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이동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동양사상/한국의 사상/조선전기의 사상/조선전기의 윤리사상

위키문헌 ― 우리 모두의 도서관.

조선전기의 윤리사상〔槪說〕

[편집]

조선전기의 윤리사상은 유교(儒敎)였다. 중국의 송대(宋代)에 완성된 유교철학(儒敎哲學)인 성리학(性理學)과 그 성리학에 근거를 둔 가례(家禮)의 충군애부사상(忠君愛父思想)은 새로운 매력으로 우리 반도(半島)에 수입되었던 것이다. 그런 유교철학을 조선왕조에서 왕실(王室)의 권위유지(權威維持)를 위하여 숭장(崇奬)한 관계로 더욱 융성하게 되었던 것이다. 원래 유교에는 오래 전부터 두 가지 이질적인 부분이 모순 없이 존재해 왔으니 그것은 곧 살신성인(殺身成仁)의 희생정신과 곡학아세(曲學阿世)의 자기영달(自己榮達)을 구하는 행동인 것인데, 통치자인 제왕(帝王)들은 그 두 가지를 교묘하게 이용하여 그 유교도(徒)들을 조종(操縱)하였던 것이다. 조선왕조에서도 그 예외가 아니어서 정몽주(鄭夢周)의 장렬한 순국정신과 개국공신(開國功臣)이라는 영달을 추구하는 무리들을 이용하여 유교를 장려하였다. 그리하여 가례의 본뜻에서는 조금 지나칠 정도의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를 새로 편찬하여 권외(圈外)로 분방(奔放)할 수 있는 젊은 기개를 구속하였고 강경(講經), 즉 유교의 경전을 그대로 외우기만 하는 과거제도(科擧制度)로 그들의 영달추구를 만족시켜 왔다. 그 결과는 편협하고 배타적이고 그러면서 비굴(卑屈)하고 외면치례에 편치하는 극히 소승적(小乘的)이라고 할 정도로 조선 특유의 유교사상을 형성해 나갔다. 그리하여 붕당(朋黨)이니 예송(禮訟)이니 하는 정치 아닌 정쟁(政爭)을 되풀이 하여 서로 헐뜯고 모함하여 왔던 것이다. 이 싸움이 조선왕조 중엽을 지난 숙종(肅宗)때에 이르러 그 극(極)에 달한 감이 있다.

충군애부의 사상

[편집]

忠君愛父-思想

송나라의 유교는 양심있는 학자들이 세태인심을 구극(究極)한 뒤에 부흥시켰으므로 진정한 철리(哲理)를 탐구하여 완성시켰지만 조선시대의 유교는 왕실에서 여용학자(御用學者)들을 기용(起用)하여 발전시켰으므로 필연적인 결과가 곡학아세(曲學阿世)의 유교로 후퇴함을 면하지 못하였다. 그 제일의 착수가 <오례의(五禮儀)>였다. <오례의>는 전형적 관료였던 허조(許稠)가 편찬한 것이다. 세종대왕은 허조가 무식하고 편협하여서 <오례의>가 잘못되었다고 탄식하였다. 세종의 탄식이 무엇 때문인지 모르겠으나 <오례의>는 가례(家禮)의 근본사상을 몰각(沒却)하고 지엽말절에 집착하여 쇄세한 번문욕례(繁文縟禮)로 일관된 작품이다. 원래 유교의 예(禮)라는 것은 지극히 광범위한 것으로 형식 같은 것을 문제로 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분명히 자유의지에 자발적(自發的)인 질서유지이니 그러므로 '예의 본질은 조화가 귀중하다(禮之用 和爲貴)'라느니, '예라고 하는 것이 어찌 예물만을 말하겠느냐'라는 말을 통해 알수 있는 것으로 그와 근사한 말은 <논어(論語)>에서 자주 볼

