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문화·민속/한국의 연극/한국의 고전극/삼국·고려시대의 연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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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고려시대의 연극〔개설〕[편집]

三國·高麗時代-演劇〔槪說〕

삼국시대라면 4세기 초에서 7세기 중엽까지 고구려·신라·백제 세 나라가 정립(鼎立)하여 항쟁하던 시대로서 처음부터 고대국가로서의 체제를 갖추고, 종교적으로는 유(儒)·불(佛)·선(仙) 등을 바탕으로 농경생활을 영위해 오던 때를 말한다. 일찍부터 고구려는 화북(華北) 및 새외민족(賽外民族)의 선진문화와 접촉이 잦았고, 낙랑문화(樂浪文化)를 비롯한 중국 대륙계와 서방 인도계의 문화를 흡수, 다시 신라·백제로 전파하여 갔다.

신라에서는 대륙 및 서역계(西域系)의 기악(伎樂)과 산악계(散樂系)의 골계희(滑稽戱)를 흡수, 이를 향악(鄕樂)으로 발전시켜 갔다. 그 대표적인 기록으로는 <삼국사기(三國史記)> 권32 <잡지(雜志)>에 보이는 최치원(崔致遠)의 향악잡영 5수의 시(詩)가 바로 그것이며 이를 신라의 5기(五伎)라고도 하는데 금환(金丸)·월전(月顚)·대면(大面)·속독(束毒)·산예 등이 그것이다.

당시 5기는 많은 신라악(新羅樂) 중에서는 물론, 고구려·백제 등 삼국악(三國樂)을 대표한 극적 놀이로서 재래의 단순한 희락(喜樂)과는 달리 외래(外來)의 극희(劇戱)를 종합하여 우리의 향악 및 극적 예능으로 발전시킨 형태였다.

재래의 고구려악(高句麗樂)중에는 외래성(外來城)·연양(延陽)·명주(溟州)의 3종이 있었다 하며(<고려사> <樂志>), 고구려악은 일찍이 중국으로 건너가 수(隋)의 7부기(七部伎)와 9부기(九部伎), 당(唐)의 10부기(十部伎)의 하나로 등장하고, 또 중국 사서(史書)에는 지서가(芝栖歌)·가지서무(歌芝栖舞)를 들고 있으나(<수서(隋書)> <音樂志>) 그 연출 방법은 알 수 없다.

백제악(百濟樂)은 선운산(禪雲山)·무등산(無等山)·정읍(井邑)·지리산(智異山)·방등산의 5종으로(<고려사> <樂志>), 중국 사서(史書)에는 또 백제기(百濟伎)로서 투호(投壺)·위기(圍碁)·저포(樗蒲)·악삭과 농주지희(弄珠之戱) 등을 들고 있으나 모두 자세하지 않다. 다만 <일본서기(日本書記)>에서는 백제사람 미마지(味摩之)가 남중국(南中國)인 오국(吳國)에서 기악(伎樂)을 배워 일본에 전하였다 하나, 기실 백제사에는 이를 볼 수 없고 일본사에만 전하고 있다.

이에 비하여 신라악은 회악(會樂)·신열악(新熱樂)·돌아악(突阿樂)·지아악(持兒樂)·사내악(思內樂) 등 (<삼국사기> <雜志>) 18종의 악명(樂名)을 볼 수 있고 이 밖에도 동경(東京:二種)·목주(木州)·여나산(餘那山)·장한성(長漢城)·이견대(利見臺) 등 6종이 기록된 데도 있다(<고려사> <樂志>).

여기서 악(樂) 혹은 기(伎)라고 하는 것은 원래 가(歌)·무(舞)·악(樂)·기(伎) 등의 종합예술인 연극의 미분화상태에 있어서의 총칭으로서 넓은 의미에서는 음악무용을 비롯한 예능·극희(劇戱) 전반을 지적하는 말이었다. 그러므로 신라악은 금척(琴尺)·무척(舞尺)·가척(歌尺) 등으로 구성되고 따라서 이는 향인(鄕人)의 희락을 위한 종합예술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삼국악(三國樂) 외에도 후세의 연극사(演劇史)에 있어서 큰 비중을 차지한 신라의 검무(劍舞)·처용무(處容舞)·무애무(無▩舞) 등을 들 수 있는 것이다.

고려(高麗)는 신라의 문화를 계승하여 전대의 불교를 옹호하고 관료조직을 정비,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를 갖추어 갔다. 일찍이 도가사상(道家思想)이 중심이 된 팔관회(八關會)와 불사(佛事) 중심의 연등회(燃燈會)는 국가의 2대 행사로서 국가 왕실의 태안(泰安)을 비는 제전으로 시작, 나중에는 채붕(綵棚), 즉 산대(山臺)를 가설하여 전대의 가면극희는 물론 가무잡극과 중국 당(唐)·송(宋)의 많은 가무희(歌舞戱)가 동시에 연출되었었다.

