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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전기의 도참사상〔槪說〕[편집]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천도문제를 중심으로 지리도참설이 또다시 대두하게 되었다. 태조는 개경에서 즉위했지만 개경은 망국(亡國)의 기지(基地)라 하여 자신이 급히 천도를 서둘렀다. 처음에는 한양을 신도(新都)로서 경영했는바 공주 계룡산을 후보지로 건의하는 사람이 있었다. 태조는 그 건의에 의하여 친히 그곳에 가서 상지(相地)하고 신도 경영에 착수하다가 얼마 아니되어 그곳을 버리고 다시 도참설(漢水가 明堂에 들어간다는 설)에 의하여 서울의 서쪽인 무악(毋岳) 남쪽(지금의 연희동·신촌 일대)을 신도의 지(地)로 답사했으나 그곳이 너무 협착하다 하여 결국 다시 한양으로 정하게 되었다. 한양은 위에서 이미 말한 바와 같이 고려시대의 남경으로서 공민·공민왕 양대(兩代)에도 도참설에 의해서 그곳에 대한 천도론이 자주 일어났다. 이 한양 천도는 소위 방석(芳碩)의 난 후인 정종(定宗) 즉위 원년에 일관(日官)의 주청에 의하여 개경으로 환도 하였던바 태종이 즉위하자 천도문제가 재기되어 태조 때와 거의 비슷한 상태를 이루었다. 즉 태종(太宗)은 부왕(父王)이 정한 한양(漢陽) 신도(新都)로 돌아가는 것이 좋다고 하고 지관(地官) 중에는 역시 도참설(圖讖說)에 의해서 무악(毋岳) 남쪽이 좋다 해서 상택(相宅)하기까지 했지만 역시 그곳이 협착하다 하여 결국은 한양 신도로 환도(還都)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한양으로 천도한 태조은 본래 유교주의의 군주로서 미신타파를 주로 하여 여조(麗朝) 이래 인심을 무혹(誣惑)케 하던 비기 도참류의 서책을 모두 불질러 없애게 하였다. 이것은 태종의 치적 중 가장 높이 평가할 만한 영단이었다. 이 뒤로부터 여말(麗末) 국초(國初)에서와 같이 도참설이 유행하지는 않았고 단지 때에 따라 단편적인 조작이 행해졌다. 예를 들면 중종(中宗) 때의 도학 정치가인 조광조(趙光祖) 일파들이 조정에 등장하여 유신정치(維新政治)를 행하려 했을 때 그들은 소인·군자론을 되풀이하여 자기네와 뜻이 맞지 않는 일파를 소인이라고 하자 반대 편에서는 원한을 품게 되었고, 이 일파(반대파)를 대표하는 남곤(南袞)·심정(沈貞)은 홍경주(洪景舟)와 더불어 궐내에 유언비어를 퍼뜨리기를 "일국의 인심이 모두 다 조씨(광조)에게로 돌아간다"하고 마침내 동산 나뭇잎에 감즙(甘汁)으로써 "주초위왕(走肖爲王:조씨가 왕이 된다는 설)"이란 네 글자를 써서 벌레가 먹어 글자를 이루자 궁인으로 하여금 잎을 따서 왕에게 바쳤다. 주초는 즉 조자(趙字)의 파획(破 )이려니와 이는 여말·국초에 유행하던 비기 가운데 "목자장군검(木子將軍劍)이요, 주초대부편(走肖大夫鞭)"을 이용한 것이다. 왕은 결국 이들 일파의 음모에 속아 광조 등을 참혹한 화에 빠뜨리는 기묘사화(己卯士禍)를 일으켰던 것이다. 기묘사화를 포함하는 4대사화 끝에는 당쟁이 벌어지게 되었는데 당쟁은 선조 8년에 동서분당(東西分黨)으로써 터지게 되었다.

