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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문화·민속/세계의 연극/서양의 고전극/프랑스의 고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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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고전극의 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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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nce 古典劇-槪觀

16세기에 도입된 그리스와 로마 고전극의 영향은 합창대의 존재나 서정적인 긴 대사 등에 나타나 이론상의 요구를 충분히 만족시켜 주지는 못했다. 16세기 후반부터 1630년경까지의 프랑스 연극계의 주류는 오히려 이상주의적인 합법칙(合法則) 연극에 대한 반동(反動)이라고도 할 수 있는 바로크 연극(baroque drama)이었다. 그 주요한 장르(genre)는 에스파냐의 영향을 받은 희비극이다. 이 바로크의 특징은 운동성과 정념(情念)의 전면적 표출 및 표현의 자유분방에 있다. 당시의 관객이 요구한 괴이(怪異) 모험에 대한 취미를 줄거리의 변화로 충족시킨 것이 희비극이며, 초자연적인 무대로 우아한 연애를 펼쳐 보인 것이 이탈리아계의 목가극(牧歌劇)이었다. 그러나 프랑스에서는, 후자는 오히려 당시에 크게 유행했던 오노레 뒤르페(Honore d' Urf,e 1568-1625)의 장편소설 <아스트레>(1610-27) 등의 전원소설에 흡수되어 연극의 장르로서는 별로 발전하지 못했으나 라캉의 <전원극(田園劇)> 같은 유명작도 있다. 희비극의 활발한 움직임이나 자유로운 줄거리 등은 관객을 매혹시켰다. 1628년 상연된 장 드 실랑드르(Jean de Schelandre)의 희비극 <틸과 시돈>에 보낸 프랑수아 오지에(Fran

ois Ogier)의 서문은 바로 희비극 옹호의 이론이라 하겠다. 실재의 인생에도 즐거운 일이나 슬픈 일은 섞여 있기 때문에 무대 위에서도 쌍방의 혼합이 자연스럽다고 하는 이러한 희비극은 코르네유의

<르 시드>가 발표된 1636년경까지 크게 유행했다(<르 시드>의 초판은 희비극이라는 제목이다). 이 장르의 대표적 작자는 알렉산드르 아르디(Alexandre Hardy, 1570-1632?), 장 드 메레(Jean de Mairet, 1604-86), 트리스탕 레르미트(Tristan l' Hermite), 로트루(Rotrou, 1609-50) 들이다. 특히 아르디는 부르고뉴 극장의 전속 작가로서 약 600편의 작품을 남겼으며, 그의 공적은 합창을 배제하고 라틴풍의 번잡한 수사법(修辭法)을 폐지했으며 무대의 움직임을 중시했다는 점에서 크다고 하겠다. 이리하여 프랑스 연극은 연극성이라는 점에서는 꾸준한 진보를 보였으나, 국내에는 종교전쟁의 여운이 아직 가라앉지 않았고 앙리 4세(재위 1589-1610)가 광신자의 손에 쓰러지는 등 불안한 사회정세를 반영시키고 있었으며, 연극의 세계도 여전히 피비린내 나는 것이나 황당무계한 작품이 환영받고 있었다.

이것이 루이 13세의 치세가 되어 리슐리외(duc de Richelieu, 1585-1642)의 정치로 사회정세가 안정되면서 우아·세련을 요구하게 된다. 후에 몰리에르가 <재치를 뽐내는 아가씨들>에서 통렬히 풍자한 브레시오지테(才人才媛氣質)는 당시 이 새 풍조의 지도적 역할을 다했다. 즉 상류계급에서는 명사나 귀부인을 중심으로 하는 귀족 문인이 모이는 살롱(salon)이 형성되고, 언어나 예의 범절을 세련케 하는 곳이 되어 지식인에 의한 국어의 순화운동과 결부되는 커다란 힘이 되었다. 이러한 살롱은 이상적 인간상으로서 우아하며 교양이 높고 더구나 용감하고 성실한 '오네콤(紳士)'의 상(像)을 만들었다. 이와 같은 운동이 번짐에 따라 극계나 작품에도 이러한 이상에 입각한 예절이 요구되기 시작했다. 루이 13세(1610-43)는 칙령으로 '배우에게 모든 부도덕한 언동을 금'하고 재상 리슐리외는 추기경의 저택에 훌륭한 무대를 설치한 뒤 스스로 집필하였고, 또한 한 무리의 작가들에 대한 지원자가 되어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창립(1635)에 기여했다.