이와 병행하여 고려의 나례(儺禮)는 전대의 가면 구나희(驅儺戱)의 일종으로서 그 유래는 신라의 대면희(大面戱)에서도 볼 수 있으나 연희방법은 <고려사(高麗史)> <64지(志)> 계동대나의조(季冬大儺儀條)와 <후한서(後漢書)> <예의지(禮儀志)>의 기록이 대체로 일치하고 있어 그(중국) 모양을 모방한 듯하다. 뿐만 아니라 기원전 9-8세기 주대(周代)의 풍속에서 보이는 방상씨(方相氏)의 기록과 연희(演戱)가 일치하고 있어, 이는 벌써 고대의 풍속에서 기인한 세계공통적인 송구영신(送舊迎新)의 놀이와 주술적(呪術的)인 벽사진경의 뜻이 없지 않았던 것이다. 고려시대에 있어서의 세말 나례(歲末儺禮)의 풍속은 이미 명문세가의 자제들로 구성된 일종의 스펙터클한 극적 놀이로 발전하여 단순한 고대 주술적인 행사의 의미에만 그치지 않았다.

다시 여기에 오늘의 창극(唱劇) 배우에 해당하는 창우(倡優)·광대(廣大)의 잡기(雜技)와 유기(遊妓)들의 가무백희(歌舞百戱)가 함께 연출되는 등, 당대(唐代)의 산악계의 골계희와 송대(宋代)의 교방가무(敎坊歌舞) 및 전대(前代) 극희의 대표적인 처용·태평무(太平舞) 등이 함께 연출됨으로써 이를 더욱 찬란하게 장식했다.<張 漢 基>

제천의례와 가면희[편집]

祭天儀禮-假面劇

3세기경의 한반도의 여러 부족의 생활을 기록한 <삼국지(三國志)> <위지동이전(魏志東夷傳)>과 그 밖의 중국 사서에 의하면 어느 부족사회에서나 1년에 1∼2차의 국중대회(國中大會)를 열고, 제천(祭天)과 아울러 부족의식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 가무백희(歌舞百戱)를 연행(演行)하였다고 하였다.

이때 우리의 원시극인 무의식극(無意識劇)으로 가면희(假面戱)가 이미 그 속에서 싹트고 있었음을 생각할 수 있으며, 부여(扶餘)의 영고(迎鼓), 고구려의 동맹(東盟), 예(濊)의 무천(舞天), 마한(馬韓)의 5월제·10월제, 가락(駕洛)의 계욕 등은 그 대표적인 제의(祭儀)가 된다. 이러한 고대의 제의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록이 없어 전승된 민속에서 그 내용을 복원(復元)할 수밖에 없는데, 현존한 동제신사(洞祭神祀) 등에서 그 유풍(遺風)을 추측할 수 있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는 청안(淸安)의 국사신사(國師神祀), 웅천(熊川)의 웅산신당사(熊山神堂祀), 고성군신사(高城郡神祀) 등에 관한 기록이 보이며, <임영지(臨瀛誌)> <풍속조(風俗條)>에는 강릉단오(江陵端午)굿에 관한 기록이 보인다.

또 강릉단오굿과 거의 같은 계통의 별신(別神)굿이라 생각되는 것으로 하회별신(河回別神)굿이 있다. 이처럼 각 지방에 전해져 오는 동제(洞祭)의 민속과 그에 따르는 가무오신(歌舞娛神)의 각종 연희가 바로 영고·동맹·무천 등 고대제의(古代祭儀)의 유속(遺俗)이며, 그 가무(歌舞)와 가희(歌戱)가 근원연극(根源演劇)으로서 한국 연극의 기원의 하나가 됨을 짐작할 수 있다.

원시사회에 공통된 제천의식에 이어, 영신(迎神)과 조묘제의(祖廟祭儀)의 보다 더 구체적인 기록은 <삼국유사> <가락국기(駕洛國記)>에서 찾을 수 있는데 이것은 건국신화인 시조 수로왕(首露王)의 전설이 그들의 제전(祭典)을 통하여 형성된 것임을 말해준다. 문자(文字)로 기록할 수단을 갖지 못한 그들은 춤과 노래의 제천극희(祭天劇戱)를 통해 그들의 역사, 즉 '생활이 된 현실로서의 신화'를 되풀이하고, 제전의 실수(實修)행위로써 이를 전승해온 것인데 이러한 기록에 의해 제의(祭儀)의 일부로 무언극적 춤이 연무(演舞)되고, 그 제의무(祭儀舞)가 다시 드라마로 발전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밖에 토템의례(totem 儀禮)·농경의례·장의(葬儀) 등에서도 한국 연극의 기원을 말해주는 여러 가지 시사(示唆)를 찾아볼 수 있다.

고구려악[편집]

高句麗樂

고구려악은 고려악이라고도 하는데 고구려의 고분벽화에서 보이는 정도이며, 문헌을 통한 고증은 확실하지 못하다.

