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동양사상/한국의 사상/한국의 현대사상/한국의 현대 정치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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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현대 정치사상〔槪說〕[편집]

1919년 이후의 정치사상에 있어 주요한 사조는 자유민주주의로, 이는 범세계적인 사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이밖에 무정부주의(無政府主義, Anarchis), 사회주의 등도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한다. 1910년에 일제에 주권을 빼앗긴 한국은 종전의 독립성과 폐쇄성을 다 같이 상실한 채 당시 일본에서 유행하던 정치사상에 그대로 노출되었을 뿐만 아니라 해외의 독립운동가들은 중국·만주·노령(露嶺)·미주 등지에서 각각 그 곳에서 유행하던 정치사상에 접하여 큰 자극을 받았다. 이와 같이 한국은 완전히 세계에 개방된 채 새로운 사조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들 사조를 충분히 음미할 사이도 없었던 당시의 한국은 그러한 풍조에 휩쓸려 들어가, 조국광복이라는 큰 목적과 통일된 광복운동에 혼란과 이탈이라는 양상이 빚어지기 시잭했다. 따르게 되었다. 여기서는 근대 정치사상의 수용을 편의상 다음과 같이 3기로 나누어 간추려 보기로 한다. 제1기는 1919년에서 1930년까지로 근대정치사상의 개화기이며, 제2기는 1931년에서 1948년까지로 좌·우익대립기, 제3기는 1949년 이후로 자유민주주의 정착시기이다. 먼저 제1기는 1912년 이래의 중국혁명, 1917년의 러시아혁명, 1918년의 제1차 세계대전 종결과 윌슨의 <민족자결원칙(民族自決原則)> 등에 자극받아 각종 정치사상이 일본 사상계나 중국·러시아의 혁명운동을 통해 소개·수용되어 민족해방이라는 궁극적인 목표는 일치하되 이론적 근거나 방법론은 상이한 각종 정치단체나 선각적(先覺的)인 사상가들이 나타나 그들의 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된 시기이다. 즉, 이미 전시대에는 개화사상, 위정척사론, 의병투쟁, 계몽사상, 독립사상 등 그 연원을 달리하고 때로는 반목하던 것이, 망국(亡國)과 함께 근대적인 민족주의 사상으로 통합되어, 1918년의 <대한독립선언서>, 1919년의 <2·8선언> 및 <3·1독립선언> 등을 통해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투쟁이론이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뿐만 아니라 민족사학자들인 박은식(朴殷植)·신채호(申采浩)·정인보(鄭寅普)·문일평(文一平)·안재홍(安在鴻) 등에 의한 민족주의 사론(史論)이 나타나 한국 민족주의의 연원과 사적(史的) 배경을 밝혔고, 신규식(申圭植)·안창호(安昌浩) 등은 민족사를 반성, 근대적인 민주주의·민족주의·혁신론 등의 이론을 내놓아 독립운동의 이념적 기초를 마련하였으며, 상해임시정부의 헌장(憲章)은 곧 당시 망명지사들의 정치토론의 결실이었던 것이다. 이때부터 한국인은 비로소 자유민주주의를 채택 습득하기 시작하였다. 만주·중국 등지에서는 민족종교인 대종교(大倧敎)의 영향이 적지 않았고, 일제 치하의 국내에서는 천도교·기독교·불교 등이 민족주의 운동의 중요한 기점이 되었으니 손병희(孫秉熙)·이돈화(李敦化) 등의 개벽론(開闢論), 이상재(李商在), 이승훈(李昇薰), 조만식(曹晩植) 등의 종교·교육·청년운동, 한용운(韓龍雲)의 <조선독립의 서(朝鮮獨立-書)> 등이 그중 대표적인 것들이었다. 민족주의가 이와 같이 체험 속에서 우러나 독특한 이론 전개를 보인 데 대하여 자유민족주의는 임시정부의 강령·정책 등의 조문으로 표현되고, 계몽운동에 의하여 전달되었다. 한편 1920년대 이후의 정치사상으로 가장 문제된 것은 역시 러시아혁명에 자극받은 마르크스주의, 즉 사회주의사상이었다. 이 사상은 처음에 대일 항쟁의 이론적 거점과 튼튼한 배후 세력을 기대하는 일부 민족주의자들에 의하여 독립을 위한 방편으로 소박하게 수용되었으나, 국제공산주의운동과의 연결이 강화되고 계급투쟁의 이론이 보급되면서부터는 국내의 노동운동·학생운동·좌익정당활동으로 나타나고 만주·중국 등지에서는 코민테른의 지휘를 받는 이질적인 정치사상으로 형성되어 민족주의 진영과 대립하기 시작하였다. 이로써 대일투쟁은 분열되어 민족진영과 이들 좌익 공산진영 간에 끊임없는 반목·대립이 계속되었다. 사회주의 운동의 격화는 모처럼 싹트기 시작한 자유민주주의의 가능성을 크게 위축시켰을 뿐만 아니라 전통적인 민족주의에도 큰 충격을 주어, 이를 일부 포괄하여 보다 실직적이고 합리적인 민족주의 혁명이론을 성립시키기도 하였으며, 민족의 단결과 통일전선을 열망하는 정치가들은 좌익노선과 절충 타협하여 좌·우익합작의 민족단일전선을 구축하려는 움직임도 보여주었다. 6·10만세 운동과 광주학생운동은 주류가 민족주의임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의 영향을 숨길 수 없었고, 1921년의 임시정부 분열, 이동녕(李東寧)등의 반공(反共) 노선, 1927년의 신간회(新幹會) 결성과 1931년의 신간회의 좌·우익 사상논쟁 등이 모두 독립운동기에 사회주의가 준 충격과 민족주의의 시련을 말해주는 것들이다. 제2기는 일본의 대륙침략이 노골화됨에 따라 상해에서 좌·우합작의 운동이 본격화되면어 통일전선의 윤곽이 드러나고, 좌·우를 포괄한 민족주의 이론으로 3균주의(三均主義)가 확정되어 한국독립당의 당헌(黨憲), 임시정부 건국강령 등이 채택되는 것과는 정반대로, 국내에서는 신간회가 분열·해체되고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이 강행됨에 따라 사회주의는 지하로 잠복하고, 민족주의 운동이 마비되며, 일부 친일분자들의 반역행위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해방까지 국내 사상계는 암흑기였지만, 해외에서는 비로소 임시정부가 재통합하여 강화되고, 광복군이 편성되어 본격적인 민족적 투쟁기를 맞게 된다. 일본군국주의의 고집은 더욱 한국인들에게 자유주의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었고, 김구(金九)가 주도하는 임정의 항일투쟁은 실력적인 면에서나 이론적인 면에서나 상당히 강화되어 있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1945년 미·소 양군의 진주에 의한 피동적인 해방으로 민족주의는 크게 약화되었고, 오히려 민주주의와 사회주의간의 이데올로기적인 대립이 격화되어 민족분열, 국토분단의 비극을 맞이하게 되었다. 해방직후부터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에 이르는 동안은 민족사상의 최대 혼란기로, 극우(極右)에서 극좌(極左)에 이르는 수십 개의 정치노선을 현출시켰다. 제3기는 1949년 이후부터 시작되는 바, 이 시기는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면서 정부의 반공정책이 강화되고 자유민주주의가 채택 실시된 시기였다. 이 시기에는 제도적으로 서구적인 민주주의가 상당히 구체적으로 보급되었지만 한편으로는 권력집중에 의한 전제체제(專制體制)가 굳어져서 이승만(李承晩)은 자유당(自由黨)을 만들어 장기집권을 시도하였다. 이런 속에서 부패와 부정이 만연하게 민중의 비판은 점고(漸高)하였고 정국은 소란해져 갔다. 그 결과 자유민주주의의 혁명기운이 팽배하여 1960년 4·19 혁명을 가져오기에 이르렀다.

