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동양사상/한국의 사상/조선전기의 사상/조선전기의 철학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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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전기의 철학사상〔槪說〕[편집]

조선왕조 5백년은 불교배척과 유교보호의 정책으로 일관하였다. 이것은 고려조(朝)의 숭불정책(崇佛政策)으로 말미암은 패망의 한 원인을 시정 개혁하여 인심을 일신함으로써 신왕조의 지도이념을 확립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유학은 멀리 삼국시대부터 수입되어 관학(官學)으로서 정치·문학·예교(禮敎), 즉 규범학 등의 방면의 주축을 담당했다. 그러던 것이 고려말 백이정이 원으로부터 주자학(朱子學)을 도입하여 보급함에 이르러 차차 연구되어져, 조선시대에 접어들자 정도전(鄭道傳)·권근(權近) 등이 배불숭유(排佛崇儒)에 힘썼으나 유학은 처음에는 역시 정치·경제·법률·문장 등의 이념에 머물렀다. 그 후 수차에 걸친 사화(士禍)로 인해 이제 유학은 치인지학(治人之學)인 회향적 태도로부터 내향적 태도로 바뀌어 수기지학(修己之學)으로 되었다. 여기서 이기(理氣)심성(心性)의 학으로서의 주자학, 즉 성리학(性理學)이 깊이 연구되어 중국 송대(宋代)의 성리학을 오히려 능가하게 되었다. 중국 송대의 철학은 정주학(程朱學)·주자학·성리학(性理學)·이기론(理氣論)·이학(理學) 또는 도학(道學)이라고 일컫는다. 송대의 이러한 철학은 한(漢)·6조(六朝)·수(隨)·당(唐) 이래의 불가(佛家)·도가(道家)의 철학을 섭취함으로써 유가(儒家)를 중심한 유불도(儒佛道) 3교합일(三敎合一)의 철학으로서, 이후 중국사상의 정면에 나타나게 되었다. 유학은 인생필수의 학으로 정치·경제·문학·역사·철학·도덕 등 전부를 포괄하고 있지만 시대나 사회에 따라 그 중점을 달리 하였다. 성리학은 특히 철학·윤리학으로서 선진(先秦)시대의 공·맹(孔孟)의 원시유교에 대해 이를 신유학(新儒學, Neo-Confucianism)이라 한다. 성리학을 개관하면 이기(理氣)·심성(心性)을 탐구함으로써 세계와 인생을 해명하려는 것이다. <기(氣)>는 우주의 구성소재로서의 우주기(宇宙氣)로 음양의 기운(氣運)인대, 현대과학적으로 말하면 에네지이다. <이(理)>는 기(氣)의 운동 작용의 조리(條理)·조건 법칙으로서, 철학적으로는 원리·형상·로고스(Logos)·당위(Sollen)·이념(Idae)·규범(規範) 등의 뜻이다. 주희(朱憙)(1130∼1200)는 이기설의 집대성자로 <이>와 <기>의 정의를 다음과 같이 내렸다. <기>는 능히 응결(凝結)하고 조작(造作)하지만, <이>는 도리어 정의(情意)·계탁(計度)·조작의 작용이 없다. 다만 기가 응취(凝聚)하는 바로 그 안에 이가 있다. <이>는 결정공활(潔淨空闊)한 세계로서 자취(形邊)도 없고 조작도 아니한다. <기>는 능히 온양응휘하여 물(物)을 낳는다. 그러므로 <이>와 <기>는 꼭 두 물건(決是二物)이다. 다만 현상을 통해 보면 이·기(理氣) 2물(二物)이 한 덩어리로 되어 있어 나누어지지 않는다(不可分開). 따라서 2물이 한곳에 있지만 2물이 각기 1물(一物)됨을 방해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것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기>는 조작 즉 움직이는 것으로서 그 조작작용에 의해 천지만물이 된다. 따라서 우주내의 물(物)·심(心) 제현상이 모두 <기>의 작용이며 사람의 심(心), 즉 의식작용도 <기>의 작용이며, <기>는 지·정·의(知情意)의 세 가지 작용을 다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는 지·정·의의 작용을 하는 것이 아니라 <기>의 작용의 조리로서 이치(理致)·이법(理法)이므로 순전히 관념상의 존재다. 그러므로 <이>와 <기>는 서로가 전연 다른 것(決是二物)이지만, 현상의 세계는 모두 <이>의 이치·이법에 따라 일어나는 것이므로 <이>와 <기>는 항상 서로 떠나려 아니한다(不可分開). 그러므로 우주의 시원(始源-본체)에 있어 벌써 현상으로 될 가능성을 가진<이>와 <기>는 동시에 실재(real)한다. 따라서 주희의 철학을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이라 한다. 주희는 또 말한다. <이>에서 볼 것 같으면 아직 현상물이 있지 않아도 현상물의 <이(理)>는 있다. 그러나 다만 그 <이>만 있을 뿐, 아직 실지로 물(현상)이 있지는 않다. 이 사상이 주희의 이선기후(理先氣後)의 경향이다. 그러나 또 <이>와 <기>는 본래 선후를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그 근원을 미루어 보면 모름지기 먼저 <이>가 있어야 한다. 본원에서 논한다면 <이>가 있은 뒤에 <기(현상물)>가 있는 것이요, 품부(稟賦 즉 현상)에서 논한다면 <기>가 있은 뒤에 <이>가 따라서 갖추어진다. 이 말은 우주 발생론적으로 <이>와 <기>의 관계를 말하는 것으로 이는 이기무선후(理氣無先後)의 형이상학이며 또 인식론적 고찰이다. 여기서 주희는 <기>가 있으면 <이>가 있고, <기>가 없으면 <이>가 없다 하여 이기동시(理氣同時)를 명백히 하였다. <이>와 <기>에 대한 설명은 주희의 어류(語類)에 산재해 있으므로 전체적, 체계적인 것이 아니어서 후학으로 하여금 서로 이해를 달리하게끔 하여 이런 것들이 조선 유학에 있어 시비의 불씨가 된 것이다. 이기론에 있어서 이기를 논함에는 <이>를 <체(體)>, <기>를 <용(用)>이라 한다. <체>는 부동의 본체로서 형이상자(形而上者)요, 용은 동(動)의 작용으로서 형이하자(形而下者)다. 여기서 말하는 형이상·형이하는 서양철학에서 말하는 본체와 현상의 개념이 아니고, 동과 부동의 작용면을 가리켜 말하는 것이므로 <이>와 <기>는 다 같이 본체로서 형이상자를 가리킨다. 그리고 이기론에서 심성을 논함에는 <성(性)>을 체로서의 <이>, <정(情)>을 용으로서의 <기>로 봄으로써 <이>와 <기>는 <성>과 <정>에 해당한다. 주희는 이기이원론의 입장에서 성정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즉 성은 심(心)의 이요, 정은 성의 용이며, 심은 성·정의 주(主, 즉 주재)다. 