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동양사상/한국의 사상/한국의 근대사상/한국의 근대 사학사상

위키문헌 ― 우리 모두의 도서관.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한국의 근대 사학사상〔槪說〕[편집]

개항기의 한국 역사는 두 가지 면에서 기본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그 하나는 한국사의 내적인 발전 과정에서 이미 해체되고 있던 봉건적인 사회체제를 타파하고 새로운 근대사회를 형성하는 일이었다. 다른 하나는 서구 자본주의 열강의 제국주의적·식민주의적 진출에 대응하여, 또는 일제의 한국침략에 대하여 어떻게 대응하여 민족의 독립을 견지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그러기에 이 시기의 역사학에서는 이와 같은 역사적 현실을 통찰하고 거기에 대처할 수 있는 역사의식이 필요하였다. 더욱이 1890년대에서 1910년대에 이르는 기간에 일제 관학자들에 의해 한국사가 근대적인 역사학으로 연구되고 서술되는 것은 일제의 대륙침략과 표리가 되어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한 것이다. 일본에서는 한국사에 대한 연구가 이와 같이 침략성을 띠고 진행되고 있을 때 한국에 있어서의 역사학은 역사의식에 있어서나 역사 연구의 방법적인 면에서 새로운 차원을 모색해 나가지 않을 수 없었다. 즉 한국의 근대 역사학도 전통적인 역사관을 탈피하여 역사의 발전성이나 객관적인 파악을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요청은 광무(光武) 개혁기를 통해서 비로소 새로운 방법론을 참작하는 경향을 나타내게 되었으니, 이 시기의 역사학은 실학(實學)에 의거하고, 또 실학을 계승·발전시켜야 할 전통사상·전통문화로 중시(重視)한 것이다. 이리하여 광무 5년(1901) 김택영(金澤榮)·현채(玄采)·장지연(張志淵) 등이 실학서적을 간행하거나 증보하였다. 1905년에 드어와 김택영은 <역사집략(歷史輯略)>을 편찬했으며, 장지연도 한국의 풍속사(風俗史)에 관한 소품들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와 같이 개혁기의 역사가들은 실학사상적인 기반 위에서 그들의 연구를 진행시켰고, 그 성과는 통사(通史)와 특수 연구의 두 경향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통사로서는 황현(黃玹)의 <매천야록(梅泉野錄)>, 정교(鄭喬)의 <대한계년사(大韓季年史)>, 김택영의 전기한 <역사집략> 등이 대표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 저자의 역사의식은 투철하여서 이들은 이 시기의 개혁사업에 동조하고 있었으며, 제국주의의 침략에 대해서는 강력하게 저항하는 민족의식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들의 역사 서술은 아직도 전통적인 편년체(編年體)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었고, 역사의식 또한 근대적인 것에 이르지는 못했다. 이 점은 이 시기의 역사학이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될 한계이고 과제였다. 이러한 과제는 번역사학(飜譯史學)을 통해서 점차로 해결의 단서를 찾았다. 사학사적(史學史的)인 입장에서 번역이 문제시될 수 있는 것은 현채의 일련의 역술(譯術)활동에서 찾아 볼 수가 있다. 그는 <만국사기(萬國史記)>를 역간(譯刊)하였고, <동국사략(東國史略)>을 내었다. 이러한 역술 활동은 제국주의와 관련해서 그들의 침략의 방법을 알아야 한다는 당시의 식자층(識者層)의 공통된 견해에 입각한 것이었으며 뿐만 아니라 역사 서술에 대한 방법론에까지도 그 관심이 발전하고 있다. 현채가 자신의 그 동안의 편년체적인 역사 편찬이 체제불립(體制不立)했음을 개탄한 것은 그가 방법론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했다는 증거였다. 개혁기의 역사학을 계승하여 그 때에 해결하지 못한 과제를 해결한 것은 이른바 민족사학자(民族史學者)라고 불리는 일련의 학자들이었다. 민족사학은 박은식(朴殷植)·신채호 등에 의해서 계발되었다. 박은식은 광무 개혁기의 역사학을 계승하여 근대 역사학의 방법론을 도입함으로써 우리의 역사학을 근대 역사학으로 발전시켰으니, 이는 1910년대의 일로서 <한국통사(韓國痛史)>와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는 그의 대표적인 저서이다. 그는 이러한 책에서 역사적 사실의 발달과정을 인과관계의 면에서 분석·비판·종합했고, 이러한 근대 역사학의 방법론을 통해서 일제의 침략 과정을 낱낱이 폭로했다. 그는 국가가 유지되는 데 있어서는 혼 곧 정신이 중요한 관건이라고 보고 민족이나 국가의 혼이 담기는 곳을 그 나라의 역사라고 했다. 