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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동양사상/한국의 사상/통일신라시대의 사상/통일신라시대의 유학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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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시대의 유학사상〔槪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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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통일 이후, 중대(中代)로 접어든 신라는 전제적인 왕권의 확립을 위하여 유교의 정치이념을 채용하려 하였다. 이것은 삼국시대의 상대(上代) 신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새로운 경향이다. 이리하여 신문왕 2년(682)에는 국학(國學)이 설립되었고, 그 후 성덕왕(聖德王) 때에는 당(唐)으로부터 공자, 10철(哲), 72제자의 화상(畵像)을 가져다가 국학에 안치하였다. 이어 경덕왕(景德王) 때에는 국학을 태학감(太學監)이라 개칭하고 박사(博士)와 조교(助敎)를 두고 교수(敎授)를 담당케 하였다. 이 태학에서는 3과(科)로 구분하여 교수하였는데 3과의 과목은 다음과 같았다. A. 논어(論語)·효경(孝經)·예기(禮記)·주역(周易) B. 논어·효경·좌전(左傳)·모시(毛詩) C. 논어·효경·상서(尙書)·문선(文選) 이에 의하면 <논어>와 <효경>은 3과 공통의 필수과목이었고 그밖의 것에 따르는 선택과목이었다. 이 태학에 입학할 수 있는 것은 대사(大舍) 이하 무위자(無位者)에 이르는 귀족들이었으며, 연령은 15세로부터 30세까지, 수학 연학은 9년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교육기관의 정비를 기초로 하고 원성왕 4년(788)에는 독서3품과(讀書三品科)라는 관리채용을 위한 일종의 국가시험(國家試驗)제도를 만들었다. 이에 의하면 독서의 성적에 따라 다음과 같이 3등급으로 나누어 채용하였다고 한다. 즉 (1) 상품(上品)은 <좌전>이나 <예기>나 <문선>을 읽어서 그 뜻에 능통하고, 겸하여 <논어>와 <효경>에 밝은 자이며, (2) 중품(中品)은 <곡례(曲禮)> <논어> <효경>을 읽는 자요, (3) 하품(下品)은 <곡례> <효경>을 읽은 자이다. 그러나 5경(五經)·3사(三史)·제자백가(諸子百家)의 서(書)에 박통(博通)한 자는 순서를 뛰어 등용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독서3품과의 설치는 관리채용의 기준을 골품(骨品)보다도 유학에 두자는 것이다. 이 같은 정치적·사회적 분위기는 유학의 진흥을 촉진시킨 한 요소가 되었을 것 같기도 하다. 독서3품과의 설치와 대(大) 유학자인 강수(强首), 설총(薛聰) 등의 활동은 거의 그 때를 같이 하고 있다. 강수는 중원경(中原京)의 사량(沙梁) 출신이었으며, <효경>

<곡례>

<이아(爾雅)> <문선> 등을 익혀 배웠다. 태종 무열왕 때 당나라와 신라 사이에 왕래하는 국서(國書)를 맡아 크게 공헌하였다. 그리고 문무왕(文武王)이 설인귀(薛仁貴)에게 보낸 서한은 그가 지은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이때 그에게 사찬(沙飡)의 벼슬이 내려졌다. 다음 설총은 원효(元曉)의 아들이었으며, 어려서부터 유달리 총명하여 널리 경사(經史)에 통했다고 한다. 그는 이두(吏讀)를 집대성하였으며, 특히 이두로 경서(經書)를 훈독(訓讀)하는 법을 마련한 점 등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강수나 설총은 모두 6두품(六頭品) 출신이었다. 6두품은 신라의 골품제사회에서 상대등(上大等)이나 시중(侍中)은 물론이요, 각 부(部)의 영(令-長官)에도 임명될 수가 없었다. 그것은 그들이 정치적인 실권을 장악할 수 있는 기회가 허락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을 뜻한다. 그 한 예로서 강수는 왕의 극진한 총애를 받았으나, 벼슬은 겨우 사찬에 이르렀을 뿐이다. 사찬은 골품제의 17관등 중 8위에 해당하는 관등이다. 이것은 진골(眞骨) 출신에 비해서 엄청난 차별대우인 것이다. 6두품 출신의 이러한 사회적 지위가 그들로 하여금 정치적 지위의 승진보다는 학문적인 식견에 의한 정치적 참여의 길을 밝게 하는 경향을 나타나게 했다. 그러나 신라의 폐쇄적인 골품제 지배 질서는 위와 같은 경향에 적합한 분위기마저 보장해 주지 아니하였다. 독서3품과가 이렇다할 성과를 거두지 못한 까닭도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독서3품과는 골품제도를 그 멸망 시(時)까지 유지해나간 신라 사회로서는 결국 용납하기 어려운 제도였다. 6두품 출신들의 식견의 원천은 대개 유교적인 교양이었다고 생각되지만, 그것은 당으로의 유학에 의하여 충족될 수 있는 것이었다. 신라 하대(下代)의 정치·사회의 분위기는 상대의 귀족연립정권 형태가 되살아난 것 같았다. 정권쟁탈의 현상은 더욱 격심해져 갔으며, 사회는 혼란하였다. 정치적 혼란은 학문에 종사하려는 자들의 수를 증가케 하였다. 사비(私費)로 당에 유학하는 사람들이 늘어갔으며 심지어 당에서 벼슬을 하기까지 하였다. 최치원(崔致遠)은 그 대표적이 인물이라고 하겠다.

