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동양사상/한국의 사상/조선후기의 사상/조선후기의 경제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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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의 경제사상〔槪說〕[편집]

조선후기의 경제사상은 곧 실학의 경제사상으로 대표될 수 있다. 물론 실학사상이 조선후기 사회의 전반을 휩쓴 것은 아니요, 또 그것이 경제정책에 완전히 반영된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경제사상을 특징적으로 전개시킨 것은 실학이었다. 일반 유학자들은 대체로 성리학에 매달려 있었고 가끔 경제문제를 논할 때에도 주자학적 경제의식을 거의 그대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어서 새삼 이야기할 만한 것이 못된다. 실학의 경제사상은 17세기 중엽에서 19세기 중엽에 이르는 동안에 많은 변화 내지 발전을 하게되지만 대체로 몇 개의 유형으로 나누어 파악해 볼 수 있다. 우선 경제문제에 대한 관심을 대상의 기준으로 해서 보면 경세치용학파(經世致用學派)와 이용후생학파(利用厚生學派)로 나누어진다. 경세치용학파는 토지제도, 재정제도 등 주로 제도적인 문제를 중심으로 경제문제를 논하는 실학으로서, 성호(星湖) 이익(李瀷)을 그 대종(大宗)으로 하고 있다. 이용후생학파는 농업기술, 공업기숭 등의 주로 기술적인 문제를 논하는 실학으로서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초정(楚亭) 박제가(朴齊家) 등의 소위 북학파(北學派)가 여기에 속한다. 전자가 주로 농촌경제를 배경으로 하여 전개된 중농적(重農的) 경제사상이라 한다면, 후자는 대체로 도시경제를 배경으로 하여 전개된 중상적(重商的) 경제사상이었다. 다음으로 실학자들이 어떠한 사회계층을 기준으로 하여 경제사상을 펴고 있는가에 따라서 급진개혁파와 온건개량파로 나누어질 수 있다. 급진개혁파는 현실적으로 몰락하고 있는 소작인이나 혹은 소위 '무토불농지민(無土不農之民)' 등의 서민을 기준으로 하여 그들을 지지 옹호하고 그들을 중심으로 급진적인 사회개혁의 변혁을 모색하는 경제사상으로서 이익이나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같은 이가 이 부류에 속하는 것 같다. 이들은 토지문제를 논할 때 경영의 개선이나 소작조건의 개선보다는 소유의 변혁을 주장하며 조세문제를 논할 때 조세량의 감소보다는 조세제도의 변혁을 주장한다. 한편 온건개량파는 농촌의 경영적인 부농(富農)이나 소(小)상품 생산층을 지지 옹호하며 그들 중산층을 중심으로 하는 온건적인 사회경제의 개량을 모색하는 경제사상으로 가령 우하영(禹夏永)·서유구와 같은 실학자가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들은 소유의 변혁보다는 경영의 개량, 제도의 변혁보다는 기술의 개선을 주장하고 있는 점이 특색이라 할 수 있겠다. 또한 경제문제를 어떠한 윤리적 내지 인식론적 기반 위에서 논하고 있는가에 따라서 몇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진다. 그 하나는 전통적인 성리학에 대해서는 그대로 긍정하면서 종래에 부족했던 이용후생론 혹은 경세치용론을 그 위에 보강하려는 입장의 경제사상이다. 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 같은 이가 여기에 속한다고 하겠다. 다른 하나는 전통적인 성리학이니 의리학(義理學)을 정면으로 부정하지는 않더라도 그것을 외면 내지 홀시(忽視)하고 이용후생론 혹은 경세치용론을 내세우는 입장의 경제사상이다. 연암(燕巖)이나 초정(楚亭) 같은 실학자가 여기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종래 '정덕이용후생유화(正德利用厚生惟和)'라는 전통적 유학질서를 뒤엎고 "이용 후에 후생이 가능하고 후생 후에 정덕이 가능하다"고 주장, '금강산도 식후경(食後景)'이라는 민중의 생활의식을 논리화하여 종래의 윤리의식에 구애됨이 없이 자유롭게 경제문제를 논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과격한 기술도입론과 상업진흥론을 펼 수 있었다. 마지막 하나는 종래의 경학(經學)을 비판하거나 재해석함으로써 새로운 이용후생론 내지 경세치용론에 대한 경학적 기초를 수립하고 이에 준거하여 경제와 윤리의 갈 등을 새로운 차원에서 종합 통일하려는 입장의 경제사상이 있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이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다산은 종래의 윤리관을 규제하고 있던 주자학의 관념적 <이(理)>를 철저히 비판하고, 따라서 공동체적 내지 선험적 윤리의식을 극복하고 각자 자유롭게 이윤을 추구하는 개인을 중심으로 경험적이고 개인적인 윤리체계를 수립하여 인(仁)의 <본(本)>(혹은 <체(體)>)은 성의(誠意) 정심(正心)의 윤리(倫理)요, 인의 <말(末)>(혹은 <용(用)>)은 경세치용의 경제로 통합 통일하였다. 그는 <이(利)>와 <의(義)>, 경제와 윤리의 갈등을 게젤프트(Gesellschaft)적인 차원에서 극복하고자 하는데 전력을 기울였다. 이것은 의와 이의 갈등 속에 고민하면서 차라리 이의 추구를 제한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려던 18세기 초 이익의 입장을 거쳐, 18세기 말에 와서는 차라리 의를 경시함으로써 이의 추구를 극대화하려던 북학파 실학자들의 고민을 거쳤고, 19세기 초에 이르러 다산에 의해서 시도된 고민의 연속이었다고 하겠다. 실학자들은 경제현상을 해석하는데 탁월한 이론적 성과를 보이고 있었다. 18세기 초까지만 하더라도 화폐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래서 조세의 금납화(金納化), 양역(良役)의 금납화를 주장하는데 머물러 있었으나, 18세기 말 박지원 같은 실학자들은 화폐가 단순히 실물경제(實物經濟)에 대한 베일에 그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화폐가 실물경제를 교란하는 요인을 발견하였고, 또한 악화(惡貨)는 양화(良貨)를 구축한다는 법칙도 발견하였다. 특히 박제가는 귀금속의 국외유출 방지를 적극 주장하면서도 귀금속 그 자체가 결국 국부(國富)가 될 수는 없으며 오히려 재(財)의 생산이 국부의 원천이라고 파악하였다. 그리고 생산과 소비의 관계를 공급과 수요의 관계로 파악하여 마치 샘(井)을 사용하지 않으면 폐정(廢井)이 되는 것과 같이 비단을 입지 않으면 비단업이 쇠퇴하고, 유기(鍮器)를 사용하지 않으면 유기산업이 쇠퇴한다고 하였다. 또한 유수원(柳壽垣)·박제가 등은 노동분업의 잇점을 적극 주장하였고 다산은 분업노동 위에 기중기의 원리, 수학의 원리 등 과학기술을 응용하는 문제를 진지하게 모색하였던 것이다. 조선후기의 경제사상은 결코 그렇게 황무지는 아니었으며, 한국경제학이 사상적으로 그 위에 발을 디딜 수 있는 주목할 만한 유산임에 틀림없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균역법[편집]

