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동양사상/한국의 사상/한국의 근대사상/한국의 근대 철학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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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근대 철학사항〔槪說〕[편집]

근대 조선(1876∼1918)의 철학은 조선이 근대 문명기를 배경으로 하여 국제 무대에 등장하기 시작한 시대를 반영한다고 하겠다. 종래의 정신적 지주였던 유교철학은 개화의 물결 앞에서 점차 무너져 갔고 이에 대하여 서양철학이 소개되기 시작하였다. 지금까지 우리 학계를 지배하여 온 유교철학은 정치적·사회적인 개화기(開化期)를 맞아 그 활동방향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곧 주리파(主理派)와 주기파(主氣派)의 논쟁을 중심으로 활동을 하던 유교철학은 개화의 노선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길을 찾이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한편으로 주리파와 주기파를 하나로 묶어 보수주의(保守主義)의 세력을 만듦으로써 자기를 지켜내려고 했다. 곧 이황(李滉)의 주리설(主理說)을 철저히 이어받아 주기설(主氣說)을 비판한 이진상(李震相)·곽종석(郭鍾錫) 등과 철저한 주기파인 임성주(任聖周)의 학통을 이어받아 주기설을 내세운 전우(田愚)·유중교(柳重敎) 등은 서로 철학적이 입장을 달리함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보수주의 세력을 규합, 이단·개화·외세에 반대하는 위정척사의 운동을 폈다. 다른 한편으로 유교사상은 개화의 물결 속에서 새 시대의 새 현실에 맞는 새로운 유학으로 자신을 개혁하려는 움직임도 보았다. 개화정책에 반대하다가 드디어 의병(義兵)을 일으켜 싸운 유인석(柳麟錫)은 <우주문답(宇宙問答)>을 통해 유교 사상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였다. 곧 종래의 도덕을 넓혀 도덕에 지·인·용(智仁勇)을 포함시켰다. 이것은 유교의 도덕에 문·무(文武)를 포함시켜 새 시대에 적응케 했다는 것을 뜻한다. 또 종래의 사·농·공·상(士農工商) 신분에 병(兵) 신분을 더하여 상호유통을 강조했다. 박은식(朴殷植)은 유교구신론(儒敎求新論)을 통해 전통적인 유학의 세 가지 통폐를 지적하고 이것을 개혁하는 세 가지 방안을 제시하였다. 여기서 특히 그는 공자는 대동(大同)사상과 맹자의 중민(重民) 사상을 강조하였다. 이렇게 유교를 크게 개혁한다면 유교가 전세계에 빛날 수도 있다고 하였다. 장지연(張志淵)은 <조선유교연원(朝鮮儒敎淵源)>을 통해 실학자의 입장에서 우리나라 유교의 발전과정을 체계적으로 밝혔다. 여기서 그는 실학자들의 사상을 '한유(漢儒)의 학술'이라고 보고 이것을 송대(宋代)의 학술보다 높이 평가하였다. 이 시대에 종래의 성리학(性理學)이 차츰 쇠퇴하게 되자 그 동안 주자학(朱子學)에 눌려 부진하던 양명학(陽明學)이 일어났다. 이건창(李建昌)은 지(知)는 의(意)의 근본이 아니라고 하여 지식보다 실천을 더 강조했다. 김택영(金澤榮)은 지식과 실천이 서로 작용해야 한다고 하였다. 박은식은 양명학에서 내세우는 지행합일(知行合一)이 새 시대에 알맞는 학설이라고 밝혔다. 우리 전통적인 유교철학이 새 시대를 의식하고 자기유지를 위한 개혁을 꾀하고 있는 동안에 서양의 철학사상이 들어오게 되었다. 대체로 개화운동을 하는 사람, 그리스도교·신식 교육 등을 통해 서양철학이 소개되고 보급되었다. 서양철학은 한편으로 그리스도교 계통을 통해 다른 한편으로는 일본 학계를 통해 우리나라에 들어왔다. 서양의 새로운 문물·학문·사상을 소개하는 저서들이 나와 서양철학이 소개되었고 신문·잡지 등을 통해서도 소개되었다. 1895년에 출판된 유길준의 <서유견문(西遊見聞)>에는 서양학술에 이바지한 사람으로서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베이컨, 헤겔, 스펜서 같은 이름이 소개되어 있다. 그리고 철학을 "지혜를 사랑하여 모든 이치를 통하기 위한 것"이라고 풀이하였다. 장지연(張志淵)의 <만국사물기원역사(萬國事物紀原歷史)>(1909)에는 탈레스, 피타고라스,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 등의 그리스철학이 소개되어 있고 베이컨, 로크, 스펜서, 칸트, 피히테, 셸링, 헤겔, 데카르트 등이 소개되어 있다. 역시 장지연 등이 주동이 되었던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 월보(月報)의 <윤리강화(倫理講話)>에서는 톨스토이의 인도주의사상과 니체의 초인(超人) 철학이 비교·설명되어 있다. 그리고 양기탁(梁起鐸) 등이 주관하던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에서는 1909년 8월 4일자 <노예근성을 버린 후에 학술이 진보함>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옛 성인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동양학계의 폐습을 비판하였다. 이와 동시에 다윈, 스펜서, 루소, 몽테스키외 등의 서양사상을 비판없이 받아들이는 지식인들에 대해서도 경계하였다. 이것은 그 당시 개화를 부르짖던 지식인들이 단편이나마 서양철학·서약사상을 받아들였음을 뜻한다. 특히 그 당시의 지식인들에게 큰 자극을 준 것은 다윈, 스펜서의 진화론과 프랑스의 계몽주의 사상인 듯하다. 그러나 서양철학을 좀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더 오랜 시간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요컨대 근대에는 종래의 유교철학이 자기의 보존과 개혁을 위해 노력했으나 결국 붕괴되는 과정을 밟지 않을 수 없었으며 이에 대해 서양철학이 단편적이나마 수용되기 시작하였다.

