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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문화·민속/세계의 연극/세계의 현대연극/영국의 현대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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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현대극〔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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英國-現代劇〔槪說〕

20세기의 영국에 있어서의 연극 발전은 대체로 3기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 즉, 처음 30년간을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 1856-1950)가 지배하던 시대, 다음 25년간은 다만 침체기라고 밖에는 설명할 수 없다. 그러나 끝으로 1956년 이후 영국연극은 존 오즈번(John Osborne, 1929- )의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를 신호로 소위 '분노'의 시대로 돌입, 영국연극의 르네상스를 맞는다.

그라인(Jack Thomas Grein, 1862-1935)의 '독립극장'(The Independent Theatre, 1891)과 윌리엄 아처(William Archer, 1856-1924)의 '신세기 극장'(The New Century Theartre, 1897)의 창설로 영국의 이 새로운 연극운동은 20세기로 접어들자 박차를 가하기 시작, 전(前)시대의 연극을 대담하게 개혁하는 희곡과 공연이 쏟아져 나왔다. 따라서 영국극계는 새로운 부흥기를 맞는 듯, 20세기 첫 10년 간에 절정을 이루었다. 이 시기에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그 작품의 형식에 있어 사회적·도덕적 문제를 제기하는 '사회문제극'과 사회 사상을 고취시키는 '사상극'이 풍미한 것이며, 한편으론 이러한 작품을 공연해 줄 수 있는 실험적인 레퍼토리 극장이 영국 각지에 창설되었다는 점이다.

이 시기에 가장 재능있고 뛰어난 작가는 작품·이론 양면으로 새로운 연극운동의 기수가 되었던 버나드 쇼로서, 그는 피네로(Arthur Wing Pinero, 1855-1934)나 존스(Henry Arthur Jones, 1851-1929)와 함께 사실적인 문제극을 확립시켜 놓았다. 그러나 버나드 쇼가 그와 동시대 작가나 같은 계열의 후배 작가들보다 월등하게 뛰어났던 것은 입센의 옹호자이면서도 단지 거기에 머무르지 않고 광범위하고 독창적인 실험을 거듭해왔으며, 희극적 구성과 위트, 날카로운 대사감각, 그리고 자신의 독특한 철학으로 연극을 옹졸한 사실적 사회극의 속박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활동은 1910년대가 전성기에 해당되었고, 40년대까지 계속해서 작품을 발표했으나, 30년대 이후부터는 큰 주목을 끌지 못하게 되었다.

그와 같은 계열의 작가로서는 그랜빌 바커(Herley Gran­ville-Barker, 1877-1946), 배리(James Matthew Barrie, 1860-1937), 골즈워디(John Galsworthy, 1867-1933), 휴톤(Stanley Houghton, 1881-1913), 어빈(St. John Ervine) 등이 있는데, 골즈워디는 자연주의적인 작품을 쇼보다 더 써서 성공을 거두었다.

1920년대와 30년대에 와서는 문제극이 쇠퇴하면서 그 반동으로 시극(詩劇)이 다시 일어나 오든(W.H.Auden, 1907-73), 이셔우드(Christopher Isherwood, 1904-1986)가 시와 산문을 혼합한 사회비평적인 시극을 썼으나, 예이츠와 엘리엇(T.S.Eliot, 1888-1965)만이 관심을 끌었다. 그러나 1945년 이후에 다시 전후 시인들의 활약으로 시극이 놀랄만큼 부흥, 엘리엇의 작품이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고 프라이(Christopher Fry, 1907- )의 발견으로 절정에 이르렀다.

30년대의 대표적인 작가는 극작술이 뛰어난 문제극과 희극을 쓴 프리스틀리(J.B Priestley, 1894-1984), 구성은 약하지만 능란한 화술을 구사한 브라이디(James Bridie, 1888-1951)가 있지만, 유성영화의 출현은 그들로부터 많은 관객을 빼앗아 갔다.

한편 희극에서는 19세기의 풍속희극을 계승, 20년대에 활약한 몸(W. Somerset Maugham, 1874-1965)과 카워드(N. Cow­ard, 1899-1973)가 신구세대간의 갈등과 도덕적 혼란을 사실적으로 묘사했고, 특히 카워드는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 1856-1900) 이래 가장 세련되어, 고급 희극을 쓴 작가로 인정받고 있는 반면, 그만한 새로움은 찾을 수가 없다. 그외 제임스 배리가 일련의 사회희극을 남겼다.

전후의 영국극계는 시극의 부흥 이외에는 이렇다 할 만한 것이 없고 오히려 저급한 희극이나 스릴러들이 판을 쳐, 크리스트(Agatha Christie, 1891-1976)의 <쥐덫>은 52년부터 오늘까지도 계속 공연되고 있다. 다만 새로운 극작가로 유스티노프(Peter Ustinov, 1921-1985)와 래티건(Terence Rattigan, 1911-1977)이 등장했고 그 중에 래티건은 뛰어난 기교로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었지만 영속적인 가치나 새로운 방향을 예시할 만한 작품을 남기지는 못했다.

더욱이 텔레비전의 보급으로 문을 닫는 극장이 많아졌고 순회공연이 급격히 퇴조함으로써 극계는 더욱 저조해졌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런던극계의 명맥을 유지한 것은 '올드빅'을 중심으로 한 셰익스피어극 상연이 예술적 성과를 올렸고, 아누이(Jean Anouilh, 1910-1987), 베티(Ugo Betti, 1892-1953), 브레히트(B. Brecht, 1898-1956) 등과 50년대 후반 베케트(Samuel Beckett)와 이오네스코(Eugene Ionesco, 1912-1994) 등 유럽 작가들의 작품을 훌륭히 공연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극단의 꾸준한 활동이 가능했던 것은 영국에서 연극사상 처음으로 정부가 레퍼토리 극단에 보조를 해 주었기 때문이었는데, 1940년부터 시작된 이 보조는 1963년 영국 최초의 국립극장을 탄생케 했고, 로렌스 올리비에(Laurence Olivier, 1907- 1989)가 극장장으로 임명되었다.

영국연극의 새로운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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英國演劇-時代

1956년은 침체된 연극계에 돌파구를 연 것뿐만 아니라, 과거와 현재 사이에 뚜렷이 선을 그어버린 혁명적인 해라 하겠다. 이 해에는 과거의 연극과는 전혀 새로운 오즈번의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가 '로열코트' 극장에서 공연되어 획기적인 성공을 거둔 것도 놀라운 일이려니와, 그 결과로 불과 5년 전까지만 해도 소설로써 재능을 발휘했을 많은 젊은이들이 갑자기 희곡으로 그 넘치는 에너지를 폭발시키고, 또한 그것을 받아줄만한 극단과 관객을 발견할 수 있었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다.

1956년 이후에, 오즈번을 위시해서 심프슨(N. F. Simpson, 1919- ), 젤리코(Ann Jellico, 1927- ), 웨스커(Arnold Wesker, 1932- ), 딜레니(Shelagh Delaney, 1939- ), 볼트(Robert Bolt, 1924- ), 쉐퍼(Peter Shaffer, 1926- ), 비언(Brendan Behan, 1923-64), 핀터(Harold Printer, 1930- ), 아든(J. Arden, 1930- ), 화이팅(John Whiting, 1915-1963), 콥스(Bernard Kops, 1928- ) 등 수없이 많은 작가들의 등장은 불과 3, 4년 사이에 런던을 세계 연극의 중심지로 만들었고, 뒤이어 리빙스(Henry Livings, 1929- ), 머서(David Mercer, 1928- ), 오튼(Joe Orton, 1933-67), 모티머(John Mortimer, 1923), 우드(Charles Wood, 1932- ), 스토파드(Tom Stoppard, 1937- ), 본드(Edward Bond, 1936- ), 그레이(Simon Gray, 1936-) 등이 배출되었다.

