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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현대 사학사상〔槪說〕
[편집]한국의 역사학은 박은식(朴殷植)·신채호(申采浩) 등에 의해서 근대 역사학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이 시기에 이들이 보여준 역사 서술이나 역사의식은 우리 역사학의 소중한 성과였고 우리나라 근대 역사학을 성립시키는 데 있어서 이들은 정신적 지주역할을 담당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우리의 근대 역사학이 1930년대와 40년대에 이르러서는 커다랗게 변모하고 또 다양해지게 된다. 이 무렵이 되면 전문적인 교육을 받은 역사학도가 배출되고 급격하게 변동하는 사회사상 속에서 일정한 역사관을 지니고 등장하는 역사가를 볼 수 있게 된다. 역사학계는 이제 정통적인 역사학의 계승 위에서 새로운 역사학으로 성장한 바 있는 민족사학 이외에도 랑케류(流)의 실증사학의 사풍(史風)을 띤 실증주의 역사학과 일정한 역사관에 의해서 전역사를 체계적으로 계통지으려는 사회경제사학이 등장하게 되었다. 민족사학의 계통에는 신채호와는 그 입장을 다소 달리하여 한국 고전의 출판과 함께 계몽사학의 활약을 하다가, 일관된 사학정신을 상실한 뒤 실학시대의 백과전서파적인 박식으로 돌아가 버린 최남선을 들 수 있다. 한국의 문학사적 이해에 있어서 가장 두드러진 최남선의 업적은 그의 <불함문화론(不咸文化論)>이란 논문 속에서 가장 뚜렷이 표명되어 있다. 그 외에도 민족사학의 계열에 서는 역사가는 많았지만 그 중에서도 중추적인 기능을 한 것은 정인보(鄭寅普)였다. 그가 본격적인 역사연구에 몰두하게 되는 것은 1930년대의 일로서, 그 연구의 결정으로 <조선사연구>가 간행되었다. 정인보와 동학(同學)으로서 민족사학의 사풍(史風)의 또다른 일면을 개척하고 있었던 사람은 <조선상고사감(朝鮮上古史鑑)>을 저술한 안재홍(安在鴻)이며, 정인보나 안재홍과 동시기에 문일평(文一平)은 민족사학의 또 다른 일면을 담당하고 나타났는데, 그의 <호암전집(湖岩全集)>은 민중의 계몽 및 역사의 대중화라는 점에서 새로운 역사서술의 형태를 보여준다. 이들의 학문적인 계통을 계승하여 일제의 식민사학에 대결하기 위한 작업을 수행하려 한 인물로서 1940년대에 활약하게 되는 손진태(孫晋泰)·이인영(李仁榮) 등이다. 그러나 이들의 학문적인 성과에도 불구하고 민족사학에 속하는 학자들이 많은 것은 아니었다. 물론 그러한 인원으로서 짧은 기간에 그들이 거둔 성과는 결코 적은 것이 아니었다. 이들은 민족을 수호하고 민족정신을 고양(高揚)시키는 데 큰 업적을 남겼고, 일제의 식민사학에 대결하는 역사관을 확립하여 우리 역사를 굳건한 터전 위에 체계화하는 공적을 남겼다. 또한 그들의 역사의식은 일제 침략기의 역사가가 지닐 수 있었던 최선의 역사의식이었다고 할 수 있으며, 그들의 역사 서술 또한 근대 역사학의 과학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들 민족사학자들이 40년대까지에 도달했던 역사서술이나 역사 인식의 수준은 높았고 그들이 지향하고 있던 역사연구의 방향은 오늘날에도 지표가 되는 것이다. 그들은 우리 역사를 세계사와의 관련속에서 포착하였고, 세계사적인 역사 발전의 여러 단계에 입각하여 연구 작업을 하거나 그것을 우리 역사에 도입하여 적용하려는 노력을 보였다. 그중에서도 사회발전의 이론을 우리 역사의 체계 속에서 적용시키려고 한 것은 커다란 성과였다. 그들은 요컨대 우리 역사의 주체성을 확립시키려 하였고, 나아가 세계사와 관련된 보편성과 개별성의 조화를 의식하고 있었다.
