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문화·민속/한국의 연극/한국의 가면극/한국 가면극의 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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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가면극의 연혁〔개설〕[편집]

韓國假面劇-沿革〔槪說〕

삼국시대의 가면극[편집]

三國時代-假面劇

한국 가면극의 기원은 9세기 말엽으로 거슬러 올라가, 최치원(崔致遠)의 <향악잡영> 5수에 나타나는 5기(五伎), 즉 월전(月顚)·대면(大面)·금환(金丸)·속독(束毒)·산예에서 확실히 가면을 사용한 흔적을 엿볼 수 있다. 다만 유감인 것은 그 시가 너무나 간단하여 내용이 자세하지 않다는 점이다. 그러나 가면극으로서는 이것이 한국에 있어서의 최초의 기록인 셈이다.

신라시대에는 이 외에도 가면놀음으로서 검무(劍舞)와 처용무(處容舞)가 있었다고 하나, 이에 대한 정확한 문헌과 유물은 없다. 다만 <동경잡기(東京雜記)> <풍속조>의 기사에서 검무가 가면극이라는 시사를 얻을 수 있는바, 이 가면검무는 중국 북제(北齊) 난릉왕(蘭陵王)의 고사(故事)를 놀음으로 만든 대면희(代面戱)와 어린 관창(官昌)의 이야기를 춤을 통해 놀음으로 만든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같은 책에 처용무 역시 가면을 쓰고 춤을 춘다는 것을 말하였다. 그러나 <문헌비고(文獻備考)> <황창랑무(黃昌郞舞)>조를 보면, 이 두 놀음이 발생한 신라 그 당시에도 과연 가면을 사용하였을까에 대해서는 의문이 간다. 다만 상술한 문헌을 통해 뒷날 가면을 사용했던 것만은 명백하다고 추정할 수 있다.

이 검무는 지금까지도 전승되어 오거니와, 오늘날 보는 검무는 가면을 쓰지 않는 것을 보는데, 이는 후세에 와서 이 춤이 남성의 놀음에서 여성의 놀음으로 옮겨간 뒤부터라고 생각된다. 아무튼 이 검무는 신라가 통일의 위업(偉業)을 성취하려 할 때의 화랑도(花郞道)정신을 검무로써 표시하고, 또 이를 고취하려 하였던 것이라고 생각된다.

처용무는 고려·조선을 거쳐 오늘날까지도 가면을 쓰고 춤추는 것을 보거니와 <고려사(高麗史)> 고종 23년조와 신우조(辛禑條)를 통해 고종 23년(1236)에 연희(演戱)하였다는 것이 문헌상 가장 오래나 그 이전에도 있었다는 것이 엿보인다.

이 가면처용무는 조선조에 와서도 궁중을 중심으로 연희되어 왔으니 그 연희에 대하여는 <용재총화> 등에 산견(散見)된다. 아무튼 처용무는 신라 말기에 발생한 처용의 전설을 토대로 한 고대사회의 주술적(呪術的) 무용의 하나로 보아 틀림이 없을 것이다.

고려시대의 산대잡희[편집]

高麗時代-山臺雜戱

고려시대에는 가면을 쓰고 하는 나례(儺禮)행사와 산대잡희(山臺雜戱)가 있었다.

나례란 연중의 재앙 및 병마(病魔)의 근원인 악귀(惡鬼)를 쫓아내어 즐겁고 경사스런 새해를 맞이하기 위해 음력 섣달 그믐날 밤에 행하던 의식이다. <문헌비고>에 의하면 이 행사는 고려 정종(정宗) 6년에 우리나라에 들어와 조선왕조 인조(仁祖) 때까지 행하여졌다고 한다.

한편 나례와는 달리 고려 말엽에는 산대잡희(山臺雜戱)가 있었다. 이 잡희에는 처용무 등 가면놀음도 들어 있었는데,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더욱 성행하였다.

조선시대의 산대나례[편집]

朝鮮時代-山臺儺禮

고려시대의 나례와 산대잡희는 조선조에 그대로 계승되어 인조 때 공의(公儀)로써 폐지될 때까지 행해졌다. 조선조에서는 산대도감(나례도감)이 설치되어 여러 가지 놀음을 주선하였으며 조정의 여러 의식이나 외국사신의 영접 등에도 이와 같은 놀음이 사용되었다.

