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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문화·민속/한국의 연극/판 소 리/판소리의 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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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소리의 연혁〔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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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沿革〔槪說〕

판소리는 민속연희이기 때문에 그 자체의 기록이 없고 향반들의 방증(傍證)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판소리의 창자(唱者)는 광대이므로 광대의 사회적 신분부터 밝혀야 할 것이다. 광대는 일명 화랑(花郞)·재인(才人)이라고 하여 중세기의 연예를 맡았던 우인(優人)이다. 그들은 소위 '사니'계급에 속하는 일종의 천민이며, 무속의 담당자인 무당(巫堂)의 남편이었다. 그들은 호적에 우인(優人)이라 표기되며, 대기 군아(郡衙)의 재인청(才人廳)에 소속되고 있었다. 그들은 무계라는 그들 계급의 조직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것은 전국적인 조직이었다. 군아에서 잔치를 할 때는 재인(才人)으로 봉사케 하고 군수가 나들이 할 때는 그들에게 고취(鼓吹)를 잡히어 악기를 연주케 하고 1년에 한 군에서 몇 명씩 악공(樂工)으로 서울에 올라가 한두 달 연습을 하고 공중의 나례(儺禮)를 치르게 하였다. 또 명(明)이나 청(淸)국의 사신이 오면 산대잡희(山臺雜戱)를 이들로 하여금 연출케 하였다.

그리고 평상시에는 무당의 남편으로 아내인 무당이 굿을 할 때 북을 쳐주는 조무(助巫)로 봉사했고, 무당이 창을 하면 이와 간투적(間投的)으로 '만수바지 창법'을 사용하여 흥을 맞춰 주었다. 그리고 남의 집 잔치에 나가서 잡희를 하고 과거에 합격하고 내려온 신급제(新及第)의 3일유가(三日遊街)나 문희연(聞喜宴) 땐 삼현육각(三絃六角)을 잡고서 전도(前導)를 하는 등, 조선사회에선 우인·창자(唱者)로서 연예문화(演藝文化)에 봉사해온 것이다.

이 중에서 그들의 중요한 소임은 인조(仁祖) 이후 산대도감극(山臺都監劇)의 희자(戱子)로서 가면극을 연출하였다는 사실이다. 이 산대도감극은 대화와 창(唱)과 춤(舞)으로 되어 있다. 여기에는 소박하나마 하나의 스토리가 있을 수 있다. 이 스토리를 여러 사람이 협동적으로 연출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이 설명을 해가며 그 장면 장면을 노래와 대사로 엮어 갈 때 '배뱅이굿' 같은 형태의 그 무엇이 생성(生成)된다. 그 무엇이 바로 판소리다.

그러나 오늘날까지 알려진 사실로는 판소리가 누구에 의해서 언제 불리어졌는지 알 수 없다는 사실 뿐이다.

정노식(鄭魯湜)의 <조선창극사(朝鮮唱劇史)>에는 1930년대의 여러 명창들이 증언한 것을 토대로 하여, 판소리는 숙종(肅宗) 말에서 영조 초에 걸쳐 하한담(河漢潭)과 결성(結成)의 최선달(崔先達)에 의하여 시창(始唱)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들의 행적에 대하여는 묘연하다. <목천읍지(木川邑誌)>에 우인의 이름으로 하한돌(河漢乭)이 <효행(孝行)편>에 나오고 결성에 해주최씨(海州崔氏:崔萬理의 後孫)가 살고 있으나 그곳에서도 이런 사실을 확인할 수 없다. 문헌상으로는 우춘대(禹春大) 다음에 권삼득(權三得)이 나오는데 이 권삼득은 생원(生員)이라고도 하며 전북 완주군(完州郡) 안동 권씨(安東權氏) 향반(鄕班)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인물이라는 것이다. 그는 그 문중의 족보에 의하면 영조 47년(1771)생으로 되어 있다. 이런 점으로 보아, 판소리문학에 내재된 그 문학성을 해명하는 데는 이런 향반 자제의 참가가 중요한 의의를 갖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광대들의 활동을 중심으로 판소리사(史)는 세 시기로 나눌 수가 있다. 즉 첫째 시기는 시창기(始唱期)에서 영·정조대까지의 형성기, 둘째 시기는 고종 때까지의 전성기, 그리고 셋째 시기는 고종 말기 이후로 그 쇠잔기라 할 수 있다.

판소리의 형성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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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形成期

판소리의 시창기(始唱期)에서 영조(英祖)·정조(正祖)대까지이니, 이 당시의 문헌으로는 영조 30년 만화본(晩華本) <춘향가(春香歌)>가 현존하여 있고 그 2년 뒤에 양주익(梁周翊)의 <춘몽연(春夢緣)>이 쓰여졌다고 하나 현재 전하지 않고 있다. 이 당시의 광대로는 하은담(河殷潭:河漢潭), 최선달(崔先達), 우춘대(禹春大) 등이 있으나 그 자세함이 전하지 않고 있다.

