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문화·민속/세계의 연극/동양의 고전극/인도의 고전극
인도의 연극
[편집]印度-演劇
중국 연극의 유교적·도교적인 교의(敎義)를 기본 이념으로 하는 윤리적·정치적 공리주의나, 우리나라의 불교적·도덕적이며 또 오락 분위기적 연극 이념에서 본다면, 같은 아시아권(圈)에 있으면서도 인도 연극은 약간 취향을 달리하여 음악이나 무용·연극 등 모든 연극적 행위를 신비적·철학적 이상의 구상(具象)으로 하여, 거기에 천문학적인 과학지식으로 통일한다는 것이 고전의 정신이었다. 그러나 그 정신도 모습도 전통도, 오늘날에 와서는 오랜 동안의 피압박적 식민지상황과, 연극의 원류(源流) 발생이 난해한 산스크리트어에 의한 것이었다는 데서 점차로 민중으로부터 유리되어 본류로서의 발전을 방해하고, 거기서부터 파생한 지류만이 그 고장의 풍토와 혼합하여 각 지역 나름의 예능을 낳아, 그것이 겨우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는 형편이다. 그러나 그러한 향토적 유산 속에 오늘날에도 옛 산스크리트 연극의 원형을 볼 수는 있다. 그런데 영국 통치하에서는 매우 심하게 변형되거나 쇠퇴하는 수 밖에 없었다. 독립 후는 그 반동으로서 고전부흥의 소리가 높아졌으며, 민족 의식의 앙양에 따라 고극(古劇)에의 관심도 높아졌다. 또 한편 연극활동이 세계적으로 활발해짐에 따라 인도 고전극에 대한 재인식이 각 국의 전문가에 의해 강조되기 시작한 것도 인도 고전극의 부활에 큰 자극을 주었다고 하겠다.
인도의 고대연극
[편집]印度-古代演劇
고대 인도의 민족 문화는 밖에서 온 아리안 민족을 중심으로 하여 수립된 문화로서 독자적인 종교철학을 지니며, 또 독특한 연극문화를 창조했다. 엄밀히 말하면 베다의 성전(聖典)을 신앙하는 베다 아리안과 불교 또는 자이나교의 신도가 대표하는 비(非)베다 아리안의 둘로 나뉘며, 전자가 연극을 신성한 오락으로 간주한데 반하여 후자는 그 신성성을 인정하면서도 한편에서는 그 관능적인 쾌락성에 대해 엄격한 계율을 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결과는 하나였으며, 거기에 인도의 독자적인 연극에 대한 이상주의 이념이 형성되고, 비록 변형은 했어도 오늘날까지 전통으로서 유지되어 왔다. 그 원류는 베다에 있었으며, 또한 이 베다는 리그 베다(무용)를 중심으로 사마 베다(가요), 야쥬르 베다(흉내), 아트하르바 베다(감정)의 종합예술을 이룬다. 연극의 기본적 요소가 감정·흉내·가요·무용이라 한다면 인도 고대연극은 그 필요한 모든 요소를 구비하는 셈이 된다. 이 중에서 리그 베다는 대화를 곁들이는 무용으로서 지상의 인간과 하늘 위의 여인의 낭만적인 사랑의 이야기이다. 또 이 무렵에는 이미 실로 조종하는 인형극이 있었다고도 전한다. 기원 전 3세기의 마가다 왕조기(王朝期)의 것으로서 남(南)비하르 지방에 있는 동굴엔 당시의 극장 같은 것이 있어 고전 연극의 옛 그림자를 엿보게 하는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1세기와 2세기 사이에 불교의 보호자 카니시카 왕조의 궁정 시인 아스바 고샤의 <사리푸트라 푸라카라나>라는 작품이 있어서 단편적(斷片的)이나마 인도 연극의 전형으로 평가되고 있다. 2세기부터 3세기에 걸쳐서 인도 고대극은 급속한 발전을 보였다. 많은 극작가와 그들의 작품이 탄생했다는 것과 바라타의 음악·무용·연극에 관한 이론서 <나트야샤스트라>가 세상에 나온 것 등도 인도 연극의 여명기를 말한다고 하겠다. 이 가운데서 바하사의 3개의 비극과 서사시는 후의 2대 서사시 <라마야나>와 <마하바라타>에 영향을 주었고, 400년 구프타조 왕조의 칼리다사는 대표적인 극 시인으로서, 그의 3대시극 <말라비카 아그니미트라> <비크라모르바시야> <샤쿤탈라>는 산스크리트극의 모범이라 하여 후세에 이름을 남겼다.
샤쿤탈라
[편집]Sakuntala
칼리다사의 걸작으로 꼽히며, 이때까지의 서사시적, 도덕윤리적 규범에서 탈피하여 인간의 참된 모습을 예술적 표현으로까지 승화시켰다는 점에서 획기적인 의의가 있다.
