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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문화·민속/세계의 연극/서양의 고전극/유럽의 낭만파 연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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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파 연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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浪漫派演劇

낭만파의 고전적 강요에 대한 반발과 표현자유의 확인이라는 정신은 공통된다 해도 그 성격이나 방향은 각국에 따라 상당히 다르며, 특히 연극면에서 그것은 현저하다. 이탈리아의 만조니(Manzoni)가 1820년에 <카르마뇰라 백작(Il Conte di Carmagnola)> 서문에서 삼일치 법칙(三一致法則)의 폐기를 주장하고 그 영향 아래 프랑스의 스탕달(Stendhal, 본명 Henri Beyle 1783-1842)이 쓴 <라신과 셰익스피어>(1823)와 위고(Victor Hugo, 1802-1885)의 <크롬웰 서문>(1827)은 모두 셰익스피어를 이념으로 하여 갖가지 장르를 종합한 드라마를 주장했으며, 위고는 '오늘날은 드라마의 시대'라고 논했다. 위고나 만조니도 작가로서 낭만파의 대표적 희곡을 썼으며 독일에서는 슐레겔 형제의 이론과 티크, 클라이스트의 실제 작품은 분리되고 있다. 그리고 오스트리아의 작가 그릴 파르처를 간과할 수는 없다. 그러나 셰익스피어에의 존경은 각국이 공통적이다. 영국의 낭만파는 시에 집중되고 있으며 연극면에서는 거의 볼 만한 것이 없고 다만 바이런과 셸리에게 희곡이 있을 정도이다.

독일 낭만파 연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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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낭만파 연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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獨逸浪漫派演劇

일반적으로 독일낭만파(낭만주의) 연극이라 하면 18세기말-19세기의 30년 전후까지 독일에서 지배적이었던 문학과 연극사조를 가리키며, 전대(前代)의 계몽주의·고전주의와 겹쳐지는 면을 지님과 동시에 후대의 사실주의·자연주의의 싹으로서의 면도 지니며, 또한 낭만주의 그 자체의 모순된 성격 및 예술운동에서의 낭만적인 것의 주기성(周期性)에서 상당히 폭이 넓고 연속적인 주조(主潮)로서 파악할 수 있다. 따라서 넓은 뜻에서의 독일 낭만파 연극은 18세기 중엽의 레싱의 연극혁신에서 비롯되며 슈트름 운트 드랑(疾風怒濤運動)에서 괴테, 실러의 고전주의적 완성을 거쳐 클라이스트, 뷔흐너에 이르기까지 큰 흐름을 형성한다.

17세기의 독일은 바로크 연극의 전성기였으며, 18세기에 들어서자 오성(悟性) 존중의 계몽주의가 일어나 합리주의적 입장에서 바로크 연극의 황당무계함을 배척하고, 프랑스 고전극을 규범으로 하는 연극 혁신의 움직임이 라이프치히 대학 교수 곳스셰트(Johann Christoph Gottsched, 1700-66) 및 노이베린 극단을 중심으로 일어나 극작에서의 삼일치의 준수, 어릿광대의 무대로부터의 추방 등 여러 가지 혁신이 이루어졌다. 이 곳스셰트식의 형식 존중과 프랑스 모방에 대하여 스위스파를 비롯한 젊은 세대로부터는 격렬한 공격이 가해졌으며, 특히 레싱은 아리스토텔레스 시학이나 디드로 연극론을 근거로 하여, 차라리 셰익스피어의 자유분방한 형식에 의거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극작·평론 분야에서의 다채로운 실천활동을 통하여 독일 시민극의 길을 개척하였다. 계몽주의의 견고한 구습을 타파하고 개성의 자유로운 발현을 부르짖는 젊은 문학세대의 반향은 루소의 자연사상이나 클롭슈토크(F. G. Klopstock), 허먼, 헤르더의 이론에서 결정적 동인(動因)을 얻고 이어 슈트름 운트 드랑에 이르러 폭발했으며 형식파괴와 인습타파는 더욱 추진되었다. 이에 앞장선 작가가 젊은 괴테, 실러였으며 클링거(Friedrich Maximilian Klinger, 1752-1831), 렌츠(Jakob Mi­chael Reinhold Lenz, 1751-92) 등이 그 뒤를 따라 반계몽주의의 열광은 절정에 이르렀다. 이 운동의 문학적 연소의 시기는 짧았으며 두드러진 작품도 많지 않으나 괴테, 실러에게서 고전주의적 고요와 완성을 보았으며 또한 낭만주의에의 길을 준비한 공적이 크고 영국·프랑스에 준 영향도 무시할 수는 없다. 이 기성질서에 대한 반항의 폭풍도 1785년경에는 겨우 가라앉아 다시금 이성을 회복하는 움직임이 보이기 시작했다. 고전주의는 만년의 괴테, 실러에게 <파우스트(Faust)>, <발렌슈타인(Walle­nstein)> 등 인류의 유산이라 할 수 있는 위대한 작품을 낳게 했으며 독일의 문학·연극사에서의 최성기를 이룩하고 낭만주의에게 자리를 양도했다.

