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동양사상/한국의 사상/조선후기의 사상/조선후기의 정치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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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의 정치사상〔槪說〕[편집]

조선조 후기의 정치사상은 양차에 걸친 이민족의 침략이란 대외적인 모순과 토지제도의 문란과 재정의 빈약이란 봉건적인 경제질서의 모순이 함께 심화되던 조선조 후기적 상황(18세기 영·정조 이후)에서 새로운 왕조 에너지를 모색하려는 민족의 의지에로 발전하였다. 따라서 그 정치사상도 자연히 그 주체가 국왕, 고급관인으로부터 재야의 사림(士林) 및 민중에 이르기까지 각층의 정치단위로 그 범위가 확대되어 갔다. 그것은 먼저 왕조의 복고적 재정비(再整備)와 문화적 중흥을 통하여 정치를 유신(維新)하려는 영조(英祖)의 문예부흥정책으로 나타났다. 그러한 정책은 인재등용(人材登用)의 공평과 관인세력간의 균형을 유지시키기 위한 탕평책(蕩平策), 민생과 세제(稅制)의 공평을 위한 균역법과 산업의 장려 및 언로(言路)를 넓히기 위한 신문고(申聞鼓)와 같은 여론정치의 확대 등으로서, 그것은 곧 국조 초기의 정치이념에 표방된 긍정적인 제 요소(왕조적 균형 및 여론)에로의 회복·강화를 의미하는 것이며, 거기에는 또한 지나친 악형(惡刑)의 시정과 같은 새로운 인권(人權)에의 진보적인 사상도 가미되어 있다. 그러나 아직도 당쟁격화의 여파를 다 넘기지 못한 채 오히려 시파(時派)·벽파(僻派)의 당쟁, 갈등 사이에서 왕실문제가 끌려간 결과, 사도세자(思悼世子) 아살(餓殺) 사건과 같은 비극을 거쳐 정조(正祖)의 문화정책으로 옮겨갔다. 정조의 문화정책도 문인 엘리트가 중심이기 마련인 사림정치(士林政治)와 근본적으로 현인정치(賢人政治)에 바탕을 두는 왕도정치(王道政治)를 회복시킴으로써 새로운 왕조 에너지를 얻으려는 후기 부흥사상의 한 형식이었다. 거기서는 문예부흥과 같은 문화 에너지의 재생산 및 그러한 문운을 타고 청(淸)의 고증학과 같은 외래문화를 흡수할 수 있는 문화적 포용력의 확대로 나타난 실학(實學)과 같은 새로운 창조력 등이 나왔다. 그러나 그러한 문화정책은 자기질서에 대한 안정만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천주교와 같은 이질 질서(異質秩序)를 배척하는 벽위사상(闢衛思想) 등으로 그 진보적 흡수력을 다하지 못하고, 또 문치(文治)와 왕조의 이상적 균형만을 강조한 나머지 정치권력이 몇몇 척리(戚里)의 손아귀에서 농단되는 세도정치(勢道政治)의 폐단을 미리 막지 못하였다. 정조 때의 총신 홍국영(洪國榮)에 의하여 나타난 척신 중심의 소위 세도정치는 조선조 관인정치의 후기적 타락의 부산물로서, 그것은 (1) 권력의 부당한 집중에 의한 정치균형의 파괴, (2) 독재에 의한 언로(言路)의 제약, (3) 권력이 비합법적인 세력(척신 등)에 장악됨으로써 오는 정치 권력 정통성의 동요라는 부정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한 세도정치가 극복되지 못한 채 순조(純祖)의 국구(國舅) 김조순(金祖純)을 통해 더욱 본격적인 척신(외척) 정치로 굳어졌을 때 그것은 조선조 후기의 에너지를 약화시키는 근본적인 요인의 하나로 고질화되어 갔다. 이러한 세도정치가 왕실측의 세도라는 또 하나의 세도형식으로 바뀌어 나타났던 것이 바로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통치였던 것이다. 따라서 대원군의 정치사상은 제도의 과감한 복고적 개혁, 부정적인 봉건잔재에 대한 획기적 도전 및 주체성의 위기를 극복하려는 대외적 자존(自尊)의식(鎖國으로 표현) 등 긍정적인 진보가 보이기는 하여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척리(戚里)의 세도를 물리치기 위하여 나타난 다른 또 하나의 세도정치였음에는 틀림이 없었다. 따라서 이같이 군주나 고급 관인이 중심이 되었던 후기의 정치적 노력이 해체과정의 왕조를 부흥시킬 수 있는 새로운 에너지를 완전히 확보하지 못하자, 거기에 대한 반응과 노력은 점차 재야의 사림(士林)과 민중들 속으로 그 범위가 확대되어 갔다. 그것은 전제왕조(專制王朝)와 봉건질서(封建秩序)의 내부적 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민중의 혁명사상으로 발전하기도 하였고, 또는 그 왕조질서의 말기적 모순을 오히려 그 본래적 정상(正常)으로 회복시킴으로써 극복하려는 사림(士林)의 복고적 비판기능으로 나타나기도 하였다. 1811년의 홍경래(洪景來) 난과 1860년대 이필제(李弼濟) 난을 비롯하여 전국적으로 확대된 농민반란 및 그런 모순 에너지가 토착적 사상으로 심화하고 체계화 된 동학사상(東學思想) 등은 모두 대내적 모순 극복에서부터 역사의 새로운 활력을 찾으려는 민중적 저항운동이었다. 여기에 대하여 민란 등 왕조정치의 변이(變異)를 극복하기 위하여 오히려 무실(務實)과 민본(民本) 등 관인정치의 본래적 가치의 회복을 강조한 기정진(奇正鎭) 등의 비판 기능(상소)은 왕조 에너지의 복고적 창조를 위하여 동원된 유생(儒生) 여론 운동의 확대였던 것이다. 이같은 유림들에 의한 비판기능은 19세기 후반 열강의 침략이란 새로운 대외적 모순의 심화로 그 저항 에너지가 본격적으로 발휘되기 시작하게 되었다. 즉 양차에 걸친 양요(洋擾)에서의 척사운동(斥邪運動)과 강화도조약(불평등조약) 당시의 척화운동(斥和運動)은 모두 유교적 정치이념이 사림을 통하여 대외적 모순에 저항하는 한 형식이었던 것이다. 여기서 조선조 건국초, 그 지배적 통치이념으로 흡수되었던 유교 교의(敎義)적 정치사상은 이민족 침략이란 그 말기적 위기 앞에서 마지막 자기를 지키려는 민족주의적 저항에너지로 발휘되었던 것이다. 이같은 조선조의 마지막 정치사상적 활력은 침략의 모순이 점점 심화됨에 따라서 영남만인소(萬人疏)와 같은 집단 저항운동으로 발전하였으며, 그 침략에 의하여 자주권이 상실되던 왕조의 멸망 앞에서는 주권회복을 위한 민족운동(의병)으로 동원되었던 것이다. 조선조 후기의 이같은 정치적 유신(維新) 에너지는 그것이 진보적이든 복고적이던 모두 밀려오는 외세의 침략이란 모순 때문에 전통극복의 역사 임무를 다하지 못한 채 그후 민족의 역사의식의 한 형식으로 내면화됐다.

