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동양사상/한국의 사상/조선전기의 사상/조선전기의 교육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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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전기의 교육사상〔槪說〕[편집]

이 시기의 교육제도는 고려의 교육제도를 이어받아 크게 발전했다. 다만 연산군이 재위(在位)한 11년간(1495∼1505)은 '교육의 수난기'로서 많은 유능한 학자가 피해를 입었고 교육은 한동안 침체를 면치 못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에 발달한 성리학(性理學)을 비롯해서 수사사업(修史事業)·건축·조각·회화·공예·음악·국문학·문학·역학·지리학·의학·화학공업·농업기술·선박교통기술 등은 모두 자랑할 만한 것이었다. 그중에서도 으뜸가는 것이 훈민정음(訓民正音)의 창제(創制)(1443, 세종 25년)였다. 한편 사상의 통일을 위해서는 척불숭유책(斥佛崇儒策)이 취해졌다. 여기에 있어 가장 크게 활약한 인물은 권근(權近)이었다. 그는 유교가 인륜(人倫)의 가르침으로서 가장 뛰어났음을 설파하였고, 후에 국민독본으로서 <소학(小學)>을 읽게 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다음에 성리학을 중심으로 국미들의 사상적 통일을 시도한 조선전기 시대의 교육제도(敎育制度)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조선사회에 있어서의 교육통제의 형태는 성균관(成均館)·종학(宗學)·5부(4부) 학당(五部·四部學堂)·향교(鄕校) 그리고 과거제도(科擧制度)에서 보게 되는 관학(官學) 및 정부에 의한 인재등용법과 서원(書院)·서당(書堂) 같은 사학(私學)이라는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성균관(成均館)은 1398년(태조 7년)에, 학당(學堂)은 1411년(태종 11년)에 설립하여 그 후에 4부학(四部學)으로 개치(改置)하였고, 왕족의 자제들을 교육시키기 위한 특수학교로 종학(宗學)이 1429년(세종 11년)에 처음으로 세워지니 중앙의 교육시설이 완비되었다. 한편 고려 때부터 보급되었던 향교(鄕校)를 태조 원년부터 전국 각지에 증설 정비케 하니 남은 제주에서, 북은 경흥(慶興)·갑산(甲山)에까지 주(州)·부(府)·군(郡)·현(縣)에 없는 곳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교육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역시 국가의 보조를 받아 개인이 선현선사(先賢先師)의 유지(遺址)에 세운 서원(書院)의 발달이었다. 주세붕(周世鵬)이 안향(安珦)을 모시기 위해서 세운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기점으로 해서 전국 각지에 서원이 다투어 서니 이들을 통하여 유학교육은 크게 융성하였다. 특히 이황(李滉)을 사향(祀享)한 안동의 도산서원(陶山書院)은 아직도 사학의 성지로 꼽히고 있다.

권근의 교육사상[편집]