고구려악의 우수성[편집]

高句麗樂-優秀性

고구려 가악(歌樂)에 대해서는 <고려사> <악지(樂志)>의 삼국속악(三國俗樂)조에 '내원성(來遠城)' '연양(延陽)' '명주(溟州)'의 3종이 기재되어 있다. 또한 고구려악(古樂에서의 '樂'은 오늘날과 같이 좁은 의미의 음악만을 가리키지 않고, 樂·歌·舞가 하나로 종합된 예능을 뜻하였으며, 가무, 즉 음악과 무용을 포함하여 널리 예능·연극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영어로는 theatrical arts나 performing arts와 같은 뜻임은 일찍이 중국으로 건너가 수(隋)의 7부기(七部伎)와 9부기(九部伎), 당 태종(唐太宗) 때의 10부기(十部伎)에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일본에는 삼국악(三國樂)이 5세기 중엽에서 7세기 중엽에 이르는 동안 신라악(新羅樂)·백제악(百濟樂)·고구려악(高句麗樂)의 순서로 전래되어 정립하였으나 9세기 중엽에 이르러 그들이 외래무악(外來無樂)을 정리할 때 삼국 및 발해(渤海)의 악무(樂舞)를 우방악(右方樂), 당(唐) 및 인도(天竺) 등의 악무를 좌방악이라 이르게 되었다. 그런데 좌방악은 카라가쿠(唐樂), 우방악은 코마가쿠(高麗樂)라 하여 고구려악이 삼국악의 총칭으로 불리게끔 되었다.

고구려악과 서역악[편집]

高句麗樂-西域樂

<수서(隋書)> <음악지>에 고구려악으로 지서가(芝栖歌)와 가지서무(歌芝栖舞)가 있음을 기록하고 있는데, 오늘날 그 연무(演舞)의 내용은 분명치 않으나, 이는 우리말로 극희(劇戱)를 의미하는 '짓'이란 말의 대자(對字)로 추정된다. 그런데 여기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은 수의 9부기(九部伎)의 하나인 서역(西域) 안국악(安國樂) 중에 가지서(歌芝棲)와 무지서(舞芝棲)가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우연한 부합이 아니라 고구려의 지서가무(芝栖歌舞)와 안국(安國)의 지서가무가 같은 계통의 것임을 시사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지서뿐만 아니라 당(唐)의 10부기(十部伎) 중 고려기(高麗伎)에는 호선무(胡旋舞)와 광수무(廣袖舞)가 들어 있는데 역시 10부기 중의 하나인 강국기(康國伎)·미국기(米國伎)·식닉기(識匿伎)에도 호선여무(胡旋女舞)가 보인다. 이 밖에도 수·당의 '악'과 고구려악이 같은 계열의 것임을 짐작케 하는 사실들은 많다.

일본에서 전해지고 있는 우방악(무)(右方樂<舞>), 즉 고구려악 24곡(曲) 중에는 일본제 악무라고 하는 것이 4곡이다. 나머지 20곡중 12곡은 가면극이고 나머지 8곡은 가면을 사용하지 않은 것이다. 이것은 물론 삼국과 발해악(渤海樂)의 집성으로 고구려악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지만 현존한 가면과 간단하나마 일본 악서(樂書) 중에 전하는 연무(演舞) 내용과 설명들은 고구려악을 비롯한 삼국악을 복원(復元)하는 데 있어 중요한 자료의 하나가 되고 있다.

이처럼 고구려악이 신라나 백제악을 대표하여 수·당의 9부기·10부기에 포함되고 일본의 우방악으로 집성될 수 있었던 것은 고구려악이 당시 중국을 풍미하던 오현(五絃)과 필률 같은 서역(西域)악기와 가면무(假面舞)를 도입·흡수하였기 때문이라고 하겠다.

백제악[편집]

百濟樂

백제의 가악(歌樂)은 <고려사> <악지(樂志)>에 선운산(禪雲山)·무등산(無等山)·방등산(方等山)·정읍(井邑)·지리산(智異山) 등 5종이 기재되었고, <수서(隋書)> <동이전(東夷傳)>에는 백제기(百濟伎)로 투호(投壺)·위기(危機)·악삭·농주지희(弄珠之戱)를 들고 있는데, 백제악은 고구려악과는 달리 수(隋)의 9부기(九部伎)에 들지 못했다. 그 이유는 주로 중국 남조악(南朝樂)인 청악계(淸樂系)의 영향을 받은 반면 당시 유행하던 서역계(西域系)의 음악을 채용하지 않았던 것에서 찾을 수 있다.

일본의 악서(樂書)인 <악가록(樂歌錄>에는 백제의 악인(樂人)이 554년에 백제악을 전했다고 기록되어 있고,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백제 무왕(武王) 13년(612)에 백제인 미마지(味摩之)가 기악(伎樂)을 남중국(南中國)인 오(吳)에서 배워 일본에 전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중앙아시아에서 시작된 기악(伎樂)이 백제를 거쳐 일본에 전해지고 양국의 예능 발달에 획기적인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백제의 기악[편집]

百濟-伎樂

기악이란 사자무(獅子舞)·치도(治道) 이하 오공(吳公)·금강(金剛)·가루라(加樓羅)·곤륜(崑崙)·오녀(吳女)·역사(力士)·바라문(波羅門)·태고(太古)·취호(醉胡) 등이 등장하는 일종의 소극(笑劇)으로서, 로마시대의 마임(mime)이나 미무스극(mimus 劇), 또는 판토미무스(pantomimus) 등에 비교될 가면묵희(假面默戱)이다. 오늘날 기악의 실체를 명확히 밝힐 수는 없지만, 백제의 기악은 사찰(寺刹)에서 일반민중(신도)을 관객으로 하여 연희되는 극적 구성을 가진 가면무용극으로, 백제의 대표적인 드라마일 뿐 아니라 한국가면무용극의 모체가 된 것 중의 하나이다. 이러한 기악에 고구려의 무악(無樂), 신라의 5기(五伎) 등의 영향이 가미되어, 고려·조선시대로 전승되면서 조선조 후기의 산대도감(山臺都監) 계통의 드라마를 형성하는 모태가 되었다.

