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동양사상/한국의 사상/통일신라시대의 사상/통일신라시대의 불교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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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시대의 불교사상〔槪說〕[편집]

통일신라시대의 불교사상은 결코 단순한 동질적 성격을 가졌다고 볼 수 없다. 668년 신라가 반도를 통일한 뒤, 이 통일왕조는 917년 고려왕조에 의해 대체될 때까지 근 250년이란 긴 수명을 유지하지만 이 시기에는 대개 전 100년과 후 150년으로 구분되는 두 개의 사상적 특징을 보인다. 이 두 구분을 가령 통일신라 전기와 통일신라 후기로 이름 붙인다면 전기는 불교사상이 아직 그 건전한 발전을 계속한 시기이고, 후기는 그 사상내용이 점차 타락쇠퇴의 길을 달리는 시기라고 볼 수 있다.

통일신라 전기[편집]

統一新羅前期

통일신라 전후에는 불교사상에 현격한 내용 차이가 드러난다. 전기불교는 단적으로 교학(敎學)을 위주로 했다면, 후기불교는 단적으로 선학(禪學)을 위주로 했음이 확실하다. 통일신라 전기에 속하는 학승(學僧)으로서는 원효(元曉)·원측(圓測)·의상(義湘)·경흥(憬興)·의적(義寂)·도증(道證)·승장(勝莊)·도륜(道倫)·대현(大賢)·표훈(表訓) 등이 있으나 본격적으로 불전에 대한 주소(註疏)를 남긴 학승은 원효에게서 비롯된다. 원효는 한국사를 통하여 전무후무한 대학자이었는데, 그의 저술은 81부 200여권에 달한다. 그는 <화엄> <열반> <법화> <반야> <심밀> <미타> <능가> 등 대승불교의 여러 경에 통효(通曉)해 있었고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 <요가론(瑜伽論)> <섭대승론(攝大乘論)> <성유식론(成唯識論)> <중변분별론(中邊分別論)> <인명론(因明論)> 등 대승논서를 중시한 학습을 했다. 그중에서도 원효의 기본사상을 가장 잘 알게 해주는 현존문헌은 그의 <대승기신론소> 및 <동(同)별기(別記)>와 <금강삼매경론>이다. 원효는 <금강삼매경>을 대승의 깊은 뜻과 의미를 총섭(總攝)한 것으로 보고 <섭대승경(攝大乘經)> 또는 <무량의종경(無量義宗經)>이라고도 부르고 있는데, 그는 <대승기신론소>에서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심식(心識)을 깊이 통찰하여 8식설(八識說)에 의거하여 인간은 모름지기 제 9식, 본각(本覺)에 귀입(歸入)하는 것을 최고 최후의 목표로 삼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의 이같은 이상은 귀일심원(歸一心源) 또는 환귀일심(還歸一心)이라고도 표현하고 거기에 도달하는 수단으로서 6바라밀(波羅密)의 실천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그는 6바라밀의 실천, 그 중 계(戒)의 실천을 매우 심오하고 폭넓게 생각하여 율법주의의 편견에 사로 잡히지 않는 대장부의 면모를 보였다. 그의 계율관을 분명히 드러내 주고 있는 것이 <보살계본지범요기(菩薩戒本持犯要記)> 또는 <범망경소(梵網經疏)>와 같은 문헌이다. 그는 종파적 대립을 초월하면서도 개성의 상대적 가치를 인정하였으므로 그의 근본입장을 화쟁和諍)이라고 할 수가 있다. 그는 이를테면 인간 사이의 조화와 일치에 불가결한 철학적 원리와 윤리적 방향을 제시한 민족의 대사상가라고 말할 수 있다. 