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문화·민속/세계의 연극/동양의 고전극/일본의 고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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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중세의 예능[편집]

고대·중세의 예능[편집]

古代·中世-藝能

원시시대는 아직 일본의 국가형태가 형성되지 않았던 시대이며, 소국가(小國家)만이 서로 분립하여 있을 뿐, 통일된 국가가 없던 시대이다. 따라서 이 시대의 예능은 부족적·향토적·지역적이었으며, 종교행사에 바탕을 둔 음악 가무(音樂歌舞) 중심의 예능이었다. 아스카(飛鳥)·나라(奈良)·헤이안(平安) 시대가 되어 겨우 천황을 중심으로 한 통일국가가 성립되었다. 그리고 중국대륙과의 교섭도 왕성하여져, 중국의 제도나 문화가 도입되고, 중국문화를 섭취하는 시대로 들어가게 되었다. 이리하여, 중국으로부터는 예능도 수입되었다. 이때 전래된 것이 기악(伎樂)·아악(雅樂)·산악(散樂) 등이다. 중국문화의 모방시대였던 나라 시대(奈良時代)를 중심으로 한 시대에는 중국의 예능이 중시되고, 기악이나 아악은 아악료(雅樂寮)에서 보호·육성되었다. 일본 고유의 예능도 중앙으로 도입되었는데 이들 예능은 중국 예능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그러던 중, 헤이안 시대에 들어가, 겨우 중국예능의 일본화가 행하여지기 시작했다. 나라·헤이안 시대에 천황·귀족들의 지지를 받고 일본예능의 대표격이 된 것은 아악인데, 그것은 일본인의 신앙생활과도 연결되어, 귀족들의 의식(儀式)이나 사찰 및 신사(神社)의 제례(祭禮)에는 불가결의 것이 되었다. 그러나 이들 예능은 이 시대에는 아직 민간인에게는 보급되지 못했었다.

헤이안 시대 말엽부터, 후지와라(藤原)의 귀족정치가 점차 약체화하고, 지방의 호족들이 실력을 갖기 시작하여, 그들이 중앙으로 진출하게 되니, 이와 병행하여 지방에서 행하여지고 있었던 전악(田樂)이 사회의 표면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전악은 오곡풍요(五穀豊饒)를 기원함과 동시에 진혼(鎭魂)의 뜻도 있어, 레이카이(靈會)에는 빼놓을 수 없는 예능이 되었다. 레이카이와 관계를 갖는 기엔카이(祇園會)나 가스가와가미야제(春日若官祭)가 성해지자, 이들 제사엔 전악(田樂, 덴가쿠)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됐다. 한편, 중국에서 들어온 곡예를 흉내내는 것을 중심으로 한 원악(猿樂)은 그 기예(技藝)의 내용이 오락적인 데서 신사(神事)·법회(法會)·의식(儀式)과 연취(淵醉)의 여흥예(餘興藝)로서 행해졌으며, 중국에서 들어온 예능이었기 때문에 귀족들 사이에서 행하여지고 있었다. 그러나, 기예의 내용이 민중적이었기 때문에, 교토(京都)를 중심으로 한 민중들 사이에서 크게 환영을 받았다. 원악이 민중들 사이에서 호평을 받게 되었기 때문에 전악과 맺어지게 되었고, 제전(祭典) 때에는 전악과 함께 매우 필요한 예능이 되었다. 그래서 전악·원악이 가미된 예능제적(藝能祭的) 제례 양식을 가진 제전은 각지로 분포되어 나아갔다.

가마쿠라 시대(鎌倉時代)가 되어, 후지와라 귀족 대신에 무사(武士)가 정치권력을 장악하게 되자, 전악과 원악은 당시에 있어서의 대표적 예능으로서 사회의 표면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무사는 지방 출신자이자 시골 사람이며, 아악과는 인연이 없었다. 무사들은 온 나라안을 휩쓸었으되 교토에는 머무르지 않았고, 정권의 소재지는 가마쿠라에 있었으며, 연약한 후지와라 귀족문화와 접근하려 들지 않았다. 무사들의 주거지는 지방이었기 때문에 지방의 제례는 그들이 중심이 되었으며, 거기에다 전악과 원악을 섞은 제례양식을 도입하였다. 당시 지방에는 비와 스님(琵琶法師)이나 시라효시(白拍子) 등이 횡행, 이마요(今樣)·소가(早歌)·구세마이(曲舞) 등도 행해졌으며, 사원에서는 쇼묘(聲明)·엔넨(延年)이, 신사(神社)에서는 신악(神樂)이 행해졌고, 또한 고유의 노래나 춤도 있었다. 원악·전악은 이들 잡예(雜藝)를 받아들여, 그 기예의 내용을 풍부하게 해갔다.

가마쿠라 막부(鎌倉幕府)가 멸망한 후,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 57년간의 쟁란(爭亂)을 거쳐 아시카가(足利) 정권이 탄생하게 되자, 사회는 다시 크게 흔들렸다. 아시카가는 정치의 소재지를 가마쿠라에서 교토로 옮겼다.

교토는 헤이안(平安) 귀족문화가 떠도는 고장이었다. 아시카가는 무가(武家) 출신이며, 그 문화적 배경은 가마쿠라의 무가문화였다. 아시카가가 정치의 소재지를 가마쿠라에서 교토로 옮긴 것은, 가마쿠라 무가문화를 교토의 헤이안 귀족문화 속으로 이식시켰음을 뜻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예능에도 큰 영향을 주게 되었다. 가마쿠라 시대의 예능의 대표는 원악과 전악이며, 양자 중에선 전악이 당시의 예능을 대표하고 있었지만, 아시카가 3대 장군(三代將軍) 요시미쓰(義滿)는 양자 중에서 원악을 채택하였다. 요시미쓰에게 총애를 받고 있던 원악자(猿樂者) 제아미(世阿彌)는 헤이안 귀족문화가 지니는 유현(幽玄)한 미(美)와 가마쿠라 무가문화가 지니는 연가적(連歌的) 민중의 미, 선(禪)의 사상을 짜 넣은 높은 예능을 완성하였다. 그런데, 오닌(應仁)·분메이(文明)의 난을 경계로 하여 아시카가 정권이 쇠퇴하고 분국적(分國的) 양상을 가져왔으며, 지방적·민중적 움직임이 강화되고, 소시민의 대두가 현저해져서 성하(城下) 도시에 소시민들의 세계가 형성되자, 이곳을 중심으로 하여 민중예능인 후류춤(風流踊)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이 후류춤 중에서 가부키춤(歌舞伎踊)이 싹트게 되었다.