인·의·예·지(仁義禮智)는 <성>이요, 측은(惻隱)·수오(羞惡)·사양(辭讓)·시비(是非)는 <정>이며, 인(仁)으로써 사랑하고, 의(義)로써 미워하고, 예(禮)로써 사양하고, 지(智)로써 아는 것은 심이다. <성>은 심의 갖춘 바 <이>요, <정>은 <성>이 물(物, 즉 대상)에 접하여 동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맹자의 이른바 인·의·예·지 4덕(四德)은 심이 선천적으로 타고난 성(性, 즉 理)으로서 체요, 측은·수오·사양·시비의 마음작용인 4단(四端)은 정(情, 즉 氣)으로서 용이며, 심은 성과 정을 합한 것으로 성·정의 주재이다. 장재(張載, 1020∼1077)는 심통성정(心統性情)이라고 말하는데, 이 말은 조선 유학에서 많이 사용되는 말이다. 그리고 맹자의 이른바 <4단> 이외에도 정으로서 희·노·애·구·애·오·욕(喜怒愛懼愛惡欲)의 7정(七情, (<禮記>)과 희·노·애·락(喜怒哀樂, <中庸>)의 4정(四情)이 또 있다. 그리고 4덕에 신(信)을 가하여 5상(五常)이라 하는데 5상은 성의 덕으로서 이에 해당한다. 다음, 성의 선악의 문제에 있어 주희는 장재와 정이의 성설(性說)을 계승하여 <성>을 본연지성(本然之性, 즉 天地之性)과 기질지성(氣質之性)으로 나누고, 본연지성은 이로써 순선(純善)이며, 기질지성은 겸이기(兼理氣)로서 유선악(有善惡)이라 한다. 이것은 종래의 성설을 종합한 것이며, 이일분수설(理一分殊說)에 입각하여 우주 즉 천(天)과 인성 즉 인(人)을 일관적으로 해명한 것이다. 여하튼 4덕·5상·4단 7정 및 4정 등은 조선 유학에서 치열하게 논쟁을 일으킨 문제들이다. 이와 같이 이·기·성·정의 문제가 제기되어 중국 송대에 있어 이기2원론을 창설한 철학자는 정이(1033∼1107)인 바 그 이전의 주돈이·소옹(召雍)·장재(張載)·정호(程顥) 등에 있어서는 아직 이기론이 확립되지 않았다. 그런데 주희의 철학, 즉 성리학은 이 모든 학설을 종합하여 집대성한 것이며, 특히 주돈이의 태극도설(太極圖說)과 정이의 이기설을 종합한 것이다. 이것이 조선시대에 와서 심오하게 탐구되었는데, <기>를 주로 보는 주기파(主氣派), <이>를 주로 보는 주리파(主理派), <이>와 <기>를 다 같이 동(動, 즉 發)하는 것이라고 보는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 이항)과 이기공발설(理氣共發說, 기대승), 또 주리설과 주기설을 절충한 절충파(이항·장현광 등) 등이 있으며, 조선후기에 이르러서는 극단적 유리론(唯理論)과 유기론(唯氣論)으로 발전한다. 또 이기론을 일명 이학(理學)·기학(氣學)이라고도 부르며, 우주론보다 심성론에 치중했기 때문에 심학(心學)이라고도 일컫는다. 더욱이 중국 명대의 양명학(陽明學)이 들어와 일부 학자들이 전공하게 됨으로써 양명학파(陽明學派)가 형성되었고 심학이 크게 융성하여 이른바 사단 칠정논쟁(四端七情論爭) 또는 사칠이기설 (四七理氣說)이 성행하였고 많은 학자들이 배출되었다. 서경덕은 이기이원론(理氣二原論)을 일원론적으로 보려고 노력하여 태허(太虛)를 기(氣)의 본체로서 일기(一氣)요, 선천(先天)이라고 하고, 일기가 음기·양기의 이기(二氣)로 갈라져 후천(後天)이 생긴다고 주장하여 주기적(主氣的) 경향을 보인데 대하여, 이황(李滉)은 이기이원론을 취하고,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것을 곧 기대승(奇大升)의 '이기공발설(理氣共發說)'과의 논쟁, 이른바 퇴·고논쟁(退高論爭)을 일으켰고, 이 논쟁이 다시 뒤에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주장하는 이이(李珥)와 '이기분속설(理氣分屬說)'을 주장하는 성혼(成渾)간의 율·우논쟁(栗牛論爭)으로 발전하였다. 즉 이황의 이발(理發), 이이의 기발(氣發)이란 상반되는 견해는 다음 주리파(主理派)와 주기파(主氣派)의 양대진영으로 갈리어 드디어 심즉리(心卽理)란 극단적인 대립을 이루기까지 되어 조선왕조 철학계의 논쟁점이 된다. 이황을 지지하는 주리파는 영남지방에서, 이이를 지지하는 주기파는 경기·호남 등지에서 성행하였으므로 영남학파 기호학파라고도 각기 일컬어졌다. 양파는 모두 자파(自派)의 학문적 근거를 성리학의 대성자 주희에게 구하려 한 나머지 주기파의 송시열(宋時烈)과 한원진(韓元震)의 공저 <주자언론동이고(朱子言論同異考)>는 주희의 어록을 세밀히 조사함으로써 주기론의 근거를 고증한 것이며, 이에 대해 주리파의 이진상(李震相)의 저(著)인 <이학종요(理學宗要)>에서는 주희의 어록이 이발을 주장한 것이 틀림없다고 변증했던 것이다. 송시열(宋時烈)은 그의 스승 김장생(金長生)을 통하여 물려받은 이이의 기발이승을 논리적으로 추연(推演)하여 사단칠정이 모두 기발인 까닭에 사단도 순선(純善)일 수는 없고, 칠정과 마찬가지로 불선(不善)도 있다 하여 당시에 물의를 일으켰다. 노수신(盧守愼)은 성경(誠敬)과 전인(專一)의 공부방법에 치중하고, 심학에 있어 나흠순(羅欽順, 1465∼1547)이 도심(道心)을 체, 인심을 용이라 한 것을 지지하여 말년에는 선학(禪學)에 기울어졌다. 한편 중종 때 명(明)에서 양명학이 들어왔다. 양명학은 명대 왕수인(王守仁:호 陽明 1472∼1528)이 송대의 정호(程顥)와 육구연(陸九淵:호 象山 1139∼1192)의 계통을 이어, 특히 육구연의 심즉리설(心卽理說)을 조술(祖述)하여 치량지(致良知), 지행합일(知行合一)을 주장했다. 조선왕조에 있어 양명학을 전공한 학자로는 최명길(崔鳴吉)·장유(張維)·정제두(鄭齊斗)등 몇 사람 뿐이다. 장유는 김장생의 문인으로서 치심복성(治心復性)을 주장하여 정일공부(精一工夫)란 심학의 역행(力行)에 전념했다. 그러나 당시 학계에서는 양명학을 불학(佛學)이나 선학(禪學)에 가깝다 하여 무조건 배척하였는바 이런 태도는 학문의 자유란 입장에서나 또는 그 당시의 성리학에서는 지루한 문의(文義) 해석이나 공소(空疎)한 이론보다 간이독실(簡易篤實), 지행합일의 적극성이 참으로 긴요했다는 점에서나 학계의 불행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불행은 정주학 내에도 있었다. 즉 박세당(朴世堂)이 <사변록(思辯錄)>을 지었는데, 그 <4서집주(四書集註)>가 주희의 학설과 다르다 하여 추방당했으며, 윤휴도 성현의 교훈이나, 심법(心法)의 요지를 해득함이 학문에 필요하다하여 경서연구에 비판적 태도를 치함으로써 주희의 학설에 대항하여 <중용> <대학> <효경> 등의 장구(章句) 및 주(註)를 고쳐 짓고, 또 퇴·율(退栗)의 이기설에 대항했기 때문에 드디어 사문난적(斯文亂賊)의 낙인을 받았다. 한편 이항(李恒)과 장현광(張顯光)은 성리학에 있어 이와 기를 하나로 보려고 했다. 이항은 태극의 <이>와 음양의 <기>를 일물 (一物)이라 하여 이기일물설(理氣一物說)을 주장했으며, 장현광은 이와 기를 경(經)과 위(緯)에 비유함으로써 이기일본설(理氣一本說)을 역설했지만 주희와 이황의 이발, 기발을 의심하고 기발이본(氣發理本)이라 한 것을 보면, 이항의 일물설과는 멀어지고 오히려 이이의 기발이승설에 가까워졌다 하겠다.

