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동양사상/한국의 사상/통일신라시대의 사상/통일신라시대의 사상〔槪說〕
신라 통일의 중추세력이 화랑도(徒)였다면 화랑도의 사상을 이해하는 것이 통일신라시대의 사상을 이해하는 지름길이 될 것이다. 그러나 화랑도의 사상을 올바로 이해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김대문(金大問)의 <화랑세기(花郞世紀)> 같은 것이 전해지지 않는 오늘날에 있어서 화랑사상을 이해하는 길은 <삼국사기(三國史記)>나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실린 화랑 계통의 인물들에 관한 전기(傳記), 설화(說話)와 몇 조목의 화랑 창설에 관한 기록에 의지하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얼마 안되는 문헌자료(文獻資料)나마 그것을 풀이함에 있어서 사람들의 견해가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최치원(崔致遠)의 <난랑비서문(鸞郞碑序文)>은 화랑의 사상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하나의 주요한 자료인데 그 속에 있는 "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으니 풍류라 한다(國有玄妙之道 曰風流)"라고 한 풍류(風流)를 최남선(崔南善)은 '부루'란 우리 고유어(固有語)의 한음역(漢音譯)이라고 보고 화랑사상을 그가 주장하는 '태양숭배(太陽崇拜)'란 민족 고유신앙(固有信仰)에 결부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현상윤(玄相允)은 <삼국유사>의 화랑창설 기록에 나오는 "왕은 또 천성이 풍미로워 신선을 몹시 숭상한다 (王又天性風味多尙神仙)"라는 문구에 근거하여 최남선의 순어음적(純語音的) 해석에 찬동하지 않았다. 그러면 풍류교(風流敎), 풍월도(風月道)로 호칭(呼稱)되는 화랑도(徒)의 이 현묘지도(玄妙之道)란 과연 어떻게 이해되어야 할 것인가? 최치원의 서문(序文)에는 현묘지도는 선사(仙史)에 자세히 적혀 있다 하고 그것은 유(儒)·도(道)·불(佛) 3교(敎)를 포함하여 군생(群生)을 접화(接化)>하는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다시 말하면 화랑의 근본사상을 이룬 현묘한 도(道)는 유·도·불 3교의 사상을 다 포함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문제점이 있다. 첫째 3교를 포함했다는 말은 3교 밖에 어떠한 고유사상이 따로 있어서 그것이 3교를 그 속에 포섭했다는 것인가? 그런 고유사상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유·도·불 가운데 어느 하나가 주(主)가 되어 다른 2교를 겸포(兼包)함으로써 3교합일을 이루었다는 것인가? 둘째 풍월도(風月道) 속에 포함되었다는 그 3교는 어떻게 받아들여 어느 정도로 소화된 유·도·불인가? 다시 말하면 그 당시 화랑도들은 유·불·도 3교를 어떻게 이해하고 그들의 실제생활과 어떻게 관련시켰던가? 이 몇 가지 의문을 밝히는 데서 통일신라시대의 사상내용에 접근하는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첫째 3교를 포함한 고유사상이 있었다면 그 고유사상은 무엇이냐에 대해서는 샤머니즘(巫)으로 보는 견해가 가장 보편적이요 최남선과 같이 '밝', '불'의 태양숭배 종교로 보는 견해가 그 다음이요 샤머니즘이란 용어 대신 신도(神道)란 용어(用語)를 사용하여 원시다신교적(原始多神敎的) 신앙(信仰)과 토템사상까지 포함시키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견해들이 모두 단군신화(檀君神話)를 토대로 한다. 3교 중 어느 한 교가 주가 되어 기타 3교를 포섭하여 3교합일을 이루었다고 보는 견해도 가능한 것이다. 문제는 어느 것이 주가 되었겠느냐에 있다. 지금까지 나타난 문헌으로 보아서는 도교(혹은 仙敎)가 주가 되어 유·불의 2교를 포섭했다고 보는 견해(李能和의 <한국도교사(韓國道敎史)>)가 유력한 듯하다. 그런데 이 주가 되는 도교는 완전히 중국에서 도입한 것이냐?