기악[편집]

伎樂(기가쿠)

'구레가쿠' 또는 '구레노우타마이'라고도 했다. 외래(外來) 악무 중에서는 가장 오래된 것 중의 하나이며, 주로 사원의 불회(佛會)에서 행하여졌다. 문헌상으로 처음 나타나게 된 것은 <니혼쇼키(日本書記)> 스이코천황(推古天皇) 20년(612)조(條)에 "백제(百濟) 사람 미마지(味摩之) 귀화하다. 가로되, 오(吳:中國杭州地方)에서 배워 기악무를 터득했다고 말했다. 즉, 사쿠라이(櫻井)에 안거(安居)케 하되, 소년들을 모아 기악무를 배우게 함"이라는 기사이다. 물론, 오늘까지 남아 있는 가면 같은 것으로 추측해 보면, 그 본향(本鄕)은 고대 티베트, 인도 근방이었던 것 같고, 그것이 서역지방을 거쳐 오국(吳國)으로 들어갔다가 일본에까지 전파되어 간 듯하다.

당시의 상세한 연출에 대해서는 알 수도 없지만, 고마노치카자네의 <교훈초(敎訓抄)>(1233)에 의하면, 우선 피리(笛)·삼고(三鼓)·동박자(銅拍子) 등의 음악과 함께, 각종 기악가면(伎樂假面)을 곁들인 사람들이 1종의 행도(行道)를 하고, 그 후 야비하고 우스운 촌극(寸劇)을 연출할 정도의 거친 것이었다. 융성기는 8세기 중엽까지였고, 그 후로는 계속해서 전래된 고아한 무악(舞樂)에 압도되어서 급격히 쇠망하였다.

기악면[편집]

伎樂面

기악(伎樂)에 사용되는 가면의 총칭으로서, 그 종류는 치도(治道)·사자두(獅子頭)·사자아(獅子兒)·오공(吳公)·금강(金剛)·가루라(伽樓羅)·곤륜(崑崙)·오녀(吳女)·바라문(波羅門)·역사(力士)·대고부(大孤父)·대고아(大孤兒)·취호왕(醉胡王)·취호종(醉胡從)의 14종이었다. 가면은 야외극(野外劇) 때의 기악에 꼭 알맞게 매우 크며, 후두부(後頭部)를 감싸듯 만들어졌고, 눈과 콧구멍과 입 등도 크게 내었다. 표정도 매우 과장적이며 이상한 형태의 것이 많다. 재료는 오동나무·녹나무·노송나무 등이 쓰였는데, 그 중에는 말린 옻나무가 재료로 된 것도 있다.

산악[편집]

散樂(상가쿠)

서역지방에서 일어나, 중국을 거쳐 일본에는 나라 시대에 전해졌는데, 가벼운 재주부리기·곡예·기술(奇術)·우스운 흉내내기 등 여러 가지 예능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때문에 별명을 백희(百戱)·잡희(雜戱)라고도 하였다. 아악의 우아함이나 귀족취미와는 반대로, 비속하고 서민성을 지닌 것이 특색이다. 그것은, 중국의 <당회요(唐會要)>에서 볼 수 있는 종목의 일부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경우와, 일본 고유의 잡기(雜伎)와 결합되어 재미있고 웃기는 연기를 보여주는 종목도 나타나게 되었다.

이 중의 고족(高足)·일족(一足)·품옥(品玉) 등의 곡예는 전악(田樂)으로 계승되었고, 사자무(獅子舞)·대신악(大神樂), 그리고 '노(能)'의 교겐(狂言) 등에 큰 영향을 미쳤다. 헤이안 시대부터는 원악의 문자가 사용되고, 이후에는 이것이 통용되었다.

원악[편집]

猿樂(사루가쿠)

산악에는 흉내를 내는 요소가 많았기 때문에 '원(猿)'자를 쓰게 됐으리라 하며, 헤이안 시대에는 산악과 동일한 예능을 의미하였다. 헤이안 말기에서 가마쿠라 시대로 접어들자 원악의 곡예 부분은 전악(田樂)에 편입되고, 거기서 독자적인 예능으로 재출발하게 되었다. 원악에는 종교성도 있어서, 차츰 신사나 사원(寺院)에 예능을 가지고 봉사하게 되었고, 전업적(專業的)인 예단조직(藝團組織:座)도 생겨나, 이것이 좌(座)끼리의 경쟁으로부터 큰 사사(社寺)의 보호를 받게 되고, 그 지역에 있어서의 독점권을 쥐게 했다. 야마토원악(大和猿樂)·오미원악(近江猿樂)·담바원악(丹波猿樂)·우지원악(宇治猿樂)·셋쓰원악(攝津猿樂) 등이 유명하다.

