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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시대의 정치·사회사상〔槪說〕[편집]

7세기 말부터 10세기에 이르는 통일신라시대가 우리 역사에 있어서 차지하는 위치는 극히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이 시대에 와서는 비로소 우리 민족이 단일민족국가를 형성하여 통일된 국가의식·민족의식이 굳혀지고, 통일 이전만 해도 아직 건재했던 토착적인 부족사회가 장기간의 통일전쟁을 통하여 붕괴되었다. 그와 동시에 중국적인 봉건제도와 유교사상을 전범(典範)으로 하여, 신라왕족을 핵심으로 한 새로운 봉건사회가 가속적으로 정비되어 갔던 것이다. 또한 삼국의 오랜 정립과 대결을 통하여 강화된 국가의식 혹은 조국애(祖國愛)는 처음에는 백제·고구려 유민들의 독립·부흥운동으로 나타났고, 신라의 강력한 국가주의 또한 당제국(唐帝國)의 대국주의(大國主義) 침략과의 대결을 통하여 백제·고구려 유민 포섭의 민족정책으로 발전하였다. 한편 반도 전역에 걸친 군현제(郡縣制) 실시에 의한 강력한 중앙집권적 봉건체제의 실현을 보게 됨에 따라 사회의 계급분화가 급속도로 진전되어 왕족(王族)의 분열, 통일공신과 귀부귀족(歸附貴族), 지방토호(地方土豪) 등을 중심으로 한 신귀족(新貴族)의 등장 등으로 골품제(骨品制)는 크게 동요되었다. 또한 통일 후에 전쟁포로·범죄자·역적 등의 권속들을 집단 정착시킴으로써 부곡민(部曲民)이라는 천민(賤民)계급이 나타나고, 서울과 해안지방에는 당나라·일본 등과의 무역을 통해 신흥 상인(商人)계급이 형성되고 있었다. 귀족문화의 기능적 보조인(補助人)에 불과했던 지식인 계층도 성당문화(盛唐文化)와의 접촉, 불교의 융성, 독서3품과의 실시 등을 통하여 무시할 수 없는 여론집단을 형성하기 시작하였다. 즉 불교에서는 5교 9산(五敎九山)의 종파교단(宗派敎團)이 성립되면서 사회의 지도계층으로서 정치·사회 전반에 큰 발언권을 얻게 되었고, 당나라에 유학하고 돌아온 젊은 지식인들은 전통적 사회를 비판하고 새로운 변혁을 모색하기에 이르렀다. 사회의 계급분화가 이와 같이 격화됨에 따라 국민의 단결과 일체감은 무너지고 각기 자기들의 이익과 야망을 위하여 반목하니 중앙에서는 왕위다툼이 치열해지고, 지방에서는 광대한 토지를 소유한 부농(富農)·성주(城主)·호상(豪商) 등의 반란이 일어났다. 이러한 현실에 실망한 종교인·학자들은 불평을 품은 채 산중으로 도피하였으며, 유랑민·부곡민들이 도적단을 이루어 각지에서 소란을 피워 9세기 말의 신라 사회는 거의 완전한 무정부 상태가 되고 말았다. 정치·사회의 현실이 이러한 변천을 거치는 동안 그들의 사상도 그때마다 다른 형태로 전개되었다. 먼저 통일전쟁을 주도하고, 태종 무열왕(太宗 武烈王)·문무왕(文武王)을 도와 성업을 완수한 김유신(金庾信)은 화랑 출신의 명장(名將)일 뿐만 아니라 불교·유교를 섭취한 문무겸전의 정치가로 충군애군(忠君愛國)의 신도(臣道)에 충실하였고, 왕도(王道)로 군왕(君王)을 일깨워 통일정책 수행에 큰 역할을 하였다. 또한 문무왕도 불교와 호국사상, 유교적인 정치사상으로 당나라의 침략정책을 비판 견제하여 통일 성업의 완성자가 되었고, 다음 신문왕(神文王)은 중앙집권적인 봉건체제의 정비에 뚜렷한 식견(識見)을 가진 명군(名君)이었다. 그러나 왕권다툼이 시작되면서 자기를 정당화하는 이론을 내세웠던 김양상(金良相), 김양(金陽) 등의 활동이 있었고, 일찍이 당나라에 건너가 무관(武官)으로 있던 장보고(張保皐)는 보다 진취적이고 실제적인 정치관을 갖고 해상세력(海上勢力)을 구축하여 중앙정권에 도전하였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이와 같이 골품제가 동요되고 귀족 간에 왕권다툼이 격화되자 정권에 참여할 수 없는 민중(民衆) 속에서도 행동으로 정치의사를 표현하고 정권탈취를 기도하는 혁명사상이 팽배하기 시작했으니 특히 궁예(弓裔)는 몰락 왕손으로서 신라적인 것 일체를 거부하였고, 미륵신앙을 이용하여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신정(神政)을 꿈꾸었으나 왕건(王建)의 혁명으로 좌절되었다. 그 밖에 <화왕계(花王界)>로 신문왕을 일깨운 설총(薛聰), 말기의 문란한 정치를 개탄하고 시무(時務) 10여조를 올려 개혁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한 최치원(崔致遠), 헌덕왕(憲德王)때 이상적인 왕정(王政)론으로 각간 충공(忠恭)의 고민을 풀어주었다는 녹진(祿眞) 등은 역시 유교적인 왕도(王道)사상의 체득자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통일신라의 정치·사회사상은 이와 같이 발전하여 이를 계승한 고려 태조에 가서야 비로서 그 결실을 보게 되었다.

