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문화·민속/한국의 연극/한국의 가면극/한국 가면극의 종류
한국 가면극의 종류〔개설〕
[편집]韓國假面劇-種類〔槪說〕한국 민속극의 큰 갈래 중 하나인 가면극은 멀리 고구려의 '가면무(假面舞)', 백제의 '기악(伎樂)', 신라의 '오기(五伎)'와 '검무(劍舞)' '처용무(處容舞)', 삼국시대 이래 중국에서 전래된 '산악백희(散樂百戱)' 등 지배계층이 주관했던 가면희(假面戱) 등이 토착적인 '탈굿' '탈놀이' 등과 섞이면서 선행예능(先行藝能)으로서의 역할을 하며 형성되었는데, 그 주류를 이루는 것은 '산대놀이'로서 애오개(阿峴洞)·노량진·퇴계원·녹번리·구파발·송파 등지에 흩어진 '산대패'에 의해 형성되었다. 이렇게 형성된 가면극은 그 내용이나 형식면으로 보아 선행예능이 되어 준 '가면희'와는 달리 서민취향화(庶民趣向化)된 것이었는데, 이를 '본산대(本山臺)'라 부른다.
처음 서울 및 근교에서 시작된 산대놀이는 각 지방으로 전파되었고, 그 지방의 독특한 스타일로 발전하여 경기 지방의 '양주별산대놀이', 황해지방의 '봉산·강령·해주의 탈춤', 경남지방의 '동래·수영의 야유(野遊:冶遊)', 일정한 고장이 없이 유랑하며 연희하던 '남사당의 덧보기', 다소 계통은 다르나 함경도 지방의 '북청사자놀음', 경북 지방의 '하회별신굿놀이', 강원도 지방 '강릉관노탈놀이' 등으로 갈라졌다.
북청사자놀음
[편집]北靑獅子-
이 놀음은 함경남도 북청군하(北靑郡下) 전 지역에서 행하여졌으며, 동리마다 제각기 사자를 꾸며서 놀았고, 각 처에서 읍내로 사자 놀음패가 모여들어 자연히 경연(競演)이 붙었는데, 구 청해면 토성리(靑海面土城里)의 사자놀음은 관원(官員) 놀음과 함께 행하여지므로 특히 유명하다.
사자놀음은 주 목적이 벽사진경에 있으며, 백수(百獸)의 왕으로 벽사할 만한 힘을 가졌다고 믿어지는 사자로써 잡귀를 쫓고 동리의 안과태평(安過泰平)을 비는 것이며, 집집마다 순회하면서 벽사해주고 그 대상으로 출연(出捐)된 전곡(錢穀)은 동리의 공공사업(장학금·빈민구제·경로회비용) 및 사자놀음 비용에 쓰였다.
북청사자놀음은 구 정월 14일 밤 달이 뜬 뒤(보통 8∼9시)부터 시작하는데, 이보다 앞서 여러 마을에서 장정들의 편싸움으로 횃불싸움이 있어 왔다고 한다.
14일 밤에 시작한 사자놀음은 15일 새벽까지 논 다음 서당·도청 광장(都廳廣場)에서 주식을 갖추어 놓고 논 뒤 해산한다. 16일 이후는 초청하는 유지가(有志家)를 돌며 논다.
퉁소·장고·소고·북·꽹과리의 반주 하에 사자와 사령·꺽쇠·양반·무동·승무·꼽새춤과 그 밖의 잡패들이 한 떼가 되어 집집마다 돌아다닌다. 먼저 이들 무용단이 목표하여 둔 집의 마당으로 들어가서 난무를 하면, 사자(몸 속에 사람이 2인 들어감)가 맹렬한 기세로 안마당을 거쳐 안방문을 열고 큰 입을 벌려 무엇을 잡아 먹는 시늉을 하고, 이어서 부엌에 들어가 전과 같이 한 다음, 다시 안마당 한복판에 나와 활발하고 기교적인 무용을 한 다음, 다른 무용단보다 먼저 물러나가는데, 주인의 청에 따라정지(부엌)의 조왕과 시렁 앞에 엎드려 조령(祖靈)에게 절을 한다. 이때 아이를 사자에게 태워주면 수명이 길다 하여 태워주기도 하고, 사자털(헝겊 조각)을 몰래 베어다 두면 장수한다는 속신(俗信)도 있다.