신라악[편집]

新羅樂

<고려사> <악지> 삼국속악(三國俗樂)조에는 신라악으로 동경(東京:2종)·목주(木州)·여나산(餘那山)·장한성(長漢城)·이견대(利見臺) 등 6종이 수록되었고, <문헌비고(文獻備考)> <속악부(俗樂部)>에는 동경곡(東京曲) 이하 30여종이 수록되어 있어, 7세기 후반에 삼국을 통일한 신라가 가야·백제·고구려악을 집대성하였으며, 후대에 전한 것이 가장 많았음을 보여준다. 신라악은 중국에 전해진 바는 없는 듯하나, 일본에 전달되어 신라악으로서 악서(樂書)에 기록이 있으며, 눌지왕(訥祗王) 37년(453)에는 일본으로 악인(惡人) 80명을 보내어 윤공천황(允恭天皇)의 죽음을 조상한 기록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이때 벌써 신라악무(新羅樂舞)의 규모가 매우 컸음을 알 수 있다.

우리 문헌에 '가무백희(歌舞百戱)'란 성어(成語)가 처음 보이기는 <삼국사기(三國史記)> 권1이며, <문헌비고> 속악부(俗樂部)의 팔관회(八關會)에 관한 기사 가운데도 보이는데, 이때의 가무백희(歌舞百戱)가 어떠한 내용의 것이었는지는 자세하지 않다. 다만 신라의 팔관회를 계승한 고려조의 팔관회에 관한 기록으로 미루어 <수서> <음악지>에 보이는 '각저희(角抵戱)'와 비슷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이러한 신라악의 내용을 보다 구체적으로 살필 수 있는 종목으로는 검무(劍舞)·무애무(無▩舞)·처용무(處容舞)·5기(五伎)·도솔가무(도率歌舞) 등을 꼽을 수 있다.

검무(황창무)[편집]

劍舞(黃昌舞)

<동경잡기(東京雜記)>와 <문헌비고(文獻備考)>에 의하면, 신라의 황창랑(黃昌<倡>郞)이란 7세(8세)의 소년이 검무(劍舞)를 빙자하여 백제왕을 척살하고 백제인들에게 피살되었으므로, 신라사람들이 이를 슬피 여겨, '소년의 얼굴을 닮은 가면을 만들어 쓰고 칼춤을 춘 것'이 지금껏 전한다고 하였다. 이 황창무의 전설은 백제 공격전에 참전하여 용감히 싸우다가 백제의 계백장군(階伯將軍)에게 피살된, 신라 품일장군(品日將軍)의 아들 관창랑(官昌郞)의 사실(史實)과 관련하여 유래된 것으로 보여진다. 또 <삼국사기(三國史記)> <열전(列傳)> 제7에 보면, 청년용사 해론(奚論)의 진몰(陣沒)에 대해 "당시의 사람 중 애도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며, 장가(長歌)를 지어 그의 넋을 위로했다" 하였고, 화랑 김흠운(金歆運)의 전사에 대해서도 "전사를 전해들은 사람들은 양산가(陽山歌)를 지어 상처를 달래었다"는 이야기가 있어 관창의 이야기와 비슷한 바가 있다. 사랑하고 의지하던 자가 죽었을 때 그 넋을 위로하기 위해, 고인의 모습을 가면으로 본뜨거나 혹은 고인의 공적을 연출함은 죽은 자와 살아남은 자 쌍방에 위로가 되었을 것이다. 여기서 고대인들의 무언극적(無言劇的) 무용과 드라마의 한 기원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여러 설화를 종합해 보면, 이 검무가 단순한 전투모의무(戰鬪模擬舞)나 용검술(用劍術)의 묘기(妙技)를 보이는 등의 검무가 아니고, 가면을 착용하고 좀더 희곡성(戱曲性)을 띤 가면동자무검희(假面童子舞劒戱)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검무의 발생시기를 단정할 수 없음과 함께 고려와 조선조의 여러 문헌에 표현된 검무의 모습이 각기 다른 것으로 보아, 신라의 검무(황창무)의 분명한 모습을 밝히기란 어려운 일이라 하겠다.

무애무[편집]

無▩舞

무애무의 유래에 관한 기록은 일연(一然)의 <삼국유사(三國遺事)> 권4 <원효불기(元曉不羈)조>에 보이는 것이 가장 오래 된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의하면, "원효가 이미 실계(失戒)하여 설총(薛聰)을 낳은 뒤 속복(俗服)으로 바꾸어 입고 스스로 소성거사(小姓居士)라 행세하였다. 우연히 광대를 만나 큰 박을 무롱(舞弄)하였는데, 그 형상이 매우 기괴하였다. 원효가 그 형상대로 한 도구(道具)를 만들어 무애라 명명하여 노래를 지어 세상에 퍼뜨렸다. 일찍이 이것을 가지고 수많은 촌락을 돌아다니며 노래하고 춤추어 화영(化詠)하고 돌아왔으므로, 시정(市井)의 하찮은 무리들로 하여금 모두 부처님의 이름을 알게하여 누구나 염불을 할 줄 알았으니 원효의 법화(法化)가 크다"고 했다.

