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문화·민속/한국의 연극/한국의 신극/신극의 극작가·연출가·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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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극의 극작가·연출가〔개설〕[편집]

新劇-劇作家·演出家〔槪說〕

한국 연극에 있어서 신극이라는 말은 일본을 통해 굴절이입(屈折移入)된 말이다. 다시 말해서 도쿄(東京)에 있던 '쓰키지 소극장(築地小劇場)'을 본거지로 하여 종래에 있었던 신파극(新派劇)에 대한 비판과 반발로 일어난 연극이 바로 신극운동이었다. 따라서 신극운동의 정신적인 지주는 서구의 사실주의 문학정신이었으며, 그 표현기술은 이른바 '리얼리즘' 연출이론에 입각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이 상연한 대부분의 작품은 창작극보다는 구미 선진국의 작품을 번역·번안하는 데 의존했고, 그것이 신극운동의 첩경인양 착각을 했었다.

한국의 신극운동은 바로 이와 같은 일본의 신극운동을 직접적으로 접했던 도쿄 유학생들에 의해 이입이 되었고, 초창기의 극작가와 연출가들은 거의가 '쓰키지 소극장(築地小劇場)'의 영향을 받았음은 부인할 수가 없다.

초창기의 극작가·연출가로는 1920년대의 김우진, 윤백남을 위시, 극예술연구회의 주동이던 유치진을 꼽을 수 있다. 그러나 외국문학의 모방 또는 이식에서 비롯되었던 시대사조 가운데서 유달리 십자가를 져야 했던 사람은 바로 극작가였다. 희곡이 문학인 동시에 연극의 모태(母胎)라는 상식적인 개념이 받아들여지기에는 사회적인 여건이 너무나 불합리했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해서 우리의 전통연극의 계승이나 전수(傳受)는 이미 시대착오인양 버림을 받은데다가 일반 대중의 연극에 대한 천시(賤視)는 여전했기 때문에 극작가가 신극운동에 적합한 희곡을 쓴다는 것은 하나의 사명감이나 개척자적인 투지를 가지는 데서부터 일어서야 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어떤 물질적인 보장이나 화폐가치로 간주될 수도 없고 오직 자기 자신이 쓰고 싶으니까 써야 했고 또 그것으로 자기만족을 할 수밖에 없었다.

뿐만 아니라 이른바 종합예술이요, 집단예술이라 일컫는 연극에서는 한 극작가의 의견이 그대로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연출가에 의해 그려지며 연기자의 주문을 받아야 하고 흥행사의 요구를 들어야만 했고 관객의 기호를 계산해야만 했던 복합적인 압력이 극작가의 탄생이나 성장을 더디게 했다.

이른바 신극운동의 정수인 사실주의(寫實主義) 문학정신을 무대 위에 옮겨놓았을 때 그것을 이해하기에는 관객의 수준이 너무나 낮았다. 그렇다고 그 당시 유행했던 상업주의 연극의 표본인 신파극(新派劇)을 쓰자니 극작가의 긍지와 이상과 사명감은 너무나 높았다. 이와 같은 모순 가운데에서 우선 쉽게 올릴 수 있고 자기 세계에서나마 군림할 수 있는 길은 번역극을 상연하는 길밖에 없었다. 연극이 흥행으로 성공치 못할 바엔 예술적인 작품의 소개라는 문화적 사명감에라도 만족하자는 소극적이며 고답적인 의지가 응결된 셈이다. 그러는 사이에 피해를 입는 측은 극작가였다. 천대받는 극작가가 집필생활에 몰두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현상은 연출가의 경우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연극에 있어서 연출이라는 분야가 기능직이 아닌 재현예술(再現藝術)의 창조자로서 인정을 받게 된 것은 신극운동에서 비롯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전까지의 신파극은 극작가가 연출을 겸했거나 연출가가 있었어도 그 이름을 밝히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일본 유학시절에 얻어진 새로운 지식은 바로 연극에 있어서 연출이라는 분야가 얼마나 중대한 의미를 가지며, 또 창조상에 있어서 연출의 권한과 권위가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가를 안 것도 바로 신극운동에서 얻어진 지식이었다. 그러나 극작가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연출(演出)이라는 어휘 자체가 일반에게는 생소했었고 도쿄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연출가가 있었다 하더라도 그들이 극단에서 인정을 받기란 매우 어려웠던 게 바로 신극 초창기의 일반적인 경향이었다. 홍해성(洪海星), 이서향(李曙鄕)·안영일(安英一) 등이 바로 그런 측에 속했다.