이같은 하나의 세력을 가졌다는 것은 원악예(猿樂藝)를 발전시키는 결과가 되고 전악(田樂)·엔넨(延年)의 후류(風流)·구세마이(曲舞) 등의 영향으로 단지 흉내만을 내는 가무적(歌舞的)인 기예로부터 극적 내용을 가진 희곡으로, 즉 노(能)로 성장했으며, 다시금 이것은 노와 교겐(狂言)으로 나눠져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노·교겐[편집]

노·교겐의 역사[편집]

能·狂言-歷史

원래는 우스운 흉내를 내는 것을 예능으로 하고 있던, 원악(猿樂)을 하는 사람들이 노(能)를 시작한 것은 가마쿠라 시대(鎌倉時代)의 중엽부터였다고 인정된다. 남북조(南北朝) 시대에 들어와서 각지의 전악(田樂)과 원악(猿樂)이 노를 공연하고 있었으나, 야마토원악(大和猿樂) 등 교토(京都) 주변에 본거지를 두는 여러 좌(座)가 번영하여, 14세기 중엽엔 야마토원악의 유이자키좌(結崎座)에 간나미키요쓰구(觀阿彌淸次)가 나와서 노의 인기를 높였다.

간나미는 유이자키좌를 창설하여 활동을 계속, 그 예풍(藝風)이 사회적 인기를 얻어, 결국엔 아시카가(足利義滿) 장군의 비호를 받게 되었다. 간나미는 종래 흉내만을 내는 기예였던 야마토원악의 예풍을 가무유현(歌舞幽玄)적인 방향으로 돌리는 공을 세웠다. 또, 당시 유행하고 있었던 구세마이부시(曲舞節)를 받아들여 고우타부시(小歌節)와 융합시켜서 고우투부시쿠세마이를 만들고, 노의 노래에 변화성을 주어서 평판을 높였다.

간나미의 아들 제아미(世阿彌)는 부친이 장군에게 인정받았을 때 겨우 12세였었으나, 그 재능과 미모 때문에 특별한 총애를 받았다.

제아미 최대의 공적은, 노에 이론적인 뒷받침을 주고, 노게이(能藝)의 장래를 명시해준 것으로서, 그 소론(所論)은 계고습도(稽古習道)·연기(演技)·연출·노작론(能作論) 등 다방면에 걸쳐 있다. 이리하여 무로마치기(室町期)를 통하여 야마토원악이 융성하게 되었는데, 그때 원악노(猿樂能)도 무로마치기의 대표적인 예능이 되었다. 무로마치 말기의 정치적 혼란은 노에도 영향을 주었으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노를 몹시 좋아했고,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도 막부(幕府)를 엶과 동시에 원악을 공인적인 예능으로 키워 주었다. 그래서 노는 막부의 식악(式樂)이라는 제한을 받기에 이르렀다.

에도 시대(江戶時代)의 노는 한마디로 말해서 무가적(武家的)이고 규격적인 색채를 강하게 지녔다. 이 시대에 완성된 양식은 계속 인계되어서 메이지 유신(明治維新)까지에 이르렀다. 그 중에는 개혁을 시도한 자도 있었으나, 그 급진적인 방법의 탓으로 결실을 보지 못한채 끝나고 말았다.

메이지 유신을 경과하게 되자 사태는 일변하였다. 계속되는 사회 변동 때문에 노도 한때는 없어질 위기에 빠져 있었으나, 차차 사회가 안정됨에 따라, 공경(公卿)·귀족 및 신흥 재벌의 지지를 받고, 한편에서는 일찍이 무사계급(武士階級)의 예능이었음을 들고 나와 신인(新人) 제자들을 획득, 새로운 융성기를 맞았다.

노·교겐의 특색[편집]

能·狂言-特色

노와 교겐은 모두 전용무대에서 상연되어 왔었는데, 항상 양쪽이 함께 짜여져 있었다. 노의 몽환적(夢幻的) 성격과 교겐의 현실적 성격이 서로 합쳐져, 하나의 커다란 세계를 만들 수 있었다고도 할 수 있다. 노는 곡중(曲中)의 인물로 분장한 자가, 그 곡에서 다뤄지고 있는 사항을 노래하고 춤추며 상연하여 나아가는 것인데, 그때의 재미는, 어느 사항을 상연하는 흉내내기 재주에 있는 것이 아니라 노래하고 춤추는 것, 즉 유현(幽玄)한 가무 쪽에 있다고 하겠다. 한 곡의 극적 전개에는, 곡에 따라 농담(濃淡)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어느 것이나 가무극(歌舞劇)으로서의 성격을 강하게 지니게 된다. 곡중의 인물로 꾸며 나오는 것인 '시테(仕手)'의 상대역인 '와키(脇)'도 극적 요소가 짙은 <아타카(安宅)> 등에서는 활약이 뚜렷하게 나타나게 마련이지만, 가무적인 요소가 짙은 작품인 <다카사고(高砂)> 등에서는 거의 활약하지 않고, 시테의 춤이라든가 노래 등을 찾아내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데 불과하다. 노는 한마디로 말해서 가무극이며, 시테 중심의 예술이라고 말할 수가 있고, 그것이 가장 큰 특색으로 되어 있다. 와키쪽을 비롯하여 '하야시'쪽 및 '지요(地謠)'로부터 '고겐(後見)'에 이르기까지는 모두 시테가 매력적으로 춤추고 매력적으로 노래부르게 하기 위하여 그 조력자로서 참가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편, 교겐(狂言)은 대사극(臺詞劇)인 것으로서 노와는 다르며, 두 사람의 (때로는 보다 더 많은 수의 인물의) 대립·갈등으로 전개해 나가는 연극이다. 갈등이라고는 하나 근대연극의 그것과는 전혀 다르며, 세련된 인공적 요소마저 가미된 대화 형식에 의한 경묘(輕妙)하고도 소탈한 기지(機智)에 넘친 웃음을 자아내는 것이 주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나 가무의 요소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며, 정취를 더하기 위해 군데군데에 교겐요(狂言謠)라고 총칭되는 가요가 들어 있고, 그 노래에 맞춰서 춤추는 경우도 자주 보게 된다. 이런 경우도 노와는 달라, '시테'나 '아도'('와키'役)와는 무게로는 다소 차이가 있을지라도 어느 한쪽이 한쪽을 완전히 이끌어주는 역(役)이 되는 일은 없다.