토성리의 사자놀음은 관원(官員)놀음과 병행하는데, 사자놀음이 먼저이고 뒤에 관원놀음과 합쳐졌다. 관원놀음은 정월 14일이 예습이고 정월 15일이 본의(本義)인데, 가장하는 인원 및 칭호는 남병사(南兵使)·본관(本官)·좌수(座首)·형리(刑吏)·공방(工房)·순검(巡檢)·헌병(憲兵) 등의 신구 관속이 세나발(細喇叭)·퉁소·장고·대고·소고 등의 구식 악기와 양악(洋樂)의 관현 악기가 연주하는 행진곡에 맞추어 '숙신고도사령(肅愼故都使令)'이란 큰 깃발 아래 보무당당히 행진하여 옛 제단터(祭壇趾)에서 식을 끝낸다.
북청사자놀음은 애원성, 마당돌이, 사자춤의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여기에서는 사자춤이 위주가 되지만, 가면극으로서는 지나치게 간단하다고 할 수 있다.
하회별신굿놀이
[편집]河回別神-
우리 나라의 부락제(部落祭)는 그 연원(淵源)이 오래되었으며, '영고(迎鼓)' '무천(舞天)' '동맹(東盟)' 등과 '팔관회(八關會)' '중동팔관회(仲冬八關會)' 등의 영향을 받아 이루어진 것이다. 그 명칭은 여러 가지이나 이를 2대 유형으로 나눈다면, 하나는 남성 본위로 유교풍(儒敎風)의 축문을 읽는 '동제(洞祭)'이고, 다른 하나는 여성 중심으로 무당이 주재하는 '도당(都堂)굿'일 것이다. 그러나 유식동제(儒式洞祭)보다 원초적인 것으로 축문도 없이 제주(祭主)가 조용히 정성을 드린다는 '산제(山祭)'가 있다. 즉 산제와 당제·동제가 부락제의 기본유형이 된다.
이러한 부락제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현재 서낭가면(城隍假面)이 전해지고 있는 경북 안동시 하회동(慶北安東市河回洞)의 동제와 별신굿놀이이다. 하회동의 서낭신은 '무진생서낭(戊辰生城隍)님'이며, 이곳 서낭제의 평상제(平常祭)는 보통 동제(洞祭)라 부르고, 10년에 한 번씩 지내는 별신제(別神祭:별신굿) 또는 도신제(禱神祭)라 부르는 임시특별제(臨時特別祭)가 있다(1928년 이래 중단되었다).
10년에 한번씩 또는 신탁(神託)에 의해 임시로 거행되는 '하회별신굿'은 그 준비를 음력 12월 말부터 시작한다. 산주(山主:主祭者)는 부정(不淨)이 없는 목수를 선정하여 서낭대와 성줏대를 마련한다.
정월 초이튿날 아침에 산주와 무녀(巫女)와 광대(廣大:別神굿놀이 演戱者)들이 서낭당(上堂)에 모여 제수(祭需)를 차려놓고 3∼4장(丈) 길이의 서낭대와 2∼3장 길이의 성줏대를 세우고 강신(降神)을 빈다. 서낭대에는 오색포(五色布:홍·백·황·청·녹색)를 늘이고 꼭대기에 당방울을 달았다. 신이 내려 신령(神鈴)을 울리면 강신한 서낭대를 메고 성줏대를 받들고 주악(奏樂)하면서 상당(서낭당)에서 하당(下堂:국시당)과 삼신당을 거쳐서 구동사(舊洞舍) 앞 놀이 마당에 이르러 서낭대를 세우고 신령을 울림으로써 별신굿놀이가 시작된다.
이의 첫 과장(科場)은 '주지놀음'이다. '주지란 호랑이를 잡아 먹는 무서운 귀신'이란 설도 있으나 주지는 '사지' 즉 사자(獅子)를 말한다. '주지놀음'은 서막으로서 다른 가면극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벽사를 위한 의식무(儀式舞)로서의 사자춤이다. 붉은 보자기로 전신을 가리고 주지머리를 손에 든 광대 두 사람이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면서 사방으로 휘두르면서 돌아다닌다.
