. 602년 백제의 침공으로 부친과 함께 출전하였을 때, 취항과 함께 세속5계중 제4조인 임전무퇴를 선두에서 실천하여 적군을 격퇴하고 돌아오는 중에 만신에 부상을 입고 죽었다. 진평왕이 이들의 시체를 맞아 통곡하고 벼슬을 추증했는데, 귀산에게는 내마(奈麻)가, 추항에게는 대사(大舍)가 내려졌다.

세속5계[편집]

世俗五戒

신라 진평왕 때 원광(圓光)이 화랑에게 준 다섯 가지 교훈. 화랑5계(花郞五戒)라고도 한다. 원광이 당나라에서 돌아와(600) 청도(淸道)의 가실사(嘉悉寺)에 머물고 있을 때 귀산과 추항의 청을 받아 사군이충(事君以忠)·사친이효(事親以孝)·교우유신(交友有信)·임전무퇴(臨戰無退)·살생유택(殺生有擇)의 5계를 주어서 신라 화랑도의 기본이념이 되게 하였다.

난랑비서[편집]

鸞郞碑序

최치원이 난랑이라는 화랑의 비(碑)에 쓴 비문의 서문. <삼국사기>에 전하는 것으로 화랑도의 사상적 연원과 형성과정을 말해주는 귀중한 문장이다. 문장의 내용은 "우리나라에는 현묘(玄妙)한 도(道)가 있다. 이를 풍류(風流)라 하는데 이 교를 실천한 근원은 선사(仙史)에 상세히 실려 있거니와 실로 이는 3교(敎)를 포함한 것으로 모든 민중과 접촉하여 이를 교화하였다. 또한 그들은 집에 들어와서는 부모에게 효도(孝道)하고, 나아가서는 나라에 충성을 다하니 이는 노(魯)나라 사구(司寇-孔子를 말함)의 취지이며, 또한 모든 일을 거리낌없이 처리하고 말 아니하면서 일을 실행하는 것은 주(周)나라 주사(柱史-老子를 말함)의 종지(宗旨)였으며, 모든 악한 일을 하지 않고, 착한 행실들만을 모두 신봉하여 행하는 것은 축건태자(竺乾太子-釋迦를 말함)의 교화이다"라고 하였다. 이 문장은 뒤에 민족사상의 3교합일론 또는 3교원융론(三敎圓融論)의 논거로 인용되었고, 현대 대종교(大倧敎)에서는 단군신앙(檀君信仰)의 전승(傳承)과정으로서 이 문장을 중요시하고 있다.

화랑세기[편집]

花郞世紀

신라 성덕왕 때의 학자 김대문(金大問)의 저서. 신라의 대표급 화랑(花郞)의 전기를 수록한 것으로 <삼국사기> 편찬시에 중요한 자료로 쓰였으나 지금은 현존하지 않는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이 책에서는 화랑도의 역할을 "어진 재상과 충성된 신하가 여기서 배출되었고 뛰어난 장수와 용감한 군사가 이로 인하여 생겨났다"고 말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