노의 가면[편집]

能-假面

노의 특색은 가면을 사용하는 점에도 있다. 원칙적으로는 '시테'만이 사용하고, '와키'를 비롯한 여러 역의 대부분은 그냥 맨얼굴로 나오는 데도 불구하고, 가면이 차지하는 비중은 크다. 거의 무표정에 가까운 가면이 무대 위에서는 희로애락 전체를 남김없이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은 감탄할 수밖에 없다.

노에 있어서는 여배우를 쓰지 않기 때문에, 가면의 필요도(必要度)는 여면(女面)에 있어서 가장 높다. 감각적인 미에 가까운 유현미(幽玄美)를 존중하는 노로서는 그 미의 이상(理想)을 젊은 여성의 얼굴에 의뢰하고 있다.

남가면(男假面)도 마찬가지로서, 연령에 따른 가면이 있다. 젊은 귀공자(貴公子)용 가면, 노는 데 미친 소년용 가면, 순진하고 귀여운 소년용 가면, 무장(武將)용 가면, 구게(公家)·귀족용 가면 등이 따로 있다. 또한 노인들은 위면(尉面)을 사용하는데, 신이냐 인간이냐에 따라서 각각 종류가 다른 위(尉)를 사용한다.

그리고 죽은 사람의 상(相)을 지닌 가면도 있다. 여인의 사령(死靈)·생령(生靈)의 성격을 나타내는 것으로 수녀(瘦女), 영녀(靈女), 증발(增髮), 이안(泥眼), 교희(橋姬)가 있다. 수녀는 음참(陰慘)한 사령이며, 영녀도 그렇지만 이것은 다소 품위가 높다. 증발은 악령이 들려 미친 여인, 교희는 질투에 미쳐서 마음이 귀신이 된 여가면이다. 남자의 경우는 침울한 사자(死者)의 상을 나타내는 수남(瘦男)·담남(淡男)·하진(河津)·괴사(怪士) 등이 있다.

교겐의 가면[편집]

狂言-假面

교겐엔 사실적(寫實的)인 연기가 필요하며, 가면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지만, 노인이나 추녀(醜女), 그 밖에 이상한 모습(神佛魂畜·鳥充·動植物)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가면의 사용이 불가피해진다. 노의 가면에 비해 사실미(寫實味)가 더해지고, 말할 수 없는 우스꽝스러움을 지닌 가면으로 되어 있다.

노무대[편집]

能舞臺

노·교겐 등을 상연하기 위한 전용무대는, 노악당(能樂堂)이라고 불리는 건물 안에 관람석과 함께 설치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노의 무대는 크게 나누어 다음과 같은 4개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즉, 무대·후좌(後座)·지요좌(地謠座)·교괘(橋掛) 등이 그것이며, 관람석에서 보이지 않는 부분에 경실(鏡室)과 악실(樂室)이 설치되어 있다.

노 연출의 중심이 되는 무대는 약 6m 사방의 단(壇)이 지상 약 1m의 높이에 가설되어 있고, 4개의 굵은 기둥을 4구석에 세워, 합각지붕 형식의 박공을 넣은 지붕을 지탱한다. 기둥에는 용도에 따라서 각각 명칭이 따로 있으며, 정면에서 보아 왼쪽의 것은 '시테'가 춤을 출 때 목표로 하며 찾아내는 기둥이다. 오른쪽에 있는 것은 '와키'가 차지하는 자리에 가깝기 때문에 협주(脇柱)라고 한다. '와키'는 흔히 대신으로 분장하기 때문에 대신주(大臣柱)라고도 한다. 찾아내는 기둥 중 안쪽의 것은 '시테'의 '등장 제1성'을 발하는 장소에 가까이 있으므로 '시테주'라 하는데, '시테' 이외의 다른 등장 인물도 대개는 여기에 서서 제1성을 발한다. 협주(脇柱)의 안쪽에 위치한, 찾아내는 기둥의 대각선 위치에 있는 것은 피리 불기역(役)의 자리에 가깝고, 때문에 적주(笛柱)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이들 4개의 기둥에 둘러싸인 무대는 세로로는 마루판자를 깔았고, 그 각 부분에도 명칭이 있어서, 연기의 가늠으로 사용한다. 기둥도 마루의 판자도 칠을 하지 않은 채로의 노송나무 재목이 쓰이고 있다.

인형조루리(닝교조루리)[편집]

인형극의 기원[편집]

人形劇-起源

일본에 있어서의 인형극의 발생에 대해서는 종교적·주술적(呪術的)인 신인형(神人形)에서 발생하였다는 국내설(國內說)과, 이민족(異民族)에 의해서 꼭두각시 인형의 예능이 전래되었다는 외래설이 있는데 현재의 연구단계에서는 아직 어느 쪽이라고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어쨌든 멀리 나라조(奈良朝)에도 이미 인형을 다루는 예능은 존재했으며, 11세기 중엽에 이르러서는 꼭두각시 인형은 도산민(逃散民)에 의해서 형성된 표박집단(漂迫集團)의 직능의 하나가 되고, 그 집단을 괴뢰자(傀儡子)라고 불렀으며, 인형을 다루는 사람을 '꼭두각시 돌리기'라고 일컬었다.

집단민 외에 독립된 인형 조종자도 있었으니 이들을 '손꼭두각시'라고 불렀다.