2과장(科場)으로는 무녀가 주연하는 '삼석놀음'이 있었다고 하며, 토끼같이 귀가 난 가면을 쓰고 춤을 추었다고 하나 지금은 전하지 않고, 지금의 2과장은 서막적인 과장으로 주지와 삼석놀음이다. 본격적인 놀이는 3과장 파계승(破戒僧) 놀이부터이다. 그리하여 놀이는 4과장 양반선비놀이, 5과장 떡다리와 할미의 살림살이과장, 6과장은 백정이 나와 소를 잡는 살생과장, 7과장 환자(還子)놀이, 8과장 총각과 각시의 혼례과장, 9과장 신방(新房)과장으로 이어진다.
다음으로 헛천굿(거리굿)이 별신행사 최종일인 정월 보름날 마을 앞 길거리에서 거행되고 이날 밤 자정에 상당에 올라가 당제를 지낸 다음 서낭대는 당에 봉납하고, 하당과 삼신당에 차례로 제를 올림으로서 별신행사가 끝나며 산주와 광대들은 12월 그믐 이래 15일 만에 처음으로 근신합숙(謹愼合宿)에서 풀려 자기 집으로 돌아간다.
강릉관노탈놀이
[편집]江陵官奴-
하회별신(河回別神)굿놀이와 같은 유형(類型)의 것으로 강원도 강릉에서 지내는 놀이인데, 가면(假面)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이 놀이의 연희자(演戱者)가 관노(官奴)이기 때문에 관노탈놀이라 부르며 내용이 빈약해서 본격적인 가면극이라 하기는 어렵다. 대사가 없이 무언극으로 진행되고 장자말이 등장하는 1과장, 양반과 소매각시가 등장하는 2과장, 양반·소매각시·시시딱딱이가 등장하는 3과장, 위의 등장인물이 모두 다시 나오는 4과장으로 구성된다.
오광대
[편집]五廣大
오광대 및 야유(野遊)는 경상남도 일대에 분포된 한국가면무극(韓國假面舞劇)의 영남형이라 할 수 있는 것으로, 그 발생지는 낙동강변의 초계(草溪) 밤마리(栗旨)라고 전해진다.
오광대는 밤마리(당시 3백호 가량의 인구) 장터의 대광대(竹廣大)패들에 의해 시작되어 점차 각지로 퍼져서 신반(新反)·의령(宜寧)·진주(晋州)·산청(山淸)·창원(昌原)·통영(統營)·고성(固城)·진동(鎭東)·김해(金海)·가락(駕洛)·수영(水營)·동래(東萊)·부산진(釜山鎭) 등 거의 경남 내륙과 해안선 일대의 각지를 망라하게 되었다. 이러한 분포는 초계 밤마리 대광대패가 각지로 순회 공연을 하였거나 또는 밤마리 장터에서 보고 간 사람들이 제각기 자기 고장에서 시작한 것으로 생각된다.
현재 발상지인 밤마리 오광대를 비롯한 여러 지방의 것은 전해지지 않고, 통영 및 고성오광대, 진주·마산 오광대만이 전해지고 있다.
초계 밤마리에서 시작된 오광대는 수영·동래·부산진 등지에서는 들놀음을 뜻하는 야유(野遊)라 부르고, 기타 지방에서는 모두 오광대라 부른다.
오광대란 이름은 오행설(五行說)에 의거한 '5(五)'로서 진주와 마산 오광대에서 오방신장무(五方神將舞)가 나오는 것은 그것을 뒷받침한다. 또 이 오방신장에 합치되는 다섯 양반을 만들어 연출하기도 하고, 진주에서는 문둥이광대도 다섯을 등장시키며, 그 문둥이 가면은 오방각색으로 만들어졌고, 통영과 고성의 오광대는 다섯 과장으로 구성되었다. 또 밤마리 오광대는 대광대 죽(竹)방울받기를 비롯한 곡예와 함께 '말뚝이' '비비새(영노)' '중과 각시' '할미·영감·지대각시' '사자' 등의 다섯 가지 놀이장면이 있었다 한다.