그러나 인조 12년 산대잡희 및 나례가 혁파(革罷)되자, 이러한 놀음에 종사해오던 연희자들은 그들의 생계를 위해 재출발을 해야만 했다. 이리하여 그들은 그들 자신의 발의에 의해 민간 관람자를 상대로 신생면(新生面)을 개척해 나갔으며, 이로부터 단순한 가면놀음에서 하나의 연극으로 점차 발전해 갔다. 여기에서 산대잡희가 아닌 산대가면극으로서의 산대놀음이 연희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연극으로서의 산대가면극의 형성은 산대잡희 및 나례가 공의로써 폐지된 뒤의 일이었다.

그런데 여기에 산대놀음으로써 특히 가면놀음을 위주로 하여 일단이 형성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고 보인다. 당시 나례도감에 예속되어 있던 연희자들은 하층민으로서, 그들은 궁중에서 가면을 쓰고 나례행사를 하던 나자(儺者)들이었다. 물론 이들은 나례행사 외에 산대잡희 때에도 연희를 하였다. 그들은 그들끼리의 도중(都中)을 형성하고 있었는데, 공의(公儀)로서 궁중의 나례 및 산대잡희가 폐지되자,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 그들의 기본 재주를 활용할 도리 밖에 없었다. 공의가 폐지된 후에도 이들은 가끔 궁중에 불려가 연희하였다. 따라서 그들의 생활비는 국가에서 직접 주지는 않았으나 그들에게 계방(契房)의 도인(都印)을 주어서 생계를 보조해 주었다.

도인(都印)이란 관가(官家)에서 발급하는 증명서의 일종으로 민간인에게 기부금을 받을 수 있는 허가증 같은 것인데 봄철에는 매미인(蟬印), 가을철에는 호랑이인(虎印)이 찍혔다. 그들은 이것을 가지고 연 2회 나루터나 시장이나 절 등지에서 돈과 곡물을 받아 생계를 꾸려나갔다.

산대가면극의 전파[편집]

山臺假面劇-傳播

이들 연희자들의 거주지는 성 밖이었으며 서울 남대문 밖의 큰고개(大峴里) 및 서빙고(西氷庫), 서대문 밖의 녹번리(碌磻里), 그리고 애오개(阿峴里) 등지였고, 아현리에 살고 있는 이가 많았으므로 이른바 '아현산대'라고 하였다. 이 아현리에 그 일단이 있었던 아현산대는 사회적으로 지위가 가장 낮은 데다가, 또한 경제적으로 혜택을 입지 못하였으므로 70여년 전에 흐지부지 해산되고 말았다.

그런데 서울에서 북쪽으로 15마일 가량 떨어진 곳에 있는 '양주산대(楊州山臺)'는 지금부터 100년전 서울성 밖에 있던 아현산대가 그 지방에 흥행을 갔을 때 그곳 관아의 하층배들이 보고서 이것을 본받아 배운 것으로서 이 둘은 같은 계통에 속한다. 아현산대의 아류(亞流)인 이 양주산대를 '별산대(別山臺)'라고 부르기도 한다. 양주산대는 한때 지방공연을 갖기도 하였는데, 대대적인 흥행으로는 1929년 조선박람회 때의 서울 동대문 밖 붕어우물에서의 공연이었다. 양주산대는 그 일단이 그들의 거주지인 양주의 구읍(舊邑)에 잔존해 있었으나 옛날의 연희자는 다 죽고, 지금은 몇 사람이 그들의 계승자(繼承者)로서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상태이다. 그런데 이 산대가면극(山臺假面劇)은 양주 이외의 지방에서도 연희되어 왔으니, 그것은 구파발(舊把撥)·녹번(碌磻)·노량진(鷺梁津)·퇴계원(退溪院)·송파(松坡) 등지였다. 이 중에서도 송파는 50여년 전에 양주산대가 송파에 와서 노는 것을 그때 그곳 사람들이 본받아 배워서 한 것이다. 그 외의 것은 각각의 지방에 그 연희자들의 일부가 거주하면서 이 가면놀음을 하게 되자, 그곳 사람들 중에서 이를 즐겨 배우는 이들이 생기게 되어 자연히 분포케 된 것이다.

산대가면극은 아현산대가 연극으로서 발전되어 가던 시기에 각 지방에 흥행을 나갔던 것인데, 그때 이 가면극은 여러 지방에 전파되어 또다른 유형(類型)의 가면극이 형성되었을 것이다. 즉

해서(海西) 쪽으로는 봉산(鳳山)·해주(海州)·강령(康翎)·황주(黃州)·서흥(瑞興)·기린(麒麟) 등지에 퍼지게 되어 '해서가면'으로 동해안 쪽으로는 강릉(江陵)·영양(英陽)·안동(安東) 등지에 퍼져서 이것은 '서낭신제(城隍神祭) 가면극'으로, 남해지방의 낙동강(洛東江) 연안 쪽으로는 초계(草溪)·신반(新反)·진주(晋州)·마산(馬山)·김해(金海)·통영(統營)·고성(固城)·거제(巨濟)·수영(水營)·동래(東萊)·부산진(釜山鎭) 등지로 퍼져서 '오광대(五廣大) 및 야유(野遊) 가면극'이 되었던 것이다.