이즈음 전주(全州)의 유자로서 언변이 뛰어나고 풍채가 좋은데다 고금에 통달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 유명한 정여립(鄭汝立)이었다. 그는 일찍이 사림(士林) 사이에 명성이 높아 특히 율곡 이이(李珥)의 사랑을 받아 그 문하에 출입하더니 이이가 죽은 후로는 동인(東人)에 아부하여 동인이 미워하던 이이를 헐어 말했다. 그리하여 그는 동인의 힘으로 수찬(修撰)이란 벼슬을 얻었는데 그 심술을 간파한 선조의 눈에 벗어나자 그는 곧 벼슬을 버리고 전주로 돌아가 강학을 칭탁하고 향중 내지 타처의 여러 무리들(유자·무사·승려 기타 잡배)을 모아 대동계(大同契)란 비밀결사를 조직하였다. 그래서 그는 때로 무예를 단련하는 한편 당시 유행하는 비기 참설로 인심을 현혹케 하며 장차 대란을 일으켜 자기의 천하를 만들려고 큰 음모를 꾸몄다. 그때 비기 참설의 내용은 즉 '목자망 전읍홍(木子亡 奠邑興-이씨는 망하고 정씨가 일어난다)'이란 것인데 이는 일종의 역운설(曆運說)로서 조선왕조가 중쇠기(中衰期)에 처한 것을 이용하여 조작된 참설이었다. 그러나 여립(汝立)의 음모는 사전에 누설되어 본인은 도망하여 자결하고 그 도당도 많이 잡혀 죽고 혹은 귀양갔던 것이다. 그런데 이씨가 망하고 정씨가 일어난다는 참설은 후일에 <정감록(鄭鑑錄)>이란 비기서 중에 수록되어 조선왕조 말기까지 오랫동안 인심을 지배하여 왔었다. 정여립 사건이 발발한 지 몇 해 안 되어 임진왜란 일어났다. 다행히 나라를 패멸에서 건진 후 십여 년에 후에 광해군(光海君)이 즉위하였는데 이때 도참가 이의신(李懿信)은 "도성(서울)의 왕기가 이미 쇠진하였으니 교하(交河)로 천도하는 것이 좋다"고 건의하였다. 그러나 유신들의 반대로 인하여 실현되지 못하고 말았다. 광해군 8년에는 술승(術僧) 성지(性智)가 "인왕산(仁旺山)하에 왕기(王氣)가 있다"고 하여 사직(社稷) 근처에 신궁을 일으킬 것을 건의하였고, 이듬해에는 도참가 김일룡(金馹龍)이 "색문동(塞門洞:과거 서울고등학교 자리)에 역시 왕기가 있다"고 하여 신궐을 일으킬 것을 청하였다. 왕은 이들의 말에 움직여 지금 사직동에 인경궁(仁慶宮)을 짓고, 또 과거 서울고등학교 자리에는 경덕궁(慶德宮)을 지었는데, 이 자리는 왕의 이모제(異母弟)인 정원군(定遠君)의 옛 집으로 이를 빼앗아 궁을 일으킨 것이었다. 후일 왕(광해군)이 쫓겨나고 대신 정원군의 아들인 인조가 즉위한 것을 생각하면 퍽 아이러니컬하다 하겠다. 위에서 말한 <정감록>이란 책은 어느때 누가 저술한 비기인가를 추증해 보자. 정감록은 흔히 <정감록(鄭鑑錄)>이라고 쓰는데 혹은 <정감록(鄭堪錄)>이라고 쓰여진 것도 있다. 정감은 인명이라고 하나 실제 어느 때 인물인지 자세히 알 수 없다. 단 선조 때로부터 광해(光海)·인조(仁祖) 시대에 걸쳐서 정감(鄭鑑)이란 실제 인물이 있었으나 과연 이 사람의 소작이라고 할 수 있는지 그것이 문제이다. 이 실제 인물인 정감은 당시에 비인격자(非人格者)로서 낙인을 찍힌 사람이었으므로 세상 일반에 대한 증오감을 가지고 인심을 현혹케 하는 비기류(秘記類)의 참설을 편찬한 것이 아니었던가 하는 의심이 난다. 그러나 좀더 후고(後考)를 요한다. <정감록>이란 비기가 실록에 나타난 것은 영조 15년(1739)에 불과하나 그 저술은 이미 이 이전에 되었던 것으로 보아야 하겠다. 이때 특히 서북 지방의 사람들이 이 <정감록>중의 참설을 서로 퍼뜨리고 있으니 그것을 몰수해서 불질러 없애자는 조신들의 주장까지 있었다. 그러나 영조는 진시황처럼 분서(焚書)는 싫다고 하여 그 주장을 좇지 않았다. 그후 정조(正祖) 9년, 김두공(金斗恭) 등의 모역사건 때에도 역모인들은 <정감록>중에 "우리나라가 600년을 지낸 뒤에는 백년전쟁이 일어난다"는 등의 문구를 이용하여 인심을 선동하였다고 한다. <정감록>의 내용을 보면 전사본(轉寫本)에 따라 조금씩 다르나 대개 종래에 내려오던 여러 참설류를 모아 놓은 것인데 그 중에는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정씨가 일어난다는 설과 진인(眞人)이 남방에서 온다는 설, 큰 난리가 일어난다는 설과 또 난리가 일어날 때는 '이재송송(利在松松) 이재궁궁(利在弓弓)' 등등의 말이 있고 절대 안전지로서 <10승지(十勝地)>를 열거한 것도 있다. 