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문화·민속/한국의 연극/한국의 신극/번역극의 해설과 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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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극의 해설과 감상〔개설〕[편집]

飜譯劇-解說-鑑賞〔槪說〕여기에서 번역극이라고 할 때는 대체로 유럽희곡의 우리말 번역을 두고 말하는 것이 통례이다. 그러나 1910년 이후, 다시 말하자면 신파극(新派劇) 상연 초기에서부터의 일본 작품의 번역·번안물을 고려해 넣는다면 한국 신연극은 처음부터 창작극에의 의존도가 심히 약했다고 할 수밖에 없다. 초기 신파연극 특히 그 중에서도 성공한 것은 예를 들어 <육혈포강도(六穴砲强盜)>니, <불효천벌(不孝天罰)>이니, <장한몽(長恨夢)>이니, <불여귀(不如歸)>니, <쌍옥루(雙玉淚)>가 모두 일본 것의 번안 아닌 것이 없을 정도이다. 그러나 이런 유(類)의 신파극은 제대로 대본이 갖추어져 있지도 않을 뿐 아니라, 정통신극이 갖는 문학성도 많이 결여되고 있기 때문에, 통념적(通念的)으로 말하는 번역극의 범주에서는 벗어나는 것이다.

다음으로 지상(紙上)에 발표된 한국 최초의 창작극으로 조일제(趙一齊)의 작품 <병자 삼인(病者三人)>(1912)을 꼽는데, 이 시기엔 창작극이 극히 드물었으며, 1920년대 이후에 몇 사람의 극작가가 공연활동 위주로 작품을 내놓기에 이르지만 아직도 본궤도에 올랐다고는 할 수 없었다. 따라서 이 시기 이후부터는 유럽 희곡에의 의존도가 높아지고, 단순히 창작극의 불모뿐만 아니라, 먼저 서양문물을 통해서 배우는 것이 있어야 한다는 외래문화 숭상의 일반적 사조가 연극계에도 그대로 적용되어, 1920년에서 30년대 말에 이르기까지 적지 않은 숫자의 유럽극작가들이 주로 무대를 통하여 소개되었다. 그 명단을 살펴보면 셰익스피어, 톨스토이, 입센, 스트린드베리, 체호프, 그레고리 부인, 던세니, 쇼, 마이어펠스터, 오닐, 안드레예프, 고리키 등 대부분이 근대극작가들이다.

이 시기의 번역극 레퍼토리는 말하자면 한국 신극운동의 길잡이가 되는 것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나 그 선택은 일본에서의 소개를 뒤쫓은 것이 많아, 1920년대 초 '토월회(土月會)'가 상연한 <부활(復活)>이나 <알트 하이델베르크>, 심지어는 <카르멘>처럼 일본의 '예술좌(藝術座)'의 모방이 많았다. 그러다가 30년대에 들어와 '극예술연구회'가 발족됨에 따라 비로소 서구 근대극의 주류를 소개하는 의식적 의도가 드러났다. 예컨대 <검찰관(檢察官)>(고골리), <벚꽃동산>(체호프), <인형의 집>(입센), <어둠의 힘>(톨스토이) 등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이런 경향은 곧바로 역시 일본 신극운동의 본산이라고 할 '쓰키지(築地) 소극장'의 레퍼토리를 그대로 본떴다고도 할 수 있어, 광복 전까지의 번역극 상연에 있어 일본의 영향(때로는 일본어에서의 중역까지 합하여)은 뚜렷한 바 있다.

이런 경향은 광복과 더불어 일단 가시게 되나 번역극 위주의 공연방식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우수한 창작극 작가가 드물고, 따라서 좋은 창작극이 귀했다는 사실과 이러한 번역극 일변도의 경향이 서로 악순환을 거듭해 온 것은 사실이나 광복 후의 번역극 수용방향은 전과는 많이 달라졌다.

그 첫째는 미국희곡의 진출이 눈에 띄었다는 점이다. 어쩌면 지극히 당연하다고도 볼 수 있는 이런 경향은 오닐을 위시하여 와일더, 윌리엄스, 밀러 등이 일반극단은 물론, 대학연극에까지 널리 침투되어 번역극의 일반화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 둘째는 이보다 시기적으로 뒤인(6·25 이후) 전후 세계문학의 대량소개와 아울러 전후의 새로운 극작가의 소개가 비교적 활발히 진행되었다는 점이다. 특히 프랑스를 중심으로 해서 사르트르 같은 실존주의 작가의 희곡들이 재빨리 소개되었다. 이런 경향은 그 뒤 1960년대에 들어서고 나서 베케트, 이오네스코 등의 '부조리 연극'까지 포함하여 이른바 전위극(前衛劇)의 도입을 용이하게 만들어 주었다. 프리쉬나 뒤렌마트 같은 독일계 작가의 소개도 이 범주 안에 넣어서 생각할 수 있다. 셋째로는 셰익스피어, 몰리에르, 때로는 그리스 비극까지 포함해서의 서구 고전극의 도입이다. 셰익스피어는 광복 전에 이미 소개된 바 있었고, <햄릿>같은 작품은 일찍이 1920년에 현철(玄哲)에 의하여 중역(重譯)으로나마 제대로 번역·출판까지 보게 되어, 아마 번역극 출판의 가장 오래된 케이스가 아닐까 생각될 정도이지만 공연 및 출판을 통한 셰익스피어 소개는 1950년경부터 극단 '신협(新協)'의 중요 레퍼토리가 되었으며, 1960년 이후는 가장 많이 상연되는 극작가가 되었다.

셰익스피어만큼 연극적 영향력이 막강한 현대극작가 브레히트의 극작품 역시 공연되고 있다. 브레히트의 극공연은 96년 2월 극단 '미추'의 <사천 사는 착한 사람>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극단 '미추' 창단 10주년 기념으로 문예회관 대극장 무대에서 공연된 <사천 사는 착한 사람>(이병훈 연출)은 '인간 세상에 과연 선은 존재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을 통해 자본주의적 시민사회의 모순을 지적하려 한 비유극이었다. 선한 인격자로서 남을 도와주려는 자는 이 세상을 살아가기 힘들고, 안면을 몰수하고 무자비하게 남을 착취하며 사는 자만이 살아남는다는 진리를 셴테와 슈이타라는 1인2역을 통해서 설파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연기에 있어서 선한 여자에서 악한 남자로의 변신 연기에 설득력이 부족하였으며, 그외의 역할들도 다소 겉도는 듯했다. 그리하여 전체적인 극의 흐름은 어느 정도 정돈된 듯하지만, 관객으로 하여금 '그러므로 인간 세상은 바뀌어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게 하기는 어려웠다. 1995년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을 성공적인 한국적 각색으로 이끈 오태석의 극단 '목화'에서는 브레히트 대표작 중의 하나인 <서푼짜리 오페라>를 번안, 공연하였다. 극중 인물을 우리 식으로 표현하고 극적 상황을 우리 실정에 맞게 손질함으로써 브레히트가 표현하고자 했던 주제의식, 지배계층이나 최하층 불량배 집단이나 모두 부패한 사회 구조를 지니고 있음을 통렬히 비판할 수 있었다. 또한 속도감 있는 무대 진행이나 활력 넘치는 연기에 있어서는 극단 '목화'의 참모습을 유감없이 보여주었으나, 포화 상태의 무대 장치와 역할을 채 소화해내지 못한 젊은 배우들의 연기는 아쉬움을 남기기도 하였다. 특별히 무대가 협소한 한국일보 소강당을 공연장으로 택함으로써 무대 공간의 활용도가 크게 떨어져 공연 진행 및 연기에 상당한 부담을 느끼게 해 주었다. 최근 몇년간 극단 '목화'의 공연은 무대적 변형이 자유로운 예술의 전당 자유소극장 등에서 많이 이루어졌던 경우를 상기해보면 이번 공연 무대의 부적절함을 즉각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하반기에 이루어진 브레히트 극작품은 극단 '한양 레퍼토리'의 <해피 엔드>였다. <해피 엔드>는 원작자로 도로시 레인을 내세우고 있으나 브레히트와 그의 여비서 하우프트만이 힘을 합쳐 만든 공동작이라고 한다. 구세군이라는 종교 집단과 갱단이라는 폭력 집단을 통해 사회의 축소판을 형성하고 그들 간의 반목과 화해, 범죄와 회개 과정을 보여주는 극구성이나 주제 의식이 브레히트의 작품 경향과 크게 다르지 않으므로, 이 작품 역시 브레히트의 창작으로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 극단 '한양 레퍼토리'의 <해피 엔드>(김대현 연출) 공연은 브레히트 특유의 교훈과 젊고 발랄한 연기진들이 만들어내는 재미를 동시에 추구함으로써 브레히트 연극은 딱딱하고 무겁다는 종래의 인식을 크게 전환시켰다. 연출가 김대현은 과잉되기 쉬운 젊은 연기자들의 의욕을 효율적으로 조절하며 사건의 설명이나 시공간의 전환 등을 나타내는 서사적인 부분을 속도감있는 영상으로 처리하여 극적 흐름을 매끄럽게 이어가는 수완을 발휘하였다. 그러나 뮤지컬이라는 양식으로서 음악 선정의 적절성과 배우들의 가창력에서는 약간의 문제가 있었으며, 녹음된 반주음악과 유선 마이크의 사용은 극적 몰입을 방해하는 요인이 되고 말았다.