서경덕[편집]

徐敬德 (1489∼1546)

조선전기의 학자, 자는 가구(可久), 호는 복재(復齋)·화담(花潭), 시호는 문강(文康). 독학으로 공부하여 13세에 <서경(書經)>을, 18세에 <대학(大學)>을 읽고 크게 깨달았으며, 삼남지방을 유람하고 교육과 학문 연구에만 전심하였다. 중종 26년 어머니의 요청으로 생원시(生員試)에 응시하여 합격했으나 벼슬길을 단념하고 개성의 동문 밖 화담(花潭)에 초막을 지어 이기론을 깊이 연구하여 이기일원론을 체계화하려고 하였다. 저서에 <화담집(花潭集)>이 있다. 그의 사상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그는 이기이원론을 내세우면서도 이·기를 일원적으로 보려 애썼는데 주기적(主氣的) 경향이 농후했다. 그는 송대 장재의 기일원론(氣一元論)과 소옹(邵雍)의 선천학(先天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즉 태허(太虛)를 기의 본체·본질이라 하고 이것은 <기>가 아직 형(形)으로 응결되지 아니한 상태로서 담연허정(淡然虛靜)한 일기(一氣)이며, <선천>이라고 하였다. 선천의 일기는 자동(自動)하는 것으로서 기자이(機自爾)이며, 일기가 음기(陰氣)와 양기(陽氣)의 이기(二氣)로 갈라져 개벽생극(生克)함으로써 천지·일월성신이 형성되는데, 이것이 <후천(後天)>이다. 이렇게 <기>의 자동하는 까닭을 <이(理)>라 하여 이기불상리(理氣不相離)를 역설한다. 그는 담연한 일기의 장존(長存)을 주장하여 그것을 사람에 있어 영혼으로 보고, 영혼불멸설을 제창했다.

이구[편집]

李球 ( ? ∼1573)

조선전기의 유학자. 자는 숙옥(叔玉), 호는 연방(連坊) 서경덕의 문인. 그는 명의 왕양명의 영향을 받아 심무체용(心無體用)이라 했다. 기란 기운이므로 정태(靜態)인 체(體)에도 용(用)으로서의 잠세력(潛勢力)이 있으므로 체와 용을 확연히 나눌 수 없다는 뜻이다. 그는 당시에 조선의 가장 전통적인 특색을 발휘한 학자로 알려졌다.