영조의 정치사상[편집]

英祖-政治思想

1724∼1776년간 재위한 제21대 영조는 그 자신이 숙종년간의 서인(西人) 대 남인(南人)의 당쟁 속에서 태어났고, 경종(景宗) 연간의 노론·소론의 당쟁 속에서 스스로 두 번이나 피해를 입었다. 당쟁의 폐해를 절감한 그는 자기를 음해한 소론을 숙청하고 노론정권을 세우기는 하였으나, 1728년 이인좌(李麟佐)의 난을 겪어 붕당의 폐를 깊이 반성하고, 혁신정치를 실시하여 조선의 중흥기를 이룩하였다. 그의 치적 속에 나타난 사상을 요약하면, (1) 탕평책을 실시, 노론·소론을 고루 등용하여 당쟁의 격화를 막았다. (2) 가혹한 형벌을 폐지 개정하고 신문고(申聞鼓)제도를 부활시켰다. (3) 금주령을 내려 농업을 장려하고, 균역법(均役法)을 실시하여 세제개혁을 꾀하였고, 예산제도를 정비하여 탁지정례(度支定例)를 채택하였다. (4) 군대직제를 개편하고 신무기를 개발하여 국방태세를 갖추었다. (5) 국왕 자신이 왕실 교육을 위한 저술을 남기고, 법전·병서·의례·음악·문헌학 등에 관한 서적 편찬사업을 추진하였고, 세종 때의 과학기구를 복원(復元) 제작하여 실학(實學) 발흥 분위기를 조성시켰다. (6) 그러나 그는 만년에 노론정객의 술수에 넘어가 자기의 세자(世子)를 죽게 하면서까지 장기집권에의 집착을 버리지 못하였다는 것 등이다.

