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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동양사상/한국의 사상/조선전기의 사상/조선전기의 문예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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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전기의 문예사상〔槪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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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의 국문학의 문예사조는 어느 시기를 막론하고 역사적·시대적 환경 속에 각 시대마다의 사상·종교의 영향을 받아 내용적인 깊이를 더해 가고 사상적으로 심화·확대되었다. 따라서 이와 같은 역사적 배경에 있어서의 제반 여건은 항상 그 시대의 문에사조와 상호 유기적인 상관 관계를 갖는 것이 하나의 역사적 필연성이었다. 이러한 점에서 15세기 초에서 17세기 말에 이르는 조선전기(朝鮮前期)의 문예사조도 그 구체적인 면을 상론하기에 앞서 당시의 역사적·시대적 배경을 몇 가지 측면에서 살펴봄으로써 좀 더 명확한 윤곽을 파악할 수 있다. 우선 이 시기의 문예사조상 커다란 변화를 가져다 준 직접적 원인은 왕조의 교체였다. 즉 고려에서 조선왕조로 왕조가 바뀜에 따라 새로운 정치질서 및 사회질서가 하나의 역사적 필연성으로 요구되었고, 이러한 사회변혁이 새로운 시대사조와 새로운 국민의식, 새로운 가치관을 불러일으킴에 따라 문예 일반도 새로운 형식에 새로운 내용을 담은 새로운 모습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다음으로는 고려시대를 통하여 국교로 일관해 온 불교의 퇴진과 이를 대신한 유교의 등장이었다. 당시 유교는 하나의 단순한 종교철학에 그친 것이 아니다 이것이 곧 국가의 대도(大道)였고, 정치이념이었으며, 국민 전반의 윤리·도덕 강령이었으며, 사고방식 내지 생활의 지침이었다. 그러므로 유교가 문예사조에 끼친 영향은 지대한 것이었다. 한편 당시의 문예사조에 절대적인 영향을 준 것으로 또 하나의 중요한 사실을 국자(國字)의 발명이었다. 즉 세종대왕의 훈민정음(訓民正音)의 창제에 의하여 문자의 변혁이 있게 되면서 표기법상 쉽고 새로운 표현수단을 갖게 되자 종전의 일부 유식계급만의 전유물이었던 문학은 더욱 폭 넓은 작자층과 독차층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결과적으로 문학의 형식상·내용상 다채롭고 다양한 유파(流派)의 대두를 보게 하였다. 한편 끝으로 이 시기 문예사조의 특징적인 점은 임·병·양란(壬兵兩亂)을 전후하여 대두한 서민정신에 바탕을 둔 비판적인고 반항적인 시대의식의 발로였다. 정치 관료계급의 부패와 사회제도의 모순에서 초기 이후부터 싹터 오던 이러한 사회풍조는 임란 직전부터 사회의 표면에 노출되어 오다가 급기야 전쟁이 끝난 후, 당시 유학자들의 허세와 위선이 백일하에 노출되면서 하나의 사회적인 서민의식(庶民意識)으로 등장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서민의식의 각성은 민족의식의 고취와 기성권위와 기존제도에 대한 반항과 비판의식으로 확대되어 이 시기의 문예사조에 새롭고 강한 바람을 불러 일으켰다. 이상 네 가지의 역사적 ·시대적인 특수한 여건은 이 시기의 문예사조의 형성과 전개 그리고 그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고 또 이로써 당시의 문예사조는 다양한 면모를 보이게 된 것이다.

한글 창제와 민족의 자주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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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創濟-民族-自主意識

