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동양사상/한국의 사상/한국의 근대사상/한국의 근대 문예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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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근대 문예사상〔槪說〕[편집]

'근대'의 어의(語義)는 여러 가지로 정의할 수 있겠지만 현재 우리나라에서 쓰이고 있는 근대 내지 근대화의 뜻은 유럽의 문예부흥 이후의 인간의 자유, 인권의 존중, 계급의 평등 등에 입각한 인간성의 해방에 기준을 둔 것으로 해석된다. 따라서 우리의 전통문화가 유교의 윤리관을 바탕으로 한 동양적 내지 한국적인 배경을 원류(源流)로 한 것이라면 근대문화란 다분히 서구적인 자유사상에 그 모태를 둔 것이라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또한 이것을 사회사상사적인 면에서 본다면 한국의 고전문화 내지 고전문학이 주로 왕권전제(王權專制)나 봉건체제의 정치 및 사회 배경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면, 근대문화 내지 근대문학은 주로 미숙하나마 이 땅의 근대 자본주의의 사회 배경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근대화라는 말 속에는 자연히 근대 자본주의화 또는 서양화의 의미가 내포되기도 하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근대화의 과정은 대중의 계몽 즉 문명개화(文明開化)를 매개로 이루어진 것이므로 역사적인 면에서 근대화를 개화(開化)라고도 부르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근대화의 주축이 인간성의 해방에 있으므로 국가나 민족 또는 개인에 있어서 주체성의 문제가 그 시발점으로 되는 것도 당연한 귀결이라 하겠다. 근대사상의 핵심이 자유에 입각한 주체성의 확립에 있으므로 우리의 근대문예사상도 자연히 이러한 기점(起点)에서 출발하여 그러한 방향으로 모색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또한 근대의 자유주의 사상은 정채체제나 사회구조가 그 배경적인 기반이 되는 것이므로 우리의 근대문학에 있어서도 자연히 그 내용에 있어서 자주독립·자유평등·계급타파·남녀평등·민주화 등이 주제로 다루어졌고, 그 표현면에 있어서 국어의 주체적인 표현을 이룩하기 위한 문법의 체계화, 시문체(詩文體)에 의한 어문일치(語文一致) 운동, 한글의 보급 등이 당면 과제로 대두되었던 것이다. 유길준(兪吉濬)은 그의 저서인 <서유견문(西遊見聞)>에서 주위의 반대를 물리치면서까지 굳이 국한문(國漢文) 혼용체를 사용하고, 주시경에 의하여 국어문법이 새로운 문법론의 적용에 의하여 체계화된 <국어문법(國語文法)>이 저술되고, 최남선·이광수 등에 의하여 어문일치(語文一致) 운동이 제창되고 아울러 최남선에 의하여 전통적인 고유시가인 시조(時調)의 현대적인 부흥이 주창된 것도 모두 이러한 주체성의 확립에 기인된 것이다. 또한 1896년에 창간된 <독립신문>도 이러한 민족적 주체성 및 자주의식의 발로로 이루어진 것이라 하겠다. 