96년 4월 국립극장 대극장에서는 극단 '여인극장' 창단 30주년 기념 공연으로 에드워드 올비 작, 강유정 연출의 <키 큰 세 여자>가 무대에 올랐다. 에드워드 올비의 최신작으로 미국 초연시 많은 화제를 뿌리며 1994년도 퓰리처상을 받은 바 있는 작품 <키 큰 세 여자>는 죽음을 눈 앞에 둔 한 여인의 삶을 되돌아 보는 형식의 작품으로 일생을 살아가면서 겪는 사랑과 결혼, 자녀 문제 등에 대한 인생관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하였다. 특별히 1막에서는 치매에 걸린 노파와 50대 간호사, 20대 여사무원을 통해 일상사를 보여주다가, 2막에서는 이들이 각각 꿈많던 20대, 현실적인 50대, 무감각해진 90대의 자아로 분열되어 서로간에 미워하다가 이해하고 용서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말 한 마디 없이 무대에 등장하는 사내(작가의 모습으로 추측되는 인물)를 통해서 한 개인의 삶을 관조하는 형식을 취하면서도 결국은 인간의 보편적인 삶의 모습을 그리려 한 듯했다. 그러나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인물들을 한 여자의 세 분신으로 금세 이해시킬 수 있는 연극적 장치에 대한 고안 등을 비롯한 극의 세밀한 부분들을 치밀하게 분석하는 자세가 필요했다. '소재, 무대 공간, 대소도구, 인물 간의 역학 관계 등을 연출자가 의미화의 기호로서 보다 의도적으로 사용했더라면'(김윤철)하는 바램이 강하게 들 정도로, 비싼 저작료를 지불하면서 공연에 임한 의욕만큼 성과는 그리 크지 않았다.

우리나라에 최초로 소개되는 캐나다 극작가 미셸 트레블랑의 희곡 <핏빛달>은 극단 '산울림'의 실험무대로 공연되었다. 30대 시절부터 70대에 이르기까지의 모습을 5명의 분신을 통해 드러내는 형식의 이 작품은 앞서 거론한 <키 큰 세 여자>와 구성이 아주 흡사하다. 이 공연은 젊은 연출자와 연기자들에게 실험적인 공연의 기회를 주려는 의도가 있었다 하더라도, 관객들에게 현실과 환상을 오고가는 연극적 장치를 충분히 납득시킬 태세가 되어 있지 못했다. 또한 5명의 분신들이 각각 외모가 다르고 신체적인 공통점이 적었다는 점은 접어두더라도, 연기의 미숙함은 결정적인 결함이었다.

1993년 미국 퓰리처상을 받아 세간의 화제에 올랐던 토니 커쉬너 작 <천사의 바이러스>(원제, Angels in America)는 극단 '단홍'의 창단 공연으로 7월 동숭홀 무대에 올려졌다. 동성연애자들과 에이즈 환자들 사이의 사랑과 배신을 다룬 사회문제극 <천사의 바이러스>(유승희 연출)는 미국을 좌지우지하는 법조계 인사들이 불치의 질병 앞에서 파멸해가는 과정을 충격적으로 보여주었다. 그러나 이 작품은 미국의 고유한 정치 사회적 정서가 전달되지 못하고 에이즈의 공포가 그리 심하지 않은 국내 형편 때문인지, 우스꽝스럽고 교태넘치는 동성연애자들의 파격적인 행동만을 단순한 구경거리로 만들고 말았다. 번역자와 번안자를 따로 두어 우리 실정에 맞추려는 시도를 극단측에서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번역극의 한계를 절감케 해주었다.

해롤드 핀터의 초기 단막극 를 번역한 <달빛 멜로디>(이성열 연출)는 은행나무 소극장에서 막이 올랐다. 이 작품은 지저분한 지하골방에 대기하고 있으면서 익명의 조직이 내리는 살인 명령을 수행하는 살인청부업자들의 일상을 통해 각박한 사회 현실 속에서 남을 쓰러뜨려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현대인의 비정한 실존적 이미지를 형상화하였다. 이 작품은 살인과 희생이라는 비극적 맥락과 점증되는 불안감을 숨긴 채 하찮은 일로 서로 다투고 있는 희극적인 상황을 이끌어낸 점에서 부조리극의 양상을 보여 주었다. 그런데 공연에서는 극을 이끌어가는 중심축은 어느 정도 파악이 되게 하였지만, 말과 말 사이의 침묵이라든가, 평범한 말 속에 들어있는 역설적인 진리, 상반된 의미를 전달하는 일상 언어의 아이러니 등의 섬세한 장면들이 제대로 전달되지 못한 아쉬움이 남고 말았다. 가족간의 애증과 세대 차이를 다룬 연극 <춤추는 은빛 초상화>(티나 하우 작, 김철리 연출)는 문예회관 소극장에서 공연되었다. 치매증과 이삿짐 꾸리기 등의 가장 평범한 일상을 가장 극적으로, 따뜻하게 느끼게 해준 이 공연은 연극속의 노부부 역을 맡은 박웅, 장미자 부부의 연기 앙상블이 빛을 더해 주었다. 특히 '연출의 절제된 감정 처리와 격앙과 이완 리듬의 적절한 조절 등의 세련미가 돋보인 무대'(최준호)였으며, 가족애를 되새겨보며 송년을 차분히 맞이하게 하는 무대로 손색이 없었다. 1990년대 후반에 들어와 한국 연극계를 보면 이제는 더 이상 창작극/번역극이라는 해묵은 이분법적 기준은 파기시켜도 될 만한 시기가 왔음직하다. 창작극과 번역극의 문제는 늘 '번역극의 우세와 창작극의 침체'라는 도식적 틀로 귀결되어 매년 연극계를 결산하는 단골 명제가 되곤 했다. 우리 연극계는 근대극이 도입된 이래로 극작가의 빈곤과 그에 따른 창작극의 부족 현상이라는 고질적인 난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편의적으로 외국극을 번역하여 빈 자리를 메꿔왔다. 또한 관객의 정서를 무시한 채 창작극의 빈곤을 빌미삼아 외국 작품을 무분별하게 직수입해오는 관행이 있었는가 하면, 창작극을 무조건적으로 편애하며 번역극을 경원하는 경향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번역극은 일단 작품성이 한 번 검증된 것이므로 예술성과 흥행성을 보장받을 수 있으리라는 안일한 태도에서 벗어나 번역극의 장점을 살리되 우리의 정서와 현실에 맞는 작품으로 수용하려는 적극적인 자세가 확립되어가고 있다. 특별히 1996년에 들어와서는 앞서 지적한 악순환의 고리를 끊으려는 연극계의 각성이 돋보였다. 한국연극협회가 작성한 공식 통계에 따르면 50여개 정회원 극단에서(재공연과 연장공연, 그리고 지방공연을 제외하고) 총 150편의 공연이 이루어졌는데, 그 중에서 번역극은 30여편, 즉 20%에 불과해 번역극 공연이 대폭 줄어들었음을 알 수 있다. 숫적인 면의 변화뿐만 아니라 질적인 변화 역시 두드러졌는데, 번역극의 장점을 살려 우리 것으로 수용하려는 창조적인 자세가 뚜렷한 한 해였다. 오역을 피하고 정확한 해석과 번역, 고증을 중시여기는 태도가 점차 정착되어가고 있으며, 더 나아가 원작을 다양하게 재해석하거나 한국적 상황으로 번안하려는 적극적인 시도가 돋보였다.

오이디푸스왕[편집]

Oidipous Tyrannos(또는 Oedipus Rex)

그리스의 고전비극. 소포클레스의 작품. 기원전 430년경에 쓰여진 것으로 추정된다.

모든 그리스의 비극이 그렇듯 신화에서 얻어온 주인공 오이디푸스는 신의 예언에 따라 피치 못하게 주어진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발견해 나가는 과정에서 비극적 인물로 성장해 간다.

한국에서는 동국대학교 연극학과에 의하여 1964년 12월에 드라마센터에서 상연된 바 있다.

오이디푸스는 테바이의 왕 라이우스와 왕비 이오카스테 사이에서 태어난 왕자인데, 라이우스가 아폴로의 신전에서 얻어온 신탁(神託)에 의하면 이 아이가 자라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하게 된다는 것이어서 그를 산속에 버리게 한다. 그 아이가 자라 코린트왕의 양육을 받게 되나 같은 예언을 들은 오이디푸스는 코린트왕이 자기의 친어버이인 줄 알고 코린트를 떠나 외국으로 떠난다. 그 길에 라이우스왕을 자기의 친어버이인 줄 모르고 살해하고 그 나라의 왕위에 올라 이오카스테를 다시 왕비로 삼게 된다. 이유는 그가 테바이에서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어 그 나라를 재앙에서 구함으로써 백성들의 숭앙(崇仰)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 극은 테바이에서 선정(善政)을 베푼 오이디푸스가 나라 안에 다시 재앙이 들어 그 화근을 없애려고 신전에 신탁을 청했더니 선왕 라이우스의 실해자를 찾아야 한다는 점지를 받아 그 하수인을 찾는 데서 시작되는데 그것이 바로 자기였음을 발견하자 스스로 두 눈을 빼어버리는 데서 끝난다. 매우 긴밀한 구성과 장대(壯大)한 비극적 깊이를 갖는 그리스 고전극의 대표적 작품이다.

햄릿[편집]

Hamlet

영국의 희곡. 셰익스피어 작(作). 그의 4대 비극 중의 하나로, 1601년 36세 때의 작품이라 한다. 5막 19장으로 되어 있고, 그 3막 제1장에 있는 '살아야 할 것인가 죽어야 할 것인가, 그것이 문제다'라는 대사(臺詞)는 널리 알려져 있다.

한국에 처음 소개된 것은 1921년 월간 종합지 <개벽(開闢)> 5월호에 현철(玄哲)의 번역으로 게재된 것이다. 물론 최초의 번역은 일본판의 중역이었으며, 그 이후 여러 극단에서 상연하였는데 특히 기록될 공연으로는 광복 전의 극단 '낭만좌(浪漫座)'의 창립 기념 공연으로 상연된 일(1938년 1월)이 있다.