수 있다. 즉 형식(形式)이 아닌 평화적인 질서유지임으로 활달(豁達)하고 홍원(弘遠)한 것이지만 <오례의>는 구속적인 부분을 발전시켜서 편협하고 비굴한 극히 소승적인 의식에 몰두한 그런 예법이었다. 물론 충군애부의 사상은 가장 제왕들에게 중요한 것이므로 그것을 등한히 하지는 않았지만 그것도 지극히 쇄세한 절차로 구속하는 의식이었다. 국가관에서도 "백성이 가장 귀하고 사직은 다음이요 임금은 그 다음이다(民爲貴 社稷次之 君又次之)"라는 사상은 찾아 볼 수 없는, 다만 군왕(君王)에게 일체를 희생시키는 충(忠)만을 강요하여서 그것이 예의 본분인 양 윤리로 확립시켰다.

절의문제

[편집]

節義問題

사육신(死六臣)의 절의는 절의로 죽은 그 자체는 장렬한 것이므로 필자도 경의(敬意)를 표하기에 주저하지 않지만 전체적인 관점에서는 수긍할 수 없는 점도 있는 것이다. 첫째로 주소국의(主小國疑)한 그때에 중견관료로 있으면서 사전에 대비책도 없었으니 죽는 것만 가지고 그 책임을 피할 수 있을까. 둘째로 중국 제(齊)나라의 소백(小白)과 관중(管仲)의 예를 보아서도 육신(六臣)도 꼭 죽어야 할 것은 아닌성 싶다. 그러나 그 죽음은 장렬무비(壯烈無比)했으니 충신의 사라고 그 절의를 칭찬할 수 있겠지만 그 후에 일어난 무수한 사화는 거론할 가치조차 없는 것이 많으니 그중 특히 무오사화(戊午士禍) 같은 사건은 절의가 전도된 것으로 더 말할 필요조차 없다. 기묘사화(己卯士禍) 또한 완전한 정치 싸움의 결과로서 상대방을 모함한 남곤(南袞) 일파의 수단은 비열했으며, 무엇인가 해보려던 조광조 일파의 사상이 옳았다고 하여 지금까지 문제가 되고 있다. 그러나 한편 시대를 생각하지 않고 옛 법(法)만을 부활시키는 것은 어떠할지 의문이다.

동서분당도 그런 소소한 절의문제로 생긴 것이다. 윤원형(尹元衡)은 조선왕조 500년 동안 외척 집권자중 가장 흉악한 자였다. 동서분당(東西分黨)은, 그러한 윤원형의 식객이었다는 김효원(金孝元)과 그를 배척한 당시의 왕실 외척 사이의 알력에서 기인되었다. 이쯤 되면 이 시대에 이르러 절의(節義)니 윤리(倫理)니 하는 것은 허언(虛言)이 된 감이 든다. 다행히 임진왜란 때에 이순신(李舜臣) 장군과 조헌(趙憲)을 비롯하여 많은 유림(儒林)들이 순국(殉國)한 것으로 절의가 다시 소생되었으나 광해군 때에 서인(西人) 일파를 완전히 말살하려고 인목왕후(仁穆王侯) 폐모문제(廢母問題)가 발생되어 절의나 윤리사상은 여지없이 유린되었다. 또한 그것을 빙자하고 광해군을 축출한 서인들에 대하여 어느 일파는 비난하기도 하였으니 그것은 그 축출한 그 파가 순수한 절의나 윤리를 떠나서 행동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한 중에 병자호란(丙子胡亂)에 3학사(三學社)를 비롯한 많은 인사(人士) 특히 부녀자들도 절의를 위하여 생명을 초개(草芥)처럼 포기한 것은 장렬한 행위라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 후에 일어난 것이 예송(禮訟)이다.

