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문화·민속/한국의 연극/한국의 고전극/조선시대의 연극

위키문헌 ― 우리 모두의 도서관.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조선시대의 연극〔개설〕[편집]

朝鮮時代-演劇〔槪說〕

조선전기의 연극[편집]

朝鮮前期-演劇

고려시대에 있었던 궁중나례(宮中儺禮)의 풍속과 의식은 조선에 이르러 더욱 그의 미를 확대하여 산대잡극(山臺雜劇) 혹은 산대나례(山臺儺禮)로 발전, 백희(百戱) 일반과 어울려 때와 장소도 일정하지 않았고, 그 목적과 의도도 달라져 갔다. 이리하여 계동나례의(季冬儺禮儀), 부묘환궁, 종묘친제(宗廟親祭), 태안이실(胎安移室), 중국 사신 영접, 신임감사(監司) 영접 때와 연락환오(宴樂歡娛) 때 등 갖가지 목적에서 연출되고 있었다.

따라서 이를 전업(專業)으로 하던 우인(優人)·광대(廣大)패가 생겨나고 또한 이를 나라에서 관장하는 산대도감(山臺都監)이라는 감독관청이 따로 있었다.

고려시대에 있어서는 명문세가(名門勢家)의 어린 자제들이 나와 이에 동원되었으나 여말(麗末)에서 조선시대에 들어와 이에 동원된 창우·광대들의 사회적 신분이란 그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낮은 계층의 사람들이었다. 더욱이 이것이 직업화됨에 따라 자연 기예(技藝)에 능숙한 창우(倡優)와 재인(才人)들까지도 이에 흡수되었기 때문에 그들의 신분이란 말할 수 없이 하락되어 갔다. 이것이 말하자면 조선 봉건사회에 있어서의 배우들의 신분이었다 할 수 있다. 이들은 말하자면 국가와 관의 보호를 받고 한편으로는 조정의 각종 의식은 물론 사사로운 오락에도 참여하여 즉흥적인 풍자극(諷刺劇)과 해학극(諧謔劇)을 연출한 때도 있었다.

하나의 실례로는 세조시대의 조정 구나시(驅儺時)의 축역우인(逐疫優人) 한 사람이 자문자답으로 탐관오리의 비행을 짐짓 풍자로 엮어 연출한 사실이라든지, 유생(儒生)을 가장하여 시속(時俗)을 풍자한 노유희(老儒戱), 그 밖에도 정실(情實)과 조정의 부정부패를 탄핵한 도목정사(都目政事)놀이, 상소(上疏)놀이 등의 촌극(寸劇)을 엮어 연출하기도 했다.

이러한 당시 우인·광대들의 기지(機智)와 해학·풍자놀이는 근세조선의 가면극에까지도 전승되어 오고 있다.

그러나 한편 전기조선(前期朝鮮)에 있어서의 영사(迎使) 때의 나례와 백희는 국가 신흥의 기세와 함께 그 규모의 웅장하고 성대함이 이를 데 없었으며, 한때의 영사를 위한 비용면을 보더라도

나라 재정과 백성들의 부역은 너무나 엄청난 것이었다. 이를 위해 기호(畿湖) 및 충청 각도의 좋은 목재와 수천의 산대 역군이 동원된 사실과 또 그 부담과 폐단을 시정하기 위한 상소(上疏)가 곳곳에서 날아들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그때의 장관을 가히 추측할 수 있다.