흔히 민족사학의 역사 서술을 비과학적이라든가 또는 치졸하다가 평가하기도 하지만 이는 민족사학에 대한 본질적 평가가 아니고 부분적인 것에 국한된 것이다. 그러나 민족사학의 긍정적인 면에는 아직도 일정한 한계가 있다는 점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일제의 식민사학이 그들의 식민정책을 이용하려 했던 정치성 이론이나 타율성이론을 과학적으로 극복하지 못한 점과 한사군 문제에 대한 실증주의 역사학의 고증과 식민사학의 고증을 또한 극복하지 못한 점이다. 한편 이 시기에는 민족사학과는 달리 랑케사학의 방법을 배운 실증사학자들이 등장하여 문헌고증적인 학풍을 수립했다. 일제시대의 실증사학이라고 하면 곧 진단학회(震檀學會)를 연상하게 되는데 여기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진단학회가 조직된 것은 1934년의 일로, 이들과 사회경제사학 및 민족사학과의 관계를 분석하면 실증사학의 본질이 대개 드러날 수가 있다. 먼저 사회경제사학자들은 진단학회의 기관지인 <진단학보>를 일단의 발전이라고 인정하면서도 반면에 날카로운 비판을 가하고 있다. 즉 사회경제사학자들은 진단학회를 굳이 말을 만들어 붙인다면 순수사학이라고도 할 수 있는 성질의 학문활동을 하는 학회로 보고 있다. 요컨대 그들은 실증사학을 한 마디로 사관(史觀)이 없는 연구단체로서 비판한 것이다. 이에 대해 진단학회는 사회경제사가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받지는 못했지만 그들을 용납할 수 있는 여지로 그러한 비판을 게재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일면에도 불구하고 양자 사이에 개재한 대립은 팽팽한 것이었다. 다음으로는 민족사학과의 관계이다. 진단학회의 발기인 명단에는 문일평이 나타나는데, 그러나 이로써 양자의 밀접한 관계를 말할 수 없음은 정인보의 실증사학에 대한 평가에서도 나타나는 것이다. 곧 정인보는 현재의 문헌에 전하지 않는 민족사적 진실도 찾으려 했기에 일본 학자들을 추종하는 일본 유학 출신의 학자들을 못마땅하게 생각했고, 그런가 하면 실증사학자 또한 민족사가들의 역사학에 만족하려 들지 않았고 그 학문적 성과를 높이 평가(評價)하지도 않았다. 이상 실증사학과 민족사학·사회경제사학과의 관계에서 드러난 바와 같이 실증사학은 기성사관에 집착하지 않았으며,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이를 기피하였다는 사실이 주목된다. 그들은 일정한 기성사관보다는 구체적인 역사 연구를 통해서 일반적인 것을 이해하려 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개별적인 사실(史實)을 통한 일반화 작업이 한국사 내지는 역사 전체를 통관(通觀)하는 단계로까지 발전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사관이 없었다는 비판을 받게 되는 것이다. 실증사학은 또한 가정된 공식이나 법칙을 일방적으로 적용하는 것을 역사 연구의 과학적 방법이 아니라고 보았다. 그들은 반드시 세계의 모든 민족의 역사를 살펴야만 일반적인 법칙이 발견되는 것이 아니고, 일개인이나 한 민족에서도 일반성은 추출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실증이 마치 실증사학의 전유물(專有物)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착오이며, 그것은 역사적 일반의 기초 조건에 불과한 것이다. 따라서 실증이 곧 역사학 자체일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그런데 실증사가들은 개개의 사실 위에서 일반적인 의미를 생각해보는 작업에는 별 의욕을 보이지 않았다. 