예송의 전개

[편집]

禮訟-展開

전부터 예송이라고 쓰니까 필자도 예송이라고 쓰지만 실상(實相)은 예(禮)라는 학문을 가지고 논쟁(論爭)한 것이 아니고 학문을 정쟁(政爭)에까지 이용한 싸움이었다. 아들인 효종(孝宗)이 죽자 어머니인 장렬왕후(莊烈王侯)의 복(服) 입는 것은 어떻게 하느냐는 문제로 송시열(宋時烈)이 1년복(服)을 주장하였는데 예(禮)에는 장자상(長子喪)에 3년간 입는 것이지만 효종은 인조(仁祖)의 장자가 아니었다. 장자인 소현세자(昭顯世子)가 일찍 죽어서 장자의 복을 입었는데 이제 효종이 또 죽었으나 장자는 둘이 될 수 없는 것이라 하여 1년복을 주장한 것이다. 그러나 제왕가(帝王家)에는 사가(私家)와 달라서 출생의 순위 문제가 아니고 왕통을 계승한 것이 문제이다. 원래 장자상에 참최삼년(斬衰三年)이라는 복을 입는 이유가 조상의 종사(宗祀)를 받들 사람이라는 이유였으니 몇째 아들이고 왕통을 계승하는 사람이 조상의 종사를 받드는 것이니 그가 장자이다. 그 예는 진안대군(鎭安大君)이나 양녕대군(讓寧大君)에게서 이미 있어 왔다. 이것을 생각하지 아니한 것은 예학파(禮學派)의 비조(鼻祖) 김장생(金長生)의 제자인 송시열이 덜 생각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은 예(禮)를 잘못 해석한 것이다. 실제로 장렬왕후의 복은 국조전례(國朝典禮)에 따라서 정했는데 지금까지 서인(西人)들에게 밀려 있던 남인(南人)일파가 그것을 이용하여 서인 전체를 타도하려고 들고 일어나 송시열이 고의로 선왕(先王)을 모욕하였다고 탄핵하였다. 처음 1년복제설(一年服制說)에 다소 의심을 갖고 이견(異見)을 갖던 서인들도 남인들의 논란이 학문에서 그치는 것이 아님을 깨달은 뒤에는 일치단결하여 송시열을 옹호(擁護)하고 나섰다. 그리하여 결국 초기에는 서인의 불리로 몇 사람이 죽기까지 하였으나 후일에 인현왕후 폐출(廢黜) 문제로 남인은 결정적인 패배를 보게 되었다.

노·소론 간의 논쟁

[편집]

老少論間-論爭

이것도 절의문제에서 발단되어 정치문제로 파급된 것이다. 윤선거(尹宣擧)는 유림의 유례(類例)가 드문 대가(大家)인데 소시(少時)에 병자호란을 당하여 권순장(權順長)·김익겸(金益兼) 두 동지(同志)와 국난에 함께 순국할 것을 약조(約條)했으나, 혼자만 죽지 못하였다가 후일에 그것을 후회하고 일체 세상에 출두하지 않았다. 이를 송시열이 좋게 보고, 개과(改過)하였다고 칭찬하면서 교우(交友)로 대하였는데 그의 사후(死後)에 약간의 배신의 흔적이 발견되자 그것에 노(怒)한 송시열은 그의 아들이요 송시열의 문인(門人)인 윤증(尹拯)과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그러나 윤증 일가도 워낙 사림(士林)의 명문(名門)이니만치 그 편을 두둔하는 선비들이 많아서 서인(西人)이 노·소론(老小論)으로 갈리고 소론(小論)은 남인(南人)과 합세하여 송시열을 죽이기까지 하였다. 이것을 보통 '회니시비(懷尼是非)'라고 한다. 여기에서 박세채(朴世采) 같은 이는 처음에 송시열에게 불만을 가지고 송시열이 주장하는 태조(太祖)의 휘호(徽號)문제 ― 송시열은 그의 사대사상벽(事大思想癖)으로 하여 태조가 국가에 반역(反逆)하기 시작한 위화도회군일절(威化島回軍一節)을 대명천자(大明天子)에게 반항하지 않은 것은 대의(大義)로서 그까짓 소국(小國)인 고려(高麗)의 왕명(王命)을 거역한 것은 문제가 아니니 태조의 시호(諡號)에 그것을 표시하는 문자를 삽입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 에 정면 반대하고 윤증 일파에 가담하였으나 후에 송시열이 살해당하자 박세채는 결연(決然)히 반발(反撥)하고 송시열을 위하여 3개월 복(服)까지 입었다. 그리고 자기 문인들을 데리고 노론(老論)으로 복귀, 그 덕(德)으로 문묘(文廟)에 배향(配享)되는 영광(榮光)을 얻었다. 그도 예송(禮訟)에 대해서는 학문적인 의미로 반대의사를 가졌던 것이 명백하였다.