조선 중기의 연극[편집]

朝鮮中期-演劇

조선왕조 중엽에 접어들면서부터는 임진(壬辰)·병자(丙子)의 양란을 겪고, 나라살림의 피폐와 국운의 쇠퇴로 말미암아 인조(仁祖) 12년에 공의(公儀)로써 이를 폐지하게 되자 그로부터 나례는 창우·광대들로 장관을 이루던 그 산대백희와는 달리, 축역행사(逐疫行事)의 의의로만 그치고 점차 쇠미하게 되어 그때까지 나라에 고용된 창우와 광대들은 아무런 보장이 없었기 때문에 그 나름의 생계를 위해 뿔뿔이 흩어져 가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 때를 같이 하여 중국도 명(明)이 망하고 청(淸)이 세력을장악하게 되자 당시 명을 섬겨 오던 조선의 정세로서는 청사(淸使) 영접에도 자연 소홀해지고, 그만큼 열의가 식어져 간 것이 당연하다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숙종조(肅宗朝)에 있어서는 중국으로부터 실학사상(實學思想)이 들어와, 그 모든 분야에 있어 실질적인 개혁이 단행되던 때로서 문학부문에서도 서민문학이 대두되고, 따라서 그때까지 그나마 존속해 있었던 청의 사신을 위한 산대잡극도 영·정조(英·正祖) 시대 이후에는 그 예를 볼 수 없게 되었다.

한편 이때를 기화로 하여 흩어져 갔던 창우와 광대 및 일반 평민들 사이에서는 당시 양반사회에 대한 불만과 그들의 인간적인 욕구로서 실로 풍자적이며 해학적인 놀이가 일고 있었으니 현재 각 지방에 존속해 오고 있는 민속가면극이 바로 그것이다. 이것이 '산대' 혹은 '산두' '산대도감놀이'라고 전하여 오는 것은 전조(前朝)에 있어서의 '산대잡극' 혹은 '산대나례'에서 유래한다. 그리고 이는 전기 국가기관에 종속되어 하나의 의식적(意識的)인 목적을 갖추었던 산대나례 및 산대백희 등과는 달라, 보다 자유로운 입장에서 일반 민속오락을 대표하던 놀이였던 것이다.

그러나 각 지방 민속극은 그 지방 특유의 토희(土戱)와 역자(譯者)의 구성에 따라 일정하지는 않았으며, 그 모두가 하나같이 양반사회를 풍자하고 파계승(破戒僧)을 조롱하는 의미에서는 대동소이하다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들 가면극은 전대 가면극의 형식을 모방하고 있어 종교적인 일면도 무시할 수 없으나 그 가면은 극히 희화화(戱畵化)되어, 특히 양주산대극(楊州山臺劇)의 가면 중 '양반'은 윗입술이 좌우로 찢어진 언청이 '샌님'으로, 그리고 오광대(五廣大) 가면에서는 '비뚤양반'으로 더욱 조소의 대상이 되게 할 뿐 아니라 또한 강렬한 토속적 인상을 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 명칭도 일반 서민적인, 그리고 토속적인 '부네' '이매' '초랭이' '미얄할미' '말뚝이' '취발이' '쇠뚝이' '왜장녀' 등으로 불려지고 있으며 이것은 그 역할의 특징과도 관련되는 이름이다. 따라서 그 내용과 동작에 가서는 풍자와 해악이 지나치게 노골화되어 있다.

이들 가면극은 어느 지방의 것을 막론하고 막(幕)과 막간(幕間)의 연결성이 전혀 무시되고 있으며, 그때그때의 기분에 맞추어 연출되던 것으로, 악기로는 장고·북·피리·젓대·제금 등이 동원되고 장소는 일정치 않으나 대개는 마을의 광장을 이용하고 있었으며, 개복청(改服廳)과 악대석을 갖추는 외에는 특별한 장치가 없다.

이들 연극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가면이며, 그 외에도 의상과 간단한 소도구를 필요로 했다.

'양주산대극'의 경우는 '상좌' 중의 청혹색(靑紅色) 고깔과 소장삼(小長衫), '노장' 중의 염주와 송낙·지팡이와 장삼, '애사당'의 변발, '왜장녀'의 큰머리·치마·저고리·쾌자(快子), '옴'의 화립(花笠)과 막대기, '연잎'의 부채와 청창의, '샌님' 양반의 유건(儒巾), '신주부'의 관(冠), '완보'의 꽹과리와 불알망태기·회초리·채찍들이 그것이다.