이황[편집]

李滉 (1501∼1570)

조선시대의 대학자. 초명은 서홍(瑞鴻), 자는 경호(景浩), 초자는 계호(季浩), 호는 퇴계(退溪)·도옹(陶翁)·퇴도(退陶)·청량산인(淸凉山人). 중종 18년에 성균관에 입학, 동왕 29년 관계에 나가 선조 1년 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을 지내고, 다음해 낙향하여 학문과 교육에만 전심하였다. 그는 영남학파의 태두요, 시호는 문순(文純)이다. 저서에 <퇴계전서(退溪全書)>가 있다. 그의 철학사상을 보면, 그는 주희의 이기 결시이물(決是二物)의 입장을 철저히 어어받고 나아가서는 무조작(無造作)인 <이>를 조작 활물(活物)로 보고, 이발(理發), 기발(氣發) 즉 이기호발(理氣互發)을 주장했다. 이것은 정추란(鄭秋欒)의 <천명도(天明圖)>를 '사단은 이의 발, 칠정은 기의 발'이라고 고쳐준 데 나타난다. '이기호발'이란 <이>, <기>가 시간상 또 공간상 서로 분리하여 발동한다는 것으로, 심성 안에 이미 <이발(理發)>,<기발(氣發)>의 두 묘맥(苗脈)이 있다고 보는 설이다. 그의 학설은 곧 그의 제자 기대승(奇大升)의 비판을 받아 이른바 '퇴·고논쟁'으로 전개되었고, 결국은 사단은 이발기수지(理發氣隨之)요, 칠정은 기발이이승지(氣發而理乘之)라 하였다

기대승[편집]

奇大升 (1527∼1572)

조선전기의 성리학자. 자는 명언(明彦), 호는 고봉(高峰)·존재(存齋). 명종 13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사관(史官)이 되었고, 선조 5년 대사간(大司諫)에 이르렀으나 병으로 그만두고 귀향중 객사하였다. 그는 32세에 이황(李滉)의 문인이 되어 이황과 사단칠정(四端七情) 논쟁을 벌여 인정받았다. 시호는 문헌(文憲). 저서에 <고봉집(高峰集)> <주자문록(朱子文錄)> <논사록(論四錄)> 등이 있다. 그는 이황의 '이기호발설'을 비판하고, '이기공발설(理氣共發說)'을 주장하여 사단칠정은 <이>와 <기>로 분속되지 않으니 불가분의 것이라고 하며, 칠정기발(七情氣發)을 강조하여 주기적(主氣的) 경향을 띠게 되었다.

이기호발설[편집]

理氣互發說

이황의 학설. <이>와 <기>를 모두 근원적인 것으로 보고 사단을 <이>에, 7정을 <기>에 근거하여 설명하며 <이>, <기>를 다같이 근원으로 보는 2원론이다.

이기공발설[편집]

理氣共發設

기대승의 학설. <이> <기>를 모두 인정하기는 하되 사단과 칠정의 이·기의 시공상(時空上)의 분리를 부정하여 <이>와 <기>는 동시에 함께 있는 것이라고 함으로써 이원론적인 대립을 극복하려고 하였다.

사단칠정논쟁[편집]

四端七情論爭 조선 성리학에 있어서 오랫동안 계속되었던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에 대한 논쟁. 이황(李滉)이 사단은 <이>의 발(發)에 속하고, 칠정은 <기>의 발에 속하는 것으로서 인성(人性)에는 본연의 성(性)과 기질(氣質)의 성이 다른 것과 같다 하여 이기이원론을 주장한데 대하여, 기대승이 질문서를 보내고 <이>와 <기>는 관념적으로는 구분할 수 있으나 구체적인 마음의 작용에 있어서는 이·기를 분리할 수 없다는 이기공발설(理氣共發說)을 주장한 데서 발단하여 양인간에 <사단칠정 분리기 왕복서(四端七情分理氣往復書)>가 교환되었다. 뒤에 이이(李珥)가 이기일도설(理氣一途說)을 주장한데 대하여 성혼(成渾)이 이황 쪽을 지지함으로써 이·성(李成) 양인 간에 논쟁이 재연(再燃)되어 영남학파와 기호학파 간의 대립을 가져오기도 하였다.

퇴·고 논쟁[편집]

退高論爭

퇴계 이황과 그의 제자 고봉 기대승 간에 있었던 4단7정논쟁. 이황이 이기호발설을 주장, <이>와 <기>가 시간상 공간상 분리되어 발동한다고 하자, 기대승은 이·기(理氣)의 시공상의 분리를 생각하지 않는 주희의 이른바 불가분개(不可分開)의 입장에 서면서도 주희의 이른바 무조작인 <이>를 이황과 같이 역시 활물(活物) 조작으로 보고, 이기공발(理氣共發)이라는 결시이물(決是二物)의 태도를 가미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정주(程朱)가 주장한 심성론의 문제가 제기된다. 정주는 심(心)의 체(體)로서의 성(性)을 천지본연지성(天地本然之性)으로서의 순선(純善, 즉 理)과, 기질지성(氣質之性)으로서의 유선악(有善惡, 즉 兼理氣)으로 나눔으로써 선의 근원을 <이>, 악의 근원을 <기>로 본 느낌을 주고 있다. 그래서 이황은 호발(互發)의 입장에서 순선인 4단을 이발, 겸선악인 7정을 기발이라 보았다. 기대승은 공발(共發)의 입장에서 4단과 7정이 모두 한 성에서 발하는 정(情)이므로 불가분개(不可分開)의 태도를 취하여 이기를 분리시키지 않고, 이약기강(理弱氣强)을 내세워, 공발할 때 이가 강하면 선, 기가 강하면 악이라 생각하여 7정 중의 선한 것을 순선인 4단과 다를 바 없으므로 이와 기를 분대(分對)시키지 않고, 따라서 4단과 7정도 이황 같이 이기로 분속(分屬)시키지 않으려 했다. 그런데 '이의 발(理之發)'이란 말은 <주자어류(朱子語類)>에도 이미 나오는 것으로서 이황만의 독창적인 견해가 아니며, 권근(權近)·이파(李坡)·유숭조(柳崇祖)·정추란 등도 이런 견해를 가졌다. 여하튼 이황과 기대승은 서로 다른 입장에 논쟁을 벌여 8년 후에는 서로 절충단계에 도달하게 됨으로써 이황은 호발의 입장에서 <4단은 이발로서 기가 따르고, 7정은 기발로서 이가 탄다(四端理發 氣隨之 七情氣發 理乘之)>는 결론을 내렸으며, 기대승은 여전히 공발의 태도를 견지함으로써 "7정이 발해서 중절(中節)한 것은 4단과 더불어 처음부터 다름이 없고, 7정이 비록 기에 속해도 이도 진실로 그 안에 있으므로 발하여 중절한 것은 천명의 이(天命之理)요, 본연의 체(本然之體)니, 이것을 기발이라 한들 4단과 다르리오"라 하여 이기공발을 내세우면서도 7정기발의 주기적 경향을 띠었다. 이 논쟁은 곧 각 학파간의 이·기논쟁으로 확대되어 가장 중요한 철학적 쟁점이 되었다.