權近-敎育思想

조선 초의 학자인 권근(權近)이 그의 저서 <양촌집(陽村集)> 속의 수편 글을 통해서 보여준 성리학적인 교육사상. 그는 교육이념으로서 먼저 <인륜을 밝힐 것(明人倫)>을 강조하여 조선사회 5백년간을 지배하는 국가적인 교육이념을 정립하였다. 그는 이색(李穡)·이숭인(李崇仁) 등에게 사사(師事)하여 한문(漢文)을 잘한 것으로 손꼽혔고, 그 자신 이 점만은 크게 자신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기에 그의 한문(漢文)실력은 외교상 난문제를 무난히 해결케 할 수 있었고 명태조(明太祖)에게 인정받아 그의 명성이 길이 남았다. 권근은 <심기리 3편서(心氣理三篇書)>와 <불씨잡변설서(佛氏雜辨說序)> 등의 글을 통하여 유교(儒敎)가 불교 및 도교(道敎)보다 훌륭하다는 것을 밝혔고 <논문과서(論文科書)>에서 <소학(小學)>을 읽게 해야 한다는 것을 제창하였다. 이것은 말을 달리면서 조선사회의 건국 초에 있어 바야흐로 조선왕조의 사상적 구심점을 유교에 두었던 것이요, 교육이념으로서 <명인륜(明人倫)>을 말했던 것이다. 그런데 <명인륜>에 대하여 자세하게 논급하고 있는 책이 다름아닌 <소학>이니 이 책을 널리 읽혀야겠다는 것인데, 그의 뜻대로 그후 줄곧 <소학>을 읽을 것이 교육정책상 강조되었다. 물론 여기에 대비하는 도덕 교과서가 우리나라 사람에 의하여 간행되었으니 그것들 또한 주목할 만하다. 그는 또 각자가 수양해야 할 덕목(德目)으로서 <효(孝)·공(公)·근(勤)·관(寬)·신(信)>이라는 다섯 가지를 들었다. '효'를 제외하고 공·근·관·신의 다섯 가지 덕목은 그가 셋째 아들 규에게 준 교훈이다. 비단 규만이 아니라 누구나 사람으로서 수행해야 할 일은 이 네 가지라고 하겠다. 그런데 효가 언급되지 않은 것은 쉽사리 알 수 있듯이 부모로서 아들 보고 효도를 하라고 말하기는 심히 거북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태종(太宗)에게 올린 글인 <수창궁재상서(壽昌宮災上書)>에서는 여섯 조목 중 제일 먼저 '독성효(篤誠孝)'라고 하여 왕이 수양할 첫째 조목은 효성이 지극해야 된다고 하였다. 그 밖의 다섯 조목은 '근(勤)'에 관한 것이 셋, '신(信)'에 관한 것이 둘이니 결국 양촌(陽村)이 생각한 바 수양덕목은 '효(孝)·공(公)·근(勤)·관(寬)·신(信)'이라는 다섯 가지라고 하겠다. 이 다섯 덕목은 때로 그 표현은 다를망정 예부터 우리나라에서 강조되어 온 교육적 가치와 직결하고 있다.

성균관[편집]

成均館

고려·조선시대의 국립대학. 고려 충선왕(忠宣王) 때 국학(國學)을 성균관으로 개명, 공민왕때 국자감(國子監)이라 하다가 곧 성균관으로 복귀하였고, 이후 1894년 갑오개혁(甲午改革)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의 최고 교육기관이었다. 조선 태조 7년(1398)에 서울 숭교방(崇敎坊:지금의 明倫洞)에 건물을 준공하고, 유학을 강의하는 명륜당(明倫堂), 공자를 모신 문묘(文廟), 유생들이 거처하는 재(齋)를 두었다. 태종(太宗) 때의 학전(學田)·노비의 지급, 왕세자(王世子)의 입학을 거쳐 성종(成宗) 때 그 규모가 완성되었다.

학당[편집]

學堂 고려말기에 시작되어 조선시대에 완비된 중앙의 교육기관. 고려 때는 개경에 5부학당(五部學堂)이 있었으나 학사(學舍)가 없어 대부분 사원을 이용하였다.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 1411년(태종 11년)에 처음으로 남부학당(南部學堂 약칭 南學)이 설립되었으며, 그 후에 4부학(四部學)으로 개치(改置)하였는데 그 위치는 다음과 같다. 중학(中學)은 북부 관광방(觀光坊:지금의 中學洞 52·83·88·91번지)이었고, 동학(東學)은 동부 동학동(東學洞:지금의 동대문 6가 32·40·44번지, 이화여대부속병원)이었고, 남학(南學)은 남부 성명방(誠明坊-지금의 南學洞 26·27·30번지)이있고, 서학(西學)은 서부 여경방(餘慶坊:지금의 태평로 60·61번지, 서울특별시 교육위원회 청사 소재지)이었다. 그런데 북학(北學)의 창폐(創廢)는 자세하지 않다.

종학[편집]

宗學

왕족의 자제들이 교육을 위하여 세운 특수 교육기관. "세종(世宗) 11년에 비로소 처음으로 종학을 세우고 문행(文行)과 학덕(學德)이 높은 사람을 가려 박사(博士)를 삼고 종친들을 가르치니, 이로부터 예도(禮度)가 서고 질서가 바로 잡혔다"는 기사(記事)가 보인다. 교육내용은 당시의 문교정책으로 보아 성균관의 교육 방침과 별로 차이가 없었을 것이다.

