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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동양사상/한국의 사상/한국의 현대사상/한국의 현대 종교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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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현대 종교사상〔槪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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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36년간에 크고 작은 민족적 종교집단이 많이 생겼으나 총독부의 탄압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일본의 교파·신도(神道)나 민속 종교가 이식되기 시작했으며 민족종교의 부흥을 위해서는 1945년 해방을 기다려야 했다. 동학사상을 종지(宗旨)로 한 천도교는 1920년대에 이돈화(李敦化)가 신인사상(新人思想)을 제창했다. 이 사상은 사람 성(性)의 무궁함과 반항도덕(反抗道德)을 기조로 정신개벽(精神開闢)하여 신인(新人)을 창조한다는 것이었다. 신인사상이 천도교에서 고취되던 때를 같이하여 정도사상(正道思想)이 통천교(統天敎)에서 창도되었다. 이 교의 창립자인 양기탁(梁起鐸)은 당시(1920년대) 동학이 천도교에 의속(依屬)하고 사회 각층이 예수교에 진사(盡師)하는 것을 보고 흐트러진 민심을 연합하고자 하여 교(敎)를 세웠다. 그 종지(宗旨)에 따르면 천지는 만물의 종(宗)이고, 인물(人物)은 만물의 영(靈)이라고 한다. 인심(人心)이 사물(事物)에 옮겨지면 우인(愚人)이 되고 범인(凡人)이 되는 데, 천(天)과 합(合)하면 성인(聖人)이 되고 철인(哲人)이 된다는 것이다. 통천교는 천도교(天道敎)·시천교(侍天敎)·청림교(淸林敎)·태을교(太乙敎)·제세교(濟世敎)·경천교(敬天敎)의 여섯 종교를 통일하여 진정한 대(大)종교를 수립하여 개교(開敎)되었던 것이다. 이 사상에 호응하였던 사람들은 상류층에 많았다. 통천교와 같이 여러 종교를 하나로 묶으려는 사상은 지귀사상(指歸思想)으로서, 당시 여러 신종교에서 제창되었다. 선교(仙敎)가 영(靈)의 묘(妙)를, 불교가 영의 광(光)을, 유교가 영의 명(明)을 각(覺)하게 하는 종교인데, 인간의 영화(靈化)를 지향하고 인간의 본성에 되돌아가는 데서는 하나라는 것이다. 청림교에서 말하는 유·불·선의 대도(大道)에로의 지향이라든지 수운교(水雲敎)에서 말하는 3단통일신단(三段統一神壇) 등은 모두 지귀사상에 통하는 신앙이고 그 종교들은 이 시기에 일어난 신종교들이다. 근대에서 현대에 이른 모든 민족적 신종교는 기독교(基督敎)를 배척하고 지귀사상에 입각했었다. 불교는 구법(求法)보다 순례(巡禮)에, 무명(無明)에서의 각오(覺悟)보다 의타신앙(依他信仰)에 치우쳤다. 선(禪)의 명상(瞑想)·오득(悟得)보다는 염불(念佛)이 사찰에서 중심이 되었다. 이것은 정토적(淨土的) 구제(救濟)사상을 말하는 것이라 하겠다. 그 구제관에는 사회정세를 말법(末法:終末) 적으로 보는 외포관념(畏怖觀念)이 뒤따르고 있었다. 이 당시 불교신도는 어떤 종(宗)의 교리신앙에 구애받지 않고, 타인신앙에 의지했었다. 한편 개신교는 일제하 초기에 전도단(傳道團)운동을 벌이고 부흥회(復興會)를 열어서 신도 확보에 노력했는데 부흥회는 어디까지나 아메리카의 근본주의(根本主義) 사상에 입각하면서 이스라엘 민족의 수난과 구출 고사(故事)를 인용하여 신자들의 최후 승리를 민중들에게 예언했다. 그러나 이 초기에 선교사의 우월감이나 그들의 교권 악이용에 대한 반감과 교회 지도자들의 형식적 교회 건설이란 운동으로 번져갔다. 그 결과 한국인들의 손으로써 건설된 교파가 생겼다(예:조선 기독교 복음교회) 일제후기에 와서 한일동조론(韓日同祖論)과 신사참배(神社參拜)와 한국 기독교의 일본 기독교화란 길을 개신교는 걷게 되었다. 한일동조론을 일본 기독교는 조합교회(組合敎會)를 통해서 한국 교회에 펼쳐서, 1911년 105인 사건을 일으켰고 3·1운동 후에 대두된 민족정신을 말살코자 했으나 실패했다. 신사참배는 신사의 벽사기양(闢邪祈禳)의 제사의례(祭祀儀禮)의 일종이란 단정하에 장로교(長老敎)에 의해서 거절되었으나 카톨릭 교회와 감리교(監理敎)에게는 받아들여졌다. 일제 말기에 한국의 모든 교회는 일본 기독교 산하에 있게 되었는데 불교도 일본 불교의 일부로서 행세하게 됐다. 