이러한 상황 아래 고전적 교양이 깊은 지식인의 발언력이 연극문학에 대해서도 강대해지고 '비앙세안스(예의범절)프레상브랑스(사실적)장르의 엄연한 구별삼일치(三一致)의 법칙' 등 고전주의의 원칙이 형성되었으며, 1634년에 메레의 비극 <소포니브스>는 프랑스 최초의 합법칙 연극으로서 성공했다. 그리고 당대 문단의 원로격인 장 샤플랭(Jean Chapelain, 1595-1674)은 리슐리외의 동의를 얻어 <연극예술에 관한 서간>을 발표, 삼일치의 법칙을 비롯하여 고전극의 법칙을 주장했다. 전세기(前世紀) 이후 파리에는 부르고뉴 극장 이외의 상설극장은 없었으나 1628년에는 비극배우 몽드리 극단이 마레 극단을 창설, 1658년에는 몰리에르 극단이 프티 부르봉에서 공연하게 된다. 17세기 초엽에는 중세적 병렬무대가 남아 있었으나 1618년에 니콜라 사바티니의 <연극기계장치 제작의 실제>가 발행되고 이탈리아식 장치가 채택되었다. 조명은 촛대를 매달아 사용했으며 상연중에는 이를 끌어내어 촛불의 심지를 자르는 등의 방법을 썼다.

삼일치의 법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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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一致-法則 Regle de trois unites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시학(詩學)>에서 비극은 "가능한 한 태양의 1회전하는 기간"에 한정하고, 그의 줄거리는 "쉽사리 기억할 수 있는 크기"로, 극중의 사건은 거의가 "동시에 실현하는 것을 모방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이것들은 그리스 비극들을 상연할 때의 외적 조건이었으며, 스카리졔 전후(前後)에 이탈리아에서 프랑스로 들어온 문예부흥기의 연극이론은 이를 엄밀한 규칙으로 해석했으며, 샤플랭 등 지식인은 삼일치 또는 삼단일(三單一)의 법칙으로서 프랑스 고전극에 도입했던 것이다. 이를 단적으로 표현한 것이 부알로(Boileau)의 <풍자시> 제3에 나오는 "한 장소에서, 하루 중에 오직 하나, 완성된 일이 마지막까지 무대를 충만시킬 수 있도록 하라"는 말이다. 이것은 고전극의 중요한 요건이 되어, 1637년에 코르네유의 <르 시드>의 대성공 때 생겨난 '르 시드 논쟁'의 쟁점의 하나는 이 비극이 시간적·장소적으로 단일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리슐리외의 명을 받은 샤플랭이 '<르 시드>에 관한 아카데미의 의견'을 발표하기까지 문단과 사교계가 둘로 갈라지는 등의 소동을 빚었다. 즉 코르네유에게는 이러한 법칙이 부담이었으며 라신은 이를 편하게 소화시키고 있었다. 즉 라신의 <베레니스> 서문에는 "비극에서 사람을 감동시키는 것은 진실다움 이외는 없다. 몇 주간이 걸려도 일어날지 어떨지 알 수 없는 많은 일들이 하루 사이에 일어나는 연극이 진실답다고 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라고 적혀 있다.

뷔를레스크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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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rlesque派

원래의 뜻은 고귀한 대상을 야비하게 표현하는 정신으로서, 1600년경 이탈리아로부터 프랑스에 들어왔다. 초기에는 재치있는 말을 농하는 경향을 띠었으며 예술 형태로서는 1650년경에 유행했던 '패러디'를 낳았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는 폴 스카롱(1610-60)의 <가짜 비르지르>가 있다. 스카롱은 <조드레> 등 천박하면서도 유쾌한 희극작품을 남겼다. 또 하나의 대표자 시라노 드 베르즈라크(1619-1655)는 박학한 무신론자로 야릇한 저작을 남겼으며 사상적으로는 몰리에르에게 영향을 미쳤다 한다. 뷔를레스크의 연극계에서의 한 경향은 희비극 등의 유행에서 찾아볼 수 있다. 목가극적 비극의 명작 <피라므와 티스베>를 쓴 테오일 드 비오(Theohile de Viou, 1590-1626)는 사상적으로 시라노와 가깝다. 또한 메레(Mariet, 1604-1686)의 희비극과 전원극을 혼합시킨 작품 <시르바넬>도 뷔를레스크적 연극의 한 예라고 하겠다.