이로 인해 실증이란 무수한 구슬은 꿰어지지 않은 채 굴러다니게 되었고, 이것이 저간(這間)의 한국 현대사를 혼미(混迷)하게 한 원인이 되었다. 랑케류의 실증사학과 병행하여서 이 시기에는 사회경제사학이 또한 발달하였다. 사회경제사학이라고는 하지만 이에 속하는 모든 역사가들이 반드시 한결같은 성격을 띤 것은 아니었다. 1920년대의 후반기에서 30년대에 걸쳐서는 식민지 착취의 가중과 경제공황의 물결에 편승하여 사회주의 사상의 발달과 노동운동이 전개되고 있었는데, 이러한 사조는 역사학에도 영향을 주었다. 사회경제사학에서의 역사 서술의 특징의 하나는 개개의 역사사실에 관한 고증적 연구를 떠나서 전체 사회경제에 관한 체계적인 연구의 형태를 취하는 점이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은 백남운(白南雲)이었다. 백남운의 대표적인 저술은 <조선사회경제사>(1933)와 <조선봉건사회경제사·上>(1937)가 있다. 그는 원래 방대한 한국사회경제사를 완성할 계획을 갖고 있었다. 그는 종래의 한국사 연구에 신랄한 비판을 가하고 있는데, 그 중 근대사학에 대한 비판에서 그는 민족사학을 일제관학자들의 그것과 아울러서 특수사관으로서 비판 배척하였다. 그는 외관적(外觀的)인 특수성과 일원론적인 역사법칙과는 구별되는 것으로 보고, 역사의 기본이 되는 것은 바로 일원론적인 역사법칙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이러한 관점에 서야만 일제하의 위압적 특수성에 대해 절망을 모르는 적극적인 해결책을 발견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가 식민사관과 민족주의사관 즉 소위 그가 말하는 특수사관을 비판하고 그 대신으로 받아들인 일원론적 역사발전 법칙이란 곧 유물사관의 공식이었다. 그리고 이 공식을 한국사에 그대로 적용한 것이라고 비난을 받고 있기는 하지만, 한편으로는 세계사적인 발전과정에 비추어서 한국사의 체계화를 시도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무엇이 세계사적인 발전법칙이냐 하는 데에 있다. 그가 주장한 세계사적인 발전법칙이란 유럽사(史)의 발전 법칙이 기준이 된 것이고, 이 점은 그의 '아시아적 생산양식'이라는 문제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이 문제는 서구사회의 발전법칙과는 또다른 아시아 제국(諸國)을 염두에 두고 발설한 것 같으며, 이 점은 한국사에도 적용되어 한국에 있어서는 봉건사회의 특수성, 곧 아시아적 특수성을 말한 것으로 추측된다. 이는 곧 그의 소위 일원적 발전법칙과 정면으로 배반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이상에서 그의 역사학적 체계는 구체적인 연구에 입각한 귀납적인 것이 아니라 법칙의 일방적인 적용이라는 것이 증명된다. 그러므로 세계사적인 법칙이란 것은 좀더 다른 각도에서 고찰되어야 한다고 생각된다. 그것은 오직 하나의 법칙만이 역사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고 다원적인 법칙들이 보편성과 특수성의 양면을 가지고 포용되고 해석되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특수성이란 그 민족의 구체적인 사실(史實)에 입각해서 이해되고, 그런 이해가 그 민족의 역사인식의 종합적인 토대가 될 때 역사의 다양한 측면이 폭넓게 전개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최남선
[편집]崔南善 (1890∼1957)
