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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근대 과학사상〔槪說〕
[편집]1876년의 개항을 전후부터 3·1운동 전까지의 한국의 근대과학기술사상을 개괄해 보는데 있어서 먼저 서양의 근대과학기술이 어떻게 전래되어 왔는가를 살피고, 이어 한국에서의 과학기술사상의 전개과정을 단계적으로 살펴본 후 다시 몇 가지의 사상적 특성을 지적해 보려고 한다. 서양의 근대과학 혁명의 성과는 그들의 소위 서세동점(西勢東漸) 과정에서 한국에 직접 혹은 간접으로 전달되었다. 서양 선교사들은 선교활동을 하는데 있어서 서양의 과학지식과 기술을 이용하는 것이 매우 효과가 크다는 것을 알고 그것을 적극 활용하였으며, 그래서 19세기 후기의 한국에서는 서양의 과학기술 서적을 기독교 서적으로 알았던 사람이 매우 많았다고 할 정도였다. 또한 근대기술로 만든 서양의 상품―그것을 당시에는 '양화(洋貨)'라고 불렀다―은 개항 전부터 우리나라에 침투하고 있었고, 또 그들이 통상을 요구하는데 있어서 당시 과학기술의 최첨단인 증기기관선과 대포(大砲) 등을 앞세워 위협함으로써 우리나라에 새로운 과학기술세계를 보여주고 그것을 배우겠다는 과학 기술사상을 부여하게 되었다. 그러나 서세동점은 중국과 일본에 먼저 이루어졌고, 따라서 한국의 서양 과학기술 도입은 계속 중국과 일본에 종속되는 경향을 띠고 있었다. 서양의 근대 과학기술의 수용과정은 편의상 4단계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제1단계는 개항 전 특히 대원군 시대를 중심으로 하여 대포와 증기기관선을 중심으로 한 무기기술을 주 수용대상으로 하되 '양이(洋夷)'를 물리치기 위해 이(夷)의 장기(長技)인 무기기술을 수용하려는 형태였다. 제2단계는 외압(外壓)과 내재적 요구로 개항이 이루어진 이후 1894년 갑오경장(甲午更張) 때까지의 시기이다. 이 시기에는 개화사상에 입각하여 무기만이 아니라 일반 산업기술도 도입하고자 하였으며, 그러한 기술도입의 동기 내지 명분은 부국강병(富國强兵)이었다. 말하자면 과학기술 사상과 부국강병 사상이 일체화(一 化)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전단계에 있어서와 같이 정부가 그 주체가 되고 있었으나 선각적(先覺的)인 개화파(開化派) 일부 혹은 특권적 기업도 주체로 등장하고 있었다. 특히 지석영에 의한 근대 의학의 도입과 그 연구는 획기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일부 보수적인 유생(儒生)들은 여전히 서양인을 양이(洋夷), 그 과학기술을 곡기(曲技) 혹은 사술(邪術)이라 하여 배격하였고, 여기에 샤머니즘적인 대중감각(大衆感覺)이 가미되기도 하였다. 제3단계는 1894년에서부터 1910년 한일합방(韓日合邦) 때까지의 시기로서, 이 때부터 정부에서는 과학기술 개발을 국가 기본정책의 하나로 내세우고 적극 노력하는 한편, 여태까지의 주로 외형적인 기계나 형식적인 기술을 받아들이려고 하는 입장에서 한 걸음 나아가 기초과학 내지 과학의 일반원리를 배우고자 노력하였다. 또 한 이 단계에서는 정부만이 아니라 시민층에서도 기업 형태를 통하여 기술도입의 주체로 등장하고 있었고, 교육에서도 과학교육이 중요 과목이 되었으며