이진상[편집]

李震相 (1818∼1885)

조선말의 유학자. 자는 여뢰(汝雷), 호는 한주(寒主). 경사(經史)에 밝았고, 성력(星曆)·산수·의약·복서(卜筮)에 통달하였다. 특히 성리학에 전심,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과 심즉리(心卽理)설을 주장하여 주리설(主理說)의 완성자가 되었다. 그의 저서 <한주집(寒州集)> <이학종요(理學宗要>에 나타난 사상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기(氣)를 인정하여, 주기(主氣)로 귀착하는 주기설, 노장(老莊), 불교, 순자(荀子), 양주(楊朱) 등은 모두 이단(異端)으로, 이(利)의 근저에 도달할 수 없다. (2) 성(性)은 이(理)일 뿐이요, 심(心)도 역시 이이며, 정(情)도 그 근인(根因)은 역시 이니 모두가 일리(一理)에 근원한 것으로 이발(理發)만이 있고, 기발(氣發)은 있을 수 없다. (3) 이(理)는 주인이요 기(氣)는 종(從)이니, 움직이거나 정지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이뿐이요, 이의 동정(動靜)에 따라 기의 동정이 생겨나는 것이다. (4) 4단은 이가 경기(經氣)를 승(乘)한 것이요, 7정은 이가 위기(緯氣)를 승한 것이니, 4단7정은 이가 승하는 기의 경위(經緯)에 따라 결정된다. (5) 왕양명(王陽明)이 <심즉리>를 말하였으나 그것은 기(氣)를 이(理)로 오인한데서 온 오류이니 실은 '심즉기(心卽氣)'를 주장한 것이나 다름없다.

곽종석[편집]

郭鍾錫 (1846∼1919)

조선말의 주자학자·독립투사. 자는 명원(鳴遠), 호는 면우(傘宇) 또는 유석(幼石), 이진상(李震相)의 문인. 이황·이진상의 학문을 계승, 주리설을 주장하였고, 1895년년 을미사변 때 영국 영사관에 일본침략 규탄을 호소하였고 1905년 을사조약 체결시에 열국공법(列國公法)에 호소할 것을 상소하였다. 1910년 한일합방 소식을 듣고 비분강개, 다음 해에 이름을 도, 자를 연길(淵吉)이라 고치고, 1919년 2월에는 유생들의 연서(連書)로 파리강화회의에 독립호소문을 발송시켜 투옥되어 2년형 언도를 받았으나 병사하였다. 그의 저서인 <면우집>에 나타난 사상은 (1) 모든 심정(心情)이 발(發)함에 있어 <이>는 주재(主宰)가 되고, <기>는 자용(資用)이 된다. (2) 4단7정이 다 같이 정(情)이요, 이발(理發)의 결과이다. (3) <이>는 선하기만 하지만, <기>는 혹은 악하기도 하니 <기>를 검치(檢治)해야 한다. (4) 심(心)의 본체는 이(理)에 있고, 심의 주재가 이이니 심(心)과 성(性)이 다같이 이라 해도 틀린 것이 아니다 등이다.