무애무에 대해서는 일부 학자 중에 '농대과(弄大瓠)'라 하는 것을 가면극(假面劇)으로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고려 명종(明宗) 때 이인로(李仁老)의 <파한집(破閑集)> 하권에는 무애가 가면이 아니라 호로(葫蘆:호리병박)였음을 말하고, 원효가 만든 무애박과는 달리 호리병박 상부에 금방울을 달고 밑에는 여러 가지 색의 헝겊(彩帛)을 달아, 이것을 흔들면 방울소리가 나고 채백(彩帛)이 휘날려, 연무(演舞)의 흥을 돋구어 주는 일종의 무용구였던 것 같다.

<삼국유사>에 원효가 무애무를 가지고 여러 마을을 편력하며 불교를 포교하였다는 내용이 들어 있는 것으로도 알 수 있듯이 원효의 무애가무는 불교적인 내용임이 분명하며, <고려사>와 <악학궤범(樂學軌範)>에도 연무(演舞)의 설명 끝에 무애가가 불가어(佛家語)를 많이 썼음을 부기하고 있다. 그러나 고려로 접어들면서 불교 교화의 취지에서 벗어나 오락화되어 여기(女妓)의 향악무(鄕樂舞)로 변화하였고, 호리병도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금방울과 채백(彩帛)으로 장식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종교적인 의의를 완전히 잃지는 않았다.

처용무[편집]

處容舞

처용무의 기원은 신라에 있으나 고려와 조선조를 통하여 궁중나례(宮中儺禮)와 연례(宴禮)에서 처용면(處容面)을 쓰고 추는 괴이호방(怪異豪放)한 일종의 무극(舞劇)으로 연행(演行)되어 왔다. 벽사진경의 구나가무(驅儺歌舞)로 전승된 처용가무의 기원에 대해선 많은 논문이 발표되었으나 그 중 처용설화(處容說話)는 원초에 인류가 가졌던 벽사가면의 인격신화(人格神化)와 그에 따른 해석·설명에서 형성되었으리라는 의견은 처용설화의 해명을 위한 유력한 시사의 하나가 된다. 벽사가면의 민속은 신라 귀와(鬼瓦)의 예는 물론이고 최근까지 문루(門樓)나 방패에 새겨진 귀면(鬼面)에 의해서도 볼 수 있으며, 민가(民家)에서도 귀면형의 탈을 문에 걸어놓고 잡귀의 침범을 방지하려 했다.

이러한 배경에서 신라 향가(鄕歌)인 '처용가'가 이루어지고 다시 고려조에는 일종의 극시적(劇詩的) 무가(巫歌)인 '처용가'로 발전되면서 처용무도 초기의 단순한 주술무(呪術舞)에서 다양한 절차를 갖춘 의식무(儀式舞)로 발전, 조선조의 <악학궤범>에 실려있는 바 그대로 일종의 무극(舞劇)으로까지 계승·발전되어 조선조에는 세말(歲末)의 궁중나례에서 중심가무(歌舞)가 되기에 이르렀다. 처용무는 고려와 조선조를 통해 의식무로서뿐만 아니라 궁중과 궁가(宮家) 및 양반 민가(民家)의 연악무(宴樂舞)로서도 많이 추어졌다.

5기[편집]

五伎

5기는 신라말 최치원(崔致遠, 857∼ ? )이 <향악잡영> 5수(五首)에서 읊은 5종의 놀이, 즉 금환(金丸)·월전(月顚)·대면(大面)·속독(束毒)·산예희를 말한다. 최치원은 이 놀이들을 신라 고유의 향악(鄕樂)이라고 읊었는데, 그 내용으로 보아 중국과 서역에서 전래한 산악(散樂) 등에서 영향받은 삼국악을 종합한 놀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금환[편집]

金丸 몇 개의 금칠한 공(방울)을 공중에 던졌다 받는 곡예로 중국 산악(散樂)의 잡희(雜戱), 농환(弄丸)에 해당하며, 또 일본의 사루가쿠(猿樂:산악)에서 보면 품옥(品玉)·팔옥(八玉)·농칠환(弄七丸) 등에 해당한다. 또 이것은 백제의 농주지희(弄珠之戱), 가야의 보기(寶伎)와도 동일한 것으로 보인다. 보기와 금환(金丸)이 동일한 것이라면, 가야의 우륵(于勒)이 만든 가야금 12곡중의 셋째인 보기와 여덟째인 사자기(獅子伎)는 신라의 5기(五伎)와 조선조의 나례백희(儺禮百戱)·죽광대(竹廣大) 놀이의 주요 레퍼토리로서, 그 연원이 오래됨을 알 수 있다. 경남 일대에서 연행(演行)되던 오광대 탑놀이는 19세기에 초계(草溪) 밤마리(栗旨)장터에서 대광대(竹廣大)에 의해 정립되었다고 하며, 그들은 오광대놀이를 시작하기 전에 매귀(埋鬼:농악)를 치고 먼저 죽방울을 받고, 때로는 솟대광대놀음과 줄광대놀음도 함께 놀았다 한다. 죽방울놀이가 진행되고 구경꾼들이 어지간히 모이게 되면 말뚝이와 다섯 양반이 나와 양반과장(兩班科場)을 놀고 다음에 중과 각시가 나와 승무(僧舞)과장을 하고 비비새가 나와 영노과장을 시작하였다. 다음에 할미와 영감과 지대각시(妾)가 나와 할미와 영감과장을 놀고, 마지막으로 사자과장(獅子科場)을 놀았다고 한다. 이로써 보면 5기(五伎)의 다섯놀이는 개별적인 것이 아니고 뭉쳐진 다섯이며, 그 전통이 5광대에까지 연면히 이어진다고 생각된다. 최근까지 있어온 굿중패들의 주요곡예는 죽방울놀리기·땅재주·쌍줄타기·장재타기·사발돌리기 등이었는데, 이 '죽방울놀음'이 곧 금환(金丸)의 계승일 것이다.

