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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동양사상/한국의 사상/조선후기의 사상/조선후기의 사학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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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의 사학사상〔槪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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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의 일련의 선진적인 학자들은 현실적인 정치, 사회제도의 여러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서 고민했다. 그 이전의 시대에도 선진적인 사상가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 시기만큼 의욕적이지는 못했다. 여하간 조선후기의 이런 사상가들의 어떤 분은 벼슬길에 있으면서 그 해결을 도모하기도 했고 또 어떤 측에서는 초야(草野)에 묻혀 살면서 제나름대로의 방안(方案)을 모색(摸索)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이 시대의 여건에서, 유교이념(儒敎理念)을 저버린 사상은 있을 수가 없었다. 어떤 모순의 해결을 위한 기준은 늘 유교적인 것에 있었다. 서학(西學)의 영향, 청조문물(淸朝文物)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깃들게 되던 18세기 무렵부터는 꼭 유교적인 데에만 기준한 것도 아니었지만 대부분의 생각은 유교이념을 떠날 수가 없었다. 따라서 현실의 광정(匡正)-새로운 이상적(理想的)인 국가·사회의 염원(念願)은 유교적인 이상세계에 준거(準據)해서 현실의 비판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 현실의 비판은 역사적인 안목(眼目)에서 합리성을 찾고자 한 일이 많았다. 전근대적인 역사가 자치적(資治的)인 데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면 조선후기의 역사의식(歷史意識) 또한 자치적인 의의가 다분했다. 현실은 언제나 만족한 것이 못된다. 더욱이 모순을 직시하여 그 광정(匡正)을 꾀하던 입장에서는 더욱 그러했다. 역사 연구는 오늘날의 과학적인 방법론에 의해서도 늘 비판적이다. 시대의 추이를 긍정적으로 이해한다고 하더라도 그 속에 내재되어 있는 사실의 비판에서 시작된다. 하물며 조선후기의 역사적 안목도 이런 비판을 떠날 수가 없었다. 아울러 전술(前述)한 조선후기의 일련의 선진적인 학자들은 자주적이었다. 자아(自我)의 재발견이라고도 이름하거니와 모든 문제를 자주적인 견지에서 해결하고자 했다. 종래의 부용적(附庸的) 태도에서 바로 서게 된 것이다. 이런 생각에서 자국(自國)의 역사·지리에 대한 인식이 새로워진 것이다. 한국에서는 역사의식이 민족적 각성(覺醒)의 시기(그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에 많이 일어났다. 과연 민족이란 개념이 이 시기에 성립하느냐 않느냐 하는 것은 별문제로 하더라도 자아를 강력하게 인식하던 자주적인 시기에 일어났다. 이런 예는 북방민족의 침구(侵寇)를 입었던 고려중기에서도 볼 수 있고 신체제의 확립기이던 조선초기에서도 찾을 수 있으며 남북 두 이민족(異民族)의 침구를 받았던 조선중기에서도 나타났다. 더욱이 현실적인 모순을 눈앞에 놓고 그 해결에 고심하던 18세기 전후의 이지적(理智的)인 사상가들에게서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개화(開化) 전후의 시기에서도 절실한 것이었다. 물론 이러한 역사의식은 시대적인 특징의 하나가 될 수 있다. 따라서 전술한 예증(例證)의 몇 시기에는 그 역사의식을 대변할 수 있는 역사서(歷史書)가 나왔다. 조선후기도 예외는 아니었다. 먼저 저명한 역사서를 편찬한 사가(史家)로 <동사강목(東史綱目)>의 안정복(安鼎福),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의 이긍익(李肯翊), <해동역사(海東繹史)>의 한치윤(韓致奫) 등이 있다. 그리고 이들을 전후하는 시기의 학자로서 이들에게 영향을 주었거나, 그 영향을 입은 저명한 학자로서는 이익(李瀷)·임상덕(林象德)·윤형성(尹衡聖)·이덕무(李德懋)·조경남(趙慶男)·유득공(柳得恭)·홍양호(洪良浩)·홍석주(洪奭周)·정약용(丁若鏞) 등이 있었다. 이상에 열기(列記)한 학자들은 조선후기의 이른바 실학파(實學派)에서 보면 대부분 역사학파(歷史學派)에 해당한다고도 말할 수 있거니와 이들은 역사를 종래와 같은 단순한 자치적(資治的)인 역사관에 의해서가 아니라 과거의 역사를 가지고 현실을 직시 비판하기 위하여 연구하였다. 소극적인 역사인식이 아니라 적극적인 역사주의(歷史主義) 입장이었다. 과거의 흥망득실(興亡得失)은 현실의 시비(是非)에 직결되어 있다고 보았다. 그러면서도 역사를 객관적으로 고찰하고자 했다. 독자적인 한국사(韓國史)의 체계를 세운 안정복의 <동사강목>에서도 그랬고, 자기의 의견(意見)이라고는 한 줄도 써 넣지 않은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에서도 마찬가지였는가 하면 중국이나 일본측의 자료만으로 한국사의 모습을 투영(投影)해 보고자 했던 한치윤의 <해동역사>도 같은 생각이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그들을 전후하던 앞에 든 학자들도 그랬다. 역사는 과학으로서의 가치가 있어야 한다. 사실의 기술만이 역사인 것은 아니다. 조선후기의 역사서는 각각이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대표적인 예를 들면 <동사강목>은 강목체(綱目體)의 통사(通史)이었고, <연려실기술>은 기사본말체(紀事本末 )의 단대사(斷代史)이었으며, <해동역사(海東繹史)>는 기전체(紀傳體)의 통사이었다. 또 임상덕(林象德)의 <동사회강(東史會綱)>과 윤형성의 <조야첨재(朝野僉載)>는 야사(野史)로서, 유등공은 지난날 고구려의 유민(遺民)에 의해서 건국되었다는 발해(渤海)의 역사 등으로 모두 일가견(一家見)을 세운 바 있다. 이들은 역사를 연구하고 편찬할 때 그 사실(事實)을 사실로서만 인식한 것이 아니라 옳은 사실(史實)로 찾고자 했다. 조선후기의 새 학풍(學風)을 실사구시(實事求是), 또는 구진(求眞)이라고 한다면, 이들에게서도 이런 연구방법과 정신은 손쉽게 찾아 볼 수 있는 것이다. <동사강목>에서의 <고이편(考異篇)>이나, <해동역사>의 편자(編者)의 의견(按 또는 謹按에서 볼 수 있다)은 물론, 유득공의 <발해고(渤海考)>에서의 지리고증(地理考證)에서는 더욱 뚜렷하게 나타나 있다. 그러면서도 이들에게는 독자적인 정신이 강렬하게 작용하고 있다. 한국사의 체계적인 이해와 그 체계를 옳게 재편성하고자 했다. 자국사(自國史)의 종적(縱的)인 연장(延長)도 여기서 나왔고, 횡적인 지리고증이나 사실(史實)의 분석도 여기에서 유래되었다. 이들이 개척해 놓은 한국사의 새 인식은 오늘날의 입장에서 보아서도 수긍(首肯)되는 점이 너무나도 많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계몽(啓蒙)당하는 경우까지 있다. 그것은 이들이 역사연구를 과학적(당시로서는 考證學)·객관적으로 다루어 놓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의 연구방법과 태도를 직접 간접으로 이어 받아서, 그 정신을 드높인 학자로서는 이건창(李建昌)·박은식(朴殷植)·신채호(申采浩)·장지연(張志淵) 등이 있었다. 그 뿐만이 아니라 최남선(崔南善)·이능화(李能和)·정인보(鄭寅普) 등도 이 그룹에 속한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이렇게 보면 조선후기의 역사사상(歷史思想)은 그 당시에만 그 가치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한국 사학사상(史學史上)에서도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익의 역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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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瀷-歷史觀