의상은 일찍이 원효와 동도(同道)하여 입당(入唐)을 계획, 원효가 이미 도(道)를 알고 홀로 귀향한 뒤 당에 유학, 삼국통일 이듬해에 귀국하여 원효와 더불어 신라 통일기의 지도적 사상가가 되었는데, 그는 중국에서는 화엄종의 지엄(智儼)으로부터 배웠고, 법장(法藏)과 동학이었다. 의상은 문무왕 16년, 나이 52세 때에 왕명으로 태백산(太伯山)에 부석사(浮石寺)를 세우고 화엄일승(華嚴一乘)을 개연(開演)하였다. 의상에게는 10명의 제자가 있었다. 오진(悟眞)·지통(智通)·표훈(表訓)·진정(眞定)·진장(眞藏)·도융(道融)·양원(良圓)·상원(相源)·능인(能仁)·의적(義寂)이 그들이다. 이들은 의상의 <일승법계도(一乘法界圖)>에 관한 스승과의 대화와 자기들 나름의 해석을 <법계도기총수록(法界圖記叢髓錄)>이라는 책을 상·하 양권으로 남겨 현존하고 있는데 이 책을 보면 그 <법계도>가 당시 얼마나 중시되고 널리 보급되어 있었는가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원측(圓測)은 의상과 동시대인으로서 약간 앞서 입당하여 끝내 돌아오지 않고 만 사람이나 그의 학문은 멀리 당나라에서 명성을 떨쳤다. 왕손으로 일찍이 출가하였고 입당 후에는 현장에게서 배웠다. <요가> <유식> <구사> <성실> 등의 논(論)과 대·소승의 경에 통했다. 송나라 <고승전(高僧傳)>을 보면 현장이 새로 번역한 <유식론>을 강(講)하여 자은(慈恩)·규기(窺基)에게 주자, 원측(圓測)은 그 기회를 얻지 못하여 문지기를 꾀여 몰래 그 강(講)을 듣고 규지 못지 않게 이에 통달하게 되었다. 측천무후(則天武后 )때에는 역경관(譯經館)에 들어가, 인도의 지바하라(地婆訶羅)가 <밀엄경(蜜嚴經)>을 번역할 때, 5대덕(大德)의 상수(上首)가 되어 이에 참여할 정도로 어학에도 능통하였다. 승장(勝莊)과 도증(道證)은 그의 문인으로 모두 유식에 관한 저술들을 남겼다. 또 순경(順璟)과 신방(神昉)·둔륜(遁倫)·지인(智仁)등과 더불어 입당(入唐) 유학을 하고 돌아온 사람들도 유식계통의 학승(學僧)들이다. 문무왕과 신문왕대에 걸쳐서 경흥(憬興)의 이름이 높았다. 효소옹 원년(701년)에는 당나라 법장(法藏)의 문인 승전(勝詮)이 <화엄소초(華嚴疏抄)>를 가지고 와서 의상에게 바쳐 우리나라 화엄학이 더욱 발달하게 되었다. 그후 범수(梵修)라는 사람이 중국에 건너가 <신역후분화엄경관사의소(新譯後分華嚴經觀師義疏)>를 구해 가지고 왔다. 즉 징관(澄觀)의 소(疏)를 말하는데 그것이 찬술된 지 12년만에 동전(東傳)하게 되었다. 이렇게 발달된 화엄학을 신라의 심상(審祥) 등이 일본에 전해주었다. 명효(明曉)란 중(僧) 역시 같은 시기에 입당했다가 진언(眞言)의 묘의를 우리나라에 전했다고 하는데, 그는 <불공견색다라니경> 1부를 중국에서 번역하는 데 참여하였다고 한다. 현재 동명(同名)의 승려가 남긴 <해인삼매도(海印三昧圖)>가 있는데, 이는 의상의 <일승법계도>를 본딴 것이지만 이것이 동일인의 것인지는 분명치 않으나 만약 그렇다면 당시의 불교사상가들이 지녔던 경향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진언과 화엄 일승사상과의 혼융이란 현상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대현(大賢)은 혹 태현(太賢)이라고도 하였는데, 경덕왕 때의 사람으로, 경주 남산의 용장사(茸長寺)에 살았다고 한다. 그 절에는 자씨석불(慈氏石佛)이 있었고 대현이 항상 이를 선요(旋繞)하였는데, 그 정성에 동하여 그 석불이 대현이 돌 때마다 같이 따라 돌았다고 <삼국유사>가 전하고 있다. 대현은 유식에 정통했고 또 동시에 다른 많은 경들에도 능통했으며 매우 신통력이 있는 중이었다. 