13세기가 되자 꼭두각시 집단은 직능별로 분산 정주했으며, 14세기에 와서 '꼭두각시'는 이미 집단민을 지칭하는 말은 아닐 정도로 달라졌고, 무로마치(室町) 시대에 들어와서부터는 '손꼭두각시'가 배출되어, 원악(猿樂)을 상연한다든지 고와카(幸苦)의 구세마이(曲舞)를 상연했다. 16세기 중엽경부터는 사이구쥬신사(西宮戎神社)와의 유대가 생겨서 직능 조직을 만들고, 이른바 '에비스 돌리기(惠比須回)'라 칭하는 극단이 다시 결성되어, 각지를 순회하게 되었고, 불사(佛寺)와 결합한 '불상돌리기'도 발생하였다. 이 밖에 조그만 상자무대를 가슴에 걸고 인형을 조종하는 순회예능(巡廻藝能)도 생겼다. 17세기 초엽, 분로쿠(文祿)·게이초(慶長) 시대에는 '에비스 돌리기'의 인형이 당시 새로 일어난 이른바 '가타리모노'로서 유행한 '조루리'와 손잡고 '닝교조루리'가 시작되었다.

조루리의 발생[편집]

淨瑠璃-發生

일본에서는 예로부터 이른바 '가타리모노'라 일컫는, 줄거리가 있는 이야기에 가락을 붙이고 반주에 맞추어서 입으로 낭독하는 예능적 전통이 있다. 그 기원은 대체로 예능사상(藝能史上)으로는 평곡(平曲:平家琵琶)을 시발점으로 삼고 있다.

평곡은 비파(琵琶)의 반주에 맞춰서 '헤이케(平家) 이야기'를 낭독하는 것으로서, 장님인 이른바 '비와 스님(琵琶法師)'의 전업(專業)이었다. '비와 스님'의 이야기는 이미 헤이안 말기에 존재하고 있었는데, 가마쿠라 시대에는 <헤이케(平家)> <호겐(保元)> <헤이지(平治)> 등 수많은 뛰어난 전기문학(戰記文學)의 성립과 함께 발달하여, 남북조로부터 무로마치 시대를 통하여 크게 번영하였다. 또 불보살(佛菩薩)의 연기(緣起)를 이야기하는 설경(說經)이 음곡적(音曲的) 발전을 이루어 설경부시(說經節)가 되고, 무로마치 말기로부터 에도(江戶) 초기에 걸쳐서는 크게 민중의환영을 받아, 인형과 연결되어서 '불상돌리기'가 유행되었으나, 아직 극장을 갖지 않는 '큰길연예(演藝)'였었던 듯하다.

그 밖에 중세에는 '이야기 승(僧)'의 이야기라든가 '맹인어전(盲人御前)'의 이야기, '고와카(幸苦)' 등 각 종류의 '가타리모노'가 발달하였다. 그것들 중에서도 무로마치 중기 이후, 소경스님이 부채로 손등을 쳐 소리내는 박자로 중얼거리기 시작한 <조루리 주니단소시(淨瑠璃十二段草子)>가 민중의 지지를 받아, 그 곡의 가락이나 억양을 '조루리 선율'이라고 부르고, 다른 사장(詞章)에도 쓰이게 됨으로써 '조루리'라고 총칭하게 되었다. 같은 무렵 류큐(琉球)에서 도래한 신악기 사피선(蛇皮線)을 반주하게 되자 크게 비약하고, 더 나아가 '에비스 돌리기'와 맺어져 '닝교조루리'를 형성했다.

조루리 반주에 처음으로 사피선을 사용한 것은 사와즈미켄코(澤住檢校)라고 전해지며, 뱀 가죽은 차차 구하기 어렵게 됨에 따라 고양이 가죽을 사용하게 됨으로써 소위 샤미센(三味線)이 생겨났다.

기다유부시[편집]

義太夫節

다케모토 기다유(竹本義太夫)와 지카마쓰 몬자에몬(近松門左衛門)의 제휴로 창시된 이른바 '도류조루리(當流淨瑠璃)'는, 그 이전의 조루리와는 예술적으로 큰 차이가 있으며, 분명히 하나의 선을 긋는 것이었다. 이것은 일단 데이쿄(貞亨) 원년(1684)의 다케모토좌(竹本座)의 출범을 그 성립 시기로 하고 있는데, 물론 현재의 기다유부시(선율)는 그 후 대대의 명수들이 더욱더 연구를 거듭함으로써 닦여진 것이다.

대본(臺本)의 구성은 이른바 고조루리(古淨瑠璃)와 마찬가지로 지(地)의 문(文)과, 사(詞:對話)로 이루어진 서사시체의 희곡인데, 자카마쓰에 의해서 그 문장미는 최고도로 높여져, 원칙적으로 5단조직(五段組織)이 확립되었다. 제재(題材)에 따라 크게 시대물(時代物)·실재물(實在物)의 두 개로 분류되는데, 내용은 전일곡(全一曲)의 주제보다도 각 단(各段)마다에 반독립적인 소주제(小主題)를 설정한 의리·인정(義理人情)의 전개가 요점으로 되어 있다.

원칙적으로 지문(地文)에는 아름다운 곡의 가락이나 억양이 붙여졌고, 사(詞)에는 대사적(臺詞的)인 표현이 있게 마련이지만 긴 사에는 곡조를 단 부분을 집어넣어서 단조화되지 않게 연구되었으며, 특히 아름다운 가락을 붙여 모정(慕情)이나 비애 등을 강조하는 부분을 '타이름(說得)'이라고 해서 1곡 중에서 가장 주의깊게 듣게 하는 부분이 된다. 반주용의 샤미센은 다른 것보다 크며 '후토자오(太棹)'라고 불린다. 곡절(曲節)의 기록법에 있어서, 이야기하는 쪽은 '호마(胡麻)'라고 쓰이는 기호가 대본의 사장(詞章) 옆에 붙여져 있는데, 샤미센 쪽에도 '주(朱)'라고 쓰이는 독특한 악보가 고안되어, 곡의 전존(傳存)에 큰 역할을 다하고 있다.