이이[편집]

李珥 (1536∼1584)

조선시대의 대학자. 아명은 현룡(見龍), 자는 숙헌(叔獻) 호는 율곡(栗谷)·석담(石潭)·우재(愚齋), 시호는 충문(忠文). 어려서 어머니 사임당 신씨(申씨)에게 학문을 배우고, 19세기에 금강산에서 불서(佛書)를 연구하다가 다시 유학에 전심하여 명종 19년에 과거에 합격하고, 관계에 나가 선조 16년에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이르도록 서정쇄신, 당쟁조정 등에 기여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다. 그는 이황과 함께 조선 유학계의 쌍벽을 이루어 뒤에 기호학파(畿湖學派)를 형성시켰으며,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근본으로 하여 이통기국(理通氣局)을 주장하였다. 시호는 문성(文成). 저서에 <율곡전서(栗谷全書)>가 있다. 그는 주희(朱憙)의 이른바 불가분개(不可分開)의 입장을 고수하여 이기일도설(理氣一途說)로써 이발(理發)을 부정하고 기발이승(氣發理乘)만을 관철시킨다. 이황은 이기호동(理氣互動)을 주장함으로써 체·용(體用)에 있어 이를 체, 기를 용으로 보는 이기이원론의 일체일용(一體一用)를 넘어서 이에도 체와 용, 기에도 체와 용이 있다고 보게 됨으로 이체이용(二體二用)의 사상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이의 경우에 체는 정태(靜態) 용은 동태(動態)이므로 용은 동태로서 기에 한한다. 따라서 성정을 논함에 있어서도 4단과 7정의 근원으로서의 이황의 이른바 이발·기발이란 두 묘맥(苗脈)만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그의 학설은 곧 이황을 지지하는 성혼(成渾)의 비판을 받아, 양인 간의 이른바 율·우논쟁(栗牛論爭)이 오랫동안 전개되었고, 그 결과 이이는 인심(人心)·도심(道心) 문제를 거쳐 자기의 기발이승론(氣發理乘論)을 끝까지 관철시켰다.

성혼[편집]

成渾 (1535∼1598)

조선전기의 학자. 자는 호원(浩原), 호는 우계(牛溪)·묵암(默庵). 일찍부터 이이(李珥)와 교분이 두터웠으나 학설에 있어서는 이황(李滉)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지지,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주장하는 이이와 논쟁을 벌여 이른바 율·우논쟁(栗牛論爭)이 6년간이나 전개하기에 이르렀다. 이 때문에 이이의 문인인 조헌(趙憲)·한교(韓嶠)·황신(黃愼)·이귀(李貴) 등이 그의 문인이 되었다. 그는 또 글씨에도 능했다. 저서에 <우계집(牛溪集)> <주문지결(朱門旨訣)> <위학지방도(爲學之方圖)>등이 있다.

율·우 논쟁[편집]

栗牛論爭 이이와 우계(牛溪) 성혼 사이에 전개된 4단7정논쟁. 이는 성혼이 이이에게 질문서를 보냄으로써 발단되어 양인 간의 왕복 토론을 통하여 전개되었다. 성혼은 당시 퇴·고논쟁(退高論爭)을 보고 오히려 이황(李滉)에게 찬성함으로써 기대승의 견해에 대해 이의를 품고서 이이에게 물었다. 주희는 <중용장구(中庸章句)> 서문에서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을 논하며 "마음의 허령지각(虛靈知覺)함은 하나뿐이다. 인심과 도심이 서로 다른 까닭은 혹은 형기의 사(形氣之私)에서 나오고(生), 혹은 성명의 정(性命之正)에 기초하여(原) 그 지각하는 바가 다르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성혼은 이러한 인심·도심의 구별을 이황의 4단7정의 이기분속(理氣分屬)과 동일시하였는바 이는 기대승이 "이심·도심의 차이는 이·기로 분속시킬 수가 있지만 4단7정은 이·기로 분속시킬 수 없다"고 한데 대한 질문이다. 줄여서 말하면 성혼의 주장은 이황의 이기호발의 입장, 즉 인심과 도심, 4단과 7정의 이기분 속의 입장이다. 이에 대해 이이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발하는 것은 기요(氣自動의 뜻), 발하는 까닭(所以, 즉 原理) 이다. 기가 아니면 발하지 못하고, 이가 아니면 발하는 바(理致)가없다." "이는 기를 주재하는 것이요, 기는 이가 타는 곳이니, 이가 아니면 기의 근거할 곳(원리·법칙)이 없고, 기가 아니면 이가 붙을 곳(素材)이 없다." 이렇게 이와 기는 서로 떠나지 못함으로써 이와 기의 관계는 2이1(二而一)이요, 1이2(一而二)라 한다. 그러므로 개념상으로 보면 이기는 '결시이물(決是二物)'로서 서로 판이하지만, 실재세계에 있어서는 '불가분개(不可分開)'로서 시간적 선후나 공간적인 이합(離合)이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이이의 성정론(性情論)은 기발이승으로 일관한다. 4단7정이 다 같이 정으로서 기발이승인데, "4단은 7정 중의 선일별(善一邊)이요, 7정은 사단의 총회자(總會者)다."

이이는 7정을 정의 전체로서 총회자로 보고, 그 중에는 선악이 공재(共在)하는데 선정은 중절(中節)한 것이며, 악정은 지나치거나(過) 모자란(不及) 결과 중절하지 못한 것이라 한다. 선은 심의체로 전선(全善)한 성이 직수(直遂)한 것이며, 악은 전선인성이 기를 타고 나올 때 물욕(物欲) 등 형기(形氣)에 가리워져 그 성의 본체를 그대로 드러내지 못한 것이다. 또 인심과 도심의 관계에 있어 이황과 성혼은 이기호발의 입장에서 "이가 발하면 도심의 되고, 기가 발하면 인심이 된다"고 함으로써 도심의 발처(發處)와 인심의 발처를 두 가지로 구별했다. 그러나 기발만 인정하는 이이에 있어서는 다만 하나의 근원이 있을 뿐이니, "그 발할 때 혹 도의(道義)를 위하여, 혹 형기를 위하니, 고로 그 발함에 따라 그 이름이 다른 것이다"라고 했다. 이이는 성·정·의(意)를 다음과 같이 구별한다. 심의 적연부동(寂然不動)한 체를 성, 대상에 접감(接感)하여 처음 발하는 용을 정, 정에 따라서 심이 계교(計較), 사량(思量)한 상태가 의다. 그러면 4단이나 7정은 <성+정>, 도심과 인심은 <성+정+의>의 구조를 가진다. 그런데 의가 계교 사량함으로써 인심이었던 것이 도심으로, 또 도심이었던 것이 인심으로 될 수 있으므로 인심과 도심은 상대적으로 왔다 갔다 할 수 있으나 4단과 7정은 상대적인 것이 아니다.