청교도주의나 근본주의적 사상에 뒤따라 기독교 전교(傳敎) 후 50년이 되는 희년(禧年:1934)부터 자유주의 신학사상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 사상은 앞의 두 사상을 근본적으로 배척하는 신학이다. 자유 신학은 종래의 신앙과 대립하였으나 조술(祖述)에 그쳤을 뿐 널리 파급되지 못했고 독일 변증법적 신학은 몇몇 신학자 외에 알려지지도 않았다. 생각하건대 개신교는 이 나라에 전래된 이후 줄곧 문화운동과 내적으로 결합되어 포교되었던, 아메리카의 학술·사상·문학·예술·의료·도덕·사회·경제적 생활과 결합해서 성장해 왔다. 그런데 그 기독교 사상은 한민족의 주체의식을 자각할 때 생긴 배타적 사상이 신도 간에서도 대두되었을 때 그들의 반감에 부딪치게 되었고, 국민이 구미(歐美) 문화 사상을 섭취하여 독자적 문화를 개척하려고 했을 때 비판을 면치 못했다. 또 기독교는 그것이 민족운동을 지지했을 때 일정(日政)의 문화정책에 다른 제약과 통제하에 있게 됨으로써 국민의 정신에서부터 사라져 가기도 했다. 1945년 해방과 군정치하(軍政治下)에 일제의 굴레에서 벗어난 그리스도교는 교회재건과 구령운동(救靈運動)을 시작했다. 1960년대엔 종전에 보지 못했던 신신학(新神學)이라 불리는 사상이 대두되었다. 신학을 이론적으로 비판하고 해석학적으로 연구하는 경향이 생겼다. 그러나 일반신도는 종전과 다름없는 신앙에 고착(固着)했다. 한국학 연구의 대두와 함께 개신교에서 기독교의 토착화 문제가 일어났으나 아직 그 결말을 보지 못하고 있다. 또 카톨릭교의 바티칸 공의회(公議會)의 결과 에큐메니즘(一致主義)이 일어났을 뿐 뚜렷한 결과를 보지 못하고 있다. 아메리카의 소(小)교파들이 전래되고 기성 교회에 대한 불만에서 분립된 기독교 신종교로 인해서 카리스마적 신앙 풍조가 교계(敎界)나 일반신도 사이에서 일어났다. 카리스마는 규제나 전통 일반을 깨뜨리고 현존하는 일체의 신성관념(神聖觀念)을 박멸한다. 카리스마는 보내어진 사람, 선택되고 소명(召命)을 받은 사람이고, 효험과 험력(驗力)에 의해서 소명의 사명에 복종하고 귀의할 것을 사람들에게 요구한다. 카르스마는 신적인 것, 심상치 않은 것으로 생각되는 것에 대한 민중들의 열광적인 귀의신앙(歸依信仰)에서 생긴다. 일종의 권위주의이기도 한다. 이와 같은 카리스마 사상은 종교계 일반에 내재되어 있다. 그리스도교의 사제직자(司祭職者)나 신종교(新宗敎)의 교조(敎祖)들은 대체로 카리스마적 위치에 있고 신도들은 그런 존재자(存在者)에 대해서 계시신앙(啓示信仰)과 영웅신앙(英雄信仰)을 피력한다. 카리스마적 교조나 성직자는 자신들의 권위가 신으로부터 계시되어 계승되었다고 생각하고, 또 신도들로부터 그렇게 신앙된다. 이렇게 믿을 때 그들은 영웅이 되는 것이다. 카리스마적 영웅은 특수한 힘의 소유자이고, 그 힘에 의해서 신도들의 소원을 성취시킬 수 있는 능력자이고, 신자들은 자신에 귀의시키는 지배자이다. 이런 카리스마적 권위주의는 민족신앙 특히 샤머니즘 속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 무당의 몰아적(沒我的)인 행동이나 묵시적(默示的) 표징(表徵)과 기적은 교조나 기성 종교의 성직자들에 의해서도 발현되고 있는데, 그 표징이나 기적 행위는 사람들로 하여금 무당을 신인(神人)으로 믿게 한다. 카리스마 신앙은 교조를 <감람나무>라 하거나 신의 계시자로 믿게 한다. 성령강림(聖靈降臨)으로써 성령에 충만한 자가 되어 보통인이 할 수 없는 초인적인 능력을 행한다는 사상은 오늘날 종교집단의 상위에 있는 사람뿐만 아니라 일반신도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으며 집단을 유지하는 힘이 되고 있다. 이상과 같은 집단화한 종교적 사상 외에 토속적(土俗的)인 신앙이 국민 일반에 깔려 있기도 하다. 그것은 대체로 샤머니즘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이것은 산 하나님으로서 지상(地上)인간과 접촉한다는 생각에 기반을 두고 있다. 신의 인간화(人間化) 또는 특수한 인간의 신화(神化)란 사상이다. 외래의 종교는 사회의 식자층(識者層)에서는 그 전통적인 원리적(原理的) 사상이 유지되고 있으나 무식층에서는 토속신앙에 영합되어 원리적 사상과는 다른 형태의 신앙으로 변화된다. 한편 사회의 전환기 때마다 민족적인 신종교는 발생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나, 사상적으로는 늘 심층(深層)에 깔려 있는 민족의 사상구조를 토대로 하고 있으며 표층(表層)에서만 신용어(新用語)를 사용한다.