세종의 한글 창체는 우리가 최초로 문자를 갖게 되었다는 역사적 사실 외에 3국 이래 자칫하면 외래문화에 정복되어 완전히 말살당할 뻔 하던 우리의 자주의식이 한글로 하여 소생하게 되었고 여기에서 진정한 민족의 문화가 새 출발을 보게 되었다는 문화사적 의의를 지니는 것이었다. 중국의 한자의 예속에 갇히어 한문화(漢文化)의 테두리 속에 있던 우리 문화가 한글로 인하여 비로서 자주성을 찾기 시작하였으니 우리나라말이 중국과 달라 문자와 상통하지 않으므로 백성들의 의사표현이 불편하다는 훈민정음 서문의 세종의 말이나, 이두(吏讀)는 한문을 빌어 쓰는 것이기 때문에 매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우리말의 만분의 일도 나타내지 못한다는 정인지의 서문에서의 말이 모두 문화적 자주의식에서 우러난 말들로서 새로운 문자의 탄생으로 자주적 민족문화의 확립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한글이 창제된 후 우리 글에 의한 진정한 국문학 작품 즉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월인석보(月印釋譜)> 등이 활발히 지어졌으며 세조(世祖) 때 설치된 간경도감(刊經都監)을 중심으로 수많은 불교의 경전, 유교의 경전, 그리고 <삼강행실(三綱行實)> <이륜행실(二倫行實)> <두공부시(杜工部詩)> 등 중국의 서적이 번역 소개되어 문화의 보급과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다. 당시 이와 같은 번역의 성행은 문학의 발전에도 크게 기여하여 사조적인 면에서의 민족의식의 발로와, 수사와 문체에서의 한국적 스타일, 형태와 형식적인 면에 있어서의 새로운 영향을 주어 국문학사상 새로운 기풍을 이룩하였던 것이다.

악장의 발달과 신흥의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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樂章-發達-新興意慾

새나라 조선의 건국은 건국을 주도하고 이를 적극 도왔던 공신들 내지 새로운 신흥 정치계급에게는 희망과 꿈에 벅찬 새 시대의 보람찬 출발이었다. 여기에서 새날의 태평함을 기원하고 새 군주의 덕과 만수무강을 축수하는 의욕적인 노래가 쏟아져 나오게 되었는데 이것이 이 때에 처음 생겨난 악장체의 문학이었다. 이들의 효시로는 세종의 6조(六祖)의 성덕을 노래하고 더 나아가 자손만대의 융성을 축원한 전 125장의 <용비어천가>가 있고, 이어서 군신간의 화합과 문덕(文德)을 노래한 <문덕곡(文德曲)> <무공곡(武功曲)> 등을 정도전(鄭道傳)이 지었고, 권근(權近)의 <상대별곡(霜臺別曲)>, 변계량(卞季良)의 <화산별곡(華山別曲)>, 윤회(尹淮)의 <봉황음(鳳凰吟)> 등이 있으며, 작자 미상의 <유림가(儒林歌)>

<오륜가(五倫歌)>

<연형제곡(宴兄弟曲)>

<북전(北殿)> 등의 작품 또한 있었다. 이들 조선왕조의 창업을 송축한 노래들은 가악만은 전래의 것을 사용했으나 내용은 모두 당시에 새로 창작된 것들로서 조선 건국의 신흥의욕에 젖어 새 나라의 앞날과 새 임금의 덕을 찬양 당시에 특별히 성행한 문학이었다.

민족고전의 정리 편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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民族古典-整理編纂

당시의 국가적인 신흥의욕 속에 주체의식에 입각한 문화적 업적이 쏟아져 나와 문화민족으로서의 긍지를 드높여 준 사례가 허다하다. 그 중에서 각종 사서(史書)·문집·가집(歌集)의 편찬 간행과 왕실 중심의 국가적 사업으로 벌어졌던 국악(國樂)정리와 민요수집운동은 국문학사상 특기할 일이었다. 사서로는 단종 2년(1454)에 왕명으로 정인지(鄭麟趾)·김종서(金宗瑞) 등이 고려 일대의 정사인 <고려사(高麗史)>를 엮어 고려시대의 역사를 보여 주는 귀중한 문헌을 이룩하였고, 성종(成宗) 때의 문호 서거정(徐居正)은 성종 9년(1478)에 신라에서 조선초에 이르는 동안의 우리나라 역대 이름난 시문(詩文)을 엮어 간행함으로써 찬란한 국문학의 전통을 작품으로 정리 체계화하였고, 그는 또한 성종 8년에 고려말에서부터 조선초에 걸치는 동안의 문인·승려 사이에 유전되던 해학적인 시문 일화를 엮은 <태평한화골계전(太平閑話滑稽傳)>을 엮어 내어 당시의 문학계에 풍성한 수확을 안겨 주었다. 또 하나 당시의 문화적 업적으로 들 수 있는 것을