기발이승일도설[편집]

氣發理乘一途說

율곡 이이(李珥)의 학설로서 이황·성혼 등의 이기분속설(理氣分屬說)을 부정하고 <이>와 <기>는 불가분의 것이니 4단과 7정은 다같이 기발이승(氣發理乘)이라고 하였다.

이기분속설[편집]

理氣分屬說

이황·성혼의 학설. 이기2원론에 의해 4단은 <이>에 속하고, 7정은 <기>에 속하여 완전히 근원이 다를 뿐만 아니라 전자는 순선(純善)이고, 후자에는 선·악이 있다고 질적으로 구별한다.

노수신[편집]

盧守愼 (1515∼1590)

조선의 학자·문신. 자는 과회(寡悔), 호는 소재(蘇齋)·이재(伊齋)·암실(暗室)·여봉노인(茹峰老人), 본관은 광주(光州). 이연경(李延慶)의 문인. 이조좌랑(吏曹佐郞)으로 있다가 을사사화(乙巳士禍)로 인하여 진도(珍島)에서 19년간 귀양살이를 했다. 그 동안 이황(李滉)·김인후(金麟厚) 등과 서신으로 학문을 토론, 주자(朱子)의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에 이설(異說)을 세워 이항(李恒)과 논쟁하여 <인심도심변(人心道心辯)>을 저술하고, 4·7론(四七論)에 대해서도 기대승(奇大升)과 의견을 교환하는 등 학문에 정진했으며, 1567년 선조가 즉위하자 귀양살이에서 풀려나와 교리(校理)로 기용, 선조 18년 영의정에 이르렀다. 양명학(陽明學)도 깊이 연구하여 주자학파로부터 공격을 받았으며, 휴정(休靜)·선수(善脩) 등과도 교제하여 불교적인 영향을 받기도 하였다. 저서에 <시강록(侍講錄)> <소재문집(蘇齋文集)> 등이 있다. 시호는 문의(文懿), 뒤에 문간(文簡)으로 개시(改諡)했다.

주리파[편집]

主理派

이황의 이기호발설을 옹호하여 이(理) 일변도의 '심즉리(心卽理)'를 주장한 조선왕조 성리학의 양대산맥 중의 하나. 주희의 성리학이 조선왕조에 수입되어 이황이 이발(理發), 이이가 기발(氣發)을 주장하게 되자 조선의 철학계는 주리파와 주기파의 양대진영으로 크게 갈라지게 되었다. 그중 이황을 지지하는 주리파는 영남지방에서 성행하였으므로 영남학파(嶺南學派)라고도 했다. 이황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에 대해서 이황의 문하에서는 거의 이론이 없었다. 이황 문하의 석학인 유성룡(柳成龍)·김성일(金誠一) 등은 스승과의 왕복서한에서 기대승(奇大升)이 굴복하였고, 또한 이황의 학설은 주자의 학설에 의거하고 있는 것이므로, 이황의 학설에 대한 시비는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이가 이황의 이기호발설에 반대, 기호지방에 이이의 사상이 보급되고, 정치성도 가미되어 서인학자 전체가 이황의 설을 배척하자 이를 남인에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인 영남학파에서는 이황의 학설을 맹렬히 옹호하여 '심즉리(心卽理)'의 이론을 굳혀서 주리파의 철학이 확립되었다. 이이의 학설을 공격하고 이황의 학설을 공공연히 옹호하기 시작한 것은 이황의 사후 약 백여년 이후부터의 일로 이러한 경향을 현저하게 드러낸 사람은 이현일(李玄逸)이었다. 그는 "4단의 공(公)이요 7정은 사(私)니, 공은 불선(不善)이 없으므로 이발이라 하는 것이며 사는 혹은 선하고 혹은 불선하여 기발이라 하므로 이발·기발의 구별이 있는 것은 당연하지 않는가?"라고 이황의 설을 옹호하였다. 그러나 이현일은 4단은 순전한 기발일 뿐 이(理)가 섞이지 않았다든가, 7정은 순전한 기발일 뿐 이(理)가 섞이지 않았다고 주장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4단에는 이가 주가 되고 7정에는 기가 주가 된다는 것을 주장한 것이다. 그러나 이후 정치적 대립의 격화와 함께 영남학파와 기호학파의 대립도 첨예화되어, 영남학파는 율곡의 기발설(氣發說)에 반대한 나머지 기를 버리고 이만을 취하는 주리설의 방향으로 나갔다. 주리파에는 이재(李栽)·이상정(李象靖)·유치명(柳致明)·이진상(李震相)·곽종석(郭鍾錫)·기정진(奇正鎭) 등이 있다.