월전[편집]

月顚

월전은 서역 우전국(지금의 지방)에서 전래한 가면무로 생각되는데, 어깨가 올라가고 목이 오그라든 예인(藝人)들이 여러 사람 등장하여 골계(滑稽)스런 회화를 주고 받는 내용의 골계희(滑稽戱)로 산악(散樂)의 일종이라는 설, 선비들이 주석(酒席)에서 격금내기로 실수하는 것을 내용으로 한 경희극(輕喜劇)이라는 설, 여러 난장이(群儒)들이 다리(假髮)를 머리에 쓰고 술잔을 다투어 마시는 놀음이라는 설, 혹은 가면인형극(假面人形劇)이란 설 등이 있는 것으로 보아, 가면을 쓴 배우들이 만좌를 웃음으로 휩쓰는 마임형식으로 골계희(滑稽戱)·경희극(輕喜劇)임에 틀림없는 것 같다.

대면[편집]

大面

대면은 북제시대(北齊時代)에 시작되고 당대(唐代)에도 성행하여 당대 5기(五伎)의 하나가 된 대면(代面:大面)희와 그것이 일본에 전해진 것이라는 좌방악(左方樂) 중의 난릉왕(蘭陵王)과 비교되는 가면극으로 여러 문헌으로 보아 3자가 같은 계열의 구나무(驅儺舞)임을 짐작케 한다.

속독[편집]

束毒

중앙아시아의 타시켄트와 사마르칸트 일대의 속특(Soghd) 제국에서 전래한 검무의 일종이라 생각된다. 신라 최치원(崔致遠)의 시구(詩句)에 의하면 가면극임을 짐작하게 하는데,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도 원방인(遠方人)이 왕화(王化)를 사모하여 떼지어 와서 무악(舞樂)을 바치는 뜻을 나타내는 가면극이라고 설명했다. 최치원의 시구로 보아 고구려가 속특제국에서 받아들인 건무(建舞)의 일종으로, 호선(胡旋)·호등무(胡騰舞)와 같은 급격한 템포의 춤이라 생각된다.

산예[편집]

5기 중에서 그 유래를 직접 알 수 있는 유일한 것이 산예희, 즉 사자무(獅子舞)이다. 사자무는 인도 특유의 동물 의장무(動物擬裝舞)로서 서역과 동방 여러 나라에 널리 퍼진 유명한 무악이다. 원래 우리나라에는 사자가 없었으나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보면 신라시대에 이미 사자가 수입되었음이 기록되었고, 신라는 불교와 관련된 우수한 사자의 조각품을 남기고 있다. 백제 기악(伎樂)에도 사자기(獅子伎)가 들어왔다. 현전하는 민속무에는 북청사자놀음·봉산탈춤·오광대에 각각 사자무가 나온다.

도솔가무[편집]

兜率歌舞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보면 도솔가(무)는 신라 제3대 유리왕(儒理王) 때에 생긴 것으로 기록되었는데, 이에 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그 중 지금 남방에서 들을 수 있는 농악의 옛 형태인 두레노래의 하나로, 도솔가는 <제산가(祭神歌)>라는 설과 하나의 균제(均齊)된 '가무악'으로 형식화되어 '민속환강(民俗歡康)'을 송축하는 공적(公的) 규모의 신사의식가무(神事儀式歌舞)였다고 보는 설 등이 유력하다.

산대잡극[편집]

山臺雜劇

고려말기에 비롯된 잡기(雜技)의 하나. 고려는 신라의 유풍(遺風)인 팔관회(八關會)를 계승하여, 해마다 중동(仲冬:음력 11월)에 이를 행하여 13세기 중엽인 원종(元宗)대까지 계속하였고, 불교적 행사로서는 연등회(燃燈會)를 상원(上元:음력 정월 15일)에 거행, 이때에 신라 이래의 백희(百戱)를 함께 거행했다. 이러한 가무백희(歌舞百戱)의 내용은 고려 말 이색(李穡)이 읊은 시 <산대잡극>으로써 짐작할 수 있다. 산대잡극은 일종의 장식무대(裝飾舞臺)인 채붕(綵棚)과 함께 처용무(處容舞)를 비롯한 가악무(歌樂舞)와 장대타기와 같은 기기(奇伎)곡예로서, 다분히 감각적으로 관중의 이목을 즐겁게 하였던 스펙터클 쇼이다. 이러한 산대잡극은 연등회와 팔관회뿐만 아니라 왕의 행행(行幸)·환국(還國)이나 연악관오(宴樂觀吳)와 개선장군의 환영잔치 등에서도 쓰인 것이 기록에 보인다.