나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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羅喆 (1863-1916)

대종교의 초대교주·독립운동가. 본관은 금성(錦城). 본명은 인영(寅永), 호는 홍암(弘巖). 전라남도 보성 출신. 29세 때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승정원가주서(承政院假注書)와 승문원권지부정자(承文院權知副正字)를 역임하였다. 일본의 침략이 심해지자, 관직을 사임하고 호남출신의 지사(志士)들을 모아 1904년 유신회(維新會)라는 비밀단체를 조직하여 국군운동을 하였다. 을사조약체결 직전인 1905년 6월 오기호(吳基鎬)·이기(李沂)·홍필주(洪弼周) 등과 함께 일본에 건너가 "동양평화를 위하여 한·일·청 삼국은 상호 친선동맹을 맺고 한국에 대하여는 선린의 교의로써 부조(扶助)하라" 는 의견서를 일본의 정객등에게 제시하였으나 응답이 없자 일본의 궁성 앞에서 3일간 단식투쟁하였다. 그러던 중 이토(伊藤博文)가 조선과 새로운 협약을 체결한다는 소식이 각 신문에 발표되자, 나라 안에 있는 매국노들은 모두 제거해야 국정을 바로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단도(短刀) 두 자루를 사서 품에 넣고 귀국하였다. 1907년 1월부터 암살계획을 구체적으로 추진하여 3월 25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오적의 주살을 시도하였으나 서창보(徐彰補) 등이 붙잡히고 사건의 전모가 탄로되자, 동지들의 고문을 덜어주기 위해 오기호·최인식(崔寅植) 등과 함께 평리원(平理院)에 자수하여 10년의 유배형을 받고 무안군 지도(智島)에 유배되었다가 고종의 특사로 그해에 풀려났다.

1908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외교적인 통로에 의한 구국운동을 계속하였으나 소득없이 귀국하였다. 귀국하자마자 오기호·강우(姜友)·유근(柳瑾)·정훈모(鄭薰模)·이기·김인식·박호암(朴湖巖)·김춘식(金春植) 등의 동지들과 함께 서울 재동에서 '단군대황조신위(檀君大皇祖神位)'를 모시고 제천의식을 거행한 뒤 단군교를 공표하였다. 이 날이 바로 중광절(重光節)이라고 불리는 날이다. 곧 교직을 설치하고, 초대교주인 도사교(都司敎)에 취임하여 오대종지를 공포하였다. 또한 단군의 개국과 입도(立道)를 구분하여 서기전 2333년에 124년을 가산하여 '천신강세기원(天神降世紀元)'이라 하고 단군교의 원년으로 발표하였다. 1910년 8월에는 단군교의 이름을 빙자한 친일분자들의 행각으로 인해, 원래의 명칭으로 환원한다는 의미와 함께 대종교의신관(神觀)을 삼신일체의 원리로 설명한 <신리대전(神理大全)>을 발간하는 한편, 강화도 마니산 제천단(祭天檀)과 평양의 숭령전(崇靈殿)을 순방하고 만주 화룡현 청파호(靑波湖)에 교당과 지사(支司)를 설치하였다.

교세의 급속한 확장에 당황한 일제는 1915년 종교통제안(宗敎統制案)을 공포하고 대종교를 불법화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교단이 존폐의 위기에 봉착하자 1916년 음력 8월, 상교(尙敎) 김두봉(金枓奉)을 비롯한 시봉자(侍奉者) 6명을 대동하고 구월산 삼성사에 들어가 수행을 시작하였다. 8월 14일, 사당 앞 언덕에 올라 북으로는 백두산과

남으로는 선조의 묘소를 향해 참배한 뒤 "오늘 3시부터 3일 동안 단식 수도하니 누구라도 문을 열지 말라"고 문 앞에 써 붙인 뒤 수도에 들어갔다. 16일 새벽에 이상스럽게 인기척이 없어 제자들이 문을 뜯고 들어가니 그는 자신의 죽음의 이유를 밝힌 유서를 남기고 조식법(調息法)으로 이미 숨을 거둔 뒤였다. 그의 유언에 의하여 청파호에 유해를 안장하였으며 그 이후에 대종교에서는 그가 운명한 날을 가경절(嘉慶節)이라 하여 4대절(四大節)의 하나로 기념하고 있다. 1962년에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이돈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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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敦化 (1884∼ ? )

천도교의 이론가. 호는 야뢰(夜雷), 호는 두암(豆庵), 함경도 고원(高原) 출신. 한학을 공부하고, 1902년에 천도교에 입교, 천도교 월보사를 거쳐 1920년에 <개벽(開闢)>(월간)지를 창간, 스스로 편집인이 되어 민족자주의 사상논설과 천도교 교리의 철학적 해의(解義)를 계속 발표하여 천도교의 교리 근대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의 종교철학을 '신인철학(新人哲學)'이라고 하는 바 최제우·최시형의 인내천(人乃天)사상에 근거하고 서양사상을 소화하여 독특한 이론을 형성하였다. 그의 저서에는 <인내천요의(人乃天要義)> <수운심법강의(水雲心法講義)> <신인철학(新人哲學)> <천도교창건사(天道敎創建史)> <동학지인생관(東學之人生觀)> 등이 있다.