均役法

조선왕조 때 양역(良役) 부담을 감소하기 위하여 실시한 법. 임진왜란 이후 국가의 재정은 핍박하였고, 국민의 양역에 대한 부담은 과중하였다. 이러한 상태에서 양역에 대한 변통책(變通策)이 강구되었으나 그 방법이 양반층의 신분적·경제적 이권과 상충되지 않는 선에서 소극적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에 공전을 되풀이했다. 그러다가 영조가 즉위하면서부터 적극성을 띠기 시작, 다양한 방책이 검토되다가 그 변통책의 윤곽이 호포(戶布)와 결포(結布)로 나타나게 되었으며, 궁방(宮房)에도 납전(納錢)케 하였다. 그러나 원임대신(原任大臣)들은 일보도 양보치 않고 이에 반대하였으므로 비변사(備邊司)에서는 양역 1필의 감포급대절목(減布給代節目)을 작성하여 영조의 윤허(允許)를 바라게 되었다. 영조는 본의가 아니었으나 관료지배층과 원임대신의 압력 때문에 2필의 포(布)를 1필로 감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 보전책(補塡策)을 강구토록 하교(下敎)하였다. 여기에서 균역법이 제정되었는데 이를 균역법이라고 부른 것은 역을 균등히 한다는 뜻에서였다. 그 중요한 내용을 보면, 종래의 수포(收布) 2필을 반감하고, 이러한 필수의 반감으로 인한 부족액은 어세(漁稅)·염세(鹽稅)·선박세 등의 제세(諸稅)와 전결(田結)에 대한 일종의 부가세였던 결작(結作)의 징수로 보충케 하였다. 균역법의 시행으로 국가재정과 양민생활의 안정이 기도되고, 관료는 결전(結錢) 및 군관포(軍官布)의 설정을 통하여 그 권리를 양보하였으며, 국왕은 궁방 독점의 어·염·선박세를 정부에 이관하여 특권의 일부를 포기하였다. 그러나 이 법은 그 명칭과 반드시 상부한 것은 아니었다. 일시적으로 양민생활과 국가재정이 안정되었으나 그것은 기만적인 변통책에 불과하였다.