연등회·팔관회·백희[편집]

燃燈會·八關會·百戱

고려의 사회에는 시민들을 위한 고정된 오락장은 없었으나 그 대신 국가 명절과 각종 불교행사가 행하여져서 음악·가무·백희(百戱) 등으로 제불(諸佛)과 천지신명(天地神明)을 즐겁게 하였고, 그로써 국가와 왕실의 태평을 빌었다. 또 이러한 국가적 행사를 통해 군신(君臣)이 동락(同樂)하고 일반 백성까지 즐겼다. 고려에는 아홉 가지 명절, 즉 원정(元正)·상원(上元)·한식(寒食)·상사(上巳)·단오(端午)·추석(秋夕)·중구(重九)·동지(冬至)·팔관(八關) 등이 있었는데, 그 중 가장 성대한 행사가 상원(上元)에 행하던 연등회(燃燈會:나중에는 2월 연등으로 되었음)와 중동(仲冬)에 행하던 팔관회(八關會)였다. 연등회는 불사(佛事)에 관한 것이며, 팔관회는 토속신(土俗神)을 위한 것으로, 그 대상은 달랐으나 의식절차에 있어서는 양자가 동일했다. 고려 태조(太祖)는 신라의 유풍인 팔관회(八關會)를 부활시키고, 선풍(仙風)인 팔관회와 사불(事佛)하는 연등회(燃燈會)를 분명히 구별했다. 그 후 유교주의(儒敎主義)를 택한 성종(成宗)은 이를 폐지하였으나 현종(顯宗) 때에 회복되어 13세기 말 쇠퇴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전후 300년을 내려오는 동안 의식(儀式)의 내용이 변모하여 신라 팔관회의 유풍이던 의식의 중심으로서의 국선(國仙)이 없어지고, 세속인인 양반과 가산이 넉넉한 자로 하여금 대행시켜, 종교적인 제례에서 속인의 백희(百戱)를 수반하는 의식으로 변모하면서 차차 세속화하여 갔다. 백희(百戱)란 죽방울놀리기·장대타기·줄타기·땅재주·사발돌리기·광대탈·꼭두각시놀음 등 신라 때의 가무백희·5기(五伎) 등의 전승이라 볼 수 있는 놀이들인데, 채붕(綵棚)이라 불리는 오색비단 장막을 늘인 다락 위에서 연희되었으며, 팔관회와 연등회(燃燈會) 등 국가적인 경사 때에 상연되었다.

교방가무희[편집]

敎坊歌舞戱

고려조는 팔관회와 연등회 등 큰 행사를 진행하는 절차를 갖추기 위해 전정(殿庭)의 백희로는 신라 이래 내려온 종목을 집대성했으며, 전상(殿上)의 가무에는 대체로 문종(文宗) 때 송(宋)으로부터 대량 수입된 교방악(敎坊樂)을 사용하여 이를 보강하였다. <고려사> <악지(樂志)>에 보이는 당악(唐樂) 중 가무희의 형태를 갖춘 것으로는 헌선도(獻仙桃)·수연장(壽延長)·5양선(五羊仙)·포구락(抛毬樂)·연화대(蓮花臺)·석노교곡파(惜奴嬌曲破)·만년환만(萬年歡慢) 등 7종의 대곡(大曲)이 있었다.

나희[편집]

儺戱

가례(嘉禮)인 연등회와 팔관회에서 백희가무(百戱歌舞)를 연행한 것과 마찬가지로, 흉례(凶禮)인 나례(儺禮)에 있어서도 역시 백희가 연행되었다. 나례란 가면을 쓴 사람들이 일정한 연장(戈盾 등)을 들고 주문을 외면서 귀신을 쫓는 동작을 하는 행사로, 일종의 가면희(假面戱)라 할 수 있는데, 이러한 귀신 쫓기 행사가 우리나라 자체에서도 상고(上古) 때부터 행해졌으리라는 것은 귀와(鬼瓦)나 호우총에서 출토된 목심칠면(木心漆面), 처용설화, 5기의 대면희(大面戱) 등에 의해 짐작할 수 있으나 형식은 중국의 나례의 영향을 받아 갖추어진 것이다. 다만 중국에서처럼 춘하추동 네 계절마다 거행된 것이 아니고 섣달 그믐날의 대나(大儺)만이 행하여졌다. 그러다가 나례는 점차 역귀(疫鬼)를 쫓아내는 종교적 의식으로만 그치지 않고, 다분히 관중들을 즐겁게 하는 구경거리, 즉 연극적 행사로 발전하여 '나례'가 '나희(儺戱)'로 변해가고, '우인(優人)' 또는 '창우(倡優)'라 불리는 직업적 배우가 생겨나게 되었다.