탕평책[편집]

蕩平策

조선 영조가 당쟁을 없애기 위하여 실시한 불편부당(不偏不黨)의 정책. '탕평'이란 <서경(書經)> <홍범(洪範)>조에 나온 말로 왕도(王道)는 어느 한쪽에 치우치거나 당파에 휩쓸리지 않고 '탕탕(蕩蕩)평평(平平)'해야 한다는 뜻이다. 사색(四色)당쟁의 폐해를 절감한 영조는 재위기간 동안에 다음과 같은 정책을 실시하여 당쟁의 격화를 막고자 하였다. (1) 즉위원년(1724)에 자신이 붕당의 폐를 비판하는 교서를 발표하였고, (2) 동왕 3년에는 장기집권한 노론중신파를 출척시키는 대신 소론을 일부 등용시켰다(丁未換局). (3) 동왕 9년에 노·소(老小) 양당의 화해를 조정하였고, (4) 동왕 17년에는 붕당의 한 원인이 홍문관(弘文館) 관원경쟁임을 인식하고 <회천(回薦)>법을 <권점(圈點)>법으로 개정하였으며, (5) 동왕 18년에는 성균관에 탕평비를 세워 작성케 하였다. 영조를 뒤를 이은 정조(正祖)도 이 정책을 계승, 자기의 침전을 <탕탕평평실(蕩蕩平平室)>이라 하였으나, 시파(時派)·벽파(僻派)간의 새로운 당쟁이 일어나 세도정치(勢道政治)로 발전하다가 대원군(大院君)때 다시 나타났다.

정조의 정치사상[편집]

正祖-政治思想

조선 22대왕 정조(재위 1776∼1800)는 영조의 정책을 계승, 시파·벽파간의 당쟁을 겪고서 다음과 같은 개혁정치를 단행하였다. (1) 홍국영(洪國榮)을 발탁, 숙위소(宿衛所)·규장각(奎章閣) 등을 설치 운영하게 하면서 벽파(僻派)의 음모를 분쇄하고 문운(文運)을 크게 일으켰으나 새로운 세도정치의 맹아(萌芽)가 되었다. (2) 1780년(동왕 4년)에 홍국영을 숙청, 영조의 탕평책을 계승하여 남인(南人)·서북인(西北人), 일부 서인(庶人)까지도 등용하였다. (3) 형정(刑政)을 개혁 악형을 금지시키고, 궁차징세법(宮差徵稅法)을 폐지 백성의 부담을 경감시켰고, 빈민구제를 위해 '자휼전칙(字恤典則)'을 반포하였다. (4) 규장각 설치, 서적 편찬, 학자 우대, 활자 개량 등을 통하여 문운을 크게 일으켜 조선후기의 황금시대를 이룩했다. (5) 문화정책에 있어 신문체(新文體) 배척의 문체반정(文體反正)을 실시하였고, 실학자(實學者)를 우대하면서도, 그중 일부의 천주교(天主敎) 감염을 막고자 신해사옥(辛亥邪獄)을 일으켜 천주교 탄압을 시작하였다.

벽위사상[편집]