대동법[편집]

大同法

광해군 즉위년부터 시행된 공물(貢物)의 미곡(米穀) 대납제도(代納制度). 공납제도는 원래 여러 가지 폐단을 수반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개폐론이 중종 때부터 대두되기 시작하여 선조 때에는 그 구체적인 개편 방안이 제시되었으니, 이이(李珥)는 수미법(收米法)을 주장, 그 피해를 덜자고 하였다. 공납제도의 폐단이란 국가의 수요품과 공물의 불일치, 수송상의 애로, 공물을 대납해 주던 방납자(放納者)와 수요자 사이의 협작으로 인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이의 전기한 수미법은 임진왜란 이전에는 시행되지 않다가 난후에 조세감속로 인한 재정의 곤란을 받고서야 그 실시를 보게 되었다. 즉 광해군 즉위년에 이원익(李元翼)의 주장에 따라 우선 경기도에 시행되었고, 인조 원년에는 강원도에, 효종 때에는 충청도와 전라도에 실시되더니, 숙종 34년에 이르러 전국에 실시되게 되었다. 대동법의 실시로 대동미(大同米)라는 명칭아래 전(田) 1결에 대하여 미(米) 12되씩을 징수하게 되었으며, 이를 대동포(布)나 대동전(錢)으로 대납도 했다. 이 법의 관할 관청은 선혜청(宣惠廳)이었으며, 이로부터 원칙적으로 공납제도는 폐지되었다. 대동법의 실시가 사회적으로 끼친 영향은 컸다. 먼저 농민들의 경제적인 부담이 줄어들었고, 공인(貢人)이란 어용상인을 중심으로 한 상업자본을 발전시켰으며, 또한 공인으로부터의 주문생산을 담당하는 독립적인 수공업을 일으켜, 조선 자본주의의 배경적 요소가 싹터 갔던 것이다.

경세치용학파[편집]

經世致用學派

조선후기의 실학자 중 토지제도나 행정기구와 같은 제도상의 개혁에 치중하는 학파. 이 학파의 주축을 이룬 대표적 학자는 유형원(柳馨遠)·정약용(丁若鏞)·이익(李瀷) 등이며 이들은 대개가 농촌을 토대로 하여 조선의 현실을 개혁하려고 함으로써 중농주의적 경향을 보였다. 이들은 관념적인 성리학이나 형식적인 예론(禮論) 따위는 현실적으로 긴요한 학문이 아니라는 신념을 가졌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민생의 문제가 가장 절박한 것이었으며, 또한 애초부터 사람이 서로 다른 신분으로 태어나게 마련이라는 생각을 부정하고,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면서부터 신분상의 차이나 빈부·귀천의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이제 부분적인 제도상의 개편으로 종래의 전통사회의 고수를 꾀할 것이 아니라, 당시의 사회체제를 전면적으로 개편함으로써 사회를 재건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들은 흔히 이념적인 모델을 주례(周禮)와 같은 고대중국의 제도에 두었으나 그것은 그대로 복고사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 부정의 한 수단이었으며, 구체적으로 제기된 현실적인 문제의 타개가 그들의 목표였다. 그들은 한결같이 현실에 대한 예리한 관찰과 비판을 통하여 그들 나름의 포부와 이상을 그려서, 종래의 단편적인 시폐론(時弊論)을 넘어 각기 새로운 사회체제를 구상했다. 이들이 한결같이 제도의 전면적인 개편 중에서도 토지제도의 개편을 기본적인 것으로 여긴 것은 그들의 관념이 전통적인 토지 경제에 집착되어 있는 중농주의 사상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왜족의 침구(侵寇)로 인한 전지(田地)의 황폐에서부터 시작되어, 전란 후에 한층 더 심해진 대토지 점유의 경향과 수취체제의 개편으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 부세(賦稅)의 전세화, 화폐의 악순환 등의 사회경제적인 상황이 토지문제를 더욱 긴박하게 했기 때문이다. 이들 사회경제나 정치제도에 광범한 관심을 가졌던 학자들은 기호(畿湖)의 양반학자 또는 전라도 지역의 학자들로 모두가 재야(在野)학자였다.

