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이동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문화·민속/한국의 연극/창 극/창극의 연혁

위키문헌 ― 우리 모두의 도서관.

창극의 연혁〔개설〕

[편집]

唱劇-沿革〔槪說〕

1908년에 국비로 설립된 원각사(圓覺社)는 창극의 요람이며 발상(發祥)의 초석이었다.

영·정조(英正祖) 이후 전승되어 온 판소리의 내용을 처음으로 분립(分立)·극화(劇化)한 것은 원각사 시대의 근세 5명창(金昌煥·宋萬甲·李東伯·金昌龍·丁貞烈)이 이룩한 큰 업적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은 당시 명창들의 새로운 착안이기도 하지만 이에는 신극인(新劇人)들의 많은 참여가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원각사에서 상연한 창극은 <춘향전> <심청전> <배비장전> <삼국지> 등이며, 이때는 볼만한 장치나 도구는 없었고, 몇 장의 배경으로 무대를 꾸몄다. 원각사 시대의 <춘향전>을 소위 <고제춘향전(古制春香傳)>이라 하여, 1965년에 대한국악원(大韓國樂院)이 회고공연(回顧公演)을 가진 바 있었다. 원각사는 협률사(協律社)를 조직하여 직속으로 두다가 1912년 재정난으로 폐쇄하였다. 그 후 장안사(長安社)·연흥사(延興社)가 협률사 형식으로 발족하여 상설흥행(常設興行)을 계속하였다.

이와는 별도로 박봉구(朴鳳九)가 1920년에 광월단(光月團)을 조직하여 흥행을 하였다. 그때 창극배우로는 임명옥(林明玉) 형제가 유명하였다. 유지가(有志家) 박승필(朴承弼)이 광무대(光武臺)를 설립하게 되자, 광월단은 여기에서 장기공연을 가졌다. 광무대가 불행하게도 화재로 소실되자 1928년경에는 일본인의 손으로 넘어가게 되고 당시의 국악 흥행계는 상당한 혼란을 가져왔으며 따라서 광월단도 해산되고 말았다.

그 후 윤창순(尹昌淳)·한성준(韓成俊) 등이 국악 흥행을 본격화시켜, 조선극장·단성사 등의 무대에서 창극(唱劇) 외에도 고전무용·경서가요(京西歌謠) 등을 공연하여 장안의 인기를 끌었었다.

일제(日帝)가 한창 극성을 부리던 1932년에는 조선성악연구회(朝鮮聲樂硏究會)가 창립·발족했는데, 동 연구회는 전통 보존과 후배 양성에 목표를 두었으며, 많은 국악계 인사들이 이곳으로 집결하였다. 판소리와 창극도 이때에 재정립(再定立)을 보았고, 동연구회 안에서도 시대의 물결을 따라 창극좌(唱劇座)가 발족되었다. 이에 이르러 창극운동이 더욱 번지게 되자, 1939년에 화랑창극단(花郞唱劇團)과 동일창극단(東一唱劇團)이 설립되었으며, 1941년에는 반도창극단(半島唱劇團)이 또한 설립되었다. 창극좌는 1942년에 화랑 창극단과 합동하여 조선창극단(朝鮮唱劇團)으로 개명(改名)하였다.

그러나 1943년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에서는 창극단의 해산을 감행하였으므로 조선창극단은 조선이동창극단(朝鮮移動唱劇團)으로 전환하고 반도창극단은 해산되었으며, 동일창극단만이 존속하게 되었다.

1945년 8월, 서울의 다옥동(茶屋洞:茶洞)에 국악원(國樂院)을 설립하고, 국악원 안에 직속으로 국극사(國劇社)가 설립되었다.

국극사 이후 괄목할 만한 것은 여성창극(女性唱劇)의 대두인 것이다. 그리하여 여성국극단(女性國劇團)을 비롯하여 햇님창극단·삼성창극단(三星唱劇團)·임춘앵창극단(林春鶯唱劇團) 등 우후죽순처럼 많은 여성창극단들이 발족하여 대중의 인기는 한동안 이에 쏠려 갔다. 따라서 남녀 혼합체인 국극사·국극협단(國劇協團)·김연수 창극단(金演洙唱劇團) 등은 사양길로 접어들고 말았다.

당시 사회 일각에서는 외국 가요가 범람하기 시작하였으며 또한 영화예술이 번성하게 되자 창극은 대중에게서 차차 멀어져 가기 시작했다. 게다가 여성창극단의 사극(史劇) 및 검술극(劍術劇) 일변도(一邊倒)는 대중들을 식상(食傷)하게 한 것이 많았다.

생활에 허덕이던 창극인들은 교포 위문(僑胞慰問) 등으로 일본 등지에서 신개척을 시도하였으나 여러 가지 조건이 까다로워서 여의치 못하고 오늘에 와서는 국립국극단(國立國劇團)이 1년에 2∼3회의 정기공연을 갖고 있을 뿐 개인창극단은 4∼5개 단체가 있으나 모두 명맥을 유지할 길이 없는 형편이다.