한편 이 개화기의 대표적인 문학 양식으로는 창가(唱歌)와 신체시(新體詩) 그리고 신소설을 들 수 있다. '창가'는 그 명칭은 일본 문학의 영향을 받았고, 형식은 우리 고전 시가의 전통률인 4·4조를 기조로 하여 거기에 찬송가의 번역체(飜譯體) 및 일본 시가의 7·5조의 영향이 가미되었으며 내용면에 있어서는 개화기의 주류사조인 자주독립·계급타파·남녀평등·신교육 등의 개화·계몽에 따르는 민권사상이 반영되었다. <독립신문>에 게재된 23편의 창가를 비롯하여 최남선이 지은 <경부철도가(京釜鐵道歌)> <세계일주가(世界一周歌)> 등은 모두 이같은 새로운 시대 즉 근대화 과정의 개화·계몽을 촉진 찬양하는 내용을 담았던 것이다. 신체시는 창가의 정형시적인 형식에서 벗어나 근대 자유시로의 접근을 모색한 시 형태로 명칭은 역시 일본 시가에서 영향받았지만 그 형식은 일본 신체시가 7·5조의 정형시임에 비하여 우리의 신체시는 그러한 율조(律調)에 제한없이 자유시의 형식을 취했다. 초기의 대표적인 신체시로는 1908년 <소년> 창간호에 실린 최남선의 <해(海)에게서 소년에게>를 들 수 있다. 이 작품은 소년을 새 시대의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고루하고 독존적인 기성세대를 비판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지만 대부분의 신체시는 그 내용에 자주민권(自主民權), 인간해방의 근대의식을 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창가와 신체시는 예술적인 작품 창조라는 면보다는 새 시대의 각성을 촉구하는 계몽의식의 비중이 더 농후하게 나타나 있다고 보는 편이 옳을지도 모른다. 신소설은 재래의 전통적인 소설인 '이야기 책' 즉 고대소설 또는 구소설로 불리는 고전소설에 대해 새로운 소설이라는 대칭으로 사용된 개화기 소설의 명칭으로 1906년 <만세보(萬歲報)>에 연재된 이인직의 <혈(血)의 누(淚)>를 그 효시로 삼고 있다. 신소설의 주요한 작가로는 이인직 외에 이해조·최찬식(崔瓚植)·김교제(金敎濟)·안국선(安國善) 등을 들 수 있다. 신(新)소설은 고대소설의 한문투(漢文套)의 문장에서 벗어나 언문일치의 평이한 문장으로 표현하였다는 것이 문장면에서의 가장 뚜렷한 특징이요, 이것은 또한 시대 조류의 한 반영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고대소설은 지문(地文)과 대화(對話)의 구분이 없이 줄글로 계속하여 서술한데 비해서 신소설은 지문과 대화를 별행으로 구분하고 다시 대화는 인용부로 묶는 등 다분히 서구소설의 표현법을 원용하였음을 볼 수 있다. 한편 내용면에서 신소설은 대부분 개화기의 현실문제를 다루어 자주독립·민주정치·신교육·외국유학·계급타파·남녀평등·과부재가 허용·조혼폐지·자유결혼·부패한 관료 규탄 등 근대의식에 연관되는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사상을 계몽하는 내용의 주제를 다각도로 다루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신소설이 근대적인 현실문제를 진취적인 각도에서 다룸으로써 한국 소설에 있어서 비로소 근대적인 소설작가가 나왔고, 독자층도 고대소설의 부녀자에서 개화기의 지식층으로 변환하는 국면을 가져올 수 있었던 것이다.