또, 극단 '신협(新協)'에서도 공연했으며, 최근에는 '실험극장(實驗劇場)'의 공연도 있다. 덴마크의 왕자 햄릿은 부왕(父王)이 급서한 뒤, 숙부 클로디우스가 왕위를 계승하고 모친 게르트루드와 결혼한 사실에 의문을 품고 있다. 그러한 햄릿 앞에 부왕의 망령(亡靈)이 나타나, 자신은 클로디우스에게 독살당했다고 말하고, 복수할 것을 요구한다(제1막). 햄릿은 부왕의 말에 번뇌하면서도 광기(狂氣)로 위장하여 주위의 눈을 속인 채 부왕 살해의 증거를 잡고자 한다(제2막). 때마침 왕궁에 들른 어릿광대들의 힘을 빌려, 부왕 살해장면 그대로의 광경을 재연(再演)하고 그것을 왕과 왕비에게 보인다. 그 직후, 침실에서 모친을 설득하고 있던 햄릿은 기둥 뒤에서 그들을 엿보고 있던 재상(宰相)인 폴로니우스(햄릿의 애인 오필리아의 아버지)를 살해한다(제3막). 클로디우스는 신변의 위험을 느끼고서 햄릿을 살해하고자 한다. 한편 아버지 폴로니우스를 여의고 햄릿에게서 버림받았다고 생각한 오필리아는 광란(狂亂) 끝에 물에 뛰어들어 죽고 만다. 아버지와 여동생을 한꺼번에 잃은 레어티즈는 미치고 만다. 그것을 안 클로디우스는 레어티즈를 교사하여 햄릿을 없애고자 한다(제4막). 클로디우스에게 교사당한 레어티즈는 햄릿에게 시합을 청하고 칼 끝에다 독을 칠해서 햄릿을 살해하고자 한다. 그 결과는 거꾸로 레어티즈가 목숨을 잃고 거기에 있던 왕비 게르트루드는 독배를 든다. 햄릿은 독배를 클로디우스에게 들게 하고 그 자신도 상처를 입고 죽어간다(제5막).

검찰관[편집]

檢察官 Revizor

러시아의 희곡. 고골리의 작품으로 5막으로 되어 있다. 1836년에 페테르스부르크(지금의 레닌그라드)의 알렉산드린스키 극장에서 초연되었으나 당시에는 찬반양론으로 객석을 들끊게 한 작품이다. 그 결과 작자는 논쟁을 피하기 위하여 국외로 도피할 정도로 제정 러시아의 지방관리의 악덕을 철저히 묘사한 희극이다.

한국에서의 공연은 1932년 5월 4일부터 3일간, 극예술연구회의 직속 극단 '실험무대'의 제1차 시연형식(試演形式)으로 행해졌다. 당시 공연을 한 진용은 다음과 같다.

번역-함대훈, 연출-홍해성, 출연에는 극예술연구회 동인들인 이헌구(李軒求), 함대훈(咸大勳), 서항석(徐恒錫), 유치진(柳致眞), 이하윤(異河潤), 김진섭(金晋燮) 등이었으며, 그 이후의 한국 신극의 주동적 인물이 망라되었다는 점은 특기할 만하다.

지방 소도시의 시장의 저택. 페테르스부르크에서 검찰관이 시찰하러 온다는 편지를 받은 시장은 지방의 유지들을 모아 대책을 강구하고 있다. 거기에 지주인 도브친스키와 보브친스키가 검찰관다운 뛰어난 용모를 가진 사나이가 여관에 머무르고 있음을 알리러 온다(제1막). 그러나 여관에 머무르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하급 관리 헬레스타코프로 도박으로 가진 돈을 다 날려버린 결과 여관에서는 식사(食事)마저도 주지 않는 형편이다. 그러나 그를 검찰관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시장은 여관에까지 가서 정중히 그를 맞아들이고 여관의 밀린 계산마저 지불한다(제2막). 검찰관인 체하고 시침을 뗀 헬레스타코프는 지방의 유지들을 따라 시장의 저택으로 온다. 시장의 처 안나와 딸 마리아를 상대로 그는 득의(得意)의 허풍을 떤다. 그리고 시장을 비롯한 유지들은 안절부절한다(제3막). 시장 저택에 유숙한 헬레스타코프는 그 지방 유지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돈을 좀 빌려달라고 한다. 지방의 명사들은 그들대로 그에게 돈을 빌려줌으로써 그들의 부정이 은폐되어 별 탈 없이 끝날 것이라고 안도한다. 이 사이에 헬레스타코프는 시장의 딸 마리아와 약혼까지 하기에 이른다(제4막). 시장의 저택에는 마리의 약혼을 축하하기 위한 지방의 유지들이 모여 있다. 거기에 우체국장이 헬레스타코프가 그의 친구에게 보낸 편지를 가지고 뛰어든다. 거기에는 그 지방 유지들을 비웃는 악평이 쓰여져 있는 게 아닌가. 시장 저택에 모인 사람들은 가짜 검찰관을 진짜 검찰관으로 오인한 죄를 서로 덮어씌우는 일로 인하여 소동을 피우게 된다. 그때 진짜 검찰관이 도착했다는 전갈이 온다.

밤주막[편집]

-酒幕 Na dne

러시아의 희곡. 막심 고리키 작의 4막. 1902년 모스크바 예술좌를 위해 쓰여진 것으로 단첸코에 의하여 초연되었다. 이 희곡은 작자의 초기작품에서 발견되는 부랑자의 생활을 묘사한 것으로서, 사회로부터 탈락한 부랑자 가운데서도 아름다운 인간적 광휘(光輝)가 있다는 것, 그리고 그들도 밝은 미래에 연계되어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한국에서의 공연은 1933년 11월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학교) 연극부에서 하였다.

어두운 지하실. 그것은 코스튈레프의 여인숙이다. 여기에는 도둑(페펠), 자물쇠 장수와 그의 병든 처(안나), 밤거리의 여자(나스챠), 만두장수, 모자장수, 전신기사(電信技士:사틴), 어릿광대, 남작, 신기료장수(알료시카), 조프, 타타르인 등이 모여 살고 있다. 여인숙 주인은 장물아비이고 숙박인에게서는 돈을 쥐어짜내고 있지만 항상 종교적 양심을 내세우는 위선자이다. 그는 자기 처와 페펠 사이를 의심하고 있다. 이 지하실의 여인숙에 나타샤가 순례자 루카를 데리고 들어온다(제1막). '밤이나 낮이나 뇌옥(牢屋)은 어둡다…'라는 밤주막 노래는 이 제2막의 개막시에 불려진다. 노름에 미쳐 있는 여인숙의 주민들이 나간 뒤, 순례자 루카는 병든 안나를 간호하고 있다. 때때로 바실리샤가 여인숙 주인을 죽여 달라고 페펠에게 부탁하는 것을 엿들은 코스튈레프는 두 사람을 욕하고 떠들어 대는 바람에 결국 큰 소동이 벌어진다. 이 소동을 말리려고 들어온 순례자 루카는 페펠에게 지하여인숙에서 탈출할 것을 권고한다. 소동이 끝난 후 생각이 미쳤을 때는 이미 병든 안나는 숨을 거두고 있다(제2막). 페펠은 자신의 과거를 고백하고, 사랑하는 나타샤와 함께 지하여인숙에서 탈출할 결심을 한다. 그것을 안 바실리샤는 질투하여 동생 나타샤를 구박한다. 코스튈레프는 자기 처의 바람기를 욕한다. 이런 소동 가운데서 페펠은 여인숙 주인을 타살하고 만다(제3막). 이런 사건이 일어난 뒤 순례자 루카는 강한 인상을 일동의 가슴 속에 남기고 홀연히 지하 여인숙에서 사라지고 만다. 전신기사 사틴은 말한다. "…그 영감은 거짓말을 했지. …하지만 그 거짓말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기 때문이야…". 일동은 술을 마시고, 춤과 노래로 광란에 빠진다. 그때 남작이 들어와서 일동에게 광대가 목을 매고 죽었음을 알린다. 침묵이 지하실을 흐른다. 사틴이 말한다. "못난 자식, 한참 신나는 판에 잡쳤네".

인형의 집[편집]

人形- Et dukkehjem 노르웨이의 희곡. 입센 작. 1879년 로마 체재중 집필. 이 작품으로 말미암아 신여성(新女性)과 부인 참정권의 문제는 격렬한 찬부양론을 불러 일으켰다. 3막극으로 되어 있다.

한국에서는 1925년 9월 조선배우학교에 의해 상연되었다. 그외 1934년 극예술연구회의 제6회 공연의 레퍼토리로 선정되어 상연되었다.

변호사 헬머의 처 노라는 세 아이의 어머니이면서도, 그 남편으로부터는 '나의 귀여운 종달새나의 다람쥐'라고 불리며 마치 인형과 같이 사랑받고 있다. 그런 노라에게는 지난날 남편을 위기에서 구하고자 크록스타드라는 남자로부터 위조증서(僞造證書)로 은밀히 돈을 빌린 일이 있었다. 우연히 헬머에 의하여 은행을 쫓겨나게 된 크록스타드는 차용증서(借用證書)의 계략(計略)을 미끼로 노라를 협박하여 자신의 복직을 꾀한다(제1막). 노라는 이런 진상을 남편에게 알리지 않고 옛벗인 린네부인에게 조력을 구한다. 린네는 크록스타드의 연인이었던 여자이며, 노라를 위하여 조력할 것을 약속한다(제2막). 린네 부인은 크록스타드와 만난다. 그러나 사전에 헬머는 크록스타드가 노라에게 보낸 협박 편지를 읽어 버리고 만다. 그리고 그는 자기처의 행위를 심하게 꾸짖는다. 헬머가 용서해 주기를 바랐던 노라의 가냘픈 희망은 드디어 무산되고 만 것이다. 그때 린네 부인한테서 예(例)의 그 차용증서가 돌아온다. 그러자 헬머는 손바닥을 뒤집듯 노라를 용서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남편의 이기주의와 여성으로서의 자신의 입장에 눈뜬 노라는 남편의 애원(哀願)을 뿌리치고 집을 뛰쳐나간다(제3막).

벚꽃동산[편집]

Vishnevyi sad

러시아의 희곡 체호프 작. 그의 4대 희곡(<갈매기> <바냐 아저씨> <세 자매> <벚꽃동산>)중의 하나로 1904년 모스크바 예술좌에서 초연된 4막극이다. 체호프의 시대는 1860년대의 혁명 운동이 탄압받은 후의 시기이다. 그의 작품이 허무적으로 보여지는 것은 바로 그 시대의 반영(反映)이라 하겠다. 그러나 그는 가까운 장래에 오게 될 미래의 밝은 세계를 그 자신의 피부로 느끼고, 그 작품 가운데에 그러한 세계를 묘사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1934년 12월에 극예술연구회에 의해서 상연되었다.

