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동양사상/한국의 사상/한국의 근대사상/한국의 근대 교육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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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근대 교육사상〔槪說〕[편집]

최초로 근대학교가 출현한 것은 1880년대의 일이다. 말할 것도 없이 여기서 근대학교라고 하는 것은 서구식 교육을 가르치는 학교이다. 19세기 말의 조선사회는 개국(開國)이 되자 무엇보다도 시급했던 것은 의심할 것도 없이 어학(語學) 문제였다. 1883년 묄렌도르프(P.G. Von M

llendorf)와 할리팍스(T.E. Halifax)에 의한 영어학교의 개교라든지, 1886년부터 1894년까지의 육영공원(育英公院)의 개설은 이런 필요성의 단적인 반영이었다. 육영공원은 내용적으로 영어학교였는데 화족(華族)의 자제 35명을 수용했다. 교사로는 정부가 미국에서 초빙한 미국 초등학교 교사 길모어(G.W. Gilmore, 吉模), 벙커(D.A. Bunker, 房巨), 헐버트(Rev. H. Hulbert, 轄甫) 세 사람이 담당하였다. 이것이 우니라에서 세워진 최초의 근대학교들인데 1895년 정식으로 법에 의하여 근대학교가 세워지기까지에는 아직도 예비단계가 필요하였다. 이 동안에 세워진 것이 배재학당(培材學堂, 1885)을 비롯한 경신학교(儆新學校, 1885), 이화학당(梨花學堂, 1886), 정신학교(貞信學校) 등의 사립학교로서 성격상 주로 기독교 선교사에 의해서 세워진 학교였다. 한편, 관학(官學)으로는 1895년 4월에 관립 한성사범학교(漢城師範學校)가 설립되고 동년에 일본어·영어·청어(淸語) 외국어 학교가 생기고 성균관(成均館)의 개혁이 있었으며 소학교 등이 세워졌다. 당시의 교육사상을 대표하는 것은 도산(島山) 안창호의 사상이라고 하겠다.

안창호는 민족사상은 곧 그의 교육사상으로서 오늘날 어느 교육선철(敎育先哲)의 경우보다도 학생들의 가슴 속에 불꽃을 일으키고 있고, 대학의 경우만 하여도 도산연구회라 하여 그 수효가증가일로에 있다.

이 시기는 마침 우리나라의 개화기이자 그후는 일제 치하에 해당하는데 애국지사들은 각기 학교를 설립하여 교육구국(敎育救國)을 시도하였다. 안창호의 대성학교(大成學校), 남궁억의 모곡학교(牟谷學校), 이승훈의 오산학교(五山學校), 엄주익(嚴柱翊) 의 양정의숙(養正義塾), 이용익(李容翊)의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 등이 그것이었다. 우리나라 근대교육사상으로 특기할 일의 하나는 여성에게 학교교육의 기회를 부여하게 된 일이다. 그 결과 여성의 사회진출의 길도 열리게 되었다. 앞서 말한 여선교사단(女宣敎師團)의 손에 의해서 설립되었던 여자학교를 제외하고, 처음으로 우리나라 사람이 세운 학교는 1906년의 명신여학교(明新女學校), 진명여학교(進明女學校), 양규의숙(養閨義塾) 등이었고, 1908년 3월 동덕여자의숙(同德女子義塾)이 순전히 민간인 자본으로 설립되었다. 관립여학교로는 1908년 5월에 비로소 한성고등여학교(漢城高等女學校)가 세워졌다.