<악학궤범(樂學軌範)>과

<악장가사(樂章歌詞)>의 편찬이었다. 이 두 문헌으로 국문학사상 주옥 같은 고려시대의 <청산별곡>, <가시리>, <서경별곡> 등 여요(麗謠) 일반을 후세에 전할 수 있었거니와 성종 24년(1493) 성현(成俔)·유자광(柳子光)·신말평(申末平) 등에 의하여 편찬된 <악학궤범>은 특히 고려시대의 서민문학으로 당시에까지 구전되던 가요들이 역사 속에 매몰되기 직전 이를 한글로 문자화함으로써 구출한 귀중한 문헌이었다. 한편 세종 때의 박연(朴堧)에 의한 국악정리와 민요수집운동 역시 당시의 이상과 같은 문화운동 속에 이루어진 일로서 조선의 아악(雅樂)을 정리 체계화하여 오늘날까지 그 귀중한 가치를 보존하게 한 의의 있는 일이었다. 그는 당시 체계없이 산만하게 흩어진 악보와 악제를 수습하여 아악과 속악의 기틀을 마련한 것이다. 한편 민간에 구전되는 서민들의 농가(農歌) 등 민요를 수집하는 일이 세종·세조대에 걸쳐 행해짐으로써 민족문화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각성을 보여 준 것이다.

금오신화의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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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鰲新話-思想

단종·세조대에 걸쳐 생육신의 한 사람으로 선왕에 대한 절개를 지킨 김시습(金時習)의 <금오신화>는 문화사적, 정신사적 그리고 민족사적 의의가 큰 명저이거니와 이것 또한 이때 이루어진 저술이었다. <금오신화>는 비록 명나라 구우(瞿佑)의 <전등신화(剪燈新話)>의 모방작이라고는 하지만 문화사적 면에서 본격적인 창작의 요소를 지닌 창작문학의 효시라는 사실과, 정신사적 면에서 비판적이고 반항적인 작가정신의 발로를 부여주고 있다는 점, 그리고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과 사건 그리고 그 배경이 한국적인 점으로 보아 민족사적 견지에서의 자주적 정신이 바탕에 깔려 있다는 점에서 우리 문학사상 의의가 큰 작품집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한국의 소설문학이 삼국시대 이래의 신화·전설에서 고려시대의 패관문학에 이르기까지 한낱 민속문학에 머문 것이었다면 <금오신화>에 이르러 비로소 중세기적 구각을 벗어나 투철한 산문정신과 작가의식에서 이룩된 소설을 낳게 되었던 것이다.

홍길동전의 사회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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洪吉童傳-社會思想

조선은 그 중기에 접어들면서 결국 초기에 보여 주었던 신흥 국가로서의 의욕적인 면이 점차 쇠퇴해가고 화석화된 유교의 탁상공론과 부패한 관료계급 그리고 모순으로 점철된 사회제도의 결함과 정치인들의 권력다툼 등으로 사회일반이 혼란의 무질서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가운데 사회적인 불안이 서서히 조성되고 있었다. <홍길동전>은 이러한 시대상황 속에 나타난 작품이었다. <홍길동전>은 하나의 소설문학으로서 그 체제나 구성, 사건이나 인물 그리고 그 웅대한 스케일에 있어서 당시로서 전무한 걸작이었고, 그 후에도 유례를 볼 수 없는 작품이었지만, 그 보다도 그 주제가 내포하고 있는 사조적인 면에서 의의있는 작품이었다. <홍길동전>은 무엇보다도 시대사조의 첨단을 가는 비판적이고 반항적이며 나아가 개혁의 꿈과 혁명의 이상을 안은 근대의식의 속성을 보여 준 점에서 당시 사회에 있어서 의미있는 작품이었다. <홍길동전>은 당시의 봉건체제 하의 여러 가지 사회적 모순에 대한 <홍길동>이란 양반 인텔리겐치아의 저항을 보여준 작품이다. 고질화된 가족제도의 엄격함에서 오는 인간성의 억압, 서얼 방한(庶孼防限)의 제도화에서 오는 사회적 불평등, 이들 일체의 중세적 모순에 대한 바항과 도전이 이 작품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홍길동은 작품의 허구적인 주인공이 아니라 당시 사회에서 필연적으로 탄생한 혁명적 반항아였으며 그것은 바로 작자 허균(許筠) 자신이었다. 허균은 서얼은 아니었다. 그리고 벼슬 못한 불만계급에 속한 사람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일찍이 천재적인 두뇌로 불교·유교에 통달하였고, 광해군 2년(1610)에는 사신을 따라 중국에 건너갔다가 천주교 12단을 얻어와 새로운 서양종교를 이 땅에 이식하는 등 당시로서는 선각자로서 시대의 첨단을 가는 사상가였다. 여기에서 그는 중세사회에 대한 과감한 개혁을 꿈꾸었고 중세기적 억압에 허덕이는 일반 민중에 대한 휴머니즘을 가지고 근대의식의 실현에 앞장 선 혁명가였다. 그러나 그는 결국 그의 꿈을 전혀 이루지 못한 채 광해군의 폭정에 항거하다가 광해군 10년 (1618)반역죄로 몰려 세상을 마쳤다. 이렇게 그의 사상은 실현을 보지 못했지만 작품 속의 그의 분신이었던 홍길동은 국외의 율도국에 이상향을 건설함으로써 그의 꿈을 실현하고 있고 이것은 그대로 작자 허균에게 있어서 만이 아니라 당시 사회의 모든 민중의 욕구를 대변한 것이라 할 때 이 작품이 갖는 시대사조상의 의의는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시가에 나타난 도학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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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歌-道學思想