오광대의 연출형태는 다른 가면무극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춤이 주가 되고, 재담(才談:臺詞)과 노래(唱)와 동작이 곁들여 연기되는 탈춤놀이의 일종이다. 춤은 염불·타령·굿거리 등 민속 음악에 쓰이는 반주곡들에 의하여 추어지지만, 그 음악도 역시 지방적 특색을 나타내고 있다. 오광대와 야유의 춤은 모두 '덧보기춤'이라고 부르며, 특히 '말뚝이춤'같은 것은 건무(健舞)에 가까운 활발한 것이었으나 지방에 따라 후대로 내려오면서 통영이나 고성의 경우처럼 차츰 완만한 춤으로 약화되어 온 것으로 보인다.
오광대의 과장은 통영과 고성 오광대는 다섯 과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그 밖의 지방의 놀이는 5∼7과장으로 지방에 따라 차이가 있는데, 현재 전해지는 것 중 수영야유(水營野遊)와 고성오광대가 비교적 원형에 가깝고, 통영오광대는 근년에 와서 많이 윤색(潤色)된 흔적이 있다.
다른 산대놀이가 그러하듯 오광대도 처음에는 종교적 의의에서 연희되었을 것이나 차차 오락적 요소가 우세하여져서 동래야유처럼 '말뚝이 재담'이 주가 되었고, 양반에 대한 조롱은 한국민속가면극 중에서 가장 심하다. 연희의 시기도 처음에는 종교적 의의와 결부된 정월 14일 또는 보름날 밤을 중심으로 행하여졌으나, 나중에는 보다 놀기 좋은 3월 보름과 4월 초의 봄놀이철, 9월의 단풍놀이철로 바뀌어 오락적 연희로 변모되었다.
통영과 고성오광대의 놀이 내용은 다음과 같다.
통영광대는 1과장 문둥탈, 2과장 풍자(諷刺)탈, 3과장 영노탈, 4과장 농창탈, 5과장 포수탈의 다섯 과장이며, 고성오광대는 1과장 문둥광대, 2과장 오광대, 3과장 승무, 4과장 비비, 5과장 저밀주(제물집, 혹은 작은 어미)의 다섯 과장이다.
동래·수영의 야유
[편집]東萊·水營-野遊
그 근원은 초계(草溪) 밤마리에 둔 오광대 계통의 것으로 동래·수영·부산진 등지에서 들놀음을 의미하는 야유(野遊)라 부르는데 지신밟기 등의 농악놀이와도 관련이 있다. 음력 정월 대보름날 광장에 무대를 마련하고, 그 앞쪽에는 28개의 제등(提燈)을 공중에 매단다. 초저녁에 놀이가 시작되어 밤늦도록 계속된다. 동래 야유는 1과장 문둥이, 2과장 양반, 3과장 영노, 4과장 할미·영감으로 구성되는데, 2과장 양반과 3과장 영노가 가장 볼 만하다. 수영야유는 1과장 양반, 2과장 영노, 3과장 할미·영감으로 구성된다.
산대놀이
[편집]山臺-
공의(公儀)로서 연희되어 오던 산대연희(山臺演戱)가 조선조 인조(仁祖) 때 이후 폐지되자, 이에 종사하던 편놈(伴人)들은 서울 근교에 분산하여 각기 거주지를 중심으로 산대놀이 단체를 모으고, 경향 각지를 순회하여 연희하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형성된 것이 녹번리산대(碌磻里山臺), 애오개산대(阿峴山臺), 노량진산대(鷺梁津山臺), 퇴계원산대(退溪院山臺), 사직(社稷)골 딱딱이패 등이며, 이들을 본산대(本山臺)라 부르는데 현재는 전해지지 않고, 이들의 지방순회 때나 혹은 직접 찾아와서 배워간 결과 형성된 양주·송파 등지의 산대놀이가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으며, 이것을 '별산대(別山臺)'라 부른다. 그러나 분파 형성에 대한 경위는 분명하지 않고, 그 지방에 거주하는 촌로(村老)들에 의해 여러 가지 유래가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그 중 양주의 '별산대놀이'는 경기지방에 남아 있는 유일한 가면극으로 약 150년 전 이을축(李乙丑)이란 사람을 중심으로 사직골 '딱딱이패'에게서 전수받아 형성된 것이다.