그들은 안일한 기성 세대에 대해 타협 없는 공격을 가하고 복지국가를 표방하는 획일적인 자세에 반항을 시도함으로써 흔히 '앵그리 영맨'이라는 통칭이 부여되었지만 작가 개개인의 출신성분이나(대개는 하층계급출신임) 그들의 자질 및 경향이 너무도 다양하기 때문에 어느 유파(流派)나 어떤 운동으로 묶어버릴 수 없다는 것이 하나의 뚜렷한 특징이 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지니고 있는 공통적인 특성을 굳이 찾는다면 첫째, 젊다는 것이다. 그들은 대개 20대에 데뷔해서 30대면 이미 기성작가가 된다. 둘째, 그들은 놀라움과 충격을 주고 싶어하며, 환상적이고 난폭하고 비상식적이고자 한다. 셋째, 그들이 다루는 소재는 통속적이고 비속하고 시사적(時事的)이고 유행적인 것들이다. 넷째, 그들은 기성 작가를 전혀 모방하려 하지 않고 항상 새로운 것을 찾아 다양하게 실험하고 있다. 끝으로 무엇보다도 중요한 점은 그들이 확고하게 연극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극작가가 되기 전 이미 배우·연출 등으로 연극에 종사했었고, 극작가로 성공을 한 뒤에도 소설이나 시를 쓰지 않으며, 대개 텔레비전·라디오·영화에 관계하지만(주로 생활 때문에) 언제나 다시 연극으로 돌아온다.

이들은 연극의 생명을 배우로부터 극작가로 옮겨 놓았을 뿐만 아니라, 또한 무대 자체를 개혁, 가능적이고 상징적인 장치를 활용시켰고, 무대와 객석 간의 제4의 벽을 파괴시키는 데 노력했다. 그로부터 이제 10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는 과거와 같은 광채를 잃었거나 아주 침묵해 버린 작가들도 많고, 그 뒤를 잇는 작가들이 별 새로움을 보태지도 못하고 관객도 역시 새삼 놀라움을 느끼지 못하게 되었지만 그들이 끼친 넓고 깊은 영향은 좀처럼 지워지지 않은 채 앞으로의 영국 연극사에 계속 주류를 형성해 나갈 것이다.

<韓 相 喆>

아일랜드의 현대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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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reland-現代劇

아일랜드의 연극사는 19세기 말 아일랜드 문예부흥운동과 더불어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아일랜드에 중세 전통극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19세기 말 더블린연극은 이미 전통과는 완전히 단절되고, 다만 영국에서 온 순회극단의 영국연극만이 판을 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진정한 아일랜드 극작가를 키우고, 참된 아일랜드연극을 발전시키기 위해서 예이츠(William Butler Yeats, 1865-1936)는 그레고리 부인(Lady Gregory, 1852-1932)과 함께 아일랜드극 국민운동을 전개했는데, 그 결실로 1899년 '아일랜드 문예극장'(The Irish Literary Theatre)이 조직되게 되었다. 이 협회는 그 후 배우인 페이(Fay) 형제의 협조를 얻어 아일랜드 국민극협회(The Irish National Dramatis Society, 1902)로 재조직되었고, 1904년에는 호니마 여사(Miss Horniman)의 도움으로 전용극장인 애비극장(The Abbey Theatre)을 갖게 되었다. 이로써 아일랜드 연극운동은 본궤도에 오르게 되었고 애비극단은 런던순회공연 이후 레퍼토리 극단으로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이 극단의 초기 공연작품은 극단의 창립인인 예이츠, 그레고리 부인, 마틴(Edward Martyn, 1859-1924) 등의 희곡이었지만, 곧이어 싱(John Millington Synge, 1871-1909)이 출현, 20세기 첫 10년간을 완전히 지배했다. 그의 작품은 아일랜드의 소박한 농민으로부터 소재를 얻고,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를 그대로 구사한 사실적인 작품이지만, 그의 비상한 시적 상상력은 그의 작품을 협소한 지역성에서 초월하게 해주었고, 그의 대사를 거의 시의 경지로 승화시켜 주었다. 싱에 이어 애비가 배출한 유능한 신인 작가로는 로빈슨(Lennox Robinson, 1886-1958)과 어번(St. John Ervine, 1883-71)이 있지만, 싱 이후 '애비'의 희망을 부활시켜 준 작가는 오케이시(Sean Ocasey, 1880-1964)였다. 그는 20년대의 대표적인 극작가로서, 도시의 가난한 노동자의 생활상을 희극적이면서도 비극적으로 그려 나갔는데, 그 생생하고 활력에 찬 언어 등은 20세기의 뛰어난 극작가로서 손색이 없다.

1928년은 아일랜드연극 발전에 중요한 의의를 갖는 해로서, 이 해에 '더블린 게이트 시어터'(The Dublin Gate Theatre)'가 창설되었다. 실험적인 레퍼토리 극단으로서 '게이트 시어터'는 주로 구미(歐美) 및 아일랜드의 실험적인 작품을 공연하는 한편, 셰익스피어와 그리스의 고전들을 재공연했는데, 그 중 대표적인 작가가 30년대를 수놓은 존스턴(Denis Johnstone, 1901-1989), 캐롤(Paul Vincent Carrol, 1900-?), 로빈슨 등이었다. 특히 존스턴은 최초로 표현주의 작품을 써서 사실풍의 민족연극이 지배하던 아일랜드연극에 처음으로 유럽 현대극의 새로운 경향을 도입시켰고, 그것은 후대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 밖에 기억해둘 만한 극단으로는 '얼스터 문예극장'(Ulster Literary Theatre)이 있다. 이 극단은 1904년에 설립되었고, 후에 '그룹 시어터'(1939)로 바뀌었는데, 남부의 '애비극단'과 맞먹는 북아일랜드연극의 중심부가 되었다. 여기에서 배출된 톰슨(Sam Thompson, 1916-1965), 토멜티(Joseph Tomelty, 1911- ), 프리엘(Brian Friel)은 현대 아일랜드의 대표적인 극작가들이다. 그리고 이 극단에서 갈라져 나간 '서정극장'(The Lyric Theatre, 1942)은 예이츠의 시극(詩劇)을 재공연함과 동시에, 아일랜드의 현존 최고 시인인 클라크(Austin Clarke, 1896-?)의 시극들을 계속 발표했다. 2차대전 후 아일랜드극은 대체로 저조하여 예이츠, 싱, 오케이시에 비견할 만한 작가가 없고, 또한 대담한 실험정신을 발휘한 작가도 드물다. 그러나 이 가운데 비언(Brendan Behan, 1923-64)만은 전후 최고의 작가로서 아일랜드극의 사실적 전통을 거부한 그의 극은 영어로 씌어진 현대의 가장 우수한 희곡에 들어간다. 이외에 현재 생존하고 있는 극작가로서 현대극에 중요한 공헌을 하고 있는 작가는 토착성을 매우 진하게 담고 있는 킨(John Keane, 1928- )과 몰로이(Michael Molloy, 1917- )이다. 그리고 아일랜드에서 거주하고 있지는 않지만 아일랜드 출신이며 노벨상을 받은 베케트(Samuel Beakett, 1906-1989)가 꾸준한 활동을 하였다.