낭만주의는 고전주의에 대한 대립이라기보다 오히려 그 전개이며 독일적 소산이라고 하겠다. 중세에의 회귀적 경향이 짙었으나 이성을 배격하는 것이 아니라 이른바 '낭만주의적 아이러니'에서 볼 수 있듯이 합리주의와 주관주의의 통합을 목표로 함과 동시에 나폴레옹 전쟁에 의해서 상처를 입은 독일인에게 국민적 각성을 촉구하는 독일적인 국민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우선 예나와 베를린에서 시작되었다. 슐레겔(Schlegel) 형제가 창간한 잡지 <아테네움>, 특히 형인 아우구스트 빌헬름의 셰익스피어 작품의 번역출간 및 <극예술·극문학 강의> 등이 이론적 구실을 다했던 것이다. 그러나 소설을 예술의 최고 형식으로 삼는 낭만파의 미학은 희곡 분야에서는 사극에서 동화극, 몽환극, 종교극, 운영비극, 희극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면을 보였음에 비해 일반적으로 내용이 빈약했었다. 다만 클리이스트의 작품은 레싱의 희극과 함께 독일 연극사상 불멸의 금자탑을 수립했으며, 또한 티크의 동화극 <돈 주앙과 파우스트>나 <해학·풍자·아이러니 및 보다 깊은 의미> 등 기상천외한 희극을 쓴 그라베(Christian Dietrich Grabbe, 1801-1836)는 오늘날 재평가되는 기미가 보인다. 이 밖에 베르너의 운명비극, 브렌타노(Clemens brentano, 1778-1842)의 <퐁세 데 레온>, 아이헨도르프(Jos­eph won Eichenforff, 1788-1857)의 <구혼자(求婚者)>, 후기 낭만파인 플라텐(August Graf von Platen)의 <불길한 포크> 등의 희곡이 이 시기의 대표작이라고 하겠다. 당시 갈채를 받았던 쾨르너(Karl Theodor K

rner, 1791-1813)의 애국적 희곡은 통속미가 짙다. 그리고 바로크 연극의 서민적인 전통과 양식을 살려 낭만주의 연극에 새로운 국면을 보인 것으로는 빈 낭만파의 연극이 있다.

독일 낭만파 연극은 레싱에 의해 시작된 고전극 형식과 사회적 인습을 타파시키는 풍조를 널리 추진시켰으며, 국가적 민족적 각성을 촉구함과 동시에 자아 중심주의, 민족주의, 반어적(反語的) 전개 등에 의해 근대 및 현대의 문학·연극운동에 앞장서는 면도 있었으나 그 반면 감정의 한정없는 해방, 고답적인 주지주의, 현실도피나 신비주의적 경향 등으로 일찍부터 괴테가 통찰했던 퇴행적(退行的)인 일면을 드러내기도 했다.

넓은 뜻에서의 낭만주의적 경향은 근대·현대의 극작가에게서도 한 시기의 현상으로서 나타나 입센, 메테를링크, 하우프트만, 와일드, 다눈치오 등의 청년기 희곡에서 그 단편을 엿볼 수 있다.

레싱, 곳홀트 에프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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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tthold Ephraim Lessing(1729-81)

카멘츠시의 목사 집안에 태어나 라이프치히 대학의 신학과에 진학했으나, 노이베린 극단에 의해 연극 혁신의 계몽을 받았다. 그리하여 첫 희곡 <청년학자>를 써서 이 극단에 참가했으나 부채로 인해 베를린 대학, 비텐베르크(Wittenberg) 대학으로 옮겼다. 그 후 베를린에서 저술가로 출발, 계몽적인 연극 잡지를 발행하는 한편 독일 최초의 시민비극 <사라 심프슨 양(孃)>을 발표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또한 유태인인 친구와 평론지 <문학서간>을 편집, 곳스셰트 일파에 통렬한 반론을 시도했다. 7년전쟁을 배경으로 한 1막비극 <필로타스(Philotas)>(1759)를 쓴 이후 돌연 프로이센의 한 장군의 비서가 되어 5년에 걸쳐 방종한 생활을 보내기도 했다. 그 후 베를린으로 돌아와 그림과 시의 대상묘사의 특성을 논한 예술론집 <라오콘(Laokoon)>(1766), 군인희극 <미나 폰 바른헬름>을 발표, 확고한 지위를 확립했다. 67년에 함부르크에 국민극장이 창설되자 고문으로 초빙되어 그 2년 동안의 극평 활동에서 <함부르크 연극론>이 저술되었다. 국민극장의 경영이 실패하자 어느 고관(高官)의 사서직(司書職)을 보면서 고전 연구에 몰두, 또한 미망인 에바케니히와 47세에 최초의 결혼생활을 가졌으나 1년 만에 사별(死別)했다. 이 무렵에 대표적 비극 <에밀리아 갈로티>를 쓰게 됐다. 만년에는 함부르크의 주임사제(主任司祭)와 신학논쟁을 벌여, 루터 정통파의 배격을 받았으며, 그 반증으로서 사랑과 관용을 테마로 한 비극 <현자(賢者) 나탄(Nathan der Weise)>(1779)을 쓰고 사서관사(司書官舍)에서 사망했다. 계몽주의의 대표적 극작가·평론가로서 독일문학·연극의 근대화를 촉진시킨 시조라 하겠다.