闢衛思想

조선후기에 성행한 천주교(天主敎) 배척사상. 영·정조(英正祖)대부터 전래되기 시작한 천주교가 남인(南人) 학자들과 일부 시파(時派) 인사들에게 침투되어 천주교 지하교단 조직, 비밀포교 등이 행하여지자 이에 자극받아 유학자 특히 주자학자들을 중심으로 천주교 배척운동이 맹렬히 일어나 천주교의 배척·탄압을 호소하는 상소문이 잇달고, 왕의 윤음(綸音)이 내려 천주교 금지가 선포되었으며, 이 운동은 시파계 남인학파 등의 숙청을 동반하게 되었다. '벽위'는 '벽사위정(闢邪衛正)'(사학을 배척하고 정도를 수호한다는 뜻)의 준말이니, 곧 천주교는 사교(邪敎)이니 이를 금압하고, 정도(正道)인 주자학을 옹호·창명하여야 한다는 것으로, 그들의 논거는 다음과 같다. (1) 천주교는 선조 제사를 부정하고, 천주(天主)를 내세우니 무군무부(無君無父)의 사도(邪道)이다. (2) 천주교는 '3강 5륜'의 윤리와 상하귀천의 계급질서를 부인하므로 불온하고 혁명적인 것이다. (3) 천주교는 동양을 침략해오는 양호(洋胡)의 종교로 천주교를 믿는다는 것은 그들 침략의 선봉이 되는거나 다름없다. 이러한 논거를 중심으로 한 벽위운동은 이만채(李晩采) 편의 <벽위편(闢衛編)> 등에 상세한 결과가 기록되어 있는 바, 요약하면 (1) 1785년 이용서(李龍舒) 등 남인학파들이 통문을 발하여 천주교 탄핵의 여론을 일으켰고 (2) 1791년 홍낙안(洪樂安) 등이 조상의 신주를 불태운 처사를 규탄하는 통문을 내고 상소하였으며, (3) 관학(館學) 유생들의 천주교도 처형 상소가 잇달았고, (4) 순조(純祖) 때에 왕의 천주교 금지 교서가 내렸고, 헌종(憲宗) 때에는 척사윤음이 내렸으며, (5) 대원군의 천주교 박해가 계속되었다. 이 벽사의 사상도 순조와 고종 초년까지는 천주교 박해 운동으로 일관하였으나, 개항 이후에는 척화(斥和)론으로 발전하여 위정척사(衛正斥邪)운동의 연원이 되기도 하였다.

세도정치[편집]

世(勢)道政治

조선후기에 특정 인물과 그의 집안이 왕의 신임으로 직접적인 위임을 받아 정권을 잡고 다스리던 일. 이미 중종(中宗) 때의 조광조(趙光祖) 등 사림파(士林派), 정조 때 홍국영(洪國榮) 등 시파(時派)의 세도정치가 있었으나, 그 후에는 외척(外戚) 발호로 발전하여 안동김씨(安東金氏), 풍양조씨(豊壤趙氏) 등의 일족(一族)정치로 정치기강의 문란과 민생의 참상을 가져오게 되었다. 이들 외척에 의한 세도정치를 혁파한 사람은 대원군(大院君)이었으나, 그가 축출된 다음에는 다시 여흥민씨(驪興閔氏)의 세도정치가 계속되어 망국(亡國)을 자초하기에 이르렀다. 이 정치의 특징을 본다면 (1) 왕의 신임을 받은 특정인이 서정결재(庶政決裁)와 인사(人事)문제에 전권을 장악한다. (2) 왕권을 약화시키고, 정부조직이 특정인의 혈족이나 측근 중심으로 개편된다. (3) 국왕과 백성간에 세도집단이 형성되어 국정을 전횡하고 백성을 수탈하면서 국왕과 백성간의 의사소통을 단절시킨다. (4) 가족독재로 발전하여, 세도가문 내에 파쟁이 일어나고, 이에 수반하여 왕족의 일부가 숙청되고, 물락 왕족, 몰락 양반, 서민들의 반항운동이 일어난다는 등을 들 수 있다.

흥선대원군[편집]

興宣大院君 (1820∼1898)

조선말의 정치가. 이름은 하응(昰應), 자는 시백(時伯). 호는 석파(石坡)·해동거사(海東居士)·노석(老石). 순조 철종(哲宗)년간에 안동김씨 세도 밑에서 설움을 받다가 신정왕후(神貞王后) 조씨(趙氏)에 접근, 철종이 승하하자 1863년 자기의 둘째 아들 명복(命福)을 즉위시켜 대원군에 진봉(進封), 조대비(趙大妃)로부터 섭정(攝政)의 대권을 위임받아 전권을 장악하고 10년간 개혁정치를 실시하였다. 고종 10년(1873) 국왕친정으로 물러나 민비(閔妃)와 암투를 벌였고,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으로 일시 집권하였으나, 청군(淸軍)에게 납치되어 천진(天津)에 유폐당하였고, 1887년 청국과 통하여 고종 폐위와 장남 옹립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고, 1894년에 을미왜변(乙未倭變)으로 정권을 장악하였으나 곧 은퇴하였다. 주로 초기 10년의 집권기간을 통해 나타난 그의 정치사상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사색평등(四色平等)을 외치고 탕평책을 회복시켰으며, 지역차별, 고려왕씨(高麗王氏) 차별을 폐지하고, 스스로 모범을 보였다. (2) 세도정치, 벌족정치(閥族政治)의 페단을 과감히 시정하고 왕권(王權)을 회복시켰으며, 이를 위해 경복궁(景福宮)을 중건(重建)하였다. (3) 세도정치 때문에 변모 타락한 관제(官制)를 개혁하여 복고(復古)시켰고, 서양 열강의 침략에 대하여 강경한 척화책(斥和策)으로 일관하였다. (4) 당쟁의 폐가 서원(書院)에 있음을 통감하고 서원을 전국 47개소로 제한, 나머지를 철폐하여 지방양반과 유림(儒林)의 세력을 꺾었다. (5) 환곡제(還穀制)의 폐지, 사창제(社倉制)의 실시, 생화 간소화 등으로 토호·관원들의 행패를 막고 백성들의 복리를 추구하였다. (6) 그러나 말년에 이르러서는 무사상(無思想)·무주견(無主見)의 정략가로 변모하여 외국 세력에 이용당하기도 하였다.