코르네유, 피에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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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erre Corneille(1606-1684)

루앙의 성직자의 집안에서 태어나 신앙심이 깊은 분위기 속에서 자라고 예수회(Society of Jesus)가 경영하는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라틴문학, 특히 비극시인 세네카에 심취했다. 후에 에스파냐 연극을 연구하여 그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수학(修學) 후에는 고향 르왕에서 성직자가 되는 한편 사교계에도 출입, 연애사건이 계기가 되어 쓴 희극 <멜리트>를 1629년에 파리에서 상연, 예상외의 성공을 올렸기 때문에 파리로 진출했다.1633년, 그는 리슐리외 등 4명의 극시인과 함께 '코메디 데 튀를'를 형성했으나, 소심한 반면 자유를 갈구하는 성격 때문에 탈퇴하여 루앙에 돌아왔다. 그 후 새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여 36년에는 <르 시드>를 발표, 대성공을 거두는 한편, 대논쟁을 일으키기도 했다. <르 시드>는 이 작가의 성공작인 동시에 프랑스 고전극의 기초를 확립시킨 작품이기도 하다.

청년기사 동 로드리그는 아버지가 받은 치욕을 씻기 위해 애인 시메인의 부친 동 고메스 백작을 결투로 쓰러뜨린다. 시메인은 자식된 의무로서 국왕에게 로드리그의 목숨을 살려달라고 호소한다. 이 의무감에 의해 정념을 초극하려는 경향으로서 코르네유의 비극은 의지 비극이라고도 불리며 이는 희비극의 외면적인 갈등 대립을 심리적으로 내면화시켰다는 점에서 획기적이었다. 표현에도 대구(對句)의 명문이 많고 지금도 많이 애송되고 있다. 이 논쟁 이후 잠시 침묵을 지켜왔던 코르네유는 1640년, 로마 기사의 명예를 묘사한 <오라스>, 로마황제의 덕을 칭송하는 <신나>, 그리고 1643년에는 그리스도교 순교자의 숭고함을 주제로 하는 <풀뤼우크트>, 다음해에는 강렬한 에고이즘의 여자를 주인공으로 하는 <로드귄> 등 많은 명작을 내놓았으며 비극의 거장으로서의 지위를 굳혔다. 이러한 작품은 모두 의지와 정념을 대립시키면서 의지의 승리와 그것에 이르는 인간적인 고뇌를 웅장한 명문과 아름다운 서정을 교차시키며 묘사한 걸작이라 하겠다. 그 이후 희극의 명작 <거짓말쟁이 사내>(1644)를 발표, 몰리에르 이전의 사교계에 고상한 풍속희극을 제공한 공적은 크다고 하겠다.

그는 1647년에 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페르타리트>(1652)는 치명적인 실패작이었으며 파리에서 낙향, 한때는 루앙에 은둔하기도 했다. 그 후 당시의 재무상 푸케의 간청이나 아우인 토마 코르네유의 성공등에 자극을 받아 극단에 복귀, <외디프>(1659), <세르트리우스>(1662), <아틸라>(1667), <쉬레나>(1674) 등을 썼다. 이러한 작품은 운문이나 장면에 의해 정적인 미는 있으나 심리상으로나 문체상으로도 율동에 넘치는 라신에게 압도되어 크게 떨치지는 못했다.

그의 동생인 토마 코르네유(Thomas Corneille, 1625-1709)도 극시인이 되어 에스파냐극의 번안에 솜씨를 발휘, 광기(狂氣)어린 로마네스크극 <티모크라트>(1653)는 당대에 가장 성공한 작품(상연 50회)이 되었으나 문학적으로는 무가치하고 형의 명성만이 남아 있다.