대한독립선언서[편집]

大韓獨立宣言書

1918년 2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만주·노령의 유지였던 김교헌 등 39명의 명의로 발표된 우리나라 최초의 독립선언서 일명 <무오독립선언(戊午獨立宣言)>이다. 여기에 나타나 있는 사상을 요약하면 (1) 대한은 자주·독립·민주의 나라이다. (2) 한반도는 어디까지나 한국인의 것이다. (3) 일제의 침략·압제의 죄악을 선포징변(宣布徵辨)한다. (4) 한일합방은 무효이며 우리의 주권을 회복한다. (5) 동북 아시아의 판도를 합병 이전으로 환원하여 섬과 반도와 대륙을 구분하라. (6) 이것은 감정적인 보복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진정한 국제도의의 실현에 있다. (7) 동권동부(同權同富)로써 남녀·빈부·노유·지식 정도에 차별을 두지 않는 민족평등(民族平等)이 건국의 이념이다. (8) 정의는 필승이니 역천(逆天)의 마(魔)와 도국(盜國)의 적을 단호히 응징하라. (9) 독립군 궐기로 독립을 완성할 것이다 등으로 왕정(王政)에 대한 미련을 청산한 것, 독립선언과 건국 및

독립군투쟁을 연결지은 것, 국시를 민주국가로 한 것 등이 특징이다.

삼일운동[편집]

三一運動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명 가운데 29명(지방에 있던 길선주·김병조·유여대·정춘수는 불참)은 서울 인사동 소재 태화관(泰和館)에 모여, 독립선언 시각인 오후 2시 독립을 선언하는 한용운의 간단한 식사를 들은 다음 그의 선창으로 대한독립만세를 제창하였다. 그리고 미리 건 전화 연락을 받고 대화관으로 달려와 포위해 있던 80여 명의 일본 경찰에 의해 의연한 태도로 연행되었다. 그 무렵 파고다공원에는 서울의 중등학교 이상의 남녀학생 400-500명이 독립선언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학생들의 희생을 염려하여 장소를 태화관으로 옮겨 민족대표들이 나타나지 않자 한 청년이 자진하여 등단,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다. 독립선언서의 낭독이 끝날 무렵 학생들은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종로 쪽으로 뛰쳐나가 시위행진에 들어갔다. 수많은 군중이 이에 호응하여 함께 행진하였으며, 시위대열이 대한문(大漢門) 앞에 이르렀을 때는 온 서울시내가 흥분된 군중과 만세소리로 들끓었다. 이 만세시위 행진은 해질 무렵부터는 교외로 번져나갔으나 질서를 유지하였기 때문에 단 한 건의 폭력 사건도 발생하지 않았다. 그러나 평화적 시위를 전개하던 군중은 일본군대와 기마경찰의 무력저지로 인하여 강제해산되고 주모자 130여 명이 체포, 구금되었다. 3월 1일에는 서울뿐만 아니라 평양·진남포·안주·의주·선천·원산 등 서울 이북지방에서도 독립선언식과 만세시위운동이 전개되었다. 이렇게 하여 3월 1일 시작된 독립만세운동은 전국 각지로 파급되어 2일에는 경기도 개성, 충청남도 예산 등에서 치열하게 벌여졌다. 그밖에 전라북도는 4일 옥구 시위로, 경상북도는 8일 대구 시위로, 전라남도는 10일 광주 시위로, 강원도는 10일 철원 시위로, 함경북도는 10일 성진 시위로, 경상남도는 11일 부산진 시위로 각각 번져갔다.

집회횟수 1542회, 참가인원수 202만 3098명, 사망자수 7509명, 부상자수 1만 5961명, 피검자수 4만 6948으로 추산된다.

3·1운동은 한민족이 자주독립을 위하여 거족적으로 일으킨 항일민족투쟁으로, 국권의 회복과 개인적 자유를 얻기 위하여 일본제국주의에 항거한 비폭력투쟁이었다. 또한 민족문화의 자주성과 주체성을 천명하고 그것을 수호하고자 한 민족의식의 발로이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3·1운동은 일제에 의하여 유린된 민족의 생존권과 주권의 회복을 위한 민족운동의 성격을 띠게 되고, 거족적으로 전개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일제의 무력적인 탄압으로 비폭력투쟁이었던 3·1운동에서 많은 희생자가 나오게 되자 그 방향을 실력투쟁으로 바꾸지 않을 수 없게 되어, 3·1운동 이후 폭력수단에 의한 투쟁이 연달아 일어났다.

3·1운동 결과 중국 상하이의 프랑스조계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이는 전국민을 전제로 한 국민정부인 동시에 국제정치에 있어서 한국의 존재를 과시하는 데 큰 의의가 있었다. 따라서 임시정부는

비록 해외에서 활약하기는 했으나 이것을 통한 국제적인 정치활동은 독립의 모태적 역할을 하였다. 또한 3·1운동은 민족운동의 민족운동의 일원화·대중화·비폭력화의 대원칙을 통하여 민중의 정치적 자각을 불러일으켰다. 천도교를 주축으로 그리스도교·불교·유교 등 독립운동의 주체가 일원화되었다는 점, 지식층·농민·상공업자 등 각계 각층의 사람들이 참여하였다는 점 등은 민족의식의 발로를 엿보게 해주는 특기할 만한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이와 같이 자각된 민족의 끊임없는 대일항쟁은 일제의 식민정책의 일부를 수정하게 하여, 무단정치를 문화정치로 전환하게 하면서 독립운동의 정신적·내면적 충실을 기하는 데 이바지하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편집]

大韓民國臨時政府

3·1운동이 일어난 후 조국의 광복을 위해 임시로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조직하여 선포한 정부. 1919년 3·1운동이 일어난 후, 일본통치에 조직적으로 항거하는 기관의 필요성을 느낀 애국지사들은 상하이로 집결하여 4월 11일에 임시정부를 조직하기로 하고 프랑스 조계에 기관을 두어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을 구성하였다. 각 도 대의원(代議員) 30명이 모여서 임시헌장(臨時憲章) 10개조를 채택·발표하고, 4월 17일에 임시정부를 조직하여 관제(官制)를 선포하였다. 당시의 각료로는 임시의정원 의장 이동녕(李東寧), 국무총리 이승만(李承晩), 내무총장 안창호(安昌浩), 외무총장 김규식(金奎植), 법무총장 이시영(李始榮), 재무총장 최재형(崔在亨), 군무총장 이동휘(李東輝), 교통총장 문창범(文昌範) 등이었다. 같은 해 6월 11일에 임시헌법(전문 및 8장 56조)을 제정·공포하고, 임시헌법에에 의하여 이승만을 임시대통령으로 선출하고 내각을 개편하였다. 그 후 재정적인 곤란과 사상적인 분열로 많은 타격을 받았으나 전력을 기울여 임무를 수행하였다.