홍경래[편집]

洪景來 (1780∼1812)

조선 순조 때의 농민혁명가. 평안도 용강(龍岡) 출신. 양반 출신으로 글을 배웠으나 정조 22년 사마시(司馬試)에 낙방, 평안도 출신의 차별대우와 세도정치의 부패상, 관리들의 횡포에 불만을 품고 혁명을 꿈꾸다가 순조 원년(1800) 우군칙(禹君則)·이희저(李禧著)·김창시(金昌始)·홍총각(洪總角)·김사용(金士用) 등과 가산(嘉山) 다복동(多福洞)에서 민중봉기를 준비, 순조 11년(1811) 12월 병력 2천으로 농민혁명을 일으켰다. 한때 가산군아(嘉山郡衙)를 점령, 혁명 정치를 펴고 국경지대 서북부의 8읍을 석권, 그 세력이 황해도까지 미쳤으나 안주(安州) 공격에 실패, 정주성(定州城)을 포위당해 5개월만에 진압되었다. 그의 혁명사상을 요약하면, (1) 평안도민에 대한 차별대우에 불만, 중앙귀족 타도를 시도하였다. (2) 당쟁, 외척발호, 관리행패로 나라를 망치는 양반정권을 타도하고, 민중의 비원을 대변하려 하였다. (3) 그는 거사를 위하여 참설·비기를 최대한 이용하였고, 기인(奇人)·도사(道士)·무인(武人)·무상(富商) 등 광범위한 서민층의 지지를 받았다. (4) 군기를 엄하게 하고 빈민에게 식량을 분배하여, 대지주(大地主)의 재산을 몰수, 탐관오리를 처단하였다.

이필제[편집]

李弼濟 ( ? ∼1871)

조선 고종 8년에 영해(寧海)·상주(尙州)·문경(聞慶) 등지 민란(民亂)의 주모자. 일명 이필(李弼). 동학교조(東學敎祖) 최제우(崔濟愚)가 대구(大邱)에서 순교하자, 경상북도 일대의 동학교도를 선동, 교조의 설원(雪寃)을 내세우고 1871년 3월 10일 농민반란을 일으켜, (1) 동학교도와 농민을 규합, 기포(基包)하고, (2) 점령지역의 관원을 참살하였으나, 관군에게 진압되어 도주하였고, 8월에 조령(鳥嶺)에서 정기현(鄭基鉉)등과 재기(再起)하였으나 문경싸움에 패배, 처형당하였다. 그의 거사는 (1) 동학교세를 주축으로 한 최초의 거사였다는 점, (2) 탐관오리를 징계하고 민원(民寃)을 풀려고 하였다는 점, (3) 단순한 민란이 아니라 <정감록(鄭鑑錄)>의 참설을 이용, 정권교체를 시도하였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만인소[편집]

萬人疏

조선시대 유생(儒生)들이 행한 정책상 의사발표를 위한 상소(上疏). 정부의 정책에 강력한 반대 여론을 일으키는 방법의 하나로 유생들이 만명 내외의 공동명의로 정부에 의견을 제시하는 것이다. 순조 23년(1823)에 유생 9,996명이 서얼(庶孼)도 임용해 줄 것을 상소하였고, 철종 6년에 유생 10,432명이 장헌세자(莊獻世子)의 추존을 상소한 일이 있으며, 고종 18년에는 김홍집(金弘集)이 <조선책략(朝鮮策略)>을 바치고 정치개혁과 일본 의존, 러시아 경계를 청한 것을 탄핵하기 위하여 영남의 유생 이만손(李晩孫) 등이 만인소를 올려 큰 파문을 일으킨 적이 있다.