대현의 저술에는 <고적기(古迹記)>라는 이름이 많이 붙어 있는데, 이는 겸허한 대현의 인품을 말해주는 것이다. 우리는 그가 관심을 표한 경론의 종류를 보면서 원효 이래 통일신라시대 불교사상이 대체로 어떤 방향으로 흘러갔던가 하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원효(元曉) 다음으로 많은 저술을 남긴 것은 역시 경흥과 대현인데 이 두 사람의 경향을 보면 불교 연구의 방향이 원효 때에 비해 점차 번쇄하게 되어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대현은 <유식론>에 관한 문헌을 다섯 가지나 남겼고, <구사론> <인명론>에도 많은 관심을 표했다. 경흥도 <유식론>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이것은 원효의 종교적 확신에 입각한 생활불교적인 면모가 점차 다시 이론 추구의 형식주의적 경향으로 흘렀음을 보여준다. 또 하나 특징적인 것은 국왕의 요구에 순응하여 저술한 <금광명경(金光明鏡)>과 같은 것, 그리고 불안한 대중들을 위하여 저술한 <미륵경(彌勒經)> <무량수경(無量壽經)>의 주석이 나타났다는 사실이다. 이는 역시 통일성기(統一盛期) 자체 내에 있어서도 일련의 변화 쇠퇴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징조라고 보겠다. 경흥과 대현 등의 저술을 포함하여 다른 승려들의 관심이 점차 종교적 감격과 생기를 잃어가고 있는 감이 없지 않다. 승전(勝詮)은 현수(賢首-643∼715)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신문왕 12년(692)에 돌아온 화엄학승이었으나 저술은 남기지 않았다. 혜초(慧超)는 성덕왕대(702∼732)에 당에 들어갔다가 인도까지 다녀와 유명한 기행문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을 지었지만 철학적인 면에서 특기할 것은 없다. 신라의 불교인들 사이에 밀교적 경향이 들어온 것은 벌써 묵호자(墨胡子) 당시부터가 아닌가 생각되지만, 그 당시의 밀교(密敎)는 아직 발전된 밀교, 주술적(呪術的)인 밀교는 아닌 것 같이 보이고, 선덕여왕 원년에 입당했다가 635년에 귀국한 명랑이 신인종(神印宗)의 종조가 되었다고 하는 기록이 <삼국유사>에 있어, 이것이 밀교 도입의 정식 연대라고 생각된다. 그후 혜통(惠通) 스님이 중국에 밀교를 전파한 사람중의 하나인 선무외(善無畏)로부터 법을 전수받고 와, 우리나라에 크게 밀교를 진흥시켰다고 기록되어 있다. 밀교는 악귀와 외구(外寇)를 쫓고 사람의 원한을 풀어주며 또 사람들의 숙명을 밝혀주는 등 상당히 종교적 실리면에서 근기(根機)가 낮은 대중과 또 지위는 높아도 역시 여전히 그러한 근기를 벗어나지 못하는 귀족들 사이에 큰 영향력을 발휘한 것으로 보이다. 그러나 우리가 앞서 말한 화엄계의 사상을 신념으로 하는 우리 민족의 대표적 사상가들의 견지에서 말한다면 그러한 타력(他力) 의존, 특히 주력(呪力) 신앙의 귀결은 결국 미신으로 떨어지고, 그 자체 역량을 감퇴시킬 우려가 있어 환영할 바가 못되는 것이다. 정세가 긴박하고 스스로의 용기가 부족한 사람들이 눈앞에 닥쳐오는 재액을 쉬운 방법으로 피해보려고 할 때에 이러한 불교적 경향은 급격히 만연해 갈 수 있는 것이다. 신라가 통일을 성취한 것은 이러한 타력에 의해서보다는 더 본질적으로 자기 자신에게만 잇는 불력(佛力)을 고스란히 개발한 그 수련의 덕택이었던 것이다. 그런 뜻에서 말하면 밀교가 우리나라 강토 안에서 판을 치기 시작했다는 것은 그리 반가운 일이 못되는 것이다.