지금까지 보아 온 것으로 조선전기의 윤리사상은 포은 정몽주(鄭夢周)의 감화(感化)로 유교적인 가례(家禮)를 중심으로 전개되었으나 그것도 왕실과 어용학자들의 곡학아세(曲學阿世)로 지극히 소승적으로 전락하여 편협하고 배타적이면서 비굴한 유교가 되었다. 간간이 그 범위에서 초탈(超脫)한 대인물(大人物)이 있기도 하였지만 그들의 감화보다는 아유구용(阿諛苟容)으로 출세하려는 소인유(小人儒)나 남을 떠밀고 자기가 올라서려는 패유(悖儒)들의 힘이 더 컸었다. 그리하여 후기에 접어들어서는 더욱 난맥을 이루었다. 그것은 유교 자신이 그런 과오(過誤)가 생길 수 있는 결함(缺陷)을 내포하고 있었던 까닭이다. 중국 한대(漢代)의 동중서(董仲舒)가 그런 곡학아세의 유교로 변질시킨 것도 변질시킬 수 있는 요소가 있었기 때문이다.

가례

[편집]

家禮

주로 관(冠)·혼(婚)·상(喪)·제(祭)의 4례(四禮)에 관한 예제(禮制). 고려 말엽에 주자학(朱子學)의 도입과 함께 <주자가례(朱子家禮)>가 들어와 주자학을 국교로 한 조선시대에 윤리의 근본이 되어 실행이 강요되었다. 처음에는 사대부(士大夫) 사이에서 성행하였으나, 뒤에는 국책(國策)으로 채택되어 사회전반에 보편화되었다. 이것은 백성들의 윤리의식을 높이고 국가의 질서를 유지하는 데는 기여하였지만 너무 형식에만 치우쳐서 예론(禮論)의 시비를 일으켜 당쟁의 원인이 되었고, 예학파(禮學派)를 대두시켰으며, 우리나라 가족제도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국조오례의

[편집]

國朝五禮儀

오례에 관하여 편찬한 책. 세종(世宗) 때 허조(許稠) 등이 고금의 예서(禮書)·홍무예제(洪武禮制)를 참작, <두씨통전(杜氏通典)>을 본따 편찬에 착수하여 세조(世祖) 때 강희맹(姜希孟) 등이 오례 중에서 실행해야 할 것을 뽑아 도식(圖式)을 편찬·탈고한 것을 1474년 성종(成宗)대에 신숙주(申叔舟)·정척(鄭陟) 등이 완성했다. 이 책은 뒤의 <국조속 오례의(國朝續五禮儀)>와 함께 조선왕조의 예절규범이 되었다.

허조

[편집]

許稠 (1369∼1439) 조선 초기의 문인. 자는 중통(仲通), 호는 경암(敬菴), 권근(權近)의 문인. 공양왕 2년에 문과에 급제, 조선건국 후 예제(禮制)의 제도화에 힘썼다. 태조 6년에는 성균전적(成均典籍)에 올라 석전(釋奠)의 의식을 개정하였고, 태종 11년에는 왕실의 의식(儀式)과 일반의 상제(喪制) 등을 법전화(法典化)하는 데 노력했고 의례상정소제조(儀禮祥定所提調)를 역임하였다. 세종(世宗) 때에는 판서(判書)를 거쳐 좌의정(左議政)에 올라 왕명을 받아 <국조오례의>(약칭 <오례의>)를 편찬하였다.