슈트름 운트 드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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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urm und Drang

계몽주의에서 고전주의·낭만주의 시대에 걸쳐 과도적인 역할을 다한 문학·연극 운동을 말한다.

1765년경부터 85년경까지의 약 20년 동안이 이에 해당되며 사상적으로는 루소의 자연사상이나 시페네르(Spener)의 경건주의, 희곡적으로는 셰익스피어의 영향을 받아 자연적 개성의 존중, 삼일치 및 알렉산드랭 시각(時刻)의 부정을 표방했다. 운동의 호칭은 클링거의 동명(同名) 희곡에서 딴 것이며, 거친 청년의 열광과 파괴 및 그 파탄, 단명하면서도 후대의 문학운동에 커다란 영향을 남긴 이 운동의 본질을 잘 나타내고 있다.

대표적 희곡으로는 괴테의 초기 작품 <괴츠 폰 베를링겐(Gotz von Berlic­hingen)>(1773), 실러의 <음모와 사랑>, <군도(群盜)>, 클링거의 <쌍둥이>, 렌츠의 <군인들>, <가정교사> 외에도 이론적 저작에 렌츠의 <연극각서>가 있다. 특히 렌츠가 독일 리얼리즘의 개척자 뷔흐너(1813-37)에게 미친 영향은 유명하며, 20세기 초엽의 표현주의는 이 운동의 20세기적 전개라고 하겠다.

괴테, 요한 볼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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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ann Wolfgang von Goethe(1749-1832)

라인 강변 프랑크푸르트의 명문 집안에서 태어나 16세 때 라이프치히 대학에 입학, 법률을 배웠다. 재학중 목가조의 희극 <애인의 변덕>, <공범자>를 썼다. 70년에 슈트라스부르크 대학에 진학하여 헤르더(Herder)의 영향으로 셰익스피어의 위대함을 알게 되고 당시 지배적이었던 프랑스 고전주의 미학에의 반발이 심해졌다. 졸업 후 고향에서 변호사를 개업하는 한편 <괴츠(Gottz)>, <클라비고(Clavigo)>, <스텔라(Stella)> 등의 희곡과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Die Leiden des Jungen Werthers)>을 발표하여 작가적 지위를 확립시켰다. 75년 당시 18세였던 카를 아우구투스(Karl Augustus)대공을 보좌하면서 최고 지위까지 올랐다. 이 동안 <이피게니에(Iphigenie auf Tauris)>(1787), <에그몬트(Egmont)>(1788), <타소(Torquato Tasso)>(1790), 및 희극 <대(大)코프타(Der Gross Kophta)>, <시민 장군>, <서출(庶出)의 딸(Die Naturliche Thchter)>을 발표했으며 또한 궁정극장의 감독으로서 경영·연출·배우 교육 등 전반에 걸쳐 활약했다. 1806년에 <파우스트> 제1부를 완성, 31년 82세에 제2부를 완성시켰으며, 연극을 세계적 수준에 올려놓았다. 자연과학의 분야에까지 미치는 방대한 업적을 남겼으며, 연극면에서는 셰익스피어뿐만 아니라 프랑스의 고전작가까지 평가, 또한 그리스 고전극의 도입을 시도하였다.

실러, 요한 크리스토프 프리드리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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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ann Christoph Friedrich Schiller(1759-1805)

남부 독일의 소도시 마르바하(Marbach)의 하급 군인의 집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군관학교에서 법률과 의학을 배웠으나 남몰래 <군도(群盜, Die Rauber)>를 써서 일약 명성을 떨쳤다. 그 후 연대 의무관이 되어 집필활동을 금지당했기 때문에 도피 방랑생활을 하면서 <피에스코의 반란>(1783), <음모와 사랑(Kabale und Liebe)>을 썼다. 한때 만하임 극장의 전속작가가 되었으나 중병을 앓고 사퇴한 후 쾨르너의 도움으로 <돈 카를로스(Don Carlos)>를 완성시켰다. 87년에 바이마르로 가서 괴테와 교제를 맺고 네덜란드 독립사를 연구, 인정을 받아 예나 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그 후 미학, 철학, 역사에 관한 논문을 잇달아 발표하여 생활의 안정을 얻었다. 99년경부터 만년(晩年)의 희곡 창작의 시기에 들어가 3부작 <발렌슈타인> <마리아 슈투아르트(Maria Stuart)>(1800), <오를레앙의 소녀(Die Jungfrau von Orleans)>(1801), <메시나의 신부(Die Braut von Messina)>(1803), <빌헬름 텔(Wilhelm Tell)>(1804) 등의 대표작을 써서 괴테와 견주는 대작가가 되었다. 희곡의 대부분은 운명과 대결하는 의지의 힘을 묘사한 것으로서 그리스 고전극 정신의 재생을 지향하고 있다.