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고유한 민속신앙(民俗信仰)의 바탕 위에서 도입한 중국의 것과 혼합해서 이루어진 도교로 보아야 할 것이냐가 또한 연구해야 할 과제이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의 화랑들의 기록 ― 김유신(金庾信)의 산중기도(山中祈禱) 같은 ― 을 보든지 고구려 영류왕(榮留王)때 당(唐)에서 도사(道士)와 천존상(天尊像)을 보내와 도법(道法)을 강(講)했다는 기록을 보든지 그 당시 당에서의 도교의 형세로 미루어 보면, 신라통일 무렵의 도교란 것은 우리의 무속(巫俗)신앙과 중국의 오두미교적(五斗米敎的) 요소가 혼합하여 바탕을 이루고 그 위에 노장(老莊)의 '허무자연(虛無自然) 장생구시(長生久視)'의 사상, 연·제 방사(燕齊方士)들의 신선사상(神仙思想), 추연(鄒衍)의 음양5행설(陰陽五行說), 한대(漢代)의 참위사상(讖緯思想) 등을 유합해서 구성된 혼합체로서의 도교로 보아야 할 것 같다. 최치원의 <난랑비서문>에서 말한 '무위지사(無爲之事)'와 '불언지교(不言之敎)'라 함은 이 복합적 요소중의 신선(神仙)·선교적(仙敎的) 요소를 가리켜 말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며 풍월이다 풍류다 하는 것도 이 선교적 요소를 지칭하는 말이며 화랑이 반드시 젊은 소년·소녀로 풍월주(風月主)를 삼는 것은 동남(童男), 동녀(童女)를 이상화(理想化)하는 선교사상과 관련이 있는 것이며 산수(山水)를 오유(娛遊)하며 가악(歌樂)으로 서로 즐긴다는 것도 유선사상(遊仙思想)과 관련이 있지 않은가 한다(다만 이 선교적 요소는 과연 연·제 방사들에게 유래된 것인가? 우리의 고유한 것인가에 대해서는 여기서 논할 겨를이 없다). 둘째 만약 도교의 토대 위에서 유·불 2교를 포섭했다 하면 유·불 2교는 어떻게 받아들여 어떻게 소화하였는가? 이에 관해서도 문헌이 부족하여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의 기록이 보여 주는 바에 의하면 최치원의 말과 같이 유교는 '들어와서는 집에서 효도하고 나아가서는 임금께 충성한다(入則孝於家 出則忠於君)'는 정도로, 불교는 '악한 일은 하지 말고 선한 일은 받들어서 행하라(諸惡莫作 諸善奉行)'는 정도로 이해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다시 말하면 유교나 불교는 일반 화랑도들-그때의 엘리트라고 볼 수 있는 계층-에 있어서는 다만 실천적인 일상생활의 윤리로서 밖에 생각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특히 당시는 오랫동안 삼국의 분립·상쟁의 영향으로 무사도-즉 충(忠)·효(孝)·절(節)·의(義)-를 매우 강조하고 호국사상(護國思想)이 우세(優勢)하던 때이므로 유교나 불교도 이러한 상무(尙武) 정신과 호국정신에서 받아들여 그것을 실제 생활에서 더욱 실천하여 승화(昇華)시켰다고 볼 수 있다. 유교나 불교가 신라의 국민생활과 윤리도덕의 형성에 이바지한 바가 있었다면 그것은 이런 의미에서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국민적인 윤리도덕(倫理道德)의 정신이 즉 화랑정신(花郞精神)이며 그것이 신라통일의 정신적 역량이 되었던 것이다. 유교는 통일 이전의 신라에 있어서 이미 국가의 제도를 중앙집권적인 고대국가로 변전(變轉)시키는 주요이념으로 받아들여졌고 신문왕(神文王) 이후는 국학(國學)이 세워지고 <5경(五經)>, <논어(論語)>, <효경>, <문선(文選)> 등이 교재로 사용되기도 하였지만 유교의 저술로서는 전해진 것이 없다. 불교는 법흥왕(法興王) 이후 국가의 숭불정책(崇佛政策)으로 인하여 고승(高僧), 대덕(大德)이 배출되고 많은 유당(留唐) 학승(學僧)들이 돌아와서 심오한 철리를 말하고 불교저술도 나오고 여러 산문(山門)이 종파(宗派)도 창설하였지만 일반국민에 있어서는 역시 호국사상이나 유교와 혼합되는 세속윤리나 무속(巫俗)과 혼합되기 쉬운 소승불교적(小乘佛敎的) 요소가 주된 것이 아니었던가 한다. 원광(圓光)이 귀산·추항 두 청년에게 보살계(菩薩戒) 대신 유교화한 세속5계(世俗五戒)를 가르친 것이나 원효(元曉)·의상(義湘)이 대승불학(大乘佛學)의 대사(大師)이면서 <청구비결(靑丘秘訣)> 같은 도참서(圖讖書)를 저술했다는 것(李圭景의 <五洲衍文長箋散稿下>)을 보아도 저간(這間)의 소식을 알 수 있는 것이다. <李 相 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