사육신

[편집]

死六臣 세조 (世祖) 때 왕위찬탈에 분격하여 선왕(先王) 단종(端宗)의 복위(復位)를 모의하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절의(節義)를 굽히지 않고 처형당한 여섯 충신. 주로 세종 때 집현전(集賢殿)의 소장학자들로 문종(文宗)의 고명(誥命)을 받은 사람들로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 하위지(河緯地), 이개(李塏), 유응부(兪應孚), 유성원(柳誠源) 등이다. 이들이 단종에 대한 충성을 표현한 애절(哀絶)한 시조를 후에 '육신애상가(六臣哀傷歌)' 혹은 '사육신충의가(死六臣忠義歌)'라 하여 널리 칭송되었고, 연산군(燕山君) 때는 김종직(金宗直)이 이들의 죽음을 찬양하여 지은 <조의제문(弔義祭文)>을 그의 제자였던 기사관(記事官) 김일손(金馹孫)이 <성종실록> 사초(史草)에 적음으로써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그 뒤 숙종 24년(1698)에는 그들의 충성과 절의를 국가에서도 높이 평가하여 단종(端宗)의 복위와 동시에 이들에게도 관직을 추증(追贈)하니 이후로 그들의 절의사상을 선양하는 서원(書院)·묘비(墓碑)·사당(祠堂) 등이 각지에 세워지기에 이르렀다.

삼학사

[편집]

三學士

조선 인조(仁祖) 때 병자호란(丙子胡亂)을 겪는 중에 청나라를 오랑캐라 하여 끝까지 주전론(主戰論)을 주장하고, 항복을 반대하다가 뒤에 심양(瀋陽)에 잡혀가 피살된 세 사람 혹인학(洪翼漢)·오달제(吳達濟)·윤집(尹集) 등 3인으로 뒤에 이들의 충성과 절의가 크게 칭송되어 송시열(宋時烈)의 <3학사전(三學士傳)>을 비롯한 많은 시문이 나타났다. 그들의 사상은 전통적인 주자학의 입장에 서 있는 것으로 충군애국(忠君愛國)의 사상과, 명(明)에 대한 모화(慕華)사상이 믿받침되어 있었다.

이순신

[편집]

李舜臣(1545∼1598)

민족의 성웅(聖雄)으로 칭송되는 조선 중기의 명장. 자는 여해(汝諧), 서울 출신, 시호는 충무공(忠武公). 그는 임진왜란 때 거북선을 만들어 일본 수군을 격파하고 나라를 위기에서 구출해 낸 명장이다. 뒤에 정조(正祖) 때에 편찬된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속에 수록된 <난중일기(亂中日記)>와 그의 장계(狀啓)·시문을 통해 고결한 인격과 윤리사상을 엿볼 수 있는 바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군인은 임금께 충성하고 나라의 치욕을 만분의 일이라도 씻어야 한다. (2) 군사를 움직이고 작전을 하는데는 항상 백성을 아끼고 위해야 한다. (3) 장병은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 살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4) 대장이 화해함은 불가하고 원수를 놓아 보냄도 불가하다. (5) 윗사람은 항상 모범을 보여야 하고 아첨과 기만을 경계해야 한다. (6) 세상의 영화보다 나라일이 더 중하고, 나라일로 바쁘되 부모를 잊을 수는 없다. 요컨대 그는 당시의 유학적인 윤리와 전통적인 무사정신(武士精神)을 함께 실천으로써 보여준 성웅(聖雄)이었다고 하겠다.