이 시대에 있어서 유교의 도학사상은 당시의 척불숭유정책에 의해서 상하 정신문화계를 완전히 지배하고 있었고, 그 영향은 정치·사회·문화 일반뿐 아니라 문학에까지 침투하여 하나의 유파를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이른바 이들 도학파의 경향은 성정(性情)의 올바른 바탕에 터전을 두고 아무 사기(邪氣)없는 순수한 마음 상태에서 선(善)과 참을 말하고 인간의 올바른 도(道)를 노래하며 그런 가운데 달관의 경지를 보여 주는 것은 그 주된 특징으로 삼고 있었다. 이러한 도학파의 문학은 주로 가사(歌辭)나 시조(時調)를 즐겨 쓰는 형식으로 이용하였으며 주세붕(周世鵬)의 <도동곡(道東曲)>, 조식(曹植)의 <권선지로가(勸善指路歌)>, 이황(李滉)의 <도산12곡(陶山十二曲)>, 이이(李珥)의 <고산9곡가(高山九曲歌)> 등이 여기에 속하는 작품들이었다. 한편 도학가류의 문학에서는 오륜(五倫) 등 인륜 도덕을 주로 교화적인 입장에서 교훈적으로 노래하여 사회나 민심을 바로잡고자 하는 목적의식을 내포하고 지어진 것도 상당히 많았다. 또 이들 도학파의 특징으로서 두드러진 경향은 유난히 자연을 노래하고 자연 속에 몰입하여 자연에 파묻혀 유유자적하는 등 자연미를 즐겨 노래하는 풍이 크게 일어나 시가의 한 갈래를 형성하였다. 맹사성(孟思誠)의 <강호4시가(江湖四時歌)>, 가사의 효시인 정극인(丁克仁)의 <상춘곡(賞春曲)>, 김구(金絿)의 <화전별곡(花田別曲)>, 송순(宋純)의 <면앙정가> 등이 여기에 해당하는 작품이거니와 조선 3대 시가인이라 할 정철(鄭澈)·박인로(朴仁老)·윤선도(尹善道) 등의 대부분의 시가도 같은 경향의 것들이었다.

군담소설에 나타난 서민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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軍談小說-庶民意識

이 시기의 말기에 나타난 소설문학으로서 임진왜란 이후에 쏟아져 나온 일군의 소설은 당시의 시대 상황이 임진왜란의 참상을 겪고 난 뒤였음으로 왜적에 대한 적개심과 이에 따르는 애국심의 고취, 그리고 전란을 통하여 빛나는 공을 세운 민족의 영웅들에 대한 찬양과 그들의 굳은 절의(節義)를 추켜 세우는 내용을 주로 그 주제로 한 소위 군담소설이었다. 탁상공론으로 정쟁(政爭)만을 일삼다가 전란의 참화를 자초한 부패한 위정자들에 대한 비판과 야유도 곁들였던 것이다. 이들 군삼소설은 허황된 점이 없지 않았고 사실을 그대로 서술하거나, 중국 <삼국지연의>를 모방하여 독창성이 다소 결여된 단점이 없지 않았으나 그 주체적인 면에서는 주체적인 민족의식을 고창하고 조국과 민족에 대한 애국사상을 일으키는 등 민족서사시적인 걸작도 많았다. 명장·명승들이 침략해온 왜적을 모조리 무찌르고서 결국은 사명당(泗溟堂)이 왜왕에게 항서를 받아 부자지국의 관계를 맺는다는 <임진록(壬辰錄)>이 그 대표적인 작품인 바 그 외에도 <유충렬전(劉忠烈傳)> <임경업전(林慶業傳)> <조웅전(趙雄傳)> 등이 있다.