주기파[편집]

主氣派

'심즉기(心卽氣)'를 주장하는 율곡이 기발설(氣發說)을 옹호한 조선시대 성리학의 2대 분파중의 하나. 경기·호남지방에서 성행하였으므로 기호학파(畿湖學派)라고도 한다. 조선왕조 성리학계의 일찍이 주기론(主氣論)을 주창한 것은 화담 서경덕(花潭 徐敬德)이었다. 그후 얼마 동안은 그의 입장을 지지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이이와 그를 이은 율곡학파가 이황의 이기호발설을 공격하자 퇴계학파는 이기호발설을 옹호하며 율곡학파를 주기파(主氣派)라고 불렀다. 그뿐 아니라 율곡학파도 이기호발설을 공격하며 자파의 이론을 확립하는 과정에서 기(氣)를 중심으로 보는 입장이 선명해져서 마지막에는 주기설을 주장하는 단계에까지 도달하였다. 이리하여 이이는 최초로 '심시기(心是氣)'라는 말을 사용했다. 곧 이이는 심(心)의 주된 작용은 허령불매(虛靈不昧)한 지각(知覺)에 있으며, 이 지각은 이가 아니라 기에 속하는 것이라 하여 '심시기'라고 하였다. 그후에 송시열(宋時烈)은 이이의 해석을 따라 '심의 허령은 분명히 기'라고 하였고, 한원진(韓元震)은 성(性)과 심을 구별하여 성이 이에 속한다고 한 이상 심은 기에 속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는 입장을 취하였다. 또한 임성주(任聖周)는 '심즉기'가 진리일 뿐 아니라 심과 성은 둘이면서도 하나이므로 성도 기라는 입장을 취하고 우주나 심의 본체(本 )가 오로지 기 하나 뿐이라고 주장하여 주기론의 정점을 이루었다. 주기론에 속하는 학자는 임정주·임성주(任靖周)·임노(任魯)·임헌회(任憲晦) 등이다.

송시열[편집]

宋時烈 (1607∼1689)

조선의 학자·정치가. 자는 영보(英甫), 호는 우암(尤庵), 시호는 문정(文正). 효종·현종·숙종대를 통해 중용(重用)되어 벼슬이 좌의정(左議政)에 이르기도 했다.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으로 이이(李珥)의 학통(學統)을 계승하여 일생을 주자학(朱子學) 연구에 몰두한 거유(巨儒)로 기호학파(畿湖學派)의 주류를 이루었다. 4단7정론(四端七情論)에 있어서 이황(李滉)의 이원론적(二元論的)인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배격하고 이이의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지지, 4단7정이 모두 기(氣)라 하여 1원론적(一元論的) 사상을 발전시켰으며, 예론(禮論)에도 밝았다. 성격이 과격하여 많은 정적(政敵)을 가졌으나 뛰어난 학식으로 많은 학자를 길러냈다. 저술에는 <우암집(尤庵集)> <2정서분류(二程書分類)> <주자어류소분(朱子語類小分)> 등이 있다. 왕세자의 책봉문제로 상소했다가 사사(賜死)되었다.

양명학 논쟁[편집]

陽明學論爭

16세기∼18세기에 조선 유학계에서 전개된 양명학의 찬·반 논쟁. 16세기 초 중국 명에서 왕양명(王陽明)이 육상산(陸象山)·진백사(陳白沙)의 영향을 받아 주자학을 비판하고, '심즉리(心卽理)', '성즉리(性卽理)>', '치량지(致良知)', '지행합일(知行合一)' 등을 핵심으로 하는 심학(心學)을 일으켜 그 학파가 번창하자 주자학(朱子學) 일색이었던 조선 유학계에서 이에 대한 찬·반 논쟁이 일어나, 양명학 배척론이 압도적으로 우세하여 그 도입을 억제하고, 양명학 찬성론을 '사문난적(斯文亂賊)', '이단(異端)'이라고 규탄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먼저 이황은 <전습록변(傳習錄辨)>을 지어 지행합일설을 비판하였고, 유성룡(柳成龍)은 그밖에 왕양명의 주자학 비판을 조목별로 반박했다. 그러나 최명길(崔鳴吉)·장유(張維) 등은 양명학을 연구하였으며, 특히 장유는 조선 유학계의 주자학 일변도를 개탄하였다. 또한 이익(李瀷)도 주자학의 주지주의(主知主義)적 경향의 공리공론(空理空論)을 비판하고 행(行)을 강조하였다.

최명길[편집]

崔鳴吉 (1586∼1647)

조선의 학자·문신. 자는 자겸(子兼), 호는 지천(遲川)·창랑(滄浪), 본관은 전주(全州). 이항복(李恒福)·신흠(申欽)의 문인. 광해군 6년 병조정랑(兵曹正郞)으로 있다가 파직되어 가평(加平)에 내려가 조익(趙瀷)·장유(張維)·이시백(李時白)등과 교유(交遊)하며 학문에 정진, 특히 당시 이단시(異端視) 되었던 양명학(陽明學) 연구에 힘쓰니 장유와 함께 조선에 양명학을 수입한 선봉이 되었다. 1623년 서인(西人)으로서 인조반정(人祖反正)에 가담하여 정사공신(靖社功臣)이 되었고, 인조 14년(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주화론(主和論)을 주장, 항서(降書)를 초안했다. 문장이 뛰어나고 저서에 <지천집(遲川集)> <경서기의(經書記疑)> <병자봉사(丙子封事)>등이 있다.

장유[편집]

張維 (1587∼1638)

조선의 문신. 자는 지국(持國). 호는 계곡(谿谷)·묵소(默所). 김장생(金長生)의 문인.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에 가담하여 정사공신(靖社功臣)이 되었고, 인조 14년의 병자호란(丙子胡亂) 대에 최명길(崔鳴吉)과 함께 강화를 주장했으며, 또한 최명길과 함께 양명학을 전공하였다. 그는 조선시대의 사상이 편벽(偏僻)함을 지적하여 "중국에는 학술에 갈래가 많아 정학자(正學者)도 있고 단학자(丹學者)도 있고 정주(程朱)를 배우는 자도 있고 육씨(陸氏)를 배우는 자도 있어 문경(門經)이 불일(不一)한데 우리나라는 유식무식(有識無識)할 것 없이, 책끼고 글 읽는 사람은 다 정주(程朱)를 송(誦)하여 다른 학(學)이 있음을 듣지 못하나 우리 사습(士習)이 과연 중국보다 훌륭하고 그런 것인가?"라고 반문하였다. 그는 양명학을 선학이라고 비의(非議)함을 변박하였으며, 천문·지리·의술·병서(兵書)·그림·글씨에 능통했고, 특히 문장에 뛰어났다. 그의 많은 저술은 대부분 정묘호란 때 분실되었고 <계곡집(谿谷集)> <계곡만필(谿谷漫筆)> <음부경주해(陰符經主解)> 등이 남아 있다.