과학입국론(科學立國論)이 제창되기도 했다. 그리고 과학서적이 저술 혹은 번역되고 또 과학잡지가 출간되기도 하였다. 제4단계는 한일합방 후의 시기로서 식민지적 과학기술 보급 단계인데, 이 때에는 근대과학은 일제에 의하여 독점되어 식민지적 수탈에 그것이 이용되면서 오히려 전단계에 있어서의 적극적인 과학사상이 외형상 후퇴하는 경향이 보이기도 했다. 다음으로 한국의 근대 과학기술사상의 몇 가지 특성을 살펴보기로 한다. 첫째로 한국에 근대과학사상을 전개시킨 사상적 매개는 서양의 과학적 개념이 아니라 전통적 사상 특히 실학사상(實學思想)에서 발전된 이용후생(利用厚生)론과 유학(儒學)의 격물(格物)·치지(致知)사상, 그리고 동양철학의 한 형태로 발전한 주기(主氣)철학 내지 유기(唯氣) 철학사상이었다. 가령 지석영이 1882년 개화상소(開化上疏)에서 "각국의 수차(水車)·농기(農器)·직조기(織組機)·화륜기(火輪機)·병기(兵器) 등은 이용후생(利用厚生)의 양법(良法)"이라고 지적하고 있는 것은 실학의 이용후생 개념에 입각한 근대 서양과학의 수용사상(受容思想)의 좋은 예의 하나이다. <한성순보>에서 전기·증기 등의 원리를 기철학(氣哲學)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은 주기론(主氣論)과 근대과학사상과의 연관성을 보여주는 한 예라 하겠다. 근대 철학사상가들이 과학을 '격물학(格物學)' 혹은 '격치학(格致學)'이라고 부르고, "과학의 설은 근대 태서(泰西)학자가 발명함이나 기실은 불과 동양 성현의 격물학(格物學)과 문예의 술(術)이라"(장지영)고 한 것은 격물치지론(格物致知論)과 근대과학사상의 연관을 말해주는 좋은예의 하나라 하겠다. 이러한 전통적 개념은 한국이 근대과학기술을 받아들이는데 따라 생기는 사상적 마찰을 최소한으로 줄여주는 교량적 역할을 하였으나, 한편 전통적 개념에 얽매여 근대적 과학정신에 접근하는 데 그 만큼 저해가 되기도 하였다. 둘째로 한국의 전통적 가치관 내지 논리관은 그대로 지니고, 서양문화 중에서 그 가치관은 배격하되 그 과학기술만 받아들이려고 하는 경향이 농후하였다. 소위 동도서기(東道西器)론이다. 가령 김윤식(金允植) 같은 이는 "그 교(敎)는 나쁘니 마땅히…멀리해야 한다. 그러나 그 기(器)는 이(利)하다. 진실로 가히 이용후생(利用厚生)이면 농잠(農蠶)·의약(醫藥)·갑병(甲兵)·주차(舟車)의 제(制)는 무엇을 꺼리겠는가. 그 교는 배척하되 그 기는 배워야 한다"고 하고, 또 윤선학(尹善學)은 "서양의 기술을 배우되 우리의 도(道)는 그대로 지킨다"(學器守道). "신(臣)이 변화시키기를 원하는 것은 기(器)이며, 도(道)가 아니다(臣之欲變者 長器也 非道也)"라고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동도서기론은 청말(淸末)의 중체서용(中體西用) 사상이나 막부 말엽 일본의 '동양지도덕 서양지예술(東洋之道德 西洋之藝術)'사상과 비슷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는 목적과 방법 내지 가치와 수단의 구별이란 것이 문제가 된다. 셋째로 과학기술 수용에 있어서 주체적 사상을 찾아볼 수 있다. 김옥균(金玉均)은 기술을 수용함에 있어서 서양의 그릇된 설에 속지 말고 기만당하지 말 것을 당부하고 있다. 유길준(兪吉濬)은 서양의 완제품 기계를 구입해 오고 기술자를 초빙해 오는 데만 급급한 현상을 허명개화(虛名開化)라 하여 배격하고, 먼저 근대기계를 스스로 만들 수 있도록 기초과학을 연마하고 기술응용 능력을 기르도록 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박영효(朴永孝)는 과학기술자를 만들기 전에 먼저 '본국사(本國史)와 본국문(本國文)'을 습득한 주체적 한국인이 되어야 하겠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주장에서 장지연·황현(黃玹)·손병희(孫秉熙)·이승만(李承晩) 등은 과학기술이 제국주의 침략의 도구가 되고 있음을 경계하고 있으며, 나아가 과학기술전쟁에서 이길 수 있어야 한다고 갈파하고 있다. 이런 주체적 과학기술사상은 오늘날 특히 주목할 만하다고 생각된다.