아일랜드의 아마추어 연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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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reland-amateur 演劇

에이레와 북아일랜드에는 상당한 아마추어 활동이 전개되고 있다. 벨파스트에서 가장 중요한 그룹은 오말레이(Mary O' Malley) 부인이 설립한 리릭 플레이어스(The Lyric Players, 1951)로, 아일랜드의 시극을 장려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 고전파 현대의 유럽극도 공연하고 있다. 이 그룹은 또한 신인배우를 양성하기 위해 연극학교도 운영하고 있다.

에이레의 아마추어 연극 중심부는 '아일랜드 아마추어 연극협회'로서, 산하에 7백여 개의 극단을 가지고 있으며, 해마다 '더블린 드라마 페스티벌'을 개최하고 있는데, 공연성과로 국제적 주목을 끌고 있으며, 아일랜드 극계에 활력을 불어넣어 주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韓 相 喆>

작가와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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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케이시, 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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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an O'Casey(1880-1964)

아일랜드의 극작가. 더블린의 빈민공동주택에서 태어나 15세 때부터 부두의 인부, 도로인부 등 일당(日當)을 받는 노동에 종사했으며, 한때는 혁명군에도 가담했다. 그는 이 체험을 살려서 도시의 빈민생활이나 혁명운동을 소재로 하고 있는데, 이것은 아일랜드극에서 종래 볼 수 없었던 특징의 하나다. 풍부한 언어, 성격에 대한 날카로운 안목, 극적 소재(劇的素材)의 폭넓은 파악력이란 점에서 싱을 능가하는 귀재(鬼才)이다. 출세작으로는 1923년 애비극장에서 초연(初演)한 <의용군의 그림자>로서, 몽상가(夢想家)이기도 한 혁명가가 뜻하지 않게 순진한 처녀를 죽음으로 인도하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아일랜드의 혁명을 배경으로 한 <주노와 공작(孔雀)>(1924)은 희비극(喜悲劇)의 요소를 구별하기 힘들 만큼 교묘하게 섞은 소시민의 비극으로서 1926년에 문학상을 받았다. 다음 작품인 <쟁기와 별>(1926)은 더블린 폭동을 취재한 것으로서 작가의 시야가 한층 더 깊고 넓어져 현대문명의 병폐에까지 파고든 느낌이 있다. <은배(銀盃)>(1928)는 표현파(表現派)의 스타일이 도입되어 통렬한 풍자를 지닌 반전적(反戰的)인 걸작이다. 이 표현파 수법을 더욱 발전시킨 것으로서 <하이드 파크 안에서>라는 작품이 있다. 그 후 파시즘·커뮤니즘·가톨릭시즘의 세 가지 힘을 더블린의 제네스트를 배경으로 해서 그려낸 <별은 붉어진다>(1940)나 <우리를 위한 붉은 장미>(1943)와 같은 우화극(寓話劇)과 비슷한 것도 있다.

엘리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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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S. Thomas Stearns Eliot(1888-1965)

미국에서 태어났으나 후에 영국에 귀화했다. 극작가로서 활약하기 전에는 <황무지>라는 시로써 영미시계(英美詩界)에 큰 변혁을 가져오게 하였으며 또한 비평가로서도 뛰어나 일약 유명해졌다. <스위니 아고니스티이즈>(1926-27) <바위>(1934) <성당의 살인>(1935) <가족재회>(1939) <칵테일 파티>(1949) <비서>(1953) <노정치가(老政治家)>(1958) 등의 희곡을 발표하였는데 모두 운문(韻文)으로 쓰여져 있다. 그가 종교극, 또는 희극 등의 형식으로 추구하고 있는 것은 항상 인간의 구제에 그 목적을 두고 있는 것이며 <성당(聖堂)의 살인> <칵테일 파티> 등은 특히 뛰어난 작품이다.

카워드, 노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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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el Coward(1899-1973)

매우 특이한 배우였으며, 많은 희곡을 썼다. 특히 기지(機智)에 찬 대화, 어딘지 모르게 풍기는 에로티시즘이 특색이다. 그 경묘(輕妙)한 희곡의 인기는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소용돌이>(1924) <타락한 천사>(1925) <고초열(枯草熱)>(1925) <시로코>(1927) <사생활>(1930) <기마대>(1931) <명랑한 유령>(1943) <상대적 가치>(1951) <나부(裸婦)와 바이올린>(1956) 등을 발표하였으며 아주 장기에 걸쳐서 활약했다. 작곡도 하고 노래도 할 수 있는 아주 다재다능한 인물이며, 2편의 자서전도 발표했다.

몸, 서머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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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merset Maugham(1874-1965)

소설가로서 더 유명하지만 극작(劇作)에도 재능을 보여, 이국정서(異國情緖)의 색채가 짙은 살롱극을 몇 개 남기고 있다. <프레드릭 부인>(1907)은 오스카 와일드류의 코미디풍 희곡이며, <재크 스트로>(1908)는 급사로 변신한 귀족과, 귀족으로 가장한 하인이 벌이는 코미디이다. 그 밖에 <주행(周行)>(1921) <수에즈의 동쪽>(1922) <정숙한 아내>(1926) <편지>(1927) <성스러운 불꽃>(1928) <서비스의 대가>(1932) <서클> <변함없는 부인> <부양자> 등이 있다.

유스티노브, 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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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ter Ustinov(1921-1985)

배우이기도 하나 극작가로서도 유명하다. <후회의 집>(1942) <자기자신의 트럼펫을 불어라>(1942) <반베리의 코>(1944) <선의의 비극>(1945) <냉담한 양치기>(1948) <진실의 순간>(1951) <빈 의자>(1956) 등을 썼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국제적인 반향을 불러 일으킨 것은 1951년의 작품인 <네 대령의 사랑>이다. 이것은 점령된 독일의 어느 마을을 무대로 한 정치적 긴장을 옛날 이야기식으로 교묘하게 엮은 것이다. <로마노프와 줄리엣>이 또한 유명하다.

브라이디, 제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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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mes Bridie(1888-1951)

글래스고 출신의 의사. 의료업에 종사하는 한편, 극작에도 전념하여 40세 경부터 약 20년 동안에 30여 편의 희곡을 발표하였으며 글래스고 시민극장의 창립에도 관여하여 스코틀랜드 극계에 크게 공헌했다. 그의 주요작품인 <해부학자(解剖學者)>(1930) <잠자는 승려(僧侶)>(1933)에서 볼 수 있듯이 스코틀랜드를 배경으로 하여 엄격한 퓨리터니즘의 세계와 악마적 인물과의 갈등을 과학자다운 날카로운 솜씨로 그리는 한편, 성서(聖書)에서 취재한 <토비아스와 천사>(1930) <요나와 고래>(1930-42) 등을 비롯하여 희극(戱劇)·소극(笑劇)·사극(史劇)·발라드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작품을 남기고 있으며 영국의 연극사상에서도 특이한 존재가 되었다. 또한 명여우 번즈의 주연으로 호평을 얻은 <다프니>(1949) 처럼 여성의 성격묘사에 걸출한 이색작도 있다.