희곡으로서는 5단(五段)까지 이어지는 장편이지만, 연주는 원칙적으로 한 장면을 각각 한 사람의 '다유(太夫)'와 샤미센이 담당, 한 사람의 입으로 인물 정경을 설명함으로써 무대의 인형에게 감정을 불어넣기 위해 음악적인 아름다움보다도 등장 인물의 성격 표현에 중점이 놓여진다. '조루리'의 연주를 '노래부른다'고 하지 않고 '얘기한다'고 하는 의미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특수한 장면일 때에는 몇 명의 '다유'가 각각 등장인물을 한 사람씩 맡아서 합주하는 경우가 있으며, 샤미센도 몇 명이 합주할 경우가 많다.

인형의 구조[편집]

人形-構造

분라쿠좌(文樂座)의 인형은 목·몸통·손·발·의상(衣裳)으로 되어 있다. 〔목〕남녀·노소·성격 등의 역할에 따라 약 70종이 있다. 어느 것이나 목조(木彫)에 도료로 채색을 한 것으로서, 목밑에는 인목(咽木) 등이 있으며 몸통에는 머리의 움직임을 조작하는 실이 붙어 있다. 인형의 장치는 종류에 따라 눈·입·눈썹이 움직이도록 되어 있는데, 대체로 여자의 목은 움직임이 적고, 형태도 작다. 무대에서 사용할 때는, 머리에 각각의 역할에 따른 가발을 씌우고, 채색도 그때그때 달리 칠한다. 〔몸통〕 견판(肩板)과 요륜(腰輪)과 이를 연결하는 앞뒤 두 장의 헝겊으로 되어 있으며, 견판에는 그 양쪽에 수세미 껍질을 붙여서 불룩하게 만들고, 중앙의 구멍에는 머리에 연결된 몸통나무를 통하게 되어 있다. 〔손·발〕손발은 양 어깨로부터 끈으로 늘어뜨린다. 원칙적으로 여자인형은 옷자락을 내리고 있기 때문에 발을 달지 않는다. 손은 그 움직임에 따라 약 30종이 있으며, 왼손에는 철사가 붙어 있다. 발의 종류도 십여 종이나 있다. 〔의상〕의상은 가부키(歌舞伎)와는 달리 그 역할에 따라 거의 정해져 있는데 어느 경우나 인형을 조종하는 사람이 몸통나무를 쥐기 위하여 손을 집어 넣을 수 있도록 잔등에는 잘린 데가 있다.

인형의 무대[편집]

人形-舞臺

분라쿠 닝교조루리(文樂人形淨瑠璃)의 무대는 다른 연극과는 달리, 발의 놀림을 감추기 위하여 무대 앞면에 '선저(船底)'라고 불리는, 마룻바닥보다 한층 낮은 활처럼 휘어져 들어간 부분이 만들어져 있다. 이 선저의 깊이는 약 36㎝, 폭은 약 180㎝로서, 이것이 보통의 평무대(平舞臺)에 해당되는 부분이며, 다시 이 양쪽엔 '난간'이라 불리는 판자가 세워진다. 난간의 높이는 앞(관객석에 가까운 쪽)이 약 48cm, 뒤가 약 85㎝이며, 앞쪽을 '2의 손', 뒤쪽을 '1의 손' 또는 '본수(本手)'라 한다. 본수에서 더 뒤쪽인 무대가 이른바 이중(二重)에 해당된다. 즉 인형의 발의 높이는 항상 약 84.8㎝의 높이로 받쳐지며, 객석에서 보면 꼭 난간의 위끝에 서 있는 것처럼 보이게 된다. 다시금 무대의 앞끝에도 약 24㎝ 길이의 '3의 손'이 놓여진다. 선저의 좌우(위쪽·아래쪽)에는 각각 인형이 출입하는 양막(揚幕)이 있고, 아래쪽 양막 위가 악기실(樂器室)로 되어 있다. 무대의 위쪽에는, 객석으로 향해서 '다유'가 이야기를 하는 높은 자리가 있다. '다유'의 자리는 회전무대처럼 되어 있어서, '다유'와 '샤미센'이 교대를 하게 된다.

가부키의 역사·연혁·배우·연출[편집]

가부키의 역사와 연혁[편집]

歌舞伎-歷史-沿革

분라쿠(文樂), 즉 닝교조루리(人形淨瑠璃)와 견주어지는 에도시대의 민중극인 가부키는 17세기 초엽에 생긴 것이므로 현재까지 약 370년의 역사를 갖는 셈이다. 그 모태는 중세 말기부터 서민 사이에 퍼지기 시작한 후류(風流)라고 하는 민속예능(民俗藝能) 내지 풍속 무용이었는데, 그 성립·발전의 과정은 결코 단순한 것은 아니었다. 그 시대시대의 서민의 마음과 감각을 반영시키면서, 한순간도 정지하는 일 없이 모든 것을 흡수, 소화하여 생성(生成), 변모함으로써, 오늘날 볼 수 있는 복잡한 것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전대(前代)의 무대예술인 노(能)와 교겐(狂言), 그리고 병행해서 발전한 닝교조루리가 그 성립 성장에 크게 영향을 주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여기에서는 그 성장의 모습을 창생기(倉生期:1603-51), 확립기(確立期:1653-1724), 발전기(發展期:1724-1803), 난숙기(爛熟期:1804-71), 계승기(繼承期:1872-현재)의 5개 시기로 나누어 살펴본다.

가부키의 창생기[편집]

歌舞伎-倉生期(1603-1651)

가부키의 조상으로 알려진 이즈모(出雲)의 오쿠니(阿國)가 교토(京都)의 기타노신사(北野神社) 등에서 처음으로 염불춤(念佛踊)을 추어 시민들의 큰 환영을 받고 가부키춤이라고 불리게 된 것은 1603년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공인된 무대예능이라면 궁중이나 대신사불각(大神社佛閣)의 무악(舞樂)이나 신악(神樂) 및 노(能)와 교겐뿐이었다. 그러한 터에 여성의 예능집단이 몰려들고, 더욱이 가면도 쓰지 않고 다채로운 의상을 휘날리며, 풍만한 지체를 보이면서 노래하며 춤을 추니, 사람들이 그 처음 보는 광경에 흥분하고 기뻐 날뛰었으리라는 것은 능히 짐작이 가는 일이다. '가부키'라는 호칭도 여기서 나오게 되었다.