슐레겔, 아우구스트 빌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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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gust Wilhelm Schlegel (1767-1845)

하노버에서 태어나 괴팅겐 대학에서 신학 및 고전어를 배우고, 98년 이후에 예나 대학 교수로서 괴테, 실러와 친교를 맺었다. 또한 동생 프리드리히와 함께 잡지 <아테네움(Athenaeum)>을 창간, 낭만파의 이론적인 지주가 되었다. 97년 이후 셰익스피어의 작품 17편을 번역 간행하고 1801년 베를린 대학, 18년에는 본 대학의 교수가 되고 그 동안에 <극예술·극문학 강의> 등 수많은 업적을 남겼다. 동생과 함께 독일에서의 동양 언어학의 창시자, 스탈 부인(Madame de Stael)의 상담역으로도 유명하다. 셰익스피어, 칼데론(Calderon)의 번역을 통하여 독일 극문학의 발전에 기여한 공적은 크다.

티크, 요한 루트비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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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ann Ludwig Tieck(1773-1853)베를린에서 태어나 각지의 대학에서 문학 및 문헌학을 배웠다. 피히테, 괴테, 실러 등과 사귀고 바켄로더(W.H. Wackenroder)와의 공작(共作)으로 전기 낭만파를 대표하는 작가가 되었다. 초기의 대표적 희곡은 문단의 양상을 희화화한 풍자극 <장화를 신은 수코양이>인데 후에 사실적 작풍으로 옮겼다. 1801년에 드레스덴으로 이주, 중세문학과 셰익스피어 번역을 이어받아 슐레겔-티크판(版)을 완성시킨 이외에도 벤 존슨의 희극이나 <돈키호테(Don Quixote)>의 소개, 렌츠(M.R.Lenz), 클라이스트(H.von Kleist), 노발리스(Novalis)의 전집을 편집, 간행한 공적은 크다.

베르너, 차하리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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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acharias Werner (1768-1823)쾨니히스베르크에서 태어나 프로이센의 관리가 되었으나, 후에 가톨릭으로 개종(改宗), 사제가 되었다. 호프만이나 슐레겔과 교분을 맺었으며 또한 사극(史劇) <마르틴 루터>로 괴테의 인정을 받았다. 대표적인 희곡으로는 근친상간(近親相姦)과 상해를 다룬 <2월 24일>로 운명비극의 선구적 작품이 되었으나 문학적 평가는 낮다고 하겠다.

클라이스트, 하인리히 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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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inrich von Kleist (1777-1811)

오데르 강변 프랑크푸르트의 군인귀족 집에서 태어나 어릴 때 근위연대(近衛聯隊)에 들어갔으나 후에 프랑크푸르트 대학에서 철학을 배웠다. 한때는 칸트 철학에 열중했으나 실망하여, 학업과 약혼자를 버리고 방랑생활을 시작했다. 그 동안 처녀희곡 <슈로펜슈타인가(家)(Die Familie Schrofenstein)>(1803), <로베르트 귀스카르트(Robert Guiskard)>(1808)를 발표, 괴테를 앞서려는 야심을 보였다. 그 후 말단관리가 되었으나 여전히 작가활동을 계속, 1804년에 부패 재판관을 풍자한 걸작 희극 <깨진 항아리(Der Zerbrochenekrug)>를 비롯하여 많은 작품을 남겼으며 <암피트리온(Amphitryon)>으로 결정적인 명성을 획득했다. 후에 드레스덴에서 티크, 쾨르너와 친교를 맺고 동화적인 <하일브론의 소녀 쾨트헨(Das Kathchen von Heilbronn)>(1810), <펜테질레아(Penthesilea)>(1808) 외에 나폴레옹에 대한 프로이센적 애국심으로 가득찬 <헤르만의 싸움(Die Hermannschlacht)>을 썼다. 만년에는 <홈부르크 공자(公子)(Der Prinz von Homburg)>등의 걸작을 남겼으나 사회적 불우와 조국의 굴욕에 대한 마음의 상처 때문에 베를린 교회의 강변에서 유부녀와 권총자살로 일생을 마쳤다.

희곡 외에도 <미하엘 콜하스(Michael Kohihaas)> 등 8편의 소설이 있다. 낭만파로서는 특이한 작가이며 근대 리얼리즘의 탄생을 준비했다.

오스트리아 낭만파 연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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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낭만파 연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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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stria 浪漫派演劇

