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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의 문예사상〔槪說〕[편집]

조선왕조 일대를 통틀어서 그 전기의 성리학파와 후기의 실학파가 문예사상의 주조(主潮)를 이루었다. 이제 그 후기의 문예사상을 밝히려면 먼저 위로 거슬러 올라서 광해조(光海朝)의 교산(喬山) 허균(許筠)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허균의 사실적인 문예사상은 그의 정치적인 실패에 의하여 중단되었으며, 그를 이은 인조 이후의 반동적 문학가에 의하여 더욱 말살되었다. 일반적 우리는 서포(西浦) 김만중(金萬重)이 언문으로 소설을

썼다 하여 그를 추숭(推崇)하는 경향이 없지 않다. 그러나 그는 실로 일부다처주의(一夫多妻主義)에 의한 낭만적인 문예사상을 고수한 작가로서 허균의 문예사상에 대하여 가장 커다란 반동세력을 구축한 작가이다. 김만중의 이러한 문예사조에 대하여 반기를 높이 든 것이 곧 영(英)·정(正祖)대 실학파의 문예사상이다. 그 당시 실학파군(群)은 실로 우후(雨後)의 춘순(春筍)처럼 열립(列立)되었다. 그러나 그 중에서는 특히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의 일계(一系)와 이용휴(李用休)의 일계가 양대(兩大) 주조를 이루었다. 박지원의 명저(名著) <열하일기(熱河日記)>는 일세를 풍미하여 후배들의 문체가 일변되었다. 한편 박지원보다 조금 앞서 이용휴(李用休)와 그의 아들 금대(錦帶) 이가환(李家煥)의 부자를 중심으로 한 문학가들의 문체는 유달리 청신하였다. 그들의 문예사상은 주로 사실적인 경향을 띠어 인조조 이후 모든 부폐한 사회상에 대한 반발과 혁신에서 나온 것이다. 이는 곧 당시의 국학·북학(北學)·서학(西學) 등의 모든 새로운 과학적인 정신의 결정체이다. 서학에 대하여서는 이에 앞서 이미 지봉(芝峯) 이수광, 어우(於于) 유몽인(柳夢寅) 및 허균 등의 수입 또는 논증(論證)이 있었거니와 이때에 이르러서는 성호(星湖) 이익(李瀷)이 특히 이에 대한 연구를 깊이 하였고, 이가환 및 권철신(權哲身)·권일신(權日身)·이기양(李基讓)·이벽(李蘗)·정약용(丁若鏞)·이학규(李學逵) 등 일대의 명류(名流)들이 모두 이에 권권(眷眷)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그 교리에 심취하였기보다는 서구의 과학적인 방법이 아니면 결코 당시의 누적된 부패를 혁신시키지 못할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이에서 이룩된 문예사상의 대표자로서 이용휴·박지원 양계(兩系)가 등장되어 구각(舊殼)을 벗고 신체(新體)를 창조하여 그들의 문풍(文風)이 거연(居然)이 일대를 휩쓸었던 것이다. 이러는 한편 당시 문체의 질적 저하를 걱정하던 정조는 실로 이에 관심이 커서 문체반정책(文體反正策)에 급급하였다. 그리하여 명계(明系)·청초(淸初)의 문집과 패관(稗官)문학·총사(▩史)·잡설(雜說) 등의 서적 구입을 금지하기에까지 이르렀고, 1795년에는 <정시문정(正始文程)> 3권을 반포하여 문체의 회순(回醇)을 기도하여 마침내 문체의 반정을 둘러싸고 커다란 파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 이른바 문체파동은 부교리(副校理) 이동직(李東稷)이 이가환의 문체를 논박(論駁)한 상소로부터 노골적으로 나타나게 되었던 것이다. 이동직은 이가환의 학문이 서학에서 나왔으며, 문학은 패관소품(小品)을 오로지 숭상하였다고 주장하여 그를 맹렬히 배격하였다. 이에 노한 정조는 이러한 문체의 불순정(不醇正)의 책임은 반드시 이가환에게만 지을 것이 아니라 박지원에게 보다 더 커다란 책임이 있음을 지적하여 박지원 일계(一系)의 문예가들에게 순정서(書)의 찬진(撰進)을 명령하였다. 이는 실로 청천벽력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문체를 고친다는 것은 어려웠다. 이리하여 그들은 실로 18세기 말기의 끝없는 고민을 부둥켜 안은 채 울음을 터뜨린 것이다. 이는 비단 어린 아이뿐만 아니라