계몽운동가·사학자·문인·독립선언문 기초자. 자는 공륙(公六), 호는 육당(六堂). 중인(中人) 출신의 한의(漢醫)의 아들로 태어나 한문을 익히다가 1906년 도일하여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고사부(高師部) 지리역사과에 입학하였다. 1908년 귀국하여 신문관(新文館)을 설립하여 출판과 인쇄를 했으며, 잡지 <소년>을 창간했다. 1910년 조선광문회를 창설하여 고문헌을 새로 간했으며, 3·1운동 당시 독립선언서를 기초하여 체포되었다. 1925년 <동아일보>의 객원(客員)으로 사설을 쓰는 한편 <불함문화론>을 발표하고, 1927년엔 백두산·금강산 등 국토를 순례했으며, 이듬해 <조선역사>를 발간했다. 그해 총독부에서 주관하는 조선사 편수회의 촉탁을 거쳐 편찬위원에 취임했으며, 1932년부터 한국사를 강의하며 언론기관을 통해 한국의 문화·산수·고적·민담(民談) 등을 강연했다. 1943년 이광수 등과 같이 재일(在日) 한국유학생들의 학병 지원 권고 강연차 도쿄(東京) 등지를 다녀왔으며, <고사통(故事通)> 등의 저서를 내기도 했다. 해방 이후 은거하면서 역사 서적 집필에 전심하다가 1949년 친일 반민족 행위자로 피소되어 수감되었다가 병보석되었다. 그는 근대사학에 대한 이해의 심도(深度)가 깊었고 한국 고전의 출판과 함께 계몽사학으로써 많은 역할을 했다. 그러나 그의 관심은 주로 문화운동에 그치고 있었는바, 이것은 민족의 독립과 역사학의 문제를 하나의 체계로 융합시키는 데 장애가 되었다. 또한 그의 한국사관은 지극히 관념적이요 종교적인 것으로서, 그러므로 이러한 신앙을 상실하였을 때 역사가로서 그에게 남은 것은 오직 박학(博學) 뿐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그의 <불함문화론>이 일제 관학자들의 만선사관(滿鮮史觀)과 일맥 상통한다는 점과도 관려하여 그를 일제에 협력케 하고 민족사학의 계열에서 이탈케 하였다.
불함문화론
[편집]不咸文化論
최남선의 논문. 한국의 문화사적 이해에 있어서 가장 두드러진 최남선의 업적으로서 '불함문화론'이라고 그가 주장하는 동북 아시아 문화권 속에서 한국문화를 고찰한 것이었다. <조선을 통하여 보는 동방문화의 연원과 단군을 계기로 인류문화의 일부면(一部面)>이란 부제목을 가진 이 논문은 한국문화의 기원을 찾아보려는 것이었다. 이렇게 넓은 배경 속에서 그가 탐구한 한국문화 중에서 가장 관심을 가졌던 것은 단군신화였다. 일본학자들이 단군신화를 말살하려고 한 것에 대한 그의 반박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문헌에 나타난 단군의 사실을 그대로 인정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민속학적인 면에서 고찰하려고 하였다. 단군신화를 한국민족의 원시적 신앙으로 이해하려고 한 것이다. 그리고 그 원시적 신앙은 한국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그가 '불함문화권'이라고 주장한 넓은 지역에 공통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믿었던 것이다.
조선상고사감
[편집]朝鮮上古史鑑
한국 고대사에 관한 저서. 독립운동가이며 정치가인 안재홍(安在鴻)의 사서(史書)로, 1947년 7월 상권이, 48년 하권이 민우사에서 간행되었다. 상권의 내용으로는 ① 기자조선고(箕子朝鮮考) ② 아사달(阿斯達)과 백악(白岳)·평양·부여변(夫餘辨) ③ 고구려건국사정고(高句麗建國事情考) ④ 고구려직관고(高句麗職官考) ⑤ 신라건국사정고 ⑥ 신라직관고략 ⑦ 삼한(三韓)과 그 법속고(法俗考) ⑧ 육가락국소고(六加羅國小考), 하권에는 ① 부여조선고 ② 밝·발·배 원칙과 그의 순환공식 ③ 고구려와 평양별고(平壤別考) ④ 백제사총고(百濟史總考) ⑤ 조선상대 지리문화고에 대한 글이 실려 있다. 연구 방법에 있어서 신채호(申采浩)나 정인보(鄭寅普)의 연구영역과 발상에서 출발하면서도 그들이 가지고 있는
민족주의 사학의 한계성을 지적, 극복하려는 점에서 독자성을 지닌다. 또한 언어학적 방법과 근대 사회과학 방법을 연구에 응용하였고, 고대사 연구에 사회발전 단계설에 도입하여 단군조선에서 삼국시대로 발전해 가는 것을 규명하였다.