주요 활동은 다음과 같다. ① 교통로(交通路):국내의 무력적·사상적 투쟁을 위해 교통부내에 지부(支部)를 설치하였으며, 전국 각 군(郡)에 1개소의 교통국을 두고, 1개면(面)에 1개의 교통소(交通所)를 신설하고 교통부 차장의 책임 아래 국내와의 연락활동에 힘썼다. ② 연통제(聯通制):임시정부 국무원령(國務院令) 제1호로 공포된 제도로, 국내 각 도에는 독판(督辦), 각 군에는 군감(郡監), 각 면에는 사감(司監)을 두고 지방세포조직에 힘써, 21년에는 전국 각 방면에 완전한 조직을 갖게 되었다. ③ 재정:재정적 기반을 위해 구급의연금(救急義捐金)·인두세징수(人頭稅徵收)·국내공채(國內公債)·외국공채(外國公債) 등의 4가지 방법을 책정하여 이를 시행하였으나, 대부분은 재미교포가 보내주는 헌금으로 유지되었으며, 공채는 아일랜드에서 발행한 500만 달러의 공채만이 성공하였다. ④ 군사:20년에 상하이에 육군무관학교(陸軍武官學校)를 세웠으나 큰 활약은 없었고, 중국에 있는 각 군관학교에 파견을 장려하면서 만주에 있는 독립군을 후원하였다. ⑤ 자료편찬부 설치:외국에 파견되는 특사에게 한국독립의 이론적 근거를 설명하고, 일본의 침략사실과 한국역사의 우수성을 설명하기 위해 21년 7월에 설치하여 9월 말에 전 4권의 책을 완성하였다. ⑥ 언론기관:기관지 독립신문을 이광수(李光洙)가 주필이 되어 발간하고, <신대한보(新大韓報)>·<신한청년보(新韓靑年報)>를 간행하였다. ⑦ 외교활동:19년 4월 18일 김규식(金奎植)을 전권대사(全權大使)로 하여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하고, 각지에 외교관을 파견하여 한국독립운동의 열의를 만국에 호소하였다. 이어 7월에는 스위스에서 열리는 만국사회당대회(萬國社會黨大會)에 조소앙(趙素昻)을 파견하였고, 주미 외교위원장 서재필(徐載弼)도 미국에서 독립을 위해 활동하였으며, 20년 10월에는 신규식(申圭植)을 광둥(廣東)의 쑨원(孫交)이 세운 호법정부(護法政府)에 파견하기도 하였다. ⑧ 대일·대독 선전포고:41년에 일본과 독일에 각각 선전포고를 하고 군대를 연합군에 편입시켜 특히 미얀마·사이판·필리핀 등지에서 용맹을 떨쳤다. ⑨ 시정방침(施政方針):20년 국무원령으로 시정방법을 결정하여 시위운동·납세거절·일본법령거절·임시작탄사용(臨時作彈使用), 국내외의 감사대(敢死隊) 조직, 각 종교단체에의 침투공작 지시 등의 활동을 하였다. 26년 9월에는 의정원에서 임시대통령제를 페지하고 국무령제(國務領制)를 채택하였으며, 김구(金九) 등이 국무령으로 강력한 지도력을 발휘하였다. 그 해 이봉창(李奉昌)과 윤봉길(尹奉吉) 사건으로 일본의 탄압이 심해져 32년 5월 저장성(浙江省) 항정우(抗州)로 옮겼다가, 37년 11월에는 중국정부를 따라 충칭(中慶)으로 옮겨서 장제스(蔣介石)와 협력하여 항쟁하였다. 40년에는 건국강령(建國綱領) 3장을 발표하여 광복군을 강화하였고, 44년에는 김구를 주석으로 선임하였다. 45년 8월 광복을 맞이하자 11월 29일에 주요 간부들이 개인 자격으로 귀국하였지만 국내의 혼란으로 임시정부의 내각과 정책은 계승될 수 없었다.

2·8독립선언서[편집]

二·八獨立宣言書

1919년 2 월 8일 동경의 기독교청년회관에서 한국 학생들이 조선청년독립단(朝鮮靑年獨立團) 명의로 발표한 독립선언서. 이광수(李光洙)가 작성한 <독립선언문>과 <결의문(決議文)>, <민족대회소집 청원서> 등의 이념은 (1) 2천만 민족을 대표하여 독립을 기성(期成)하기를 선언한다. (2) 민족자결(民族自決)에 의한 자유·독립을 요구한다. (3) 한일합방은 일본의 강압으로 이룩된 것이니 무효이다 (4) 일본의 사기는 인류의 치욕이요, 세계가 개조되는 이때 한국이 독립함은 당연하다. (5) 일본 국회와 정부는 조선민족대회를 개최케 하여 한민족의 의사를 물어보라. (6) 민족의 생존권을 위하여 일본에 대해 영원한 혈전(血戰)을 전개할 것이다 등으로, <3·1독립선언>에 비하여 훨씬 구체적이고 투쟁적이며 시민적·혁명적이다.

3·1독립선언서[편집]

三·一獨立宣言書

1919년 3월 1일 기미(己未) 독립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이 한국의 독립을 선언한 글. 본문은 최남선(崔南善)이 작성했으며, 말미의 <공약3장(公約三章)>은 한용운(韓龍雲)의 작성이라고 하는 바, 그 문면(文面)에 나타난 사상을 요약하면 (1) 우리는 독립국, 자유민(自由民)임을 선언한다. (2) 이 선언은 민중의 진심이며, 세계정세에 순응하는 것이며 민족생존권의 정당한 발동이다. (3) 일본의 죄를 추궁하거나 보복할 의사는 없다. (4) 양국합방은 동양평화를 해치는 것이니 세계평화를 위해서도 한국의 독립은 필요한 것이다. (5) 지금은 인도주의(人道主義) 발흥의 시대이니 이에 맞추어 전진할 따름이다. (6)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끝까지 발표하되 배타적 보복감정으로 일주(逸走)해선 안 된다. (7) 모든 행동은 질서를 존중하고 광명정대(光明正大)하게 하라 등으로, 인도주의·민족주의·평화주의·비폭력·낙관적 전망 등이 이 선언서의 특징이다.

대한민국임시헌장[편집]

大韓民國臨時憲章

1919년 4월 10일 오전 10시 상해 프랑스 조계(祖界) 김신부로(金神父路)에서 열린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제1회 회의에서 의정(議定)한 헌장(憲章)으로, 곧 임시정부 헌법이다. 여기에 나타난 10개조를 보면 (1) 민주공화제(民主共和制) (2)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의 결의(決議)에 의한 통치 (3) 남녀·귀천·빈부의 평등 (4) 신교(信敎)·언론·저작·출판·결사·집회·주소이전, 신체 및 소유(所有)의 자유 (5) 공민(公民)의 선거 및 피선거권 (6) 교육·납세·병역의 의무 (7) 국제연맹에의 가입 (8) 구황실 우대 (9) 생명형(生命刑)·신체형(身體刑)·공창제(公娼制)의 전폐 (10) 국토회복 후 1년내의 국회소집 등으로 대의정치(代議政治)에 의한 민주공화정을 명백히 하고, 국민의 자유와 평등을 선언한 점, 국제연맹과 구황실에 대한 배려가 불가피했던 점이 특징이다.

유관순[편집]

柳寬順 (1902-1920)

소녀 항일 독립투사. 본관은 흥양(興陽). 충청남도 천안(天安) 출생. 1918년 이화학당(梨花學堂) 고등과(高等科) 교비생으로 입학하였으며, 이듬해 3·1운동 당시 학생들과 함께 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 총독부가 학교를 휴교시키자 귀향하여 천안·연기(燕岐)·청주(淸州)·진천(鎭川) 등지의 학교·교회 등을 방문하여 만세시위운동을 협의하였다. 음력 3월 1일(4월 1일) 아우내 장터에서 시위행렬을 지휘하고 만세를 부르다가 출동한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었으며, 이 시위 때 아버지 중권(重權)과 어머니 이씨(李氏)가 피살당했고 집도 불태워졌다. 공주검사국으로 이송되어 그곳에서 영명(永明) 학교의 만세시위를 주도하다 끌려온 오빠 관옥(冠玉)을 만났으며, 3년형을 선고받고 항소(抗訴)하여 서울로 이송되었다. 법정에서 일본인 검사에게 걸상을 집어던져 법정모독죄가 가산되어 7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감옥에서 복역중, 계속 독립만세 등으로 동지들을 격려하며 적에게 항거하다가 갖은 악형 끝에 옥사했다. 62년 건국공로훈장 단장(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이동녕[편집]

李東寧 (1869∼1940)

독립운동가. 호는 석오(石吾), 천안 출신. 1904년 상동청년회(尙東靑年會)에서의 계몽운동, 1905년 을사조약 때 대한문(大漢門) 앞에서의 연좌시위(連坐示威), 만주로의 망명과 간도(間島)의 한국인학교인 서전의숙(瑞甸義塾) 창설, 1907년 신민회(新民會)에 참여, 1908년 만주 랴오닝성에서 교포자치기관 경학사(耕學社) 설치, 블라디보스토크에서의 군관(軍官)학교 설립운동, 1912년의 대종교 입교, <해조신문(海潮新聞)> 발간, 1919년 2월의 <대한독립선언>, 임시정부 조직에의 참여 등으로 활약했다. 그는 또 임시의정원 초대의장·내무총장·국무총리 대리·내무총장을 역임하면서 임정의 기초를 닦기도 했다. 1921년에는 임정의 분열을 막기 위해서 노력했으며, 1924년 국무총리·대통령직권 대행을 역임했으며, 공산주의자와의 부단한 투쟁을 전개했고, 주석(主席) 국무위원으로 선임되어 임정의 적폐제거와 공산주의자 숙청에 나섰다. 1928년에는 한국독립당을 결성했고, 1935년 한국국민당 당수, 1936년에는 국무회의 주석 등을 역임하면서 임정을 이끌다가 1940년에 서거했다. 그의 행적을 통하여 (1) 먼저 교육으로 인재를 기르고 자유로운 독립운동을 한다. (2) 독립군 양성을 위해 군관학교를 설립한다. (3) 거족적인 항쟁만이 승리할 수 있다. (4) 임정 유지를 위해서는 개인의 편견과 감정을 버려야 한다. (5) 민족진영의 단결은 공산주의자를 제거하지 않고는 안 된다. (6) 계획경제 확립으로 균등사회의 복지를 보장한다는 등의 사상을 추출할 수 있다.

