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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극의 창우〔개설〕
[편집]唱劇-唱優〔槪說〕
창극은 판소리를 몇 사람이 배역을 나누어 부르는 입체창(立體唱)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창극이 싹트기 시작했던 원각사(圓覺社) 시절에는 창극의 명인이 따로 없고 당시 판소리 명창들이 창극에 출연했던 것이다. 원각사 전속창극단체인 협률사 시절의 중요인물은 김창환(金昌煥)·송만갑(宋萬甲)·염덕준(廉德俊)·유공렬(柳公烈)·이동백(李東伯) 등인데 이들은 판소리 명창으로 너무도 유명하다. 따라서 근래의 판소리는 도막소리밖에 부르지 못하지만 창극에는 좋은 연기를 보여 이른바 창극의 명인이 나고 있었던 것과는 좋은 대조가 된다. 광무대(光武臺)·연흥사(延興社)·조선성악연구회(朝鮮聲樂硏究會) 때에는 서울·지방순회로 창극이 흥행을 하게 되자, 송만갑·이동백·김창룡(金昌龍)·정정렬(丁貞烈)·김연수(金演洙)·오태석(吳太石)·이화중선(李花中仙)·김여란(金如蘭)·박녹주(朴綠珠)·김소희(金素姬)·임방울(林芳蔚) 등이 판소리를 하는 한편 창극에도 자주 출연하게 되었다. 지방에서는 김정문(金正文)·박중근(朴重根)·공창식(孔昌植) 같은 판소리 명창들이 종종 창극에도 출연하였는데 김정문은 창극의 소리도 잘했고 창극연기에도 능하여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창극은 외면하고 지방에 묻히어 판소리의 전통을 고수한 명창들이 있으니 유성준(劉成俊)·전도성(全道成)·이선유(李善有)·정응민(鄭應珉)을 들 수 있다. 1939년 창극좌(唱劇座)·화랑(花郞)·조선 창극단 무렵에는 정정렬은 편극(編劇)에도 솜씨를 보였고, 박녹주·김여란·김연수·오태석·김소희·임방울·박초월(朴草月)·박귀희(朴貴姬) 등의 판소리 명창은 창극에서도 활약하였지만 박후성(朴厚性)·김득수(金得洙)·김옥련(金玉蓮) 같은 신인이 나와 전형적인 창극의 명인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들은 먼저 판소리를 공부하였지만 창극에 전념하게 되면서 판소리로는 빛을 보지 못하였으나 창극에서 좋은 연기를 보이며 두각을 나타낸 것이다.
광복 직후에는 국극사(國劇社)·국극협회(國劇協會)·장악회(掌樂會)·조선창극단(朝鮮唱劇團) 등의 창극단체가 차례로 생겼다. 국극사에서는 오태석·조상선·강장완(姜章玩)·신숙(愼淑)·박귀희·양상식·김원길·박보아(朴寶娥) 등이, 국극협회에서는 박후성·김득수·김소희·한일섭(韓一燮) 등이, 조선창극단에서는 김연수·박보아·박옥진(朴玉珍) 등이 활약했다. 1949년 김아부(金亞夫)를 중심으로 여성국극동호회(女性國劇同好會)가 조직돼 성공하면서 여성만이 출연하는 여성창극단이 나오기 시작하여 뒤에 여성창극단이 범람하는 계기가 되었다. 1950년대는 여성창극단의 극성기로 여성국악동지회에 임춘앵(林春鶯)이, 삼성국극단(三星國劇團)에 박보아·박옥진이, 햇님창극단에 김경애(金敬愛)가, 여성국극협회에 조금앵(曺錦鶯)이, 진경여성국극단(眞慶女性國劇團)에 김진진(金眞眞)·김경수(金敬洙) 등이 활약했다. 20여개로 난립된 여성국극단의 범람은 국극사·국악사·김연수창극단 등 기성창극단체를 침체하게 만들고 여성국극단마저 서로 경쟁의 과열과 예술적인 저하로 말미암아 대중으로부터 소외되고 영화에 밀려 1960년경에는 모두 흩어지고 말았다. 1962년에는 국립극장 전속으로 국립창극단이 결성되어 김연수가 단장이 되고 박동진(朴東鎭)·박후성·김득수·홍갑수(洪甲洙)·성순종(成淳鍾)·강종철(姜鍾喆)·장영찬(張泳贊)·박초월·김소희·박귀희·박도아·조순애(曺順愛)·박옥진·성창순(成昌順)·성우향(成又香) 등이 활약하였다. 창극 60년 간에 수많은 창극의 명인이 나왔다. 그 중에 정정렬·김연수·박귀희·김정문 등은 판소리와 창극을 모두 잘하였고 송만갑·김창룡·이동백·임방울·이화중선 등은 판소리쪽에 우세하였으며, 박후성·성순종·한일섭·임춘앵·박보아 등은 전형적인 창극인이다.
<朴 憲 鳳>
김창환
[편집]金昌煥 (1848-1933)
근세조선(고종-일정) 때 판소리 명창이며 창극의 개척자이다. 전남 나주(羅州) 출신 정창업(丁昌業)에게 서편제 판소리를 사사하고 판소리 명창이 되었다. 고종 때 어전에서 소리하여 의관(議官)직을 제수받았다. 원각사(圓覺社) 시절에 주석이 되어 창극 운동의 선구가 되었다. 풍신이 좋고 너름새가 출중하여 관중의 인기를 독차지하였다.
