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동양사상/한국의 사상/한국의 현대사상/한국의 현대사상〔槪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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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상은 3·1운동을 기점으로 한 근대적 민족주의운동을 줄기로 해서 전개된 일제침략하의 파생적 근대 시민사회 이데올로기의 형성과정으로 요약될 수 있다. 3·1운동은 사상사적으로 계몽기적인 민족주의가 성숙되어 일본 침략자에 대한 <독립선언(獨立宣言)>으로 행동화된 것이고, 이 운동의 역사적 체험 속에서 민족주의적인 의식과 애국심이 싹트고 상하귀천(上下貴賤)의 차별없는 근대적 민족 국가건설의 희망이 나타났다는 점에서 근대적 한국 민족주의 사상의 성숙이라고 볼 수 있겠다. 20세기초 비록 단명했으나 대한제국(大韓帝國) 시대의 중화문화권적 사대주의에서 벗어난 한국에서는 청말 량치차오류(梁啓超流)의 변법자강(變法自强) 사상의 한국적 전개를 통해서 1900년대 국권론적(國權論的) 민족주의가 형성되었고, 박은식(朴殷植)·장지연(張志淵)·신채호(申采浩) 등 자강론자(自强論者)들을 통해 국학(國學)과 국사(國史) 개념이 형성되었다. 을사조약(乙巳條約, 1905년)의 강행으로 일본의 한국 강점이 노골화하면서 한편으로는 위정척사파(衛正斥邪派)의 항일의병운동(抗日義兵運動)이 거국적으로 전개되었으며, 또 한편으로는 그 동안 전파된 개신교(改新敎)계에서의 계몽적·종교적 민족주의자들이 근대적 자유주의 수용에 의한 자유·평등·민족자결주의적 이념을 대중 속에 전파한 것이다. 또한 천도교는 그 발상은 비록 반(反)서구적 전통사상의 민간신앙적 풍토에서 출현했으나, 제3대 교주인 손병희(孫秉熙)대에 이르러 농민대중과 서민층의 폭넓은 지지를 바탕으로 3·1민족독립운동의 주체 세력으로서의 역학을 담당했다. 이와 같은 1910년대의 근대적·종교적·민족주의 행동화가 곧 3·1운동으로 개화된 것이었다. 그러나 3·1운동 이후 독립운동을 민족자결권의 청원(請願) 운동으로 전개한 종교인 지도층에 의한 계몽기적 민족주의에 대한 회의가 머리를 들게 되고, 또 한편으로는 국제적인 반제·반식민주의(反帝反植民主義) 사조의 풍랑 앞에 우리나라 민족운동 속에는 좌경적 모험주의, 즉전즉결적(卽戰卽決的) 폭력주의가 대두되었다. 국내에 사회주의·무정부주의 등 좌익 사회사상이 침투되고 좌경적 혁명운동, 소작쟁의, 노동자 파업, 사회주의 정당 등이 대두했다. 이로 인해 1920년대 민족운동은 '민족해방이냐 계급투쟁이냐'의 문제를 놓고 좌·우분열의 위기에 놓이게 된 것이다. 1920년대 사상적 상황은 3·1운동 이후의 자유주의적 민족주의의 퇴조기에 들어가게 된 민족사상의 이데올로기적 혼란기라고 특징지을 수 있겠다. 일본 식민주의자들은 '일시동인(一視同仁)'이라 소위 일본 천황의 조서(詔書)를 내걸고 무단지배(武斷支配) 10년의 식민지화 방식을 바꾸어 문화정치(文化政治)란 허울 좋은 간판을 내걸고 회유정책을 쓰고, 영국의 아일랜드·인도 등에 대한 식민지 정책에서의 '자치부여(自治賦與)'를 모방하여 감언에 의한 회유책으로 첨예화한 항일(抗日) 민족 사상의 예봉을 둔화시키는 한편 한국 민족을 일본화하기 위한 동화(同化) 정책을 실천하기 시작했다. 