그리고 이들 가면의 경우 대개 전통적인 것은 못되어 하회별신(河回別神)굿의 가면 이외에는 전통적인 가면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 없으며, 연희를 마친 다음에는 반드시 의상과 소도구 등은 모두 함께 불살라 버리는 것이 상례(常例)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러한 연희가 있을 때마다 다시 가면과 의상 및 소도구를 마련해야 했고 그것을 마을의 공동비용으로 제작할 때에는 마음과 몸을 우선 그만큼 정결하게 하고 임해야 했다고 한다.

악곡(樂曲)에는 대개 염불·타령·굿거리가 주가 되어 있으며 춤에는 돌단·곱사위·여다지·화장멍석마리·깨끼춤 등이 있다.

전반(前半)은 대개 마임과 춤으로 엮어지며 제1고사(告祀) 장면과 제2·제3·제4·제5과장까지는 '상좌' '옴'·'먹중'들의 약간의 희언(戱言) 외에는 구나무(驅儺舞)로 시종한다. 중반 6과장에서 10과장까지는 거의 승려(僧侶)와 무당들의 타락상을 풍자하고 있으며, 후반 11∼12과장에서는 양반에 대한 조롱(嘲弄)과 그들 서민의 반감(反感)을 실제화하고, 따라서 그들 생활고(生活苦)와 인생무상(人生無常)을 연출하고 있다.

따라서 그 각본(脚本)은 지방에 따라 일정하지 않으며 황해도(黃海道)의 봉산탈춤은 전7과장으로, 여기에는 전술한 양주산대극과는 달리 사자춤(獅子舞)이 또한 특색이나 그 내용과 사상에 있어서는 대개 비슷하다. 그리고 이 극의 특징은 가무극(歌舞劇)으로서 춤과 노래(歌唱)로 일관하고 대사(臺詞)란 종속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 또한 즉흥적인데다가 연희자(演戱者)에 따라서도 일정하지 않다.

그들 구술(口述)에 의한 각본은 일정하지 않으며 그들의 놀이 또한 그날의 흥취와 기분에 따라 좌우되고 시간도 일정하지 않을 뿐 아니라 과장(科場) 또한 얼마든지 줄일 수도 늘릴 수도 있다.

연희의 시기도 지방마다 조금씩 다르나 경기지방의 산대놀이는 음력으로 3월 3일, 5월 단오(端午), 9월 중양절(重陽節)과 4월 초파일에도 연행(演行)된다. 영남(嶺南)의 오광대 및 야유(野遊)놀이는 정월보름, 황해도의 봉산탈춤은 대개 연중행사로 단오(端午)날 저녁에 원시적인 모닥불을 밝히고 화광(火光)이 중천하는 가운데 연출되며, 이때 불빛과 달빛의 반사를 받는 가면은 더욱 괴기(怪奇)하게 빛나며 도약적인 무용은 한결 그 반사를 감명깊게 한다.