정통적인 고전파 연극이 존넬펠스의 연극 개혁이나 부르크 극장의 설립으로 확립되기 이전에 오스트리아에서는 18세기의 시초부터 독특한 민중연극이 발전하고 있었으나, 19세기의 전반에 이르러 전자(前者)의 방향에서는 코린을 거쳐 오스트리아의 국민적 고전극 작가라고 할 수 있는 프란츠 그릴파르처가 등장하고, 후자의 선에서는 페르디난트 라이문트가 나와 요정극(妖精劇)이라는 장르에서 민중연극을 문학적인 수준까지 높였다. 또한 그 요정극에서 출발한 네스트로이는 경쾌한 음악이나 시사적인 노래를 곁들인 희극을 많이 발표했으며 그 경향에는 비더마이어 시대의 시민생활에서 취재한 현실주의가 차차 강하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릴파르처, 프란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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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nz Grillparzer(1791-1872)괴테, 실러의 고전주의에 영향을 받은 오스트리아 최초의 고전적인 극작가로서 19세기 초엽의 낭만주의 연극으로부터도 많은 영향을 받았다. 빈에서는 1808년 이후 낭만파의 거성 슐레겔이 극문학을 강의하고 있었으며, 운명극의 작가 베르너는 만년에 가톨릭으로 개종하여 빈에서 설교사가 되어 있었다. 그릴파르처의 처녀작 <여자 조상>(1817)은 분명히 낭만파의 운명극을 본뜬 것이며 또한 오스트리아적 성격이나 비더마이어적인 교훈을 반영하고 있다고는 하나 실재(實在)와 가상(假象)의 2원(二元)을 테마로 한 <꿈도 인생>(1834)에서는 낭만주의적 요소를 볼 수 있다. 이 표제(表題)는 또한 셰익스피어와 함께 낭만파의 사람들에 의해 재발견된 칼데론의 작품에 의하고 있다. 그릴파르처는 또한 극시의 운문(韻文)에서도 독일 고전극으로 확립된 5각 억양격(五脚抑揚格)이 아니라 4각 억양격을 시도하고 있다. 일련의 사극 중 대표작인 <오토카르왕의 행복과 최후(Konig Ottokars Gluck und Ende)>(1825), <합스부르크가(家)의 형제싸움>은 고전적인 작풍이나, 프라그의 전설적 건국을 다루는 <리부사(Libussa)>에서는 그 국민적·국가적 지향(志向)에 있어서 낭만주의와도 통한다. 이 테마는 브렌타노가 <프라그 창립>에서 다룬 것과 같다. 그러나 무한한 확대를 너무 구한 나머지 정통적인 드라마 형식에서 벗어나거나 단편(斷片)인 채 끝나버리는 낭만극에 비하면 그릴파르처는 완결된 극 형식에서 벗어나지는 않는다. <사포(Sappho)>(1819), <금양모피(金羊毛皮, Das Goldene Vlies)>(1822), <바다의 물결, 사랑의 물결(Des Meeres und der Liebe Wellen)>(1840) 등의 대표작은 차라리 고전적인 경향이 짙다고 하겠다.

그릴파르처의 작품은 희극 <속이는 자에게 재앙 있으라>의 실패(1838) 이후 만년에 재평가를 받기까지 한동안 빈의 무대에서 자취를 감추었으며 이 시기는 민중극의 전성기이기도 했었다.

라이문트, 페르디난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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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rdinand Raimund(1790-1836)황당무계한 역사 대활극이나 코믹 등의 계보에 속하면서도 18세기 말부터 등장한 마술극, 요정극(妖精劇:모차르트의 <마적>도 이와 관련이 있다)을 예술적인 수준으로 높인 사람이 라이문트이다. 초차원적(超次元的)인 요정의 세계와 평범한 시민 세계의 교차를 바로크적인 무대전환으로 구사하면서 묘사해 나가는 이 음악희극에는 오스트리아 특유의 2원주의(二元主義)나 비더마이어적 세계관을 강하게 나타내면서도 초험적(超驗的)인 세계와의 관계에 있어서 낭만극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백만장자가 된 농부> <알프스왕과 염세주의자> <낭비가> 등은 그가 남긴 이 장르의 걸작이며 <사로잡힌 환상>은 예술 자체를 테마로 한 비유적인 요정극이다.

네스트로이, 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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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an Nestroy(1801-62)

처녀작 <악령 룸파치바가분 두스(Der base Geist Lumpazivagabundus)>(1883)는 아직 요정극이라 하나 이미 일상의 차원, 서민계급의 사서나 통렬한 풍자에 중점을 두고 있었으며, 걸작이라는 <기분풀이> <수호신> 등은 오히려 리얼리즘으로 손꼽을 수 있는 풍자희극이다. 그는 또한 낭만파 가극(마이어베어, 바그너)을 패러디화(parody化)하고 있으며 이는 독일 후기 낭만파의 작가(프라텐)의 지적인 패러디 희극의 시도와 비교할 수 있을는지 모른다. 낭만파 시인이라고도 할 수 있는 레나우의 <돈 주앙> 등은 무대와는 별로 관계를 맺지 않았었다.

프랑스 낭만파 연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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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낭만파 연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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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nce 浪漫派演劇