당시 제제(啼啼)·곡곡적(哭哭的)인 수많은 민중남녀의 심경을 대변한 것이다. 그 중 특히 박지원과 같은 이는 그 불세출의 풍종(風悰), 또는 실학사상·문명 의식 내지 웅심(雄深)한 풍자 등이 모두 그 문예작품 속에 실려 있는 동시에 그 희소와 타매(唾罵)의 어느 것이나 문장이 아닌 것이 없었다. 그들의 작품은 실로 민족문학적인 견지에서 위로 허균의 문예사상을 이어 받은 한편 김만중의 낭만적인 부패상을 배격하고, 아래로 <춘향전> 등의 평민적인 문예사상을 열어주게 하였던 것이다. 이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세계문학적인 관점에서 논한다 하더라도 중국의 <수호지> <홍루몽> 등의 혁명적이교 사실적인 작품에 비하여 비록 양적인 면에서는 그들의 것을 따를 수 없겠지마는 특히 그 사상적 면에서는 한 걸음 앞선 것 같기도 하다. 그 하나의 예증을 들면 물론 조선왕조의 사회적 계급이 중국의 송·명대에 비하여 워낙 다층적이기도 하지마는 이처럼 다채로운 무대 위에 등장된 인물들이 중국소설 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황왕(皇王)·귀족·군벌·관료·대지주·자본가보다 주로 시괴(市僧)·역부(役夫)·기인(畸人)·광객(曠客)·군교(軍校)·걸인·고용·역관(譯官)·중인·상수 등 서민적 신분의 소유자였다는 점에 주시하지 않을 수 없다. 애당초 동방인의 문예사상은 유조(儒祖) 공자에게 출발되었다. 그의 이른바 '수사입성(修辭立誠)'은 곧 후세 사실파의 문예사상의 원천이 되었던 것이다. 중국에서는 물론이요 우리나라에서도 역시 그러하였던 까닭은 같은 문화권 내에서 성장하였기 때문이다. 이 '수사입성'의 사상은 시대의 변천을 따라 송(宋) 학자에 이르러서는 '문이재도(文以載道)'의 사상으로 발전하였고, 문이재도의 사상은 사실적인 경향을 생산하게 되었다. 그러면 이 조선후기 실학파의 문예사상은 동방의 전통적인 사상을 올바르게 계승하는 동시에 송(宋)학파의 말폐(末弊)가 그 당시에 그지없이 부패한 사회상을 빚어내었음에 대한 반발과 저항, 또는 혁신의 길을 모색하거나 실천에 옮기는 데에 있었다. 이는 곧 동방의 모든 민족의 문예사상은 주로 '애국연민(愛國憐民)'에 있는 것인 만큼 어떤 문예작품이고 이 나라를 사랑하고 인민을 불쌍히 여기지 않는 것은 아무런 가치를 논할 수 없는 것과 관련해서 생각해 볼 문제이다.

박지원[편집]

朴趾源 (1737∼1805)

조선후기의 실학자·작가. 자는 중미(仲美). 호는 연암(燕巖). 16세에 결혼하여 처숙(妻叔) 이군문(李君文)에게 배우고, 30세에 홍대용(洪大容)을 만나 신학문을 배웠다. 정조 1년 벽파(僻派)로 몰려 위협을 느끼고 연암협(燕巖峽)으로 이사, 독서에 전심하였다. 동왕 4년 진하사(進賀使) 박명원(朴明源)을 따라 청나라에 가서 중국인들의 실생활을 보고 실학에 눈떴고, 각지 군수·부수를 거쳐 순조 1년에 치사(致仕)하였다. 당시 홍대용·박제가(朴齊家)와 함께 북학파(北學派)의 영수로 청나라 문물을 받아들일 것을 주장했고, 그의 저서 <열하일기(熱河日記)>는 정치·경제·병사·천문·지리·문학 등 각 방면에 걸쳐 청나라의 신문물을 서술하여 실학사상을 전개한 책이다. 또한 그의 한문소설 10편은 독특한 해학으로서 고루한 양반, 무능한 위정자를 풍자하는 등 독창적이고 사실적 문체를 구사하여 문체혁신의 표본이 되었다. 당시로서는 진보적이었던 그의 사상과 문체로 인하여 그는 보수파로부터 많은 비난과 박해에 부딪쳤으나 후세에 와서는 높은 평가를 받게 되었다.