신소설로써 비로소 서구 문예사조의 영향을 받은 근대적인 소설이 이 땅에 싹틀 수 있었다는 사실은 근대 문예사조의 도입과 연결시켜 문학사적인 것으로 획기적 사실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주시경[편집]

周時經 (1876∼1914)

한글학자·국어운동가. 초명은 상호(相鎬), 호는 한힌샘, 황해도 봉산(鳳山) 출신. 서울에 올라와 한문을 배우다가 우리글 연구의 필요성을 스스로 체득, 1894년 다시 배재학당, 1895년 인천 관립 이운(利運)학교, 1896년 다시 배재학당 등에서 수학하면서 진보적 학생단체 협성회(協成會)를 조직 활약하였고, 독립신문사에 들어가 총무 겸 교보원(校補員)으로 일했다. 연구단체인 국문동식회(國文同式會)를 결성, 한글 기사체(記事體)의 통일연구에 힘썼고, 1898년 배재학당 만국지지과(萬國地誌科)를 졸업하였다. 이 무렵 국어문법의 체계를 대강 세웠고, 상동청년학원(尙洞靑年學院) 국어강습소에서 국어문법 강사로 활약하면서, 측량술·영어·일본어·중국어·기계학·식물학·종교 등도 공부하였다. 1907년 학부(學部) 내의 국문연구소 위원으로 활약, 1908년 <국어문전음학(國語文典音學)> 1910년 <국어문법>을 계속 발간, 1911년 <조선어문법>을 저술했는데 105인 사건에 관련, 망명을 준비하다가 급병으로 죽었다. 그의 국어 사상을 보면 (1) 우리말을 우리글로 적는 것이 긴요하다. (2) 는 <이>와 <으>의 합음(合音)이다. (3) 국어의 음리(音理)와 어체(語體)를 정당하게 표기해야 한다. (4) 국어문법은 국어로 써야 하고, 한자로 쓰거나 외국술어를 차용하면 많은 폐단이 있다. (5) 문법은 세계에 두루 쓰이는 문법으로 으뜸을 삼되 우리말에 맞게 해야 한다. (6) 기독교는 정신적 침략의 일종이니 민족종교로 개종한다 등을 들 수 있다.

이광수[편집]

李光洙 (1892∼1950)

소설가·계몽사상가. 호는 춘원(春園)·경서학인(京西學人)·장백산인(長白山人), 평안북도 정주(定州) 출신. 11세에 고아가 되고 13세에 동학에 입교했다.

1905년 도쿄 메이지(明治)학원 중학부 3학년에 편입, 1907년 안창호(安昌浩)를 만나 감동받고, 톨스토이 문학에 심취했다. 1910년 오산(五山)학교 교원, 1911년 만주·상해·블라디보스토크 등지로 망명해 유랑생활을 하고, 1915년 와세다(早稻田)대학 철학과에 입학, 1917년 단편소설 <소년의 비애> <어린 벗에게> 등을 <청춘(靑春)>지에 발표했다. 장편 <무정(無情)>을 <매일신보>에 연재, 신문학의 개척자가 되었다. 1919년 <2·8독립선언문>을 기초, 상해로 건너가 안창호와 함께 임서정부 수립에 참여, <독립신문> 사장, 사료편찬회(史料編纂會) 주임 등으로 활약 중 애인 허영숙(許英淑)의 권유로 1921년 귀국, 1922년 <개벽(開闢)>지에 <민족개조론>을 발표, 동아일보사 편집국장으로 있으면서 <선도자> <허생전> <재생(再生)> 등을 발표, 1924년 최초의 순문예지 <조선문단(朝鮮文壇)>을 주재, 역사소설을 다수 발표하였다. 그밖에 현대소설로 <흙> <유정(有情)> <사랑> <무명(無明)> 등을 썼다. 조선문인협회 회장 등을 역임했고, 창씨개명을 선도, 대동아문학자협회(大東亞文學者協會)에 참석, 학병(學兵) 권유 순회연설 등을 행하였다. 1945년 해방과 동시에 친일파로 규탄받았고, 1949년 반민법(反民法)에 의해 구속되었으나, 병보석 중 1950년 6·25사변으로 납북되었다. 그의 사상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자신의 창작목적은 '조선심(朝鮮心)'의 고취, 계몽사상의 전달에 있다. (2) 그의 작품 속에는 종교적인 이상주의(理想主義), 개화 중심의 계몽주의, 톨스토이적인 인도주의(人道主義) 등이 나타나 있다. (3) 그의 독립운동관은 청년기의 전투적 독립투쟁 노선에서 합법적 투쟁으로, 다음에는 문화운동에 의한 민족성 개조론으로, 다시 현실 속에서의 간접적인 계몽문학·역사문학·저항문학으로 바뀌다가 결국은 일본 제국주의의 소위 내선일체(內鮮一體) 운동에 합류하기에 이르렀다. (4) 그러나 그의 작품은 자유연애론의 강조, 불교·기독교·인도주의 등에 입각한 순결성·영원성의 옹호, 역사소설을 통한 민족사 계몽 등에 있어서 폭넓고 깊은 사상성을 지니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