몰리에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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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liere

본명은 장 밥티스트 포클랭(Jean Baptiste Poquelin, 1622-1673). 파리의 궁정 어용 옥내 장식가의 집안에 태어나 일찍이 모친을 잃고 1632-1639년 사이에 당시의 귀족 자제가 다니는 클레르몽 학원에서 배웠다. 그러나 가업을 계승하든가 법률로 입신하라는 부친의 요구에 반항하여 가생디나 시라노 등 자유사상가와 교섭을 가졌다고 한다. 후에 명여우 마들렌 베자르(1618-72)와 그의 동생을 알게 되었으며 극단(劇壇)에 투신하여 집안에서 쫒겨나기까지 했다. 그는 '일뤼스트르 테아트르(光明劇團)'를 조직했으나 파리 상연에 실패, 채무로 투옥되는 등의 일을 겪은 뒤 베자르 자매와 함께 리옹을 비롯하여 남프랑스 각지를 약 12년 동안에 걸쳐 순회공연했다.

그는 이 고난시대에 배우 및 작가로서 비극보다는 희극에서 그 특성을 발휘했다. 지방에 잔존하고 있던 중세 파르스(笑劇)의 서민적인 웃음, 당시 유행했던 이탈리아 희극의 경묘한 움직임을 연구하고 청년시대의 교양으로 고대 라틴 희극에서도 배운 바가 많았다고 한다. 이리하여 희극으로 유명해진 그는 콩티공(公)의 보호를 받아, 1652년부터 리용을 본거지로 삼게 되었으며, 1655년 최초의 문학적 희극 <경솔한 자>를 상연했으며 다음해에 <사랑의 유한>을 발표, 작가 겸 극단장으로서의 명성으로 루앙을 방문, 코르네유와 교분을 맺었다. 그는 1658년에 파리로 복귀, 국왕 앞에서 <사랑에 들린 의사>를 상연함으로써 데뷔, 성공을 거두었다. 이 성공으로 극단은 국왕의 전속이 되었고 프티 부르봉 극장에서 이탈리아 극단과 교체로 출연할 수 있는 허가를 받기도 했다. 1659년, <재치를 뽐내는 아가씨들>은 재원인 척하는 지방귀족의 딸을 풍자한 풍속희극의 소극(笑劇)으로서 대성공을 거두었다.

1661년부터는 팔레 루아이얄 극단으로 옮겨 65년에 국왕의 전속극단이 되었다. 궁정사교계의 일부나 그가 공격한 부자연스런 낭송법에 의존하고 있던 부르고뉴 극단인 왕립극단 일파를 적으로 돌리기까지 했다. 1662년에 <아내학교>에서 노인 아르노르프의 딸에 대한 사랑을 통해 당시의 도덕이나 교육의 위선을 풍자, 성공과 동시에 엄청난 반대도 불러일으켜 이에 <아내학교 비판> <베르사유 즉흥극>으로 반론하며, 경희극은 비극과 같은 가치가 있고, 법칙은 경험에서 생겨났기 때문에 지켜야 하나 구애받을 필요는 없으며, 문제는 관객의 즐거움이라고 논했다. 그 해 마들렌의 동생(그녀의 딸이라는 말도 있다) 아르망드와 결혼하여 그 관계에 수수께끼를 남겼다. 부부 사이의 두 아들은 일찍 죽었다. 그 후 <타르튀프>(1664)에서 가짜 신앙가 타르튀프를 둘러싸고 오르곤 일가(一家)가 둘로 갈라져 다투어 위선의 가면을 벗긴다는 극을 썼으나 교회 일부의 반감을 사게 되어 상연금지를 당했으며 몇 차례의 개정을 거친 뒤에야 비로소 발표하게 되었다. <돈 주앙>(1665)도 괴이성이 등장하는 소극(笑劇) 형식으로 무신론을 주장하나 작가는 양식(良識)의 신앙을 부정하지는 않고 있다. <혐세자(嫌世者)>(1666)는 교만하나 고결한 인격의 아르세스트를 둘러싼 성격대립에 기초를 둔 걸작이라 하겠다. 이어서 코믹풍의 <억지로 의사가 되어>(1666)와 그리스의 신화를 소재로 한 <앙피트리옹>(1668) 후에 구두쇠 알파곤의 좌절을 묘사한 <수전노>(1668), 지나치게 재치가 있는 여인의 기질을 풍자한 <여학자>(1672) 등 모두가 성격 묘사에 의해서 풍속희극을 심리적으로 본격화한 걸작을 발표했다.