무리차카테이카
[편집]Mrcchakatika
슈드라카의 대표작. 인도의 서민생활을 희극풍으로 리얼하게 묘사한 점이 이색적이라고 하겠다. 그 후 7세기에 바하바브티의 <우타라라마카리타>가 있으며, 고전에 신기교를 더하여서 새로운 경향을 보였었다. 8세기에는 비사카다타 등이 나와 활약했으나 산스크리트극은 앞서 말한 이유로 차차 쇠퇴하기 시작하여, 오히려 프라크리트어계(語系)의 우파르파카극(劇)으로 대신되는 한 시기를 맞이했다.
라마야나
[편집]Ramayana 산스크리트 대서사시로서 7편, 2만 4천 송(頌)의 시구(詩句)·시의 시조(始祖)로 알려진 발미키가 엮은 것으로 전해진다. 줄거리의 내용은 코살라 나라의 왕자 라마의 모험 무용담(武勇談)을 주축으로 하여 왕자와 왕비의 사랑, 원족(猿族) 하누마트의 충절 등을 섞은 이야기로, 기교적으로는 <마하바라타>보다도 뛰어난 미문(美文)이다. 따라서 후세의 문학·시·종교(라마 숭배)에 큰 영향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동남아시아의 각 지역에 미친 영향도 매우 컸다.
마하바라타
[편집]Mahabharata
산스크리트의 장편 대서사시. 원형은 상당히 오래 전부터 있었으나, 집대성된 것은 4세기경으로 추정된다. 18편이 10만 송(頌)의 시구와 1만 6천송의 부록으로 이루어진 대작으로, 줄거리의 내용은 쿠루족과 판두족의 전쟁이 중심이며, 결국 판두족이 이긴다는 이야기인데, 그 사이에 신화·종교·철학·법률·경제 등에 관한 설화가 삽입되어 있다. 이 작품도 후세의 인도문학을 비롯하여 정신면에 영향을 미침과 동시에 <라마야나>와 마찬가지로 자바나 그 밖의 동남아시아 각 지역의 문학·연극 등에 강한 영향을 미쳤다.
인도의 음영에 의한 연기·연출
[편집]印度-吟詠-演技·演出대서사시인 라마야나 <나마 왕의 이야기>, 마하바라타 <대인도 서사시>는 바라타 '음영시인'에 의해 사원 등에서 음송되는데 음악과 무용이 곁들여지며, 인물의 감정을 몸짓으로 나타냈으리라고 추측된다. 또한 자바나 기타 남방계의 와얀(그림자 연극, 인형극)에도 공통된 것이 있다고 여겨진다. 그리고 바라타 '음영시인'은 후에 배우라는 의미로 바뀌었으나 이 점도 자바 근방의 와얀 연출가이며 해설자인 다란과 성격이 같다고 하겠다.
인도시의 음영과 그 종류
[편집]印度詩-吟詠-種類
엄밀하게 말하면 인도 시의 음영은 정가극(正歌劇) <나타카>와 통속극으로 나뉘며, 또 고급극에는 무협극 <나타카>, 가정극 <프라카라나>, 신화극 <사마바카라> 등이 포함되어 있으며, 통속극에는 소무협극 <나티카>, 소가정극 <츠로타카>, 소극(笑劇) <노라사나>, 독백극 <바나> 등이 있다. 정가극의 희곡 구성은 독일의 연극학자 프라이타크의 희곡론에서 볼 수 있듯이, 고전희곡의 법칙에 적응하는 정연한 규칙 하에 이루어지며 발단(무카), 사건(브라팀카), 전개(가르바), 전향(轉向:비마르시야), 종결(終結:니르바나)의 5부로써 이루어지며, 일단 희곡(戱曲)의 고전적인 체제를 갖추고 있다.
인도의 가무연극 교전
[편집]印度-歌舞演劇敎典
<나트야샤스트라>라 하여 4세기경으로 추정되는 바라타가 쓴 산스크리트 연극에 관한 이론서이다. 음악·무용·연출·연기·의상·무대미술·극장·배우·관객론으로부터 수사학(修辭學)·운율론(韻律論)·시론 등, 이런 종류의 광범한 이론서로서는 가장 오랜 것으로, 후대의 모범이 되었다. 이것에 의한 인도 연극의 원류가 베다에 있음은 앞서 말했거니와, 연극은 무용·가요·흉내·감정의 종합예술이기는 하나 인간이 멋대로 만든 것은 아니며, 신의 협력으로 창조되고, 신에 의해서 혜택받은 신성한 오락이므로, 그만큼 품위를 지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수많은 번거로운 연극 작법이나 계율을 정해야 했다. 예컨대 비극적인 결말·처참한 묘사·살인·전투·반역·식사·목욕·탈의(脫衣) 행위 등의 무대장면을 금했다. 또한 이를 향락하는 관객의 관극 태도도 규율하였으며, 무지한 인간이나 이교도, 천민에게 대해선 관극이 금지되었었다. 그리고 연극의 목적은 시와 마찬가지로 관객을 즐겁게 하면서 교화(敎化)시킨다는 것이 주목적이었다. 그 방법은 인생의 온갖 모습을 묘사하여 구경거리의 정서를 높인다는 것이었다. 바꿔 말한다면 연극의 목적은 방자하게 자극하지 않는 한도내에서 관객의 마음에 깃들여 있는 시적 잠재 정서를 일깨운다는 점에 있다. 따라서 이러한 자격을 갖춘자는 왕후(王侯)귀족이나 교양있는 문화인에 한정된다. 이와 같은 봉건주의적인 연극 이념은 난해한 산스크리트어에 의한 희곡의 난해성과 어울려 더욱더 연극을 대중으로부터 유리시켜, 마침내는 쇠멸하는 운명으로 몰아냈으며, 겨우 그 옛모습의 일단만이 지방연극에 잔존한다는 상태로 되어 버렸던 것이다.