문무왕[편집]

文武王 ( ? ∼681)

신라 제30대왕. 재위 661∼681. 이름은 법민(法敏), 태종 무열왕의 맏아들. 무열왕 1년에 병부령(兵府令), 이듬해 태자로 책봉되어 무열왕 7년 김유신과 백제를 공멸, 661년 즉위, 백제 유민의 부흥운동을 평정하고, 668년 김인문(金仁問)으로 고구려를 공멸,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하였다. 그러나 동맹국으로 삼국통일을 도운 당나라의 침략정책이 노골화하고, 고구려 유민의 부흥운동 원조하는 당군을 격퇴시켰으며 677년에는 그들 세력을 한반도에서 완전히 몰아냈다. 그는 당제(唐制)·당악(唐樂)을 수입, 신력(新曆)을 사용하였고, 동인(銅印)을 만들어 백관(百官)이 사용토록 하였다. 그의 사상을 요약하면 (1) 동왕 11년 당장(唐將) 설인귀(薛仁貴)의 신라 비난 서신에 대하여 완곡한 표현으로 당의 배신과 침략음모를 규탄하고, 반도 내의 신라 주권을 명백히 하는 답서(答書)를 보내고, 당군을 공격·격퇴시켰다. (2) 고구려 유민에 대해서는 유화정책을 써서 대당(對唐)싸움을 돕게 하고, 당세력을 배경으로 준동하는 백제 유민에 대해서는 강경한 무력평정으로 일관하였다. (3) 불력(佛力)을 빌어 당의 침략을 격퇴하는 뜻에서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지었다. (4) 통일직후인 오랜 전란으로 도탄에 빠진 민생(民生)을 구출하기 위하여 전몰장병 유족구호, 복역죄수의 대사(大赦), 가난 때문에 도적질한 자의 방면과 변상면제, 소작농의 고리채(高利債) 면제 등의 정책을 실시하였고, 곡창을 풀어 기근을 만난 백성들을 구제하였으며, 부세(賦稅)·요역을 경감하였다. (5) 유조(遺詔)로서 왕공(王公)의 후장(厚葬)으로 인한 재정 낭비와 허례, 신하들의 수고를 걱정하여 스스로 소장(燒葬) 후에 동해의 대왕암(大王岩)에 수장되는 길을 택하였다. (6) 또한 <유조> 속에서 변성(邊城), 주현(州縣)의 불필요한 과세(課稅)를 폐할 것, 일단 정해진 율령(律令)이라도 불편하면 개정(改正)하라고 훈계하였다. 요컨대 문무왕은 삼국통일의 명군일 뿐만 아니라, 역사상 최초로 민본정치의 왕도(王道)를 시범으로 보여준 것이다.