통일신라 후기[편집]

統一新羅後期

8세기 후반∼9세기의 사상계는 표면상으로는 선사(禪師)들의 분주한 중국 왕래와 9산 개문의 사건이 있었으나 실제로는 무언가 병폐를 안기 시작하였다고 보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8세기 후반부터 시작된 선(禪)에 대한 취향은 9세기에 들어서자 지배적인 경향으로 변했다. 단적으로 말하여 교종은 일시에 쇠잔하고, 중국에서 보리달마(菩提達摩)에 의해 계발되고 6조 혜능(慧能) 때부터 두드러진 종파색을 드러낸 선종이 이제 이 나라 불교계를 풍미하기에 이르렀다. 신라의 학승들은 앞을 다투어 당나라에 들어가 그 문하에 들지 않으면 행세를 못할 판국에 이르렀다. 중국에서는 6조(祖) 혜능 때에 남돈선(南頓禪)과 북점선(北漸禪)으로 갈라져 있었는데, 중국 자체에서 남선(南禪)이 득세하자 신라의 선문(禪門)도 자연히 그 경향을 따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신라에는 이 남돈선만이 크게 흥하고 혜능은 이제 불조(佛祖) 석가의 자리를 능가할 지경이 되었다.

선가는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을 그 종지로 하며 실상 그런 원리는 원효가 이미 그 허다한 저술 속에서 강조한 바이고, 표현은 다르나 모든 불전의 근본 정신이 바로 거기에 있는 것이었는데, 선가에서는 가까운 교가(敎家)의 번쇄철학적 타락상만을 보고, 불전을 모조리 경멸하는 어처구니 없는 반동적 태도를 나타냈던 것이다. 또 한 가지 선가(禪家)의 좋지 않은 특징은 권속관념이 지나치게 강한 것으로, 사자상승(師資相承)의 관계를 매우 엄격하게 따지는 경향이 있었던 것이다. 소위 선문9산은 신라말기에 이미 완성된 형태로 성립되지는 않았지만 그 맹아가 돋아나기 시작한 것으로, 본래 원융(圓融)해야 할 불교인의 수행자세는 자칫하면 대립적이 되고 갈등이 생길 우려가 이미 발생하고 있었다. 고려인들이 정리한 소위 9산의 계보를 보면 그것이 학파로는 인정하기 어려운 점이 엿보이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막스 베버가 그 사회학적인 이론으로 주장하는 소위 전통적 지배양식에 해당하는 현상으로서 정열과 덕성의 카리스마적 불길이 식은 뒤, 그 교조의 탈을 쓰고 가부장(家父長)적인 권위주의로 떨어져 전통의 껍질 속에 칩거하는 종교사회 일반의 현상이라고도 볼 수가 있다. 이미 통일신라의 말기에 기성 불교는 더 이상 새로운 불꽃을 튕기지 못하고 여러 가지 면에서 위험성이 깃들인 새로운 사상풍토로 자리를 옮겨주고 말았던 것이다. 역사발전과 사상의 연관관계란 관점에서 볼 때, 선풍(禪風)이 내포하는 약점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면에서 노정된다고 생각할 수가 있다. 첫째 선가의 수행방법은 대중 속가에서는 따르기 힘든 점이 많다. 가정을 가진 재가(在家)신자들이 심산유곡을 찾아 수행의 길에 나서는 것은 일반화할 수 있는 일이 아니며, 현실생활과의 유리현상을 막기가 어렵다. 따라서 대중은 불교를 알기 어렵고 접근하기 힘든 것이란 인상을 받게 되어 소외(疎外)되고 마는 일이 허다해진다. 둘째 선가에서도 계율을 결코 무시하거나 경시해서는 안 되는 것이 원칙이라고 하겠지만 불립문자(不立文字)의 표방은 자칫 잘못하면 계율을 무시하거나 경시하는 폐단을 초래한다. 역사의 발전, 국가나 민족의 현실적 진보를 위해 교(敎)를 무시한 선(禪)위주의 사고방식은 무원칙과 나태방일한 생활을 초래할 우려가 있다. 우리는 이러한 선가에 따르는 오해받기 쉬운 경향 때문에 결국 통일신라 후기불교의 지배적 조류인 선종이 아직 그 나름의 탁월한 지도자를 배출시키지 못한 채 신라의 사직을 고수하는 방패가 되지 못하고 만 것이라고 생각한다. 신라 말기의 선 중심 불교에서 우리는 신라의 독창적 수용이나 변모는 찾을 수가 없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중국 불교의 모방 그대로이다.

원효[편집]

元曉 (617∼686)