열하일기[편집]

熱河日記

조선 정조 때의 북학론자(北學論者)인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은 중국 견문기, 수많은 사본이 전하는데 그 중 신빙성이 있는 것은 충남대학교 소장본으로 박지원장(朴趾源章)이 찍혀 있는 연암 수택본(燕巖手澤本)이다. 26권 10책으로 되어 있다. 박지원은 뛰어난 이론가로서 철두철미 실사구시(實事求是), 이용후생(利用厚生)을 주장하였으니 이 책에서도 이 점에 중점을 두어, 중국의 역사·지리·풍속에서 정치·경제·문학·예술에 걸쳐서술하지 않는 것이 없으리 만큼 방대하게 서술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 책에는 중국의 학자들과 더불어 주고 받은 두 나라의 문물제도에 대한 날카로운 논평과 비판, 월세계(月世界)·지전(地轉) 등의 천문학과 천주(天主)·서학(西學)·지옥(地獄) 등에 대한 저자의 참신한 이론이 실려 있기도 하다. 제10권의 옥갑야화(玉匣夜話)에 실려 있는 <허생전>이나 제4권 관내정사(關內程史)에 실려 있는 <호질(虎叱)>에서는 날카로운 풍자와 멋있는 해학을 통하여서 경제에 어두움을 부끄러이 여기지 않고 무위도식하는 당시의 부패한 선비들을 풍자하는 한편 경제의 실용적인 면, 외국무역의 필요성 등을 역설했으며 또한 유교도덕 속의 위선적인 인간들이 얼마나 부패되어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이 책은 비실용적(非實用的)인 성리학(性理學)의 공론(空論)에 반기(反旗)를 들고 과학적 실용주의에 입각, 민족의 자주의식을 고취한 민족의 고전이다.

문체반정[편집]

文體反正

조선 정조의 문화정책의 하나. 18세기에 들어와, 도문일치(道文一致)의 문장계(文章界)의 전통을 깨뜨리는 문체(文體)가 나타났다. 도문일치는 국가의 기강(紀綱)을 광정(匡正)하고 국초 이래의 문통(文統)을 계승 진작(振作)하려는 위정자의 시도였으나, 임란(壬亂)·호란(胡亂)이 가져온 민생(民生)의 혼란과 정신적 충격은 그러한 공론(空論)에 대한 환멸과 신사조(新思潮)에 대한 갈망으로 나타나 실학(實學)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 실학은 문예면에 있어서 도문일치론에 구애되지 않고 자유자재로 성정(性情)을 표현하는 신문체(新文體)를 발생하게 하였다. 정조는 당시 일반 문인의 이러한 신체에 편중하는 경향을 개탄하고 문체반정에 착수하여 1776년 즉위하는 해에 규장각(奎章閣)을 설치하고 당시 가장 순정(醇正)한 고문(古文)의 대가(大家)였던 황경원(黃景源)·이복원(李福源)을 제학(提學)으로 임명, 이 양인의 문장을 모범으로 하였다. 그 외에 주자(朱子)의 문(文)을 위시하여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문, 오경발초(五經拔抄) 등을 출판케 하였다. 이와 같이 정조는 고인의 시문에 대하여 모범을 명시(明示)하고 당시 문체를 타락케 하는 원인이라고 생각된 패관소설(稗官小說)·잡서(雜書) 등의 수입을 금하였다. 이때 불순정(不醇正)한 문체를 사용하고 있다고 지적당한 대표자는 박지원(朴趾源)과 이가환(李家煥)이었다.

정시문정[편집]

正始文程

1795년에 규장각(奎章閣)에서 편찬한 과문집(科文集)의 하나. 정조(正祖)는 문체반경(文體反正)을 일으키고, 과거(科擧)의 응제문(應製文)이 좋지 못함을 여러 차례 계칙(戒飭)하다가, 동왕 19년에 초계문신(抄啓文臣)의 시권(試券)과 반유(泮儒)들의 응제시권(應製試券)을 고열(考閱)하여, 이 가운데 합격된 표(表)·부(賦)·시(詩) 여러 편을 규장각에 명하여 편집 간행케 했는 바 이 책은 그때 간행되었다. 3권 1책으로 되어 있다.

이동직[편집]

李東稷 (1749∼ ? ) 조선의 문신. 자는 거경(巨卿). 영조 51년(1775) 정시문과(庭試文科) 병과(丙科)에 급제, 정조 16년(1792) 부교리로 재직중 박지원(朴趾源)의 저서 <열하일기(熱河日記)>의 문체가 저속함을 상소했고, 다시 남인(南人) 이가환(李家煥)의 문체가 서학(西學)의 문체라고 논척(論斥)하는 문체반정(文體反正)의 앞장에 섰다. 주자학적인 전통에 입각하여 신문학을 배척했다.

이용휴[편집]

李用休

조선 영·정조시대의 문인. 호는 혜환재, 실학자 이익(李瀷)의 조카요, 가환(家煥)의 아버지로서 일찍이 진사시에 합격 음보(蔭補)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使)가 되었다. 문명(文名)이 높아 영·정조시대를 통해 문단에서 박지원(朴趾源)과 함께 대표적 인물이었다. 가학(家學)인 실학을 계승하였으며, 그의 시(詩)는 사실적인 경향을 지녔다.