성호(星湖) 이익(1681∼1763)은 18세기 전기를 대표하는 실학의 거성으로 그에 이르러 실학은 하나의 학파를 형성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의 다채로운 학풍은 대표적 저서 <성호사설(星湖僿說)>에 잘 나타나 있는 바 이 책에는 <논속사론(論束史論)>이 있어 그의 역사관을 엿볼 수 있다. 여기에서 역사란 용이한 것이 아니어서 어떤 사실의 진가(眞假)를 판별하는 인식은 어렵다고 하였다. 특히 과거의 일을 후일에 와서, 더구나 타(他)지역의 작사자(作史者)가 함부로 서술할 수는 없다고 하였다. 따라서 역사를 서술하는 사람에게 억측이나 요량은 금물이며 그것으로 악을 숨겨서도 안 된다고 했다. 성호는 또한 역사에 있어서 실증적인 점을 중시했으며, 문헌 취급에 있어서는 비판적이어야 한다고 했다. 그의 이러한 태도는 단군신화에 대한 비판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성호는 과거의 역사 서술이 선악 한 편에만 서 있다고 지적, 권선과 징악을 동시에 보아야 한다고 했다. 그는 또 역사적 계기는 역사적 시간성 즉 역사적 현실의 추세 속에서 발견해야 하며, 이러한 역사적 현실의 파악에는 필연적으로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었던 사회적·객관적 추세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했다.