프랑스 연극 사상에서 낭만파 연극이 그 주류를 차지했다고 할 수 있는 시대는 뒤마 페르(Dumas Pere)의 <앙리 3세와 그 궁정>이 초연된 1829년부터 위고의 <성주(城主)들>의 상연이 완전히 실패하는 1843년까지의 약 15년간에 지나지 않으며, 작가로서는 뒤마 페르, 비니, 위고, 뮈세(A.Musset)의 네 작가를 들 수 있고 따라서 여기에 포함되는 극작품의 수도 결코 많지는 않다. 고전비극이 쇠퇴하면서도 약 2세기에 걸쳐 프랑스 연극의 주류를 이루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짧은 생명이지만, 그러나 연극사상에서 차지하는 의미는 매우 중대하다. 아니 오히려 고전극의 지배가 길었던 만큼 그 타도에 성공한 낭만파 연극의 역사적 의의는 크다고 하겠다. '유럽 시민극'의 항목에서 이미 말했듯이 비극의 갱신이라고 하는 18세기 이후의 명제가 그 완성을 보기 위해서는 프랑스 대혁명에 의한 정치적 자유의 획득을 기다려야만 했었다. 낭만주의는 이와 똑같은 의의 아래 이루어진 예술적인 자아의 복권(復權) 요구이며 그런만큼 연극 분야에서는 고전극의 '보편성, 절도(節度), 이성(理性)'에 바탕을 둔 모든 규칙의 완전한 철폐가 첫째 목표가 되었음은 당연하다고 하겠다. 그러나 당시 프랑스 극단(劇壇)의 형편을 보면 이른바 상류계급 취향인 순문학으로서의 고전주의 연극의 존속과 병행하여 전세기(前世紀)의 드라마(正劇)를 일부 합류시킨 멜로드라마(大衆劇)가 대혁명 이후 파리의 서민층에 유행하고 있었다. 여기서는 애초부터 고전극적 제약이 문제가 되지 않았으며, 화려한 무대에서 펼쳐지는 복잡한 줄거리의 흥미나, 공포와 유머의 혼합, 강렬하고 감동적인 장면 등이 많은 관객을 동원했던 것이다. 낭만파 연극의 지도자가 된 위고도 어릴 때는 멜로드라마의 애호자이며 실제로 그의 극작품의 어떤 것, 예컨대 <뤼크레스 보르지아(Lucrece Borgia)>(1833) 등은 '멜로드라마의 코르네유'라고 불리었던 픽세레쿠르(Pixerecourt)의 작품을 상기시키는 것이 있다. 낭만파 연극과 이 대중극과의 관계는 프랑스 비극의 쇄신을 지향하는 그들에게 있어서 자랑할 만한 것이 못되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들이 스스로 스승으로 삼았던 작가는 독일의 슐레겔, 실러 및 영국의 셰익스피어뿐이다. 스탈 부인 이후의 독일열에 의해 1814년에 슐레겔의 <극예술 및 문학에 관한 강의>가 프랑스어로 번역되고, 극작에서는 실러의 <군도(群盜)> 및 그 밖의 작품이 압도적인 영향력을 갖고 많은 모작(模作)이나 번안 작품을 낳았다. 셰익스피어의 소개에 관해서는 볼테르 이후 뒤시스(J. F. Ducis), 르 투르느르, 기조 등이 시도하고 있으나 모두가 고전극의 제약을 탈피하지 못했으며 참다운 감동을 전하지 못했다. 그런데 1827년, 켐블, 킨, 스미드슨 등 영국의 명배우들의 영어를 사용한 극 상연이 낭만파의 청년들에게 대단한 감명을 주었음은 뒤마나 베를리오즈 등의 회고록이 전하는 대로이다. 이후 셰익스피어의 영향은 실러를 능가할 정도가 되었으며 2년 후에는 비니의 <오셀로>, 또는 <베니스의 무어인(人)>이 그 대담성에도 불구하고 일단은 성공을 했던 것이다. 비니는 이 밖에 시인의 순교(殉敎)라고 하는 주제를 간결한 필치로 묘사한 걸작 <차타턴>을 마리 드르바르의 열연으로 성공시켰으며, 뒤마는 뛰어난 무대감각으로 낭만파적 주인공 <안토니>를 무대 위에 실현시켰다. 그러나 낭만파극에 있어 가장 중요한 작가는 이 운동의 지도자인 위고와 고전극에 비견되는 걸작을 남긴 뮈세라고 하겠다.

위고, 빅토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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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ctor Marie Hugo (1802-85)

낭만파극의 지도이론은 1827년의 <크롬웰(Cromwell)>의 서문에 제시되었다. 위고는 여기서 시의 발전역사를 서술하여, 원시 시대를 서정시, 고대를 서사시, 중세 이후를 극의 시대라고 했다. 그리고 새로운 낭만파의 연극은 근대사상의 근간을 이루는 그리스도교적 2원론(二元論)에 의거하여 영혼과 육체, 하늘과 땅, 숭고함과 그로테스크 사이에 영원히 되풀이되는 대화를 극의 진수(眞髓)로 해야 하며 이것이야말로 현대의 완전한 예술양식이라 말한다. 또한 주인공을 추상적인 존재로 그치지 않게 하기 위한 지방색의 채용, 천재의 자유로운 발양(發揚)을 방해하는 비현실적인 삼일치(三一致) 법칙의 폐지, 자연(현실)의 모방을 예술로 승화시키는 운문(韻文)의 채용선 쇄신 ―― 요컨대 이것은 전세기 이래 비극의 쇄신을 위해 시도되어 왔던 많은 이론을 종합 확인한 것이나 그 대담한 표현과 명확함으로 인하여 하나의 강령으로서 신성시되었다. 위고는 이 이론에 바탕을 두고 희곡 <에르나니(Hernani)>를 썼으며, 여러 가지 장애에도 불구하고 1830년 2월에 프랑스 극장에서 상연을 했다. 그는 고전파의 방해에 대비하여 미리 수많은 동지를 '박수치는 사람'으로서 극장 안에 배치, 청년시인 고티에가 빨간 조끼를 입고 싸움의 앞장을 섰던 일화는 유명하다. 상연은 야유와 박수가 엇갈리는 가운데 별다른 지장 없이 끝났으며 낭만파는 마침내 결정적인 승리를 획득했다. 이것은 에르나니 싸움(La Bataille d'Hernani)이라 불린다. 위고는 이 승리 후에 잇달아 극작을 시도했다. 그 주된 것은 앞서 상연 금지를 당했던 <마리용 들로름(Marion Delorme)>(1831)을 비롯하여 <왕은 즐긴다>(1832), <뤼크레스 보르지아(Lucrece Borgia)>(1833), <마리 튀도르(Marie Tudor)>(1833), 또한 운문극 <뤼 블라스(Ruy Blas)>(1838), <성주들>(1843) 등이다. 이 가운데 <성주들>은 13세기의 라인강 주변의 성주들을 주인공으로 한 서사적 색채가 강한 것으로 프랑스 극장에서의 초연은 완전한 실패로 끝났으며 위고도 이후 극작을 포기하다시피하여 낭만파극은 실제로 그 생명이 끝났다고 할 수 있겠다. 일반적으로 위고의 희곡에는 강인한 극행위(劇行爲)가 결여되어 있으며 극의 본질인 갈등보다는 줄거리나 대사(臺辭)의 서사성(敍事性)이나 서정성에 역점을 두는 결점이 있다. 당시 관객의 취미는 낭만파 극의 용만성(冗漫性)과 소란함에 싫증을 느껴 고전적인 간결함을 구하고 있었으며, 뮈세는 일찍부터 그 폐단을 통감, 낭만파의 시적 환상을 고전적인 절도(節度)로 다룸으로써 참된 걸작을 남겼다.