안창호[편집]

安昌浩 (1878∼1938)

독립운동가·교육가. 호는 도산(島山), 평남 강서(江西) 출신.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하고, 1897년 구세학당(救世學堂)을 졸업, 조교로 있으면서 기독교에 입교하고, 독립협회(獨立協會)에 가입했다. 그의 교육이념은 자아혁신(自我革新), 무실역행(務實力行), 점진공부(漸進工夫)라는 세 가지였다. 그가 바란 것은 자아혁신이요, 민족완성이었다. 도산은 우리 민족이 지니고 있는 두 가지 결점을 지적하였다. '거짓'과 '공론(空論)'이 그것이다. 도산이 발견한 첫째 결함은 우리 민족이 허위(虛僞)의 폐습에 젖었다는 것이었다. 도산이 발견한 둘째 결함은 '입'이었다. 공담공론(空談空論)이었다. 남의 비판이었다. 빈말로만 떠들고 실천·실행이 없는 것이었다. 저는 아무것도 하지 아니하면서 무엇을 하고 있는 남을 비판하기만 일삼는 것이었다. 이렇게 거짓과 공론은 우리 민족성의 가장 큰 결함이라고 간주한 그는 자기와 겨레의 마음에서 이 폐습을 제거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무실역행(務實力行), 이것이 그 대책이었다. 참에 힘쓰고, 행(行)에 힘쓰자는 것이다. 도산은 자기 자신 이것을 실천하였다. 도산은 인격자라고 하거니와 그의 인격의 본질을 이룬 것이 무엇이냐 하면 그것은 쉬지 않는 노력이요 수양이었다. 그는 도덕적 검속(檢束)에 있어서도 독창적이었고, 의복·식사·거처에 자율적 규구(規矩)가 있었다. 동시에 그는 도덕은 예의가 아니면 나타날 수 없고, 예의는 각 개인의 반복실행에 의하는 습관과 형성력이 아니면 자리 잡힐 수 없는 줄을 알았다. 도산의 일거 일동은 모두 이러한 고행수련(苦行修鍊)의 결과였다. 그런데 도산의 이 끊임없는 수련의 동기는 무엇이며 목표는 무엇이었던가? 그것은 '우리 민족을 위하여서'라는 것이었다. 도산은 민족의 운동은 '힘'으로 결정되는 것이라고 하였고, 그 '힘'이라는 것은 도산에 의하면 민족 각 개인의 덕력(德力)과 지력(智力)과 체력(體力)의 종합이었다. 정치력이나 병력 같은 것은 필경 이 개인의 힘의 조직이요 결과였다. 끝으로 점진공부(漸進工夫)인데 이것은 도산의 수학(修學) 태도였다. 그는 60 평생에 나날이 새로운 점진공부를 계속하였다. 그가 고향에 세운 학교이름의 점진학교가 그것이요. "점진 점진 점진 기쁜 마음과 점진 점진 점진 기쁜 노래로 학과를 전무하되 낙심 말고 하겠다 하세 우리 직무를 다…"하는 것이 그가 지은 점진학교의 노래였거니와 이것은 동시에 그 자신의 점진공부의 노래였던 것이다. 따라서 그가 생각한 교육적 인간상은 무실역행하는 '성실인(誠實人)'이었다. 도산은 거짓없는 성실한 사람이 될 것을 바랐다. 그는 자기 자신이 이것을 행하였다. 상해(上海)에서 일본 관헌에게 잡히게 된 것도 실은 소년과의 약속을 성실하게 지킨 데서였다. 즉 그 소년의 생일날 선물을 사주마고 약속하였기에, 신변의 위험을 알고서도 지키다가 피검(被檢)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도저히 범용(凡庸)한 사람이 해내기 어려운 것이다. 도산은 바로 이러한 '성실인'을 이상적인 인간상으로 삼았던 것이다.

또한, 도산의 민족주의는 세계주의를 지향(志向)한 것이었다. 도산은 우리 민족을 서로 사랑하는 민족, 거짓이 없는 민족, 화평한 민족을 만드는 것이 곧 세계 인류를 그렇게 만드는 길이라고 생각하였다. 이것은 이론뿐만이 아니어서 도산은 흥사단운동(興士團運動)으로 우리나라를 이상국으로 만들어서 인류에게 모범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 이유로는 우리 국토가 아름답고 형승(形勝)한 지위에 있는 것, 민족의 혈통과 문화가 단일한 것, 품질이 우수한 것 등을 들었다. 게다가 동서고금(東西古今)의 문화를 집대성하는 지리적·역사적 처지에 있으니 우리 민족이 이 사명에 자각하여 노력만 하면 반드시 이상국(理想國)이 될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남궁억[편집]