유교도정 파리화회서[편집]

儒敎徒呈巴黎和會書

3·1운동 직후에 곽종석(郭鍾錫)·김창숙(金昌淑) 등 전국 유림대표 137명이 연명(連名)하여 김창숙으로 하여금 파리강화회의에 제출케 한 독립청원서. 그 내용을 간추리면 (1) 한국은 결코 없앨 수 없는 4천여년 역사의 문명국이다. (2) 한일합방은 완전히 일본의 침략행위이고 한국민의 의사가 아니다. (3) 폴란드 등을 독립시킨 것처럼 한국도 독립시켜 달라. (4) 한국민은 독립할 자격과 능력을 갖고 있다. (5) 대계유신(大界維新)의 날을 당하여 나를 찾아달라. (6) 우리는 결코 일본의 노예가 될 수 없다 등으로 역시 유교적인 의식에서 조국애를 표현하고 있다.

한국혼[편집]

韓國魂

신규식(申圭植)의 저술. 1914년에 집필되었으나 1920년경에야 임정관계 여러 사람에게 공개되었고, 1923년에 출판된 <한국외교야화(韓中外交夜話)>에 수록됨으로써 전해졌다. 이 글은 그의 민족주의 실례를 들어가면서 전개한 명문(名文)으로 그 사상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나라는 망했어도 마음속에 조국이 있으니 이것이 '한국혼'이다. (2) 망국의 원인은 법질서의 문란, 원기(元氣)의 쇠약, 지식의 폐쇄성, 아첨, 태만, 오만, 열등감, 파벌주의, 사리사욕 등에 있었다. (3) 이런 폐단이 생긴 것은 ① 선조의 교화와 종법(宗法)을 망각하고, ② 선민(先民)의 공렬(功烈)과 이기(利器)를 망각하였기 때문이다. (4) 한국은 처음에 훌륭한 문명국이요 빛나는 전통을 가졌다. (5) 그러나 단군(檀君)·이순신(李舜臣)·세종(世宗) 등 위인들의 정신을 망각하고 입국(立國)의 정신을 잃어서 나라가 망하였다. (6) 우리는 충신·영걸·천재를 중절(中折)시키는 나쁜 습성을 갖고 있다. (7) 민족사·민족혼은 국사에서 찾아야 하며 국학(國學)을 존중해야 한다. (8) 학문상의 모화사대주의(慕華事大主義)가 우리의 주체성을 마비시켜 놓았다. (9) 신지식·개화사상을 한답시고 서양 것에만 빠져서도 안 된다. (10) 주자(朱子)만 받들어 공리공론만 일삼거나 신문화에 도취되어 문명만 몽상하는 것은 모두 내 정신을 죽이는 것이다. (11) 국치(國恥)를 잊지 말고 의지할 곳 없는 국혼(國魂)을 떠받들라. (12) 지금은 국가주의와 민족주의가 서로 경쟁하는 시대이니 극단의 사회주의나 이상주의는 잠깐 덮어두자. (13) 현실도피를 하지 말고 현실주의(現實主義)로 무장하자. (14) 우리의 국혼(國魂)을 일깨워 지금이라도 자각하여 분발하자. (15) 우리는 절망해선 안 된다. (16) 국가민족주의(國家民族主義)가 우리의 유일한 집합점이다. (17) 집합점이 있어 여기에 도달할 수 있다면 주장이 달라도 관계없다. (18) 사견(私見)을 희생하고 근본을 주장하며 인심을 단결시키는 것으로 전제를 삼아야 한다. (19) 단군을 주재(主宰)로 이순신을 통제(統制)로 한다면, 적관(籍貫)·교파·노소·남녀·원근(遠近)·친소(親疏), 유명·무명, 단체·단독, 온건·급진, 비밀·공표, 공·상·농·사가 모두 하나의 동지이다. 이상을 종합해 보면 이 글은 망국과 구국을 역사적으로 해명하고 전민족의 귀일점을 제시하며, 민족분열의 제(諸)요인을 지적하여 그것을 없앨 것을 호소하였을 뿐만 아니라 역사를 주체적·객관적인 입장에서 재인식하고, 일체의 종파성을 초월하였다는 점에서 가장 훌륭한 민족주의 이론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이것은 1919년 전후의 국민사상과 정신상태를 알아보는 데도 매우 귀중한 문헌이라고 할 것이다.

3대개벽론[편집]

三大開闢論

천도교 사상가인 이돈화(李敦化)가 동학사상 혹은 수운주의(水雲主義)의 입장에서 전개한 혁명이론. 그는 인내천(人乃天)사상을 수운주의의 본체로 보고, 이것을 후천개벽(後天開闢)사상과 관련지어 다분히 민족주의적이고 독자적인 혁명이론을 그의 저서 <신인철학(新人哲學)> 속에서 체계화하였다. 그것에 의하면 수운 최제우(崔濟愚)의 사상의 목적은 곧 '개벽(開闢)'에 의한 지상천국 건설에 있고, 개벽 즉 혁명에는 세가지가 있는바 그것은 (1) 정신개벽(사상개조) (2) 민족개벽(민족해방) (3) 사회개벽(사회개혁) 등이요, 세계 인류의 향상은 계급이 아닌 민족을 단위로 해야 한다는 것, 외적·물질적 조건만으로의 개혁이 아닌 인간격(人間格) 중심의 경제적 해방이 사회주의와 수운주의의 차이라는 것, 지상천국이라는 영원한 이상에 도달하기 위한 무궁한 운동이 개벽운동인 이상 수운주의는 우익 민족주의도, 좌익 사회주의도 아닌 그 모든 것을 포괄하며서도 어떤 한 계급의 이익에 치우치지 않는다는 것 등을 강조하고 있어 주목을 끈다.

박열[편집]

朴烈 (1902∼ ? )

독립운동가·무정부주의자. 본명은 준식(準植), 일명 혁(赫), 문경 출신. 함창(咸昌) 공립보통학교, 경성 제2고등보통학교를 거치는 동안 독립운동에 관련하여 퇴학당하고 1919년 도일(渡日), 당시 일본에서 유행하던 무정부주의 운동에 투신하여 권력구조와 천황제(天皇制)를 반대하고 이를 무력으로 타도하기 위해 흑도회(黑濤會)를 조직, 1923년 일본천황 히로히토(裕仁)를 암살하려다 발각 체포되어 1926년 일본 대심원(大審院)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가 무기징역으로 감형을 받아 복역중 1945년 해방으로 석방되었다. 그 후로는 무정부주의를 버렸다. 무정부주의자였을 때의 저서로 <조선혁명론(朝鮮革命論)>이 있다.