김장생

[편집]

金長生 (1548∼1631)

조선 예학파(禮學派)의 태두. 자는 희원(希元), 호는 사계(沙溪), 송익필(宋翼弼)·이이(李珥)의 문인. 선조 11년부터 관계에 나가 임진왜란 때는 명군(明軍) 군량 조달에 공을 세웠고, 지방관으로 전전하다가 광해군(光海君) 5년 계축옥사(癸丑獄事)에 심문받고 물러나 학문연구에 몰두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관계에 복귀하여 정묘호란(丁卯胡亂) 때도 군량미 조달을 맡고, 척화파(斥和派)에 가담하였다. 그는 송익필에게서 예학(禮學)을, 이이에게서 성리학을 전수받고 예론(禮論)을 깊이 연구하여 뒤에 조선 예학파를 형성시켰다. 그의 저서로 <의례문해(疑禮問解)> <가례집람(家禮輯覽)> <상례비고(喪禮備考)> <개장의(改葬儀)> <제의정본(祭儀正本)> <예기기의(禮記記疑)>등이 모두 예론에 관한 것으로 그의 아들 김집(金集)과 문하생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俊吉) 등에게 전수되어 이른바 기호학파(畿湖學派)를 이룩하였다.

윤선거

[편집]

尹宣擧 (1610∼1669)

조선중기의 학자. 자는 길보(吉甫), 호는 미촌(美村)·노서(魯西)·산천재(山泉齋). 예학파 김집(金集)의 문인으로 인조 11년에 과거에 합격, 1636년 후금(後金)사신 입국시에 유생들의 소두(疏頭)가 되어 명(明)에 대한 의(義)를 지키자고 상소하였으며, 병자호란시에는 강화에 피난하였다가 성이 함락되자 처는 자살하고 자신만은 변장 탈출하였다. 이것을 자책(自責)한 나머지 관직을 사퇴하고 금산(錦山)에서 학문에 정진하였다. 그는 특히 예론에 정통하였고, 성리학의 대가로서 송시열(宋時烈)·윤휴 등과 사귀었다. 그러나 송·윤 양인간의 불화에 중립을 지켜 양인으로부터 똑같이 오해를 받았다. 그가 죽은 후에 송시열이 박세채(朴世采) 찬술의 행장(行狀)을 그대로 써주어 서인이 노·소론(老少論)으로 분열하는 계기가 되었고, 1715년에는 그와 유계(兪棨)의 공편인 <가례원류(家禮源流)』 발문(跋文)사건으로 관직까지 추탈당하였다가 1722년에 복구되었다.

윤증

[편집]

尹拯 (1629∼1714)

조선중기의 학자. 자는 자인(子仁), 호는 명재(明齋)·유봉(酉峰), 윤선거(尹宣擧)의 아들. 유계

김집(金集)을 거쳐 송시열의 문인이 되었다가 절교, 1682년 관계에 나가 판돈령부사(判敦寧府使)에 이르렀으나 사퇴하였다. 예론에 정통한 학자로 이름이 높았으나 1673년부터 아버지의 묘갈명(墓碣銘) 문제, 송시열 비난 서신의 전달 등으로 송시열과 절교하여 소론(少論)의 영수가 되었다. 1715년에는 아버지와 스승 유계의 저서 <가례원류> 발문속에서 정호(鄭澔)로부터 비난을 받아 당쟁이 격화되어 소론이 거세당하고, 그의 관직도 추탈당하였다가 1722년에 복구되었다.