근세조선(近世朝鮮)에 있어서 이러한 가면극과 더불어 중요한 형태의 연극으로는 꼭두각시 인형극이 있다. 이는 일명 '박첨지극(朴僉知劇)'이라고도 하는 것으로 '꼭두각시'와 '박첨지'는 모두 이 극중의 주요인물이라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연극에 있어서 배우의 그 실상(實相)이란 하나의 가화(假化)된 어떤 존재의 영적인 허상(虛相)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인형이란 형이상적(形而上的)인 한 인간의 환영(幻影)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꼭두각시 인형극이야말로 그 탈(假面)을 쓰고 나오는 가면극과 함께 그 사회적 실상과 허적(虛的)인 자기네의 존재를 연극으로써 형상화해 갔던 차원높은 예술이라 말할 수 있다. 꼭두각시라는 '꼭두'의 의미도 이러한 인간의 형이상학적 '환영'의 뜻에서 유래한다. 인형극의 기원은 본래 우리나라에서도 종교적 의인화에서 비롯되었음은 말할 것도 없으나 근세조선에서 발달한 꼭두각시극의 유래는 가면극의 유래와 일치하고 있다. 그 내용도 대개는 가면극과 비슷하나 다만 모양과 역할면에서 다른 점은 광대 및 창우의 실체가 목재 내지는 바가지 인형으로 대신되고, 그들은 무대 이면에 가리어 창(唱)과 대사를 주고 조종자의 역할까지도 겸하고 있다. 가면극은 그 독특한 전통적인 민속무용과 마임을 이해해야 하고, 또한 그것이 중요한 요소이지만 꼭두각시극에서는 이것이 없고 또 불가능할 뿐 아니라 그 전개와 내용면에 있어서도 한결 이해하기 쉬우며 더욱 리얼하다.

조선 후기의 연극[편집]

朝鮮後期-演劇

근세조선 말기에 와서 판소리는 독특한 창법을 주로 하여 왔었다. 고종(高宗) 때에 신재효(申在孝)가 광대와 기생들을 모아 종래의 <춘향전> <심청전> <흥보전> 등 12마당에 손질을 가하여 <춘향가> <심청가> <박타령> <토별가> <적벽가> <변강쇠타령> 등 6마당의 극본(劇本)으로 다시 정리하고 이를 일정한 줄거리에 맞추어 배우 한 사람이 창과 '아니리'라는 극적 대사를 함께 연출할 수 있게 만들었다. 원래 판소리는 독창으로서의 동작이 결여되었기 때문에 다분히 음악적·문학적인 요소가 지배적이다. 또 창극조에는 진양조와 중모리가 있고, 장단에도 6단계가 있으나 본래 이는 틀에 박은 듯 일정한 것은 아니고, 그때 그때에 따라 자주 변화를 갖게 되는 데에 또한 우리나라 창극의 특색이 있다.

그리고 그 명칭은 타령 또는 극가(劇歌)로도 불리어져 왔다. 이인직(李人稙)이 활동하던 신극 초창기의 그의 원각사(圓覺社) 무대에서도 예전의 창극배우와 기생들의 출연으로 신극과 구별하며 또 전통적인 국극(國劇)의 뜻을 살려 구극(舊劇) 또는 국극이라고 명명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미 신재효는 당시에 창극 발전을 위하여 가기(歌妓)들을 양성하고 한편으로는 남창(男唱)만이 아닌 여창(女唱)·동창(童唱) 등을 곁들여 실로 이제까지는 부자연하기만 하였던 배우 한 사람만의 표현방법을 수정하여 앞날의 창극 발전에 많은 공적을 남겼다.

조선 말년에는 이미 황실극장격이었던 협률사(協律社)가 생겼으나, 이와 때를 같이한 개화의 물결과 조선조 멸망은 이미 구극(舊劇)을 도외시하게 되고 일본을 통해 들어온 소위 신파극(新派劇) 시대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張 漢 基>

산대나례[편집]

山臺儺禮

조선조의 산대나례는 '규식지희(規式之戱)'의 성격과 '광대소학지희(廣大笑謔之戱)'의 성격을 동시에 지닌 것이다. 전자는 주로 가무적 측면을 가지며, 후자는 주로 연극적 측면을 가진다고 하겠다. 이 산대나례를 관장하는 관청은 나례도감(儺禮都監) 또는 산대도감(山臺都監)으로 산대나례는 중국사신 영접시 및 계동나례의시(季冬儺禮儀時) 등에 '규식지희'로 광범위하게 사용되었고 그 종류도 다채로웠다.