염덕준
[편집]廉德俊
근세조선(고종-일정) 때 판소리 명창 및 창극의 명인. 전북 전주(혹은 충남 공주) 출신. 장자백(張子伯)에게 판소리를 사사받고 판소리 명창으로 이름을 떨치다가 원각사 시절 김창환·송만갑과 함께 춘향전·심청전을 창극화하는 데 공이 컸다.
정정렬
[편집]丁貞烈 (1875-1938)
근세조선(고종-일정) 때 판소리 명창 및 창극의 명인. 전북 익산(益山)출신. 정창업과 이날치(李捺治)에게 판소리를 사사받았다. 조선성악연구회의 상무이사를 지냈다. 춘향가를 잘 하였고 창극에도 능하였으며,특히 창극의 편극에 특출하여 창극좌(唱劇座) 시절에 춘향전·심청전·흥보전·별주부전·배비장전·유충렬전 등을 편극하였다. 이른바 창극을 불러 굳어진 창극 소리는 정정렬과 그의 제자 조상선에 의하여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연수
[편집]金演洙 (1907-74)
전남 고흥(高興) 출신. 유성준·송만갑·정정렬·정응민 등에게 판소리를 사사하고 판소리 명창으로 이름을 날리는 한편 창극운동에 공이 크다. 1939년 조선성악연구회의 창극좌, 1942년 조선창극단에서 활약했다. 광복 후에는 조선창극단의 대표로 <논개> <호동왕자> 등에 출연했다. 6·25 후에는 김연수창극단을 재건하여 활약했으나 여성창극단의 범람으로 고전하였다. 1962년 국립국극단이 결성되어 단장이 되고 창극의 부흥에 힘을 기울였으며 <심청전> <흥보전> 등에 출연하여 열연하였다. 국립국극단 단장 역임.
박귀희
[편집]朴貴姬 (1921-1993)
경북 대구 출신. 유성준에게 판소리를 사사하고 강태홍·오태석에게 가야금 병창을 사사했다. 조선성악연구회에서 활약하고, 1939년 동일창극단에서 <일목장군>에 출연했으며 1946년 국극사에서 <선화공주> <만리장성>에 출연했다. 1954년 여성국극동지회를 창설하고 <반달>에 출연했다. 1962년 이래 국립국극단에서 창극의 부흥에 노력하였다.
박후성
[편집]朴厚性 (1918-?)
광주(光州) 출신. 어려서 이동백·정정렬에게 판소리를 배우고 광복 직후 국극협회에서 <고구려의 혼>에 출연한 이래 국극협단·국악사·화랑국악단 등의 창극단체의 단장을 지내며 창극활동을 해왔다. <추풍감별곡> <예도성(濊都城)의 삼경(三更)> <운곡사(雲谷寺)의 비화(秘話)> <쌍무덤> 등을 제작, 출연했다. 1962년 이후 국립창극단원으로 있으면서 <춘향전> <흥보전> <배비장전> 등의 주연을 맡아서 그의 연기력을 발휘했다. 한편 각본을 저작하여 <금방울 은방울> <세공주> <상사일념> 등을 내기도 했다.
임춘앵
[편집]林春鶯 (1924-75)
본명 종례(終禮). 전북 남원(南原) 출신. 일찍이 유성준·정정렬에게 판소리를 사사하고 1948년에 여성국악동지회를 조직하여 <해님달님> <반달>에 출연했고 그의 여성국악동호회로는 가장 인기있는 여성창극단이었다. 1958년에는 '임춘앵 창극단'을 조직하여 일본에서 춘향전을 공연하였다.
임유앵
[편집]林柳鶯 (1913-66)
본명 복녀(福女). 전북 남원 출신. 김창환·이동백·정정렬에게 판소리를 사사, 1949년 여성국극동호회에 입단하여 <옥중화> <반달> 등에 출연.
박보아
[편집]朴寶娥 (1921-?)
본명 진심(眞心). 정정렬에게 판소리를 사사하고 1938년 동일창극단에 입단하였으며 1946년에 조선창극단에 입단. <논개> <호동왕자>에 출연했다. 1951년 여성국악동호회에 입단하여 <해님달님>에 출연하고 1953년 여성국극단 대표가 되어 <귀공자> <수양사의 비애> 등에 출연했다.
김경애
[편집]金敬愛 (1928-?)
본명 행자(幸子). 광주 출신. 임춘앵 밑에서 창극과 판소리를 사사했다. 1948년에 조선창극단에 입단, 1949년 여성국극동지사에 입단하였고 1954년 햇님국극단에 입단하고 <선화공주> <금수레>에 출연하였으며 1957년 새한국극단 대표가 되어, <마음의 꽃> <그리운 사람> <사씨남정기> <태자와 흑두건>에 출연했다.
김진진
[편집]金眞眞 (1933-?)
본명 인수(仁洙). 서울 출신. 임춘앵에게 창극을 지도받았다. 1953년 임춘앵여성국극단에 입단하였고 1957년에는 진경여성국극단을 창립한 뒤 <잊지 못할 사랑> <비련가> 등에 출연하였다.
박옥진
[편집]朴玉珍 (1935-?)
전남 진도(珍島) 출신. 김연수에게 판소리와 창극을 사사했다. 1946년 조선창극단에서 <논개> <호동왕자>에 출연하고 1953년 삼성국악단에 입단, 1958년 임춘앵여성국극단에 입단하여 <해님달님>에 출연했다. 1960년 송죽여성국극단에 입단했다. 1962년 별국악단 단장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