양주별산대놀이도 다른 한국의 가면극의 연출형태와 마찬가지로 음악 반주에 춤이 주가 되며, 거기에 묵극적(默劇的)인 몸짓과 동작(科)·대사로서 덕담(德談)과 재담(才談)이라 불리는 사설(辭說:白), 그리고 노래가 곁들여진다.
연출시간에는 제한이 없어 보통 밤 10시경에 시작하면 다음날 새벽까지 계속되었으며, 그때 그때의 흥과 형편에 따라 3∼4시간으로 줄이는 수도 있었다. 이것은 민속연희의 일반적 특성이기도 하나, 산대놀이의 대사가 구전(口傳)이기 때문에 일정치 않아 전체적인 틀이나 짜임새는 정해져 있지만 세부에 들어가서는 신축이 자유롭기 때문이다.산대놀이 춤은 봉산탈춤이나 오광대놀이의 덧보기 춤에 비해 비교적 법도에 맞는데다 아담한 맛이 있고, 형식미를 갖추고 있으며, 춤사위의 분류는 어느 탈춤보다 자세하다. 춤의 반주 악기로는 삼현육각(三弦六角:피리 두개, 젓대 한개, 해금 한개, 장고 한개, 북 한개)이 쓰이는데, 그 밖에 꽹과리를 추가하기도 한다.
놀이는 판놀이(길놀이 또는 앞놀이)로 시작되는데, 서낭대와 탈들을 앞세우고 농악을 울리며 마을을 순회, 낮동안은 주로 부유한 집에 들어 춤과 덕담(德談)을 베풀어 주식을 대접받고 흥취를 돋우다가 밤이 되면 탈놀이가 시작되기 전에 탈고사를 지낸다.
양주산대놀이의 과장별(科場別)은 그렇게 엄격하지 않아 여러 가지 견해가 있었으나 8과장(8마당)으로 나누는 견해가 유력하며, 1과장 상좌춤, 2과장 옴과 상좌, 3과장 목중과 옴, 4과장 연잎과 눈끔적이, 5과장 팔목중(5과장은 염불놀이·침놀이·애사당 북놀이로 구성된다), 6과장 노장(목중놀이·신장수놀이·취발이놀이), 7과장 샌님(의막사령놀이·포도부장놀이), 8과장 신할아비와 미얄할미로 분류한다.
봉산탈춤
[편집]鳳山-
황해도 일대에 분포되어 있는 가면극은 모두 탈춤이라 불린다. 그 분포를 보면 사리원(沙里院)·봉산(鳳山)을 중심으로 황주(黃州)와 서쪽인 안악(安岳)·재령(載寧)·신천(信川)·장연·송화(松禾)·은율(殷栗) 등지와 동남쪽 평야지대인 기린(麒麟)·신원(新院)·서흥(瑞興)·평산(平山)·신막(新幕) 등지, 해안지대인 해주(海州)·강령(康翎)·옹진(甕津)·송림(松林)·추화(秋花)·금산(金山)·연백(延白) 등지에서 추어져 왔고, 5일장이 서면 대개 1년에 1회씩은 탈꾼들을 초빙하여 놀았다고 한다. 즉 이러한 탈춤은 황해도 지역에 널리 보급되었으며, 그 중에 규모로나 내용으로나 최고봉이었던 것은 봉산의 탈춤이었다. 그 밖에 황주·서흥·평산 등지의 탈춤도 상당히 성대하였는데, 이 황해도의 주요 읍들이 농산물과 수공업 생산물의 중요한 집산지(集散地)여서 탈공연을 뒷바라지할 만한 여건을 능히 갖추었으리란 점을 생각할 때 수긍이 가는 일이다. 또 이 지역은 서울에서 의주(義州)로 가는 중요한 길목으로 조선조(朝鮮朝)의 영사행사(迎使行事)에 탈놀이가 자주 동원되었던 것도 그 지역 탈춤 발전의 뒷받침이 되었다.