정인보
[편집]鄭寅普 (1892∼ ? )
사학자·항일 우국지사. 자는 경업(經業), 호는 위당(爲堂), 유가의 명문에서 태어나서 이건방(李建芳)의 문하에서 경학과 양명학을 수학했다. 1910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그곳에서 유가학풍을 연마하면서 신규식(申圭植)·박은식(朴殷植)·김규식(金奎植)·신채호(申采浩) 등과 <동제사(同濟社)>를 조직, 광복운동과 계몽운동에 진력하였다. 1918년 귀국한 후에는 주로 연전(延專)에서 조선문학과 한학(漢學)을 강의하였고, 역사학에 접근하게 되었다. 그의 역사학에의 관심은 자료 정리측면으로 나타났고, 조선후기의 실학자, 양명학자, 그 밖의 학파의 저술을 해제(解題)하고 그 학통을 밟혔으며, 또 그 출판에 임해서는 이를 교열하기도 하였다. 그중에서도 특히 심혈을 기울여 정리한 것은 실학자 특히 성호(星湖)와 다산(茶山)의 저술이었다. 그가 역사연구에 몰두하게 되는 것은 1930년대의 일이며, 그 직접적인 동기는 일제 관학자들에 의한 우리 역사의 왜곡이었고, 이를 시정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리하여 그의 본격적인 역사연구가 시작되고 그것은 <5천년간 조선의 얼>이란 표제로 동아일보에 연재되기에 이르렀는 데 이것은 후에 <조선사연구>로 간행되었다. 그의 역사학에서 가장 정채를 발하는 부분은 그 정신사적인 역사관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역사연구는 단재사학(丹齋史學)에서 계발되고 그것을 계승하면서 행하여졌으며 그 해박한 한학의 지식과 광범한 사료의 섭렵은 단재사학의 고대사의 전개를 보다 더 완벽하게 체계화했으며 그와 아울러 단재사학의 사론(史論)의 일부를 더 충실한 이론으로 완성시키고 있다. 그리하여 그는 민족사학의 역사의식의 특징을 단적으로 표현해 주는 <얼>의 사관(史觀)을 보여 주었다.
조선사연구
[편집]朝鮮史硏究
정인보가 지은 역사책. 1946∼7년에 간행되었으며, 상·하 2권으로 되어 있다. 그가 이 책을 저술하게 된 직접적인 동기는 일제에 의한 한국사의 왜곡이었고, 우리 역사학자들이 줏대없이 역사를 연구하여 일제의 식민지 문화정책에 동조하고 있음을 개탄한 데서이다. 이 책은 식민정책의 가열로 인해서 처음 계획과는 달리 고조선에서 삼국시대에 이르는 역사과정을 서술하는 것으로 그쳤으나, 이 시기의 전 역사를 민족사라고 주체적인 입장에서 체계화하였다는 점에서 큰 성과였다.
안재홍
[편집]安在鴻 1891∼1965)
항일 독립투사·사학자·정치가. 호는 민세(民世). 1914년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정경과를 졸업하고, 졸업 후에는 중국으로 망명하여 신채호·정인보가 참여하고 있었던 동제사에 가입하여 독립운동을 하였다. 귀국 후에도 교육기관이나 언론기관에서 애국의 문필을 쉬지 않았고, 때로는 3·1운동, 신간회(新幹會)·임시정부와의 관계, <조선어학회>를 통한 독립운동 등으로 일제의 감옥에 거듭 투옥되었다. 그러한 공로로 해방 후에는 민정장관(民政長官)이 되기도 하고 이어서 정계의 중심 인물이 되기도 하였다. 그는 또한 신채호의 영향을 받아 역사 연구에도 몰두하였는 바 그의 역사연구는 그것이 곧 독립투쟁의 한 방법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1930년대의 10년간을 두고 우리나라 고대사 연구에 몰두하여 드디어 <조선상고사감 상·하>를 내었다. 그의 역사 서술의 태도나 사풍(史風)은 신채호·정인보 등과 기본적으로는 같은 것이었고 연구영역도 그들과 같았다. 그리하여 그는 이들의 발상(發想)에서 출발하여 고대사의 체계를 더욱 심화시키고 확고하게 했다. 그의 역사 인식은 우리의 전통적 역사학의 기반 위에서 민족사의 주체적인 인식과 그 체계화를 구상한 것이었다. 그의 고대사 연구에는 그의 저서에서 나타나는 바와 같이 여러 가지 탁월성이 엿보인다. 그는 또한 역사학의 방법론에 있어서 일단의 진보를 보였을 뿐만 아니라 사회발전이라는 보다더 본질적인 문제를 염두에 두었는데, 이는 단재의 사론이 제시한 사회적 모순의 문제를 확대 발전시켰음을 의미한다. 그는 당시 사회과학도에 의해서 개척되고 있던 사회경제사학의 성과를 비판적으로 섭취했다.