천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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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道敎

동학을 바탕으로 발전한 민족 종교. 동학농민운동이 진압되고 동학의 제2대 교주인 최시형(崔時亨)이 1898년 순교한 뒤, 제3대 교주가 된 손병희(孫秉熙)는 교정일치론(敎政一致論)을 강조하며 조직의 재정비와 여러 가지 개혁적인 시도를 감행하였다. 그러나 그는 관헌의 추적으로 1901년 도일(渡日)하였고, 그해 9월 잠시 귀국하였다가 1902년 다시 일본을 거쳐 미국에 가고자 했으나 일제의 방해로 일본에 머무르게 되었다. 이때 일본에 망명중이던 개화파 지식인들과 교유하며 새로운 인식을 얻는 한편, 국내와의 연락을 통해 교인들을 규합하여 동학을 재정비하였다. 그러나 손병희의 일본 체류가 결과적으로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동학교도들의 민족적 저항력을 약화시키게 되어, 동학교도들이 기존 정치체제의 개혁세력으로 참여하기 위해 1904년 9월부터 전국적으로 조직하였던 진보회가 친일단체화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손병희는 정교(政敎) 분리의 원칙을 내걸고 종교로서의 동학을 고수하고자 1905년 2월 1일 교명을 천도교로 개칭하였다. 1906년 귀국하여 교회를 재조직하기 시작하였으며, '천도교대헌'를 반포하고 새로운 교단조직을 확립하였다. 서울에 중앙총본부를 두어 대도주(大道主)가 관할하게 하였고, 지방을 72개 대교구로 분할하여 교령(敎領)이 담당하도록 하였다. 또한 정당활동을 금지하고, 교리·교체(敎體)·교제(敎制)·오의(五儀;呪文·淸文·侍日·誠米·祈禱)를 제정하였으며, 다수의교서를 발간하여 동학 이래의 사상체계를 확립하였다. 새로운 교리와 체제가 확립되자 10년부터 포교활동과 함께 출판·교육 등의 문화운동을 전개하여 교세가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되었고, 그 결과 3·1운동에서 천도교가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많은 교도들이 옥고를 치르고 일제의 탄압을 받았으나, 19년 9월 천도교 청년교리강연부를 설립하고 이듬해 이를 천도교청년회로 개편하여 전국지부를 결성하는 등 지속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20년에 종합잡지 <개벽>을 비롯하여 <신여성> <학생> <어린이> 등의 월간잡지를 간행하였는데, 특히 <개벽>은 일제탄압으로 1926년 통권 72호로 폐간될 때까지 천도교 교리를 통해 민중의 주체적 자각과 근대문물 섭취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1923년 천도교청년회를 개편하여 천도교청년당을 세우고 학술연구부를 두어 <자수대학강의(自修大學講義)>를 발행함으로써 한국청년의 지적 향상을 도모하였다. 한편 1921년에 교회의 중앙전제(中央專制) 가 지방대의제로 개정도고 교주제가 중의제(衆議制)로 변경되었는데, 이듬해 손병희가 죽자 이러한 신파는 천도교연합회를 결성하고 구파와 대립하였다. 또한 박인호(朴寅鎬)의 제4대교주 인정문제를 둘러싸고 이를 인정하는 교인대회파와 부정하는 중앙종리원파 및 통일기성회파가 대립하였고, 1926년 교인대화파와 통일기성회파가 타협하여 중앙종리원을 만들면서 신구 중앙 종리원이 공존하였다. 이듬해 구파 종리원에서 교인대회파가 다시 분리되었다. 1931년 신파측의 천도교청년당과 구파측의 천도교청년동맹이 합쳐 천도교청우당을 발족하였고 이후 교회조직이 강화되었다. 그러나 34년 독립만세운동을 벌이려다 230명이 검거된 천도교오심당사건이 일어났고, 1937년 천도교청우당이 해체당하는 등 일제의 탄압을 받았다. 8·15 후 남·북지역 교도간의 연락이 어려워졌고 1948년에 남한에서는 신구파가 합쳐졌으나 북한의 교회활동은 위축되었다. 남한에서는 1953년 서울 수복 후 중앙총부를 서울로 이전하였고, 1961년 최시형·손병희의 법설이 포함된 <천도교경전>이 간행되었으며 1972년 천도교의 중심역할을 하는 수운회관(水雲會館)이 준공되었다.

손병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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孫秉熙 (1862-1922)

한말 천도교의 지도자, 독립운동가. 호 의암(義菴). 초명 응구(應九). 후명 규동(奎東). 충북 청주(淸州) 출생. 1882년 22세 때 동학에 입교, 2년 후 교주 최시형(崔時亨)을 만나 수제자로서 연성수도(鍊性修道)하였다. 94년 동학농민운동 때 통령(統領)으로서 북접(北接)의 농민군을 이끌고 남접(南接)의 전봉준(全琫準)과 논산에서 합세, 호남·호서를 석권하고 북상하여 관군을 격파했으나, 일본군의 개입으로 실패하고 원산·강계 등지로 피신하였다. 1997년부터 최시형의 뒤를 이어 3년 동안 지하에서 교세 확장에 힘쓰다가 1901년 일본을 경유, 상하이로 망명하여 이상헌(李祥憲)이라는 가명을 사용하였다.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오세창(吳世昌)·박영효(朴永孝) 등을 만나 국내사정을 듣고 1903년에 귀국, 두 차례에 걸쳐 청년들을 선발하여 일본으로 데리고 건너가 유학시켰다. 1904년 권동진(權東鎭)·오세창 등과 개혁운동을 목표로 진보회(進步會)를 조직한 후 이용구(李容九)를 파견하여 국내 조직에 착수, 경향 각지에 회원 16만 명을 확보하고 전회원에게 단발령(斷髮令)을 내리는 등 신생활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듬해 이용구가 배신하여 친일단체인 유신회(維新會)와 합하여 일진회(一進會)를 만들고 을사조약에 찬동하는 성명을 내자, 즉시 귀국하여 일진회와는 관계가 없음을 밝히고 이용구 등 친일분자 26명을 출교(黜敎)시켰다. 1906년 동학을 천도교(天道敎)로 개칭하고 제3세 교주에 취임, 교세 확장운동을 벌이는 한편, 출판사 보성사(普成社)를 창립하고 보성(普成)·동덕(同德) 등의 학교를 인수하여 교육·문화사업에 힘썼다. 1908년 교주 자리를 박인호(朴寅鎬)에게 인계하고 우이동에 은거, 수도에 힘쓰다가 1919년 민족대표 33인의 대표로 3·1운동을 주도하고 경찰에 체포되어 3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이듬해 10월 병보석으로 출감 치료중 별장 상춘원(常春園)에서 사망했다. 1962년 건국공로훈장 중장이 추서되었다.