그래도 극작가의 이름은 작품을 쓰니까 알 수도 있지만 연출가는 작품을 쓰는 것도 아니요, 연기를 하는 것도 아니니 일반 관객의 위치에서 볼 때는 매우 불투명하고도 빛이 나지 않는 존재였던 것만은 사실이다. 상업주의를 내세운 신파극단에서는 극작가가 연출을 맡기도 하고, 그 극단에서 영도력이 있는 주연 배우가 연출의 영역까지 침범했다. 연출을 예술분야로 인정하지 않고도 연극이 상품의 가치를 발휘할 수 있는 길은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스타시스템을 택하는 일이었다. 관객은 배우를 보고 연극을 찾지, 연출을 보고 오지는 않는다는 하나의 신조가 지배적이었다. 그러므로 연극에 있어서 극작가와 연출가는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한다는 원칙이 있었을 뿐 우리나라의 초기 신극 운동이나 신파극에서는 실질적인 서열이 배우보다는 훨씬 낮았었음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194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신파극과 신극이 뚜렷하게 그 빛깔을 달리하게 되었고, 그것을 선택하는 능력도 관객 가운데서 싹트기 시작했다. 즉 서민층이나 부녀층이 신파연극을 찾고 지식인이나 학생층이 신극을 지지하게 되자, 극작가와 연출가의 존재는 어느 때보다도 뚜렷해졌고, 이들이 연극 창조에 미치는 영향이 어떠한 것인가를 인식하게 되었다. 따라서 8·15 광복을 전후한 시기에는 신파극과 신극이 작가, 연출가, 그리고 배우까지도 서로 교류시키게 되었고 어느 의미로 봐서는 가장 많은 극작가와 연출가가 배출되었던 시기이도 했다.

그러나 광복 이후에서 6·25전쟁까지 그 대부분의 극작가나 연출가가 자의나 타의에 의해 피난살이와 같은 연극적인 피난살이를 해옴으로써 간신히 연극의 명맥을 이어왔음은 바로 연극의 수난기이자 극작가와 연출가의 커다란 시련이었다. 배우는 영화계로 팔리어 갈 수 있었어도 극작가나 연출가는 그렇게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때 유치진(柳致眞), 이광래(李光來), 오영진(吳泳鎭), 이해랑(李海浪), 허남실(許南實) 등이 있었다.

그러나 1950년대 후반기부터 사회적인 질서와 정치적 안정을 얻음으로써 연극계도 서서히 세대교체의 바람이 불어 왔다. 각 일간신문의 신춘문예 현상이나 문학지의 추천을 통하여 재기발랄한 극작가가 배출되었고 젊은 연극학도들에 의해 조직된 소극장운동을 통해 젊은 연출가도 두각을 나타냈다. 뿐만 아니라 구미 선진국으로 향해 넓게 열린 문화예술의 창구를 통하여, 새로운 세계의 물결을 직접 호흡하게 됨으로써 한국의 연극은 이제 신극이라는 이름을 망각할 정도로 다양화되고 활발해지고 있다. 그것은 페허 위에 새로 다져진 터를 잡고 집을 세울 사람들이요, 그 주도적인 역할은 바로 극작가와 연출가들에게 있음을 볼 때, 한국 신극의 역사는 그 나름대로 숨가쁜 역사를 꾸며 오고 있는 것이다. 이때 나온 극작가로는 임희재(任熙宰), 차범석(車凡錫), 하유상(河有祥), 이근삼(李根三), 오태석(吳泰錫) 등이 있고 연출가로는 김정옥(金正鈺), 허규(許圭), 임영웅(林英雄), 표재순(表在淳) 등이 있다.

<車 凡 錫>

극 작 가[편집]

김정진[편집]

金井鎭 (1886-1936)

극작가·연출가. 서울에서 출생. 호는 운정(雲汀). 일본의 도쿄고등상업학교에서 2년간 수업하고 약 3년간 시마무라(島村抱月)의 문하생으로 극문학을 본격적으로 연구했다. 1920년 이후 귀국하여 <동아일보> <시대일보>의 기자와 도쿄 호치신문사(報知新聞社) 조선 특파원과 <경성일보> 특파원을 역임했다. 1933년에는 조선 방송협회 제2과장에 취임하여 재직 중 사망했다. 그는 언론인으로서보다도 극작가로서 더 유명하며, 몇 편의 연극론과 함께 그가 남긴 희곡작품으로는 <십오분 간> <꿈> <잔설> <냉소> <약수풍경> 등이 있고, 장편소설로서 <독와사>가 전한다.

김우진[편집]

金祐鎭 (1897-1926)

극작가. 전남 장성 출생. 호는 초성(焦星)·수산(水山). 장성군수를 지낸 김성규(金星圭)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목포공립심상고등소학교와 일본 구마모토 현립(態本縣立) 농업학교를 졸업하고 1920년 와세다(早稻田)대학 영문과에 입학하여 희곡문학을 전공했다. 와세다대학 재학시인 1920년 봄에는 홍해성·고한승·조춘광 등과 함께 최초의 근대극 단체이며 학생극 단체였던 '극예술협회(劇藝術協會)'를 조직했고 이듬해에는 '동우회 순회연극단'을 만들어 연출가로서 활약했다. 1924년 대학 졸업 후에 극작과 연극이론에 전념하여 <정오> <산돼지> <이영녀> <두덕이 시인의 환멸> <난파> 등 5편의 뛰어난 희곡작품을 남겼으며 한국 최초로 유진 오닐, 피란델로, 차페크 등 세계의 첨단적인 극작가를 소개하기도 했다. 최초로 표현주의를 소개하고 또 표현주의 희곡도 썼다. 1926년 가수 윤심덕(尹心悳)과 현해탄에서 정사(情死)했다.