이용후생학파[편집]

利用厚生學派

조선후기의 실학자 중 상공업이나 기술도입론에 특히 관심을 가졌던 학파. 조선후기에 들어와서 서울에 있어서는 정부의 금압(禁壓) 하에서도 일반 자유상인과 도고상인(都賈商人)의 활동이 공인(貢人)의 대두와 더불어 점차 활발해졌다. 도시의 서민은 양반까지를 포함해서 이제 토지경제에만 의존할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서울의 일부 학자 사이에는 상업을 일으키고, 생산도구나 유통수단을 개발하고, 나아가서는 수공업의 발전을 꾀하고, 기술의 개발 내지 도입에 적극 노력해야 한다는 주장을 내세우게 되었다. 이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상업의 진흥과 기술의 도입·개발이었다. 이들은 거의 연경(燕京)에 다녀온 북학파(北學派)들로서 그 대표적인 존재는 박제가(朴齊家)·박지원(朴趾源)·홍대용(洪大容)·이덕무(李德懋) 등이었다. 이들의 주장은 다같이 중상론(重商論)이거나 기술존중론이라는 점에서 공통된다. 그리고 그들의 주장 속에는 상공업과 기술을 천시(賤視)하는 양반들의 생리와 관념을 타파해야 한다는 생각이 깃들여 있었다. 그것은 전통적인 직업관·신분관에서 벗어나서 근대적인 사상으로 일보 발전한 것임에 틀림없다.

이익[편집]

李瀷 (1681∼1763)

조선후기의 실학자. 자는 자신(自新), 호는 성호(星湖), 본관은 여주(驪州). 대사헌 하진(夏鎭)의 아들. 숙종 31년 과거에 응시하여 증광초시(增廣初試)에는 합격했으나 녹명(錄名)이 격식에 어긋나서 회시(會試)에는 응시치 못하였다. 동왕 32년 그의 학문적인 스승이자 중형(仲兄)인 이잠(李潛)이 당쟁으로 목숨을 잃자 일체 과거공부를 집어치우고 이후 학문에만 전심했다. 영조 3년 선공감 가감역(繕工監假監役)으로 임명되었으나 사절하고