신인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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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人哲學

1920년대부터 나타난 천도교 이론가 이돈화의 종교철학. 이 사상은 인성무궁(人性無窮)과 반항도덕(反抗道德)을 기조로 정신개벽(精神開闢)하여 새사람 곧 신인(新人)을 창조한다는 것이다. 정신개벽은 사상개조이고 반항도덕은 신지식(新知識)·신도덕(新道德)인데 이것은 구습(舊習)에 반항함으로써 생긴다는 것이다. 반항도덕은 기성의 윤리나 정제(政制) 앞에서 그 의지를 알고 그 불연(不然)함에 온 감정과 의지를 다하여 반항하는 것이다. 최제우는 경신(庚申) 4월 5일에 정신개벽의 표어를 세우고 자신을 후천세계(後天世界)의 시조라 하여 정신개벽자로 신앙하고 새 이상과 새 주의(主義) 아래에서 새 혼(魂)을 가지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돈화는 그의 개벽사상을 세 가지로 나눈다. 즉 최제우의 '보국안민(輔國安民)·포덕천하(布德天下)·광제창생(廣濟蒼生)'이란 사상 중 보국은 민족개벽(民族開闢)이고, 안민은 사회개벽(社會開闢)이고, 포덕천하 광제창생이 지상천국(地上天國)이라고 보았다. 보국안민은 현실 문제이고, 지상천국은 이상에 속한 문제이다. 이를 합하면 현실이상주의가 된다는 것이다. 과거의 민족주의는 인류 사이에 차별과 배제를 두었다. 이로 인해서 인류사회에 압박이 생겼다. 인류는 평등해야 하고 개인에서도 상등(相等)해야 한다. 이 때에 인류평화는 생긴다. 이렇게 되려면 세계에 있는 민족은 정신개벽을 해야 된다. 이것이 보국이고 민족개벽이란 것이다. 이돈화는 또 수운주의(水雲主義)의 경제(經濟) 문제를 말하면서 인간이 진화한 최고단계를 인간격(人間格)으로 보고 이 인간격을 세계에 창조 실현하는 것이 인간의 최고 목적이고 최후의 이상이라 했다. 이에 반해서 오늘의 인간은 의식주(衣食住)를 위해 약육강식(弱肉强食)하고 있다. 최고의 인간격의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3전(戰)과 3경(敬)이 필요하다. 3전이란 언전(言戰)·재전(財戰)·도전(道戰)인데 각각 이론(理論)·경제(經濟)·도덕(道德)에 관한 반항(反抗)을 뜻한다. 3경은 경천(敬天)·경인(敬人)·경물(敬物)을 말한다. 경천은 우주의 대법성(大法性)에 경외지심(敬畏之心)을 가지는 것으로 이 현실아(現實我)에서 이상아(理想我)의 영역으로 사람을 옮겨 놓는다. 이것은 나 속에서 한울 즉 전적아(全的我)을 발견하는 것이고 무궁성(無窮性)의 실재(實在)를 인식하는 것이다. 이때 나는 생명의 개척자가 된다. 또 경천은 한 민족의 사상이나 인류 동포의 사상을 일신(一神)이라는 줄에 통일시킨다. 경인(敬人)은 수운(水雲)의 사인여천(事人如天)인데 신과 사람을 갈라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경천과 경인은 내적(內的) 행위와 외적(外的) 행위로서 하나이다. 각자위심(各自爲心)의 인간을 동귀일체(同歸一體)시키는 원동력인 것이다. 이 경인의 마음을 자연에까지 미치게 한 것이 경물(敬物)이다. 경물지심(敬物之心)은 일초일목(一草一木)까지도 이용하게 하여 참다운 경제인(經濟人)으로 개인·민족·인류를 인도한다.

정도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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正道思想