지석영
[편집]池錫永 (1855∼ 1935)
의사·문신·국문학자·자는 공윤(公胤), 호는 송촌(松村). 1876년 일본인 구가(久我克明)의 저서 <종두귀감(種痘龜鑑)>을 전해받고, 종두에 관심을 갖기 시작, 1879년 부산에 있던 일본 해군병원 제생의원(濟生醫院)에서 종두법을 2개월간 배우고, 자기의 처가가 있는 충주 덕산(德山)에서 최초로 종두를 실시, 1880년에는 수신사(修信使) 김홍집(金弘集)의 수행원으로 도일(渡日), 일본 위생국에서 두묘(痘苗) 제조법과 송아지 채장법(採裝法)을 배우고 귀국, 서울서 우두를 실시하는 한편, 일본 공사관 의관(醫官) 마에다(前田淸則)로부터 서양의학을 공부하고, 임오군란 후에 종두를 다시 보급, 전주(全州)·공주(公州) 등지에 우두국(牛痘局)을 설치, 각군 선발요원에게 종두법을 가르쳤다. 1885년 <우두신설(牛痘新說)>을 저술, 1899년 경성의학교(京城醫學校)를 설립, 그후 10여년간 대한의원 의육부(醫育部) 교장 또는 학감으로 의학교육에 종사하였다. 그는 그밖에 한글보급에 유의하여 1905년 한문억제와 국문보급을 주청(奏請)하였고, 신정국문(新訂國文) 6개조를 상소, 1908년에는 국문 연구소위원, 1909년에 <자전석요(字典釋要)>를 집필하는 등 국문연구에도 공적을 남겼다. 그의 사상을 요약하면 (1) 그의 <우두신설>에는 제너의 종두법, 각종 한역(漢譯)의 종두서적들의 종두론, 소아들의 접종법, 등이 자세히 논술되어 있다. (2) 그는 서양학의 보급으로 보수적인 세력과 민중으로부터 친일개화당으로 비난받고, 유배당하는 등 피해를 겪으면서도 종두법 보급에 헌신적 노력을 계속하였다. (3) 한말(韓末)의 시폐(時弊)를 논하다가 집정자의 미움을 받았다. (4) 1902년 <양매창론(楊梅瘡論)>을 <황성신문>에 발표, 그 병독의 전염성을 주지시키고 페스트 예방, 온역(溫疫) 전염병 예방을 위해 순회강연, 예방법규 제정 건의 등의 활동을 하였다. (5) 1910년 한일 합방을 통탄하여 일체의 공직에서 물러나 독서와 저술로 소일하였다. (6) 1882년의 상소에서 각국의 수차(水車)·농기(農器)·직조기·화륜기(火輪機)·병기(兵器) 등은 이용후생(利用厚生)의 양법(良法)이라고 하고 근대과학의
연구·보급을 건의하였다.
동도서기론
[편집]東道西器論
한말 개화기에 일부 지식인 사이에 나타난 사상. 내용은 '동양의 도(道:정신)는 고수하되 서양의 기(器:기술)는 채용하라'는 것으로, 당시 중국의 '중국의 것을 체(體)로 하고, 서양의 것을 용(用)으로 한다'는 중체서용(中 體西用) 사상이나 일본에서 있었던 화혼양재(和魂洋才) 사상과 연결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말이 처음 나타난 것은 1882년 윤선학(尹善學)의 상소(上疏)였고, 1885년 간행된 <농정신서(農政新書)>중 신기선(申基善)의 서(序)에도 같은 말이 있다고 하며, 김윤식(金允植)도 "서양의 교(敎)는 나쁘나 서양의 기(器)는 이롭다"고 하고, 기독교는 배척하되 서양과학은 배워야 한다는 유사한 말을 하였다.