박세채

[편집]

朴世采 (1631∼1695)

조선중기의 문신·유학자. 자는 화숙(和叔). 호는 현석(玄石)·남계(南溪), 한성 출신. 18세 때 성균관에 들어갔으나 이이(李珥)·성혼(成渾)의 문묘종사(文廟從祀)를 주장하고 반대파를 공격하다가, 효종의 꾸지람을 받고는 과거를 포기하고 김상헌(金尙憲) 문하에서 성리학을 연구하면서 송시열과도 사귀었다. 28세에 천거로서 나아가 1659년 조대비 복상문제에 송시열과 함께 남인의 3년설을 물리쳤다. 1683년에 서인이 노·소론으로 분열되자 소론의 영수가 되어 좌의정(左議政)에까지 올랐다. 그는 당쟁에 가담하였지만 황극탕평설(皇極蕩平說)을 주장, 당쟁조절에 노력했고 예학(禮學)에 밝았다. 그가 쓴 윤선거(尹宣擧) 행장(行狀)이 송시열에게 인용되어 윤선거의 아들 윤증(尹拯)의 불평을 사 송·윤 양인의 절교를 빚었고, 태조 휘호문제(徽號問題) 때 송시열의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 정당론에 반대하고 소론파 윤증(尹拯)에게 가담하였다가 송시열이 죽자 그는 소론에서 반발하여 3개월 복까지 입고 노론으로 복귀하였다고 한다.

삼강행실도

[편집]

三綱行實圖

세종(世宗) 14년(1432)에 설순 등이 편찬한 책. 우리나라와 중국의 서적에서 군신(君臣)·부자(父子)·부부(夫婦)등 3강의 모범이 될 만한 충신·효자·열녀 105인을 뽑아 사실을 기록하고 그림을 붙여 한문으로 설명한 다음, 그 덕을 찬양하는 영가(詠歌)와 찬(贊)을 붙이고 그림 위에 한글 번역을 달았다.

이륜행실도

[편집]

二倫行實圖

장유(長幼), 붕우(朋友)의 2륜(二倫)을 지키도록 옛사람 중 모범이 되는 사람을 뽑아 엮은 원리교육서. 중종 때 김안국(金安國)이 왕에게 시강(侍講)할 때 찬술한 것을 조신(曹伸)이 인계받아 간행한 것이다. 모범적 중국인 48명의 사실을 기록하고 그림을 그려 넣었으며 한문해설, 찬시, 한글번역 등을 달았다. 이것과 <삼강행실도>를 합쳐 정조 21년에 <오륜행실도(五倫行實圖)>가 간행되기도 하였다.

회니시비

[편집]

懷尼是非

조선 숙종 때의 당쟁문제의 하나. 노론(老論)의 영수 송시열(宋時烈)과 소론(小論)의 영수 윤증(尹拯) 사이에 개인적인 원한이 확대되어 일어난 것으로 송시열의 고향이 회덕(懷德), 윤증의 고향이 이산(尼山)이라는 데서 양쪽 고향의 한자씩을 따서 '회니(懷尼)문제' 혹은 '이덕(尼德)시비'라고도 한다. 윤증의 아버지 윤선거(尹宣擧)가 병자호란 때 강화를 변장 탈출했는데 박세채(朴世采)가 이를 비판한 행장(行狀)을 쓴 적이 있었다. 그런데 송시열 자신이 남인 윤휴와 경전주해(經典註解) 논쟁을 일으켰을 때 윤선거가 윤휴를 변호하여 그를 불쾌하게 하였다. 윤선거가 죽은 후에 그의 아들 윤증이 아버지의 친구요, 자기의 스승인 송시열에게 묘비명(墓碑銘)을 청하니, 송시열은 옛날의 유감 때문에 박세채의 글을 인용하여 윤선거를 모욕하는 글을 지어 주었고, 윤증은 박세채와 같이 송시열에게 고쳐 달라고 하였으나 송시열은 끝내 거절하여 원한관계가 되었다. 그후 윤증이 노골적으로 송시열의 인격과 언행을 비난하고 아버지의 일을 변호하니 유생들이 궐기하여 양파 사이에 시비가 분분하였다. 이에 송시열을 지지하는 측은 노론(老論)으로, 윤증을 지지하는 측은 소론(少論)으로 완전히 분열되어 당쟁이 더욱 격화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