박승희[편집]

朴勝喜 (1901-1964)

극작가·연출가. 서울출생. 초대 주미공사였던 박정양(朴定陽)의 차남이다. 1923년 일본 메이지대학 영문과 재학 중 김복진·김기진·김을한·이서구 등과 극단 '토월회'를 조직하여 인사동 조선극장에서 <곰> <그는 그 여자의 남편에게 무엇이라 거짓말을 했는가> <기갈(飢渴)> 등과 자신의 작품인 <길식(吉植)>으로 제1회 공연을 가졌다. 제3회 공연 이후는 창립 동인들이 거의 탈퇴하고 혼자서 전재산을 투입하여 '토월회'를 이끌었다. 1932년에는 당국의 탄압으로 '토월회'의 명칭이 '태양극장'으로 바뀌었고, 1940년 해산될 때까지 전국을 누비면서 수백 회의 공연을 가졌다. 그는 극작가인 동시에 연출가였고, 연극 기업인이기도 했는데, 1963년에 제1회 한국 연극상을 받았다. 작품으로는 <길식> <사랑과 죽음> <산서낭당> <이 대감 망할대감> <혈육> <요부> <모반의 혈> <교장의 딸> <고향> <아리랑 고개> 등 200여 편의 창작극과 번안극이 있으며, 수백 회의 연출을 맡았다.

유치진[편집]

柳致眞 (1905-74)

극작가·연출가. 경남 통영 출생. 호는 동랑(東朗). 일본 호잔중학을 졸업하고 1931년에는 릿쿄대학(立敎大學) 영문과를 졸업한 뒤 즉시 귀국하여, 1931년에 조직된 '극예술연구회'의 창립멤버로 극계에 투신했다. 1932년 <토막>이 '극예술연구회'에서 공연된 이후 <버드나무 선 동리의 풍경> <소> 등 민족의 어둠을 그린 리얼리즘 작품을 쓰다가 일제의 탄압으로 방향을 돌려 리얼과 낭만의 중간 계열의 작품을 썼고, 역사극으로 시대를 우회적으로 비판하는 <마의태자> 등을 썼다. 그는 저술뿐만 아니라 많은 작품을 연출함은 물론 직접 출연하기도 했다. 1939년 '극연좌'가 해체되자 1940년에는 '현대극장(現代劇場)'을 조직했고, <흑룡강> <북진대> 같은 친일작품을 쓰기도 했다. 광복 후에는 한국무대예술원 초대 원장과 국립극장 초대 극장장, I.T.I. 한국본부위원장, 예총 초대회장 등을 역임했고, 1962년에는 극장 '드라마센터'를 설립하여 초대 소장에 취임하여 활약했다. <소> <나도 인간이 되련다> <유치진 역사극집> <자매> <유치진 희곡선집>(상·하) 등과 많은 연극관계 논문이 있다. 1974년 병사. 문화훈장 대통령장·예술원상 등 수상.

이광래[편집]

李光來 (1908-1968)

극작가. 본명은 흥근(興根). 경남 마산 출생. 1928년 배재고보(培材高普)를 졸업하고, 1933년에는 일본 와세다(早稻田)대학 영문과를 수료하고 귀국했다. 귀국 후에는 <조선일보>와 <중앙일보>의 기자생활을 약 3년간 하고, 1935년에는 '극예술연구회'에 입회, 극계에 투신했다. 같은 해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희곡 <촌선생>이 당선되었고, 이듬해에는 극단 '중앙무대(中央舞臺)'를 조직했다. 광복 후에는 극단 '민예(民藝)'를 조직했고, '신협(新協)'대표를 지냈으며, 문총 중앙위원, 한국문협 이사, 예술원 회원, I.T.I 한국지부 이사 등을 역임했다. 1963년에 대한민국 문화포장을 수상한 데 이어 예술원상도 수상했다. 그의 대표적인 희곡으로는 <석류나무집> <해질 무렵> <항구의 노래> <아베마리아의 만종> <지새우는 뒷골목> <지하도> 등 수십편이 있고, 그 외에 <연극의 새로운 방향> <단군신화의 연극사적 고찰> <제4벽을 모색함> <희곡문학의 방향감각> 등 수십편의 논문이 있다. 저서로는 사후에 출간된 희곡집 <촌선생(村先生)>이 유일하게 전한다.

