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동양사상/한국의 사상/조선전기의 사상/조선전기의 사학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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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전기의 사학사상〔槪說〕[편집]

조선전기의 역사사상은 편사의식(編史意識)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왕조의 실록편찬과 함께 <고려사>편찬 등 관찬(官撰)과 사찬(私撰)이 민족사의 입장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고려 때 거란과 몽고의 침입으로 국난을 당한 후 국사의식(國史意識)이 성장됨에 따라 각종 역사서적이 편찬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문화의식의 성장과 함께 중국 역사서적의 자극을 받아 민족사에 대한 의식이 크게 자라나 각 왕대 별로 실록편찬을 비롯하여 <동국사략(東國史略)> <역대병요(歷代兵要)>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 <역대년표(歷代年表)> <동국통감(東國通鑑)>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해동성씨록(海東姓氏錄)>등 사서(史書)가 간행(刊行)되었으며, 특히 <동국통감>은 민족사서(民族史書)로서 큰 의의를 지니고 있다. 민족사서의 편찬에 중국의 역사서적이 끼친 영향은 상당히 컸다. 이는 <동국통감>의 서문에 잘 나타나 있으니, 즉 <자치통감(資治通鑑)>은 '사가(史家)의 지남(指南)'이라고 밝히고 있다. 건국 후 3왕(三王)이 계승하여 문치에 힘써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가 이루어졌다. 세조는 경사(經史)에 유의하여 신하에게 "동방에 비록 제사(諸史)가 있으나 <자치통감(資治通鑑)>에 비교할 만한 장편의 통감이 없다" 했는데, 사(史)를 교정케 하였다는 이극돈(李克墩)의 서문에는 우리 역사 편찬의식이 잘 나타나 있다. 또 서거정(徐居正)이 <동국통감>을 올리는 글에서도 <통감>, 주희(朱憙)의 <통감강목(通鑑綱目)>, 강용(江鎔)의 <통감절요(通鑑節要)>, 유섬(劉剡)의 <통감절요(通鑑節要)>의 예를 들고, 우리나라의 역사도 장구하여 단군은 당요(唐堯)와 같은 시기의 인물이라 하였다. 태조 때에는 "한고조(漢高祖)가 진(秦)나라 도서(圖書)를 수습(收拾)하고, 당 태종이 수(隋)나라 전적(典籍)을 구입한 선례를 따라서 사국(史局)을 설치하여 각종 사서(史書)들을 편찬한 바 있는데, <동국통감(東國通鑑)>의 경우 "범례(凡例)는 <자치통감>을 모방하고, 대의(大義)는 <춘추(春秋)>를 규범으로 삼았다"고 한다. 서거정도 이와 거의 같은 내용의 글을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를 올리는 글에서 밝혔다. 중국 사서 중에서도 <자치통감>에 대한 관심은 상하를 막론하고 대단히 컸다. 통감이 집약된 것이라 할 강용(江鎔)의 <통감절요>가 널리 애독되었다. 세조 때에 학문에 공이 컸던 최항(崔恒)은 "통감은 사학(史學)의 종지(宗旨)이며 마땅히 먼저 알아야 될 것"이라고까지 강조하였다. 통감은 치도(治道)에 있어서 귀감(龜鑑)과 같이 밝다는 뜻으로서 교훈적인 의도에서 편찬된 것인데 조선초기 각종 사서가 편찬됨에 있어서 교훈적인 의도가 강하게 작용했다. 정인지가 <고려사>를 끝낸 후 올린 글에는 국왕이 기왕에 있었던 흥망성쇠를 살펴보는 것은 장래에 대해 훈계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 데 따라 <고려사>를 지어 올린다고 그 이유를 밝혔다. 