안정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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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鼎福(1712∼1791)

조선후기의 실학자(實學者). 자는 백순(百順), 호는 순암(順菴)·한산병은(漢山病隱)·우이자(虞夷子)·상헌(橡軒), 제천 출신이며 이익(李瀷)의 문인. 영조(英祖) 25년에 관계로 나가 한직(閑職)에 머물다가 세손(世孫:正祖)을 보도(輔導)하였다. 어려서부터 이황(李滉)을 사숙하였고, 이익의 학문을 계승하여 이용후생(利用厚生)을 목적으로 하는 실학을 깊이 연구하였다. 특히 역사학에 전심, <동사강목(東史綱目)>을 저술, 종래의 역사를 세밀히 고증 비판하였다. 그의 저서에는 <동사강목> 이외에 <성호사설유편(星湖僿說類編)> <열조통기(列朝通記)> 외 5편이 있고, 문집으로 <순암집(順菴集)> <상헌수필(橡軒隨筆)> 등이 전한다.

동사강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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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史綱目

안정복(安鼎福)이 지은 우리나라 역사서. 고래로부터 고려말까지를 주자(朱子)의 <통감강목(通鑑綱目)>의 체제에 따라 편찬한 편년체사서(編年體史書)이다. 스승 이익(李瀷)의 미완성의 서(序)로 시작해서 <역대 전수도(歷代 傳授圖)>, 지도, <역대 관직연혁도(歷代官職沿革圖)> 등 특이한 것이 있고, 본문 17권 뒤에 부록 3권이 있어 <고이(考異)>, <괴설(怪說)>, <잡설(雜說)>, <지리강역고정(地理彊域考正)> 등과 참고서목이 있어 모두 귀중한 가치를 지닌다. 그의 고대사 서술은 기자조선(箕子朝鮮)을 정통으로 삼고, 단군조선(檀君朝鮮)을 이에 부수시키고 있다. 특히 <역대 관직연혁도>와 부록 중의 <고이(考異)>편 중에 수록된 고증의 일부는 학계에서 높이 평가되고 있다.

이긍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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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肯翊 (1736∼1806)

조선후기의 실학자. 자는 장경(長卿), 호는 연려실(燃藜室). 한문과 글씨가 뛰어났으며 실학을 제창하고 고증학파 학자로서도 유명하다. 저작이 많았으나 당쟁 때 소론(少論)의 몰락에 따른 귀양살이로 대부분 유실되고, 현재 전하는 그의 대표적 저서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은 조선왕조의 역대 사실을 여러 책에서 발췌 편집한 기사본말체(紀事本末體)의 사적(史籍)으로서 공정한 사관(史觀)을 밝힌 명저이다.