의열단[편집]

義烈團 1919년 만주 지린성(吉林省)에서 조직된 가장 급진주의적인 비밀 항일운동 단체. 일정한 주소를 갖지 않고 각지에 흩어져 폭력적인 습격·암살·폭탄투척 등을 투쟁방법으로 하여 일본 관리·관청 등을 암살 또는 파괴하였다. 최초의 단원은 김원봉(金元鳳) 등 13인으로 민족주의적이었으나 뒤에 차츰 좌경(左傾)화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밀양 경찰서, 총독부, 종로 경찰서 등을 습격하였고, 동양척식회사(東洋拓殖會社) 등에 폭탄을 투척하는 등 그 활약이 컸다. 그들의 이념은 신채호(申采浩)가 작성, 의열단 명의로 발표한 <조선혁명선언(朝鮮革命宣言)>에 있는 바 그 내용은 (1) 생존의 적인 강도 일본을 살벌(殺伐)함이 정당한 수단이다. (2) 내정독립(內政獨立), 참정권 주장, 자치(自治)운동을 하는 자는 맹인(盲人)이 아니면 간적(奸賊)이다. (3) 강도 일본과 타협하거나 그 밑에서 기생하려는 자(문화운동자)는 모두 민족의 적이다. (4) 외교(外交)·준비(準備) 등을 운위하는 것은 잠꼬대이니 오직 민중에 의한 직접 혁명만이 있을 뿐이다. (5) 이 혁명은 민중혁명이요 직접혁명이며, 선각(先覺)한 민중이 민중전체를 위하여 혁명적 선구가 된다. (6) 우리가 행사할 폭력(암살·파괴·폭동)의 목적물은 ① 조선총독과 그 관리 ② 일본천황과 그 관리 ③ 첩자와 매국노 ④ 적의 시설물 일체이다. (7) 이족(異族)통치, 특권계급, 경제약탈제도, 노예적 문화사상 등을 파괴하고 신조선을 건설한다. (8) 민중은 혁명의 주체, 폭력은 혁명의 유일(唯一) 무기이다. (9) 인류로써 인류를 압박치 못하며 사회로써 사회를 박삭(剝削)치 못하는 이상적 조선을 건설할 것이다. 이로써 보면 1926년 12월에 창립된 애국단(愛國團)과 같이 의열단은 독립운동사상 가장 극렬한 투쟁방법을 취한 단체였다고 할 수 있다.

김구[편집]

金九 (1876-1949)

독립운동가. 본관 안동. 호 백범(白凡). 아명 창암(昌岩). 본명 창수(昌洙). 개명하여 구(龜, 九). 법명 원종(圓宗). 초호 연하(蓮下). 황해도 해주 출생. 15세 때 한학자 정문재(鄭文哉)에게서 한학을 배웠고, 1893년 동학(東學)에 입교하여 접주(接主)가 되고 이듬해 팔봉도소접주(八奉都所接主)에 임명되어 해주에서 동학농민운동을 지휘하다가 일본군에게 쫓겨 95년 만주로 피신하여 김이언(金利彦)의 의병단에 가입하였다. 이듬해 귀국, 일본인에게 시해당한 명성황후(明成皇后)의 원수를 갚고자 일본군 중위 쓰치다(土田壤亮)를 살해하고 체포되어 사형이 확정되었으나 고종의 특사로 감형되었다. 복역 중 98년 탈옥하여 공주 마곡사(麻谷寺)의 승려가 되었다가 이듬해 환속(還俗), 1903년 기독교에 입교하였다. 1909년 황해도 안악의 양산학교 교사로 있다가 이듬해 신민회(新民會)에 참가하고, 11년 '105인 사건'으로 체포되어 종신형을 선고받고 복역중 감형으로 11년 출옥하여 김홍량(金鴻亮)의 동산평 농장 농감(農監)이 되어 농촌을 계몽하였다.

3·1운동 후 상하이로 망명. 대한민국임시정부 조직에 참여하고 경무국장(警務局長)·내무총장·국무령(國務領)을 역임하면서, 28년 이시영(李始榮)·이동녕(李東寧) 등과 한국독립당을 조직, 총재가 되었다. 이로부터 항일무력활동을 시작, 결사단체인 한인애국단을 조직, 1932년 일본왕 사쿠라다몬(櫻田門)

저격사건, 상하이 훙커우(虹口)공원 일본왕 생일축하식장의 폭탄투척사건 등 이봉창·윤봉길 등의 의거를 지휘하였다. 33년 난징(南京)에서 장제스(蔣介石)를 만나 한국인 무관학교 설치와 대(對) 일본전투방책을 협의하고 35년 한국국민당을 조직하였으며, 10년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충칭(重慶)으로 옮길 때 이를 통솔하였고, 한국 광복군 총사령부를 설치, 사령관에 지청천(池靑天)을 임명하고 44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에 선임되었다.

1945년 대한민국의 이름으로 대일선전포고(對日宣戰布告)를 하는 한편, 광복군 낙하산부대를 편성하여 본국 상륙훈련을 실시하다가 8·15광복으로 귀국하였는데, 임시정부가 미국정으로부터 정통성을 인정받지 못하였으므로 한국독립당 위원장으로서 모스크바 3상회의 성명을 반박하고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주도하였다. 대한독립촉성중앙협의회 부의장, 민주의원 부의장, 민족통일총본부를 이승만·김규식과 함께 이끌면서 극우파로 활약하였다. 1948년 남한만의 단독 총선거를 실시한다는 국제연합의 결의에 반대하여 통일정부수립을 위한 남북협상을 제창하였다. 그 후 북한으로 들어가 정치회담을 열었으나 실패하였다. 그 후 정부수립에 참가하지 않고 중간파의 거두로 있다가 1949년 6월 26일 경교장(京橋莊)에서 육군 포병 소위 안두희(安斗熙)에게 암살당하였다. 국민장으로 효창공원에 안장되었으며, 저서로는 <백범일지(白凡逸志)> 가 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조선혁명선언[편집]

朝鮮革命宣言

1923년 중국 북경에 망명중이던 신채호(申采浩)가 비밀 항일결사 단체인 의열단(義烈團)의 선언문으로 작성한 글. 1919년 11월 10일에 창립되었던 의열단은 ① 왜놈들을 몰아내고 ② 조국을 되찾고 ③ 사회 계급을 없애고 ④ 평등을 추구하는 강령과 <천하 정의(正義)의 율(律)을 맹렬하게 실천함> 등의 공약 10조를 가지고 있었으며, 1923년 신채호에게 위촉하여 6천 4백여 자로 구성된 민족혁명주의적인 이 독립 선언문을 제시하였다. 이 선언문은 모든 의열단 단원들이 항상 소지하고 다녔을 뿐만 아니라, 1919년에 발표되었던 삼일 독립선언문(三一獨立宣言文) 이후 가장 큰 역사적 의의를 지닌 독립사상을 밝힌 문헌으로 평가되었다. 이 선언에 제시된 독립사상은 1920년대 국내에서 일제를 비적국화(非敵國化)하고 타협하려는 타협주의와 상해 임정 내의 외교노선주의론에 반대하여 폭력투쟁적인 항일투쟁노선을 정당화했을 뿐만 아니라 아나키즘의 영향을 받아 반강권(反强勸), 반엘리트주의로 '민중의 직접 혁명'의 이념을 제시하였다. 따라서 이 선언은 민중·폭력의 두 요소를 결합시킨 아니키즘적 민중혁명, 폭력의 철학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 문헌에서 신채호는 1905년 이래의 영웅사관적(英雄史觀的) 색채를 가진 자강주의(自强主義)를 극복하고 독립투쟁의 주체를 자강론적 엘리트에서 민중으로 전환시켰을 뿐만 아니라 온건한 실력양성주의에서 혁명적 민족주의로 그의 사상을 발전시켰다. 이 민중·폭력의 아나키즘적 철학에 의해 "안중근·이재명 등 열사의 폭력적 행동이 열렬하였지만, 그 후면에 민중적 역량의 기초가 없으며 3·1운동이 만세 소리에 민중적 일치의 의기를 볼 수는 있었으나 또한 폭력적 중심을 가지지 못했다"(同宣言)라고 민족혁명주의적 독립투쟁의 역사관을 제시하기에 이르렀다. 이 사상에는 리스증(李石曾) 등의 중국 무정부주의의 영향이 인정될 뿐만 아니라 독립운동의 주적인 일제(日帝)를 아나키즘적인 반강권주의에 따라 그 절대적인 적으로 타도해야 할 대상으로 설정한 반제국주의 노선이 명백히 드러나 있다.

6·10만세운동[편집]

六·十萬歲運動

1926년 6월 10일 순종(純宗) 황제의 인산일(因山日)을 기하여 일어난 만세운동. 주동자는 전문학교·대학교의 학생대표인 이병립(李炳立) 등과 사회주의 측의 권오설(權五卨) 등 및 인쇄직공 민창식(閔昌植) 등으로, 서울 안국동 민창식 집에서 10만 매의 삐라를 인쇄, 황제의 상여가 지나갈 때 삐라를 뿌리며 일제히 만세를 불러 여기에 민중이 호응하여 이 운동은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삐라의 내용은 (1) 우리의 교육은 우리 손에 맡기라. (2)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하라. (3) 토지는 농민에게 돌리라. (4) 8시간 노동제를 채택하라 등이고 약소민족의 해방 등을 슬로건으로 하였다.