국학(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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國學(新羅)

신라시대부터 있었던 교육기관. 신문왕 2년에 국학을 설치하였다고 하나 창설은 진덕여왕 2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 같다. 이미 그때에 박사(博士)와 조교(助敎)를 두었으며, 국학에 유사한 교육기관이 존재해오다가 신문왕 때에 학제가 완비되고 국학이라는 명칭이 정해진 듯하다. 그후는 예부(禮部)의 관할 밑에 두었고, 성덕왕 16년 당으로부터 공자, 10철(十哲), 72제자의 화상을 가져다 봉안하니 명실상부한 체모를 갖추게 되었다. 경덕왕 6년에 일시 태학감(太學監)으로 고쳤다가 혜공왕 12년에 환원시켰다.

독서3품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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讀書三品科

신라 때의 관리등용방법. 일명 독서출신과(讀書出身科)라고도 함. 원성왕 4년(788)에 상·중·하품의 3등으로 성적을 사정하여 인재를 등용하는 제도가 채택되었다. 이것은 과거제의 선구적인 것으로 유교경전의 지식을 근본으로 하고, 3사(三史)·제자백가(諸子百家)의 서(書)를 중시하였으며, 골품제에 대한 비판·견제로서 이루어진 개혁이나 보수세력의 반발로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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强首( ? ∼692)

신라의 유학자·문장가. 초명은 두(頭). 어려서부터 유학에 뜻을 두어 <효경> <곡례> <이아> <문선> 등을 수학, 벼슬길에 올라 문명을 떨쳤다. 무열왕 1년(654) 당나라에서 온 난해한 국서(國書)를 쉽게 해석하고, 그 답서(答書)를 유창하게 지어 왕의 신임을 얻었다. 문무왕 때는 외교문서를 능숙하게 다루어 삼국통일에 기여하였고, 유학자로서 불교를 부정하고 유교를 택함을 명백히 하였다.

설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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薛聰

7세기 경 신라의 문신·학자. 자는 총지(聰智). 호는 빙월당(氷月堂). 원효대사(元曉大師)의 아들. 벼슬은 한림(翰林). 주로 정치에 자문역할을 하였으며 유학과 문학을 깊이 연구, 국학(國學)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중국문자에 토를 다는 방법인 이두(吏讀)를 집대성, 중국문화 섭취에 큰 도움을 주었고, <화왕계(花王戒)>로서 신문왕을 충고한 일화가 전한다. 신라10현(十賢)의 한 사람으로 일컬어지며, 1022년(고려 현종 13)

홍유후(弘儒侯)에 추봉되고 문묘(文廟)에 배향되었다.

김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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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大問

신라 성덕왕 때의 저술가. 명문 출신으로 동왕 3년(704)에 한산주 도독이 되었고, 명문장가로 전기(傳記)류를 저술, 그의 <고승전(高僧傳)> <화랑세기(花郞世紀)> <악본(樂本)> <한산기(漢山記)> 등은 김부식(金富軾)의 <삼국사기> 편찬시 귀중한 참고문헌이 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