이항[편집]

李恒 (1499∼1576)

조선의 학자. 자는 항지(恒之), 호는 일재(一齋). 일찍부터 무예(武藝)를 익히다가 30세에 이르러 학문을 시작하여 거유(巨儒)가 되었다. 그는 반궁성의(反躬誠意)를 입덕(入德)의 근본으로 삼고 주경궁리(主敬窮理)를 수도(修道)의 방침으로 알아 항상 4서(四書), 그 중에도 <대학(大學)>에 치력(致力)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이기(理氣)를 논함에 이르러서는 이(理)와 기(氣)가 혼연일물(渾然一物)이란 것, 즉 태극(太極)인 이와 음양(陰陽)인 기가 일체라는 것을 역설하였다. 선조 7년 장령(掌令)이 되고 그후 장학원정(掌學院正)에 올라서 병으로 사직했다. 저서에 <일재집(一齋集)>이 있다.

이기일물설[편집]

理氣一物說

조선전기의 유학자 이항(李恒)의 학설. 이(理)와 기(氣)는 혼연일체라고 하는 것으로 명나라 유학자 나흠순(羅欽順)의 학설과 유사하다. 이항의 주장에 의하면 태극(太極)이 음양(陰陽)을 낳는다고 하는데 따지고 보면 음양이 생기기 전에는 역시 태극 속에 있었을 것이요, 음양이 생긴 후에는 태극이 음양 속에 있는 것이니 태극과 음양은 서로 불가분리이다. 그런데 태극은 이요, 음양은 기에 속하니 이와 기는 불가분리의 혼연한 일체이다. 이 학설에 대해 이황은 이의 뜻을 모르는 데서 온 지나친 고집이라고 논평하였다.

박세당[편집]

朴世堂 (1629∼1703)

조선중기의 유학자. 자는 계긍(季肯), 호는 서계(西溪). 현종 1년에 과거에 급제, 암행어사·수찬(修撰)·이조좌랑(吏曹佐郞)을 지내고, 동왕 8년에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다녀와 숙종 20년에는 승지에 특진, 판중추부사(判中樞府使)에 이르렀다. <사변록(思辨錄)>을 저술하여 주자학을 비판하고 독자적인 견해를 발표하여 '반주자(反朱子)'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려 유배 중 죽었다. 그는 또한 <색경(穡經)> 등을 써서 박물학(博物學)의 학풍을 이룩한 실학자로도 유명하다.

사변록[편집]

思辨錄

박세당의 저서. 유학경전 중 4서(四書)와 <상서(尙書)> <시경(詩 )>을 주해(註解)한 책. 일명 <통록(通錄)>. 처음 <대학(大學)> <중용(中庸)> <논어(論語)> <맹자(孟子)>의 4서에 관한 사변록을 완성하고 그후 계속해 <상서>와 <시경>에 대한 주석을 가하다가 신병으로 <주역(周易)>에는 손을 대지 못한 채 그친 것이다. 모두 14책으로 내용·편차(編次)를 보면 1책에 <대학>, 2책에 <중용>, 3책에 <논어>, 4∼5책에 <맹자>, 6∼9책에 <상서>, 10∼14책에 <시경> 등에 대한 사변록을 수록하였다. 이 중에 저자가 가장 치력(致力)하고 또 당시 일반의 비난을 받았던 것은 4서에 관한 것이다. 4서의 주설(註說)에는 종래에 관학(官學)의 권위로 주자(朱子)의 설만을 정통시하여 왔던 점을 들어 주자(朱子)의 설을 비판하는 동시에 자기류(流)의 주석을 통하여 이에 대해 새로운 해석을 가했다. 이로 인하여 당시 정계와 학계에 큰 물의를 일으켜 사문난적(斯文亂賊)의 낙인을 받고 저자는 유배당하였다.

장현광[편집]

張顯光 (1554∼1637)

조선의 문신·학자. 자는 덕회(德晦), 호는 여헌(旅軒). 이조참판(吏曹參判)·대사헌·지중추부사(知中樞府使) 등 전후 20여 차례 관직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 오로지 학문연구에만 전심했다.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각 주·군(州郡)에 격문(檄文)을 보내어 근왕(勤王)의 군사를 일으켰고, 다음해 삼전도(三田渡)에서의 항복소식을

듣고 동해안의 산에 들어가 만년을 보냈다. 그는 <우주설(宇宙說)>에서, 우주의 궁극자(窮極者)는 도(道)라 하였다. 또 "상하사방(上下四方)을 우(宇)라 하고 고왕금래(古往今來)를 주(宙)라 한다"고 하고, "우주이하(宇宙以下)는 형이하(形而下)이며 그 도(道)는 곧 형이상(形而上)이다. 형이하는 시종(始終)이 있고 내외(內外)가 있으나, 형이상은 시종이 없고 또 내외도 없다" 따라서 <우주란 시간과 공간을 합한 것이며 유한(有限)하나 오직 도만은 무한(無限)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또 "도는 곧 무극태극(無極太極)이요, 무극태극은 곧 태극이어서 동실이명(同實異名)인 것이다"라고 주장하니 이와 같은 해석은 정통적인 주자학도가 태극이 곧 이(理)라 한 것과 정면으로 대립하는 것이다. 그의 4·7설(四七說)은 이황(李滉) 및 주자의 호발설(互發說)을 반대하고 이이(李珥)의 기발일도설(氣發一途說)과도 그 뜻이 다르다. 그리하여 이와 기를 경(經)과 위(緯)에 비유함으로써 이기일본설(理氣一本說)을 역설했다. 그의 저술로는 <여헌문집(旅軒文集)> <만학요증(晩學要曾)> <우주설(宇宙說)> <성리설(性理說)> <경위설(經緯說)>등이 있다.

이기일본설[편집]

理氣一本說

조선 인조 때의 유학자 장현광(張顯光)의 학설. <이>와 <기>는 2물2본(二物二本)이 아니고, 서로 체(體)와 용(用)의 관계에 있을 뿐 같은 것이니, 오히려 경(經)과 위(緯)로 설명하는 것이 좋다고 하였다. 이러한 입장에서 4단7정(四端七情)을 보면 기발이본(氣發理本)이니, 주자가 4단과 7정을 이발, 기발로 갈라서 말함은 부당하다고 하여 주자까지 비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