프리스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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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B. John Boynton Priestley(1894-1984)자작소설(自作小說)인 <친구좌(座)>를 극화(劇化)한 후 극작가로서 활약했으며, 1930년대의 작품으로 <위험한 길모퉁이>(1932)가 있고, <때와 콘웨이의 집>(1937) <추억의 땅>(1937) 등 특히 시간의 개념을 추구한 유니크한 작품으로 각광을 받았다. 그 후 약 30년간에 걸친 극작활동에서 40편에 가까운 작품을 발표하여 질량면에서 버나드 쇼 다음가는 최대의 극작가가 되었다. <라바남의 숲>(1933) <에덴의 끝>(1934) 등과 같은 환상풍의 희극과 <밤의 음악>(1938) <요르단강을 넘는 존슨>(1938) 등과 같이 실험적 수법을 시도한 야심작, 전시(戰時)의 정치평론적 알레고리라고도 할 수 있는 <어느 마을에 온 사람들>(1943), 전후의 대표작으로 문제극적 요소가 짙은 서스펜스 드라마의 <경관(警官)의 내방>(1946) 외에 다양한 작품이 많다. 또한 50년대 후반 이후는 극단(劇團)을 멀리하고 있었으나 머도크의 소설을 공동각색한 희극풍의 이색작인 <잘라진 목>(1963)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린, 그레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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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aham Greene(1904-1991)

자작소설인 <사건의 핵심>의 극화로 극단에 데뷔. 처녀희곡인 <거실>(1953)을 비롯하여 <도자기 만드는 작은 집>(1957) <조상(彫像)>(1964)에서 볼 수 있듯이 작품의 밑바닥에 흐르는 가톨릭시즘과 신과 인간의 대결을 포함한 종교적 테마에 바탕을 둔 비극을 주로 다루었는데, 유일한 희극으로서는 애인의 남편에게 관대한 태도를 보이는 사나이와 치과 의사 부부의 기묘한 삼각관계를 그린 <사람 좋은 연인>(1959)이 있다.

프라이, 크리스토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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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ristopher Fry (1907- ) 교사와 배우를 거쳐 1938년에 운문(韻文)에 의한 종교극인 <소년과 짐차>로 데뷔하였으며, 엘리엇과 함께 시극(詩劇)을 부활시킨 극작가로 주목을 받았다. 최초의 성공작인 <불사조(不死鳥)>를 비롯하여 '봄'의 희극인 <분형(焚刑)을 면한 여인>(1946), '가을'의 희곡인 <관측된 비너스>(1950),'겨울'의 희곡인 <암흑도 또한 밝다>(1954) 등의 대작품에서 볼 수 있듯이 상상력에 찬 풍부한 이미지와 유려한 무운시(無韻詩)의 여운에 의해 특히 서정성이 넘치는 로맨틱한 분위기를 자아내어 셰익스피어의 재래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높은 인기를 얻었다. 또한 <뇌신(雷神)과 천사들>(1948) <맏아들>(1948) <포로의 잠>(1951)과 같은 종교사극(宗敎史劇)은 물론 성서극(聖書劇)에도 뛰어나며, 아누이의 <성(城)으로의 초대>나 지로두 작품의 번역도 있다. 50년대 후반부터 1961년 <짧은 외투>를 발표할 때까지 몇 해의 공백이 있었고, 다시 침묵이 계속되다가 1970년 9년 만에 <태양의 뜰>을 발표했다. '여름의 희극'이란 부제가 붙은 이 작품은 '춘하추동' 4계절을 배경으로 한 4부작의 하나이다.

래티건, 테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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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rence Rattigan(1911-1977)

<프랑스어 입문(入門)>(1936). <해가 비칠 동안에>(1943) 등 1천회 이상의 장기흥행을 기록한 경묘(輕妙)한 희극의 성공으로 한때에는 놀라운 인기를 얻었다. 전후에는 <실비아는 누구?>(1950) <잠자는 왕자>(1953) 같은 동일계통의 희극은 물론 <윈즈로 소년>(1946) <깊고 푸른 바다>(1952) 등의 진지한 드라마에서도 재능을 발휘하였으며 잇단 브로드웨이에서의 히트와 영화화에 의해서 국제적인 호평을 얻었다. 주요작품으로는 알렉산더 대왕의 생애를 바탕으로 한 <모험 이야기>(1949)를 비롯하여 2부 구성으로 여러 가지 인생의 모습을 그린 단막극 <따로따로의 식탁>(1954)과 <춘희(椿姬)>의 테마를 현대화한 <변주곡(變奏曲)>(1958), 아라비아의 로렌스를 다룬 <로스>(1960), 뉴욕에 망명중인 루마니아 대자본가와 아들의 갈등을 그린 <아버지와 아들>(1963)이 있고, 또한 텔레비전극과 방송극, 영화대본의 작가로서도 다재다능한 활약을 보였다.

오즈번, 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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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n Osborne (1929-1994)

배우로서 극계에 발을 들여놓은 후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1956)로 일약 각광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영국연극의 새로운 시대를 열어놓았다. 이 작품이 성공한 이유는 고루하고 안이한 전후 영국 사회에 대한 하층계급의 분노를 주인공 지미 포터가 폭발시켜 준 데 있는데, 형식적인 새로움은 없지만 일상적인 언어를 그대로 사용하면서도 그 언어를 생생하고 통열한 웅변으로 쌓아올린 것은 일찍이 영국무대에서는 볼 수 없던 일이었다. 다음 작품 <연예인(演藝人)>(1957)은 뮤직홀과 그 연예인의 세계를 파헤친 작품으로, 로렌스 올리비에의 호연에도 불구하고 사실적인 내용과 브레히트식(式)의 비사실적인 구조와의 결합 실패로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값싼 저널리즘의 그릇된 가치와 그 속의 속빈 인간들을 공격한 뮤지컬 <폴 슬릭키의 세계>(1959) 역시 실패를 했다. 그러나 브레히트류의 사극 <루터(Luther)>(1961)로 대표적인 작가로서의 명성을 되찾았다. 그 다음 그의 또 하나의 대표작이라 할 <허용될 수 없는 증언>(1964)은 지미처럼 생에 대한 환멸과 절망에서 자신을 파괴해 가는 바람둥이 변호사의 성격을 분석한 것으로, 단순한 항의를 넘어서서 작자의 철학의 확대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또 하나의 사극 <애국자>(1965)는 동성연애자인 한 스파이의 파멸을 다루고 있다. <현재>(1968)는 처음으로 여자를 주인공으로 한 작품으로, 역(役)의 성격은 <증언>의 주인공과 같지만 다만 그녀는 환상과 현실을 분명히 구별할 줄 알고 있다. <암스테르담의 호텔>(1968)은 <현재>보다 호평을 받았다. 1972년에 공연된 <초연감(超然感)>은 관객 개발을 위한 매우 실험적인 작품으로 그의 창조적인 에너지의 무궁함을 과시해 주고 있다.

핀터, 해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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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rold Pinter(1930- ) 영국의 극작가로 베케트와 비교되는 '부조리 연극'의 대표적인 작가이다. 센트럴 연극학교 재학중 연기자로서 활약, 그 후에도 얼마간 배우 생활을 계속하다가 1957년부터 극작을 시작, <방(房)>(1957) <요리운반용 엘리베이터>(1958) 등의 단막과 최초의 장막극 <생일잔치>(1958)를 연속 발표했다. 이들은 흥행적으로 실패했으나 <관리인>(1960)으로 핀터는 장기공연에 성공하고 극작가로서의 지위를 확립했다. 그는 관객은 물론 비평가들로부터 정당한 이해를 얻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핀터의 작품이 과거 연극과는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그의 연극은 한마디로 연극의 본질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라 할 수 있다.