용비어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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龍飛御天歌

세종 27년(1445)에 편찬한 조선왕조의 창업송영가(創業頌詠歌). 세종의 명으로 권제(權題)·정인지(鄭麟趾)·안지(安止) 등이 세종의 선조 6대(穆祖∼太宗)가 조선왕조를 일으킨 사적을 노래로 읊어 찬진한 것으로 대체로 첫수에 중국 역대왕의 위적(偉蹟)을 읊고, 다음 수에 조선의 사적을 읊어서 전부 125장 10권으로 구성했다. 여기에 나타나 있는 사상을 요약하면 (1) 조선의 건국은 천명(天命)에 의하여 왕도(王道)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다. (2) 세종의 6대 선조는 모두 중국의 성왕(聖王)·명군(名君)의 지덕을 갖춘 성군(聖君)들로 백성을 위해 대업을 완성한 것이다. (3) 이러한 건국정신을 배워 후손이나 백성은 사직을 보전하고 좋은 정치를 베풀어야 한다. (4) 조선의 건국은 중국의 왕도정치를 실현한 것으로 그 근거와 명분을 중국적인 것에 둔다.

악학궤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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樂學軌範

조선 성종 때 장악원(掌樂院)에 있던 의궤(儀軌)·악보를 정리하여 편찬한 악서(樂書). 왕명을 받들어 성현(成俔)·유자광(柳子光)·신말평(申末平) 등이 성종 24년(1493)에 완성, 광해군 2년(1610)에 악서청(樂書廳)을 설치, 중교(重校) 간행하였다. 아악(雅樂)·당악(唐樂)·향악(鄕樂)으로 구분, 악률(樂律)의 원칙과 용법, 악기·의물(儀物)의 제도, 춤·가곡의 범절을 쓰고 제사·조회·향연 등에 쓰는 음악을 집대성하였다.

서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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徐居正 (1420∼1488)

조선 전기의 문학자. 세종 26년에 식년문과에 급제, 세조 2년에 문신정시(文臣庭試)에 장원, 세조 6년에 명나라에 가서 그곳 학자들과 시(詩)를 논하여 해동의 기재(奇才)라는 찬탄을 받았다. 세조 때 <경국대전> <동국통감(東國通鑑)>, 성종 때 <동국여지승람>의 편찬에 참여했고, 왕명으로 <향악집성방>을 국역하였다. 그는 시화(詩話)의 백미인 <동인시화(東人詩話)>와 <동문선(東文選)>을 남겨 신라 이래 조선초기에 이르는 시문을 선집, 한문학을 대성하였고, 그의 소설류 저작인 <태평한화골계전(太平閑話滑稽傳)>은 여말선초(麗末鮮初)의 고관·문인·승도(僧徒) 사이에 유전되던 해학적 일화를 수록한 것으로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풍자성과 해학성을 보여준다.

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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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堧 (1378∼1458)

조선 세종 때의 음악가·민요 수집가. 초명은 연(然), 자는 탄부(坦夫), 호는 난계(蘭溪). 태종 5년에 문과에 급제, 세종 1년에 악학별좌(樂學別座)에 임명, 세종 9년 편경(編磬) 12개를 제작, 자작(自作)한 12율관(律管)에 의거, 정확한 음률을 연주케 하였고, 3년 후에는 조회(朝會)시 향악(鄕樂)의 사용을 폐지하고, 그 대신 아악(雅樂)을 실행케 하였다.

그는 궁정음악을 아악 중심으로 전면 개편하였고, 널리 가곡을 수집하여 그 중에서 유교적인 성정(性情) 가운데서 출발하여 인륜(人倫)·세교(世敎)에 관한 것을 정풍(正風)으로 하고, 그 밖에 남녀상열(男女相悅)하고 음유간익(淫遊姦匿)·정욕무치(逞欲無恥)하여 강상(綱常)에 부끄러운 것은 변풍(變風)으로 하라고 주장하였다. 즉 그는 도덕에 맞는 것과 안 맞는 것을 분류 보존하자고 하여 당시의 유교적인 예술관에 융통성을 보였고, 중국의 채시법(採詩法)을 채택하도록 하였다.