이것이 인심을 지배한 바가 커서 송송(松松)이 무엇인가 궁궁(弓弓)이 무엇인가를 해석하기에 정력을 허비한 사람도 많았고 또 가족을 이끌고 10승지를 찾아 이리저리로 이사 다니는 사람도 많았다. 이리하여 가산을 탕진한 사람도 한둘이 아니었다. 조선왕조 후기 중 특히 순조 시대에는 조정에 안동 김씨의 귀족세력이 뿌리를 박고 김씨의 일족으로 요직에 앉게 된 자가 많았다. 그리고 그 시대에는 지배층 자체 내에는 중상·참무·알력·배제·음모·구죄( 罪)·살륙 등 암담한 사실이 충만되어 있었다. 중앙의 정치 사회가 이 모양이므로 지방에 파견되는 관리 역시 청백한 사람은 별로 없고 대개 세력을 배경으로, 착취를 수단으로 하여 사복을 채우는 탐관오리가 많았다. 게다가 흉년이 자주 들고 유행병이 나돌아 백성들이 도탄에 빠짐에 민심은 날로 소란해졌다. 이 틈을 타서 민간에는 비기 참설의 종류가 유행하여 이것을 이용하여 국가를 저주하고 민심을 유혹케 하는 괘서사건(掛書事件) 즉 벽서사건(碧書事件)이 중앙·지방을 통해서 자주 일어났다. 예를 들면 순조 4년에는 황해도 안악인(安岳人) 이달우(李達宇) 등이 괴상한 가사(歌詞)로써 조정을 비방하고 인심을 선동한 일이 있었고, 또 같은 해에 상민(常民)의 재영(載榮)·성서(性西) 등이 결탁하여 <관서 비기(關西秘記)>란 것을 서울 4대문에 게재한 사건이 있었고, 동왕 19년에는 전라도 남평의 관노(官奴) 김재점(金在點) 등의 괘서사건이 있었고, 26년에는 청주인 김치규(金致奎)·박형서(朴亨瑞) 등의 괘서사건이 전후에 있었는데 청주의 괘서 내용은 국가를 저주하는 자못 불온한 참설과 유언을 나열한 것이라 하여 조정에서는 이 곳을 반역향(反逆鄕)이라 하여 청주목(淸州牧)을 강등하여 서원현(西原縣)이라 하고, 충청도를 개칭하여 일시 공충도(公忠道)라고까지 했다. 이와 동시에 순조 때에는 실제로 북에서 홍경래(洪景來)의 난이 일어났다. 그후 철종(哲宗) 말에는 진주를 중심으로 3정의 문란으로 민란이 일어났다. 이때 경주에는 최제우(崔濟愚)는 사상에 의한 개혁운동을 일으키고자 하여 종래 조선 사람이 믿어오던 천신사상, 기도의식에 유·불·선 3교의 사상 내지 약간의 도참적 요소를 가미하여 이름을 동학이라 하고 거기에 귀의할 것을 민중에게 부르짖었다. 이 동학의 도참적 요소의 가장 중요한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정감록>중의 '이재궁궁(利在弓弓)'을 이용하여 '궁을부적(弓乙符籍)'으로써 환자를 치료한 것이다. 즉 이 '궁궁을을(弓弓乙乙)'을 그린 부적을 살라 환자에게 먹이면 병마가 떨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편으로 민중의 귀의를 도모했다. 이로써 민중들의 귀의와 신앙이 더욱 컸던 것이다. 조선시대의 도참은 고려에서와 같이 그렇게 시종일관하게 유행하지는 않았지만 역시 시대와의 관련성이 크기 때문에 조선 왕조 후기와 같은 내부적으로 복잡한 시대를 당해서는 위와 같은 <정감록>이라든가 관서비기, 진정(眞淨)비기라든가 기타 여러 가지의 괘서사건과 각종의 민란이 뒤따르고 마침내 세상을 바로 잡겠다고 일어났던 것이 동학이었으나 동학사상 중에는 고급적인 요소도 있지만 저급적인 요소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결국 혹세무민(惑世誣民)의 도(徒)라 하여 무서운 탄압과 박해가 가해졌던 것이다. 그러나 그후 동학은 동학혁명을 거쳐 새로운 종교로 등장하였으니 그것이 즉 오늘날의 천도교인 것이다. 동학교도의 일파로 천도교와 갈라선 상제교(上帝敎)란 것이 있거니와 그 본부가 계룡산(鷄龍山)에 자리잡고 있었다. 상제교뿐만 아니라 각종 유사(類似) 종교단체가 계룡산을 본거지로 삼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정감록>중에는 정씨가 일어나면 도읍을 계룡산에 정한다는 설이 있기 때문에 이곳이 한 신비향(神秘鄕)으로 생각되어 온 것도 사실이다. 특히 일제 말기로부터 해방초에는 일시 각처에서 사람들이 구름과 같이 모여든 일도 있었다.