이 사이에 무용극이나 오페라로 인기가 옮아 갔기 때문에 음악가 륄리와 협력하여 이 분야의 작품도 썼다. <서민귀족>(1670)은 그 대표작이라 하겠다.

1665년경부터 그는 과로로 인해 폐결핵이 발병, 67년부터 오토유에서 정양하면서 연극활동을 계속했다. 72년에 마들렌 베자르의 사망, 이어 둘째 아들까지 요절하고 륄리에게 국왕의 총애를 빼앗기는 불운한 해가 거듭되었으며, 1673년에 <마음을 앓는 사내>의 무대에서 쓰러져 각혈한 끝에 사망하고 말았다. 그 당시 배우직은 파문을 당했었으나 국왕의 배려로 장의(葬儀)를 허가받았다.

라신,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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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an Racine (1639-1699)

파리 동북의 소도시 페르테 밀롱에서 세무관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641년에 모친, 43년에는 부친이 잇따라 사망하여 조부모 아래에서 자랐으나 49년에는 조부가 사망하고 조모 마리 데므랑은 딸 아니에스가 수녀로 있는 포르 루아이얄 수도원으로 이주했다. 이 수도원(修道院)은 장세니슴의 본산으로써 많은 지식인이 은자(隱者)로서 모여 들어 그들이 가르치는 부속학교는 권위가 있었다. 라신은 이곳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후에는 보베의 학원 기숙생이 되어 일반 교양과정을 수료, 1655-58년에 포르 루아이얄에서 그 당시로는 보기 드물던 그리스어의 교육을 받고 <이디오피아의 이야기> <테아게네스와 칼리클레아>를 탐독했다고 하나, 확실한 것은 소포클레스와 에우리피데스의 비극을 연구했었다는 점이다. 1658년에 파리 대학의 아르쿠르 학사(學舍)에 들어가 논리학 및 철학을 배우는 한편 59년경부터 먼 친척간이 되는 니콜라 비타르 소개로 슈브르즈 공(公)의 저택에 출입하면서 라 퐁텐 등과 알게 되어 문학에 뜻을 두었다.

1660년, 루이 14세의 혼례식에 즈음하여 <센강의 요정>을 헌정, 문단의 원로 샤플랭의 인정을 받아 하사금을 탔으며, 각본도 썼으나 이는 상연을 거절당했다. 1661년에 외삼촌이며 주교 대리인 앙투안 스코난을 찾아 남프랑스의 위제스로 가서 성직자가 되려고 하다 실패, 다시 파리로 되돌아왔다. 그러나 시작(詩作)으로 국왕의 연금을 탈 수 있는 시인의 서열에 들었다. 브왈로를 알게 되고 몰리에르 극단에 의해 1664년에 처녀작 <라 테바이드>를 상연했으며 이어 <알렉산드르 대왕>(1665)으로 성공을 거두나 전자는 코르네유에게서 후자는 당시의 유행작가 퀴노(Quinault)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이 작품을 비극 연출이 서툰 몰리에드 극단에서 부르고뉴 극단으로 옮김과 동시에 자기의 애인이기도 했던 명여우 라 뒤파르크까지 전속시켰기 때문에 몰리에르와의 사이가 악화되어 버렸다. 또한 66년 연극이 비도덕적이라고 한 포르 루아이얄의 은사에게 반발, 그 친분도 결렬되었다. 1667년, <앙드로마크>가 부르고뉴 극단에 의해 왕의 어전에서 상연, 트로이아의 용사 에크토르의 정절이 굳은 미망인 앙드로마크를 사랑하는 피뤼스, 피뤼스를 사랑하는 공주 에르미온, 공주를 사모하는 그리스의 왕자 오레스트와의 관계 등을 주축으로 삼아 숙명적인 정념에서 생겨나는 파멸에의 긴박함을 묘사하여 아름다운 12음각시(十二音脚詩)에 박진적인 심리분석을 꾀하는 등 코르네유의 의지비극에 대한 정념비극의 새 경지를 개척했다. 몰리에르가 이 작품을 풍자한 소극을 상연하자 그는 68년에 그의 유일한 희극 <소송광(訴訟狂)>으로 이에 맞섰다. 69년에는 로마의 황제 네론과 모후(母后)와의 권력투쟁을 주제로 하여 <브리타니퀴우스>를 발표, 70년에는 로마를 무대로 하는 비련의 비극 <베레니스>를 같은 주제로 코르네유와 경쟁한 끝에 승리를 획득한다.