그는 또 혼이 강한 나라는 비록 일시적으로는 열강에 병합된다 하더라도 마침내는 독립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는 우리 민족이 혼이 강한 민족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우리나라도 장차 반드시 광복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박은식의 역사사상 및 역사학은 이와 같이 민족의식·민족정신으로 일관하고 있었거니와, 민족의 발전적인 역사를 위해서는 세계에 문호를 개방하고 주체적인 입장에서 세계의 문화를 섭취해야 한다는 진취적인 개혁사상에 접목(接木)되고 있었다는 점을 또한 간과할 수가 없는 것이다. 동시에 그의 역사사상에는 유교적인 색채가 농후한 바도 있었다. 따라서 그의 개혁사상(改革思想)은 그런 점에서 우리의 근대(近代) 역사학의 역사의식과는 아직도 단층을 가진 것일 수밖에 없는 한계성을 스스로 내포하고 있었다. 박은식의 역사학을 계승하여 그의 역사의식의 한계를 극복하고 이론적으로 우리의 근대 역사학을 완성시킨 이는 신채호였다. 그의 역사의식은 박은식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제국주의에 대한 투쟁에 있어서 철저하였고, 민족의식이 강렬한 것이었다. 그의 역사연구는 그 자체가 바로 독립투쟁이었다. 신채호가 역사학에 관심을 기울여서 우리의 근대 역사학을 완성시킨 것은 1920년대의 사실로서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 <조선사연구초(朝鮮史硏究草)> 및 그 밖의 단편적인 연구 활동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그는 역사의 본질을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라고 인식하였다. 여기에서의 <아>나 <비아>는 시간적으로 상속성(相續性)이 있어야 하고 사회적으로 그 영향이 보급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또한 투쟁은 <아>에 대한 정신적 주체의식이 확립되지 않았거나 <비아>의 환경에 대해 순응하지 못하면 패하고 만다는 그런 투쟁이었다. 특히 사회내부에 있어 <아>와 <비아>의 모순관계는 사회발전의 계기로 간주되는 것이다. 그의 역사에 대한 본질적 파악은 그가 역사를 발전적으로 이해하고 역사적 사실의 인과관계를 사회현상 속에서 파악하려 한 데 있다 하겠으며, 외적으로는 주체성의 여러 가지 자아를 찾고 내적으로는 각시대의 다양한 역사적 현실을 상호 모순의 관계에서 파악함으로써 그러한 투쟁, 그러한 모순이 종합·지양되는 가운데서 새로운 문화가 창조되는 것이라고 이해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신채호의 이러한 역사인식의 태도는 유럽 근대 역사학에서의 그것과 기본적으로 같은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리하여 이와 같은 역사인식의 입장에서 우리의 역사를 재편성하려 했다. 그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그는 종래의 사서(史書)에 대해 비판하고, 이들 사서에서 결핍된 시(時)·지(地)·인(人) 등 역사 구성의 3대요소의 중요성을 환기시켰다. 그는 또 이들 사서가 사료(史料)의 열람을 소홀히 한 것, 공자의 <춘추(春秋)>나 주자(朱子)의 <강목(綱目)>의 역사 서술 방식에 의거했기 때문에 역사 사실의 평가를 잘 못했다는 점, 역사의 주체를 왕조(王朝) 중심으로 한 데서 민족의 동향을 몰각하였다는 점을 들어 비판하였다. 구래(舊來)의 한국 역사학의 성과가 이러한 상태였으므로, 그는 이러한 자료를 이용하여 사료를 비판하고 고증 및 역사서술의 방법과 인식을 개선함으로써 한국 역사를 새로이 체계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신채호의 역사의식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한민족의 역사와 전통에 대한 강력한 긍지요, 인간의 자유와 사회의 진보를 믿고 또 이를 이룩하려는 일종의 시민적인 근대의식이라고 하겠다. 그는 또 역사의 주체로서 민족을 강조했고, 민족 속의 민중을 역사의 전면에 클로즈업 시켰는 바 이 점 또한 그의 근대의식이 생생한 편린이라 할 수 있다. 일제에 대한 그의 입장은 무력에 의한 침략자의 타도와 민족의 독립이라는 점에 집약되고 있다. 그는 그것을 폭력에 의한 혁명으로 표현하였다. 그는 또한 일제를 구축하기 위해 종래까지 취해저 온 두 가지 방법 즉 외교방략에 의한 독립운동과 준비론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서의 독립이란 단순히 일제의 구축만을 의미한다는 것은 아니었다. 그에게 있어서의 독립은 동시에 당시까지 우리 사회에 내포되어 있는 계급적 모순이나 낡은 사회체제를 개혁하는 사회적 의미까지도 포함되어 있었다. 우리의 근대적인 역사학은 실로 이와 같이 대내적인 사회 모순과 일제에의 투쟁이라는 모순 상극의 관계에서 싹튼 것으로, 이러한 모순상극을 통해서 시민적 자각과 확고한 민족주의 사상이 형성되어 갔다.