박문수[편집]

朴文秀 (1691∼1756)

조선 영조 때의 문신. 자는 성보(成甫), 호는 기은(耆隱). 경종 3년(1723)에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 사관(史官)·설서(說書)·병조정랑(兵曹正郞)·사서(司書)·영남 암행어사, 경기도 관찰사, 어영대장, 호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시호는 충헌(忠憲). 그는 군정(軍政)과 세정(稅政)에 밝아 비정(秕政) 개혁을 위하여 크게 활약하였으나, 당쟁과 수구(守舊)세력의 반발로 수차 피해를 입기도 하였다. 영조 3년에 암행어사로 나가 탐관오리를 징치하고 민생을 구휼한 점, 횡포가 심한 안동서원(安東書院)을 폐한 일로 좌천당한 일, 호조판서로 양역(良役)의 폐해를 논하다가 좌천된 일, 세정(稅政)개혁을 건의한 일, <탁지정례(度支定例)> 등의 편서를 통해 의례행사(儀禮行事)의 비용절감을 시도한 일 등은 민중으로부터 많은 칭송을 받았다.

진주민란[편집]

晋州民亂

1862년(철종 13) 경상도 진주에서 일어난 민란. 조선말기 최초의 농민폭동으로 3정(三政)의 문란과 병사(兵使) 백낙신(白樂莘)의 탐학에 분개, 유계춘(柳繼春)·이계열(李啓烈) 등이 초군(樵軍)·목동을 규합, 폭동을 일으켜 관부(官府)의 비행을 규탄하고, 이방(吏房) 등 관리들을 잡아 불태워 죽이고, 관청을 습격, 환곡(還穀)을 불살랐으며 백낙신을 감금하는 등 소동을 벌였다. 뒤에 정부측에서 관찰사 백낙신 등을 문책 처벌하고 안핵사 박규수(朴珪壽) 등이 사태를 수습하였지만, 이 민란은 (1) 최초의 강력한 농민봉기였다는 점, (2) 농민들이 관부의 비행을 규탄하고, 자기들의 권리를 주장하였다는 점, (3) 투쟁방법에 있어 격문·선전문을 발표하고, 한글 노래를 불러서 민중시위와 조직적인 부대 작전을 취했다는 점, (4) 최초로 정부를 굴복시켜 민중의 힘을 과시하였다는 점, (5) 조선말 3정(三政)문란의 심각성을 드러냈다는 점 등에서 주목을 끌고, 뒤에 3남 전역에 걸쳐 산발적인 민란으로 확대되었다.

황사영백서[편집]

黃嗣永帛書

1801년(순조 1년) 신유사옥(辛酉邪獄) 때 천주교도 황사영이 북경에 있는 주교에게 국내의 천주교도 박해의 전말을 보고하고, 그 대책을 호소하는 글을 흰 비단에 기입한 밀서(密書). 중국인 신부 주문모(周文謨)에게 세례받아 입교한 황사영(1775∼1801)은 신유사옥이 일어나자 충청도 제천(堤川)의 천주교도 마을의 토굴 속에 은신하면서 위기에 놓인 조선 교회 구출방향을 황심(黃沁)과 상의, 이를 북경 주교(主敎)에게 호소하기 위하여 길이 62㎝, 너비 38㎝되는 흰 비단에 13,000여자의 붓글씨를 써 보내려다가 발각되어 처형당하였다. 그 내용은 (1) 당시 한국의 천주교세와 주문모 신부의 활동 및 순교자 약전, (2) 주 신부의 자수(自首)와 수형(受刑), (3) 국내 정계의 실정과 포교를 위한 4개 근본 건의책으로 되어 있다. 그 건의 내용에 있어 (1) 구미 열강의 동정을 얻고, 포교와 백성구제를 위한 자본청구, (2) 청나라 황제의 동의로 서양인 신부를 보낼 것, (3) 조선을 청에 부속시키고 친왕(親王)에게 명하여 조선국을 감독토록 할 것, (4) 전함 수백 척, 병사 5∼6만의 서양 전교대(傳敎隊)를 조직 파견하여 무력으로 포교를 지원할 것 등으로, (1) 매국적(賣國的)인 사대주의에서 출발하였다는 점, (2) 구미 열강의 제국주의와 조선 천주교도간의 연결을 꾀한 점, (3) 이로써 천주교 탄압에 더 좋은 명분을 주고 말았다는 점, (4) 당시 천주교도의 국내정치에의 불만과 서양사상에의 동경을 드러냈다는 점 등에서 주목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