그는 이 작품의 서문에서 단순한 제재에 의한 박진성과 그 감동만이 비극의 본질이라고 논했다. 그리고 이 무렵부터 그는 여우 라 샹메레와 애정관계를 맺게 된다. 동시대의 터키의 후궁(後宮)을 무대로 하는 흉폭한 질투의 비극 <바자제>(1672)로 비극계의 왕자 자리를 획득하고, 73년에 아카데미 회원이 되었으며, 로마에 저항을 한 노왕의 죽음과 그 왕비, 그리고 배다른 왕자와의 사랑의 갈등을 그린 <미토리다트>, 다음해인 74년에는 에우리피데스에서 취재한 <이피제니>로 각각 성공을 하여 경제적 및 사회적 위치를 확립시켰다. 77년에는 역시 에우리피데스에서 취재하여 테제의 왕비 페드르와 전처의 소생인 이포리트에 대한 사련(邪戀)의 비극 <페드르>로써 정념비극의 완성을 이뤘으나 라신의 적은 프란돈으로 하여금 같은 주제로 경작(競作)케 하여 공연을 방해했다. 이 극에서 그리스도교의 윤리를 강조한 루아이얄과의 화해와 그 해에 극히 평범한 처녀와 결혼을 한 그는 국왕의 수사관(修史官)으로 임명된 후 극작을 그만두고 가정과 공무에 전념하는 한편 <포르 루아이얄 사요(史要)>를 썼다. 이를 '라신의 침묵'이라고 부르며 여러 가지로 오늘까지 해석되고 있다. 그 후로는 사실상의 왕비 만토논 부인이 경영하는 여학교의 교재용으로 구약성서에서 취재한 <에스테르>(1689), <아탈리>(1691)를 상연했을 뿐이다. 1699년에 파리에서 병사, 유언에 따라 포르 루아이얄에 매장되었다.

마리보, 피에르 카를레 드 샹블랭 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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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erre Carlet de Chamblain de Marivaux(1688-1763)

극작가(劇作家)이며 소설가. 아버지는 조폐국장을 지냈으며, 어린 시절은 리옹에서 자랐고 커서는 리모지에서 보내면서 그 동안 법률을 배워 1712년에 파리로 나왔다. 퐁트넬, 라모트 등과 사귀어 그 소개로 랑베르 후작부인이나 상탕부인의 살롱에 출입했다. 문학에 뜻을 두어 처음에는 두세 가지 소설에 손을 댔으나 성공하지 못했고 1720년에 처음으로 비극 <안니바르>를 프랑스 극장에서 상연, 극작가로서의 첫출발을 했다. 이 비극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으나 그 해 <사랑과 진실> <사랑으로 연마된 아를르캥>의 두 희곡을 이탈리아 극장에서 상연, 특히 후자는 성공을 거두어 이 극단과의 오랜 교섭이 시작된다. 그 해 로의 경제정책 파탄으로 재산을 잃은 그는 생활을 위해 <르 스펙타퇴르 프랑세>(1722-23)를 비롯한 정기 간행물을 혼자서 편집, 발행했다. 여기에는 사회비평가로서의 수완보다 오히려 자기를 표현하는 일이 적었던 그의 모랄리스트로서의 인품을 엿볼 수 있겠다. 그는 평생에 40편 이상의 희극을 썼으며 그 주요한 것은 1722년의 <사랑의 기습>, 23년에 <이중의 외도>, 27년의 <제2의 사랑의 기습>, 30년에 <사랑과 우연의 장난>, 37년에 <허위의 고백>, 40년에 <시련> 등이고, 생전에 상연된 29편의 희극 가운데에서 프랑스 극단에 위임된 것은 10편이었다.