신라의 중. 성은 설(薛), 원효는 법명, 아명은 서당(誓幢)·신당(新幢)·설총(薛聰)의 아버지. 진덕여왕 2년 황룡사에서 중이 되어, 동왕 4년(650)에 의상(義湘)과 당나라 유학길에 올랐으나 고구려 순찰대에 걸려 실패, 문무왕 1년 의상과 다시 길을 떠나 당항성(黨項城)의 한 고총(古塚)에서 밤중에 해골에 괸 물을 먹고, 모든 것은 마음에 달렸으며, 사물 자체에는 정(淨)·부정(不淨)이 없다고 깨달아 유학을 포기하고 돌아와, 분황사(芬皇寺)에 있으면서 통불교(通佛敎)를 제창 불교의 보급에 힘썼으며, <자찬훼타계(自讚毁他戒)>를 세워 남을 헐뜯는 것을 금했다. 그후 무열왕의 딸 요석공주와의 파계(破戒)로 승복을 벗고, 소성거사(小性居士)·복성거사(卜性居士)로 자칭, <무애가(無碍歌)>를 부르면서 민중교화에 힘썼다. 당나라에서 <금강삼매경(金剛三昧經)>이 유입되자, 당시의 왕과 고승들 앞에서 이 경을 풀이했으며, 그후 절에 파묻혀 참선과 저술로 만년을 보냈다. 불교사상의 종합과 실천에 노력한 한국불교의 대표적 사상가이며, 가장 위대한 고승의 한 사람으로 뒤에 고려 숙종 6년(1101)의의천(義天)의 건의로 시호를 추증받았다. 저서로 <대승기신론소> <보살계본지범요기(菩薩戒本持犯要記)> <범망경소(梵網經疏)> <금강삼매경론> <십문화쟁론(十門和諍論)>등 21종이 있다. 그의 사상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인간의 심식(心識)을 깊이 통찰, 9식설에 의거하여 제9식 본각(本覺)에 돌아가는 것, 즉 '환귀일심(還歸一心)'을 최종 목표로 삼고, 실천방안으로 6바라밀의 실천을 강조하였다. (2) 그는 만법귀일(萬法歸一)을 믿어 종파적 대립을 초월한 1승원교(一乘圓敎) 혹은 화쟁(和諍) 사상을 주창하였다. (3) 그는 교화의 방법으로 민중 속에 들어가 민중과 함께 생활함으로써 불교를 생활화하는 보살정신을 직접 실천함으로써 불교대중화에 크게 공헌하였다. (4) 그는 선진문명국인 당나라의 불교를 배우려다 진리는 어디에서나 마찬가지이고, 바로 자기의 마음 하나에 달려 있다는 것을 크게 깨닫고, 주체적이고 창조적인 수행의 길을 택하였다. (5) 그는 1심(一心)의 세계를 불국토·극락으로 보고 이는 인간의 심정에 나타나 구체화되는 것으로 생각하여 지상적, 인간적 성실을 존중하면서도 진여(眞如)의 세계를 향한 부단한 노력을 강조하였다.

금강삼매경론[편집]

金剛三昧經論

신라의 고승 원효가 지은 <금강삼매경> 해석서. 신문왕 6년(686)에 이룩된 것으로 3권 1책의 목판본이다. 권1에서는 <금강삼매경>의 대의(大意)를 논하고, 마음의 근원은 홀로 정(淨)하여 아공(我空)·법공(法空)·구공(俱空) 3공(空)의 바다는 담연(湛然)한 것이라 하고, 결국 무리(無理)의 지리(至理)와 불연(不然)의 대연(大然)으로서 이 경의 종지는 개합(開合)의 별(別)이 있어서 합하면 일미관행(一味觀行)이 요(要)가 되고 열(開)면 10중법문(十重法門)이 종(宗)이 된다고 하였다. 권3에서는 경제(經題)를 말하고, 다음에는 분과(分科)하고, 이어서 본문에 대하여 논석(論釋)을 했으나 장귀(章句)에 대한 주석이 아니고, 경의 이론에 대한 구명(究明)이다. 그는 이 책 속에서 불교의 진리를 비유하여 "물이 양자강 속에 있으면 이름지어 강수(江水)라 하고, 물이 회수(淮水) 속에 있으면 이름지어 회수(淮水)라 하며, 물이 황하(黃河) 속에 있으면 이름지어 하수(河水)라 하나, 함께 모여 바다속에 있으면 오직 이름하여 해수(海水)이니, 법(法)도 역시 이와 같아서 다함께 모여 진여(眞如)에 있으면, 오직 이름하여 불도(佛道)일 뿐이다.(水在江中, 名爲江水, 水在淮中, 名爲淮水, 水在河中, 名爲河水, 俱在海中, 唯名海水, 法亦如是, 俱在眞如, 唯名佛道)"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그가 만법귀일(萬法歸一) 또는 만법귀진(萬法歸眞)을 굳게 믿고, 이에 따라 그의 모든 사상과 생활을 이끌어갔음을 잘 나타내는 하나의 예증이라 하겠다. 그는 '하나'를 강조하였는데, 그 '하나'의 이해는 원효의 사상과 생활을 아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열쇠가 된다. 그 '하나'를 원효는 '1심(一心)'이나, '제9식(第九識)'이니 또는 '대승(大乘)'이니, '불성(佛性)'이니, '열반(涅槃)'이니 하고 불렀던 것이다. 결국 그에게 있어서 이러한 이름들은 앞서 보아온 강수(江水)·회수(淮水)·하수(河水) 등의 예와 같다고 볼 수 있다.