권중화[편집]

權仲和 (1322∼1408)

조선초의 학자·문신. 자는 용부(容夫), 호는 동고(東皐). 1353년 문과에 급제, 지신사(知申事)·정당문학(政堂文學)·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 등을 역임. 이성계를 도와 조선 개국에 참가하여 판문하부사(判門下府使)에 올라 명나라까지 다녀왔고, 1407년 영의정에 이르렀다. 고사(故事) 및 지리·복서(卜筮)·의학에 통달하여 우왕 3년(1377) 상지관(相地官)으로 뽑혀 철원을 살펴보고, 동왕 4년에 북소(北蘇) 궁궐의 구기(舊基)를 답사한 일이 있고, 태조 때에 전라도·양광도를 답사, <계룡산 도읍도>를 바쳐, 계룡산 신도론을 주장하였다. 한때는 한양공사를 중단시키고 계룡산 신도공사를 일으키기까지 하였으나 하륜(河崙) 등의 반대로 뜻을 못 이루었으며, 다음해에는 하륜의 무악천도론(毋岳遷都論)을 반대하여 한양천도로 낙착되게 했다. 그는 <향약간이방> <동국역대제현비록촬요>를 편찬하였다.

하륜[편집]

河崙 (1347∼1416)

조선초의 문신. 자는 대림(大臨), 호는 호정(浩亭). 시호는 문충(文忠). 고려말에 신돈(辛旽)의 비행을 공박하고, 최영(崔瑩)의 요동정벌을 반대, 조선 개국공신이 되었다. 그는 음양(陰陽)·의술(醫術)·성경(星經)·지리(地理)에 정통하여 태조 2년에는 권중화(權仲和) 등의 계룡산신도설을 변박(辨駁)하여 폐기시켰고, 다음해와 태종 4년에 혼자 무악(毋岳)천도설을 두 번이나 고집했으나 조신(朝臣)들의 반대로 뜻을 못이루었고, 중론이 한양천도(漢陽遷都)로 귀착하자, 여기에도 풍수지리설을 들어 반대하였다. 이 밖에도 대명(對明) 외교에 공을 세웠으며, 이첨(李詹)과 같이 <동국사략(東國史略)>을 편찬하였고, 1409년 군정(軍政)을 개정하고 <태조실록> 편찬을 지휘하기도 하였다.