벚꽃동산 주인 라네프스카야 부인은 5년만에 자신의 영지(領地)로 돌아온다. 그러나 이 벚꽃동산도 경영부진으로 경매에 붙여지게 되었다. 그러나 여주인 라네프스카야는 애당초 가계(家計)에는 관심이 없었다. 가족은 여주인의 오빠(가에프)와 두 사람의 처녀(바리야와 아냐)의 네 사람이지만 한때는 급진적인 사회 운동에 참가한 일이 있는 가에프도 지금은 당구나 치고 있고, 아냐는 세상 물정 모르는 아가씨이다. 오직 바리야만이 가계(家計)를 담당하여 절약하고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어떻게도 될 수 없는 형편이다. 지주 로파힌은 벚꽃동산을 별장지(別莊地)로 팔 것을 바라고 있지만 문제로 삼지 않는다. 만년 대학생 트로피모프는 아냐에게 강한 애정을 품고 있다(제1막). 로파힌은 바리야와의 결혼을 힘쓰며, 학생 트로피모프는 노동을 알지 못하는 인텔리겐차를 격렬히 매도하고 있다. 그때 현(弦)이 끊어지는 뜻한 소리가 들려온다. 하인 피일즈는 농노 해방령이 나오기 전에도 이런 소리를 들었다 한다. 라네프스카야는 부랑자에게 약소한 금화(金貨)를 주고 일동과 함께 사라진다. 뒤에 남은 트로피모프는 아냐를 향하여 장래의 밝은 희망을 말하고 집을 버리고 자유로이 될 것을 권고한다(제2막). 홀에서는 무도회가 열리고 있다. 그때 경매된 벚꽃동산을 사들인 로파힌이 거만하게 나타난다. 낡은 지주 계급이 신흥 부르주아에게 쫓겨나는 것이다(제3막). 라네프스카야 일가(一家)가 벚꽃동산을 떠나는 날 늙은 벚꽃나무를 치는 도끼 소리가 들려오고 있다. 라네프스카야와 가에프는 언제까지나 저택을 바라보며 떠나지 못한다. 그 모습이 미래의 꿈을 지닌 아냐와 트로피모프의 젊은 두 사람과 대조적이다. 이어 남게 된 늙은 남매는 서로 안고 우는 것이다(제4막).

페드르[편집]

Phedre

프랑스 17세기의 대표적 비극작가 장=밥티스트 라신의 희곡. 1677년 작.

바탕이 되는 작품은 그리스의 극작가 에우리피데스가 쓴 <히폴리투스>이다. 그러나 라신은 표제(表題)와 같이 중점을 왕자 히폴리투스에게 두되 그에게 사련(邪戀)의 뜻을 품는 계모비(繼母妃) 페드르의 스스로도 어찌할 수 없는 사랑의 격정과 그것이 몰고 오는 비극적 결말을 프랑스 고전주의 연극답게 극도의 억제를 가하면서 외줄기로 그려나간 작품이다.

한국에서는 이화여대(1962. 6)와 극단 '성좌'(1979. 6)에 의하여 상연된 바 있다.

테제왕(王)의 비(妃) 페드르는 남편의 아들인 이폴리트에 대한 사랑에 고민하여 그 사실을 자기 유모에게 고백한다. 그때 마침 테제왕이 죽었다는 소문이 전해져서 유모는 페드르에게 이폴리트에 대한 사랑을 토로하라고 권한다. 이 권고에 따라 모든 부끄러움을 참고 이를 고백하나 반응을 못 얻고, 또 그때 마침 남편이 돌아오게 되어 그녀는 극도의 혼란에 빠진 나머지 유모가 계략을 짜 마치 이폴리트 쪽에서 그녀를 유혹하려 했다는 모함을 테제왕에게 하도록 내버려 둔다. 때문에 왕은 격노하여 아들을 저주하게 되었고, 이를 본 페드르는 후회하여 남편에게 이폴리트를 용서해 주도록 간청한다. 그때 페드르는 왕자가 진심으로 사랑하는 여자는 알리시라는 말을 듣고 질투에 불탄다. 그러나 아무튼 때는 이미 늦어 아버지의 저주를 받은 이폴리트는 해신(海神)에게 죽임을 당해 버렸고, 페드르는 음독하여 죽으면서 자신의 죄를 왕에게 고백한다.

파우스트[편집]

Faust

독일의 희곡. 괴테 작. 제1부와 제2부로 된 독일 극문학의 대표적 비극으로, 제1부는 1808년, 제2부는 1832년에 출판되었다. 그러나 괴테가 처음 이 작품을 구상한 것은 20세 때이고, 제2부를 완성한 것이 80세 때이니, 한평생을 이 작품에 바쳤다 하겠다.

한국에서의 초연은 1969년, 당시 국립극장장 직(職)에서 은퇴하고 이 작품의 공연 구상을 한 독문학 전공의 연극인 서항석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는 이 작품의 연출을 위해 직접 독일에까지 가서 그곳의 괴테 연구가들과 자료를 교환하고 수집하는 열성을 보였다. 그 이후는 아직 이 작품이 공연되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는 이 작품이 레제 드라마(lese drama)인데다가 군소극단(群小劇團)에서 공연하기에는 너무 대작(大作)이기 때문일 것이다.

지식의 무력함에 실망하고, 마술의 힘을 빌리는 데에도 실패한 파우스트는 실망한 끝에 독배를 들고자 한다. 그때 들려오는 부활제를 알리는 교회의 종소리는 그에게 생의 의욕을 갖게 한다. 개의 모습으로 파우스트에게 접근해 간 메피스토펠레스는 그를 설복시켜 '자신의 생애에 파우스트에게 봉사하는 대신, 파우스트는 현세(現世)에 만족할 수 있다면 육체를 파멸시켜도 좋다'는 계약을 맺는다. 그 결과, 메피스토펠레스의 마법으로 20대(代)의 젊음으로 되돌아간 파우스트는 그레첸을 유혹한다. 그리고 그녀에게 어머니·유아(幼兒)·자매를 죽이는 죄를 짓도록 한다. 옥에 갇힌 그레첸은 미친 가운데서도 애인 파우스트의 이름을 외친다(제1부). 메피스토펠레스는 제국(帝國)이 봉착한 재정적 궁핍을 틈타 지폐를 발행하여 이를 구하고, 파우스트를 국가 요로(國家要路)에 천거한다. 이어 파우스트는 황제의 명령으로 '어머니의 나라'에 헬레나의 형태를 빌리러 간다. 거기서 헬레나와 만난 파우스트는 그 아름다움에 정열을 불사르고 아카디아에서 사랑의 생활을 보내게 된다. 그리고 아들 오이포리온까지 얻게 된다. 그러나 그 아들이 젊어서 죽자 헬레나도 그 뒤를 따라 저승 세계로 돌아간다. 심기일전한 파우스트는 다수의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 일에 헌신하고자 결심한다. 반황제군(反皇帝軍)을 진압한 파우스트는 그 공적에 의하여 해안에 위치한 광대한 토지를 하사받는다. 거기서 파우스트는 토지의 간척에 전심(專心)하게 된다. 그때 이미 100세를 넘긴 파우스트는 비록 시력을 잃고 있지만 자신의 이상(理想)이 실현되어 가는 모습을 마음 속에 그려 보며, 비로소 현세(現世)에 만족한다. 그리고 메피스토펠레스와의 계약에 따라 죽어간다(제2부).

제1부는 제2부에 비하여 보다 극적이고 제2부는 보다 오페라적이라 할 수 있다.

영양 줄리[편집]

令孃 Julie

Froken Julie

스웨덴의 희곡. 스트린드베리 작의 단막극 <아버지>와 함께 자연주의극의 대표작품이라고 한다. 리얼리즘 수법으로써 인간성을 가차없이 척결(剔抉)하고, 인간불신, 여성멸시의 사상이 강하게 흐르고 있다.

유럽에서는 스웨덴에 앞서 1889년 파리 자유극장에서 상연되었다.

한국에서는 국립극장 단막극 시리즈로서 '횃불극회'에 의하여 1963년 7월에 상연된 바 있다.

백작의 작위를 가진 귀족인 아버지와 신흥계급 출신의 새로운 사고 방식을 가진 어머니 사이에서 자란 줄리는 자만심이 높은 여성이다. 하지의 축제가 있던 날 밤, 정원의 농민들이 춤과 노래에 흠뻑 취하여 즐기고 있을 때, 줄리는 쟌이 있는 주방에 나타난다. 쟌은 기지에 찬 미남자로 하녀 크리스텔을 정부로 삼고 있다. 줄리는 쟌을 상대로 맥주를 마시고 놀던 중 그만 몸을 허락하고 만다. 그러나 곧 귀족으로서의 체면을 되찾은 줄리는 남자(쟌)와 함께 국외로 도피해서 호텔을 경영할 계획을 짠다. 두 사람이 아버지의 돈을 훔쳐 사랑의 도피행을 하고자 했을 때, 마침 집으로 돌아온 백작이 누르는 초인종 소리가 들려온다. 놀란 쟌은 자기자신이 미천한 종의 신분이란 것을 깨닫게 된다. "우리를 명예로부터 구하여 주시고 우리의 이름을 구하여 주소서"라고 애원하는 줄리에게 대하여 쟌은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오직 자살하기 위한 면도칼을 쟌은 조용히 줄리에게 건넨다.

군도[편집]

群盜 Die R

uber

독일의 희곡. 실러 작의 비극 5막. 전편(全篇)을 관류하는 격렬한 정열은 관객의 심금을 울리고도 남는다. 1782년 만하임 극장에서 상연되었다. 한국에서는 극단 '광장'에 의해 1973년 4월 상연되었다.

모르 백작에게는 칼과 프란츠란 두 아들이 있다. 간악한 프란츠는 형 칼을 부친에게 중상(中傷)하여, 마침내 그를 추방시키고 만다. 칼은 깊이 고민한 끝에 인습에 반항하고 사회악과 싸우기 위하여 도적의 수령(首領)이 된다. 프란츠는 칼의 약혼녀 아마리아에게도 나쁜 소문이 들리도록 하여 칼과의 사이를 떼고자 하지만 아마리아의 마음은 변하지 않는다(제1막).