대승기신론소[편집]

大乘起信論疏

신라의 고승 원효의 저서. 인도의 불교학자 마명(馬鳴)의 <대승기신론>을 독자적으로 해석한 것. 이에 대한 주석서로 1,000여 권이 있으나, 원효의 이 책이 가장 잘 되었다 하여 중국에서는 <해동소(海東疏)>로 불리었다. 내용은 3문(門)으로 나누어 1은 종체(宗體)를 밝히고, 2는 제명을 해석하고, 3은 본문의 귀절을 풀이하였다. 해석에 있어 간명을 위주로 하되 조직적, 종합적이어서 불교의 지침을 얻을 수 있도록 되어 있다. 대의를 한 마디로 말하면 불타의 광대무변한 설법을 총섭하여, 1심(一心)이 만물의 주추(主樞)가 된다고 하였다. 이 책은 원효의 사상의 근간을 이루며, 이 안에서 천명된 본각(本覺)·시각(始覺)이라고 하는 2각(覺)의 이론은 그의 모든 주장의 바탕이 되었으므로, 원효의 종교를 각승(覺乘)이라고도 불렀다. 중국의 법장(法藏) 등은 이 책을 받아 크게 존중하였다.

무량수경종요[편집]

無量壽經宗要

신라의 고승 원효가 <무량수경>에 대하여 논술한 책. 취지를 4장으로 나누어 논술하였는데, 제1장은 교(敎)의 대의, 제2장은 이 경의 종지(宗旨), 제3장은 사람을 들어서 분별하였다. 그는 이 책 속에서 <무량수경>의 종지가 정토(淨土)의 인과(因果)를 밝히는 것으로, 불명(佛名) 혹은 불상(佛相)을 생각하여 끊임없이 오직 불(佛)만을 생각하고 다른 생각이 없다는데 있다고 하였다. 그는 또한 이 책 속에서 예토(穢土)·정국(淨國)의 구별에 대하여 "무릇 중생의 심성은 융통하여 걸림이 없으니 태연하기가 허공(虛空)과 같고 잠잠하기가 오히려 큰 바다와 같다. 허공과 같으므로 그 체(體)가 평등하여 차별상(差別相)이 없음을 얻을 수 있으니, 어찌 깨끗한 곳과 더러운 곳이 있겠는가. 오히려 큰 바다와 같으므로 그 성(性)이 윤활하여 인연(因緣)을 따라서 거스리지 않을 수 있으니, 어찌 움직이고 멈추는 때가 없겠는가.…… 예토(穢土)와 정국(淨國)은 본래 한 마음이다. (夫衆生心性 融通無 泰若虛空 湛猶巨海 若虛空故 其體平等 無別相而可得 何有淨穢之處 猶巨海故 其性潤滑 能隨緣而不逆 豈無動靜之時……穢土淨國 本來 一心)"라고 하였다. 그는 1심을 1승(一乘)이라고 보고, 태연하고 잠잠하며 또 넓고 호탕한 심성을 구극적 원리로 삼았다.

의상[편집]

義湘 (625∼702)

신라의 중. 성은 김(金 혹은 朴이라고도 함). 진덕여왕 4년 원효와 같이 당나라에 공부하러 가다가 실패, 다시 문무왕 1년 해로로 당나라에 가서 지엄(智儼) 문하에서 화엄종(華嚴宗)을 배웠다. 동왕 11년(671) 귀국하여 동왕 16년(676)에는 왕명으로 부석사(浮石寺)를 창건하고 화엄종을 강론, 우리나라 화엄종의 창시자가 되었다. 전국 각지에 화엄사찰 10개를 건립, 그의 문하에서 오진(悟眞)·지통·표훈(表訓)·의적(義寂) 등 10대덕(大德)의 고승이 나오고, 고려 숙종 때 해동화엄시조 원교국사(圓敎國師)라는 시호가 내렸다. 저서로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勝法界圖)> <십문간법관(十門看法觀)> 등이 있다.

화엄일승법계도[편집]

華嚴一勝法界圖

신라의 고승 의상이 <화엄일승>의 교리를 도해한 것. 전문 210자의 자작게송(自作偈頌)을 붙여 인(印)의 형식으로 된 4각형 54개를 그려 넣었다. 자작게송은 굴곡된 원형(圓形)을 그리며, 그 도(圖)의 중심에서 시작하여 중심에서 끝나도록 되어 있다. 그 원의 중심에 위치하는 두 글자는 시작이 <법(法)>이며, 끝이 <불(佛)>이다. 이것은 극히 독창적이고, 내용이 심오하여 당시의 불교학계에 큰 영향을 끼쳤고, 그의 제자들은 이에 관한 스승과의 대화와 자기들 나름의 해석을 모아 <법계도기총수록>이라는 저서를 남겼다.