동왕 39년 고령 때문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임명되었으나 그해에 죽었다. 그는 유학·천문지리·역사·제도·풍습·군사·자연과학·문학 등 광범한 영역에 걸쳐 깊이 연구하였으며, 서양의 과학지식과 천주교에 대해서도 연구하고 비판 흡수하였다. 그의 학문은 그 이전의 학문과 스스로 구별되는 독창성으로 충만해 있었다. 그의 학문적인 저작으로는 경학에 있어 <제경질서(諸經疾書)>가 있다. 그의 경학에 대한 입장은 주자주석 일변도의 고전 해석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바가 있어 우리의 학문이 고루와 무지를 면할 수 없음을 지적했고, 자득(自得)을 학문의 요체로 삼았다. 그의 경세치용(經世致用)에 대한 저작으로는 <곽우록(藿憂錄)>과 잡저(雜著) 및 친구나 문인들과의 서찰(書札)이 있다. 이 중 <곽우록>은 그의 끝없는 나라와 백성들에 대한 사랑에서 씌어진 저작이다. 그는 또한 <성호사설(星湖僿說)>을 지어 천하만물에 대한 것은 물론 고금의 일과 중국의 서양 제국에 대한 다방면에 걸친 견해를 집대성했다. 그는 투철한 주체의식과 비판정신을 토대로 당시의 사회제도를 실증적으로 분석·비판하여 정책적 대안을 제시했다. 그는 노비신분을 점차적으로 해방시킬 것 등을 주장하는 한편 당쟁의 발생은 이해의 상반에서 오는 것이라고 분석하고, 제한된 일정한 직제(職制)에 비해 생업(生業)에 종사하지 않는 많은 관리의 등장이 필연적으로 당쟁을 조성하는 것이라 하여, 양반도 산업에 종사해야 한다는 사농합일(士農合一)을 주장했고, 인재등용에는 과거제도에만 의존하지 말고 공거제(貢擧制)를 아울러 실시할 것을 제시했다. 그의 경제사상의 기본적인 입장은 몰락하여 가는 소(小)토지 소유농민의 구제라는 점에 있다. 그리하여 그가 창안한 것이 균전제(均田制)이다. 그 내용은 대토지 소유자는 물론 소토지 소유자도 일가의 생활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토지 즉 영업전(永業田)은 매매할 수 없으며, 영업전을 제외한 일체의 토지는 매매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철저하게 소토지 소유 농민의 몰락을 막아보려는 입장에서 전개된 견해이며, 이러한 견해는 당시의 사회 경제적인 변동 속에서 농민들이 그들의 자위수단으로서 지켜야 할 근검절약사상과 상호 연관되며, 일체의 재화(財貨)란 농민의 노동에 의해 창조되는 것이라는 사상과 연결되고 있다. 그는 궁극적으로 인간노동이 아니고는 가치가 창조될 수 없다는 견해를 표명했으며, 생산노동을 파괴에서 보호하기 위해 여섯 가지 좀을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 좀은 첫째 노비제도, 둘째 과거제도, 셋째 벌열제도(閥閱制度), 넷째 기교(技巧), 다섯째 승니(僧尼), 여섯째 유타(遊惰)이었다. 생산노동에 대한 그의 사상은 화폐에 대한 견해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데, 그의 화폐에 대한 평가는 화폐가 농민의 일방적인 피해 위에서 유통된다는 것에 집약되어 있다. 그의 이러한 화폐관은 다분히 시대역행적인 고루한 사상으로 보일지 모르나 그것은 궁극적으로는 소토지 농민의 몰락을 막아야겠다는 그의 사상에서 보면 반드시 그런 것만도 아니다. 이러한 그의 경제사상은 일체의 계급을 철폐하자는 사상과 결부되었고, 이것은 일종의 계급조화설에 해당되는 바,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견해가 아닐 수 없다. 그의 사상은 이후의 실학자들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주게 되었다.

성호사설[편집]

星湖僿說

조선후기의 실학자 이익의 전집. 사설은 일시에 저작된 것이 아니고 이익이 40년에 걸쳐 수시로 기록해 둔 것을 만년에 그의 족자(族子)가 등전(謄傳)한 것이다. 그후 그의 제자 안정복(安鼎福)이 원저(原著)를 산수(刪修)하여 <성호사설 유선(類選)>을 편찬하였는바, 오늘날은 이 책을 <성호사설>이라고 부른다. 이 책은 <천지편> <만물편> <인사편> <경사편> <시문편>으로 나누어지며, 각 편은 또 각 문(門)으로 나누었다. 이 책을 통해 이익은 소토지 소유 농민의 대량 몰락은 대토지 소유의 만연으로 진전하였다고 지적하고, 화폐유통에 의한 농민의 토지에서의 축출 현상은 당시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수재(水災)나 한재(旱災) 때문에 한층 격화되었다고 지적하였다. 이익은 <천지편>에서 인식론 및 역사인식에 대한 견해를 전개하고 있다. 즉 <천지편>에는 종래의 편협한 세계관에서 탈피한 지전설(地轉說)적인 통찰이 보이고 있으며 자연현상에 대해서도 비교적 과학적인 이해를 하고 있었다. 이러한 지식은 그의 인식론을 보다 합리적·긍정적인 것으로 이끌었으며, 이는 기(氣)일원론적 입장을 계승 발전한 그의 철학사상에 있어서 가장 핵심이 되는 기(氣)불멸 사상에서 잘 나타난다. <경사편>과 <천문편>에는 또한 역사에 대한 새로운 인식태도가 보이는데, 그것은 진보적인 과학사상 및 세계관과의 밀접한 연관하에서 전개되었다. 이익은 과거 중국 중심의 세계관에서 벗어나서 역사인식을 보다 합리적인 측면에서 전개했으며, 역사인식에 있어서 각국의 독자성과 객관적인 운동을 설명하려 하였다. 그리고 시세(時勢)라는 개념을 역사의 객관적인 어떤 운동으로 인정하였다.