그 나머지는 모두 당시의 '현대인의 자유로운 극단'이었던 이탈리아 극단을 위해 쓰여졌으며 코메디아 델 아르테의 메커니즘 속에 경쾌하고 미묘한 정신을 확립시켰다. 마리보는 소수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항상 하나의 테마, 즉 고백 이전의 상호간에 모색하는 사랑의 마음을 꾸준히 묘사했다. 이 은밀한 감정은 자존심·수치심에서 나온 온갖 장애 ―― 오해나 질투나 속이 뻔한 거짓말 ―― 등에 부딪히면서도 마지막의 '사랑의 고백'이라는 환희의 순간을 향해 인도되어 간다. 마리보 연극의 희극성은 바로 이 점에 있다고 하겠으며 관객으로서는 이미 명확해진 이 감정의 여로를 주인공만이 알아차리지 못한 채 무익한 우여곡절을 겪는 모습은 관객의 미소를 자아내게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영혼의 미소라는 희극미가 당시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지녔던 몰리에르 및 그 후계들의 그것과 본질적으로 달랐음은 명확하다. 여기서는 성격의 전형이나 풍속묘사는 그 흔적을 감추고 소극적(笑劇的)인 수법도 단역 가운데에서 겨우 약간을 찾아 볼 수 있을 뿐이다. 고전희극에서는 줄거리의 일부에 불과했던 연애를 확대시켜 유일한 테마로 하고, 이를 독자적인 작극법과 문체로 처리하여 마리보는 프랑스 희극사에 연애심리극이라는 새로운 분야를 개척했다. 라신에서 발단된 이 흐름은 19세기의 뮈세, 포르토리슈에게로 계승된다. 미묘한 여성심리를 다루는 극단적으로서의 세련된 수법은 동시대인으로부터 마리보다즈(마리보 취미)라고 불려, 때로는 비판을 받기도 했으나 오늘날에 와서 그의 작품은 심리주의적 고전으로서 널리 애호되고 있다. 소설가로서의 마리보도 오늘날 재평가되고 있어 <마리안의 일생>(1731-41) <벼락부자가 된 농부>(1734-35)의 두 장편은 모두 서민을 주인공으로 사실적인 풍속묘사나 심리묘사에 근대소설에의 접근을 느낄 수 있다.

프랑스 고전극의 상연 형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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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nce 古典劇-上演形態1548년, 수난극 상연조합이 부르고뉴 공(公) 저택 자리의 일부에 신설한 부르고뉴 극장은 17세기의 초엽까지 촛불 조명이었으며, 한 그루의 나무가 숲을 나타내고 물 한그릇에 담긴 물이 바다를 나타낸다는 식의 장치에 의존하고 있었다. 이것이 고전주의 이론과 이탈리아 무대장치의 도입으로 개혁되었다. 1629년에 건립된 마레 극장이나 1637년에 리슐류가 세운 팔레 루아이얄 극장은 그 영향을 받아 원근화법(遠近畵法), 기계 구성의 장치를 설치하여 달이나 별, 또는 구름이 레일 위를 가고 실린더의 응용으로 장막이 흔들리는 등의 장치를 했었다. 의상도 호화로워졌으나 시대색이나 지방색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었고 일반적으로 비극은 로마풍의 의상, 희극은 서민풍의 의상을 사용했다. 극장은 폭이 좁고 비좁았으며, 무대의 양쪽에는 상류계급의 관객을 위한 벤치가 있었으며 일반 대중석은 맨바닥에 마련되어 있었다.

1660년경에는 1주 3회의 공연이 보통이었으며 상연시간도 차차 늦어져 저녁 무렵에 개막을 했다. 희극의 제목은 여러 색깔의 간판에 게시되었으며 또한 각 극장의 인기배우, 즉 부르고뉴 극장에서는 베를로즈나 프로리들, 마레 극장에서는 몽드리, 팔레 루아이얄 극장에서는 몰리에르나 그랑쥬가 인기와 재능을 발휘하여 작품의 선전에 임했다. 당시는 그 개막전의 배우 인사가 선전에 큰 구실을 했었다. 작품은 작가가 직접 극장에 갖고 와서 교섭을 하거나 살롱에서 낭독되어 유력자의 추천을 받는 등의 형식으로 제공되었다.