원측[편집]

圓測 (613∼696)

신라의 중. 이름은 문아(文雅), 원측은 자(字). 어려서 출가, 627년 당에 건너가 법상(法常). 승변(僧辨)에게서 유식론(唯識論)을 배웠으며, 중국어. 범어(梵語)에 능통, 당태종으로부터 도첩(度牒)을 받아 원법사(元法寺)에 기거하며 <비담론> <성실론> <구사론> 등을 읽어 고금의 장소(章疏)에 통달하였다. 676년 인도승 지바하라(地婆訶羅)가 가져온 18부 34권의 범본번역에 참여, 693년 인도승 보리유지(菩提流志)가 가져온 범본<보우경(普雨經)>을, 2년 후에는 우전국의 실차난타(實叉難陀)가 가져온 <화엄경>을 각각 번역, 정통으로 자처하던 규기(窺基)의 자은파(慈恩派)와 경전해석상의 대립을 보였다. 신라 효소왕 5년, 당나라 측천무후 원년(696)에 불수기사(佛授記寺)에서 84세로 입적하였고, 그의 저술로는 <성유식론소> <20 유식론소> <성유식론 응초(應抄)> <성유식론 광초(光抄)> <유가론소(瑜伽論疏)> <관소연론소(觀所緣論疏)> <구사론 석송초(釋頌抄)> <해심밀경소(解深蜜經疏)> <인왕경소(仁王經疏)> <금강반야경소(金剛般若經疏)> <반야심경찬(般若心經贊)> <무량의경소(無量義經疏)> 등이 있다. 그의 사상은 (1) 그는 종파에 구애받지 않고 유종(有宗)에 속하여 유식철학(唯識哲學)을 주로 하면서도 반야의 공종(空宗)을 두둔하여, 양집(兩執)을 쌍파(雙破)하고 중도(中道)를 세우려 하였다. (2 유식(唯識)을 해명함에 있어 4분설(四分說)을 취하고, 8식(識)을 일일이 비판하고, 제9식은 그 필요성마저 인정하지 않았으며, 6식을 일체(一體)로, 7식·8식을 별체(別體)로 보았다. (3) 그 는 규기(窺基) 등 자은종파의 5종성(種性)·영별설(永瞥說)을 비판하고, 일체 중생이 모두 여래장(如來藏)을 가지고 있으니 5종성도 한결같이 불성을 가지고 있음을 밝혔다. (4) <해심밀경(解深密經)>을 자은종과는 달리 일승적(一乘的) 견지에서 보아, 궁극적으로는 정불성불(定不成佛)이 불가능하니 누구라도 성불할 수 있다고 단정하였다.

해심밀경소[편집]

解深密經疏

신라의 고승 원측의 저서. 본래는 10권이었으나 권10이 산일되어 지금은 9권만 남아 있다. 권1은 서품(序品)으로 여기에서 <해심밀경>의 교리·종체(宗體) 등을 들어 전체의 대의를 간명하게 논술하였다. 이것은 현재 남아 있는 유일한 <해심밀경>연구서로 그 주석에 있어서 규기 등 자은파와는 상이한 독자적인 견해를 보여주고 있다. 당시 당나라 학계에서 논의되던 모든 학설을 열거하여 이것을 검토하고 본종(本宗)과 일치되는 것을 설명하여, 결국은 만법(萬法)이 하나로 돌아간다고 논술하였다.

경흥[편집]

憬興

7세기 말경 신라의 중. 성은 수(水), 웅천주 출신. 18세에 중이 되어서 3장(藏)에 통달, 문무왕의 유언에 따라 신문왕의 국로(國老)가 되고, 저술에 전심, 45여 부 260여 권이나 되는 저술을 했으나 5부 12권 밖에는 남아 있지 않다. 남아있는 저술로는 <구사론초(俱舍論抄)> <대열반경소> <법화경소> <성유식론폄량(貶量)> <동(同)추요기(樞要記)> <동 의기(義記)> <요가론소> <동(同)석론기(釋論記)> <현양론소(顯揚論疏)> <인명의문의초(因明義門義抄)> <대승기신론 문답> <해심밀경소> <무량수경 술찬> <아미타경약기(略記)> <3미륵경소> <동 축의술문(逐義述文)> <관정경소(觀頂經疏)> <약사경소(藥師經疏)> <12문다라니경소(十二門陀羅尼經疏)> <금강반야요간(料簡)> <4분률갈마기> <법원기(法苑記)> <사비니기(捨毘尼記)> 등이 있다.