문일평
[편집]文一平 (1888∼1939)
언론인·사학자 호는 호암(湖岩). 1905년 일본 유학을 하고 돌아와 교편을 잡고 있다가 1911년 다시 도일하여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에서 정치학을 전공하였다. 그러나 학업을 중단한 채 중국으로 망명하여 그곳 중국인 신문사에서 일을 하였다. 이 즈음 일본에서는 안재홍이 역시 정치를 공부하고 있어서 사귈 수 있었고, 중국에서는 박은식·신채호·정인보 등의 역사가나 김규식·조소앙(趙素昻)·신규식·홍명희 등의 독립운동자들이 있어서 동지가 되었다. 귀국 후에는 민족사학의 여러 인사들과 더욱 깊은 유대를 맺는 가운데 중동·중앙·배재·송도 등의 학교에서 교편을 잡기도 하고, 30년 대에는 조선일보에서 역사연구와 민중계몽에 전념하였다. 그의 연구물은 대개 이때 지상을 통해서 발표되었고, <호암전집(湖岩全集)>으로서 집대성되었다. 그의 역사연구는 민족사학의 역사인식의 입장에서 행해졌으며, 민족사학의 우리 역사 체계화를 위한 사업의 일환으로서 수행되었다. 그의 역사의식이나 역사학은 신채호의 그것에서 출발하고 단재사학이 제시한 문제의 일단을 구체적인 작업으로서 개척한 것이었다. 그의 역사연구의 기본 목표는 대외관계에 있어서의 우리의 처지, 사회내부의 모순관계를 반역아를 통해서 찾아봄으로써 사회 발전의 계기를 찾으려 한 것, 아(我)의 생장 발달 상태를 사상·문화·예술·풍속 속에서 찾고 거기에서 민족문화 또는 민족정신을 소생시키려 한 세 가지 점에 압축되고 있다.
호암전집
[편집]湖岩全集
문일평의 유고(遺稿)를 수집 정리한 책. 권1은 정치 외교사편으로, 한미관계(韓美關係) 50년사, 한말외교, 서세동점의 선구, 조선인과 국제안(眼), 사상(史上)의 경오년(庚午年)·정묘호란·병자호란을 통해 본 조선, 중요성을 띤 이조사의 3정축(丁丑), 한양조의 정치가 군상, 만주와 조선인, 사상의 기인(奇人), 권2는 문화 풍속편으로, 사안(史眼)으로 본 조선, 조선 문화의 대한 일 고찰, 세계문화사 선구, 문화적 발굴, 이조 문화의 별 페이지, 사상에 나타난 예술의 성직, 예술과 로맨스, 근대 명승소열전(名僧小列傳), 조선 화가지, 전쟁문학, 정음소사(正音小史), 서의(西醫) 수입 50년, 조선 여성의 사회적 지위, 차고사(茶故事), 담배고, 세시고, 권3은 수필 및 기행편으로, 사외이문(史外異聞), 동해유기(東海遊記), 만추등척(晩秋登陟), 조선의 명폭(名瀑), 근교 산악사화 등의 내용이다.