산대나례에서는 이상의 '규식지희' 뿐만 아니라 '광대소학지희'의 화극적(話劇的)인 전개를 볼 수 있다. '광대소학지희'에 대한 기록들은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및 몇몇 문집에서 산견(散見)되고 있는 바, 여기에는 잡희(雜戱), 노유희(老儒戱), 상소놀이, 좌수희(座首戱) 같은 것이 보인다. 아무튼 15∼16세기의 이 '광대소학지희'의 전개로 화극의 형태와 다수 인물에 의한 연희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조선조의 이러한 산대나례는 나례도감의 공의(公儀)를 끼고 내려왔지만 그것이 일반민중의 호기심의 대상이 되고 공감을 자아내어 점차 일반화하여 갔다. 그러나 조선조 후기에 이르러 산대나례는 그 내용이 유학정신에 배치될 뿐더러, 그것이 사회의 최하층에 속하는 창우배(倡優輩)에 의해서 연출된다는 점과, 이를 거행함에 소용되는 경비가 막대한 데서 나온 경제적인 이유로 개폐(改廢) 논의가 분분했다. 영·정조시대에 이르러 산대나례는 드디어 그 거행이 폐지되고 창우들은 더욱 직업화되어 산대희(山臺戱)의 지방정착으로 산대도감 계통극의 형성이 있었을 것으로 보이며, 이렇게 형성된 산대도감 계통극은 지방민들의 오락에 대한 수요와 공인(貢人)·사상(私商)·수공업자들을 중심으로 하는 서민경제의 후원으로 점점 뿌리를 박아 갔을 것으로 생각된다.

규식지희[편집]

規式之戱

척불숭유(斥佛崇儒)를 국가의 지도원리로 삼은 조선조는 고려조의 연등회(燃燈會)·팔관회(八關會) 등 의식을 원형대로 계승하지는 않았으나, 산대잡극(山臺雜劇)과 나례(儺禮)는 계승하여 더욱 성행하였다. 특히 나례는 고려 예종(睿宗)이후 점차 구역(驅疫)보다 잡희부(雜戱部)가 확대되어 나례가 나희(儺戱)로 인식되었는데 이러한 현상은 조선조에 와서 더욱 심해졌다.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하는 기록들이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보인다. 조선조에 와서 나례도감(儺禮都監) 또는 산대도감(山臺都監)이 관장하여 주로 중국 사신을 영접할 때 공연한 산대희(山臺戱)는 산대잡극(山臺雜劇)·산대나례(山臺儺禮)·나희(儺戱) 등의 명칭을 혼용하였으며, 사신영접 이외에도 계동나례의(季冬儺禮儀)·부묘환궁·종묘친제(宗廟親祭)·알성(謁聖) 등의 행사 때나 각종 행행(行幸)·안태(安胎)·진풍정(進豊呈)·내농작(內農作) 때나 지방장관을 환영할 때 광범위하게 쓰였고, 종류도 다채로웠다. 그러나 기본적으로는 고려의 산대잡극(山臺雜劇)이나 나희(儺戱) 등과 다를 바가 없었다.

성종(成宗) 19년(1488)에 내조(來朝)했던 명(明)의 사신 동월(董越)의 견문기에 나타난 산대잡희의 내용은, 토화(吐火)·어룡지희(魚龍之戱)·무동(舞童)·근두(筋斗:땅재주)·곰놀이·답색(踏色:줄타기)·죽광대(竹廣大)와 사상(獅象) 등 가상(假象)의 진열(陳列) 등이었으며, 성현(聖賢)은 그의 <관나시(觀儺詩)>에서 채붕(綵棚)과 주의화과로 난무하는 모습과 농환(弄丸)·보색(步索:줄타기)·꼭두각시놀음(人形劇)·솟대놀이(長竿戱) 등을 나례에 등장하는 잡희로 읊었다. 계동나례(季冬儺禮)는 흉년이나 그 밖의 유고시에 정파(停罷)되는 예는 있었으나 거의 매년 섣달 그믐날에 거행되었으며, 축역(逐疫) 외에 잡희(雜戱), 즉 나희(儺戱)가 수반되었다. 이 밖에 조정의 각종 의식과 특히 영사(迎使)행사에서 백희잡극(百戱雜劇)은 없어선 안 될 레퍼토리가 되었고 조선조 전기의 신흥의 기세와 함께 그 규모도 성대해졌다. 그러나 임진·병자 양란을 겪으면서 인조(仁祖) 이후에는 축역행사(逐疫行事)로 그치고, 영·정조(英·正祖) 이후는 정파되고 말았다.