南宮億 (1863∼1939)

독립운동가·교육자·언론인. 자는 치만(致萬), 호는 한서(翰西), 서울 출신. 어려서 한문을 수학하고, 1883년 영어학교(英語學校)를 1년 다닌 후 묄렌도르프(P.G.Von M

llendorf)의 견습생으로 있다가 관계에 나갔으나 1895년후에 물러나 흥화학교(興化學校)의 교사로서 영문법과 국사를 가르치고, 독립협회에 가입, 1898년에는 투옥되었다가 석방되어 황성신문사(皇城新聞社) 사장이 되었다. 1900년에는 러·일간의 한국 분할설을, 1902년에는 러·일협정을 통박하였고, 1906년에는 양양(襄陽)군수로 있으면서 그곳에 현산학교(峴山學校)를 설립하였다. 이후 대한협회장(大韓協會長), 관동학회장(關東學會長), 배화학당(培花學堂) 교사를 지냈다. 이때 <가정교육(家庭敎育)>, <신편언문체법(新編諺文體法)> 등의 교과서를 지었고, 1918년에는 강원도 홍천(洪川)에 교회와 학교를 세우고 무궁화 묘포(苗圃)를 만들었다. 1933년에 무궁화와 조선 역사 사건으로 체포되어 복역하였다. 그의 저서에 <동사략(東史略)><조선(朝鮮)이야기> 등이 있고, 그 자신이 지은 가사(歌詞)로 <무궁화 동산>등 몇 편이 있다. 이와 같이 애국애족(愛國愛族)의 신념으로 일관한 그의 행적 속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교육사상을 발견할 수 있다.(1) 교사나 지도자는 스스로 솔선수범(率先垂範)해야 한다.(2) 산림녹화(山林綠化)운동을 일으켜 산림육성에 힘쓴다.(3) 여성의 교육이 중요하며, 통신교육(通信敎育)도 활용되어야 한다.(4) 나라꽃 무궁화(無窮花)를 선양하여 애국사상을 고취시킨다.(5) 교육의 목적은 내 것을 알고 내 나라를 찾아 민주의 자유(自由)강산을 이루는 데 있다.(6) 청년들은 새 진로(進路)를 개척해서 뒷사람이 따르도록 하라.

이승훈[편집]

李昇薰 (1864∼1930)

독립운동가·교육자. 본명은 인환(寅煥), 승훈은 자, 호는 남강(南岡),평북 정주(定州)출신. 어려서 한문을 배우고 16세에 오산면 용동으로 이사하여 승천재(陞薦齋)를 세우고 소년들을 교육하였다. 1901년에는 무역상을 경영하고, 1907년에 평양에서 안창호의 강연에 감동, 금주 단연하고 강명의숙(講明義塾)이라는 소학교를 세우고 재단을 만들어 오산학교(五山學校)를 설립하는 한편, 신민회(新民會)에 가입하였다. 1909년에는 평양에 자기(磁器)회사를 세우고, 1910년에 기독교에 입교, 교육의 목적과 방법을 개혁하였다. 그후 신민회 사건 때는 제주도 유배, '105인 사건' 때 투옥, 평양신학교에서의 신학공부를 거쳐 목사가 되었다. 1919년 3·1운동 민족대표로 3년간 복역, 일본을 시찰하고 와서 조선교육협회 간부가 되고 민립대학(民立大學)기성회를 결성하였다. 그후 오산학교 이사장에 취임하였다가 협심증으로 죽었다. 그의 사상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기업가는 노동자의 노동조건을 개선해야 한다. (2) 각 지역별로 자본가들이 결합하여 대자본(大資本)을 형성, 외국의 경제침략에 대항해야 한다. (3) 민족정신을 고취시키고 민족성을 개조해야 한다. (4) 교육에는 신앙이 밑받침되어야 한다. (5) 나의 목적은 하느님이 민족에게 복을 내리시려는 뜻을 받아 동포의 교육과 산업발달에 헌신하는 것이다. (6) 동양 3국이 평등하게 서로 돕고 일으켜 동방의 영광을 회복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