손진태
[편집]孫晋泰 (1900∼ ? )
사학자. 호는 남창(南滄). 1927년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사학과를 졸업하고 1933년 연전(延專)에서 교편을 잡았고, 중·일전쟁이 발발한 뒤에는 보전(普專)의 초대 도서관장으로 자리를 옮기고 연전에는 2차대전까지 강사로 있으면서 우리 민족의 문화사적인 연구에 몰두하였다. 이 때에 민족사학의 여러 학자들이나 사회경제사학의 인사들과 밀접한 관련을 맺었고, 특히 안재홍의 역사학에 대하여 각별한 관심을 가졌다. 그는 또한 이 시기의 실증주의 역사학의 인사들과도 긴밀한 관계에 있었지만, 민족사학의 역사이론 즉 민족사관에 의거하여 그 역사학을 새로운 각도에서 종합 정리하여 하나의 새로운 체계로서 그 대계를 세우게 되었다. 그는 이른바 신민족주의 이론에 의해 우리 역사를 체계화했으니 <조선민족사개론>(1948)이나 <국사대요(國史大要)>(1949)가 그것이었다. 그의 식민족주의이론은 안재홍의 그것과 기본적으로 같은 것으로서, 전통사회의 민족주의의 본질이 민족 내부에 차별을 내포하고, 자본주의사회에 있어서의 그것은 자본가의 권익을 옹효하기에 쇄국적·배타적·독선적임을 벗어나기 어려운데, 이러한 민족주의는 민족사가 세계사의 일환으로 편입되고 민족이 세계 속에서 호흡하게 된 현재의 국제사회에서는 유지될 수 없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세계 제(諸)민족에 대하여는 개방적이요 세계적이며, 국내의 제사회계층에 대하여는 정치·경제·사회·문화에 있어서 평등적이고 친화적인 것을 전제로 하는 것으로서, 그는 이것을 '민주주의적 민족주의 곧 신민족주의'라는 말로 표현하였다. 그가 도달한 민족사의 이론은 대내적으로는 민족을 구성하는 전사회 계급의 모순관계와 의식의 문제를 사회발전의 체계 속에서 인식하고, 대외적으로는 우리 민족의 타민족에 대한 투쟁과 문화교류를 통한 민족문화의 성장을 대내문제로서의 사회발전의 논리와 연결시켜 이를 전민족의 성장 발전 속에서 전개하려는 것이었다.
진단학회
[편집]震檀學會
1934년에 조직된 역사 연구회. 개척기 한국사학의 노대가(老大家)들이 총동원되어 이룩한 이 학회는 일본 학자에 의하여 연구되던 한국의 역사·언어·문학 등을 한국 학자의 힘으로 연구, 이를 한글로 발표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설치되었다. 같은 해 11월에 <진단학보>를 창간하여 기관지로 하였다. 이 학파에서는
사실을 사실대로만 파악하는 역사서술을 민족적 의무와 사명감에서 정열적으로 행했다. 그 연구의 분야는 고대사에서 현대사에까지 이르고 고고학·민속학 등을 포함하는 폭넓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 중에서 특히 활발히 연구된 것은 경제문제를 주로 하는 고대사 부분으로, 이러한 문제에 관하여는 일본인들과의 사이에 논전도 벌였다. 그러나 이 학파에서는 일본인들과 근본적으로 다른 역사관이나 민족사의 체계, 그리고 그것을 따로이 추구하는 방법을 가진 것이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은 일제 학자들이 세운 체계 위에서 그리고 그들이 제기하는 문제의 방향에서 논의를 전개하게 되었기 때문에 한국사에 대한 인식과정은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간에 일인들의 정치성에 좌우되고 있었다. 이 회의 발기인 및 초대 위원은 다음과 같다. 발기인-고유섭(高裕燮)·김두헌(金斗憲)·김상기(金庠基)·김윤경(金允經)·김태준(金台俊)·김효정(金孝井)·이병기(李秉岐)·이병도(李丙燾)·이상백(李相伯)·이선근(李瑄根)·이윤재(李允宰)·이은상(李殷相)·이재욱(李在郁)·이희승(李熙昇)·문일평(文一平)·박문규(朴文圭)·신석호(申奭鎬)·조윤제(趙潤濟)·최현배(崔鉉培)·홍순혁(洪淳赫), 위원-김태준·이병도·이윤재·이희승·손진태·조윤제 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