프란츠는 책략을 바꾸어 칼이 죽은 것으로 하여 모르 백작을 유폐하고, 아마리아까지도 빼앗고자 한다. 한편 칼 일당은 보히미아 기병(騎兵)에게 포위당하지만 용감하게 돌격한다(제2막).

아마리아는 칼이 생존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보히미아 기병을 격파한 칼은 뜻밖에도 고향의 영지(領地)로 돌아오게 된다(제3막).

백작이라고 자기 신분을 밝힌 칼에게 아마리아는 마음이 끌린다. 백작이 칼이라는 것을 알게 된 프란츠는 그를 독살하려고 했지만 실패한다. 칼은 자기의 신분을 밝히지 않은 채 아마리아와 이별하고 돌아오는 도중 동굴에 유폐된 부친 모르 백작을 발견한다. 격노한 칼은 프란츠의 성에 휘하의 1대(一隊)를 보낸다(제4막).

칼의 부하들은 성안을 공격해 들어간다. 신으로부터도 버림받은 프란츠는 발광하여 목을 매고 자살한다. 칼이 도적의 수령임을 알게 된 노부(老父)는 놀란 나머지 죽게 된다. 부하들의 힐난을 받고 딱하게 된 칼은 자신의 손으로 아마리아를 베고 관헌에 자수하기 위하여 숲을 떠나간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편집]

慾望-電車 A Streetcar Named Desire

미국의 희곡. 테네시 윌리엄스작의 3막물. 작가는 미국의 극작가 중에서도 상징주의적 경향이 강하며, 체호프의 영향을 받고 있다. 1947년 디어터길드에서 초연했고, 퓰리처상을 수상하였다.

한국에서는 박인환 역, 유치진 연출로 1955년 8월에 극단 '신협'에 의하여 상연된 바 있다.

무대는 뉴올리언스의 뒷골목.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란 이 거리를 오가는 전차의 이름이다. 블랑쉬는 고향인 남부 시골에서 이 전차로 뉴올리언스로 왔다. 결혼에 실패하고 학교에선 교편을 잡았던 적도 있는 이 여주인공은 행실 때문에 고향을 떠나 동생 부부를 따라온 것이다. 하지만 여동생 스텔라는 일찍부터 고향을 버리고 남편 스탠리를 따라 나선 여자이며, 근육 노동자 스탠리는 여자에의 욕망 외에는 포카에만 열중하는 그런 남자이다. 이 어울리지 않는 생활 가운데서는 블랑쉬의 존재는 이질적인 것이다. 그리고 점차로 뉴올리언스의 거리로부터 떠밀려 나간다. 그러나 블랑쉬는 그녀의 아름다운 과거의 꿈 속에 어떤 남성이 언제인가 자기를 구출하러 올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때 나타난 것이 스탠리의 친구 미첼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 사랑하게 되었지만 블랑쉬의 과거(창녀였던 사실)를 알고 나서는 더 이상 지속되지 않았다. 창부(娼婦)이면서도 귀부인을 가장하고 야수적 욕망에 끌리면서도 고결·우아함을 구하는 이중 인격적인 블랑쉬는 점차 파국으로 쫓긴다. 스텔라가 출산하기 위하여 입원하고 있는 동안 블랑쉬는 스탠리와 관계하고 정신이상을 일으킨다. 그리고 블랑쉬는 즐거운 표정으로 정신병원으로 끌려간다.

시라노 드 베르즈라크[편집]

Cyrano de Bergerac

프랑스의 희곡. 로스탕의 작품으로 전5막. 17세기의 사실(史實)을 극화(劇化)한 것으로 청순·협기(狹氣)의 로맨틱한 무대와 함께 일반 대중에게도 이해되기 쉽기 때문에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1897년 파리의 폴드 상마르탕 극장에서 초연되어 대호평을 받았다.

한국에서는 손우성 역으로 '국립극단'(1958. 6), '실험극장'(1971. 1) 등에서 상연된 바 있다.

코가 유난히 큰 추남(醜男) 시라노는 청순하고 아름다운 종매(從妹) 록산을 남몰래 사랑하고 있다. 그러나 록산은 미남자 크리스천을 사랑하고 있다. 시라노는 두 사람의 사랑을 맺어주기 위해, 연문(戀文)을 쓸 줄 모르는 크리스천을 대필(代筆)하여, 그 가운데다 자신의 생각을 넣어 보낸다. 곧이어 시라노와 크리스천은 전장(戰場)에 나가게 되지만, 이 대필의 연문은 계속된다. 그러나 록산이 마음을 빼앗기고 있는 것은(사랑하고 있는 것은) 인간 크리스천이 아니라 시라노가 대신 써 보낸 연문이었던 것이다. 크리스천은 그 전투에서 전사하고 인생무상을 느낀 록산은 수녀원(修女院)에 들어간다. 그로부터 15년 후, 결투에서 거의 죽게 될 지경의 중상을 입은 시라노는 수도원의 록산을 만나러 간다. 그때 그가 말하는 크리스천의 최후의 편지 문구(文句)로써 그녀는 비로소 시라노의 사랑을 알게 된다.

세일즈맨의 죽음[편집]

Death of Salesman

미국의 희곡. 아서 밀러의 작품. 입센의 영향을 받아, 사회 문제를 테마로 새로운 연극 형식을 만들어 낸 그의 의도는 이 작품으로 성공을 거뒀다. 즉 현재와 과거가 심리의 연계(連繫)로 정리되어 있는 것이 이 작품이다. 1949년 뉴욕에서 초연(初演), 호평을 받음과 동시에 문제가 되었던 연극이다.

한국에서는 오화섭 역으로 '테라트르 리이블'(1953. 12), '신협'(1957. 1), '드라마센터'(1962. 11) 등에서 상연된 바 있다.

세일즈맨 윌리 로만이 죽었다. 한 회사에서 36년간이나 근속(勤續)한 63세의 늙은 세일즈맨의 죽음은 참담하였다. 젊은날의 윌리는 알래스카의 금광에 미쳐 있었으나 데이브 싱글멘이란 세일즈맨과 만나고 나서는 세일즈맨으로 전향하였다. 한때는 성공한 적도 있지만 해가 감에 따라 점점 못해져 갔다. 장남 비프는 학생 시절에 풋볼의 인기 선수였으며 장래를 촉망받고 있었지만 지금은 실업 상태이다. 차남 해피는 백화점에 근무하고 있지만 저급한 향락주의자(享樂主義者)이다. 거대한 빌딩의 벽 때문에 태양 광선이 차단된 주거(住居), 월부와 보험 및 가옥의 수리에 쫓기는 가계(家計), 일생을 세일즈맨으로 일한 결과는 이것이다. 그리고 지금에 와서는 자신의 생명에 걸린 2만 달러의 보험금만이 재산이다. 뉴욕 근무를 신청한 윌리는 회사에서 해고된다. 자식들과 세운 계획도 모두 꿈으로 돌아가 버리고, 윌리는 처연하게 돌아온다. 그리고 혼자서 어두운 정원에 씨를 뿌린다. 처 린다는 그 모습에서 불길함을 감지하고 자식들을 꾸짖는다. 그때 윌리의 차는 2만 달러의 보험금을 목적으로 영원한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고도를 기다리며[편집]

En attendant Godot

프랑스의 희곡. 새뮤얼 베케트 작의 2막극. 아일랜드 태생의 베케트가 프랑스어로 쓴 작품으로 안티 테아트르파의 대표작 가운데의 하나이다. 1953년 바빌론 극장에서 초연되었다.

한국에서는 정명환 역, 임영웅 연출로 1970년 10월에 극단'산울림'에 의하여 상연된 바 있다.

한 그루의 나무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어디인지도 알 수 없는 회색 하늘 아래서, 인생에 지친 듯한 두 사람의 남자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가 '고도'를 기다리고 있다. 약속된 장소도, 언제 온다는 것도, 어떤 사람인지도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두 사람은 기다리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기다린다는 사실만이 두 사람의 남자에게 남은 오직 하나의 삶인 것이다. '고도'가 오게 되면 구원받는다고 두 사람은 믿고 있다. 첫째의 날도 오지 않는다(제1막). 다음날도 오지 않는다. 두 사람은 달빛을 받으면서 '고도'를 기다린다(제2막).

안티고네[편집]

Antigone

프랑스 현대 극작가 장 아누이의 작품. 1944년 작. 표제가 말해주는 바와 같이 그리스 비극에 바탕을 두었다. 아누이가 이 오랜 이야기를 다시 쓴 이유는 고전극의 주인공에다 현대적 실존주의의 해석을 내려보고자 함에 있었다고 생각되는데 여기서는 일체의 타협을 거부하는 안티고네의 운명이 그것을 스스로 바라고 추구하고 일체의 희망에서 단절된 것으로 받아들인 데 있다. 이 점은 동시에 당시 독일군 점령하에 있었던 프랑스 국민의 절대적 혁명의 외침이라고 해석되기도 하였었다.

한국에서는 나영세 역, 이기하 연출로 '고대극회'에 의하여 1961년 11월에 상연된 바 있다.

국법(國法)을 어기면서까지 자기 오빠의 시체를 매장하려는 안티고네는 끝까지 자기 삼촌인 크레온왕(王)과의 타협을 거부한다. 법과 질서와 권위를 내세우는 정치가 크레온은 세속적 상식의 소유자이고 상대방을 설득할 수 있는 논리도 갖추고 있으나 안티고네는 그의 그러한 수완과 설득력에 대해 구토증을 느낀다. 때문에 두 사람의 대립은 절대적이고 안티고네에게는 끝없는 부정(否定), 일체의 희망의 포기만이 그녀의 존재를 증명해 줄 뿐이다. 그런 의미의 궁극적 평안(平安) 가운데에 비극은 존재한다고 아누이는 주장하고 있다.

대머리 여가수[편집]

-女歌手 La cantatrice Chauve

프랑스의 전후(戰後) 극작가 이오네스코의 작품. 1950년에 처음 공연되었을 때 '반영극(反演劇)'이라는 부제(副題)를 달았다. 1950년대에 크게 대두된 이른바 '부조리(不條理) 연극'의 최초의 작품이다.