우하영[편집]

禹夏永 (1741∼1812)

조선후기의 학자. 자는 대유(大猶), 호는 취석실(醉石室), 수원 출신. 유생으로 과거에 급제했으나, 회시(會試)에는 끝내 실패, 일생 동안 학문에만 정진하던 중, 정조 20년 왕의 구언윤음(求言綸音)에 응지(應旨)하여 시무책(時務策)을 상소했다. 순조 4년에는 순조의 구언윤음에 응지하여 <천일록(千日錄)>을 바쳤는데, 그는 여기에서 중농주의적(重農主義的) 경제관을 견지하면서도 상업적 농업을 주장했다. 또한 그는 중세적 신분질서의 붕괴는 반대했으나 경제적으로 실력있는 사람의 신분이동은 긍정하는 등으로 18세기 후반과 19세기 초의 사회적 현실을 반영하는 사상을 전개했다.

유형원[편집]

柳馨遠 (1622∼1673)

조선후기 실학파의 선구자로 알려진 학자. 본관은 문화(文化), 자는 덕부(德夫), 호는 반계(磻溪). 한성부(漢城府) 서부(西部) 소정릉동(小貞陵洞)의 외가에서 출생. 부친 흠은 예문관 검열(藝文館 檢閱)로, 유형원 출생 이듬해에 유인몽(柳寅夢) 옥사(獄事)에 관련되어 옥사하였으며, 모친 여주 이씨(驪州李氏)는 뒤에 유형원의 학통(學統)을 이어 이익(李瀷)의 당숙모가 된다. 14세에 병자호란을 당하여 가족과 함께 원주(原州)로 피난을 하였고, 21세 때부터 10여 년간 선영(先塋)이 있는 지평(砥平)·여주 등지에서 산 것으로 보아 남한강 유역 일대에 본래 생활 근거지가 있었던 것 같다. 32세 되던 1653년(효종 4년)에 지금의 전라북도 부안군 보안면 변산(邊山) 기슭의 우반동(愚磻洞)으로 이사하여 여기서 일생을 마쳤다. 부안은 그의 조부가 병자호란 직후에 자리잡아 놓았던 곳이다. 33세에 진시사(進士試)에 합격했다. 그 뒤에도 수차 관직에 추천하는 이들이 있었으나 끝내 나아가지 않고 평생을 야인(野人)으로 보냈으며 또 선배로는 허목(許穆), 친구로는 윤휴 등 당대 남인(南人)당의 거물들과도 친교가 있었다. 당쟁에는 전혀 관계하지 않고 저술(著述)을 낙으로 삼았다. 52세로 부안에서 사망했다. 지금 경기도 용인군(龍仁郡) 외사면(外四面) 용천리(湧泉里) 정배산(鼎排山) 선영 아래 안장되었다. 그의 주저 <반계수록(磻溪隨錄)>은 농촌 생활의 체험을 토대로 전제(田制)·교선제(敎選制)·임관제·직관제·녹제(祿制)·병제(兵制)·군현제(郡縣制) 등 국가 제도 전반에 걸친 근본적 개혁안을 제시하고 또 그 주장의 근거로서 각 문제별로 관련문헌을 초기(抄記)한 고설(攷說)을 붙인 것인데, 부안 은퇴 전해인 31세부터 사망 수년전인 49세까지에 걸쳐 집필되었다. <반계수록>의 주장은 우선 농지 개혁 그리고 농민 국가의 중간에 개재하는 불합리한 요소와 부정(不正)을 제거함으로써 자영 농민(自營農民)을 최대한으로 길러 그 생활을 안정시키는 동시에 국가의 재정과 국방이 요구하는 물적·인적 자원을 확보하려는 부민(富民)·부국(富國)·강병(强兵)의 방안이 중심으로 되어 있다. 허목(許穆)은 유형원을 평하여 '왕좌(王佐)의 재(材'>라 하였고, 이규경(李圭景)은 평하여 '조선조 제1의 경륜'이라 한 바 있지만, 그의 경세(經世)사상은 주로 이 <반계수록>에 집약적으로 나타나 있다. 유형원은 비록 당시의 현실을 예리하게 비판하고 대안(代案)을 제시했으나 결국은 동양의 전통적인 왕도(王道), 농본주의, 균산주의(均産主義) 등의 테두리를 벗어나는 것이 아니었다. 더구나 중국 고래의 이상 국가의 표현인 <주례(周禮)>를 근본으로 하여 고성왕(古聖王)의 도(道)의 재현을 목표로 하였고, 전제왕권(專制王權)을 정점으로 한 가산관료제(家産官僚制) 체제의 강화로 그 목표를 달성하려 함으로써 그 시대적인 한계성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이익·정약용을 비롯한 이른바 실학파의 많은 학자들이 유형원을 흠모 사숙하였고, 그들의 근대 지향적인 사상은 유형원의 사상을 근본으로 하여 변모 발전한 것이 많아, 그러한 의미에서 유형원은 조선후기 실학사상의 선구자로 평가되고 있다. 유형원의 주장은 한동안 세상에 알려지지 못하였으나 영조(英祖)대에 이르러 그의 경륜이 탁월했던 것을 조정에서 알게 되자, 영조 46년에는 호조참의(戶曹參議)겸 세자시강원찬선(世子侍講院贊善)을 추증(追贈)하고 <반계수록>을 인간(印刊)케 하여 각 사고(史庫)와 홍문관(弘文館)에 분장(分藏)케 하였다. 유형원은 또한 성리학(性理學)·역사(歷史)·지리(地理)·병법(兵法)·음운(音韻)·한문학(漢文學)·선술(仙術) 기타에 걸쳐 많은 저술을 하여, 그 서목(書目)은 20종에 가까우나 <반계수록>을 제외하고는 모두 현재는 전하지 아니한다. 다만 단편적으로 남아 있는 자료로 보아, 그의 성리학은 이황(李滉)계의 주리론(主理論)에 속하는 것으로 보이며, 또 그 역사·지리·병법 등의 어느 것은 당시 지식층 사이에 성행했던 북벌론(北伐論)에 근거를 둔 경향이 있었던 듯하다.