이동휘[편집]

李東輝 ( ? ∼1928)

독립운동가. 호는 성재(誠齋), 함경도 단천(端川) 출신. 안동 영장(營將)·강화도 참령(參嶺)을 역임하였고, 함경도 일대에 유세(遊說)하여 신식학교 건설에 적극 노력했다. 1910년 이후 만주와 연해주(沿海州)로 망명, 독립운동을 지도하다가 항일(抗日)투쟁의 방편으로 사회주의에 접근, 1917년말에는 흑하(黑河)에서 한인사회당(韓人社會黨)을 조직했다. 1919년에는 코민테른에 대표를 보내 가입하였다. 그러나 3·1운동 직후 상해에서 임정수립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호응, 군무총장(軍務總長)·국무총리까지 지냈으나 1921년 상해에서 고려공산당(高麗共産黨)을 조직하고 이때 임시정부가 소련으로부터 받기로 한 독립운동자금 100만 루불 중 40만 루불을 고려공산당 조직기금으로 유용한 것이 발각되어 인책 사임하였다. 1921년 11월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의 비행을 처벌해달라고 하고, 코민테른의 종용으로 고려공산당 임시연합간부의 일원이 되었으며, 코민테른이 조종하는 극동인민 대표자대회(1922)에 참가했다. 고려 뷰로(高麗局) 위원(1923),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新韓村)의 당 도서관장(1926)을 지내다가 병사하였다. 그는 민족주의자로서 항일독립운동을 위하여 사회주의에 접근, 민족진영과 친소(親蘇) 공산주의자의 양편으로부터 고립당한 인물이었다.

안창호의 정치사상[편집]

安昌浩-政治思想

독립운동가·교육가인 도산(島山) 안창호의 정치사상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대공주의(大公主義)-민족이라는 큰 공동체를 위해 개인의 이기적인 욕망을 희생하고 헌신 봉사하라는 것, (2) 민족 3대자본저축론(民族三大資本貯蓄論)-경제적 자본, 정신적 자본, 도덕적 자본의 3대자본을 저축하여 민족의 3대파산(三大破産)을 극복한다. (3) 민족개조론-자아혁신·민족혁신·자기개조·민족개조를 위하여 국토와 사회를, 생활과 정신 등을 개조하여야 한다. (4) 4대정신론-흥사단(興士團)의 이념으로 무실(務實)·역행(力行)·충의(忠義)·용감(勇敢)에 의한 인격혁명. (5) 독립8대방략-국민개병주의, 국민개납주의, 국민개업주의 등의 8개조.

한국독립당[편집]

韓國獨立黨

1928∼1949년까지 존속하였던 가장 대표적인 민족주의 정당. 1928년 3월 상해임시정부의 취약성을 정당조직으로 극복하기 위하여 임정 주역들인 이동녕(李東寧)·김구(金九)·이시영(李始榮)·안창호(安昌浩) 등이 한국독립당을 조직하여 1930년에 만주에서 내려온 이청천(李靑天)·여준(呂準) 등의 한국독립당 및 이탁·현익철(玄益哲) 등의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과 합당하여 재결성되었다. 이때 강령으로 (1) 독립보위와 민족문화 발양, (2) 계획경제와 균등사회, (3) 민주공화국 체제, (4) 국비교육, (5) 세계일가(世界一家) 실현을 내세웠고, 1931년에는 복국(復國)·구족(救族)·구세(救世)를 표방하고, 재력·지력·부력의 균 등을 원칙으로 한 삼균주의(三均主義)를 채택하여 당의 이념, 임정의 건국강령, 광복군(光復軍)의 이념을 확립하기에 이르렀다. 1930년대부터 김구(金九)의 영도 하에 일본정부 요인 저격, 광복군 조직, 독립전쟁 수행 등으로 해외투쟁사의 주류를 이루었다. 해방 후에 임정과 함께 귀국하여 신탁통치반대, 민족분할 반대, 남북협상 등으로 투쟁하다가 김구의 서거와 이승만 정권의 탄압으로 무력해졌다.

조소앙[편집]

趙素昻 (1887∼1958)

독립운동가. 사상가. 본명은 용은(鏞殷), 자는 경중(敬仲). 경기도 파주(坡州) 출신. 1916년 상해(上海)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가담하였고 1918년에는 만주(滿洲)로 가 <대한독립선언>(일명 무오독립 선언을 기초하여 발표하였다. 1919∼1921년에 상해 임시정부 수립에 참가하였고, 동년 6월 이후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만국사회당대회 준비회의와 네덜란드 로테르담에서 열린 제2회 국제 사회당 집행위원회에 참석하여, 한국문제 실행요구안을 제출, 통과시킨 다음 상해로 돌아와 1923년부터 임정 외무총장직에 취임, 해방 당시까지 독립외교를 전담하였다. 그는 1920∼1930년에 독립을 위한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로 독창적인 삼균주의(三均主義)를 창안 제창하여 1929년에는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의 이념으로 채택하였다. 1931년부터 임정의 외교문서에 여러 형태로 표현한 다음, 1940년에는 삼균제도를 임정의 건국강령(建國綱領)으로 채택, 1945년 임정의 귀국까지 존속시켰으며, 해방후는 한국독립당과 사회당의 기본이념으로 채택했다. 그의 삼균주의는 한편으로는 ① 개인과 개인 간의 균등, ② 민족과 민족 간의 균등, ③ 국가와 국가간의 균등을 주장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① 정치적 균등 ② 경제적 균등 ③ 교육·문학상의 균등을 주장하는 가장 철저하고 완벽한 평등주의로서 국비교육론 등을 주장하였으며 그것의 이론적 기초를 범세계적인 육성교(六聖敎), 가장 단순한 유기론(唯氣論), 민족혁명론 등에 두기도 하였다. 1950년 서울 성북구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나 6.25 때 납북 된 후 소식불명이다. 저서 <소앙집(素昻集)>(上, 下) <유방집(遺芳集)> <한국문원(韓國文苑)> <대성원효전(大聖元曉傳)> 김상옥전(金相玉傳)> 등이 있다.

김성수[편집]

金性洙 (1891-1955)

교육가·언론인·정치가. 본관은 울산. 호는 인촌(仁村). 전라북도 고창출신. 호남의 거부였던 경중(暻中)의 양자가 되었으며, 13세에 고광석(高光錫)과 혼인하였다. 1906년 전라남도 창평에서 송진우(宋鎭禹)와 함께 영어공부를 하였고, 1908년(18세)에 군산의 금호학교(錦湖學校)에 다녔다. 그해 10월 새 학문을 배우겠다고 송진우와 함께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세이소쿠 영어학교(正則英語學校)와 긴조중학교(錦城中學校)를 거쳐, 1910년에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에 입학, 1914년에 정경학부를 졸업하였다. '내 나라의 독립을 되찾기 위해서는 먼저 민족의 교육이 앞서야 한다'고 생각하고, 1915년 4월 중앙학교(中央學校)를 인수하여 1917년 3월에 교장이 되었으며, 같은 해에 경성직뉴주식회사(京城織紐株式會社)를 맡아 경영하였다.

1919년 1월부터 송진우·현상윤(玄相允) 등과 함께 중앙학교 숙직실을 근거지로 독립운동을 펼 방책을 꾸며서 그 뜻이 3·1독립운동으로 결실되었다. 그해 10월, 민족의 산업을 일으키는 바탕으로 경성방직주식회사(京城紡織株式會社)를 세웠으며, 1920년 4월 동아일보사를 창립하였다. <동아일보>를 통해 1922년에는 물산장려운동(物産奬勵運動)을 폈으며, 1923년에 민립대학 설립운동을 펴서 민족의식을 불러 일으키고자 힘을 썼다. 1929년 2월 재단법인 중앙학원을 설립했다. 유럽과 미국을 비롯한 세계 여러 나라의 문물과 교육실태를 두루 살피고 돌아와, 이듬해인 1932년 3월에는 어려운 형편에 있던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를 맡아 경영하여 교장이 되었다. 1945년 10월 미군정청 고문회의 의장에 취임하였고, 1946년 1월에는 복간된 <동아일보>의 사장을 다시 맡았으며, 같은 달에 송진우의 뒤를 이어 한국민주당의 수석총무(당수)가 되었다. 또, 그해 8월에는 보성전문학교를 기초로 고려대학교를 창립하였다. 1947년에는 반탁독립투쟁위원회(反託獨立鬪爭委員會)의 부위원장으로 신탁통치반대운동을 지도하였고, 1949년 2월에 한국민주당과 대한국민당이 통합하여 민주국민당(民主國民黨)이 창당되자 그 최고위원이 되었다. 1951년 5월 대한민국의 제2대 부통령이 되었으나, 정붕의 국회탄압사건에 항거하여 이듬해 5월 그 자리에서 물러났다. 1955년 지병으로 사망했다.