정감록[편집]

鄭鑑錄

조선시대 중기 이후 민간에 성행하게 된 국가운명, 생민존망(生民存亡)에 대한 예언서(豫言書). 조선왕조의 선조 이담(李湛)이 정씨(鄭氏)의 조상 정감(鄭鑑)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기록한 책이라 하여, 조선왕조 이씨(李氏)의 흥망대세(興亡大勢)를 추수(推數)하여, 이씨의 한양(漢陽) 몇 백년, 정씨의 계룡산(鷄龍山) 몇 백년, 조씨(趙氏)의 가야산(伽倻山) 몇 백년, 범씨(范氏)의 완산(完山) 몇 백년 등등으로 왕좌가 바뀔 것을 논하고, 그 중간에 일어날 재난(災難)·화변(禍變)·민심(民心) 등을 예언하고 있다. 오늘날 세간에 전해지고 있는 것은 이 양인의 문답 외에 도선(道詵)·무학(無學)·토정(土亭)·격암(格庵) 등의 예언서 발췌를 포함하고 있다. 이것은 사상적으로 다음과 같은 영향을 끼쳤다. (1) 조선왕조가 정씨 혁명으로 교체된다는 예언은 민간 반란자들에 의하여 이용되었고, 기존 체제 비판과 새 시대 예언의 전거(典據)로 내세워졌다. (2) 정씨의 계룡산 도읍설은 피압박민중의 말세적 구세신앙으로 발전하여 많은 유사 종교에 채택되었다. (3) 재난이 있을 때의 피난처가 암호로 표시되어 있어 서민들은 변란이 있을 때마다 이것을 자기류로 해석하여 구명처를 모색하였다. (4) 한양의 지덕과 계룡산의 지덕이 운위되어 때로는 신도읍지가 거론되고 천도설이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났다. (5) 이것은 이씨 왕조체제를 비판하는 서민 대중의 소박한 혁명종교로 발전하여 동학(東學) 혁명에까지 연결되었다.

계룡산 신도설[편집]

鷄龍山新都說

조선초에 한양신도 공사를 중단케 한 계룡산 신도 택지론. 태조 2년 태실증고사(胎室證考使) 권중화(權仲和)가 전라도·충청도 일대를 답사하고 돌아와 길지로 전라도 진동(珍同)현과 양광도(楊廣道) 계룡산을 선정하고 <계룡산 도읍도(鷄龍山都邑圖)>를 바쳐 태조가 그의 주장을 따라 한양공사를 중단시키고 계룡산세를 직접 살펴보고 신도로 택정하여 공사를 벌였으나 하륜 등의 반대로 그 해 12월에 정파시켰다. 이때 하륜의 반대 논거는 (1) 계룡산의 위치가 너무 남쪽에 치우쳐 도리(道理)의 균형을 얻지 못하였다. (2) 계룡산의 지세가 산(山)은 서북방에서, 수(水)는 동남방으로 흘러 이는 송나라 풍수가 호순신(胡舜臣)의 이른바 '수파장생 쇠패입지(水破長生 衰敗立至)'의 흉지(凶地)라는 것 등이었다. 그러나 이때에 소원을 못 이룬 계룡산 신도론은 뒤에 <정감록>의 형태로 나타나 오랫동안 조선왕조를 괴롭혔다.

이지함[편집]

(1517∼1578)

조선전기의 학자·기인(奇人). 자는 형백(馨伯)·형중(馨仲), 호는 토정(土亭)·수산(水山). 어려서 형 지번(之蕃), 서경덕(徐敬德) 등에게 배우고, 선조 때에 포천(抱川)·아산(牙山) 등지의 현감(縣監)을 지내면서 걸인청(乞人廳)을 만들고 걸인의 수용과 노약자(老弱者)·기민(飢民) 구호 등 사회사업에 힘쓰다가 죽었다. 시호는 문강(文康) 의약·복서·천문·지리·음양·술서에 모두 능통했으며, 괴상한 거동·기지(奇智)·예언·술수에 관한 일화가 많고, <토정비결>의 저자로 알려져 있다.

남사고[편집]

南師古

조선 명종 때의 에언자. 호는 격암(格庵). 역학(易學)·풍수(風水)·천문(天文)·복서(卜筮)·상법(相法)에 도통, 예언이 꼭 들어맞아 명종 말년(1567경)에 벌써 1575년의 동서분당(東西分黨), 1592년의 임진왜란을 예언하였고, 명종 19년에는 다음해에 문정왕후(文定王后)가 죽어 태릉(泰陵)에 묻힐 것을 예언, 적중시켰다고 한다. 만년에 천문(天文)교수를 지내고, 편서(編書)로 <선택기요(選擇紀要)>가 있고, 이른바 <남사고비결(南師古秘訣)>의 저자로 전해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