김시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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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時習 (1435∼1493)

조선전기의 학자·문인.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 자는 열경(悅卿), 호는 매월당(梅月堂)·동봉(東峰)·청한자(淸寒子)·벽산(碧山)·췌세옹(贅世翁). 김반(金泮), 윤상(尹祥)의 문인. 세조 1년 삼각산 중흥사(重興寺)에서 공부하다가 세조의 왕위찬탈에 격분, 책을 불사르고 중이 되어 이름을 설잠(雪岑)이라 하고 방랑생활을 하였다. 세조 4년 <탕유관서록후지(宕遊關西錄後志)>, 세조 6년 <탕유관동록후지>, 세조 9년 <탕유호남록후지> 등을 저작하였고, 불경언해에 참여하였다. 다시 경주 남산에서 독서, 세조 14년에 <산거백영(山居百詠)>, 성종 7년에 <산거백영후지>를 쓰고, 1481년 47세로 환속, 성종 16년에 <독산원기(禿山院記)>를 썼다. 절개를 지키면서 불교·유교·도교의 정신을 아울러 포섭한 사상과 탁월한 문헌으로 일세를 풍미했다. 시호는 청간(淸簡)·저서에 <금오신화(金鰲新話)> <매월당집> <10현담요해(十玄談要解)> 등이 있다. 그의 사상을 요약하면 (1) 불의(不義)·부정과의 타협이란 있을 수 없다. (2) 회개한 자는 용서하되 그의 죄업에 협조할 수는 없다. (3) 소설의 소재를 우리 주변에서 찾는다. (4) 현실의 질곡을 벗어나 영원한 신비의 세계를 추구한다. (5) 인간의 욕망과 노력과 언행은 모두 불완전하고 덧없는 것이다. 요컨대 그는 결국

유교적인 교양에서 출발하여 불교·도교적인 인생관에 도달하고, 평생 동안 허무(虛無)의 심연 속에서 살았던 것이다.

정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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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澈 (1536∼1593)

조선의 문신·시인. 자는 계함(季涵), 호는 송강(松江), 기대승(奇大升)·김인후(金麟厚)·양응정(梁應鼎)의 문인. 1562년(명종 17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장원급제(壯元及第)하고 지평(持平)·수찬(修撰)을 거쳐 선조가 즉위하매 전랑(銓郞)이 되고 직제학(直提學)·사간(司諫)·승지(承旨)를 거쳐 좌의정에 올랐다. 이 때는 동서(東西)의 당이 나뉘어 정철은 서인으로서 동인에게 배척을 받았다. 파란중첩한 당쟁의 와중에서 부침(浮沈)하면서 여러번 옥사(獄事)를 안치(按治)하게 되니 자연 득방(得謗)이 많았다. 그는 천성이 충효강직(忠孝剛直)하며 또 감정에 승한 편이며, 이러한 성품은 애군(愛君), 우국(憂國)의 지정(至情)으로 나타나 시가 속에 주옥 같이 빛나고 있다. 그의 가사는 종래의 한자어투를 벗어나 3·4조의 운율에 의하여 자유자재로 우리말을 구사했다. 그는 조선시대의 시가사상(詩歌史上)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와 더불어 쌍벽(雙璧)으로 일컬어진다. 1580년 강원도 관찰사로 있을 때 그의 최초의 가사(歌辭) <관동별곡(關東別曲)>을 지었으니 이는 금강산을 비롯한 관동8경을 두루 유람하면서 산수(山水)를 노래하고 고사(故事)·풍속까지 삽입하였다. 또한 백성의 교화(敎化)를 위하여 시조의 형식을 빌어 <훈민가(訓民歌)> 16수를 지었고, 창평(昌平)에 낙향해 있는 동안 우시연군(憂時戀君)의 <사미인곡(思美人曲)> <속사미인곡(續思美人曲)> <성산별곡(星山別曲)> 등을 지었고, 이외에 <장진주사(將進酒辭)> 등 수많은 가사와 단가를 지었다.