판소리의 전성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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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全盛期

이 시기는 판소리의 전성기로서 정조(正祖)대부터 고종(高宗)대까지라 할 수 있다. 이 당시의 기록으로는 송만재(宋晩載)의 <관우희(觀優戱)>가 전해지고 있다. 당시 활약하던 광대는 우춘대(禹春大)이고 권삼득(權三得)과 모흥갑(牟興甲)은 당시 젊은 가객(歌客)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시대에 소위 열두 마당이 이미 정립되어 있었고 <관우희>는 그의 아들의 등과(登科)에 따른 문희연(聞喜宴)에 광대를 부르지 못하여 이 글을 지었다는 것이다.순조(純祖) 26년에 이루어진 신자하(申紫霞)의 <관극시(觀劇詩)>에는 고·송·염·모(高素寬·宋興祿·廉啓達·牟興甲)의 명창 외에 김종운(金鍾運)의 존재를 밝혀주고 있다.

이 당시의 고문서(古文書)론 순조(純祖) 25년의 <갑신완문(甲申完文)>과 순조 27년의 <정해소지(丁亥訴志)>가 있어 당시의 창자들의 이름과 무계를 조직하고 있는 상황으로 재인(才人)들이 각 도에서 서울로 올라가 칙행(勅行), 즉 청국 사신이 올 때에 잡희(雜戱)를 연출한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광대가 나례산주(儺禮山主)로서 판소리를 하는 동시에 나라에서 요구하는 잡희(雜戱)에 동원되어 외국사신 접대에 배우노릇을 하였다는 사실을 명시해 주고 있다.

다음은 철종(哲宗) 3년에 윤달선(尹達善)의 <광한루악부(廣寒樓樂府)>가 이루어져 열두 마당과 그 연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판소리의 사적 전개에서 잊을 수 없는 인물은 고창(高敞)의 신재효(申在孝)이다. 그는 순조 11년(1811)에 나서 고종(高宗) 갑신년(甲申年:1884)에 죽었다. 그는 고창에서 관약방(官藥房)을 하던 광흡(光洽)의 아들로, 나중에 호장(戶長)을 사서 아전(衙前)이 되었지만 그의 할아버지대만 하더라도 경기도 양주(楊州) 사람이었다. 그는 중년에 집이 요부(饒富)하게 되니 광대의 후원자 노릇을 하고 다시 판소리 여섯 마당 <춘향가>(南唱·童唱), <토별가(兎鼈歌)> <심청가(沈淸歌)> <박흥보가(朴興甫歌)> <적벽가(赤壁歌)> <변강쇠가(卞强釗歌)>와 그 밖의 많은 가사를 창작하기도 하고 개작(改作)하기도 하였다.

이 신재효의 존재로서 광대가 아전과 서로 관계를 맺으면서 판소리 사설을 다듬어 왔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존 텍스트 안에 들어있는 한시(漢詩)·한문을 위시해서 소위 유식한 성귀(成句)들은 사실 아전의 가필(加筆)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또 그는 <광대가(廣大歌)>에서 판소리의 이론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그는 여기서 송흥록(宋興祿)·모흥갑(牟興甲)·권삼득(權三得)·신만엽(申萬葉)·황해청(黃海淸)·김계철(金啓喆)·주덕기(朱德基)·송광록(宋光祿)·고소관(高素寬) 등의 조격(調格)을 비유하고 있다.

이 시대는 판소리의 황금기로 위는 왕으로부터 아래로는 시골 백성에 이르기까지 판소리를 애호했고 또 당시의 소설 사본·판본의 출현에 힘입어 이런 사설들이 널리 퍼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 당시에 나온 텍스트만 하더라도 <춘향전(春香傳)>에 30종, <심청전(沈淸傳)>에 10여종, <흥부전>에 10여종, <토별가>에 20여종, <장끼타령>에 10종의 텍스트를 남겨 놓고 있다.

대개 이 시대에 속하는 광대 창자(唱者)만 하여도 정노식(鄭魯湜)의 <조선창극사>에 70∼80명을 기록하고 있다.

판소리의 쇠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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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衰殘期

고종 말기 열강의 침략과 더불어 국정(國政)이 어수선하여지고, 또 일본(日本)에 건너갔다 온 이인직(李人稙)이 원각사(圓覺社)에서 신파극(新派劇) 운동을 일으키자 여기에 자극받은 판소리 가객(歌客)들이 1인창(一人唱)이었던 판소리를 극화(劇化)하기에 이르렀다. 이리하여 판소리는 창극(唱劇)이 된 것이다. 이때에 활약한 인사들이 송만갑(宋萬甲)·이동백(李東伯) 들이니 이들은 그 뒤 일제치하에서도 나라 잃은 울분을 판소리에 담아 노래했고, 1930년대에는 조선성악연구회(朝鮮聲樂硏究會)를 조직하여 후배를 양성하였으니 김연수(金演洙)·박녹주(朴綠珠)·김소희(金素姬) 등의 창작들은 대기 당시에서부터 판소리의 최후의 명맥을 이어 온 사람이다. 사실 판소리는 광복 후에 민족음악(民族音樂), 국악(國樂)으로서 크게 각광을 받고 있지만 젊은 층의 기호에서 멀어져 가고 있다.

<金 東 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