시대가 달라짐에 따라 희극 분야에 음악과 무용을 곁들이기 시작했다. 마자랭이나 리슐리외 지휘하에 이탈리아풍 오페라가 시연(試演)되고 음악가 륄리(1633-1686)가 몰리에르와 협력하여 연희 여흥의 음악이 곁들인 무용희극, 음악무용이 곁들인 전원극 등을 주문 생산했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이 궁정의 홀이나 정원에서 상연되어 오페라나 스펙터클 계열의 발달을 가져왔다.

프랑스 고전극의 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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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nce 古典劇-俳優

17세기 초엽의 배우는 주로 지방을 순회하는 유랑극단의 연예인에 불과했으며 레퍼토리도 빈약했다. 도시에서는 부활제 전에 서는 장날과 7월부터 9월의 상 롤랭의 장날 등에는 약장수의 선전이나 가두 행상인의 선전이 왕성했으며 그것을 담당하는 자는 거의 희극배우와 다름이 없었다. 당시 배우들은 시즌마다 파리에서 계약, 극단을 조직하여 지방으로 순회공연을 하는 관습이 있었으나, 17세기 초엽에는 바르랑 르 콩트 극단이 부르고뉴 극장에서 장기 공연을 가져 아르디의 작품을 소개했다. 당시 소극의 연기로 인기를 얻은 배우로는 그로 귀욤, 고티에 가르규, 튀르류팡의 트리오가 있었으며, 비극의 영역에서는 프롤리돌 벨레로즈, 몽프르리를 들 수 있다. 특히 몽프르리는 고운 목소리와 풍부한 성량으로 여자 역까지 맡았다고 한다. 여배우로는 샹메레를 들 수 있는데, 라신의 에르미온(<앙드로마크>), 베레니스(<베레니스>)를 잘 연기했으며 라신의 애인이기도 했다. 희극에서는 레이몽 푸아송이 유명하여 크리스팡의 역이라는 하인 역할은 그가 창시한 것이다. 마레 극단에서는 코르네유의 작품을 많이 상연했었으며 코르네유의 배우는 몽드리였다. <르 시드>의 로드리그는 크게 인기를 얻었으나 43세의 젊은 나이에 중풍으로 은퇴했다. 그 뒤는 프로리돌이 이었다. 그는 부르고뉴 극단 출신으로 자연스러운 연기로써 유명했다.

몰리에르 극단에서는 우선 단장 자신이 일류의 배우였다. 몰리에르의 잘 알려져 있는 초상화는 그가 스칼라무슈로 분장한 것으로, 이 역은 신기(神技)나 다름이 없었다고 한다. 그를 지도했다고 하는 마를렌 베자르, 그리고 그녀의 동생, 또는 사생아로 그의 아내가 된 아르망드 베자르, 또한 라신에게 스카웃되어 몰리에르와 불화의 씨가 된 뒤 파르크 등이 인기여우였다. 몰리에르의 마지막이며 또한 자식처럼 사랑했던 제자 바론은 다음 계승자를 노리는 젊고 우수한 배우였다.

배우는 교회에서 자동적으로 파문을 당하게 되고, 임종 때 배우직의 포기를 선서하지 않으면 성직자로부터 임종성사를 받을 수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배우의 실제적인 생활은 상당히 문란했었다. 예컨대 몰리에르의 결혼의 수수께끼를 비롯하여 라신의 첫번 애인 라 뒤 파르크에게는 남편이 있었고 두 번째 애인 라 샹메레도 남편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라신 이외에도 많은 관계를 맺었던 것 등을 들 수 있겠다.

1673년에 몰리에르가 사망한 뒤로는 미망인 아르망드와 그 보좌역 라그랑지는 당시 부진했던 마레 극단을 흡수하여 1670년에 건립된 게네고가(街)의 극장에 의지했으나 1680년에 왕명으로 부르고뉴 극장과 합병, 오늘날의 코메디 프랑세즈가 탄생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