연려실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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燃藜室記述

조선 정조 때의 실학자 이긍익의 저서. 조선왕조의 중요 사실을 여러 책에서 뽑아 사건별로 전말을 엮었는데 원집·속집·별집의 3부로 되어있다. 원집의 기사에는 저자의 비평이나 견해를 가하지 않았고, 일일이 인용서목(引用書目)을 밝혔고, 속집은 숙종조의 고사(故事)이고, 별집은 역대관직을 위시한 각종 전례(典禮)·문예·천문·지리·대외관계·역대고전 등을 항목별로

그 연혁을 기재하고 인용서목을 밝혔다.

한치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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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致奫 (1765∼1814)

조선후기의 실학자. 자는 대연(大淵), 호는 옥유당(玉#堂), 정조 13년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으나 대과(大科)에는 뜻이 없어 학문에만 전심하여 문명(文名)을 떨쳤다. 족형(族兄) 한치응(韓致應)을 따라 북경에 가서, 당시 청나라에서 성하던 실사구시(實事求是)와 무징불신(無徵不信)의 고증적(考證的) 방법을 배워서 국내에 소개하였다. 그의 저서 <해동역사(海東繹史)> 85권은 가장 귀중한 사서(史書) 중의 하나이다.

해동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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海東繹史

정조·순조 때의 실학자 한치윤(韓致奫)의 저서. 단군조선에서 고려시대까지의 우리나라 역사를 한치윤이 원편 70편을, 그의 조카 한진서(韓鎭書)가 속편 15권을 편술한 것으로, 우리나라 서적 이외에 중국·일본 등 외국의 서목 550여 종에서 자료를 뽑은 것이 특징이다. 그밖에 안정복의 <동사강목>과는 달리 단군조선을 인정하여 단군에서부터 편년체로 기술한 점, 역사를 분야별로 나누어 세기(世紀)·성력(星歷)·예(禮)·악(樂)·병(兵)·형(刑)·식화(食貨)·물산(物産)·풍속(風俗)·궁실(宮室)·관씨(官氏)·석(釋)·교빙(交聘)·예문(藝文)·인물·지리 등을 집중적으로 서술한 점, 흔히 안 다루던 숙신씨(肅愼氏)를 별개로 다룬 점 등이 모두 높이 평가된다. 이 책은 종래의 관찬사서(官撰史書)들이 취한 관료적인 편찬방법을 탈피하고, 역사와 지리의 합일을 꾀하였던 것이다.

유득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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柳得恭 (1749∼1807)

조선후기의 실학자. 자는 혜풍(惠風)·혜보(惠甫), 호는 냉재(冷齋)·냉암(冷庵)·고운당(古芸堂). 1779년 이덕무(李德懋)·박제가(朴齊家) 등과 규장각 검서(奎章閣檢書)에 발탁되었고 군수와 부사(府使)를 지냈다. 북학파(北學派)에 속하는 학자로서 박제가 등과 함께 실사구시(實事求是)의 방법으로 산업을 진흥시킬 것을 주장하고, 문체에도 신경지를 개척하여 한문신파 4대가(漢文新派 四大家)의 한 사람으로 꼽혔다. 그는 많은 시문과 지리·역사서를 남겼는데, 그중에 <발해고(渤海考)> <사군지(四郡志)> 등이 유명하다.

발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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渤海考

조선후기의 실학자 유득공(柳得恭)의 저서. 발해의 역사를 기록한 것으로 한·중·일의 사서(史書) 24종을 참고하여 발해왕조사(渤海王朝史)를 편찬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많은 기록을 모아 발해사를 정리·개척한 것으로 뒤에 한치윤의 <해동역사>, 정약용(丁若鏞)의 <발해고> <속(續)발해고> 등에 큰 영향을 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