김진수[편집]

金鎭壽 (1909-1966)

극작가. 평남 중화 출생. 1935년에 도쿄 릿쿄대학(立敎大學) 영문과를 졸업하였다. 재학시부터 홍해성·유치진·허남실 등과 연극연구에 전렴하는 한편, '동경학생예술좌(東京學生藝術座)' 창립에 참가하였고, 1936년에 실시된 '극예술연구회'의 현상희곡에 <길>이 당선됨으로써 극단에 정식으로 데뷔했다. 광복과 함께 교육계에 투신하여 경기여고 교사, 중앙대학·국학대학 강사를 거쳐 1955년에 경희대학 교수를 역임하였다. 문총중앙위원과 한국자유문협 희곡 분과위원장을 역임한 그는 <코스모스> <길가에 핀 꽃> <해 뜰 무렵> <버스정류장이 있는 로터리에서 생긴 일> <청춘> <아들들> 등 많은 희곡 작품과 연극평론을 썼다. 그가 남긴 저서로는 <김진수 희곡선집>과 사후에 출판된 <김진수 연극론집>이 있다.

오영진[편집]

吳泳鎭 (1916-1974)

극작가. 평안남도 평양 출생. 민족운동가 오윤선의 장남이다. 평양고보를 거쳐 1938년 경성제국대학(京城帝國大學) 조선어 문학과를 졸업했다. 1937년에 <영화예술론>이란 영화평론으로 데뷔한 그는 1942년 시나리오 <배뱅이굿>을 처음 발표함으로써 창작을 시작했다. 이듬해 시나리오 <맹진사댁 경사>를 쓰고, <살아있는 이중생 각하> <정직한 사기한> 등 희곡에도 손을 대기 시작하였지만, 초기에는 영화이론과 시나리오 창작에 전념했다. 문총 중앙위원, 중앙문화사 사장, 예술원 회원, <문학예술> 주간 등을 역임한 그는 후기에는 주로 희곡창작에 주력하여 왔다. <허생전> <모자이크 게임> <해녀 뭍에 오르다> <나의 당신> 등의 시나리오 및 <조선 영화론> <조선영화의 제문제> 등 영화관계 논문 수십 편이 전한다.

차범석[편집]

車凡錫 (1924- ) 극작가·연출가. 전남 목포 출생. 연세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한 후 10여 년간 교편 생활을 하다가, 195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밀주(密酒)>로 가작 당선되고, 1956년에 <귀향>으로 당선되었다. 그 해에 '제작극회(制作劇會)'의 동인으로 극작활동을 시작하였다. 1963년에 극단 '산하(山河)'를 창립하여 대표로서 활약, 오늘까지 한국 극작가 중에서 제일 다작(多作)을 하였고, 3-4권의 희곡집을 낸 바 있는 역량있는 극작가이다. 현재 예술원 회원이며, 주요 작품으로는 <껍질이 깨지는 아픔 없이는>(희곡집)이 1961년에 발간되었고 <태양을 향하여> <불모지>(1958), <산불>(1962), <갈매기>(1963), <청기와집>(1964), <열대어>(1966), <장미의 성>(1968), <대리인(代理人)>(1969) 등이 희곡집으로 나왔다. 또한 1971년에 <왕교수의 직업> 등 수십 편의 단막·장막을 창작해 낸 저력 있는 극작가로 알려져 있으며, <말괄량이 길들이기> <진흙 속의 고양이> <무리> 등의 연출작품도 있다.

하유상[편집]

河有祥 (1929- ) 극작가. 충남 논산(論山) 출생. 서라벌예대 중퇴 후 7년간 중학교 교사로 재직하고 1955년에 기자생활, 1957년에는 시나리오 작가협회 초대간사가 되었다. 극작가로서의 데뷔는 1956년 국립극장 제1회 장막 희곡 모집에 <딸들 자유연애를 구가하다>로 당선되었다. <젊은 세대의 백서(白書)>(1958), <죄와 벌>(1961), <미풍(微風)>(1961, 후에 희곡집으로 출간), <아리나의 승천(昇天)>(1963), <학 외다리로 서다> <어머니의 모습>(1964), <여성만세>(1965) 등 구세대와 신세대간의 갈등문제를 많이 다룬 사실주의 극작가이다. <수양대군> 등 많은 라디오 드라마와 시나리오 작품도 썼다. 현재 문예지 <탐미문학>의 주간이다.

이근삼[편집]

李根三(1929- ) 극작가. 평남 평양 출생.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대학원 졸업. 1962년 I.T.I. 한국본부 이사, 중앙대학교 연극영화학과 교수로 재직하다가, 1971년에 서강대학 영문학과 교수가 되어 현재는 명예교수로 있다. 그간 극단 '민중극단'의 창립동인으로 <국물 있사옵니다> 등 풍자 희곡작가로 활약, 많은 작품을 내놓았다. 작품으로는 <끝없는 실마리>(1958), <원고지> <동쪽을 갈망하는 족속들> <대왕은 죽기를 거부하다>(1960), <거룩한 직업> <위대한 실종>(1963), <욕망>(1964), <하나는 둘일 수 없습니다.>(1967), <몽땅 털어놉시다> <실과 바늘의 악장>(1968) 등이 있고 그 밖에

<제18공화국>이라는 표제로 희곡집을 내었다. 또 극단 '가교(架橋)'의 고문으로 <광인들의 축제>(1968), <유랑극단>(1972) 등의 작품을 발표했다. 대부분 현실을 비판하고 인간과 사회를 제압하려는 모든 사념과 제도 속에 내재된 우스꽝스런 모순을 들추어내어 희극적인 인간상과 그 비극성을 지적하고 있으며 사실주의 연극의 탈피를 시도하고 있다.