김택영[편집]

金澤榮 (1850∼1927)

한말의 문신·학자·시인. 자는 우림(于霖), 호는 창강(滄江)·소호당주인(韶護堂主人) 일찍부터 시를 잘 지어 당대의 시인 이건창(李健昌)·황현(黃玹) 등과 교유, 고종 28년에 진사(進士)가 된 이래 편사국 주사, 중추원 서기관 겸 내각기록국 사적과장을 지냈다. 광무 7년에 문헌비고 속찬위원으로 있었고 1905년 학부 편찬위원이 되었으나 곧 사직,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국가의 장래를 통탄하다가 중국에 망명했다. 그의 <역사집략>은 그가 학부에서 <동국역대사략(東國歷代史略)> 편찬에 종사했던 경험을 살려서 그 자신의 명의로 저술하였던 <동사집략(東史輯略)>을 더 증보한 통사(通史)였다. 그는 특히 고시(古詩)에도 뛰어나 문장과 학문으로 당대에 이름을 떨쳤다.

현채[편집]

玄采 (1856∼1925)

한말의 역사학자. 호는 백당(白堂). 구한말 학부 편집국에 근무하면서 지리·역사 등에 관한 많은 편찬사업에 종사, 전통적인 편년체 방법에 의한 역사 서술 방법을 지양하려 하던 차에 일본인 하야시(林泰輔)의 <조선통사>를 보고, 이를 한국인의 입장에서 초역(抄譯)·증보하여 <동국사략>을 출판했다. 이러한 역술활동을 통해서 현채는 그 목표를 세계 정세의 이해를 위한 국민계몽이라는 입장과 역사학의 방법론적인 반성에 두었다.

역사집략[편집]

歷史輯略

김택영이 우리나라의 전 역사를 서술한 책. 광무 개혁기 역사서의 표본이라 할 수 있는 책으로, 저자의 <동사집략(東史輯略)>을 다시 더 증보했다. 광무 9년 학부편집국에서 출판했으며 내용은 한문으로 기술되어 있는데, 대체로 <동국통감(東國通鑑)>에 따랐으나 기술이 요령있고 편자의 신설(新說)이 여러 군데에 나타나 있다.

황현[편집]

黃玹 (1855∼1910)

한말의 학자·항일 우국지사. 자는 운경(雲卿), 호는 매천(梅泉). 시문을 잘 지었으며, 고종 22년에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했으나 시국을 개탄하고 향리에 은퇴했다. 한일합방 때 국치(國恥)를 통분하며 절명시(絶命詩) 4편을 남기고 음독 자결했다. 그는 고종 이후의 근대사인 <매천야록(梅泉野錄)>을 지어 광무 개혁기의 역사학 분야에도 기여했다. 저서로 <동비기략(東匪紀略)>이 있다.