한국에서는 이가형 역, 김진태 연출로 극단 '가교'에 의하여 1970년 6월에 상연된 바 있다.

스미드와 마틴이라는 두 쌍의 부부를 등장시킨 이 극은 재래적 뜻의 플롯이 전혀 없는 상황 속에서 전개되는데, 주제를 요약하면 일상생활 속에 함몰된 부부생활의 무의미함, 인간들끼리의 커뮤니케이션의 근원적 불가능성, 나아가 생의 불모성(不毛性)을 다룬 것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수법으로서는 일상적 회화를 패러디의 대상으로 삼아, 말 자체가 갖는 무의미함을 단조롭게 반복하며, 우리가 비논리적이라고 생각해 오던 엉뚱한 상황을 그로테스크하게 과장하는 의상외(意想外)의 방법을 썼다.

우리 읍내[편집]

Our Town

미국 극작가 손턴 와일더의 작품. 1938년 작. 미국의 어느 소읍(小邑)을 무대로 1900년 초를 시기로 잡은 이 극은 평범한(거의 극적인 사건이 벌어지는 일 없는) 사람의 삶과 죽음을 그린 작품이다. 이름없이 평범하게 살아간 그 생활 속에 인생의 참뜻이 있지만 사람들은 대개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을 거창한 주제의식 같은 것을 전혀 배제한 채 그려보이는 데 특색이 있다.

한국에서는 이화여대 '영어극'(1957. 5), '고대극회'(1959. 5. 김갑순 역, 이기하 연출), '실험극장'(1970. 9. 오화섭 역, 김영현 연출) 등에 의하여 상연된 바 있다.

에밀리와 조지 두 남녀가 한 고을의 이웃에 살면서 학교에 같이 다니고 졸업해서 곧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그리고 에밀리는 요절하고 만다는 이야기뿐인데 작자의 주안점은 그들의 이야기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생이 그런 식으로 벌어지고 그 속에 깊디깊은 진리가 숨어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따라서 1막은 일상생활, 2막은 사랑과 결혼, 3막은 죽음이라고 각 장면을 설명하고, 이색적으로 제3막을 묘지의 장면으로 하여 죽은 자들을 등장 인물로 하고 있다. 작품 전체에 개별적인 것을 통한 보편화의 의도가 뚜렷이 엿보인다.

세인트 존[편집]

Saint Joan

잔 다르크를 주제로 한 G.B. 쇼의 만년(1923)의 걸작, 역사를 현실주의적으로 해석한 작품.

한국에서는 이진섭 역, 이진순 연출로 '국립극단'에 의하여 1963년 3월에 상연된 바 있다.

이 작품은 전 7장으로 되어 있고, 첫장면에서 존이 자기 존재를 시골 영주에게 알려 마치 그녀가 기적을 행한 것같이 보여주는 장면도 합리적으로 다뤄져 있다. 그것은 종래의 의미의 기적이라기보다 뭇사람들을 훨씬 뛰어넘은 한 사람의 '천재'로서 그려져 있다. 그러기 때문에 왕자에게도 신임을 얻고 오를레앙을 방비하는 젊은 장군의 승복(承服)을 받을 수도 있게 된다. 이와 아울러 그녀를 넘어뜨려야 장래의 화근이 없겠다는 반대파의 입장도 매우 명료하고, 또 종교재판관들처럼 공정하게 그려져 있어 흔히 있을 수 있는 주인공의 신격화(神格化)와 거기 대립되는 인물의 악역화(惡役化)의 인상은 전혀 없다. 이 극의 또 하나의 특색으로 존의 처형이라는 클라이맥스 겸 극의 종결을 이룩하는 장면 다음에 다시 하나 '에필로그'라고 이름붙여 새장면이 첨가되어 있다. 존이 죽은 뒤 25년이 지난 어느날 옛날 왕자였던 국왕 샤를 7세의 꿈자리에 여러 인물들이 나타나 존의 처형에 대해서 변소(辯疏)를 하는, 말하자면 논의극적(論議劇的)인 장면인데 여기서 쇼는 되풀이하여 존과 같이 인간을 보다 나은 상태로 이끌 수 있는 천재의 출현에 대해 세계는 너무나도 무지하고 또 두려워하고 있다고 개탄한다. 그러나 이 장면은 공연에서 제외되어도 상관없다고 작자는 말하고 있다.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편집]

Look Back in Anger

영국의 희곡. 오즈번 작의 3막극. 1956년 작품으로 물질 문명이 가져 온 인간 상호의 매스 커뮤니케이션의 부재(不在), 소위 인간을 맺어주는 애정이 파괴된 상황을 사실적(事實的)인 수법으로 묘사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김경옥 역으로 '제작극회'(1960. 7), 극단 '성좌'(1970. 3) 등에 의하여 상연된 바 있다.

중부 잉글랜드의 봄날 저녁무렵이다. 지미는 애리슨을 열애하고 있지만 말로 표현하지는 못하고 있다. 그는 매일같이 사랑하고 있음을 애리슨에게 알리고자 하지만, 오히려 애리슨은 지미로부터 멀어져 가고자 한다. 클리프도 애리슨에게 친절하게 대한다. 애리슨의 동무 헬레나가 지미를 찾아온다. 애리슨은 임신중이다(제1막). 2주일 후 지미는 세속적인 헬레나에게 혐오감을 느낀다. 그리고 애리슨이 헬레나의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노력하지만 도리어 역효과만 낸다. 지미는 초조해진다. 그 초조는 애리슨과 헬레나에 대한 분노로 변한다. 헬레나는 권력과 위엄으로 당당하게 응대(應對)는 하지만, 기분은 좋지 않다. 그 때문에 애리슨에게 하는 말은 잔인성을 띤 외설스런 언사이다. 다음날 저녁 때, 애리슨의 부친이 헬레나의 전보로 애리슨을 맞으러 온다. 이 군인 출신의 사람좋은 아버지를 애리슨은 애정을 갖고 맞는다. 그리고 지미에게 편지를 써두고 집을 나간다. 자기 곁을 떠난 애리슨에 대한 지미의 사랑은 점점 강해진다. 그리고 애리슨이 자기의 사랑을 알아 주지 않음에 분노를 느낌과 동시에 자기 자신에게도 초조함을 느낀다(제2막). 수개월 후의 저녁때 지미는 일상 생활의 무미 건조함을 통절하게 느끼고 강렬한 정열을 바라게 된다. 헬레나는 지미를 이해하면서도 동등한 입장으로 그를 대한다. 지미와 헬레나의 대화에는 증오마저 느껴진다. 그러나 지미는 헬레나와 함께 빠져 나와 새로운 생활을 갖고자 한다. 그때 갑자기 애리슨이 돌아온다. 그러나, 그로부터 몇 분 후 애리슨은 유산을 하고 만다. 이전의 위엄을 되찾은 헬레나는 자신의 행동은 자발적이고 또 자신의 슬픔을 깨달았기 때문이라 하고 떠난다. 지미는 비로소 애리슨에 대하여 이제까지 말할 수 없었던 것을 말할 수 있게 된다. 이를 들은 애리슨은 절망적으로 울부짖는다(제3막). 라스트신의 두 사람의 모습은 왜곡된 형태로밖에 애정이 존재하지 않는 현대 사회를 예리하게 묘사한다.

밤으로의 긴 여로[편집]

-旅路 Long Day's Journey into Night

미국의 대표적 극작가 유진 오닐의 사후(死後)에 발표된 대표적인 작품. 1940년을 전후해서 완성되었다고 하나 발표는 1955년에 그의 미망인의 손에 의해 이루어졌다. 한마디로 해서 오닐 자신의 자서전적인 작품인데 주인공 에드먼드는 바로 젊은날의 오닐 자신이라고 보여진다.

한국에서는 오화섭 역, 이해랑 연출로 '한국연극연구소'(1962), 극단 '신협'(1971. 10) 등에 의하여 상연된 바 있다.

젊은 에드먼드는 퇴직한 배우인 아버지와 신경증 때문에 정신의 안정을 얻지 못하는 어머니, 그리고 겉보기에 매우 거칠고 술주정뱅이인 형 사이에서 내성적인 성격을 달래고 있다. 그는 폐를 앓고 있는데 저축해 둔 것이 있는 아버지이지만 원래 구두쇠라서 시설이 좋은 요양소에 그를 보내기를 주저하고 있다. 이것을 잘 알고 있는 어머니나 형은 그런 아버지를 몹시 비판하나 그들은 그들대로의 마음 속 고민이 축적되어, 이 가족을 에워싼 눈에 보이지 않는 망령(亡靈)의 그림자는 집요하기 짝이 없다. 이런 가운데서 결국 어머니가 좌절하고 그것을 고통스런 마음으로 지켜보는 아버지와 형, 그리고 에드먼드는 모두가 다 자신의 고독을 뼈저리게 느낀다.

과거가 망령처럼 현재를 지배하고 있는 이 정신의 불모상(不毛相)을 오닐은 곧잘 그렸지만 여기서는 그것이 일종의 연민을 동반하여 작자의 깊이 있는 눈에 어김없이 포착되어 있다.

생일 파티[편집]

The Birthday Party

영국의 전후 극작가 해럴드 핀터의 희곡. 1958년 작. 그가 즐겨쓰는 주제, 즉 외부로부터 차단된 '방'의 세계 속에 정체불명의 힘이 침입해 들어온다는 이른바 '위협의 희극'의 대표적 작품이다.

한국에서는 박영희 역, 유덕형 연출로 극단 '드라마센터'에 의하여 1970년 10월, 1971년 2월에 상연된 바 있다.