뮈세, 알프레드 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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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fred de Musset(1810-1857)뮈세의 극작이 시대조류에 항거할 수 있었던 이유의 하나로는 그의 작품이 상연을 전제로 하지 않고 쓰여졌다는 외적 조건이 있다. 최초의 극작인 <베니스의 밤>은 1830년 오데온 극장에서의 첫 상연일에 주연여우의 과실도 있고 해서 야유와 욕설 가운데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극작을 단념하지 않고 다음에 출판한 시집에서는 <술잔과 입술> <처녀는 무엇을 꿈꾸는가>의 두 운문극을 시도하여 '안락의자에서 보는 연극'이라는 제명을 붙였다. 이 작품으로 극작에의 방향을 확인한 그는, 그 후 세계평론지(世界評論誌)에 상연을 고려하지 않는 많은 극작품을 발표했다. 33년의 <앙드레아 델 사르토(Andrea del Sarto)>를 비롯하여 <마리안의 변덕(Les Caprices de Marianne)>, 34년의 <판타지오(Fantasio)>, <사랑을 장난으로 하지 말아라(On ne Badine pas avec l' Amour)> <로렌자초(Lorenzaccio)> <종마(種馬)>, 37년의 <바람기(Un Caprice)> 등이 극작집 <희극과 격언극(格言劇)>에 수록되어 있다. 이러한 작품은 상연상의 제약이 없기 때문에 한층 자유로운 형식이나 여유있는 시정(詩情)을 발휘할 수 있었으나 동시에 마리브식(式)의 정밀한 심리주의를 계승하여 프랑스 연극의 전통을 확대, 강화했음도 잊을 수 없는 일이다.

특히 사극(史劇) <로렌자초>는 셰익스피어풍 규모와 문체의 화려함을 갖춘 낭만파극의 걸작으로 손꼽힌다. 뮈세의 극은 1846년에 <바람기>가 여배우 알랭에 의해 상연된 이후 그 연극적 가치가 재평가되었으며 잇따라 각광을 받았으나 20세기에 들어와 연극에서 시정을 되찾으려는 자크 코포의 운동 후 처음으로 참다운 이해를 받았다고 하겠다.

영국 낭만파 연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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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낭만파 연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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英國浪漫派演劇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초기의 영국은 시와 소설의 전성기이며 정통연극의 불모의 시기이기도 했다. 이 시기의 연극은 드루리 레인(Drury lane)과 코벤트 가든의 두 극장에서 상연되는 것과 상연을 궁극의 목적으로 삼지 않는 이른바 '서재극(書齋劇)'에 속하는 시극의 두 종류에 불과했다. 낭만파 연극이라는 것은 센티멘털한 멜로드라마나 소극(笑劇) 등 스펙터클풍의 극을 주류로 하는 전자에 대해 후자, 즉 독일 낭만주의와 중세 취미에 매혹된 시인들의 작품을 가리키는 것이다.