1920년대 양기탁(梁起鐸)이 창시한 통천교(統天敎)의 중심사상. 천지는 만물의 종(宗)이고 인물은 만물의 영(靈)이니, 인심이 만물에 옮겨지면 우인(愚人-凡人)이 되고, 천(天)과 합하면 성인·철인이 된다. 성범(聖凡)의 구별은 다만 여기에 있는 것이다. 성(聖)과 철(哲)에 달하는 것이 정도이고, 이 정도에 서기 위해 속(俗)됨을 성(聖)에 화(化)하여야 한다. 성에 화하지 못했으므로 개인간에 대립이 있고, 민족간에 분립이 있고, 종파(宗派)간에 삼립(森立)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곳곳에 변쟁설(辨爭說)이 상전(相傳)하여 분열이 가시지 않는다. 아(我) 동방에는 상고(上古)에 성신(聖神)이 설강(設降)한 때부터 도덕을 숭배하여 교화가 전성하였다. 그러나 그 후에 선(仙)·불(佛)·유(儒)·야(耶)가 들어와서 성대통일(聖代統一)의 미거(美擧)는 문란해졌다. 그런데 통천교는 정도(正道)를 내세우는데, 사람들이 천지와 하나가 되는 것이 정도이며, 이 정도에 원귀(圓歸)할 때 구고제액(救苦濟厄)의 세계는 열린다. 정치가 정도에 귀(歸)할 때 전쟁은 지식(止息)하고, 전쟁이 지식하면 승평무사(昇平無事)하고, 승평무사하면 정도대행(正道大行)한다. 정도대행하면 사람들이 자명(自命)해지고, 만방(萬邦)이 모두 안녕하다. 따라서 민족은 제각기 안락하게 되고 이렇게 되면 세계통일의 태강(太康)도 실현된다. 이 천령국(天靈國)의 실현을 위해 각자는 정도에 서기에 힘써 심리수양하고, 각 종교는 정도의 천리(天理)하에 통일되기에 영각(靈覺)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 사상에 입각하여 통천교는 당시의 신흥종교 6교파의 통일을 추진하였으나 성공하지는 못하였다.

불교의 민간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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佛敎-民間信仰

1920년대 이후에 민간에서 유행한 불교신앙의 사상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정토적 구제사상(淨土的 救濟思想)-현세를 예토(穢土)로 보는 현세 혐오감이 깊어져 서방정토 아미타불(阿彌陀佛)의 구제를 믿는 것으로, 타력신심(他力信心)이 생활에서 강조되었다. 그 타력신심은 불타의 법신(法身)보다 보·응신(報·應身)사상과 3세관통(三世貫通)하는 불사감로(不死甘露) 사상을 요구하게 되고, 이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대상은 보살과 문수(文殊:師利)이었다. 타력신심에서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불타는 불사(不死)의 체험자로서, 그리고 인생고(人生苦), 사회고(社會苦)의 속박으로부터 탈(脫)한 무애자유자재(無碍自由自在)한 해탈자로서 숭경(崇敬)의 대상자가 되었고, 현고(現苦)에서 구하는 보신(報身)이 되었다. 그러나 한편 불타는 법신(法身)으로서 창조자가 되기도 하였으나, 그 창조는 그리스도교와는 달리 단일회(單一回)의 창조가 아니고 무한히 창조를 되풀이하는 힘있는 영원불사불멸(永遠不死不滅)의 존재가 되었고, 일체중생의 본성(本性)이므로 인류가 존재하는 한 언제나 사람의 내외(內外)에 서서 선(善)에 대한 자각과 불사 자유에로 이끌어 주는 대비활동(大悲活動)을 하는 덕행자(德行者)가 되었으며, 무명(無明)에 덮여서 헤매고 괴로워하는 중생을 불쌍히 여겨서 수행하여 해탈하는 실천도(實踐道)를 가르친 사주(師主)가 되었다. 사주가 교시한 불도(佛道)를 행하고 법을 깨달으면 누구의 앞에도 실현(實現) 현성(現成)하는 아미타불(阿彌陀佛) 약사불(藥師佛)로서의 응신(應身)이기도 했다. 또 범부게(凡夫界)에 자진해서 마음대로 악취(惡趣)에도 모습을 나타내는 보살신이 되어 주기도 했다. 염불과 공양·숭경하는 민중에 응화(應化)하는 자수(自受)·타수(他受)의 용신(用身)이기도 했다. (2) 불타여래(佛陀如來)사상-나무아미타불은 무량수(無量壽)와 무량광(無量光)의 두 뜻을 나타내는 보신불적(報身佛的) 존재가 되었다. 전자는 불사감로(不死甘露), 후자는 번뇌의 암지(暗地)를 비춰주는 불지(佛智)이다. 이것이 불타여래(佛陀如來)사상이다. 서방정토(西方淨土) 아미타불이란 사상도 신도간에 유행되었다. 이것은 불(佛)의 편재(遍在)를 말하는 10방제불(十方諸佛)사상이다. (3) 염불신앙(念佛信仰)-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을 염송(念誦)하는 이는 반드시 왕생(救授)한다는 것이다. 즉 부처님의 명호(名號)를 부르고 기쁜 마음을 갖고 일념지심(一念之心)으로 불(佛)의 명에 좇으면 그 때 바로 왕생이 결정된다는 것이다. 이 염불신앙과 곁들여 부처님의 이름을 들으면 중생이 지은 네 가지 중죄(重罪)를 없애 준다는 문수보살의 신심도 민중의 마음을 사로 잡았다.

한용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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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龍雲 (1879∼1944)