물론 그 이전부터, 여원악(女猿樂)이라든가 여쿠세마이, 시라효시춤(白拍子舞) 등은 떠돌이 연기인들이 연기함으로써 서민들 사이에서 인기를 얻고 있었으며, 그 계류(系流)의 여성 연기자들을 포함하는 후류춤이 갑자기 성행되고 있었다. 오쿠니(阿國)를 위시한 여성의 극단도 그 일파였다. 그러나 그 여자 연기인이 단순한 나그네 연기인으로서가 아니라, 비록 빈약한 임시 건물이었기는 하나 교토의 한복판에 당당하게 건물을 세우고 노와 교겐 등을 들고 나와서 채리티 쇼(charity show)를 한다는 것은 1603년에 이르러 비로소 가능했었다. 불교의 여인금제사상(女人禁制思想), 이에 기인하는 여인 멸시의 풍조가 강했던 중세에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세키가하라(關ケ原)의 싸움이 1603년에 끝나고, 겨우 전국(戰國)의 난세(亂世)와 중세의 주박(呪縛)에서 해방되게 되자 비로소 여성의 예능이 생생한 육체적 매력으로써 대중 앞에 선을 보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여성예능의 시대는 그리 오래가지는 못하였다. 교겐계통의 원약(猿若)이라는 촌극(寸劇)을 곁들인 오쿠니(阿國) 등의 여인 가부키는 전국을 뒤흔들었으나, 유녀(遊女)를 겸하고 있는 본래의 성격 때문에 미풍양속을 크게 어지럽게 하였다. 그래서 막부(幕府)는 마침내 1629년 여자 예능인의 등장을 금지시킨 것이다. 그리하여, 메이지(明治) 24년 신파(新派)에서 여배우가 등용될 때까지인 262년간은 일본의 공인극장(公認劇場)에서는 여배우를 볼 수 없었다. 그 대신 인기를 독차지한 것은 아름다운 소년의 노래와 춤으로 이뤄지는 이른바 와카슈 가부키(若衆歌舞伎)였다. 그러나 이것도 남색(男色:衆道라고도 하며 동성애)의 유행을 가져오고 그 폐단이 심하였기 때문에 막부는 또다시 전면적인 금지령을 내리게 되었다. 1652년의 일이었다.

오쿠니 가부키와 와카슈 가부키는 이렇게 탄압을 당하고는 나타나지 못하였으나 민중의 요구는 그치기 어려웠으며, 드디어 가부키는 형태를 바꾸어서 재흥, 바로 새로이 '극(劇)'으로서의 출발점에 섰으니, 그것이 '야로 가부키(野郞歌舞伎)'였다.

가부키의 확립기[편집]

歌舞伎-確立期(1653-1724)

가부키의 재흥을 위하여 막부가 제시한 허가조건은 두 가지가 있다. 그 하나는 배우의 앞머리칼을 자름으로써 와카슈 모습이 아니게 나타낼 것, 또 다른 하나는 노래와 춤을 적게 함으로써 흉내내기 교겐을 주로 할 것 등이었는데, 어느 것이나 다 선정성(煽情性)에 대한 규제였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는 것이다.

이미 찰나적인 성적 매력에만 의지할 수는 없게 되었으므로 필연적으로 가부키는 드라마로서의 내용의 충실, 그 무대표현의 정치(精緻)와 변화성과 규모의 확대, 연기의 사실성(寫實性)에로 향해야만 했다. 그러나 이것은 연극으로서는 플러스가 되었다. 그 후 1664년에는 에도와 오사카(大阪)에서 동시에 계속하여 교겐(다막물)이 초연(初演)되었다. 1670년대에는 드디어 에도와 교토·오사카 등지에서 가부키 연기의 기초가 확고하게 다져졌다.

대도구(大道具)가 발달하고, 노무대(能舞臺) 그대로의 형태였던 무대도 계속 확장되더니, 이윽고 화도(花道)를 파생시켰고, 반야외(半野外)였던 것이 전개식(全蓋式) 극장으로 되었다. 그리고 내용·양식 모든 면에서 중세를 탈피하여 도쿠가와 시대의 독자적인 시민연극으로서 확립되어 갔다.

가부키의 발전기[편집]

歌舞伎-發展期 (1724-1803)

1724년엔 지카마쓰(近松)가 사망했다. 1803년은 겨우 문화문정(文化文政)의 난숙시대에 들어가려는 전회점(轉回點)이었다. 이 시기는 에도의 아라고도게이(荒事藝)의 예술적인 대성공이 한편에 있는데, 주로 인형세계에서 연발되는 명작 조루리가 작(作)·연출되어 공히 가부키에 전면적으로 채용되게 되어서 이른바 '기다유교겐'이라는 하나의 큰 블록이 형성되어 가는 시기이다.

그것은 동시에 또한 기다유 등과 샤미센 음악 요소(要素)가 가부키의 연기·연출에 크게 참여하게 됨으로써 오늘날과 같은 준음악극적인 양식을 특색으로 하기에 이른 과정이기도 했다. 샤미센 음악의 발달에 따라 무용극의 발달이 촉진된 사실도 간과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시기의 초기 30-40년간은 닝교조루리쪽이 훨씬 우세하였다. 이는 위대한 지카마쓰의 극문학상의 업적이 그 원인(遠因)인데, 지카마쓰 사망 후 10년이 경과했을 때, 인형 조종사 요시다 분사부로(吉田文三郞)가 오늘과 같은 3인 조종 방법을 완성한 사실이, 인형극 발전의 견인차가 되었다. 정교한 인형은 인간에게 육박할 정도의 리얼한 표현력을 획득하고, 더욱이 인간의 현실성을 초월한 요미환상미(妖美幻想美)의 세계를 현출한다. 기다유(義太夫)가 연 다케모토좌(竹本座)와 거기서 갈라져 나간 도요타케좌(豊竹座)는 서로 경쟁적으로 조루리의 명작을 내었다.