대현[편집]

大賢

일명 태현(太賢). 8세기 중엽 신라 경덕왕 때의 중. 유가종(瑜伽宗)의 조사. 호는 청구사문(靑丘沙門). 다방면에 학식이 깊고, 교학의 연구로 많은 저술을 남겼는데, 특히 유식학(唯識學)에는 뛰어난 대가로서 중국인까지도 주목하였다고 한다. 일설로는 대현의 법계를 원측의 문손(門孫)으로 한 것도 있으나 확실치 않다. 그의 저서로는 <화엄경 고적기(古迹記)> <대열반경 고적기> <법화경 고적기> <금광명경 술기(述記)> <동 요간(料簡)> <인왕경 고적기> <금강반야경 고적기> <동 신역경 고적기(新譯經古迹記)> <반야이취분경주(般若理趣分經注)> <반야심경 고적기> <관(觀)무량수경 고적기> <대무량수경 고적기> <소(小) 아미타경 고적기> <칭찬정토경 고적기(稱讚淨土經古迹記)> <미륵상생경 고적기(彌勒上生經古迹記)> <미륵하생경 고적기>

<미륵성불경 고적기> 등 42부가 있다.

혜초[편집]

慧超 (704∼787)

신라의 중. 성덕왕 22년(723) 당나라에 가서 인도승 금강지(金剛智)의 제자가 된 후, 그의 권유로

인도의 성적(聖蹟)을 순례하고, 727년경 당나라 안서도호부가 있던 구자(龜玆)를 거쳐 돌아온 후, 733년 당나라 장안(長安)의 천복사(薦福寺) 도량에서 금강지와 함께 <대승요가금강성해만주실리천비천발대교왕경 (大乘瑜伽金剛性海曼珠實利千臂千鉢大敎王經)>이라는 밀교경전을 연구, 740년 한역(漢譯)에 착수했으나, 금강지의 죽음으로 중단되었다. 오대산(五臺山) 건원보리사(乾元菩提寺)에 들어가서 여생을 보냈는데, 그의 인도기행문인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이 1908년 발견되어 동서교섭사 연구에 귀중한 사료로 평가되고 있다.

혜통[편집]

惠通

7세기경 신라의 중. 우리나라 진언종(眞言宗)의 개조. 일찍이 중이 되어 당나라에 들어가서, 인도승 무외삼장(無畏三藏 혹은 善無畏)의 인결(印訣)을 받고서, 문무왕 5년 견당사 정공(鄭恭)과 함께 귀국하였다고 한다. 일설에는 인도승 불공(不空) 삼장의 종파라고 한다.

선종의 도입[편집]

禪宗-導入

통일신라시대에 당나라에서 성행한 선종 불교가 유학승에 의하여 도입되기 시작하였다. 당시 중국에서는 6조 혜능에 이르러 선종이 남돈선(南頓禪)과 북점선(北漸禪)으로 나뉘면서, 그 기세가 극성할 무렵, 신라에서도 7세기에는 벌써 법랑(法朗)이 입당하여 4조 도신(道信, 580∼651)의 법을 전해 와서 신행(神行)에게 전하였고, 신행은 다시 당으로 건너가 북점선(혹은 北宗)의 신수(神秀)의 문손(門孫)인 지공(志空)에게 배워와 지리산에서 교화하였다고 한다. 북점선은 이것으로 자취를 감추고 9세기초에 이르러 혜능의 남돈선이 도입되기 시작하였다. 선덕왕(宣德王) 때 도의(道義)가 당으로 가서 지장(智藏)에게 배우고 821년 귀국하여 선법(禪法)을 일으키려 하였으나 교학(敎學)이 성하던 신라의 불교계에서는 선법을 마설(魔說)이라고 배척하여 환영받지 못하였다. 설악산에서 그의 법을 배운 제자 체징(體澄)이 837년에 당에 건너갔으나 실망하고 840년에 돌아와서 가지산(迦智山)에서 보림사(寶林寺)를 창건하고, 도의의 종풍을 떨치니 이로써 선종 9산의 1파로 ① 가지산파가 최초로 성립되었고, 뒤이어서 홍척(洪陟)이 지장에게서 배워와(826) 지리산 실상사(實相寺)에서 ② 실상산파(實相山派)를 열었으며, 도헌(道憲)은 준범(遵範)·혜은(慧隱)의 법맥을 받아와 ③ 희양산파(曦陽山派)를 열었으며, 현욱(玄昱)·심희(審希) 등에 의해 ④ 봉림산파(鳳林山派)가, 혜철(惠哲)에 의해 ⑤ 동리산파(桐裡山派)가, 무염(無染)에 의해 ⑥ 성주산파(聖住山派)가, 도윤(道允)·절중(折中)에 의해 ⑦ 사자산파(師子山派)가, 범일(梵日)에 의해 ⑧ 도굴산파( 堀山派)가 열리니 신라말에는 8산이 형성되었고, 여초(麗初)에 이엄(利嚴)의 수미산파(須彌山派)를 기다려 9산 선파가 정립되기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