그의 초기 작품들은 흔히 '위협의 희극'이라 불리어진다. 핀터 연극의 기본적인 상황은 외부로부터 차단된 방이라는 안전한 공간이 언제나 예고도 없이 외부의 파괴적인 힘의 침입을 받는 위협과 공포에 노출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기본적 상황이 관객에게 미치는 정신적·심리적 효과는 핀터의 연극에서는 상황 그 자체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인물들의 신원과 행동의 동기가 전혀 설명되어 있지 않고 인물들이 나누는 대화가 전혀 일상적인 논리성을 지니지 않고 있다는 데서 온다. 따라서 그의 연극은 재래의 연극과 같이 논리적인 인과관계나 인물의 성격 분석에 의해서는 도저히 이해될 수가 없다. 핀터는 연극을 통해서 진리를 찾아내려고 하지 않는다. 그는 연극의 존재 이유는 시나 음악과 마찬가지로 연극 자체 속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설명할 수 없는 그 무엇을 설명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직접 체험케 하려고 한다.

그러나 6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그의 경향은 급격한 변화를 일으켜 종래의 폐쇄된 방을 헐고 인물들의 심층(心層)을 성(性)과 시간의 프리즘으로 탐사하고 있는데 <귀향>(1965) <풍경>(1969) <침묵>(1965)(둘 다 단막) 및 <과거>(1971) <무인지대>(1975)가 그것이다. 그 밖에 <미열>(1959) <지하실> 등 많은 라디오, 텔레비전, 영화 작품이 있다.

아든, 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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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n Arden (1930- ) 케임브리지 대학과 에든버러 대학에서 건축학을 전공했다. 재학 중에 이미 극작을 시작했지만 본격적인 작품은 <인간의 생애>(1956)라는 라디오 드라마로 시작, 정부의 재정정책을 풍자한 <바빌론의 물>(1957), 무허가 건축을 둘러싼 가난한 사람들의 싸움을 다룬 <돼지처럼 살아라>(1959)를 '로열 코트'에서 공연했다. 이어 그의 대표작으로 식민지 전쟁을 우화적으로 그린 <머스그레이브 상사의 춤>(1959)을 내놓았다. 그는 시와 산문을 대담하게 혼용시키며 브레히트와 같이 노래와 발라드를 구사했고(<돼지처럼 살아라>에서) 특수한 인간 상황을 놓고 (<머스그레이브 상사의 춤>) 일반적인 결론을 내리기를 꺼려했다. 그는 도덕과 사회문제에 전념하고 연극의 설교적인 역할을 거부함으로써 브레히트와 매우 일치했지만 한편 과거의 문학에서 창조적인 힘을 끌어내오고, 존슨의 '기질희극(氣質喜劇)'을 부활시켜 현존하는 연극 양식과 언어를 배척함으로써 연극을 풍요하게 하는 데 이바지했다. 가면을 사용한 희극 <행복한 피난처>(1960)와 사극으로 <암스트롱의 마지막 작별>(1964), 마그나 카르타를 소재로 한 <불완전한 자유>(1965), 그리고 텔레비전 드라마가 있다.

웨스커, 아놀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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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nold Wesker(1932- ) 전후 영국 사회극의 가장 강력한 대변자. 한때 청년공산연맹회원이었고 시오니즘 운동에도 가담했었다. 농장에서 일한 적이 있으며 호텔·레스토랑 주방에서 요리사로도 일했다. 이러한 그의 경험이 작품 속에도 그대로 나타나 <부엌>(1958) <보리를 넣은 치킨 수프>(1958) <뿌리>(1959) <예루살렘을 이야기하고 있다>(1960) 등이 나왔다. 뒤의 3작품을 웨스커의 3부작이라 하는데 약 20년간에 걸쳐 이상적인 생활을 추구하는 한 가정의 정치적 변천을 그리고 있다. <부엌>은 런던의 한 주방을 통해 세계의 축소판을 보여주고 있다. <모든 것에 칩스를 넣었다>(1962)는 이제까지 그의 작품 중에서 가장 성공을 거둔 작품으로, 영국 공군 내부의 계급조직을 다루었다. 그는 1960년에 가난한 노동자들에게 연극을 보여주고 연극을 연극인 손에 맡기기 위해 '센터 42'를 조직, 이에 정열을 기울이고자 극작을 중단했다가 다시 <4계절>(1965)과 <그들의 황금도시>(1966)로 컴백했다. 등장인물 두 사람의 러브 스토리인 <4계절>은 실패했지만 <그들의 황금도시>(1966)는 성공하였다. 이 작품은 한 건축가가 자기들의 도시를 건설하기 위해 60년간의 투쟁을 벌이는 이야기로서, 극장은 곧 사회적인 활동이며 극작가는 마땅히 대중의 생활을 풍족하게 해 주도록 노력할 의무가 있다는 그의 사상을 잘 반영해 주고 있다.

딜래니, 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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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elagh Delaney (1939- )

영국의 극작가로 <꿀맛>(1958)을 써서 일약 각광을 받았다. 이 작품은 그녀가 17세 때 쓴 작품으로 창녀의 어머니를 가진 소녀의 서글프고도 분노에 찬 세계를 서정적인 아름다움으로 그리고 있다. 그러나 두번째의 <사랑하는 라이온>(1960)은 성숙한 여인을 주인공으로 하고 있는데 전작만큼 성공하지는 못했다.

셰퍼, 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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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ter Shaffer (1926- ) 런던 출생의 극작가로 제2차 세계대전 후에 등장한 극작가들 가운데 상업극으로써 가장 성공을 했다. 그는 로버트 볼트와 같이 전통적인 대중의 기호를 살리면서 전통적인 형식을 완벽하게 조작하고 있다. 처녀작 <5지연습(五指練習)>(1958)으로 눈부신 데뷔를 했는데 세련된 어머니와 속된 아버지를 가진 가정에 독일출신 가정교사가 들어오면서 일어나는 불화를 교묘하게 그린 정서적인 드라마이다. 남녀의 싸움을 다룬 단막 희극 <은밀한 이야기>와 <세상의 눈>(1962)은 영국보다도 브로드웨이에서 히트했다. <태양 탐험대>(1964)는 이제까지 셰퍼의 작품 중에서 가장 야심적인 극으로, 16세기 에스파냐의 잉카제국 침략을 주제로 삼고 있는데 극적 현란성이 압도적이다. 그의 국립극장의 또 하나의 히트작은 불바르 파르스를 반대적인 효과로 되살리기 위해 중국의 연극을 이용한 <블랙 코미디>(1956)이다.

그의 쌍둥이 동생 앤서니 셰퍼(Anthony Shaffer, 1926-)도 극작가로서 제일급 스릴러물 <탐정>(1970)으로 영미에서 대히트를 했다.