이 경우의 '방'의 주인공은 스탠리. 밝혀지지 않은 동기(핀터의 작품에서는 언제나 그렇다)로 해서 어느 해변가 하숙집에 살고 있는 피아니스트 출신의 스탠리라는 사나이는 하숙집 안주인의 지나친 보살핌을 받고 있는데 어느날 난데없이 골드버그(유태인)와 매캔(아일랜드인)이라는 정체 불명의 두 사나이의 방문을 받는다. 그들은 받고 싶지도 않은 친절을 잔뜩 베풀고 급기야는 스탠리 자신이 알지도 못하는 생일잔치를 베풀어 한바탕 소란을 피운 다음날 쥐도 새도 모르게 그를 납치해 간다. 나갈 때의 스탠리의 행색은 이미 자신의 의사를 완전히 상실한 듯한 멍한 표정이다. 그러나 하숙집 아주머니는 그 사실도 모른 채 있다. 마치 무슨 갱스터 이야기를 연상시키기도 하는 이 극은 그러나 다의적(多義的)으로 해석될 수 있는 공백적 부분을 많이 남겨 놓고 있다. 이 점을 핀터의 묘미라고 해석하는 사람이 많다.

안도라[편집]

Andora

현대 스위스의 대표적 극작가인 막스 프리시의 2막극. 1950년대 작품으로 1961년 11월 취리히에서 초연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1965년 11월 강두식(姜斗植) 역, 허규(許圭) 연출로 극단 '실험극장(實驗劇場)'에 의해 처음 소개되었고, 그 이후에도 여러 극단에 의해 여러 번 공연되어 호평을 받았다. 안도라라는 가상의 소도시에서 안드리란 한 젊은이가 유태인으로 오해를 받고 동료시민에 의해 참혹한 죽음을 당한다. 그러나 그가 피살된 후 그의 진짜 부모가 알려지고 그가 유태인이 아님도 판명된다는 줄거리이다.

줄거리에서 보는 바와 같이 <안도라>는 나치즘에 대한 비판을 우화적(寓話的)으로 묘사한 작품이다. 작품에 나오는 검은 나라와 검은 군대는 권력이 최고조에 달했던 나치스를 상징하고 안도라는 침략당한 주변 국가들을 상징한다. 작품에서 안도라 사람들은 침략자에게 차차 양보하고 살인 행위마저 묵인하는데, 이것은 현대인의 나약성과 도덕적 타락을 고발한 것이다. 그리고 인간이란 그릇된 편견에 따라 타인을 봄으로써 그에 대한 그릇된 상(像)을 만들게 되고, 결국 편견은 무서운 결과를 낳는다는 것이다.

이처럼 <안도라>는 인간본질에 대해 깊숙이 조명한 작품이다. 연극의 본질이 끝없는 인간 탐구에 있다고 볼 때, 이 작품은 현대의 고전이 될 만하다.

반유태주의에 대한 비판과 나치의 폭력을 상징적으로 묘사한 이 <안도라>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세계에서 많이 공연된 작품이다.

노부인의 방문[편집]

老婦人-訪問 Vesuch der alte Dame현대 스위스의 대표적 극작가인 프리드리히 듀렌마트의 3막극. 그는 막스 프리시와 쌍벽을 이루는 스위스 작가이다. <노부인의 방문>은 1956년의 작품으로서 50년대 말에 취리히에서 초연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1968년 12월에 강두식(姜斗植) 역, 이승규(李昇珪) 연출로 극단 '가교(架橋)'에 의해서 초연되었고 그 이후 여러 극단들이 자주 공연한 인기 레퍼터리가 되었다.

듀렌마트는 근원적으로 인생이란 무의미한 것이며 인간은 타락하기 쉬운 동물이라고 본다. 그의 작품들에는 두 개의 주제가 관류(貫流)하고 있는데, 그것은 권력과 죽음의 문제이다. 이 주제가 <노부인의 방문>에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인간은 피할 수 없는 죽음을 의식하고 일생동안 무엇인가를 성취시키려 하지만 그같은 노력은 죽음의 공허성 앞에서 한갓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만다. 인간의 존재란 죽음 앞에서 어리석고 우스꽝스러운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그의 두번째 주제는 권력의 소유에 의한 인간의 타락이다. 권력이란 선을 위하여 창조되었으나 결과적으론 그것을 소유한 자에 의하여 타락을 면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로물로스 대제>가 바로 그런 문제를 다룬 작품이다.

<노부인의 방문>은 듀렌마트를 세계적인 작가로 발돋움시켜 준 작품으로서 차하나씨안이란 부인(고급창녀)이 큰 부자가 되어 실연의 설움을 안고 떠났던 몰락 직전의 고향도시를 30여년 만에 찾아오는 데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 부인은 자기 고향사람들에게 자기를 배신했던 옛애인 안톤을 살해하는 대가로 10억 마르크를 희사하겠다고 제의한다. 시민들은 이 비인도적인 제의에 분개하여 처음에는 단호히 거절한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시민들의 마음은 황금 쪽으로 기울고 각종 물건들을 외상으로 사들이는 등 분위기가 변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차기 시장 물망에까지 오른 안톤의 구명운동도 외면하고 그의 살해에 동조하면서 그들의 변심을 합리화 내지 정당화해간다. 결국 살인이 저질러질 뿐만 아니라 그 살인행위가 민주적인 절차까지 거쳐서 진행된다. 그리고 그 부인은 안톤의 시체를 가지고 다시 고향도시를 떠나간다는 이야기이다. 듀렌마트는 여기에서 인류가 그의 이익을 위해서는 얼마나 쉽게 타락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며 인간정신에 대한 그 자신의 환멸을 비극적으로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동시에 듀렌마트는 안톤의 수난과 비극적 승화를 통하여 개인에 대한 신뢰의 일단을 술회하고 있는 점에서 긍정적인 면모를 보여주기도 한다.

에쿠우스[편집]

Equus

영국의 극작가 피터 셰퍼의 대표작으로서 1973년에 영국 올드빅 극장에서 초연된 후 전세계적으로 센세이션을 일으킨 작품이다. 우리나라에서는 1975년 9월에 극단 '실험극장(實驗劇場)'이 신정옥(申定玉) 역, 김영렬(金英烈) 연출로 소극장 개관기념으로 공연하여 3개월이라는 연극사상 최장기 기록을 세웠고 관객 확대에도 성공하여 연극에 대한 대중의 새로운 인식과 아울러 연극운동의 전환점을 만든 작품이다.

현대문명과 기성도덕, 또 그에 따른 기성세대의 위선을 비판한 이 작품은 근본적으로 현대인의 절망과 실존적 고뇌를 그리고 있다.

라틴어로 말(馬)이란 뜻의 '에쿠우스'는 영국 법정에서 커다란충격과 파문을 불러일으켰던 '6마리의 말의 눈을 쇠꼬챙이로 찌른 마굿간 소년의 괴기적 범죄실화'를 소재로 한 작품이다. 한 시골 정신병동이 무대로 되어 있는 이 작품의 줄거리는 대략 다음과 같다.

어느날 한 여판사는 6마리의 말을 쇠꼬챙이로 찔러 법정에 서게 된 소년을 정신과 의사에게 데려와서 그 원인규명과 진료를 간청한다. 이 소년은 형벌보다는 병리적 치료를 받게 해야 할 것이라는 것이 여판사의 제안이었다. 의사는 자기 병원에 입원시킨 후 그 소년의 범죄에 대한 심리적 요인을 캐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의사는 소년의 부모를 찾아가서 그 집안 사정부터 알아본다. 소년의 아버지는 인쇄공이고 어머니는 전직 교사였다. 의사는 소년의 어머니로부터 그는 일찍부터 철저한 기독교 교육을 받았고, 말을 유난히 사랑했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그리고 소년의 어머니는 기독교의 광신도인데 반해 아버지는 무신론자라는 것도 알게 된다. 그런 이질적 부모 밑에서 성장한 소년은 전기기구 상점에서 점원 노릇을 하다가 마구간에서 일하고 있던 소녀를 알게 되고, 그녀의 소개로 마구간에서 그녀와 같이 일하게 된다. 이야말로 소년에게는 생의 환희이며 인생의 전부였다. 어느날 소녀는 소년을 꾀어 성인영화를 구경한다. 그런데 뜻밖에도 거기서 항상 근엄하기만 했던 아버지를 만났던 것이다. 소년의 실망은 더할 나위 없었다. 마구간으로 돌아온 소녀는 소년을 유혹하여 성관계를 갖는다. 그러나 소년은 뜻을 이루지 못한다. 말이 내려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년은 갑자기 분노가 폭발하여 말굽파게로 마구간의 말눈을 모조리 찔러 버린다. 그리고 자기 눈마저 찔렀던 것이다.

이상은 의사가 치료를 위해 소년에게 재현시킨 것이다. 소년은 신(神)을 긍정하는 어머니와 신을 부정하는 아버지와의 이질적 상황 속에서 자기모순이라는 성격을 만들었던 것이다. 고독했던 소년은 말을 동경과 애정과 신앙으로 삼았다. 그러나 기성에 대한 일체가 무너지면서 신처럼 생각했던 말을 공격하고 말았던 것이다. 우리는 '에쿠우스'에 나오는 말을 신이라든가 숙명, 또는 냉혹한 현실과 물질문명의 상징으로 볼 수가 있다. 젊은이는 그런 비정과 중압감에서 자기 생의 의미를 찾고 인간으로서의 존재 확인을 위해 방황한 것이다. 그리함으로써 자기 스스로를 그대로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새롭게 발견하기 위한 자기 포기를 결행했던 것이다.

아일랜드[편집]

The Island

남아연방(南阿聯邦) 출신의 연출가이며 극작가인 아톨 후가드와 흑인 배우 존 가니·윈스톤 앵쵸나의 합작으로 1972년 작이다.

이 작품은 바로 악명높은 남아연방의 흑백 인종분리정책을 다룬 고발적 작품이기 때문에 1972년에 케이프 타운에서 극단의 단원들만 참석한 가운데 비공개리에 단 한번 공연한 뒤 곧장 외국(영국)으로 진출하여 호평을 받은 이색작이다.