향교[편집]

鄕校

고려·조선 때 지방에 있던 문묘와 부속학교. 이태조(李太祖)가 즉위하던 해부터 곧 적극적으로 개선(改善)과 보급에 노력하였다. 각도(各道) 감사(監司)에게 명하여 향교의 흥폐로 수령(守令)의 치적(治績)을 고사(考査)하게 하였고, 이해 제주(濟州)에 향교를 세웠다. 태조가 즉위한 뒤로 향교는 널리 펴져서 남은 제주로부터 북은 공주(孔州=慶興)·갑산(甲山)에 이르기까지 학을 세우고 학생을 모아 경서(經書)를 가르쳐 주(州)·부(府)·군(郡)·현(縣)에 모두 향교(鄕校)가 서게 되었다. 조선전기의 경우 역대군왕(歷代君王)의 장려로 향교는 계속 융성(隆盛)하였다.

서원[편집]

書院 조선시대의 민간사학기관. '선현존경(先賢尊敬)과 후진장학(後進奬學)'이라는 선미(善美)한 정신에 입각하여 선현선사(先賢先師)를 봉사(奉祀)하는 사묘(祠廟)였고 한편 교육기관이었다. 국가보조를 받았는데 향교·문묘의 규모를 따랐다. 최초의 서원은 주세붕(周世鵬)이 안향(安珦)을 모시기 위해서 세운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이었는데, 후의 소수서원(紹修書院)이다. 이것은 사액서원(賜額書院)의 시초이기도 하다. 그리고 퇴계(退溪) 이황(李滉)을 사향(祀享)한 도산서원(陶山書院)은 현재도 사학(私學)의 성지로 여겨지고 있다.

소학교육[편집]

小學敎育

조선시대에 가장 성행한 유교의 기본교육. 주자(朱子)의 저서 <소학(小學)>이 전해지면서 성리학의 입장에서 윤리와 예절을 밝히는 기본교육으로 <소학>의 활용이 특히 강조되어 이에 관한 주해서(註解書) 도해본(圖解本)·언해본(諺解本) 등이 계속해서 나왔다. 조선 유학자들이 <소학>을 찬양하고 그것을 활용한 예는 얼마든지 있으나 중요한 것만 추려보면 다음과 간다. (1) 권근(權近)은 <논문과서(論文科書)>라는 글 속에서 <소학>을 읽게 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2) 김종직(金宗直)이 김굉필(金宏弼)에게 <소학>을 가르치며 "학문에 뜻을 둔다면 마땅히 여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하였고, 김굉필은 이 정신을 물려받고, <소학>을 깊이 공부하였으며, 스스로 '소학동자(小學童子)'라고 일컬었다. (3) 김안국(金安國)은 경상감사로 있을 때, 각 읍의 향교에서 <소학>을 가르치게 하고, 특히 함양(咸陽) 등지의 학자들에게 다시 소학에 힘쓰라고 당부하였다. (4) 중종 때 최숙생(崔叔生)이 <소학>을 한글로 번역한 <소학언해(小學諺解)>가 간행되었고, 선조(宣祖) 때 중간(重刊)되었다. (5) 이황(李滉)이 <소학>의 내용을 도해한 <소학도(小學圖)>를 작성하였다. (6) 숙종 때에 박세채(朴世采)가 <소학>을 개정 증보한 <소학총론(小學總論)>을 간행하였다. 이와 같이 주로 영남사림학파(嶺南士林學派)를 중심으로 전개된 소학교육운동은 곧 정부의 지원을 받아 후기에도 전개되어 조선시대 교육의 기본이 되었다.

이황의 교육사상[편집]

李滉-敎育思想

조선전기의 석학(碩學) 퇴계(退溪) 이황이 그의 문집(文集)인 <언행통록(言行通錄)> 등을 통해 보여준 교육사상. 박종홍(朴鍾鴻) 박사의 연구에 의해 밝혀진 현저한 특징은 다음과 같다. (1) 교육의 목적은 윤리에 있고, 문예(文藝)·등과(登科) 또는 영리(營利) 등은 부차적인 것이다. (2) 입지(立志)에 따른 자발적 태도를 존중하였으며 특히 개성을 살리는 교육이어야 한다. (3) 교육방법은 전기(前期)에는 반복연습을 주로 하는 학습과 습관형성에 치중하고, 후기(後期)에는 자각적인 사색과 역핵(力行)에 치중했다. (4) 지행호진설(知行互進說)을 취하여 양자의 근본을 경(敬)에다 둔다. (5) 신체와 관련되는 양호도 중요한 것이다. (6) 학습에는 신중한 사색이 필요하고, 천리(天理)의 체인(體認)에 이를 것을 이상으로 한다. (7) 실천은 일상적인 평이·비근한 것으로부터 시작하되 효(孝)를 기본으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