조희[편집]

調戱 가무(歌舞)를 주로 한 연희(演戱)에서 한걸음 발전하여, 이야기 내지 대화가 가미되어 화극형식(話劇形式)으로 발전한 것이 조희(調戱)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화극의 출발은 대체로 고려조로 잡을 수 있는데, 이것이 두드러지게 나타난 것이 고려 현종(顯宗) 때의 하공진(河拱辰) 이야기가 테마가 된 '하공진놀이'이며 여기에서는 드라마로서의 성격이 뚜렷이 나타나 있다. 이것은 말을 주된 표현수단으로 하여 혼자 연기한 것으로 짐작되며 공민왕(恭愍王)대에 거리에서 '권세가들의 악랄한 수탈상'을 풍자·연출한 우희(優戱)·배우희(俳優戱) 등은 재담(才談)을 주로 한 조희였다. 이와 같은 독연(獨演) 형태가 아닌 여러 사람에 의한 놀이로는 좌우번(左右番)의 내시들이 경연(競演)으로 채붕(綵棚)을 설치하고 잡기(雜技)를 연출하여 이국인(異國人)들이 고려에 와서 공물(供物)을 바치는 광경을 재현한 '공물바치기놀이'가 있다. 이 밖에 신종(神宗) 4년(1204)에 최충헌(崔忠獻)이 비단으로 채붕을 시설하고 마련한 호한잡희(胡漢雜戱)와 기악잡희(伎樂雜戱)를 비롯하여 가면희잡희(假面戱雜戱)·주유희(侏儒戱)·창우희(倡優戱)·걸호희(乞胡戱)·당인희(唐人戱) 등이 있었다.

고려의 재인·광대[편집]

高麗-才人·廣大

고려의 연희(演戱)는 거란(契丹)의 가무잡희(歌舞雜戱), 송(宋)의 교방악(敎坊樂)과 대성아악(大盛雅樂), 서역(西域)의 안국기(安國伎)·잡기(雜技)·고창기(高昌伎)·천축기(天竺伎) 등의 영향을 받았는데, 고려가 원의 부마국(駙馬國)이 된 뒤에는 원을 통하여 유라시아 대륙 문화와의 교류가 더욱 활발해졌으며, 충렬왕 9년(1283)에 원나라의 남녀 창우(倡優)가 내조하여 '백희'를 연희하기에 이르렀다. 이때 중국을 지배하던 원조(元朝)는 중국 역대의 제왕이 유학(儒學)을 숭상하던 것과는 달리, 유학을 중히 여기지 않았고, 도(道)·석(釋)·회회교(回回敎)를 똑같이 대우하여 인종적으로나 종교적·사상적으로 퍽 관대하였다. 한편 한인(漢人)들은 이민족의 지배에 대한 불만을 술과 노래로 발산하여 신기한 잡극(雜劇)을 즐겼다. 또 백전전승의 기세로 중원(中原)을 석권한 몽고인 역시 한족(漢族)의 화려한 문물에 접하자 점차 사치와 안일에 빠져 오락방면에 손을 댔으며 소설·희곡을 애호하였다. 이러한 배경 아래 잡극의 황금시대가 도래하였는데, 여기에는 당시 여러 도시의 경제가 발전하여, 이들 신흥서민(상인과 수공업자)들이 자신들의 오락을 요구하기에 이른 것도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어느 나라나 연극문화의 발전에는 그에 뒷받침이 되는 서민의 경제적 여건이 필수적인 것이며, 이 점에서 고려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었다. 고려는 개국 이래 농업과 수공업·상업을 중심으로 한 산업이 발전하여, 개성에는 상점(商店)이 상설되었고, 지방에는 향시(鄕市)라 불리는 시장이 설치되었다. 고려의 악공과 배우들은 태악서(太樂署)·관현방(管絃房) 또는 교방(敎坊)에 소속되었는데, 이들은 교방악관(敎坊樂官)·안국기인(安國伎人)·잡극기인(雜劇伎人) 등으로 분류되었다. 잡극기인이란 바로 산대잡극의 배우이며, 이들은 연극적 행사를 전담한 직업적인 배우의 일단으로 우인(優人)·창우(倡優)라고도 불리었다. 태악서·관현방 등 관에 속한 배우들외에 상당수의 악공과 배우들이 민간에 있었으며 시정(市井) 상공인들은 이들의 패트런이 될 만한 재력을 가질 정도로 성장하였으므로 이들은 직업적으로 연회에 종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경위로 '가무백희'도 10세기 이전의 단순한 '가무백희'가 아닌, 즉 규식지희(規式之戱)에서 스토리의 전개를 보여주는 조희, 즉 소학지희(笑謔之戱)로 비약, 발전했다. 이와 같은 서민들에 의한 연희에는 바탕에 날카로운 비판정신이 깔려 있으며, 이것은 조선왕조 후기의 산대도감(山臺都監) 계통극에서도 계승되었다.

고려에서 배우를 '광대(廣大)'라고 부른 기록은 <고려사> <전영보열전(全英甫列傳)>에 처음으로 보이며, 역시 <고려사> <열전> <최이(崔怡)조>에는 재인과 광대를 동일하게 보고 있다. 배우를 가리켜 광대라 부른 외에 송목손(宋穆孫)의 <계림유사(鷄林類事)>에는 '수작(水作)'이란 말이 나오는데 이것도 역시 배우를 가리키는 말이며, 유기장(柳器匠)과 수렴·도살(屠殺)·육상(肉商) 등에 종사하던 유랑의 무리인 양수척(楊水尺)의 수척(水尺:水作)에서 나온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