박조열[편집]

朴祚烈 (1930- )

극작가. 함남(咸南) 출생으로 함남중학교를 졸업하고 원산공업학교 교원을 하다가 월남, 육군장교로서 오랫동안 복무했다. 군에서 제대한 후 드라마센터 연극 아카데미에서 극문학을 수학하고 1965년 <토끼와 포수(砲手)>로 데뷔한 중견 극작가이다.

그 후에 주로 단막극인 <관광지대> <목이 긴 두 사람의 대화> <흰둥이의 방문> 등을 발표하고 한때 텔레비전 드라마에 손을 대기도 했으며 <오장군의 발톱> <조만식은 아직도 살아 있다> 같은 장막극도 썼다. 비교적 과작(寡作)인 그는 언어감각이 예민하고 기지와 해학이 넘치며 스피드와 경쾌감이 전면을 뒤덮는다. 현재 동아일보 신춘문예와 동아연극상 심사위원으로 있다.

오태석[편집]

吳泰錫 (1941- ) 극작가·연출가. 서울 출생으로 연세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1967년 단막극 <웨딩드레스>로 조선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장하였다. 비교적 부조리극적 색채를 띠고 있는 오태석은 <환절기(換節期)> <고초열(枯草熱)> <육교 위의 유모차> <여왕과 기승(奇僧)> <교행(交行)> <유다여 닭이 울기 전에> <사육(飼育)> 외에도 <롤러스케이트를 타는 오뚝이> <이식(移植)수술> <약장수> 등의 모노드라마를 발표하는가 하면 <쇠뚝이 놀이> <초분(草墳)> 등의 민속적이며 원형적인 작품도 시도하였다. 매우 실험성을 띠고 있는 그는 역사물에도 관심을 가져 세조(世祖)와 단종(端宗)의 비극적 관계를 다룬 <태(胎)>를 발표하여 안민수(安民洙) 연출로 구미 순회공연까지 하였다.

이재현[편집]

李載賢 (1940- ) 극작가. 평안도 평양 태생으로 경기고(京畿高)를 거쳐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사회과를 졸업했다. 1965년 국립극장 현상장막극 모집에 <바꼬지>로 데뷔한 이래 <해뜨는 섬> <사할린스크의 하늘과 땅> <신시(神市)> <썰물> 등 시적이고 향수(鄕愁)의 미학을 주조한 작품을 발표하다가 다시 도시문명 속의 인간의 소외를 다른 <제10층> <엘리베이터> <몽유병 환자> 등을 발표했다.

그리고 우리 현대사 문제에도 관심을 기울여 <포로들> <하늘아 무엇을 더 말하랴> 등을 발표했는가 하면 최근에는 역사극에도 손을 대고 있다. 1973년 장충동의 신축 국립극장(國立劇場) 개관 레퍼토리인 <성웅 이순신(聖雄李舜臣)>을 비롯하여 <대한(大恨)> 등을 발표했다. 그 밖에 <꽃샘> <내 거룩한 땅에> 등의 작품들이 있다.

윤대성[편집]

尹大星 (1939- ) 극작가. 만주(滿洲)에서 출생하여 서울에서 성장. 연세대 법과를 졸업하고 은행(銀行)에 근무하다가 1967년 단막극 <출발(出發)>로 동아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데뷔했다.

그 후 전통극과 현대극의 융화를 꾀하는 <막난이>로 동아연극상과 한국일보 연극영화상의 희곡상을 수상했고 <노비문서(奴婢文書)>로는 현대문학 신인상을 받았다. 매우 날카로운 시각으로 현실을 비판 풍자하고 있는 윤대성은 특히 매스컴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으며 매스컴이 인간을 어떻게 파멸시키느냐 하는 문제를 자주 다루었다. 그런 작품으로서는 <출세기(出世記)>와 <목소리> 등을 꼽을 수 있다. 그는 희곡 이외에도 라디오·텔레비전 극을 많이 쓰고 있다.

연 출 가[편집]

홍해성[편집]

洪海星 (1893-1957)

연출가. 본명은 홍재원(洪在遠). 경북 대구 출생. 니혼(日本)대학 예술과를 수료하고, 1920년에 도쿄에서 유학생을 중심으로 '극예술협회'를 조직, 국내에서도 공연하였다. 1924년에는 일본의 신극 단체 쓰키지 소극장(築地小劇場)에 입소, 연출과 연기를 배웠다. 1930년에 귀국하여 극단 '신흥극단'을 조직하고 창립공연 작품 <모란등기(牡丹燈記)>의 연출을 맡았다.