볼트, 로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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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bert Bolt (1924- ) 맨체스터에서 대학을 나왔다. 사학을 전공하고 학교 교사로 있다가 라디오 드라마와 희곡을 쓰기 시작했다. 그는 <꽃피는 체리>(1957)의 성공으로 학교를 그만두고 극작에 전념, 대표작 <4계절의 사나이>(1960)를 비롯하여 <호랑이와 말>(1960) <신사 잭>(1963) <바론 볼리그루의 방해>(1965) <오누이>(1967)를 발표했다. <꽃피는 체리>는 회사원의 좌절과 전원생활에 대한 거짓된 환상을 테마로 한 작품으로 영국판 <세일즈맨의 죽음>이란 평을 받았다. 이 극에는 환상과 현실의 도치가 없고, 주인공에 가해지는 사회적 압력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지 않아 상업극 관객의 취미를 거슬리지 않는다. 토머스 모어를 주인공으로 한 <4계절의 사나이>는 브레히트적인 수법으로 역사적인 인물을 현실적인 인물로 부각시킨 감동적인 작품이다. 리얼리즘과 표현주의의 중간적인 실험을 시도해본 <호랑이와 말> <신사 잭>은 실패였지만 아동극인 <바론 볼리그루의 방해>에서 재능을 발휘했다. 볼트는 그 후 <아라비아의 로렌스> <닥터 지바고> <라이안의 처녀> 등의 영화 대본을 썼다.

오튼,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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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e Orton (1933-1967)

영국의 가장 날카로운 문장가이며 웨스트 엔드의 점잖은 관객의 비위를 거슬려 주는 데 제일인자이다. 안하무인격인 쾌활성, 고약한 취미의 유머(시체까지도 최고의 노리개감으로 다루고 있다)로 그의 작품은 '블랙 코미디'란 딱지가 붙어 있다. 라디오 드라마인 <계단 위의 깡패>(1964)로 시작, <슬로언씨를 즐겁게>(1964)로서 그 해 최우수 희곡상을 탔다. 오튼의 특질이 잘 나타나 있는 작품으로 자기의 아버지를 죽인 살인자임에도 불구하고 그와의 성적 관계를 지속하기 위해 남매가 그를 비호하고 공유한다는 내용인데, 야만적인 행위를 하면서도 겉으로는 의식적으로 점잖은 대화를 나누는 모순에서 희극성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테크닉이 보다 큰 효과를 거두고 있는 작품이 경찰의 부패를 풍자한 <전리품(戰利品)>(1966)이다. 생전에 공연 안 된 <청지기의 목격>(1969)을 남기고 그는 동성애 친구에게 해머로 맞아 죽었다. 이 작품은 런던과 미국 공연시에 관객이 난동을 일으킬 뻔했으며 대개의 비평가들로부터 나쁜 평을 받았지만 일부 비평가는 오튼의 최고작으로 평가하고 있다.

젤리코, 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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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n Jellicoe (1927- ) 극작가 겸 연출가. 센트럴 연극학교를 나와 그곳 강사가 되었다. 1952년 '코르핏 시어터'를 창설했다. 처녀작 <미친 엄마의 스포츠>(1956)는 종래의 연극과는 전혀 다른 연극으로 말과 소리와 행동을 혼합하여 격렬한 제의적(祭儀的) 형식을 취하고 있다. 다음 작품 <비결>(1961)은 같은 테크닉을 풍속희극에 적용시킨 것으로 떠돌아 들어온 순진한 소녀를 중심으로 성격이 상반되는 두 소년 사이의 관계를 재치있게 그린 그녀의 대표작이다. <셸리>(1965)는 시인 셸리의 생애를 다큐멘터리식으로 엮어나간 정통적인 형식의 드라마이다. 그녀에겐 또한 <새로운 세대>(1967) 이외에 입센과 체호프의 번역이 여러 편 있다.

화이팅, 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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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n Whiting (1915-1963)

극작가 겸 배우로서 왕립연극학교에서 수학하고 몇 년간 배우를 하다가 극작을 시작하여 <성자의 날>(1949)로 데뷔했다. 죽음에 쫓기는 매우 강렬하고 상징적인 연극으로 51년 예술원 희곡상을 탔다. '아트 시어터'에서 공연되었을 때는 굉장한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다. 다음 작품은 환상적 희극 <노래 한 곡조에 한 푼>, 정치적·개인적인 이유로 인한 자살의 문제를 다룬 <행진곡>(1954)을 쓰고 잠시 극계를 떠났다가 <악마들>(1961)로 복귀했다. 그 밖에 <아니 왜> <동의의 조건>이 있다.

스토파드, 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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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m Stoppard (1937- )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출생하고 싱가포르와 인도에서 성장했다. 영국에 건너온 것은 1946년으로 브리스틀에서 신문기자로 문필생활을 시작, 첫 희곡 <물위를 걷다>(1963)를 개작, <자유인의 등장>(1968)으로 제목을 바꾸어 런던에서 공연했다. 그동안 4편의 라디오 드라마, 3편의 텔레비전 드라마와 소설을 썼다. 그의 제2작이며 대표작인 <로젠크란츠와 길던스턴 죽다>(1967)는 영국국립극장의 레퍼토리의 하나가 되었다. 복수 비극 <햄릿>을 복수 희극으로 쓴 것인데, 미국 공연에서 최우수 외국 희곡상을 타기도 했다. 그 외의 작품으로는 <별개의 평화> <검찰관의 사냥개>가 있다.

비언, 브렌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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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endan Behan (1923-1964)

아일랜드의 극작가. 아일랜드 독립군에 가담하여 싸우다 형무소 생활을 했다. 신문기자 생활을 하다가 쓴 첫 희곡 <괴짜>(1954)는 영국에서 조안 리틀우드에 의해 공연되어(1956) 대성공을 거두었다. 사형을 하루 앞둔 밤에 형무소에서 일어난 이야기로서, 테마는 비극적이지만 거기 등장하는 많은 인물들의 야비하지만 생기에 넘친 대사들로 매우 희극적인 요소가 강하게 풍긴다. 두 번째 희곡 <인질>(1956)은 영국 군인을 인질로 잡아 둔 창녀집을 무대로 거기 모여든 여러 종류의 인간들과 여러 가지 사건들의 얽힘을 비언 특유의 분방하고 활달한 언어로 묘사한 대표작이다. 라디오 드라마로는 <큰 집>(1958)이 있다.

존스턴, 데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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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nis Johnston(1901-1984)

아일랜드의 극작가. 케임브리지 대학을 나오고 법조계에 들어가 일하면서 극작을 시작, <노부인은 아니다! 라고 말한다>(1929)로 유명해졌다. 그는 1931년에서 1936년까지 '게이트 시어터'의 극장장을 지냈고 1961년 이후 스미드 대학 연극과장을 역임한 바 있다. 그의 두번째 대표작 <황하의 달>(1931)은 이성과 질서가 사라져버린 듯한 난동과 폭동이 난무하던 1920년대의 아일랜드를 묘사한 이상주의적인 작품으로, 저급의 희극과 감동적인 비극을 교묘하게 배합함으로써 전성기의 오케이시를 연상시킨다. 그의 작품은 스타일이나 주제가 매우 광범위한데, 공통적인 특성은 아일랜드연극에 흔히 있는 감상(感傷)을 지성과 객관성으로 극복한 점이다.