광대소학지희[편집]

廣大笑謔之戱

조선조의 산대나례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잡희(雜戱) 또는 창우지희(倡優之戱)·배우희(俳優戱) 등으로 불린 광대소학지희(廣大笑謔之戱)의 화술적(話術的) 전개일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산견되는 짧은 기록들에 의하면, 축역우인(逐疫優人)이 자문자답으로 "관리들의 탐욕스러움과 서민생활의 곤궁상을 낱낱이 묘사했다" 하고, 또 대장장이 고용(高龍)은 원래 우인(優人)이었는데 술 취한 맹인의 형용을 잘 하였다는 것이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이 밖의 몇몇 문집에 실린 예를 보면, 유몽인(柳夢寅)의 <어우야담(於于野談)>에서 우인귀석(貴石)이 진풍정시(進豊呈時)에 '풍시사지희(諷時事之戱)'를 놀았다는 이야기와 함께 동윤(洞允)의 '탐화봉접지희(探花蜂蝶之戱)'와 우인(優人)들의 상소(上疏)놀이가 소개되었다. 그 밖에 무세포희(巫稅布戱)·도목정사(都目政事)놀이와 선비들의 행동을 풍자한 유희(遊戱), 성균관 유생들이 연례적으로 설행(說行)하는 궐희(闕戱)와 속리산 법주사의 좌수희(座首戱) 등이 있었다.

조선조의 재인·광대[편집]

朝鮮朝-才人·廣大

조선조의 궁중 연희문화(演戱文化)를 담당한 것은 기(妓)·공(工)·배우(俳優)·화랑(花郞)·사당(社堂)·무녀(巫女)·농민(農民) 등이었는데, 이들 중 기(妓)·공(工)·배우(俳優)가 그 주류를 이루었으며, 나례(儺禮)나 영사행사(迎使行事) 등이 있을 때 봉행(奉行)하였다. 이것이 차차 무계(巫系)에 속한 광대(廣大)나 수척승(水尺僧)에 의해 대치되었는데, 이러한 현상은 조선조의 연예문화를 수정하는 근본적인 계기가 되었다. 광대·재인·수척승 등의 예능인들의 생활에 대해서는 왕조실록에도 여러 군데 보인다. 이들은 농사를 짓지 않고 걸량(乞糧)으로 생활하였으며, 국가나 관가의 행사가 있을 때마다 모여들어 사회악의 원천이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즉 천인(賤人)인 그들은 정재인(呈才人)으로서 궁중에도 출입하여 봉행(奉行)을 했지만 관으로부터 생계에 대한 도움은 받지 못하였다.

산대나례(山臺儺禮)는 공의(公儀)로서 거행된 것이었지만 일반 민중에게도 공감을 일으켜 산대희가 거행될 때는 민중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관극(觀劇)은 점점 일반화했다.

조선조의 선비들은 그들의 유학적(儒學的) 견지에서 산대희 자체를 비난하고 특히 풍교상(風敎上)의 이유로 일반인의 관극과 부녀자의 참관(參觀)을 반대하였으며, 여러 차례에 걸쳐 상소하여 숙종(肅宗) 29년(1703)에는 부녀자와 사족(士族)의 관극 금지령이 내렸다. 영·정조 시대에 이르러서 드디어 산대나례의 거행은 폐지되고 이로써 창우(倡優)들은 직업화되었다.

<張 漢 基>