정교[편집]

鄭喬 (1856∼1925)

한말의 학자·항일 우국지사. 호는 추인(秋人), 고종 33년에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활약하다가 광무 2년 정부에서 삼림·철도·광산 등 이권을 외국인에게 이양하자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를 개최하여 그 시정책을 요구했으며, 정부의 회유책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폐정 개혁을 직언했다. 그는 국학 관계의 많은 저술을 남겼고, 특히 편년체 서술인 <대한계년사(大韓季年史)>을 통해 고종 1년부터 한일합방 때까지의 최근사를 서술하여 한말의 사실(史實)을 아는 데 귀중한 사료(史料)가 되고 있다.

박은식[편집]

朴殷植 (1859∼1926)

항일 운동가·언론인·사학자. 자는 성칠(聖七),호는 백암(白巖)·겸곡(謙谷). 그는 광무 개혁기에는 장지연(張志淵)·남궁억(南宮檍)·신채호(申采浩) 등과 <황성신문>을 창간하여 언론계에 투신했으며, 또한 교육자로서 국민계몽의 선두에 섰다. 한일합방이 되자 광문회(光文會)에 참가하여 저술에 종사하던 중 만주의 서간도(西間島)로 옮겨 고구려·발해의 유적을 조사하고 사적(史籍)을 연구하여 남북 만주와 용동평야가 모두 고대 우리 민족의 활동 무대였음을 밝힘으로써 그 곳을 우리 민족의 새로운 독립운동의 기지로 삼으려고 했다. 또한 상해에서 신규식(申圭植)·홍명희(洪命熹) 등과 더불어 동제사(同濟社)를 조직했고, 3·1운동 직전까지 상해를 중심으로 중국·만주 등지의 교포들 사이에서 활동했다. 상해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된 뒤에는 <독립신문> 사장에 임명되었고, 그 뒤에도 여러 신문을 통해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한편 <한국통사> <한국독립운동지혈사> 등을 저술하여 민족정신을 고취했으며, 광무 개혁기의 역사의식을 일층 발전시켜 근대 역사학 수립에 공헌했다. 1925년에는 임시정부 제3대 대통령에 피선되었다가 병사했다.

한국통사[편집]

韓國痛史

박은식이 지은 우리나라 최근세 정치사. 이 책은 박은식이 광무 개혁기에 역사학을 계승하여 근대 역사학의 방법론을 직접 우리 역사에 도입함으로써 우리의 역사학을 근대 역사학으로 성장시킨 역사책으로 1914년에 완성되고 1915년에 간행되었다. 이 책은 대원군 집권 이후부터 1911년까지의 우리나라 근대사를 일제침략이라는 면에 초점을 맞추고 서술한 것이었다. 전 3편으로 구성된 본서는 제1편은 우리나라의 지리적 환경과 역사의 대개, 제2편은 대원군의 개혁정치에서부터 아관파천 이후 친일정권이 무너질 때까지, 제3편은 대한제국의 성립과 그 후의 일제의 침략과정을 취급하였다. 본서를 서술한 방법은 그가 범례에서 밝히고 있는 바와 같이, 근세신사(新史)의 체제를 따라 역사적 사실을 중심으로 장(章)을 이루고, 이 사실을 기술함에 있어서는 그 내용을 서술하기도 하고, 이에 대한 견해, 즉 비평이나 논평을 가하기도 하였으며, 또 이 사실이 유래하게 된 선행사건을 거론하기도 하고, 그 결과로서 일어나게 되는 사실을 부론(附論)하기도 하였다.

한국독립운동지혈사[편집]

韓國獨立運動之血史

박은식이 지은 항일투쟁사. <한국통사> 이후 준비되고 서술된 책으로 1920년에 간행되었다. <한국통사>와 표리 관계에 있는 사서(史書)로 <한국통사>에서 볼 수 있는 일제의 한국 침략에 대항하여 우리 민족이 국권회복을 위하여 투쟁한 역사를 서술한 것이다. 본서는 전 3편으로 구성되었는데 상편에서는 개항 이후의 일제의 침략과정과 조선총독부의 침략정책을 폭로하였고, 하편에서는 국권을 상실한 후의 우리 민족의 독립을 위한 투쟁을 3·1운동 이후까지 전개하였으며, 부편(附篇)에서는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에 대한 세계여론을 수록하였다. 그 서술방법은 통사와 마찬가지로 근대 신사(新史)의 체제를 따르고 있다.