1931년에는 '극예술연구회'의 창립동인이 되어 주로 연출을 맡아 부설 '실험무대'를 통하여 <검찰관> <옥문> <해전(海戰)> <토막> <인형의 집> <벚꽃동산> 등의 작품을 연출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여의치 않아 '동양극장' 연출부로 가서 산하단체인 '청춘좌' '희극좌' '호화선'에서 많은 연출작품을 남겼다. 풍운의 뜻을 안고 이 땅에다 신극을 수립하고자 했으나 스스로 갈등을 안은 채 타계하였다.

서항석[편집]

徐恒錫 (1900-1985)

연출가. 함남 홍원에서 출생. 중앙고보(中央高普)를 거쳐 일본 제3고등학교와 도쿄 제국대학 독문과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동아일보> 학예부장, <민주일보> 편집국장, <대학신문> 주필 등 기자생활 10여 년을 한 언론인이기도 하다. 1931년 '극예술연구회' 창립동인으로 극계에 투신, 주로 연극이론가·연출가로서 활약하였다. 광복 후에는 국립극장장, 문총 최고위원, 예술원 회원, 서울문리대 교수를 거쳐 현재 서라벌예대 교수로 재직 중이다. 괴테의 <파우스트> 등 많은 작품을 번역·연출하였고, <마을의 비가> 등의 희곡 작품과 수 십편의 연극 관계 논문이 있다.

박진[편집]

朴珍 (1905-1974)

연출가·극작가로서 서울 출생. 본명은 승진(勝進). 1923년 양정고보(養正高普)를 졸업하고 니혼(日本)대학 문예과를 중도 퇴학하였다. 1927년에는 극단 '산유화회(山有花會)'를 조직하였고, 1928년에는 극단 '화조회(火鳥會)'를 발족시켰다. 이듬해는 '개벽사(開闢社)'의 학예부장으로 근무하는 한편 '토월회' 연출부에 입회, 박승희 작 <아리랑 고개>를 연출하여 절찬을 받았다. 1935년 '동양극장'이 설립되자 문예부 연출부장에 피임, 전속연출가로서 홍해성(洪海星)과 수백 편을 분담, 연출했다. 광복 후인 1946년에는 문교부 주최 제1회 연극 경연대회에서 <혈맥>(김영수 작)의 연출로 연출상을 수상했다. 문교부 예술심사위원, 한국무대예술원 이사, 부원장, 최고위원 등을 역임했다. 연출가인 동시에 극작가이기도 한 그는 <공작선생> <끝없는 사랑> <춘향전> 등의 희곡을 발표했다.

이해랑[편집]

李海浪 (1914-1989)

연출가. 서울 출생. 니혼(日本)대학 예술과 졸업. 1941년 '극연좌'에 입단했다. 광복 후엔 '극협'의 창립 동인으로 1950년에 '신협'을 재건하였다. 예술원 회원에 재선되었고, 1957년에 국립극단 단장, I.T.I. 한국본부부위원장, '드라마센터' 극장장, 1967년에 연극인으로는 유치진 후임으로 예총회장에 피선되었으며, 유정회 소속의 국회의원으로서 연극인으로 정치에 참여한 최초의 사람이다. 연출작품은 <햄릿> <한강은 흐른다> <왜 싸워> <안네 프랑크의 일기> <죄와 벌> <미풍> <뜨거운 양철지붕 위의 고양이> <맥베스> <자매> <밤으로의 긴 여로> <포기와 베스> <갈매기> <학 외다리로 서다> 등 신협 공연작품을 거의 연출하였으며, 출연작품은 <오셀로> <붉은 장갑> <가야금의 유래> <다이얼 M을 돌려라> <밤으로의 긴 여로> 등이다. 그의 생애는 연기 생활에서 출발, 연출·기획·예술원 회원·정계로 점차 그 세계를 넓혀간 듯하다.

이원경[편집]

李源庚 (1916- )

연출가·극작가. 서울 출생. 일본 미술학교 양화과(洋畵科)를 졸업하고 '도쿄 아테네 프랑세즈' 3년 수료, 그 후 일시 귀국하여서 '극예술연구회'에 입회, 다시 도쿄 쓰키지 소극장(築地小劇場) 내의 신쓰키지(新築地) 극단의 미술부원으로 있었다. 1941년 극단 '현대극장'의 창립동인, 평양에서 '청명(淸明)극단'의 동인, 국립극장의 기획위원을 지냈으며, 광복 후에 극단 '민극(民劇)'과 '8월극단'을 창단했고 국립극장 운영위원을 지냈다. 5·16 군사혁명 후 '예그린악단' 창단시 기획실장으로 재직했고, 극단 '드라마센터'의 창단동인으로 연출을 맡아 연극 아카데미의 학생들과 서울연극학교 학생들의 연출지도를 하여 왔다. 현재 예술원 회원으로 있다. 그의 희곡 작품으로 <수선화> <격분> <해결되지 않은…>외 다수가 있으며, 연출작품으로 메테를링크의 <파랑새>, 몰나르의 <릴리옴>이 있고 그 밖에 <오셀로> <한여름밤의 꿈>외 다수가 있다. 무대 장치가 출신으로서 무대의 설정을 정확히 하고 대사를 정교하게 하는 등 사실주의적인 정묘한 연출의 제1인자라 할 수 있겠다.