김유신[편집]

金庾信 (595∼673)

신라의 명장·정치가. 본관은 김해(金海). 가야국 왕손 서현(舒玄)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만명(萬明)부인. 진평왕 3년 화랑이 되어 용화향도(龍華香徒)를 인솔, 수련하고, 진평왕 31년 낭비성(娘譬城)전투 출전에서부터 백제, 고구려군과의 무수한 접전에서 전공을 세워서 선덕여왕 13년에 상장군(上將軍), 진덕여왕 2년에 상주행군대총관(上州行軍大摠管)에 올라, 김춘추(金春秋)와 함께 정치의 실권자로 등장하여 통일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태대각간(太大角干)까지 올랐다. 그는 진평·선덕·진덕·무열·문무의 5대(五代)를 섬기면서 근왕사상·왕도사상·화랑정신으로 국민정신을 일깨우고, 스스로 모범을 보이면서 군왕(君王)에게 건의하여 통일성업을 완수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의 사상을 요약하면 대체로 다음과 같은 것을 들 수 있을 것이다. (1) 길흉(吉凶)은 무상한 것으로 사람이 그렇게 여길 따름이니 지덕(知德)으로 요망(妖妄)을 물리칠 수 있다. (2) 하늘의 위엄은 오직 사람의 정성에 달렸으니 신(神)도 선악을 분명히 하여 부끄러움이 없어야 한다. (3) 전쟁의 승부는 군대수에 달려 있지 않고, 민심(民心)에 좌우된다. (4) 백제정벌 후에 당장(唐將)의 식읍(食邑) 제공 회유책을 물리치고, 당군의 신라정벌 음모를 간파하자 생존권을 위해 싸우는 것은 당연하다고 왕을 설득시켰다. (5) 장군은 천도(天道)를 얻고, 지리(地理)를 얻고, 인심(人心)을 얻은 후에야 성공할 수 있다. (6) 충절(忠節)과 신의(信義)로 살고, 오만으로 멸망하며, 교만에 차면 위태롭다. (7) 정치를 처음에 잘하기는 쉬우나 끝까지 잘해서 망하지 않는 사람은 드물다. 일은 시작하기보다는 지키기가 어려운 것이다. (8) 소인(小人)을 멀리하고 군자(君子)를 가까이 하며, 위로 화합하고 아래로 백성을 안정시키는 것이 이상적인 정치이다.

신문왕[편집]

神文王 ( ? ∼692)

신라 제31대왕. 재위 681∼692. 이름은 정명(政明)·명지(明之), 자는 일초(日 )·일소(日炤). 문무왕을 계승하여 중앙집권적인 통일국가 체제를 정비하는데 진력하였다. 그의 업적을 요약하면 (1) 흠돌(欽突) 등의 역모를 토평·숙청하고 왕권(王權)을 강화하였다. (2) 국학(國學)을 설치했으며 전국의 행정조직을 9주5소경으로 개편하여 처음으로 중앙집권적인 군현제를 실시하였으며, 한때 서울을 달구벌(達句伐 - 大邱)로 옮기려고 했으나 실행하지 못하였다. (3) 당나라가 태종 무열왕(太宗 武烈王)의 '태종'이란 시호 개정을 요구하자 당당히 거절한 것 등을 들 수 있다.

김 양[편집]

金陽 (808∼857)

신라의 왕족·공신. 자는 위흔(魏昕). 흥덕왕 3년 고성(固城) 태수가 되었고, 무주도독(武州都督)에 이르렀으나 동왕 11년 균정(均貞)과 제륭(悌隆-僖康王) 간의 왕위 쟁탈전이 벌어지자 균정편에 가담, 실패하여 산속에 피신하였다. 그 이듬해 균정의 아들 우징(祐徵-神武王)을 도와 청해진(淸海鎭) 장보고와 결탁, 반정거사(反正擧事)를 도모하고 군사를 모집, 13개월간의 투쟁 끝에 무주(武州-光州), 철치현(鐵治縣), 대구(大丘), 금성(金城) 등지에서 관군을 격파하고 839년 4월에 우징을 즉위시키고 혁명정권을 세웠다. 그후 16년 간 신무왕·문성왕·헌안왕을 섬기다가 죽었다. 그의 행적에 있어서 단순한 도성내의 정변이 아닌 지방을 거점으로 한 장기간의 군사행동으로 중앙정권을 쓰러뜨렸다는 점, 성수(星宿)의 이변(異變)에 불과하나 '낡은 것을 제거하고, 새것을 시행하려는 징조'라는 민심을 이용했다는 점, 왕군(王軍)격파 후에 보복(報復) 금지로 민심안정을 꾀했다는 점 등이 주목할 만하다. 죽은 후 서발한(舒發翰)을 추증, 태종 무열왕의 능렬(陵列)에 배장(陪葬)되었다.