조봉암[편집]

曺奉岩 (1898-1959)

정치가. 호는 죽산(竹山). 경기도 강화(江華) 출신. 조선기독교 청년회(YMCA) 중학부 재학중 3·1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가담, 1년간 복역하였다. 출옥한 뒤 일본에 건너가 주오대학(中央大學) 정경학부에 재학중 비밀결사인 흑도회(黑濤會)에 감담, 사회주의 이념에 의한 독립 쟁취를 목표로 항일운동을 하다가, 곧 탈퇴한 뒤 대학을 중퇴하고 귀국했다. 그 산하단체인 고려공산청년회 간부가 되었다. 이해 공산청년회 대표로 모스크바에 가서 코민테른 원동부(遠東部) 조선대표로 일하였으며, ML당을 조직, 활약하다가 32년 일본경찰에 검거되어 신의주형무소에서 7년간 복역하였다. 출옥 후 인천에서 지하운동을 하다가 45년 2월 다시 예비검속으로 검거되었으나 8·15와 함께 출옥, 조선공산당 중앙간부 겸 인천시 민주주의 민족전선(민전) 의장에 취임하였다. 이듬해 5월 박헌영을 비판하는 공개서한을 발표하고 좌익세력과 완전히 결별했으며, 그 뒤 단독정부 수립에 참여, 1948년 제헌국회의원에 당선되고, 이어 초대 농림부장관으로 입각, 농지개혁법·양곡매입법 등 진보적인 정책을 추진하였다.

1950년 제2대 민의원에 당선되고 국회부의장에 선임되었으며, 1952년과 56년 제2·3대 대통령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하였다. 1956년 11월 혁신정당인 진보당(進步黨)을 창당, 위원장으로서 정당활동을 하다가 58년 간첩혐의로 구속되어 사형선고를 받고 1959년 7월 31일 처형되었다. 그가 국가보안법을 위반했다는 내용은, 간첩 양명산(梁明山)으로부터 북한의 지령과 자금을 받았다는 간첩혐의와 진보당의 평화통일론이 국시(國是)에 위배된다는 것이었는데, 평화통일론은 무죄였으나 간첩혐의는 양명산의 진술번복에도 불구하고 인정되어 사형이 선고되었다. 진보당 사건은 1958년 제4대 국회의원선거를 앞두고 정적(政敵)을 제거하기 위해 조작한 권력의 음모임과 동시에 냉전적 분위기에 편승한 분단주의자들이 평화통일론에 가한 탄합이었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조봉암은 평화통일론, 기간산업·거대기업의 국유화 등의 진보적 사회 민주주의 노선으로, '시대를 앞서간 정치인'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저서로 <공산주의 모순 발견> <우리가 나아갈 길> <우리의 당면과제> 등이 있다.

여운형[편집]

呂運亨 (1886-1947)

독립운동가·정치가. 경기도 양평(楊平) 사람. 호는 몽양(夢陽). 우무학당(郵務學堂)을 졸업하고 융희(隆熙) 3년(1909) 광동학교(光東學校)를 건립하여 청년들을 교육하였다. 이듬해 그리스도교에 입교한 뒤 평양신학교 재학중에 서간도(西間島)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 견학을 계기로 국외에서의 독립운동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학교를 중퇴, 14년 중국으로 갔다. 난징(南京) 금륭대학(金隆大學)에 입학하여 영문학을 전공하다가 그만두고 협화서국(協和書局)에 근무하면서 교민단 단장으로 활약하였으며, 18년 파리에서 만국평화회의가 개최된다는 소식을 듣고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을 조직, 한국의 독립을 청원할 대표로 김규식(金奎植)을 파견하였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이 수립에 가담하여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 의원이 된 후, 일본이 한국의 자치문제에 대해 의견을 타진해 오자 장덕수(張德秀) 등을 대동하고 일본에 가 일본의 각계 인사들에게 한국 독립의 필요성을 적극 역설하고 돌아왔다. 1920년 고려공산당에 가입, 이듬해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인민대표대회(極東人民代表大會)에 참가하여 레닌을 비롯한 트로츠키·지노비예프 등 코민테른의 고위 인사들과 한국 문제를 논의했다. 1921년 상하이(上海)에서 조직된 한중호조사(韓中互助社)의 평의원으로 선임되어 민간외교 분야에서 중국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으며, 29년 영국의 식민정책을 비난했다가 영국경찰에 피체, 일본경찰에 인도되고 제령위반죄(制令違反罪) 명목으로 3년간 복역하였다. 1944년 일본의 패망을 예상하고 비밀단체인 조선건국연맹(朝鮮建國聯盟)을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8·15광복 후 건국연맹의 기반을 확대하여 조선건국인민공화국을 선포, 부주석이 되었으나 우익진영의 반발과 미점령군당국의 불허(不許)로 실패하였다. 같은 해 12월 인민당(人民黨)을 조직하고 이듬해 29개의 좌익단체를 규합하여 민전(民戰:民主主義民族戰線)을 결성, 의장단에 취임하였다가 지나친 좌경(左傾) 성향에 반발하여 탈퇴하였다. 그 후 근로인민당(勤勞人民黨)을 조직하여 좌파 온건세력을 규합, 정치활동을 하다가 1947년 한지근(韓智根)에게 암살당했다.

박헌영[편집]

朴憲永 (1900-1955)

공산주의 운동가. 본관 영해(寧海). 충남 예산(禮山) 출생. 1919년 경성고보(현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그 후 상하이로 건너가서 1921년 이르츠크파 고려공산당 상하이 지부에 입당, 그 해 고려공산당청년동맹 책임비서가 되었다. 1922년 1월 김단야·임원근과 함께 모스크바에서 개최돈 코민테른의 극동인민대표회에 참가하였고, 4월 국내공산당 조직을 위하여 귀국하다가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 1924년 출옥 후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에서 기자로 활동하였으며, 그 후 1925년 4월 18일 서울에서 비밀리에 조직된 조선공산당 창립에 참가하였다. 이 때 공려공산청년회를 결성하여 그 책임비서가 되었다. 1946년 12월 남조선신민당·조선인민당을 조선공산에 흡수, 남조선노동당을 조직하였으며 초대 부위원장이 되었다. 그리고 신탁통치 지지 등 공산주의 활동을 지휘하다가 1946년 9월부터 미군정의 지명수배를 받자 북한으로 도피하였다. 1948년 9월 남조선노동당 당수의 자격을 지닌 채 북한의 내각 부총리 겸 외무장관이 되었다. 그러나 1950년 4월 남·북노동당이 합쳐 조선노동당으로 발족하자 부위원장이 되어 위원장인 김일성의 밑으로 지위가 전락하였다. 그 후 군사위원회 위원, 노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등의 직위에 있었으나 1953년 김일성에 의한 남로당계 숙청작업으로 8월 3일 체포되었다. 그 후 평북 철산(鐵山)에 감금되어 고문을 받다가 1955년 12월 5일 반당·종파분자·간첩방조·정부 전복음모 등 7가지 죄목으로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되었다.