프리엘, 브라이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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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an Friel (1929- ) 아일랜드의 극작가. 학교 선생을 하다가 1960년부터 극작에 전념하였다. 첫 작품은 아일랜드의 성자를 다룬 <안에 있는 적>(1960)이지만 그의 대표작은 <필라델피아, 내가 여기 왔노라>(1964)이다. 미국으로 이민을 갈 한 젊은이의 내적 감정을 관객에게만 보이는 제2의 인물을 통해 표현해 주고 있는데 이러한 수법은 대화, 특히 내면의 자아와의 대화가 불가능하다는 주제를 살려 주고 있다. 그 밖의 작품으로는 70세의 불굴의 여인을 다룬 <카스 맥과이어의 사랑>(1966)과 사랑을 파르스적(的)으로 그린 두 개의 단막극으로 된 <연인들>(1967)이 있다.

연출가와 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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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크, 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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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ter Brook(1925- )

옥스퍼드 대학을 나온 그는 이미 20대 초에 연극연출가 전위대열에 끼어 장 콕토·사르트르 같은 프랑스 작가를 소개했고, 1962년에는 왕립 셰익스피어 극단의 대표자가 되었다. 이때부터 연출가로서의 재능을 주목받기 시작했으며, 62년 독일의 신인작가인 피이터 바이스의 <마라사드>의 연출로서 그의 명성은 확고한 것이 되었다. 그의 연출활동은 프랑스·이란·아프리카 등에 걸친 범세계적(汎世界的)인 데가 있으며, 배우의 기용에 있어서도 일본의 노(能) 배우, 루마니아·포르투갈·프랑스·미국·카메룬·말리 등 각국인을 기용하는 등 실험적인 요소가 보인다.

길구드, 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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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n Gielgud(1904-2000)

19세기 최대의 여배우 엘렌 테리, 영국 현대연극의 아버지라 불리는 고든 그레이크 등을 배출한 연극 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18세 때 '올드빅'에서 데뷔했다. 1932년 고든 데비오트 작 <보르도의 리처드>를 연출·주연하여 대성공을 거두고 영국상업극의 수준을 유럽 수준에까지 이끌어 올렸다. 그 후에도 뛰어난 연출을 계속 보여 주어 영국 굴지의 연출가로 성장하였다. 그의 연출은 한마디로 말해서 희곡의 내재적 가치를 발굴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길구드는 연출가로서 성공한 것 이상으로 배우로서도 성공했는데, 고전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비극에서 희극까지 폭넓은 연기력을 과시했다. 최근에는 데이비드 스토리의 <집>에서의 뛰어난 연기로 1972년 퓰리처상을, 75년에는 해럴드 핀터의 <아무도 살지 않는 땅에서>에 출현, 그 해의 최우수연기자로 뽑혔다.

올리비에, 로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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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r Lawrence Olivier(1907-1989)70의 나이에도 현역으로 노익장을 과시하며 활약한 올리비에는 1922년 스트랫퍼드 극장에서 <말괄량이 길들이기>의 '카타리나'역으로 첫 무대를 밟았다. 1926년에서 28년까지는 버밍엄 극단에서 일했으며, 1935년 마침내 길구드와 함께 올드빅에 참여, 극단의 중심인물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그는 천부의 훌륭한 체격과 20세기가 낳은 최초·최고의 소리라 일컬어질 정도의 뛰어난 발성 등으로 영국 남우(男優) 일인자가 되었는데, 셰익스피어의 작품 중 올리비에가 거치지 않은 작품이 없을 정도로 셰익스피어 연극을 위해 태어난 배우 같았다. 고전극뿐 아니라 현대극·영화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연기생활을 한 그는 2차대전 때는 해군에 종군하였고 전후에는 파괴된 '올드빅'의 책임자로서 영국연극 부흥에 전력을 기울여 그 공로로 1947년 '셔(卿)'의 칭호를 받았다. 그가 제작·주연·감독한 셰익스피어의 <햄릿>,<헨리 5세>,<리처드 3세>,<오셀로> 등은 너무도 유명하다.

영국의 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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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극장의 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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英國劇場-現況

영국에는 현재 약 2,000개 정도의 극장이 전국에 산재해 있다. 물론 극계(劇界)의 중심은 런던이며 그 대부분의 극장이 웨스트 엔드에 집중되어 있으나 가장 중심이 되는 것은 1977년에 개관한 '국립극장'이다. 그 밖에 유명한 극장이 변두리나 교회에도 있다. 새들러즈 웰즈, 코벤트 가든, 로열 코트, 마메이드, 올드위치, 아트 시어터 등 상업 베이스의 이른바 레퍼토리 시스템 극장은 공공기관의 보조금을 받아 공연하고 있으나 대부분은 기업적인 흥행 위주의 상업극장이다.

국립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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國立劇場

영국 극단의 오랜 숙제이던 국립극장은 1949년의 국립극장법의 국회 통과와 대장성(재무부)의 극장 신축 비용 100만 파운드 지급 결정, 런던시의회의 부지 제공 등에 의해 1951년 기공식을 가졌다. 그러나 역대 영국 내각은 올드빅 극장을 임시 본거로 하여 발족(1963)한 국립극장 극단에 대한 국고보조만을 집행했을 뿐이어서 극장 건축은 연기되어 오다가, 66년에야 경비의 반을 정부가 지급키로 함으로써 본격화되었다. 무대양식이 다른 두 개의 대극장과 실험·실습용의 스튜디오 공연장을 포함한 종합극장 건설은 1973년까지 완성시킬 예정이었으나 경제불황 등 여러 가지 원인으로 1976년 10월에 준공식을 가질 수 있었다. 한편 세번째 대극장인 코테슬로어관은 1977년 봄에 완성되었다.

올드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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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Old Vic

런던시의 남부 워털루역 부근에 있는 극장과 극단. 현재의 건물은 1818년에 건립된 것이며 최초의 명칭은 로열 코바그라고 하였으나, 1833년에 로열 빅토리아 홀로 개명했으며, 오늘날 그 약명(略名)이 정식 극장명으로 되어 있다. 이 극장이 오늘날의 명성을 얻게 된 것은 에마 콘즈 여사와 그 조카인 릴리안 베이리스의 공적이 크다. 베이리스가 이 극장의 지배인이 된 후인 1914년 봄에 일류 배우를 동원해서 셰익스피어극을 상연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 이래 셰익스피어극과 오페라 및 발레를 상연하는 런던의 중심극장으로서의 지위를 확보했다. 제2차대전 중 폭격을 받아 파괴되었으나 현재의 위치에 재건하여 제1폴리오판에 의한 셰익스피어의 전작품(36작품)을 상연하였다. 1963년에 극단은 해산되었고, 전용극장을 갖지 못한 국립극장(National Theatre)의 임시 본거지로서 사용되었다.

새들러즈 웰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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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dler's Wells

이 극장의 창립은 17세기 말, 그 후에 수많은 부침(浮沈)을 겪으면서 오늘날까지 존속하고 있다. 20세기에 들어와 1927년에 릴리안 베이리스가 런던 북안(北岸)에다 이 극장을 런던의 올드빅(The Old Vic)에 필적할 만한 것으로 만들려고 1931년에 옛 극장부지에 새로운 극장을 건설했다. 흥행을 위해 존 길구드와 도로시 그린의 <12야>를 상연하고, 그 후는 올드빅이 주로 셰익스피어극 등의 순수극(純粹劇)을 상연하는데 반하여 이 극장에서는 오페라, 발레의 상연을 주로 상연하여 베이리스 여사의 꿈은 실현되었다. 그 후 전속의 새들러즈 웰즈 발레단이 왕실 발레극단의 명칭을 받음과 동시에 그 전용극장을 코벤트 가든극장으로 옮긴 이래 오늘에 와서는 준국립(準國立) 오페라 극장이 되었다.