봉산탈춤은 연중행사의 하나로 5월 단오날 밤 모닥불을 피워놓고 연희되며 새벽까지 계속된다. 단오절은 남부지방의 추석과 맞먹는 중부 이북 지방의 명절로서, 이때는 시기적으로 보아 곡식의 씨앗을 뿌리고 난 직후로 모내기할 때까지의 망중한(忙中閑)의 시기이기도 하여 벽사와 기년(祈年)의 행사, 나아가서는 하지(夏至)의 축제를 베풀기에 알맞은 때이다.
산대놀이가 비교적 전업화(專業化)된 놀이로서 보다 많이 관(官)의 행사와 관련되어 왔음에 비하여, 봉산탈춤을 비롯한 황해도 탈춤은 주로 농민과 장거리의 상인들을 상대로 한 놀이였다. 그러나 역시 고을 원님의 생일이나 부임날과 같은 관아의 경사와 중국사신을 영접하는 놀이로서 연희되었다.
황해도의 탈춤은 봉산탈춤형과 해주탈춤형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봉산탈춤의 연출형식은 피리·젓대·북·장고·해금으로 구성된 이른바 삼현육각(三弦六角:꽹과리와 징을 추가)으로 연주되는 염불·타령·굿거리곡 등에 맞추어 춤이 주가 되고, 여기에 몸짓(mime)과 동작(科:action)과 재담(才談:白, dialogue)과 노래가 따르는 가면무극으로, 크게 보아 가무적 부분과 연극(희곡)적 부분으로 구성된다. 탈춤의 춤은 깨끼춤이 기본이 되며, 목중춤은 오광대의 말뚝이 춤과 마찬가지로 도무(跳舞)로서 모닥불 위를 넘어 뛰며 장기(長技)를 자랑하였으며, 대륙에서 전래한 건무(健舞)를 상상케 한다.
봉산탈춤의 대사는 어느 가면극보다도 한시 구절(漢詩句節)의 인용과 패러디(parody) 등이 많아 지방 이속(吏屬)들이 세습적으로 전해왔음을 반증해 준다.
사용된 가면은 상좌(上佐) 4개, 목중(墨僧, 目僧) 8개, 거사(居士) 6개, 사당(社堂) 1개, 소무(小巫) 1개, 노장(승)(老長<僧>) 1개, 신장수(鞋商) 1개, 원숭이 1개, 취발(醉發) 1개, 맏양반(兩班) 1개, 둘째 양반 1개, 셋째 양반 1개, 말뚝이 1개, 영감 1개, 미얄 1개, 덜머리집 1개이다.
봉산탈춤의 과장(科場)은 크게 7과장으로 나누어 1과장 사상좌춤(四上佐舞), 2과장 팔목중춤(八目僧舞), 3과장 사당춤(社堂舞), 4과장 노장춤(신장수 놀음·취발이놀음 포함), 5과장 사자춤, 6과장 양반춤, 7과장 미얄춤 등으로 구성된다. 이 중에서 팔목중춤·사당춤·사자춤 과장이 양주산대놀이와 다르다. 봉산탈춤은 결국 목중·노장·양반 및 미얄의 독립된 네 개의 놀이에 사당춤·사자춤·원숭이 놀이가 곁들여 전체를 구성하고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봉산탈춤은 양주 산대놀이와 동일한 산대도감의 한 분파라고 할 수 있다.
남사당덧보기
[편집]男寺黨-
남사당이란 조선조 후기 이래 1920년경까지 우리나라 농어촌을 돌아다니며 서민들을 상대로 놀이를 제공하며 생활해 온 유랑예인(流浪藝人)의 무리를 말한다. 이들의 주요 레퍼토리는 풍물(農樂)·버나(대접돌리기)·살판(땅재주)·어름(줄타기)·덧보기(假面舞劇)·덜미(꼭두각시놀음) 등으로, 재인(才人)·광대(廣大)들의 가무백희(歌舞百戱)의 전통을 전승해 온 것들이다.
그들의 가면무극(假面舞劇)의 덧보기는 원형(原型)이 되어 준 산대도감극이나 양주별산대놀이·봉산탈춤 등에 비해 더욱 날카로운 풍자와 패러디(parody)를 보여준다.
또한 남사당 덧보기는 짜임새가 뛰어나 춤보다 재담(才談:臺詞)과 동작(科:action) 부분이 주도적이며, 의식성(儀式性)이나 행사성에 관계없이 그때그때 서민의 오락에 대한 갈구를 충족시켜 왔다.