전우[편집]

田愚 (1841∼1922)

한말의 유학자. 초명은 경륜(慶倫), 자는 자명(子明), 호는 간재(艮齋) 또는 구산(臼山). 21세에 임성주(任聖周)의 문인이 되었고, 28세에 기질체일설(氣質體一說)을 세워 인정받았으며, <5현수언(五賢粹言)>을 편찬했으며, 1895년 단발령을 반대하였다. 1902년 이이(李珥)의 음정양동설(陰靜陽動說)을 반대한 기정진(奇正鎭)의 주장을 통박하였고, 1905년 을사오적(乙巳五賊) 규탄 상소를 올린 후 전라도 해안의 도서(島嶼)지방을 돌면서 제자들을 가르쳤다. 그의 사상은 (1) 이이(李珥)의 학설을 철저히 옹호했으나 한원진(韓元震)의 주기설(主氣說)은 배척하였고, 기정진·이항로·이진상 등의 주리설(主理說)을 철저히 비판하였다. (2) 음정양동(陰靜陽動)의 사실 자체는 정의(情意)가 있는 기(氣)의 작용이니 자연(自然)이다. (3) 심즉리(心卽理)가 아니라 심즉기(心卽氣)이다. (4) 성(性)은 존귀하고 심(心)은 비천한 것이다 등이다.

유중교[편집]

柳重敎 (1821∼1893)

조선말의 유학자. 자는 치정(致政), 호는 성재(省齋). 이항로(李恒老)·김평묵(金平默) 등에게 수업, 1881년에 김평묵과 같이 구법보수(舊法保守), 척양척왜(斥洋斥倭)를 주장하였으며, 설악산에 입산, 그곳에서 생애를 마쳤다. 그는 처음에는 이항로를 따라 주리설(主理說)을 주장했으나, 만년에는 한원진의 호론(湖論)을 지지, 주기파(主氣派)로 전향하였다. 그의 저서에는 <태극도설대지(太極圖說大指)> <소대학설(小大學說)> <역설(易說)> <인물성동이변(人物性同異辨)> 문집 등 다수가 있다. 그는 성명(性命)에 관한 것을 형이상(形而上)으로, 일반적 심리작용을 형이하(形而下)의 것으로 구분하여 이해하고, 심(心)을 둘로 나누어 본심(本心)·양심(良心)·도심(道心)·인의지심(仁義之心)은 형이상의 것으로 이(理)나, 그밖의 일반적인 심(心)은 형이하의 것으로 이(理)나, 그밖의 일반적인 심(心)은 형이하의 것으로 곧 기(氣)라고 했다.

이건창[편집]

李健昌 (1852∼1898)

조선말의 문신·유학자. 자는 봉조(鳳朝, 鳳藻), 호는 영재(寧齋). 1866년 별시문과에 급제. 1874년 청나라를 다녀왔고, 암행어사로 조병식(趙秉式)을 징계하다가 오히려 유배당했으며 함흥(咸興)민란, 동학란 수습에 참가하였고, 관직을 거절, 유배당하기도 하였다. 그는 갑오개혁, 단발령을 반대하였고 저서로 <당의통략(黨議通略)> <명미당집(明美堂集)> 등을 남겼다. 그는 정제두(鄭齊斗) 등의 양명학의 학통을 계승하여 지(知)는 의(意)의 근본이 아니라고까지 말하여 행(行)을 중시하였으며 전통적인 주자학이 양명학을 배척한 태도를 비판하였다.

유교구신론[편집]

儒敎求新論

1905년경 서북학회(西北學會) 월보 1권 10호에 겸곡생(謙谷生)이란 명의로 수록된 박은식(朴殷植)의 유교개혁론. 그 내용은 전통적인 유학의 통폐로 (1) 유교파의 정신이 오직 제왕(帝王)편에만 있고, 인민사회(人民社會)에 보급시킬 정신이 부족했다는 것, (2) 쇄국주의적이고, 독선적이라는 것, (3) 간이직절(簡易直截)한 유학을 하지 않고, 공리공론만 일삼는다는 등 3가지를 들고, 해결방안으로는 (1) 공자(孔子)의 대동(大同)사상과 맹자(孟子)의 중민(重民)사상을 살려 민지(民智)·민권(民權)을 신장시킬 것, (2) 보다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교화방법을 이행할 것, (3) 양명학을 연구하여 치량지(致良知), 지행합일(知行合一)의 기절(氣節)과 공효를 취하라는 3가지 주장을 하였다.