허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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許筠 (1569∼1618)

조선중기의 문신·소설가. 자는 단보(端甫), 호는 교산(蛟山)·성소(惺所)·백월거사(白月居士). 선조 27년 정시문과, 선조 30년에 문과중시에 급제, 황해도 도사(黃海道都事)·전적(典籍) 등을 역임, 1606년 명나라 사신을 영접, 명문장으로 이름을 떨쳤으며, 숭불(崇佛)죄로 파직당한 적도 있다. 1609년(광해군 1년) 형조참의가 되고, 다음해 진주부사(陳奏副使)로 명나라에 가서 천주교(天主敎) 기도문을 얻어 왔다. 1614, 1615년에 2차 명나라에 다녀오고 1617년에는 폐모론(廢母論)을 주장하는 대북(大北)파에 가담, 혁명계획을 진행시켰다. 1618년 하인준(河仁俊) 등과 혁명을 모의하다가 탄로되어 참형당하였다. 시문(詩文)에 뛰어난 천재로 그의 소설 <홍길동전(洪吉童傳)>은 사회제도의 모순을 비판한 조선시대의 대표적 걸작이다. 그의 저서 <교산시론(蛟山詩論)> <성소복부고> <한년참기(旱年讖記)> <홍길동전> 등을 통하여 그의 사상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서얼(庶孼) 차별은 모순된 제도이므로 타파되어야 한다. (2) 중앙의 역신(逆臣), 지방의 수령(守令)들의 탐학에 못견디는 민중의 혁명은 정당하고 불가피하다. (3) 귀족적·허식적인 유교의 문례(文禮)보다는 평민적이고 초탈한 불교 참선의 경지가 낫다. (4) 유교윤리의 대부분은 부당한 계급질서와 특권층의 자기합리화를 위한 방편이니 그런 것에 구애받아 개성을 죽일 필요는 없다. (5) 큰 사원의 토호행세, 탐관오리의 행패를 응징하고 서얼계급을 해방시키는 혁명을 일으킨다.

윤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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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善道 (1587∼1671)

조선의 문신·시인. 자는 약이(約而), 호는 고산(孤山)·해옹(海翁), 본관은 해남(海南). 1612년(광해군 4년) 진사가 되어 성균관의 유생으로 권신 이이첨(李爾瞻) 일당의 횡포를 상소 청죄(請罪)하다가 경원(慶源)에 안치(安置) 당하여 오랫동안 유배생활을 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석방,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가 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해남(海南)에 내려갔다. 1628년(인조 6년)에 봉림(鳳林)·인평(麟平) 양대군(兩大君)의 사부(師傅)가 되고 이어 호조좌랑(戶曹佐廊)·한성부서윤(漢城府庶尹)을 역임했으나 다시 낙향하여 해남에 돌아갔다. 1636년(인조 14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그는 향리(鄕里)의 자제(子弟)와 가동(家童) 수백명을 모아, 배를 타고 수천 리 해정(海程)에 주야를 가리지 않고 강도(江都)로 향발(向發)했으나 배가 도착하였을 때는 벌써 강화도가 함락된지 수일이 지난 뒤였다. 남한산성으로 가려던 차에 임금이 항복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분노와 치욕을 이기지 못하여 두 번 다시 이 세상을 나오지 않을 각오로 탐라로 배를 몰아가다가 보길도(甫吉島)에 다달았다. 이곳은 천석절승(泉石絶勝)한 상외(想外)의 가경이었다. 이 곳을 부용동(芙蓉洞)이라 명명하고, 낙서재(樂書齋)를 세우고 자의음영(恣意吟詠)하면서 세상을 잊으려 하였다. 때때로 유배를 당하는 고역을 겪다가 낙서재에서 졸하였다. 그는 치열한 당쟁으로 인생을 거의 벽지 유배소에서 보냈으며 그 동안의 작품은 <고산유고(孤山遺稿)>에 수록되어 있으며 특히 <견회요(遣懷謠)> <산중신곡(山中新曲)> <속산중신곡(續山中新曲)> <어부사시사(漁夫四時詞)> 등이 유명하다. 윤선도는 당시 한문의 밀림 속에서 한글의 아름다움을 발견했으며 한글을 예술적으로 순화 앙양하였다. 앞서 정철이 이미 가사를 통하여 더 없이 아름다움을 밝혀 놓았으나 윤선도에 이르러 더 깊고 넓게 파고 캐내어 그 아려(雅麗)함을 간명하게 했다. 또한 수사(修辭)와 기교(技巧)에 있어서 새로운 발견을 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장가(長歌)에 있어서는 정철이 뛰어났으나 윤선도는 단가에 있어서 절정을 이루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