산대가면극의 현황[편집]

山臺假面劇-現況

이 가면극은 주로 국민이 다같이 쉬고 즐기는 음력 정월 대보름과 5월 단오절(端午節)에 민중 오락의 하나로서 매년 거행되어 향토예술화되었던 것이다. 연희자 자신의 흥에서와 또 민중의 이에 대한 절대적인 지지로 배양되어 온 가면극은 중·일 전쟁이 일어나자 일제에 의해 금지되었다.

5·16 이후 문화재 보호법의 발효와 더불어 다만 몇몇 지방의 가면극이 무형문화재로서 지정을 받게 되어, 이에 대한 보호와 기능자의 계승으로 인해서 한국가면극은 간신히 그 명맥을 유지하게 되었다.

<崔 常 壽>

가면극의 기원[편집]

假面劇-起源

가면극에 관한 사적 연구(史的硏究)는 다른 어느 장르의 경우보다도 활발하게 이루어져 왔으며, 그 논의의 초점은 가면극의 기원을 어디에 두는가로 압축되었는데, 농경의식설(農耕儀式說)·기악설(伎樂說)·산대희설(山臺戱說) 등이 가면극의 기원을 설명하는 유력한 설로 되어 있다.

농경의식설[편집]

農耕儀式說

고대 이래로 농사가 잘 되라고 농민들이 거행하던 농경의식이 가면극의 기원이란 설이다. 농경의식의 모습은 현재 남아 있는 서낭굿 등의 부락굿에서 잘 나타나 있다. 농경의식설에 의하면 신의 얼굴을 모방하여 만든 가면은 차차 인간의 모습을 닮은 가면으로 바뀌었고, 자연과의 갈등을 주술적(呪術的)으로 해결하기 위한 굿이 사회적인 갈등을 예술적으로 표현하려는 것으로 변모하여 가면극이 발생했다. 농악대가 악사로 전환된 것이라든가, 가면극의 관중이 극의 진행에 개입하는 점 등은 서낭굿의 단계에서부터 내려오는 전통이라고 본다. 농악대의 잡색(雜色)놀이는 가면극의 맹아를 보여주는 것이고, 하회별신(河回別神) 굿놀이나 강릉관노(江陵官奴) 탈놀이는 굿의 형태를 완전히 탈피하지 못한 가면극으로 농경의식이 농민의 행사였기에 가면극은 처음부터 민중의 연극으로 자라났다는 것이 이 설(說)의 주장이다.

기악설[편집]

伎樂說

백제사람 미마지(味摩之)가 중국 남조(南朝) 오(吳)에서 배워 일본에 전했다는 기악(伎樂)이 바로 가면극의 기원이라는 설이다. 13세기에 만들어진 일본 문헌 <교훈초(敎訓抄)>에 전하는 기악(伎樂)은 묵극(默劇)이기는 하나, 그 내용이 오늘날의 양주별산대놀이나 봉산탈춤과 흡사하므로 기악이 가면극으로 전승되었음을 알 수 있다는 논지(論旨)이다.

산대희설[편집]

山臺戱說

산대희에서 산대극이 생겨났고, 산대극의 전파로써 각 지방의 가면극이 이루어졌다는 설이다. 산대희는 산처럼 높은 무대를 만들어 5색비단과 인물·새·짐승·수레 등의 가작물(假作物)로서 장식하였고, 그 위에서 가무(歌舞)와 규식지희(規式之戱) 및 소학지희(笑謔之戱)를 하는 놀이였다. 일찍이 신라에서 시작되어 고려를 거쳐 조선조에 와서도 국가적인 행사로서 계속되어 오다가 인조(仁祖) 때 일단 중단되고, 영조(英祖) 이후에는 없어졌다. 국가적인 행사로서의 산대희는 없어졌으나 그 연희자인 반인(伴人:편놈)들이 민간에서의 산대놀이, 즉 가면극을 시작했다. 따라서 가면극의 연기는 규식지희의 연장이고, 대사(臺辭)는 소학지희(笑謔之戱)가 발전한 것이란 논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