이는 한국 민족의 민족의식·전통·풍속·언어 등을 말살시키려는 한민족의 말살을 위한 노회(老獪)한 흉계였다. 1910년대 들어 이 동화정책에 발맞추어 일본을 적국시(敵國視) 하지 않는 민족주의 부재(不在)의 개화주의(開化主義)적 자결주의 인텔리중에는 인도나 아일랜드의 자치운동 방식으로 방향 전환을 모색하는 자치파(自治派) 내응자(內應者)가 속출했고, 곧 내선일체(內鮮一體)를 내걸고 한국 민족주의의 사상적 토대를 말살하려는 식민주의적 사상정책이 전개된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1922년 1월 모스크바에서 열렸던 <극동민족대회(極東民族大會)> 이래 자유주의자들의 내응화를 틈타서 한국 민족운동의 주도권을 쥐려는 좌익사상의 침투가 활발해진 것이다. 1927년 2월 5일 발족한 신간회(新幹會)는 분열되고, 해외 사조에 의해 점유되기 시작한 한국 민족주의의 주체화를 위한 20년대의 새로운 좌우합작(左右合作)에 의한 민족운동이 나타났다. 신간회 사상은 '좌우합작 민족 단일화'의 표명에 나타난 바와 같이 민족운동 중 동화정책에 대응해서 자치파(自治派)로 기울어지는 타협주의를 배격하는 한편, 좌익사회사상의 홍수 속에 퇴조하는 민족주의의 정통을 재건해 보려는 데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신간회운동의 전개는 첫째로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 중 시민적 자유의 신장을 통해 미족주의사상을 수용하고, 둘째로 일제 식민주의의 경제적 침략을 비판하면서 경제적 민족주의를 배양하고, 셋째로 민족주의의 정신적·문화적 방면에서 조선주의, 조선학을 발전시켜 1920년대 국학운동(國學運動)의 발전을 보게 되었다. 특히 문학·예술 방법론 면에서 민족어(民族語)로서 한국어의 근대적 발전을 보게 되었다. 1920년대 천도교 민족사상은 <개벽(開闢)>지(誌) 등의 언론활동을 통해, 특히 이돈화(李敦化)가 동학 교리(東學敎理)를 근대적으로 발전시켜 인내천(人乃天) 사상을 이끌어냈다. 또한 도산 안창호(安昌浩)의 홍사단(興士團) 운동은 1913년 미국에서 창립된 이래 주로 해외 한인(韓人)들에게 호응을 얻었는데 '무실(務實)·역행(力行)·충의(忠義)·용감(勇敢)'의 슬로건하에 교육에 의한 인격혁신(人格革新)을 강조하는 인격교화적인 자유주의 민족사상의 메카가 되었다. 1930년 당시 1945년 8·15 광복까지의 국내 민족운동은 일제의 파시즘화(化)로 인한 암흑기를 맞이하게 되었고, 1940년대에는 완전히 민족(民族) 부재(不在)의 일본화(日本化) 강압 속에서 동면기(冬眠期)에 들어간 것이다. 이 일제의 대륙침략기(大陸侵略期)에는 친일(親日) 문인·친일 관료들이 일본 식민지 지배의 수족 노릇을 하면서 내선일체(內鮮一體)적인 일본 예민화(隸民化), 한국어 부정(否定), 창씨강요 등에 의한 '한국 민족의 부정'에 혈안이 됐다. 따라서 1945년 8·15 광복은 민족해방인 동시에 한 민족이 한 국가를 가지려는 '한 민족, 한 국가'원칙에 입각한 근대적 민족국가(nation-state), 통일국가의 시발점이기도 했다. 그러나 타율적인 국토분단은 민족국가 형성에서의 민족의지의 좌절을 초래했고, 동시에 동·서냉전 체제하에 들어가 냉전 이데올로기로 인해 지나친 코스모폴리터니즘적·대외지향적 사조가 만연하게 되었다. 1960년 4·19혁명을 계기로 해서 비로소 민족자주와 경제자립의 민족주의의(밑으로부터의) 발현을 보았고, 이승만(李承晩) 자유당 독재에 대한 지식인의 반항 운동을 통해서 민주주의 사상이 다각적으로 전개되고, 집요하게 정치적 정통성이 추구되었다. 그후 경제개발 위주의 근대화론이 어느 정도 정통성을 경시하면서 개진되었으나 그 한계가 드러나 오늘날 그 반성기에 들어선 감이 없지 않다. 오늘날 우리의 사상적 상황은 국제적인 다원화(多元化) 경향과 발맞추어 다시 민족주체(民族主體) 사상과 역사적 정통의 양 평가가 고개를 들면서 한국학(韓國學), 한국사(韓國史), 국문학 고전(國文學古典) 등 민족전통에의 복귀를 통한 민족자주사상 형성의 움직임이 우리 사상계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중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