<劉 起 龍>

원각사

[편집]

圓覺社

1909년 궁내부(宮內府) 대신 이용익(李容翊)이 내탕금(內帑金)으로 지금의 새문안교회 자리에 로마식 원형극장을 지었다. 5명창의 한 사람인 김창환(金昌煥)이 주석이 되고 직속 극단인 협률사(協律社)를 통솔하였다. 이때, 여기서 상연된 작품으로는 <춘향전(春香傳)> <심청전(沈淸傳)> <배비장전(裵裨將傳)> <화용도(華容道)> 등이 있다.

협률사

[편집]

協律社

협률사는 국악예술인들을 중심으로 한 흥행 단체이며 공연 내용은 창극(唱劇)·재담(才談)·줄타기·화초사거리 등이었으며 지방으로 순회공연을 하였다.

장안사

[편집]

長安社

연흥사(延興社)와 함께 지금의 서울 인사동에 자리잡고 있었던 가설 극장이다. 장안사는 명창 이동백(李東伯)이 관리하였고 연흥사는 명창 김창룡(金昌龍)이 주관하였다.

조선성악연구회

[편집]

朝鮮聲樂硏究會

1933년 순천(順天) 부호김종익(金鐘益)의 재정 후원으로 송만갑(宋萬甲)·이동백(李東伯)·정정렬(丁貞烈) 외 쟁쟁한 명창(名唱)들이 지금의 서울 익선동(益善洞)에 한식 가옥을 사들여 회관으로 삼으며 조선 성악을 보존·지도하였다.

창극좌

[편집]

唱劇座

조선성악연구회의 직속으로 1936년에 창립한 창극 단체. 5명창을 비롯해 한성준(韓成俊)·오태석(吳太石)·박녹주(朴綠珠)·김여란(金如蘭) 등이 참여하여, <춘향전(春香傳)> <배비장전(裵裨將傳)> <심청전(沈淸傳)> <숙영낭자전(淑英娘子傳)> <유충렬전(劉忠烈傳)> 등의 창극을 공연하였다.

화랑창극단

[편집]

花郞唱劇團

1939년 박석기(朴錫紀)·박동실(朴東實)·김소희(金素姬)·김여란(金如蘭)이 중심이 되어 만든 창극 단체이다. 공연작품으로는 <팔담춘몽(八潭春夢)> <봉덕사(奉德寺)의 종소리> 등이 있다.

동일창극단

[편집]

東一唱劇團

1939년 임방울(林芳蔚)·박초월(朴초月)·박귀희(朴貴姬) 등이 창립하고 창극 <일목장군(一目將軍)>을 공연하였다.

조선창극단

[편집]

朝鮮唱劇團

창극좌(唱劇座)와 화랑창극단(花郞唱劇團)의 합동단체로 <항우와 우미인(項羽-虞美人)> 등 새 각본을 공연하였다.

조선이동창극단

[편집]

朝鮮移動唱劇團

일제말엽에 조선창극단이 재정난에 허덕일 때 '조선이동창극단'으로 전환함으로써 농촌을 중심으로 한 가설무대를 통하여 흥행했다. 오태석(吳太石), 박녹주(朴綠珠) 등이 활동하였으며, 창극사(唱劇史)에서 처음으로 흑자 운영을 한 일도 있다.

국악원

[편집]

國樂院

1945년 10월 서울 다옥동(茶屋洞:지금의 茶洞)에 세운 남도·경서도를 막론한 국안 운동의 본산. 원장 함화진(咸和鎭), 부원장 박헌봉(朴憲鳳), 총무국장 유기룡(劉起龍), 문화국장 임서방(任曙昉), 민요부장 최경식(崔景植) 등이 간부였다.

국극사

[편집]

國劇社

국악원(國樂院)의 직속 창극단체. 정남희(丁南希)·조상선(趙相鮮)·오태석(吳太石) 등의 동인제(同人制)로서, <만리장성(萬里長城)> <선화공주(善花公主)> 등의 창극을 공연하였다.

여성국극단

[편집]

女性國劇團

박녹주(朴綠珠)·박초월(朴初月)·박귀희(朴貴姬)·김소희(金素姬) 등이 중심이 되어 창극 <해님달님>을 비롯한 많은 창극을 공연하였다.

국립국극단

[편집]

國立國劇團

국립극장(國立劇場)의 직속 단체(直屬團體). 김연수(金演洙)를 비롯한 창극계의 저명한 인사로 구성되어, <춘향전(春香傳)> <배비장전(裵裨將傳)> <옹고집(雍固執)> 등의 창극을 공연하였다.

<劉 起 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