반계수록[편집]

磻溪隨錄

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의 만년(晩年)의 저작. 이 책은 그가 지방을 유람하면서 농촌사회의 실정을 살피고 특히 우반동(愚磻洞)에서 농민과 더불어 생활하면서 얻어진 제세구민론(濟世救民論)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의 편제(編制)는 전제·교선제(敎選制)·임관제(任官制)·직관제(職官制)·녹제(祿制)·병제(兵制)의 6부분과 미완성의 보유(補遺) 1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는 이 책에서 임진·병자의 양란(兩亂) 후 전제 문란으로 국가의 모든 일이 그릇되고 있음을 목격하였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전제의 정비가 시급함을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균전제에 입각한 전제개혁안을 제창, 농민 급전, 관리 급전 등을 주장했다. 그러나 그 개혁안에는 사회계층의 구분을 엄격히 규정하는 등 한계성이 없는 것이 아니다. 요컨대 이 책은 전통사상에서 근대사상에로의 전환기에 선도적 사명을 다했던 유형원의 시대적 현실의 제약과 발전이라는 측면에서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18세기 이후 각 학문 분야에서 혁신사상을 제창한 수많은 저작이 서술되었는데, 이러한 신사조는 직접적·간접적으로 <반계수록>의 영향을 받지 않은 것이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약용의 경제사상[편집]

丁若鏞-經濟思想

다산(茶山) 정약용은 학문적으로 유형원(柳馨遠)·이익(李瀷)을 잇는 중농주의적(重農主義的) 학풍을 계승하고 박지원(朴趾源)을 대표로 하는 북학파(北學派)의 기술도입론을 과감히 받아들였다. 그의 경제사상은 한 마디로 말하여 민생을 위한 경제론으로 집약된다. 그는 농민의 토지균점(均占)과 노동력에 의거한 수확의 공평한 분배, 기술교육 등 사회경제적인 제도 개편을 설파했다. 그는 또한 경제제도의 간소화를 통해 정체된 조선왕조의 발전을 기도했으니, 이를 위해 ① 왕실재정 정비, ② 호조(戶曹)기구 개혁, ③ 국가 재정관리를 위한 형(刑)·공(工) 양조의 관아 신설, 그리고 ④ 토지와 조세의 관리 등에 대한 그의 견해를 밝혔다. 그러나 보다 본질적인 것은 ① 토지관리, ② 조세관리, 그리고 이것을 관리하는 ③ 행정감독론으로 요약할 수 있는데, 이를 위해 그는 ① 중국 토지제도에 대한 역사적 비판, ② 조선 토지제도의 역사적 비판, ③ 전제 개혁론, ④ 조선 결부제(結付負制)의 비판, ⑤ 조선 각도(道) 토지조사론, ⑥ 조선 토지조사의 기술적 조절론, ⑦ 각종 세론(稅論), ⑧ 조선 조세제도의 역사적 비판 등을 가하고 있다. 다산은 또 유적지 강진(康津)에서 목격한 지방 관헌의 탐학과 부패를 통탄하여 "남쪽의 전부소출(田賦所出)에는 지방 관헌의 간활(奸猾)로 인하여 그 폐단이 막심하다"고 하여 사목자(司牧者)는 각자 수신하여 관료로서의 개인적 덕성과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고 했다. 다산은 그의 애민사상(愛民思想)을 경제적인 유민정책(裕民政策)으로 발전시켰다. 또한 행정적으로는 새로운 회계제도에 따라 수입과 지출을 정비하자고 주장했다. 이와 같은 다산의 경제사상 속에는 또한 근대 자본주의 정신의 요체(要諦)인 직업윤리까지 내포되고 있어 그 발전적인 시민정신을 엿볼 수도 있게 한다.