김규식[편집]

金奎植 (1881-1950)

독립운동가(납북)·정치가. 호 우사(尤史). 부산 동래 출생. 6세 때 고아가 되어 선교사 H.G. 언더우드의 집에서 서양교육과 기독교교육을 받고 미국으로 유학, 1903년 로노크대학 문학과를 졸업하였다. 이듬해 프린스턴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1905년 귀국하여 경성청년회 교감·연희전문 교수 등을 역임하였다. 1913년 중국으로 망명, 1918년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약소민족대회에 한국대표로 참가하고,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외무총장으로 참가하고, 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외무총장으로 파리강화회의에 전권대사로 참석하였다. 그해 학무총장·구미위원부 위원장을 겸임하였고, 1920년 만주로 건너가 대한독립단·고력혁명군 조직에 참여하였다. 1923년 모교인 미국 로노크대학에서 법학박사학위를 받고 35년 중국 난징(南京)에 민주혁명당을 창당하는 한편, 베이징(北京)·난징·쓰촨(四川) 등지 대학에서 강의를 맡았다. 44년 대한민국임시정부 부주석이 되었고, 8·15광복 후 귀국하여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인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신탁통치반대운동에 앞장섰다. 46년 민주의원 부의장·입법의원 의장으로 있으면서 1948년 국제연합에 의한 남한의 단독 총선거에 반대하고 통일정부를 수립하기 위하여 노력하였으며, 이를 위하여 김구와 함께 북한에 가서 남북협상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고 정치활동에서 은퇴하였다. 1950년 6·25전쟁 때 납북(拉北)되었다가 만포진(滿浦鎭)에서 사망한 것으로 전한다. 저서로 <에리자베스시대의 연극입문>과 시집 <양자강의 유혹>) 등이 남아 있다.

삼균주의[편집]

三均主義

조소앙(趙素昻)의 정치사상. 1931년 임시정부가 발표한 건국원칙, 1941년 대한민국 건국강령, 1944년 임시정부 개정 임시헌장 등으로 채택되어 건국이념이 되었으며, 1929∼1950년간의 한국독립당과 1948∼1950년간의 사회당의 당의(黨義)·당강(黨綱)·선언문 등으로 발표되었다. 그 목적을 보면 (1) 개인간, 민족간, 국가간의 완전 평등과 (2) 권력(權力)·부력(富力)·지력(智力)에 있어서의 사회 각 계층간의 완전평등을 지향하고, 그 방법으로서는 (1) 일체의 압제와 불평등을 제거한 자유·평등의 민주정치, (2) 재산상의 불평등을 제거한 사회주의 경제, (3) 문화·교육상의 불평 등을 제거한 국비교육제도 등을 주장하였다. 이것은 특히 봉건적 잔재와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 정책과 망명 민족의 수난 속에서 일체의 반민주적 특권계급의 타파, 빈부·귀천·상하의 차별 철폐, 민족차별의 시정, 소수 민족의 자결권 보장 등을 요구하면서, 가장 자유롭고 평등한 이상국가의 이념으로 체계화된 점에 특징이 있다.

대한민국 건국강령[편집]

大韓民國建國綱領

1941년 11월 상해임시정부가 공포한 건국강령. 제1장 <총강(總綱)> 7개조, 제2장 <복국(復國)> 8개조, 제3장 <건국> 7개조 등 합계 22개조로 구성된 문장으로, 1931년에 발표한 건국원칙에 입각하여 행동방략(行動方略)을 구체화한 것이다. 이것은 삼균제도(三均制度)를 정치이념으로 하고 조국광복을 위한 일종의 청사진(靑寫眞)을 밝힌 것으로 1944년 제5차 개정임시헌장의 기초가 되었고, 1948년 대한민국 헌법 기초에도 중요한 참고자료가 되었다. 그 내용을 보면, 임시정부의 법통(法統)을 단군 이래의 민족사와 3·1운동에 두고, 삼균주의의 정치이상을 밝힌 다음, 광복운동을 제1기, 제2기, 완성기의 3기로 나누어 각 단계에 해야 할 일을 명시하였으며, 조국광복 후의 건국과정을 역시 삼균제도의 강령·정책 입안의 제1기, 헌법시행·삼균제도 집행의 제2기, 이를 완성하는 완성기의 3기로 분류하였다. 또한 헌법 제정상의 원칙, 중앙 및 지방의 정치기구 구성원칙, 건국 직후의 경제정책·교육정책 등을 상세히 규정한 바, 그 성격은 민족주의·민주주의·사회주의 이상을 종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신간회운동[편집]

新幹會運動

1927년 조직된 민족주의자의 통합단체인 신간회의 운동. 이것은 한국 근대사상사에서 3·1독립운동 다음 가는 중요한 민족운동이요, 사회경제적 자각에 눈뜬 민족사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경시된 것은 전후 냉전적 이데올로기 영향 때문이었다. 우리나라 근대사상사를 근대적 민족국가 건설을 위한 내셔널리즘 발전의 문맥에서 이해하면 1920년대 서구 자유주의·사회주의의 두 외래 이데올로기를 일시나마 내셔널리즘 안에 포용하고 식민지·반(半) 식민지 상태하의 아시아에 반제(反帝)·반식민지투쟁의 슬로건으로 침투해 들어온 좌익의 계급주의적 사상과 대결하여, 민족해방과 항일독립의 민족주의 사상이 우위를 차지한 좌·우사상 투쟁면에서도 중대한 역사적 의의가 있다. 일제하 우리나라 민족운동은 1910년대의 서구의 자유주의적·계몽적·종교적 운동으로 시작하여

1919년의 3·1독립선언으로 매듭을 짓고, 1920년대에는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도 불구하고 날로 팽창해가는 제1차대전 후의 제국주의 열강의 치열한 식민지분할 경쟁 속에서 반제 민족운동의 국제적 연대가 생기고, 우리나라에도 좌익사상이 침투하여 20년대 청년운동, 사회운동을 사로잡았다. 한편 일부 계몽적인 인텔리겐챠는 자치운동으로 전향, 일제를 적대시하지 않는 제국(帝國) 내의 자치권 획득의 선까지로 후퇴·타협하는 동향까지 생겼다. 1927년 신간회의 '좌우합작(左右合作)을 통한 민족단일당' 민족운동의 출발은 우선 1910년대 계몽자유주의의 한계점을 인식하고, 일제와 타협하거나 회유당함으로써 파생될 민족운동 부정의 위기에서 다시금 20년대의 좌·우 진영을 망라하고 비타협적 항일민족운동의 주체를 결성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일제의 소위 '문화정치'라는 간판하에 폭발적 저항의 예봉을 피하고 점차적으로 한민족을 일본에 동화시키려는 한(韓)민족 부정의 저의를 간파하고 가능한 한 합법적 민족운동으로 민족의 존립을 가능케 하려는 안간힘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운동의 사상적 주류는 김병로(金炳魯)·신석우(申錫雨)·조병옥(趙炳玉) 등 민족진영이 장악했다. 1927년 2월 15일 창립총회를 거쳐 원래 <신한회(新韓會)>로 발족하려던 회명(會名)을 고쳐 신간회(新幹會)로의 창립총회를 갖고 그 강령을 발표했다. <조선민족의 정치적 의식이 발전됨에 따라 민족적 중심의 단결을 요구하는 시기를 타서 순 민족주의를 표방한 신간회(新幹會) 발기인 28명의 연명으로 3조의 강령(綱領)을 발표하였는데 신간회의 목표는, 우경적(右傾的) 사상을 배격하고 민족주의 중좌익전선을 형성하려는 것이다. 1. 우리는 정치적·경제적 각성을 촉구함 2. 우리는 단결을 공고히 함 3. 우리는 기회주의를 일체 부인함(<동아일보> 1927년 1월 2일자 기사). 신간회의 3대강령은 첫째로 한민족의 정치적·경제적 해방, 즉 항일민족주의와 일제 식민주의적 경제침략에 대한 비판이었고, 둘째로 아울러 시민적 자유의 신장(민주주의)과 식민지정책 반대, 경제적 착취 비판(사회주의)으로 발전하였고, 셋째로 일제의 소위 '일시동인(一視同仁)'의 동화정책으로 표면화한 한민족 부정의 음모에 반대하여, 한편으로 친일(親日)동화주의, 자치권 주장 등 일체 타협주의를 기회주의로 규정하여 규탄하고, 비타협적·합법적 민족운동을 전개했고, 넷째로 교육·문화면에서 한국 민족의 존재를 유지 발전시키기 위해 '조선어(朝鮮語) 교수의 요구, 조선인 본위의 교육실시'를 주장하는 한편 국어·국사·국문학 연구 등 국학(國學)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신간회 민족주의의 2원성은 1931년 민족해방이냐 계급투쟁이냐의 신간회 좌·우사상 논쟁을 일으켜 해소론의 대두를 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