스트랫퍼드 왕실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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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atford 王室劇場

셰익스피어의 탄생지인 워릭셔의 스트랫퍼드 온에이번 마을을 흐르는 에이번 강변에 이 국민시인(國民是認)을 기념하기 위하여 1871년에 창립되었으며 처음에는 셰익스피어 기념극장이라고 칭하였다. 최초의 이 극장은 엘리자베스 왕조의 글로브 극장을 모방한 원형극장(圓形劇場)이었으나 불행히도 화재를 만나 소실되었다. 그 후 6년을 거쳐 영국 국내외의 기부를 받아 오늘날과 같은 극장이 재건되었다. 1950년부터 약 10년 동안은 배리 잭슨경. 안토니 퀘일, 글랜비암 쇼의 세 사람이 연출을 담당, 매년 수명의 명배우 지도 밑에 신극단(新劇團)을 만들어 셰익스피어 레퍼토리 시어터로서 뛰어난 연출을 하여 명성을 얻었으며, 1960년에는 칙허(勅許)로 '왕실 셰익스피어 극장'이라는 명칭을 받았다. 이와 함께 피터홀이 극장의 책임자가 되었으며 마이클 센트 데니스와 피터 브루크 등 3인이 연출을 맡아 장기계약의 전속극단을 만들어 극장운영의 전반에 걸쳐 획기적인 개혁을 단행하였다. 즉 동 극단은 런던 상설극장으로 올드위치 극장을 갖고, 스트랫퍼드에서는 셰익스피어극을 중심으로 한 레퍼토리를 지향하는 한편, 런던에서는 국내외의 근대극을 상연함으로써 배우에게 폭넓은 연기를 배우게 하고 관객에게는 다채로운 극을 제공하고 있다. 이 극단의 셰익스피어극의 연출은 현대적 해석을 가한 신기축(新機軸)에 의한 것으로, 보다 오서독스한 연출법을 행하고 있는 올드빅에 비해 특히 젊은 층의 인기가 대단하다.

영국의 극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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英國-劇場群

이 밖에 런던시 슬로언스퀘어에 있는 로열 코트극장은 1870년에 창립된 오래된 극장으로서 1920년대에는 잭슨경이 버밍엄 극단을 인솔하여 버나드 쇼의 <메서셀러로 돌아가라>와 현대복(現代服)에 의한 셰익스피어극 상연 등으로 극장사(劇場史)에 이름을 남겼으며, 더욱이 1956년부터 조지 셰데빈, 토니 리처드슨의 지도 아래 잉글리시 스테이지 컴페니(The English Stage Company)가 이 극장을 차지하여 오즈번의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를 공연한 후 아든, 웨스커, 핀터 등 새로운 젊은 작가들의 등용문이 되었고, 한편 베케트, 이오네스코, 주네 등 외국 전위작가들의 작품을 공연함으로써 영국연극사에 획기적 영향과 공헌을 남긴 극장이 되었다.

이 밖에 런던에는 클럽 조직의 극장으로 아트 시어터를 비롯한 몇 개의 극장이 있으며 리젠트 공원의 야외극장에서는 매년 여름 셰익스피어극을 상연하여 유명하다.

한편 지방도시에도 유명한 극장이 많으나, 이들 극장은 1920-30년대에는 한때 쇠퇴의 길을 걸었다. 그러나 1940년대에 이르러 각 도시와 중앙정부의 보조금을 얻어 다시 성황을 되찾았으며, 특히 브리스틀·리버풀·노팅검·벨파스트·버밍엄·맨체스터·글래스고 등의 극장은 레퍼토리 극단으로서 유명하다.

위에서 설명한 극장 가운데 버밍엄 레퍼토리 극장은 배리잭슨경이 많은 사재를 들여 창립한 것이며 20세기에 있어서 이 극장이 영국의 연극에 남긴 공적은 크다.

또한 이 극단에서 랄프 리처드슨, 로렌스 올리비에, 폴 스코필드 등의 명배우가 배출되었다. 한편 브리스틀의 올드빅은 전속극단은 물론 독자적인 배우학교도 가지고 있다. 또한 이 극단은 영국에서 최초의 연극강좌를 개강한 바 있는 브리스틀 대학과도 제휴하여 모범적인 레퍼토리 시스템을 갖는 일류극단이며, 매년 정기적으로 런던과 다른 지방에서 공연을 행하고 있다.

영연방의 현대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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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연방의 현대극〔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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英聯邦-現代劇〔槪說〕

영연방 제국들은 영화의 위세에 눌려 연극은 위축상태를 면치 못했으나 제2차 세계대전 후 영국의 극단이 캐나다·오스트레일리아 등에 순회공연을 한 것이 계기가 되어 연극 부흥의 불길이 일어났다.

오스트레일리아의 현대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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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stralia-現代劇

1954년 엘리자베스 여왕의 오스트레일리아 첫 방문을 기념하여 연극·오페라·발레의 진흥을 목적으로 한 엘리자베스 연극재단이 설립되었다. 총경비의 3분의 2는 일반국민들로부터의 성금으로 충당되고 나머지 3분의 1을 정부가 출자했다. 시드니의 마제스틱 극장이 엘리자베스 극장으로 명칭이 바뀌어 재단의 본부가 되고 런던 올드빅 극장의 연출가였던 휴 헌트가 초대 극장장이 되었다.

캐나다의 현대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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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nada-現代劇

1953년, 온타리오주 스트랫퍼드에서 셰익스피어 페스티벌 시어터가 발족되어 매년 여름 셰익스피어극이 공연되고 있다. 초기에는 커다란 천막속에서 공연되었으나 57년에 타일론 거슬리의 설계에 의한 상설극장이 건설되고 전속연출가로 페스티벌 시어터의 창설자이기도 한 거슬리 자신이 취임했다. 초기에는 영국으로부터 유명한 배우들이 객원으로 와서 공연했으나 현재는 캐나다 배우의 진출이 많아졌다. 퀘벡주의 몬트리올에는 국립배우학교가 설립되어 영어와 프랑스어를 사용하여 배우 양성이 추진되고 있다. 온타리오주의 토론토에는 데이비스 형제가 이끄는 크레스트 극단이 다종다양한 작품을 공연하고 있는데, 그들이 런던 공연시 영국작가의 작품을 선택한 것은 우수한 캐나다 작가가 없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60년대에는 토론토에 설비가 완벽한 근대적 극장 오키프 센터가 개설되었다.

뉴질랜드의 현대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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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 Zealand-現代劇

대도시조차 상설극단을 유지할 만한 연극인구를 갖고 있지 못할 뿐 아니라, 순회극단은 각 도시간의 지리적 거리가 너무 멀어 경비를 회수하기 어려워 전문극단이 성립하기 어려운 실정이었다. 뉴질랜드 유일의 직업극단인 '뉴질랜드 플레이어스'도 재정적 지원이 부족하여 1960년 순회공연을 중단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1961년 플레이어스의 창설자였던 리처드 캠파언의 노력으로 뉴질랜드 연극좌가 조직되어 일년에 한 작품을 가지고 각 도시를 순회공연하고 있으며, 정부의 예술위원회로부터 원조도 받아 뉴질랜드 연극의 기둥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