장지연[편집]

張志淵 (1864∼1921)

한말의 학자·언론인·항일우국지사. 초명은 지윤(志尹), 자는 순소(舜韶), 초자(初字)는 화명(和明), 호는 위암(韋庵)·숭양산인(嵩陽山人). 1895년 을미사변에 의병궐기호소의 격문을 발송, 1897년 아관파천(俄館播遷)시 고종의 환궁을 요구하는 만인소(萬人疏)를 기초했다. 독립협회에 가입, 1899년 시사총보(時事叢報)·황성신문사의 주필을 역임. 광문사(廣文社)에서 정약용(丁若鏞)의 저서 간행, 1901년 <황성신문> 주필로 복귀, 1905년 11월 20일자로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라는 사설(社說)로 을사조약을 규탄, 1906년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를 조직했으며, 1908년 대한협회로 개편했다. 그후 교육사업에 관계하다가 1908년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 <해조신문(海潮新聞)> 주필로 활약 1910년 한일합방을 개탄 폭음으로 울분을 달래다 죽었다. 저서에 <조선유교연원(朝鮮儒敎淵源)> <위암문고(韋庵文稿)> <만국사물기원역사> <대한강역고>

등 다수가 있고 그는 실학의 영향을 받은 유학자로서 실학에 관계되는 저서를 많이 남겼고 처음으로 우리나라 유학사를 체계화했으며, 서양사상을 섭취하여 진화론·실증주의 등에 관심을 가졌다.

조선유교연원[편집]

朝鮮儒敎淵源

장지연의 저서. 우리나라 유교의 발달사를 실학자(實學者)의 입장에서 처음으로 체계화한 것으로 (1) 권말(卷末) 총론에서 유학의 유입에서 한일합방에 이르기까지 특히 이황(李滉)·이이(李珥) 이후의 유학자 50여명을 취급한 점, (2) 한국 유학의 본격적인 전개를 송학(宋學)의 전래로부터 잡은 것, (3) 유형원(柳馨遠)·홍대용(洪大容)·박지원(朴趾源)·이덕무(李德懋)·정약용(丁若鏞) 등 실학자들이 사상을 소개한 뒤에 "그들은 특히 유교로써 경제(經濟)·고거(考據)의 학을 겸하였으니 한유(漢儒)의 학술"이라고 규정한 점 등에 있어서 특히 실학연구에 선구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 책은 1922년에 전 3권으로 간행되었으나 저자 자신이 1921년 몰하였으니 저작은 훨씬 이전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만국사물기원역사[편집]

萬國事物紀原歷史

1909년에 나온 장지연의 저술로 신식문물을 항목별로 소개한 일종의 소사전(小事典)이다. 이 책 속에서 저자는 그리스 철학의 전개과정을 간략히 소개하였고, 근대철학자로 베이컨·데카르트·로크·칸트·헤겔 등을 들고 있으며, 사회학(社會學)에 언급하여 칸트에서 시작되고, 스펜서로 대성(大成)되었다고 논술하고 있어 서양철학 특히 관념론과 진화론에 대한 단편적인 이해를 보여주고 있다.

유인석[편집]

柳麟錫 (1842∼1915)

한말의 유학자·의병장(義兵將). 자는 여성(汝聖), 호는 의암(毅庵), 이항로(李恒老)·유중교(柳重敎)의 문인. 1876년의 병자수호조약을 반대했다. 1894년 갑오경장(甲午更張) 때 김홍집(金弘集) 등 친일내각에 반대, 의병을 일으켜 싸우다 관군에 패전, 만주로 망명했고, 1909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13도 의군도총재(義軍都總裁)에 추대, 두만강 도하작전을 시도했으나 실패, 러시아 관헌에 체포되었고, 1910년 합방 후에도 독립운동을 계속하였다. 그의 문집 <의암집(毅庵集)>의 말권(末卷)에 <우주문답(宇宙問答)>이 있는바, 이것은 그의 정치·외교·사회·문화 등 각 분야에 걸친 사상편력의 일단을 보여준다. 그는 철학적으로 이항로의 주리설(主理說)을 계승하였으면서도 의리(義理)·명분(名 分)만 내세워 공리공론만 일삼던 도덕(道德)을 지(智)·인(仁)·용(勇)을 포함하고, 문무(文武)를 겸한 보다 실천적인 개념으로 확대해석하고, 사회적으로도 종래의 사·농·공·상(士農工商) 신분차별제를 비판하고, 여기에 병(兵)을 추가하여 이들 다섯 신분이 서로 다른 신분의 직능을 겸하고 상호 유통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것은 전통적인 성리학자로서 새 시대를 자각한 그의 진보적 태도의 일면을 보여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