세조는 왕세자의 교육이 국가대사라고 지적한 다음 세자를 교훈하는 데 선왕의 실록과 경사(經史)를 광범위하게 살펴서 규범으로 삼을 것과 경계할 것을 자세히 살펴서 올리도록 양성지(梁誠之)에게 명령하였다. 또 기왕에 있었던 흥망성쇠는 좋은 점이나 나쁜 점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마땅하다는 서거정(徐居正)의 말은 역사편찬이란 중요직책을 맡아본 사람들이나 왕의 태도에서 잘 파악할 수가 있다. 건국초기에 권근(權近)이 김부식의 <삼국사기>를 대본으로 <동국사략(東國史略)>을 편술할 때에도 절의(節義)를 포상하고 참란(僭亂)을 근절하는 엄격하고 교훈적이고 주관적인 입장에서 역사편찬을 하였음을 살펴볼 수 있다. 이처럼 조선건국 후부터 역사사상이 강조되는 편사의식(編史意識)이 강하게 나타난 이유 중에는 유교정책이 강화되면서 사풍(士風)이 진작되며 정통론(正統論)이 강조되어 관찬물(官撰物)로서의 실록을 비롯한 각종 사서편찬에 이어 개별적으로도 역사의식이 강하게 나타났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중국의 역사에는 밝으나 우리의 사적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데 대한 반성적인 면이 나타났다. 서거정이 성종 때 경연에서까지 교양인, 사류(士類)라 할지라도 우리나라 역사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하는 상태이니 <동국통감>을 만들어 이를 깨우쳐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오랜 역사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사서(史書)가 구비되어 있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한 데에는 당시 지도층에 있어서 민족사서(民族史書)의 필요성이 공감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특히 서거정이 우리나라에 태어 났으니 불가불 우리의 사적을 알아야 되겠다고 한 말은 우리의 역사편찬의식을 잘 나타낸 것이라 보겠다. 확실히 조선건국 후에 들어와서 민족사에 대한 역사의식이 강조됨에 따라 편사의식도 강하게 나타났다. 그래서 <왕조실록>을 비롯한 편년체와 강목체(綱目體)로 된 각종 통사와 시대사, <역대병요> <해동성씨록> <동국여지승람>등 특수한 서적도 편찬되었다. 이같은 사서 편찬의식의 고조로 역사교육이 중요시되어 민족사 편찬과 교육의 열성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양성지는 세조 9년에 민족사 교육을 강화하는 일환으로 예문겸관(藝文兼官) 20명을 정선하여 5명씩 4부로 나누어 일부는 <주역(周易)> <역학계몽(易學啓蒙)> <성리대전(性理大全)>, 2부는 <춘추(春秋)> <좌전(左傳)> <호전(胡傳)> <사기(史記)> <전한서(前漢書)>, 3부는 <통감강목> <통감속편> <송원절요(宋元節要)>, 4부는 <삼국사기> <동국사략(東國史略)> <고려전사(高麗全史)>를 각각 담당케 했는데, 어느 분야에 속하든 4서(四書) 즉 <시전(詩傳)> <서전(書傳)> <예기(禮記)>를 겸하여 익히게 하였으며, 1일과 15일에는 전강(殿講)케 하고, 세 번 다 정통한 자는 특별히 가자(加資)케 하며, 불통자(不通者)는 좌천시켰다. 그래서 중국사뿐만 아니라 우리 민족사도 똑같이 힘쓰기를 강력히 주장하였다. 이같은 민족사의 편찬의식이나 교육의 강화는 <세종실록지리지>의 완성, 또는 <동국통감>에 단군신화 등 고조선의 내용도 기록하여 민족사를 당요(唐堯) 때까지 끌어 올리며 민족사의 강화와 역사서술을 발전시켰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뒤 서양세력의 접근과 함께 새로운 세계의 지식이 청국을 통하여 들어오면서 실학자가 대두되어 우리의 것을 알아야 되겠다는 뜻에서 민족사를 강조하는 경향은 더욱 뚜렷하여졌다.