박지원의 경제사상[편집]

朴趾源-經濟思想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은 전통적인 중농사상(重農思想)의 소유자로, 토지의 점유를 제한할 것을 주장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농기구(農器具)의 개량, 관개(灌漑)시설의 확장, 농경법(農耕法)·양잠법의 개량은 물론 도자기 제작이나 야금술(冶金術) 등 청(淸)의 기술을 도입할 것을 주장했다. 그는 또 농업의 발달과 아울러 상공업도 병행되어야 할 것을 말하여, 차(車)와 선박을 이용하여 국내상업과 대외무역의 진흥도 같이 도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실제 차제(車制)를 개량하여 물화(物貨)의 유통을 활발하게 해야 한다는 주장은 수차(水車)의 이용설과 더불어 김육(金堉)이나 윤휴와 같은 이도 일찍부터 주장한 바이다.

박제가의 경제사상[편집]

朴齊家-經濟思想

초정(楚亭) 박제가(朴齊家)는 전후 3회에 걸쳐서 청(淸)의 수도 연경(燕京)에 왕래하여 청의 문물과 상업·무역의 활발함을 보고 왔다. 그리하여 그는 청의 문물을 섭취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으며, 중상주의적(重商主義的) 경제사상을 전개했다. 그는 조선에서도 청국에 무역선을 파견하여 수로(水路)로 통상의 길을 열어서 청에 있어서의 세계무역에 참여해야 할 것과 청의 흠천각(欽天閣)에서 봉직하고 있는 서양인을 조선에 초빙하여 천문기술에서부터 유리 제조에까지 이르는 기술 전반을 학습케 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그는 또 국내 상업 및 외국 무역의 장려, 수입 금지, 수출 장려, 은(銀)의 해외유출 금지, 물가의 평균화, 대량생산, 제품규격의 규제, 전국적 시장확대, 농·공·상업에 대한 국가적 후원의 강화 등의 개혁안을 제시했으나 정부는 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유수원[편집]

柳壽垣 (1694∼1755)

조선의 문신·학자. 자는 남로(南老), 호는 농암(聾菴)·농객(聾客). 숙종 40년에 진사, 동왕 44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경종 2년 정언(正言)이 되었으며, 영조 4년 지평(持平)에 승진했으나 노론(老論)의 득세로 정치적인 금고생활을 하면서 오직 연구와 저술에 정력을 기울여 <우서(迂書)>를 저술했다. 동왕 17년 탕평(蕩平)에 부심하던 왕명을 받아 '관제서승도설(官制序陞圖說)'을 제진(製進)했으나 그후는 계속 정치적으로 불우한 생활을 보내었으며, 동왕 31년 변서사건(變書事件)에 연루되어 대역죄로 사형당했다. 그는 <우서>를 통해 조선왕조의 문물제조에 대한 역사적 고찰을 한 뒤, 관제의 개편, 신분제의 철폐, 교육의 기회 균등, 농·공·상업의 분업적 전문화를 통한 산업의 진흥 등을 주장하는 등 주목할만한 사상을 보였으나 이런 사상은 그의 사형으로 지하로 숨어 은밀한 전승과정을 겪을 수밖에 없어, 크게 계승·발전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