운동가. 3·1운동 민족대표 33인의 1인. 승려·시인. 초명은 유천(裕天), 자는 정옥(貞玉), 계명(戒名)은 봉완(奉琓), 법명은 용운(龍雲), 법호는 만해(卍海). 충남 홍성 출신. 어려서 한학을 배우고 1896년 동학혁명에 참가. 혁명이 실패하자 오세암(五歲庵)에 입산, 불교로 개종하였다. 1905년 백담사(百潭寺)에 가 연곡(蓮谷) 화상에게 득도(得道), 불승이 되고 1908년 일본 여행중에 최린(崔麟) 등과 사귀고 돌아와 1909년 <불교유신론(佛敎維新論)>을 발표, 불교 개혁운동을 일으켰다. 합방 직후 만주에 망명, 독립군 양성에 힘쓰다가 1911년에 순천 송광사(松廣寺)에서 승려궐기대회를 열어 매국승(賣國僧)을 규탄, 한·일 불교의 동맹조약을 분쇄하였다. 계속해서 <불교대전(佛敎大典)>(1913) <채근담강의(菜根譚講義)> 등을 저술했고, <유심(唯心)>지 등을 간행하면서 대중불교운동에 진력하다가 1919년의 3·1운동 때 민족대표 1인으로 참가, <3·1독립선언문>중 '공약3장(公約三章)'을 기초하였고, 옥중에서 <조선독립의 서>를 작성, 일본 침략의 부당성을 논박하고, 한국독립의 정당성을 주장하였다. 석방 후 <철창철학(鐵窓哲學)> <6바라밀(六波羅密)> 등의 연재로 독립사상을 고취시키고, 중편소설 <죽음>을 탈고, 1925년에는 시집 <님의 침묵>을 출간했다. 1927년에는 신간회(新幹會) 운동에 참여하는 한편, 불교유신운동을 꾸준히 전개하여 1930년에는 <불교(佛敎)>지를 인수하고, 1937년에는 불교계의 독립운동 비밀결사인 '만당(卍黨)사건'에 관련, 시달림을 받았다. 그 밖에 장편소설 <흑풍(黑風)>(1935), 장편 <후회(後悔)>, 장편 <박명(薄明)> 등을 각 신문에 연재하였고, 대한불교청년회 총재, 신간회 경성지회장을 지냈다. 1944년 성북동 심우장(尋牛莊) 자택에서 별세, 1967년 서울 파고다공원에 용운당대선사비(龍雲堂大禪師碑)가 건립되었다. 그의 사상을 요약하면, (1) 불교계·문학계·독립운동 관계에 있어 일본화(日本化) 배척, 비협조, 민족정신고취 등을 제1의(第一義)로 삼았고, (2) 문학작품에 있어서는 불교의 대승보살(大乘菩薩) 정신과, 민중의 입장에선 민족주의·혁명노선을 결합하려 하였으며, (3) 불교유신운동에 있어 민족불교의 사수, 전근대적인 폐습타파, 대중불교의 실현, 선·교원수(禪敎圓修)의 전통계승, 마르크스주의의 반종교운동 비판 등을 근본목표로 하였고, (4) 독립운동·사회운동에 있어서 철저한 자유주의·비폭력 무저항주의·평화주의·민족자결주의, 진보적 혁명노선을 명백히 한 것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조선불교유신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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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佛敎維新論

1913년에 한용운(韓龍雲)이 저술 간행한 저서. 조선 왕조의 억불숭유(抑佛崇儒) 정책에 의한 배척과 탄압 속에서 사상적으로나 조직적으로나 산중으로 도피하여 약화된 불교부흥을 위하여 근대적인 불교 개혁론을 주장한 역저(力著)이다. 여기에서 그는 (1) 불교의 성질로서 불교가 진보적으로 미래의 도덕 문명의 원료품이 될 수 있음을 밝히고, (2) 불교의 주의로서 평등주의(平等主義)와 구세주의(救世主義)를 강조하고, (3) 구습파괴(舊習破壞)에 의한 혁명적 개혁으로 불교 유신을 정의하며, 그 방안으로 (1) 승려교육제의 개혁, (2) 염불당(念佛堂)의 폐지, (3) 포교방법의 근대화, (4) 대중적, 모험적, 구세적, 경쟁적, 사상의 고취, (5) 전근대적 불가소회(佛家塑繪)의 철폐, (6) 각종 의식의 개혁, (7) 승려 자신의 노동력에 의한 자활(自活)과 그것에 의한 인권회복, (8) 승려 금혼제(禁婚制)의 철폐, (9) 사원 주직(住職)의 선거제 채택, (10) 유신론자의 대동단결, (11) 사원통할제의 개혁 등을 기술하였다.

원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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圓佛敎

일원상(一圓相)의 진리를 최고종지(最高宗旨)로 모시고 일원상(○)을 신앙의 대상 및 수행의 모범으로 삼아 사은·사요(四恩四要)의 신앙문(信仰門)과 삼학·팔조(三學八條)의 수행문(修行門)을 믿고 닦음으로써 스스로 부처가 되어 이 지상에 일원의 낙원세계를 건설함을 목표로 삼는 한국의 새로운 생활불교.

원불교는 1916년(원기 1년) 4월 28일 교조인 소태산 대종사(大宗師;朴重杉)가 일원상의 진리를 대각(大覺)하여 창교한 종교이다. 대종사는 전라남도 영광군 백수면 길룡리에서 26세의 젊은 나이에 우주의 진리를 깨치고, '진리적 종교의 신앙'과 '사실적 도덕의 훈련'을 제창했다. 그리하여 그는 '파란고해(波瀾苦海)의 일체생명을 광대무량한 낙원으로 인도하기 위해서' 원불교를 개교했다. 원불교의 교명(敎名)에 대해서 대종사의 종통(宗統)을 이어받은 정산종사(鼎山宗師;宋奎)는 "원(圓;○)은 형이상(形而上)으로 말하면 언어와 명상(名相)이 끊어진 자리이므로 무엇으로도 이를