인도의 지방연극
[편집]印度-地方演劇
중세의 암흑시대를 맞이하여 중앙의 연극은 각지로 분산되어 지방의 민속예능으로서 잔존, 그 가운데에서 어떤 것은 예술로서 발전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지방예능에는 이미 아리안 계통의 것으로서 기원전 2세기경에 차칼 쿠투라는 흉내를 내는 이야기가 있으며, 대본은 산스크리트어로 쓰였고, 북과 심벌즈의 반주로 연출했다고 전한다. 이 연출형식은 후에 칼리다사, 하하사, 하르시야 등의 산스크리트 연극에도 사용되었다. 또한 파타캄 설화 무용이라는 것이 그 이전에 있었고, 춤의 양식은 후의 카타칼리에 계승되었다.
카타칼리·인도 4대 무용
[편집]Kathakali·印度四大舞踊아삼의 <오쟈파리>, 벵골의 <쟈트라>, 캐시미르의 <파테헤르>, 말라바르의 <카타칼리> 등을 인도의 4대 무용이라 한다. 이 가운데서도 특히 유명한 것이 카타칼리로서, 인도 남서 해안 말라바르 근방의 케랄라를 중심으로 발전했다. 말하자면 산스크리트극 쇠퇴 후의 전통예능으로서의 일종의 설화 무용이다. 춤의 안무(按舞)는 양식화되었으며, 무드라라고 하는 뜻을 지닌 일정한 타입이 5백개 이상이나 있어, 이러한 것이 어울려 말의 대역(代役)을 담당하는 전아하고 아름다운 춤이다. 최근에는 유럽을 비롯하여 미국·일본 등지에서도 소개되어 무용으로서의 가치가 재평가되고 있다.
인도의 현대극
[편집]印度-現代劇
인도 현대극의 여명은, 영국이 지배했던 대략 18세기 후반부터라고 하겠다. 주로 캘커타, 봄베이, 마드라스와 같은 시를 중심으로 발전했는데, 최초엔 영국인이 연출하는 영국인 상대의 것이었고, 오히려 한 러시아인이 봄베이에 극장을 세운 것이 구체적인 계기가 되었다고도 말할 수 있겠다. 그것과 파르시 극단의 공연 및 그 지방의 순회공연이 현대극 수립에 대한 자극제가 되었다. 최초로 유럽 연극이 소개된 것은 1795년, 영어극의 벵골어역(語譯)에 의한 상연으로서, 이때 처음으로 여배우가 등장했다. 1830년 이후 셰익스피어극이 활발하게 소개되어, 다른 유럽 근대극과 함께 주로 대학의 학생들에 의해서 실험적으로 시연(試演)되기에 이르렀다. 특히 벵골지방은 그 중심이었는데, 그것은 벵골 문학의 유산을 배경으로 하였으며, 또 외래문화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아들였다고 하는 지리적 사정이나 환경에 의한 것으로 여겨진다.
힌디극
[편집]Hindi劇
북인도의 힌두이즘을 모체로 하여 발전한 것인데, 여기에다 근대성을 부여한 것이 1930년 이후의 쿠리파나트 미슈라의 리얼리즘 연극이었다. 사라스찬드라 교수(실론 대학교수)도 말하고 있듯이 원래 인도는 문예나 미술 뿐 아니라 음악·무용·연극, 나아가서는 영화·텔레비전에 이르기까지 산스크리트적 교의에서 나온 고전주의 그리고 그 주의의 주조(主調)를 기본 이념으로 하는 그의 구상화, 즉 예술 표현상의 상징주의를 준봉해 왔던 것이지만, 이제는 연극을 통해 이 오래된 습관의 나라에도 유럽의 물결이 밀려오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많은 어려운 문제를 안고 있는 현재의 인도가 과연 새로운 연극을 시급하게 수립할 수 있을지 의문이나, 그러기 위해서는 아직도 오랜 세월과 대단한 노력을 필요로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