고려사[편집]

高麗史

고려 34왕 475년간의 정사(正史). 조선개국후 태조의 명을 받아 정도전(鄭道傳), 정총(鄭摠) 등이 <고려역대실록>과 민지(閔漬)의 <강목(綱目)>, 이제현(李齊賢)의 <사략(史略)> 및 이색(李穡)의 <금경록(金鏡錄)> 등을 참고하여 37권을 편찬하였으나, 이때 것은 편년체(編年體)로 된 조잡한 것이었다. 태종 때의 교정을 거쳐 세종 때 왕명으로 정인지(鄭麟祉)·김종서(金宗瑞) 등이 개찬(改撰), 1451년에 완성, 1454년(端宗 2년)에 출판에 착수하였다. 체제는 중국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를 본따 세가(世家)·지(志)·표(表)·열전(列傳)의 4부분으로나누어 기전체(紀傳體)로 서술하였다. 이것은 관(官)에서 편찬한 정사(正史)로 조선개국을 합리화하는 방향으로 다소 왜곡(歪曲)된 기술을 보이나 고려시대의 근본 사료에 의거해 썼다는 점에서 사료로서의 가치가 크다.

고려사절요[편집]

高麗史節要

조선 문종(文宗) 때 완성한 고려의 편년사(編年史). <고려사>가 기전체인데 대하여 독자적인 편년체를 취하였고, <고려사>에 없는 많은 자료를 포함하고 있다. 김종서의 감수를 거쳐 1452년에 완성되었다.

조선왕조실록[편집]

朝鮮王朝實錄

조선시대의 역사를 임금을 단위로 하여 기록한 것. 현재 남아있는 것은 태조에서 철종(哲宗)에 이르는 25대의 실록 중 총 1,893권 888책의 원본이 있다. 이 실록시술의 특징은 (1) 비교적 독립적인 입장에서 사초(史草)·시정기(時政記) 등을 기록한 사관(史官)의 사초(史草)를 정리 수록한 것이라는 점과 (2) 반정(反正)·혁명에 의해 폐위당한 왕대의 기록을 실록이라 하지 않고 '일기(日記)'라고 한 점. (3) 사색당쟁이 격화됨에 따라 정변이 있을 때마다 수정·증보·개서가 수차 있었다는 점. (4) 편찬 직후에 정세에 따라 사초(史草)의 필화(筆禍)를 일으키기도 했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징비록[편집]

懲毖錄

조선 선조 때의 명신 유성룡(柳西龍)이 쓴 임진(壬辰)·정유(丁酉)왜란의 기록. 1600년경에 집필하여 인조(仁祖) 56년 경에 간행·유포되었다. 1592∼1598년간의 기사로 <징비록> 상·하 2권, <근포록(芹曝錄)> 2권, <진사록(辰巳錄)> 10권, <군문등록(軍門謄錄)> 2권으로 되어 있다. 이 책의 특징은 (1) 임진왜란의 경험을 거울삼아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미리 징계하여 후환을 경계함>을 취지로 하였다는 점, (2) 전투경위 이외에 난중의 식량문제, 명군(明軍)과의 교섭경위, 난중의 민정(民政) 실태 등을 상세히 다루었다는 점, (3) 당시의 당쟁·공리공론으로 인한 정부의 무방비·무정책·무기력을 비판하였다는 점, (4) '국가는 인심(人心)에 의지해 유지될 뿐이다'라 하여 민심(民心)의 국가관·역사관을 밝혔다는 점, (5) 인심을 청정(淸定)시키는 방안을 '계(啓)'로써 수록하였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동국통감[편집]

東國通鑑

조선 성종 때 편찬된 우리나라 역사서. 세조 때 착수하였으나 완성을 못보고, 성종 15년(1484)에 서거정(徐居正)·정효항(鄭孝恒) 등이 편찬, 신라초부터 고려말까지를 편년체(編年體)로 엮었다. 중국 사마광(司馬光)의 <자치통감(資治通鑑)>을 본따고, <삼국사기> <삼국유사>, 기타 중국의 자료를 참고하여 저술하였다. 내용은 삼국시대·고려시대 1,400여 년간의 국토의 이합(離合)·명교(名敎)·난적(亂賊) 등의 사적을 쓰고, 단군·기자·위마의 고삼선(古三鮮) 및 한사군·삼한(三韓) 등을 외기(外記)로 하여 책머리에 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