형용할 수 없으나, 형이하(形而下)로 말하면 우주만유가 이 원으로써 표현되어 있으니, 이는 곧 만법의 근원인 동시에 또한 만법의 실재(實在)이다. 그러므로 이 천지 안에 있는 모든 교법(敎法)이 비록 천만 가지로 말은 달리 하나 그 실에 있어서는 원 이외에는 다시 한 법도 없다"라고 밝혔고, "불(佛)은 곧 깨닫는다는 말씀이요, 또는 마음이라는 뜻이니, 원의 진리가 아무리 원만하여 만법을 다 포함하고 있다 할지라도 깨닫는 마음이 없으면 이는 다만 빈 이치임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원·불교(圓佛) 두 글자는 원래 둘이 아닌 진리로서 서로 떠나지 못하는 관계가 있다"고 그의 어록인 <정산종사법어(法語)>에서 말했다. 대종사는 <대종경(大宗經)> <서품(序品)>에서 "석가모니불은 진실로 성인들 중의 성인이다.… 나의 연원(淵源)을 부처님에게 정하노라.…불법으로 주체삼아 완전무결한 큰 회상(會上)을 이 세상에 건설하리라"하고 말했다. 그러나 외면상으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은 신앙의 대상을 상징함이 다르고, 교단(敎團)의 형성과정·운영방식·제도 등도 기성불교와는 다른 각도에서 조직된 교단이다. 사상적으로는 근본진리면세서 상통해 있다. 그러나 교리(敎理)의 분파적인 해석이 각각 다른 기성불교의 제도나 운영방식 등을 그대로 답습하지 않으려고 한 원불교의 일대 혁신적인 모습은 기성불교의 개혁을 넘어서서 현대종교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소태산 대종사가 제창한 혁신의 표준은 불교의 시대화·생활화·대중화이다. 시대화란 어느 시대에 처하든지 그 시대성을 저버리지 아니하고 잘 동화하면서 높은 차원(次元)으로 사람들을 지도해 나갈 수 있도록 짜인 교법이라는 뜻이요, 생활화란 직접 생활해 간다는 뜻이며, 대중화란 집단적 전체주의로 휘몰아가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다 보람을 찾을 수 있도록 교화(敎化)한다는 뜻이니, 서민화(庶民化)·시민화(市民化)와 같은 의미의 말이다.

대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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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倧敎

단군(檀君)숭배를 기초로 하는 민족종교. 근본 교리는 성(性)·명(命)·정(精)의 삼진귀일(三眞歸一)과 지(止)·조(調)·금(禁)의 3법이다. 대종교는 종교로 출발하였지만 그 시기가 바로 일제가 한국을 강점할 때였으므로 종교로서보다는 항일독립운동에 더 많은 공헌을 했다고 볼 수 있다. 교조 나철(羅喆:1863-1916)은 일본의 한국에 대한 간섭과 강박이 날로 심해지자 이를 항의하고자 3차에 걸쳐 도일(渡日)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귀국하여 구국운동이 몇 사람의 애국정객만으로는 이룩될 수 없음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여기에서는 그는 국가의 기틀을 튼튼히 하고 민족을 부흥시키는 원동력은 민족의식을

일깨우는 데 있다고 보고, 1909년 동지 오기호(吳基鎬) 등 10명과 함께 서울 종로구 재동에서 '단군대황조선위(檀君大皇祖神位)'를 모시고 <단군교포명서(檀君絞佈明書)>를 공포함으로써 고려시대 몽골의 침략 이후 700년간 단절되었던 국조 단군을 숭앙하는 단군교를 창시하였다. 시교(始敎)한 지 1년 만인 10년, '대종교'로 개칭하는 한편, 같은해 만주 북간도(北間島)에 지사를 설치하였다가, 14년에는 대종교 본사를 이곳으로 옮겨 포교 영역을 국내와 만주 일대로 확대시켰다. 16년 나철이 죽자 제2세 교주 김교헌(金敎獻)이 취임하였는데, 그는 대종교의 종리(倧理)라 할 수 있는 <신단민사(神壇民史)>를 저술하고, 3·1운동 이후 만주로 들어가는 동포들을 포섭하여 그들로 하여금 항일구국운동에 앞장서게 하였다. 그 실례로 20년 일본군을 크게 무찌른 청산리대첩(靑山里大捷)의 주역이었던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의 장병 대부분이 대종교인이었다. 1948년 김교헌이 죽을 무렵에는 한국·만주·노령(露量)·중국 본토 등에 48개의 시교당(詩敎堂)을 가지고 있었다. 한편, 일제의 탄압이 날로 심해져 3세 교주 윤세복(尹世復)이 취임한 이후 많은 교인이 체포·학살되었고, 1932년 이른바 만주국의 탄생과 함께 대종교도 지하로 숨지 않을 수 없게 되었는데, 1937년 시교당의 수가 52개로 증가하였다. 이러한 포교활동은 곧 독립운동의 일환이었으므로 교세 확장은 바로 독립운동의 확대이기도 하였다.

자유주의 신학의 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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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由主義神學-傳來

1934년을 전후하여 일본·구미(歐美) 유학생들에 의해 자유주의적인 신(新)신학사상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장로교 희년(禧年)총회에서 창세기 저자 문제, 여권 문제가 일어났고, 성서의 비판적 해석이 나타나 종래의 보수적인 근본주의 신학에 충격을 주었다. 이때의 주역은 송창근(宋昌根) 목사, 김재준(金在俊) 교수 등이었고, 특히 김 교수는 5개조의 신학교육이념을 발표하여 한국인의 입장에 선 신신학(新神學)의 가치를 명백히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