신채호[편집]

申采浩 (1880∼1936)

항일 독립투사·사학자·언론인. 호는 단재(丹齋)·일편단생(一片丹生). 광무 3년 성균관에 들어가 1905년 성균관 박사가 되었으나 그해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황성신문>에 들어가 논설을 쓰기 시작, 독립투쟁의 방향을 제시하여 민족혼을 일깨우기에 앞장섰다. 다음해 <대한매일신보>의 주필이 되어 활약하는 한편 계속 배일사상과 독립정신 앙양에 앞장섰다. 1907년에는 신민회와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하였으며, 이듬해 <가정잡지>를 편집·발행하고 대한협회, 기호흥학회(畿湖興學會)에 가입했다. 1909년에는 일진회 성토에 앞장서고 1910년 청도(靑島)로 망명했다. 앞서 1906년에는 <이태리 건국 3걸전(伊太利建國三傑傳)>을, 1908년에는 <성웅 이순신> <을지문덕> <독사신로(讀史新論)>을 발표했으며, 또한 <소년>에 <국사사론(國史私論)>을 발표했다. 1910년부터 1936년까지의 망명생활 중에 우리 민족의 고대 활동무대를 답사하면서 우리 민족의 고대사 연구에 주력하였다. <조선상고사> <조선상고 문화사> <조선사연구초> 등이 이 때에 기초되었다. 이 기간에 그는 또

<조선혁명선언>을 작성하였다. 한편 그는 상해에서 신한청년회(新韓靑年會) 조직에 참가하고 1919년 상해에서 임시정부 수립에 참가했으나 이승만 배척론을 내세워 공직을 사퇴, 비밀 결사 대동청년단(大東靑年團), 신대한 청년동맹 등을 통해 민중의 폭력혁명에 의한 적극 항일투쟁을 기하려 하였다. 1927년 무정부주의 동방연맹에 가입하여 활약하다가 피체되어 뤼순 감옥에서 복역 중 옥사했다. 이른바 민족사관을 수립하고 한국 근대사학의 기초를 닦았다.

조선상고사[편집]

朝鮮上古史

신채호가 지은 역사책. 이 책은 1926년에 완성되고 1931년에 <조선일보>에 연재되었다가 해방 후 안재홍(安在鴻)의 서문과 함께 단행본으로 발행되었다.삼국시대까지의 개설인데 제1편 총론은 우리 역사 연구를 위한 방법론을 기술한 것으로 그의 역사 이론의 집약이라고도 하겠다. 그는 총론에서 역사의 본질을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라고 하였는 바 그의 이러한 역사 인식의 태도는 유럽 근대 역사학의 그것과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그의 고대 사론(史論)이 가지는 특징은 독창적인 것이 많으며, 그 비판이 준엄하였는데, 이는 그가 중세 사관에서 이탈하려고 노력한 흔적이라 할 수 있다. 총론 다음에는 수두시대, 3조선 분립시대, 열국영웅시대, 고구려 전성시대, 고구려의 중쇠(中衰)와 북부여의 멸망, 고구려·백제 양국의 충돌, 남방 제국의 고구려에 대한 공수동맹(攻守同盟), 3국의 혈전의 시(始), 고구려의 수에 대한 전역(戰役), 고구려의 당에 대한 전역, 백제의 강성과 신라의 음모 등으로 나누어 서술하였다.

조선사연구초[편집]

朝鮮史硏究草

신채호가 저술한 역사책. 이 책은 1920년대 전반에 쓰여지고 1925년에 신문에 발표하였던 논문을 1926년에 홍명희의 수집으로 발행(1929)한 것이다. 본서에는 6편의 논문이 수록되었는데, 이들 논문도 우리 역사 연구를 위한 방법론의 문제와 관련하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