가부키의 난숙기[편집]

歌舞伎-爛熟期(1804-1871)

1804년은 막부의 에도문화도 최후의 난숙기를 거쳐, 막부의 말기로 접어드는 기점(起點)이며, 4세(四世) 쓰루야남보쿠(鶴屋南北)가 해학미가 가득 담긴 <텐지쿠토쿠베에(天竺德兵衛)>를 발표하여 세상을 놀라게 한 해이다. 1871년은 막부 말기의 가부키의 타성이 종국(終局)에 이르는 해이다. 이 시기에는, 에도에서 가난한 서민을 리얼하게 그려내는 세정교겐(世情狂言)이 속속 생겨나오고, 요괴무용(妖怪舞踊)도 받아들여져 복잡한 무대기구(機構), 트릭, 연출, 게자음악(下座音樂) 등이 매우 정교하게 완성되는 시대이다.

<텐지쿠토쿠베에>로 명성을 얻은 쓰루야남보쿠는 기발한 발상과 예리한 인간 통찰로 상가의 하층사회를 자유로이 그려냈으며, 1825년에는 집대성적(集大成的)인 명작 <시타니카이단(四谷怪談)>을 썼다.

가부키의 계승기[편집]

歌舞伎-繼承期(1872-현재)

교토(京都)에서 서양의 입지전(立志傳) 작품의 극화(劇化)가 상연된 것은 메이지 5년(1872)인데 그 후 극장은 양풍을 받아들여 확대되고, 문명개화나 서구화 풍속을 그려낸 작품이라든가 사실(史實) 존중주의 가부키교겐의 1종인 활력극(活歷劇) 등이 생겨났으며, 이윽고 정부가 중심이 되고 9세(九世) 이치카와 단쥬로(市川團十郞)가 이에 호응한 연극 개량운동도 일어났다. 그러나 메이지 21년, 신파가 발생하고, 40년경에 신극운동이 일어나는 정황 속에서 가부키는 결국 신시대적 연극을 향한 자기혁명을 이룩함 없이 전통연극과 고전예능으로서 계승된다는 기본선(基本線)을 정하였다.

가부키 배우의 특수성과 전통[편집]

歌舞伎俳優-特殊性-傳統가부키는 오쿠니(阿國) 이래, 여자는 남장을 하고 남자는 여장을 함으로써 반자연적(反自然的) 세계를 만들어내어 온 것이었다. 내부에 잠복한 매음생활 같은 것을 포함시켜서 1종의 불가사의한 미(美)에 떠받쳐진 것이 가부키의 미이며, 그것을 나타낸 것이 기예(技藝)이다. 부모·자식의 관계도 극 위에서는 스승·제자가 되었다.

가부키의 연출[편집]

歌舞伎-演出

가부키는 무엇보다도 형태를 중요시한다. 그러니까 진행중인 무대의 어느 한 순간을 잘라서 들여다보아도, 배우의 개개의 모습으로부터 다른 배우와의 균형·위치, 또 의복·가발·소도구·무대장치 등과 어울려서 항상 한폭의 그림이 되어 있게 마련이다. 가부키의 연출에서 일관되고 있는 것은 그 양식성(樣式性)이다. 더욱이 대사는 리드미컬한 표현 형태를 취한 채, 소위 게자음악(下座音樂)을 수반하고, 무대 효과에 해당하는 비·바람·물소리, 또 눈 내리는 소리마저도 음악화해서 표현한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가부키는 일종의 뮤지컬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단순히 양식적이라고 해도 그 연출 내용은 매우 복잡하다. 그 연극사(演劇史)가 보여주듯이, 민속예능, 노(能), 노교겐(能狂言), 닝교조루리(人形淨瑠璃)의 영향을 받아 그것이 가부키 속에서 발전해 감과 동시에, 가부키 자체 ―― 순(純)가부키 ―― 에서도 시대의 움직임이라든가 배우·작가(作家)에 따라서 끊임없이 새로운 경향을 지닌 연출이 생겨나고, 또한 이것이 전개되어 갔다.

가부키의 형[편집]

歌舞伎-型

가부키는 본래 배우의 기예본위(技藝本位)의 연극이다. 따라서 연출의 창조 과정은 개개의 배우들이 고안한 연출을 우선 존중하고, 이것을 주연배우가 하나의 앙상블로서 정리해 간다. 이 점은 서유럽의 근대극의 연출자라는 제3자가 일관된 의도에 따라 통괄하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라 하겠다.

형(型)이란 배우 또는 관계자들이 창조해 낸 표현형식을 말하는 것인데, 대본의 개수보족(改修補足), 연기연출(演技演出), 화장, 가발(머리에 꽃을 꽂는 등), 대도구(大道具), 소도구, 게자음악 등의 전체에 걸쳐 있어 넓은 범위이며, 그 수도 매우 많다.

그러나 그 중에서 표현형식으로서 적절한 경우, 당연히 거기에는 전승(傳承)이 행하여져, 다음 연출의 기초가 된다. 이른바 명배우인 이치카와 단쥬로의 형이라든가 하는 식으로 불리는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상연에 당도해서 전부를 답습하는 경우도 있는가 하면, 일부만을 이어받고 기타는 배우 자신의 해석과 연구를 첨가시켜서 상연하는 수도 있다. 그때는 또 그 배우의 형으로 되어서 다음 시대로 넘어가 남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