일찍부터 독일문학을 연구하여 괴테의 <괴츠 폰 베를링겐>(1779)을 번역한 스코트(Sir Walter Scott)를 비롯하여 영국 낭만파 시인들의 대부분이 극작에 손을 댔으나 워즈워스(William Wordsworth, 1770-1850)의 <변경(邊境)의 사람들>(1795-6)이나 콜리지(Samuel Taylor Coleridge, 1772-1834)의 <회한(悔恨)>(1813)처럼 실러의 <군도>의 영향을 현저하게 볼 수 있는 것, 또는 중세 암흑시대를 배경으로 하면서 셰익스피어적이며 낭만적인 세계를 그리려 한 키츠(John keats)의 <오토 대제(大帝)>(1820) 등은 모두 연극으로서는 실패작이었다. 그들 가운데 비교적 극작가의 소질을 엿볼 수 있는 사람은 셸리(P.B.Shelley, 1792-1822)와 바이런(Lord George Byron, 1788-1824) 두 사람이다. 셸리에게는 우주적 규모의 장대한 극시 <해박한 프로메테우스(Prometheus Unbound.)>와 엘리자베스 왕조 연극을 모델로 한 비극 <쌍시 일족(一族)>(1819)이 있으며, 특히 후자는 낭만파 시극 가운데에서 가장 주목되는 대표작으로서 높이 평가받고 있다(1886년에 런던의 셸리 협회에서 초연되었으며 그 후에도 몇 차례 상연이 있었고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한편 바이런은 드루리 레인 극장의 위원일을 본 적도 있고 드라마에 대한 실제적인 흥미를 가장 적극적으로 보인 시인으로서, <맨프레드(Manfred)>(1817)를 비롯하여 <카인(Cain)>, <마리노 팔리에르(Marino Faliero)>(모두 1821), <워너(Werner)>(1822)등, 양적으로 다른 시인들을 능가할 뿐만 아니라 희곡에서도 본질적으로 상연 가능한 적성을 갖추고 있었다. 그의 생존중에 상연된 유일한 작품 <마리노 팔리에로>나, 죽은 후 6년 만인 1830년 상연되고 <괴츠>나 <군도(群盜)>의 영향이 가장 짙은 <워너>가 대표하고 있듯이 연극적 기교에 대한 풍부한 지식을 가진 작가는 적어도 낭만파 시인 가운데에서 극작가로서의 성공에 이르는 최단거리에 올랐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리고 실제로 바이런을 극작가로서 재평가하려는 기운도 근년에 와서 서서히 높아지고 있다.

낭만파 연극의 상연형태와 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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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파 연극의 상연형태와 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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浪漫派演劇-上演形態-俳優

고전극의 완결된 극형식과 비교하여 형식에 있어서는 유동적이고 내용적으로는 환상적인 낭만파 연극은 이미 확립되어 있던 일정한 무대의 범위 안이라고는 하나 마땅히 극장 공간의 확대를 요구한다. 티크처럼 무대를 앞뒤 뿐만이 아니라 상하의 공간으로 나누어 일정한 범위의 무대와 셰익스피어 무대의 통합을 지향하는 시도 등은 가장 특징적인 것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생각은 임머만(K. Immermann)의 무대양식에 의해서 답습되었으나 일정한 범위의 무대형식의 파괴에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오히려 무대기구나 조명의 발전으로 환상적인 파노라마 세계를 무대 위에 실현시키는 스펙터클적인 상연법이 낭만파 시대의 공통적인 특징이라고 하겠다. 프랑스에서는 유명한 <에르나니>의 장치를 담당한 바 있는 시셀리(1782-1862)의 회화적(繪畵的)인 무대가 유명하며 바이런도 관계한 바 있는 런던의 드루리 레인 극장은 개스 조명의 도입으로 초지연적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영국에서는 거대한 관람석을 갖는 스펙터클적인 극장이 지배적이라는 폐단도 유발시켰다. 독일의 싱켈은 많은 낭만파 오페라의 장치에도 손을 댔으며 이탈리아에서는 바니아라가 오페라 미술을 완성했다. 낭만주의의 일면인 고대나 중세에의 동경은 미술에도 정확한 시대고증을 요구한다. 프랑스의 명배우 타르마(1763-1826)는 그 격정적인 연기와 충실한 역사적 의상의 착용으로 낭만파의 선구가 되었다. 도르바르나 루메틀 등은 낭만파 시대의 프랑스 명배우로 손꼽힌다. 영국의 의고전파(擬古典派) 배우 C. 켐블(1775-1854)의 셰익스피어극 공연은 프랑스에서 낭만파 연극의 운동을 크게 자극했다. 또한 영국의 배우 매크레디는 셰익스피어극의 군중 장면의 연출에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다. 걸출한 개성적 배우에 의한 주역 장면과 군집(群集)장면의 교체가 그 특색이다. 한마디로 낭만파의 배우는 강렬한 개성과 자유분방한 상상력이 특색이라고 하겠으며 다른 면에서는 앙상블에서 유리되기 쉽다. 이프란트는 스펙터클한 연출이나 운명극의 채용으로 연출가로서는 낭만극 연극과도 관계를 지니지만 배우로서는 고전적이며 외형으로 배역을 조형(造形)했다. 티크가 즐긴 프레크나 전형적인 낭만파 배우 로트비히 드브리앙(1784-1833)은 상상력에 위탁하여 안에서 밖으로 조형하는 배우이며 자기가 맡은 역에 불가사의한 마적(魔的) 요소를 줄 수가 있었다. 일족(一族)인 에밀 드브리앙도 저명한 배우이다. 영국에서는 켐블과 함께 불리는 에드먼드 킨(1787-1832)이 직관적인 배우의 대표이며 낭만주의적인 국민극이 왕성했던 이탈리아에서는 루이지 베스트리(1781-1841)가 성격배우로서 뛰어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