이러한 서민취향의 풍자극은 양반과 상놈의 갈등을 상놈편에서 다루었으며, 거침없는 직설적 재담은 재미에만 그치지 않고 사회극으로서의 일면을 보여주기도 한다.
연희장소는 마을의 큼지막한 뜰이나 마당이며, 앞에서 적은 여섯 가지 놀이 중 다섯번째로 연희되고, 시간은 대개 자정 무렵으로, 텃고사부터 시작된다.
과장은 네과장으로 구성되며, 1과장 집탈마당, 2과장 샌님마당, 3과장 말뚝이마당, 4과장 피조리마당 등인데, 바가지 위에 종이를 붙여 만든 가면 11개가 사용된다.
한국 가면극 내용의 공통점
[편집]韓國 假面劇內容-共通點한국의 민속가면극들은 원래 야외극(野外劇)으로 무대다운 것이 없이 비탈진 언덕 아래 평지나 넓은 들판같은 데서 상연되었으며, 민속연희의 일반적 특성으로 연출 시간에는 제한이 없이 보통 밤 10시경에 시작하면 새벽까지 모닥불을 피워놓고 계속되었으며, 동틀 무렵 끝마치는 것이 상례였다. 상연시기는 각 지방에 따라 다르나 음력 정초, 상원(上元), 4월 초파일, 5월 단오, 8월 추석 등의 명절과 그 밖의 경사 때나 한천(旱天)의 기우제(祈雨祭) 같은 때에도 수시로 상연되었다.
현존하는 이들 가면무극(假面舞劇)들의 공통된 내용은 같은 시기의 조선조 서민문학의 특성이 그러하듯이 파계승(破戒僧)과 몰락한 양반, 무당, 사당패, 거사(居士)와 기타 서민들의 등장을 통하여, 권선징악의 테두리에서 호색(好色)과 현실폭로와 풍자·웃음 등을 보여 주며, 그 주제는 크게 나누어 파계승놀이와 양반놀이, 서민생활상 등이다. 이것을 더욱 세분하면 ① 벽사의 의식무(儀式舞)와 무제(巫祭), ② 파계승(破戒僧)에 대한 풍자, ③ 양반에 대한 모욕, ④ 남녀(부부와 妻妾)의 갈등, ⑤ 서민생활의 곤궁상 등을 나타낸 것들이다.이 주제들은 몇 개의 과장(科場:마당)으로 나누되 소위 옴니버스 스타일로 한 테두리 속에 묶은 것이므로 서양 근대극처럼 하나의 주제로 시종한 일관성(continuity)은 찾아보기 어렵다.
이러한 가면극들의 또 하나의 공통점은 그 경영적(經營的)인 면으로, 연희에 소요되는 비용은 지방 유지나 상인(商人)들의 기부로 충당되었고, 대개의 경우 연희자들은 무보수였으며, 지방에 초청을 받아 가면 응분의 전곡(錢穀)이나 주식(酒食) 대접을 받는 정도였다.
한국 가면극의 연희본
[편집]( 韓國假面劇-演戱本) 민속예술이 그러하듯이 가면극의 연희본도 구전(口傳)으로 전승되어 왔다. 따라서 항상 고정된 내용이 아니기 때문에 세월과 함께 약간씩 변하였고, 연희자에 따라서도 조금씩 달랐다. 또한 즉흥적인 창작의 여지가 있어, 같은 연희자의 대사라도 공연의 기회에 따라서 달라질 수도 있었다. 이처럼 구전으로 전승되던 연희본이 채록(採錄)되기 시작한 것은 1930년대부터의 일이었으며, 이 무렵 양주별산대놀이·봉산탈춤 등 몇 가지가 채록되었다.그 후 1960년대에 와서 가면극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고, 연희본 채록도 활발해졌다. 그러나 가면극사(假面劇史)의 전과정을 본다면, 1930년대 이래 쇠퇴기에 들어섰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채록된 대본이 만족스러운 것은 못되나, 그전 것을 알 도리가 없으므로 오늘날의 연희본을 통해서 가면극을 이해할 수밖에 없다. 현재까지 채록된 연희본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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