장보고[편집]

張保皐 ( ? ∼846)

신라의 무장. 별성명은 궁복(弓福)·궁파(弓巴). 청해진(淸海鎭)을 설치하여 해적을 소탕하고 일본과 당나라에 무역사절을 파견, 삼각무역을 주재하고, 여기서 세력을 굳혀 우징(祐徵)·김양(金陽) 등의 반정(反正)을 후원, 성공시키고 문성왕 때 딸을 차비(次妃)로 삼게 하려다 실패하여 반란을 시도하다 좌절되었다. 그의 행적에 있어서는 (1) 우리나라 사람이 해적들에게 약탈당하여 중국의 노비로 되어가는데 분개하고, 수군 강화를 건의한 점 (2) 우징 등의 반정(反正)을 돕고서 평민으로서 국정에 참여하려 한 점 (3) 일찍이 무역(貿易)의 상리(商利)에 눈을 떠서 해상권을 자각하고, 일본·신라·당 간의 3국무역을 통해 국리(國利)를 도모한 점 등이 주목할 만하다.

녹진[편집]

祿眞 신라 헌덕왕 때의 문신. 성(姓)과 자(字)는 모두 불명. 일길찬 수봉(秀奉)의 아들. 23세에 벼슬하여 내외관(內外官)을 여러 번 지내고 헌덕왕 10년에 집사시랑(執事侍郞)에 이르렀다. 동왕 14년에 각간 충공(忠恭)이 심화가 괴로워 병을 칭탁하고 쉬고 있을 때 그는 찾아가서 다음과 같은 내용의 말로 충공을 설득시켜 병을 고쳐 주었다고 한다. (1) 집을 짓는 원리나 정치의 원리나 다름이 없다. (2) 조정에 빈 자리가 없고, 벼슬아치가 저마다 인품을 갖추며, 상하가 고루 정하게 되고, 현·불초(賢不肖)의 분별이 선 후에야 왕정(王政)이 이룩된다. (3) 공사(公私)의 분별, 공평무사, 뇌물의 근원봉쇄, 인사정책의 공정성, 업무의 경중(輕重) 파악 등이 특히 중요하니, 이를 지키지 못하면 국사는 혼탁해진다. (4) 공직에 있는 자가 정사(政事)를 폐하고 누워 있음은 부당하다. 그는 결국 왕과 세자를 일깨워주고, 김헌창(金憲昌)의 반란 진압에 공을 세워 대아찬 벼슬이 내렸으나 받지 않았다고 한다. 즉 그는 유교적인 왕도정치 사상을 깊이 이해하고 문란한 현실정치를 비판하여 경계시켰던 것이다.

궁예[편집]

弓裔 ( ? ∼918)

후고구려 혹은 태봉(泰封)의 왕. 재 901∼918. 성은 김(金), 승호(僧號)는 선종(善宗). 신라 헌안왕 혹은 경문왕의 서자라고 한다. 나말(羅末)의 혼란기에 민중봉기로 세력을 얻고 반도 중부를 석권하여 새 왕조를 열었으나, 18년만에 쫓겨난 그의 행적에 있어서는 (1) 처음에는 몰락 왕손의 사원(私怨)에서 출발하였으나 하층민사회에서 성장하는 동안에 가장 급진적인 혁명사상을 익혔다는 점 (2) 승려 출신으로 도적·유랑민들을 규합, 혁명세력을 구축한 점 (3) 종전의 모반자들과는 달리 신라의 통치체제를 전면 거부하고 신왕조·신질서의 개창을 시도한 점 (4) 전략적으로 고구려 유민의 망국한(亡國恨)과 조국애(祖國愛)를 자극, 이용하려 한 점 (5) 정치 체제와 이념에 있어서 유교적인 것을 배척하고, 민중의 미륵신앙(彌勒信仰) 내지 불교를 취하고 신정(神政)을 꿈꾼 점 (6) 신라의 사대(事大)외교와는 달리 연호(年號)를 정하고, 자주노선을 표방하고, 북경(北境) 개척에 착수한 점 (7) 신라를 멸도(滅都)라 불러 철저한 보복을 다짐한 점, (8) 후백제와의 싸움에 있어 처음으로 해군력을 최대한 이용한 점 등에서 주목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