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동양사상/한국의 사상/조선후기의 사상/조선후기의 사상〔槪說〕
조선후기로 접어들면서 남부에 기반을 둔 이퇴계학파(李退溪學派)와 중부에 세력을 가진 이율곡학파(李栗谷學派)는 차차 그 에피고넨들에 의해서 생기를 잃은 번쇄한 이론과 형식적인 예법(禮法)의 논쟁을 상호간에 일삼게 되었고, 이 논쟁은 또한 정치상의 당파싸움과도 밀접한 관계를 갖게 되어, '양반' 즉 사대부계급 자체의 격심한 분열·분화과정을 촉진시켰다. 이 당파싸움은 17세기 중엽에 이르러 승자측과 패자의 역관계(易關係)가 완전히 균형을 잃은 채 고정되게 되면서, 승자측은 자기들의 영구집권을 합리적으로 옹호하기 위해서 성리학(性理學)의 권위주의적 측면을 강화시키는 한편 사상과 언론의 자유를 철저하게 통제하게 되었다. 이제 성리학은 그 초기의 발랄한 진취성(進就性)을 상실하고 도리어 조선의 발전을 크게 제약하는 정신적 질곡이 되고 말았다. 이에 대해서 정권에서 이탈한 패자측의 사람들 및 그 후예들은 당시의 성리학에 대한 비판의식을 잠재적으로 키워 나갔다. 혹은 성리학의 테두리 내에서 종래 성리학이 소홀시하였던 사회·경제적 문제를 독자적 입장에서 진지하게 다루어 놓기도 하고 혹은 성리학을 정면으로 공격하는 것은 회피하면서도 처음부터 성리학을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견지에서 현실 문제에 접근하기도 하였다. 이것이 18세기 이후의 한국의 실학 운동(實學運動)이다. 한국사상사에 있어서 실학(實學)은 성리학의 역사적 비중을 전제로 해서만이 그 의미부여가 가능한 것이다. 사실 성리학은 동양의 중세사회 특히 한문문화권(漢文文化圈)에 있어서 하나의 보편성을 갖다시피 하였다. 주자(朱子)에 의해서 완성된 성리학은 원대(元代)부터 중국의 정통사상이 되어 명·청(明淸)에 걸쳐 통치체제(體制)와 굳게 결부되게 되었고, 14세기 말에 조선으로, 그리고 17세기에는 다시 조선에서 일본으로 건너가 도쿠가와 막부(德川幕府)의 관학(官學)이 되었다. 이리하여 성리학은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세계에 보편적 교리가 되었다. 성리학은 역사적·사회적 견지에서 두 가지 가장 중요한 결과를 낳게 되었다. 하나는 형이상학적·사변적(思辨的) 해석으로 종래의 윤리도덕에 새로운 이론적 근거를 줌으로써 중세신분주의적 계층사회질서를 강화시키게 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중국 역사에 정통론적 이념을 구현시킴으로써 중화주의적(中華主義的) 세계관을 확립하게 된 것이다. 첫째의 것은 주자의 인륜(人倫) 즉 천리론(天理論)과 <분(分)>사상에서 온 것이고, 둘째의 것은 주자의 <강목(綱目)>사상에서 온 것이다. 이 사상은 동아시아 각 민족사회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그것은 통치체제와 결부되어 권위주의적화했던 것이다. 중국과 일본에 비해서 조선은 더 많은 영향을 받았다. 조선에서는 주자의 이론 이외에는 일절 다른 이론이 허용되지 않았다. 양명학 같은 것도 일부에서 비밀히 전해 왔을 뿐이다. 중세로부터 근세로 지향하는 역사의 발전과정에서 권위주의화한 이 신분주의적 사회원리와 중화주의적 세계관을 극복하지 않고서는 동아시아 각 민족사회의 발전적 방향이 타개될 수 없었다. 이리하여 성리학에 대한 극복에의 노력이 각 나라의 지성들에 의하여 일어났다. 중국에 고증학(考證學)이 일어나고, 일본에서 고학(古學)·국학(國學)이 일어나고, 우리 한국에서 실학(實學)이 일어나게 된 것이 그것이다. 성리학의 역사적 바탕과 작용이 각 나라에서 약간씩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극복하는 방향과 양상이 또한 다르게 되었다. 중국과 일본의 그것을 우리 한국의 것과 대비 검토하면서 성리학적 권위주의에의 극복을 위한 한국 지성의 고민과 경향을 살펴보는 것은 매우 의의있는 일이다. 조선 실학의 담당자들은 사대부·계급에서 분화된 사(士) 즉 앞에서 말한 당파싸움의 패자측(敗者側)에 속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계층이며, 실학의 유파(流派)는 경세치용파(經世致用派), 이용후생파(利用厚生派), 실사구시파(實事求是派)로 구분될 수 있겠거니와 여기 사족(蛇足)을 달아보면 실학은 아래와 같은 네 가지 점으로 그 성과를 요약할 수가 있다고 본다. (1) 형이상학적·사변적 학문에 대한 실용실증주의(實用實證主義)의 제창 (2) 우주자연적 질서로부터 인간사회 질서를 분립시킴 (3) 중화주의적 세계관의 부정과 독자적 민족관의 주장 (4)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신분제에 관한 비판과 새로운 직업관의 형성. 이와 같은 실학의 성과는 근대적 사유(思惟)에 매우 가까워진 것이다. 역사적 제약 때문에 '근대(近代'라는 시대개념을 창조해 내지는 못했지만 역사의 발전과정에서 보면 그들의 지향은 근대로의 방향으로 통했던 것이다. 실학 속에서 움트기 시작한 근대적 사유의 맹아는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서양문화와의 접촉을 통하여 개화운동(開化運動)으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성리학의 정통을 묵수(墨守)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거부하기에 시종하였다. 개화운동의 실패는 국제적 이유가 크겠지만 이러한 국내사정에도 중요한 원인이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