이가환[편집]

李家煥 (1742∼1801)

조선 영·정조시대의 학자. 천주교도. 자는 정조(廷藻), 호는 금대(錦帶)·정헌(貞軒). 용휴(用休)의 아들, 익(瀷)의 종손 정조 1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여 당시 이름 높은 남인(南人)학자 안정복(安鼎福)·정약용(丁若鏞) 등과 교유(交遊)하면서 새로운 학문인 실학 연구에 힘썼다. 정조 8년 숙부 승훈(承薰)이 북경(北京)에서 돌아왔을 때 천주교에 대한 학문상의 흥미를 갖고 교리를 번역·연구했으나 입교(入敎)는 하지 않았다. 광주부윤(廣州府尹) ·충주목사(忠州牧使)로 재직할 때는 천주교도를 탄압하였으나 파직된 후 다시 천주교를 연구하고 신자(信者)가 되었다. 종교운동에 헌신하다 순조 1년(1801년)의 신유박해(辛酉迫害) 때 이승훈 등과 함께 체포되어 순교했다. 저서로는 <금대유고(錦帶遺稿)>가 전한다. 그는 당시의 국학(國學)·북학(北學)·서학(西學) 등의 새로운 과학적인 학풍을 흡수하여 부패한 사회상에 반발하였다. 문체에 있어서는 사실적이고 청신한 문체(文體)로의 혁신을 주장하였다가 이동직(李東稷)의 논박(論駁)을 받아 문체반정(文體反正)의 표적이 되었다.

춘향전[편집]

春香傳

조선 영·정조 시대에 이루어졌으리라 믿어지는 작자 미상의 고대 소설. 이본(異本)이 많아 갑오개혁(甲午改革) 이전의 이본만 20여종이 있고 오늘날엔 외국어로 번역된 것까지 합치면 무려 70∼80여 종이나 있다. 완판본(完板本)이 가장 우수하다. 내용은 사회적 계급의식을 초월한 애정문제로 취급함으로써, 계급제도의 타파(打破)를 주장하였고, 춘향의 정절사수(貞節死守)를 통하여 당시 지배계급인 평민들의 합법적인 반항정신과 인권을 주장하고 있다. 이 책에는 또한 변부사(卞府使)를 등장시켜 지배계급인 위정자들의 횡포성과 부패성을 폭로하고 있는 바 변부사의 생일잔치에서 이몽룡(李夢龍)이 지은 한시(漢詩)는 그것을 잘 표현해 주고 있다. 작자는 민중편에 서서 새로운 세계관에 입각한 투철한 눈으로 현실을 바라보고, 특수계급에만 한정된 재래적인 소재 취급을 버리고 사실적으로 고도의 윤리관을 가지고서 민족이 나아갈 길을 보여주고 있다. 이 작품은 영·정조시대 이전의 귀족문화가 붕괴되고 새로운 평민 중심의 문화가 형성(形成)되어 가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작품으로 우리민족의 고전(古典)으로 길이 남을 작품이다.

김만중[편집]

金萬重 (1637∼1692)

조선의 문신·소설가. 자는 중숙(重淑), 호는 서포(西浦). 현종 6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장원, 동왕 12년 암행어사(暗行御史)가 되어 경기·삼남(三南)의 진정(賑政)을 조사했다. 숙종 11년 홍문관 대제학이 되고 동왕 15년에 숙종의 민비(閔妃) 폐위문제를 극력 반대하다가 남해(南海)에 유배당하였다. 유배지에서 그의 노모(老母)를 위하여 <구운몽(九雲夢)>을 썼고, 이보다 앞서 숙종을 회오(悔悟)시키기 위해서 <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를 집필했다. 그는 소설의 전문을 한글로 집필하여 소설문학의 선구자가 되었고, 한글로 쓴 문학이라야 진정한 국문학이라는 문학관을 주장하였으며, 정철(鄭澈)의 기사를 높이 평가했다. 그는 <구운몽>에서 동양적인 봉건귀족들의 이상적인 생활을 표현했다. 즉 일부다처주의(一夫多妻主義)의 교묘한 합리화, 낙천적인 인생 향략사상 등이 그것이다. <사씨남정기>는 가정 안의 씨앗싸움을 그린 최초의 가정소설로 권선징악(勸善懲惡)을 고취하고, 궁중비극을 측면에서 공격하고 풍자하였다. 그는 이러한 소설을 통해서 유(儒)·불(佛)·도(道) 3교의 혼연한 일치경을 표현하고 있으며, 특히 내세를 긍정하는 불교적 체념 및 숙명론(宿命論)을 전개하고 있다. 그의 저서로는 이외에 <서포만필(西浦漫筆)> <서포집(西浦集)> <고시선(古詩選)>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