이진순[편집]

李眞淳 (1916-1984)

연출가. 서울 출생. 니혼(日本) 대학 예술과 졸업. 1936년 '동경학생예술좌' 동인, 1938년에 '극연좌(劇硏座)' 회원, 1947년에 극단 '신지극사(新地劇社)' 대표를 지냈고, 한국무대 예술원 이사를 지냈다. 광복 후에는 '신극협의회' 간사, 1959년에는 무대예술원의 사무국장, 1960년에는 문총 사무총장, 1964년에는 연극협회 부이사장, 그리고 1965년에는 해방 후 최초로 연극전문지 <연극>(계간)을 발행하여 2호까지 계속되었다. 1966년에는 극단 '광장'을 창립, 본격적인 무대연출작업에 임했다. 1964년에 서라벌예대 강사, 1970년에는 동국대학교 연극영화학과 교수, 1972년에 예술원 회원이 되었다. 연출 작품은 약 250편에 다다르며, 이는 한국 연극연출가 가운데 최다기록이라 할 수 있다. 대표작으로는 <주노와 공작> <살아 있는 이중생 각하> <시라노 드 베르즈라크> <붉은 장갑> <산불> <세인트 조온> <베니스의 상인> <수치> <바꼬지> <벚꽃동산> <갈매기> <사춘기> <학마을 사람들> <로물루스 대제(大帝)> <천사 바빌론에 오다> <수전노> <군도> 등이 있다. 오페라는 <토스카> 외 10여편이 있고 그 외 창극으로 <춘향가> <심청가> <흥보가> 등이 있다. 그는 초기의 리얼리즘 추구에서 점차 내면성의 탐구에 역점을 두다가, 1960년대부터 연극의 전통성과 새로운 연극성의 발굴에 미학의 초점을 맞추어 간 듯하며, 치밀한 연출 계획이 특색이다.

강유정[편집]

姜由禎 (1930- ) 연출가·연기인. 경남 진주(晋州) 출생. 1954년 동국대학교 국문과를 졸업. 연극 공부의 시작은 18세로, 이때 '극예술협회'(약칭 극협)에 연구동인으로 입회, 오영진(吳泳鎭) 작 <살아 있는 이중생(李重生) 각하>에서 연기인으로 데뷔했다. 1950년 '신협(新協)'의 유치진 작 <원술랑>에서 지초부인으로, 파뇰의 <향수>에서의 오놀란 역을 맡았고, <햄릿> 등에 출연했다. 1957년에는 영화 <생명>에서 조감독으로 활약하였고, 1964년에는 김은국(金恩國)의 <순교자>를 제작하였다. 1966년에는 극단 '여인극장(女人劇場)'을 창립하여 대표가 되었고, 창립 공연으로 그 해 11월 체호프 작 <갈매기>를 공연했다. 1968년 로르카 작 <알바의 집>을 연출함으로써 연출가로서 데뷔했다. 윌리엄 기브슨의 <기적을 만드는 사람들> 이후부터는 계속 테네시 윌리엄스 작품을 연출하였다. 그의 연출 작품으로는 <오르페>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이구아나의 밤>(1970), <고해(苦海)>(1972) 등이 있다. 여류 연출가로서 본격적인 전문인으로서는 한국 최초의 연출가이다.

김정옥[편집]

金正鈺 (1932- )

연출가. 전남 광주(光州) 출생. 광주서중과 서울문리대 불문과를 졸업하고 파리 소르본 대학에 유학, 영화학 연구소에서 연구하고 현대 불문학 연구과정의 디프롬을 얻고 귀국했다. 현재 중앙대학교 연극영화학과 교수와 I.T.I. 한국본부 상임위원, 한국연극협회 부이사장을 역임하고 있다. 또한 극단 '자유극장'의 창립 동인으로 10여년간 간사장을 맡아 오며 계속 상임연출을 맡고 있다. '민중(民衆)극장' 창립공연인 마르소 작 <달걀>, 장 아누이 작 <도적들의 무도회>(1963), 박조열 작 <토끼와 포수>(1964), 그리고 '자유극장'의 창립 공연인 스칼페타 작 <따라지의 향연> 등의 경쾌한 연극 연출양식과 카뮈 작 <흑인창녀를 위한 고백>, 최인훈 작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랴>, 매커라스 작 <슬픈 카페의 노래> 등의 시적(詩的) 연출양식의 추구로 다양하게 관객의 폭을 넓히고자 하는 것이 그의 경향이다. 근래에 이르러 살롱드라마를 통하여 관객과의 접근을 적극 시도하고 있다.