을사조약과 을사오적
[편집]乙巳條約-乙巳五賊
을사보호조약 체결 소식이 전해지자 민중은 거리에서 일군경과 기왓장으로 맞서며 체결 무효 시위를 벌였다. 관원들은 반대상소를 끊임없이 올리고 자결로 이 조약체결의 불합리성을 알리려 하였다.
실상 을사조약은 일본에게 있어 통감정치 시작을 합리화하는 수단으로 조선 식민지화의 발판인 셈이었다.
1905년 11월 이토 히로부미는 고종을 만나 이 조약으로 두 나라의 발전과 동양의 평화를 꾀하자는 회유로 조인을 종용했지만 고종의 강력한 거절에 부딪치게 되었다.
이에 이토는 서울을 일군경으로 에워싸고 대신들을 위협하고 협박하며 조인을 요구해 왔다. 고종이 불참한 어전회의에서 한규설 등이 무조건 절대불가를 주장하며 강경한 태도를 보이자 이를 쫓아내고 옥새를 뺏어 찍어버렸다.
이 과정에서 이른바 을사오적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보인 행태는 그들이 왜 오적으로 물리게 되었는가를 명백하게 입증하고도 남는 것이었다.
이완용(李完用, 1858-1926)은 을사조약 체결의 주동자로 조약체결의 불가란 말은 한번도 비치지 않았다. 일본의 무력을 등에 업고 왕을 협박하여 학부대신의 이름으로 조약을 솔선 체결하였다. 그는 절대불가의 완경한 태도로 조인을 거부하는 대신들에게 "지난날의 모든 조약이 일방적으로 강요에 못이겨 체결되었다. 그래서 우리나라는 늘 그 조약의 글자 수정을 못하여 후회하였다. 그러하니 이번 새로운 조약은 서로 변동할 수 있도록 하면 전혀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절대불가로만 말해선 안 된다. 대한제국은 일본의 지도, 보호를 받아야 한다"며 조약체결을 종용했다.
그는 헤이그 밀사사건을 들어 고종에게 책임을 물어 양위를 강요하여 결국 순종에게 양위토록 하기도 하였다.
1910년엔 테라우치 통감과 한일합방조약을 체결하여 일본으로부터 백작·후작 작위를 받고 나라와 겨례를 팔았다.
3·1운동 당시엔 '학생 청년들은 부질없이 생명 재산을 잃지 말고 자중하여 실력양성을 기다리라'고 동포를 위협하고 공갈하는 경고문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예술도 이해하는 교양인이었고 서예와 영어에도 뛰어난 실력을 보였던 그는 매국매족함에 있어서도 철저하였던 것이다.
이지용(李址鎔, 1870- ?) 역시 완전히 능동적인 친일파로 외부대신으로 일본공사 하야시와 한일의정서를 조인하고 내부대신이 되어 을사조약을 찬성, 조인했다. 한일합방으로 일본정부로부터 백작 작위를 받고 중추원 고문이 되었다.
이근택(李根澤, 1865-1919)도 민족 반역자이며 군부대신으로 을사조약에 조인하고 합방과 함께 자작작위를 받고 중추원 고문이 되었다. 이하영(李夏榮, 1858-1919)은 미국주재 공사관, 서기관을 역임하고 주일 전권공사로 일본에 있다가 법무대신이 된 후 을사조약에 찬성하여 자작 작위를 받고 중추원 고문이 되었다.
권중현(權重顯, 1854-1916)은 주일공사, 참찬을 지내고 농공상부대신으로 을사조약에 찬성, 서명하여 자작 작위를 받고 조선사편수회의 고문을 지냈다. 또 박제산(朴齊純, 1854-1916)은 조약체결을 강력히 반대하는 한규설 대신으로 일본에 의해 외부대신에 봉해져 을사조약에 조인해 을사오적에 넣기도 한다.
이 조약은 이토와 하세가와의 주도와 일진회의 송병준·이용구의 적극적인 지원과 이완용·이지용의 야합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들은 을사조약으로 동양평화와 황실보호, 교육문화 증진과 실력양성, 인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물산장려를 떠들었지만 모두가 일본의 대한정책에 동조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