<아일랜드>는 제목이 뜻하는 것처럼 인종차별 정책에 반대하다 체포된 죄수들만이 갇혀있는 남태평양상의 고도(孤島) 로빈섬이 실제무대로서 한 감방의 두 죄수 윈스톤과 존의 극한상황 속의 삶을 적나라하게 묘사한 작품이다. 그들은 단순히 이상(理想)과 신념 때문에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고 판사는 이들의 신념과 이상을 한갓 어린애 장난이라고 가볍게 밀어붙이면서 무기형과 10년형을 선고했던 것이다. 여기에서 그들은 인간의 존엄성을 생각하게 되고 법의 모순을 회의하게 되며 권력의 비리에 울분케 된다. 그러나 자기들의 주장은 말할 것도 없었고 인간적 삶마저 차단된 그들은 유일한 변론기회로서 '안티고네' 재판극을 생각해낸다. 그때 마침 10년형의 존이 3년으로 감형되고 석방이 3개월 뒤로 다가오게 된다. 존은 기뻐 날뛰지만 종신형의 윈스톤은 더욱 절망한다. 이상과 범용한 삶이란 두 극에서 방황하고 고민하던 그들은 불굴의 신념을 되찾고 절망과 내면적 죽음마저 초극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최후 수단으로서 안티고네 재판을 연출하여 당국을 통렬하게 비판한 뒤 다시 손발에 수갑을 찬다. 안티고네 재판은 이 작품의 클라이맥스로서 인위법(人爲法)이 신법(神法) 위에 놓일 수 없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하여 그들이 본보기로 가져온 희랍비극이다. 그러니까 인위법이 자연법 위에 놓이게 되면 인간의 존엄성은 물론 기본권마저 짓밟히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법과 양심, 정치와 도덕성의 갈등으로서 인류사를 관통하여 언제나 제기되는 문제인 것이다. <아일랜드>가 설득력과 감동을 안겨주는 이유는 바로 인위법에 맹종하지 않고 자연법과 양심, 그리고 인간애를 좇아 참담한 죽음을 택하는 처녀 안티고네의 비극적 삶을 남아 흑인들의 리얼리티로, 더 나아가서는 모든 세계 관객의 리얼리티로까지 승화시킨 데 있다. 이처럼 <아일랜드>는 자연법과 인위법의 갈등, 자유와 운명의 갈등, 국가와 개인적 삶 등을 매우 예각적으로 그린 작품이다. 그러면서 법 뒤에 도사린 권력악을 고발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작품은 흑백 인종문제를 넘어 인간 대 정치권력의 차원으로까지 확대되고 현대인의 자기 확인으로까지 이어져 간다. 이처럼 문제성을 지닌 작품이면서도 예술성이 높은 것은 인간탐구에 대한 깊이는 물론 두 죄수의 인간적 삶에의 끝없는 동경과 좌절, 고통과 슬픔이 서정적으로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극단 '실험극장(實驗劇場)'이 구희서(具熙書) 역, 윤호진(尹浩鎭) 연출로 1977년 11월 25일부터 공연하여 1978년 2월까지 장기 공연했다.

환도와 리스[편집]

Fando et Lis

에스파냐(모로코 태생) 출신의 프랑스 극작가 페르나도 아라발의 작품. 소위 부조리 극의 첨단을 걷는 아라발이 1960년대 후반에 쓴 작품이다. 아라발이 추구하는 작품세계의 부조리는 인간 존재의 철학적 회의(懷疑)가 아니라 유아(幼兒)의 상황이다. 아라발의 작품 속에는 스트린드베리, 카프카, 베케트 등의 영향이 깃들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많지만 그가 끊임없이 고집하는 테마 및 그 '세계에 존재하는' 양식은 다른 작가와 전혀 이질적이라는 것을 말하는 이는 적다.

환도와 리스는 매우 사랑하는 연인이다. 환도는 리스를 유모차에 태우고 '따르'란 도시를 찾아가는데 항상 같은 곳을 맴도는 데 그친다. 환도는 다리 불구의 아름다운 리스를 사랑도 하고 학대도 한다. 학대하는 이유는 그녀가 너무 환도에게 의지하기 때문이다.

환도는 리스의 아름다움을 사랑하기 위해, 역시 '따르'를 찾아가는 3인의 방관자에게 리스의 옷을 벗기고 다리를 보여 주려 한다. 그러다가 리스가 엎어지면서 환도의 소북을 찢게 된다. 화가 난 환도는 리스를 마구 때려 리스는 죽는다. 그러나 환도는 리스를 묘지에 묻고도 자기가 한 일에 대해서 깊이 이해하지 못한다는 게 <환도와 리스>의 간략한 줄거리이다. 환도는 성행위에 뿌리박은 충동에 의해서 리스를 죽인 것이다. 왜냐하면 이 경우 살인이란 타인을 소유하기 위한 최종적 수단이며, 자기에 대한 관계를 영구히 고정하려는 원망(願望)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아라발 세계의 일반적 특징은 뭐니뭐니해도 성인사회에 유년시대를 투영시킨다는 점이다. <환도와 리스>에서도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그의 작품에서는 심미(審美)가 갑자기 증오·공포로 변한다.

그래서 그의 작품을 공포연극이라고도 부른다. 그의 말을 빌면 공포연극이란 비극과 어릿광대 연극, 시와 속된 것, 사랑과 에로티시즘, 세련된 감정과 악취미, 신성과 모독, 숭고한 것과 더러운 것이 동거하는 연극이라는 것이다.

<환도와 리스>는 1976년에 김정옥(金正鈺) 역, 이윤영(李允榮) 연출로 극단 '자유극장(自由劇場)'에 의해 초연되었다.

바다풍경[편집]

-風景 Sea Scape

미국의 현대극작가 에드워드 올비의 최신작으로, 1975년 1월 뉴욕의 슈버트 극장에서 초연된 2막극. 우리나라에서는 '그룹 10'에 의해 신정옥(申定玉) 역, 김도훈(金道勳) 연출로 1976년 12월에 초연되었다.

올비의 작품은 매우 시적이고 상징적이며 모호성마저 띠지만 일관되게 흐르는 주조는 오늘의 미국사회와 미국인이 안고 있는 소외·좌절·고독·허무이며, 절망적 삶의 표상이다. 그가 초기 단막극에서 미국사회의 이단자들을 다룬 것도 실은 사회악에 감염된 사회병리를 파헤치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이를 통해서 미국정신의 불모성(不毛性), 더 나아가서는 현대인이 겪고 있는 정신적 질환을 묘사한다. 따라서 그가 그리는 것은 언제나 지치고, 그러면서도 불만에 가득찬 우리 시대의 아픈 삶이고 이런 병든 삶을 비관적 각도에서 묘사하고 있다. <바다풍경>은 초기작보다 훨씬 원숙한 작품이다.

노부부가 해변에 앉아 자기들의 지나온 삶을 회의하고 문명생활을 회의한다. 바다를 찾아 해변에서만 살자는 몽환적인 아내와 그래도 어쩔 수 없이 모든 사람들처럼 살아가야 되지 않겠느냐는 현실안주(現實安住)의 남편과는 건널 수 없는 심연의 계곡이 가로놓여 있다. 이는 부부간의 사랑의 부재, 의사소통의 단절, 그로 인한 인간의 근원적 고독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 노부부 앞에 젊은 도마뱀 부부가 나타난다. 도마뱀 부부는 노부부와의 대화 속에서 인간세계를 조금씩 배우게 되는데, 특히 애증(愛憎)과 고독, 슬픔 등을 알게 되면서 인간세계에 환멸을 느끼고 다시 그들의 원초적 세계로 돌아간다. 여기서 특히 작가가 남편의 입을 통해 강조하는 것은 사람이나 도마뱀이나 아득한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면 다 똑같다는 것이다. 이처럼 인간존재의 근원에 조명하는 <바다풍경>은 태고의 이미지를 갖고 있는 해변에 무대를 설정하고 있다.

매우 인생관조적인 이 작품도 그의 다른 작품들처럼 현대문명을 비판하고 그로 인한 인간성 상실의 고발과 진정한 삶을 추구하고 있다.

맥베스[편집]

셰익스피어 작. 외국인에 의해 연출된 작품으로 모처럼 의미있는 연극교류의 형태를 확인할 수 있다. <맥베스>를 연출한 바비츠키는 수난의 역사로 얼룩진 폴란드인답게 괴로워하는 악인 맥베스의 내면적 분열을 명상적으로 접근하면서 폭력을 축소하고 양식화한 채 유혈이 낭자한 원작의 세계에서 선정성을 제거한다. 그는 또 마녀들을 들판뿐만 아니라 맥베스의 궁전안에서도 등장시켜 인간사에 대한 악의 지배를 더욱 강조한다. 무엇보다 그는 맬콤왕자가 구국공신들과 함께 정의를 회복하고 평화의 시대를 선언하는 원작의 결말장면을 정지시킨 뒤에 세 마녀로 하여금 맥베스를 첫 장면에서 유혹할 때처럼 불길한 제물을 무대 맨 앞쪽에 내려놓게 함으로써 피와 악의 역사가 되풀이될 것임을 강력하게 시사한다. 감옥, 파괴된 자연, 폐허화된 공장의 이미지를 교차시킨 윤정섭의 무대미술은 연출의 개념과 잘 어울렸다.

러브 차일드[편집]

조안나 머레이 스미스 작. 태어나자마자 입양되었던 빌리가 혼자 사는 어머니 안나를 25년만에 찾아오면서 시작한다. 두 대조적인 모녀가 벽을 허물고 하나로 합하는 과정을 추적하는데, 결국 두 사람은 그들이 못다한 딸과 엄마로서의 역할을 확립하기에 이르지만 그 과정에서 어머니로부터 진정한 사랑을 받으려는 딸과 자식없는 커리어우먼으로서의 안정된 생활과 자기영역을 지키려는 어머니 사이에 팽팽한 줄다리기가 지속되면서 극적인 긴장감을 한껏 북돋운다. 모녀간의 미묘한 심리적 교류보다 복잡한 내러티브의 논리적 설명에 초점을 맞춘 채윤일의 무대만들기가 글쓰기와 때때로 엇갈리기는 했지만 호주연극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킨 공연으로서 그 의미는 작다고 할 수 없다.

물고기의 축제[편집]

유미리 작. 작가의 너무나 불행한 인생체험이 희화화를 통해서 강한 충격을 안겨 주었다. 가정결손으로 인한 상처와 재일교포로서 겪어야 하는 냉대와 소외를 견디다 못해 여러 번 자살을 시도했다는 그녀의 치열한 자전적 불행이 극에 다양한 색채로 배여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