허규[편집]

許圭 (1934- ) 연출가. 경기도 고양 태생. 서울대 농과대학 임학과 졸업. 1960년에 극단 '실험극장'의 제1회 공연인 이오네스코 작 <수업>의 연출에서부터 시작, <시나리오>(1962), <위대한 실종> <안티고네>(1963), <리어왕>(1964), <청혼소동> <햇빛 밝은 아침> <안도라>(1965), <해뜨는 섬> <무익조(無翼鳥)>(1966), <돈키호테>(1967), <사할린스크의 하늘과 땅>(1968), <피가로의 결혼> <유다여 닭이 울기 전에>(1969) 등과 '제작극회' 공연인 <껍질이 깨지는 아픔 없이는>(1961), '국립극단'의 <순교자>(1964)와 <손달씨의 하루>(1970) 외 수십 편의 단막극 연출을 하였다. 사실주의 연극으로부터 새로운 연극 양식을 구축하고자 모든 실험적 요소를 점검하면서 착실하고 밀도있게 연출하고 있는 연출가의 한 사람이다. 현재는 그간의 KBS, TBC, MBC TV극 제작·연출에서 은퇴, '허규연극연구실' 겸 '새문화 스튜디오'를 열어 후진 양성과 연기의 체계화를 위한 작업을 하고 있으며 북촌창우극장 대표로 있다.

표재순[편집]

表在淳 (1937- ) 연출가. 서울 출생. 배재고교(培材高校)를 거쳐 연세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했다. 그 후 TBC TV와

MBC의 TV에서 프로듀서로 활약하던 중 1963년 극단 '산하(山河)'의 창단동인으로 직업 연출생활을 시작. 10여년간 15편의 작품을 연출하였다. 1994-98년에는 SBS 프로덕션 사장을 역임했다. 연출 작품으로는 <천사여 고향을 돌아보라>(1965), <열대어> <베케트> <산불>(1966), <적과 흑>(1967), <슬로안씨를 즐겁게 하자> <장미의 성>(1968), <고독한 영웅>(1969), <키브스의 처녀>(1972), <노비문서>(1973) 등이 있고, 그 밖에 <햄릿> <페드라> <템페스트> 등을 연출했다. 오페라로는 <춘희>를 연출했으며, 한국연극영화상 연출 부문상을 받은 바 있다.

임영웅[편집]

林英雄 (1934- )

연출가. 서라벌예대 연극과를 졸업하고 신문기자 생활을 거쳐 극계에 투신한 중견 연출가이다. 60년대에 주로 국립극단에서 연출을 맡아 온 그는 1969년에 최초의 본격적인 프로듀서 시스템이라 할 수 있는 극단 '산울림'을 창단했다. '산울림' 창단공연인 <고도를 기다리며>는 그의 연출능력을 인정받게 한 작품이다.

1973년 KBS 방송국에 입사했으며, 현재는 극단 '산울림'을 이끌고 있는 그의 대표작으로는 <꽃피는 체리> <홍당무> <바다의 침묵> 등이 있고 그 외에 수십편의 연출작품이 있다.

유덕형[편집]

柳德馨 (1938- )

연출가. 서울 출생. 연세대 영문과와 예일 대학원을 졸업. 1969년 '제1회 연출작품 발표회'라는 특이한 경우를 통해서 데뷔한 연출가이다. 유덕형은 이 발표회에서 매우 시적이고 감각적이며 시각적 연출로 각광을 받았는데 그는 아르토 이후 그로토우스키피터, 부르크 등이 시도하는 동작 중심의 연극, 절대 연극을 도입하여, 최초로 실험한 것이다. 그 후 그는 필리핀의 제3세계 연극제에서 <알라망>을 연출하여 호평을 받았다. 이어서 <초분> <생일파티> <마의태자(麻衣太子)> 등을 연출하여 주목을 끌었다. 그리고 뉴욕의 '라마라' 극단 초청으로 미국배우들로 <초분>을 연출공연한 적도 있다. '동랑레퍼터리극단'의 대표 겸 서울예술전문학교 이사장으로서 학교경영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안민수[편집]

安民洙 (1940- )

경기도 광주 출생. 외국어대 불문과를 졸업하고 '동랑레퍼터리극단'에서 배우로 출발, <동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등에 출연하다가 하와이로 건너가 연출을 수업했다. 귀국 후 <리어왕>을 연출하여 소위 잔혹극(殘酷劇)의 예범을 보여준 그는 계속해서 <태(胎)> <보이체크> 등으로 주목을 끌었다. 유덕형과는 약간 달리 한국적 입장에서 동작 중심 연극을 수용하는 그는 <하멸태자>에서 그의 실험을 다시 보여주었다. 전통적 민속극인 판소리·탈춤 등을 현대극에 도입하는 그는 인간을 광인(狂人)으로 보고 연출각도를 맞춰 나간다.

77년도에는 <하멸태자>와 <태>를 갖고 구미 순회 공연을 하여 절찬을 받았다. 제1회 한국연극상을 수상한 그는 현재 예술전문학교 학감으로 있다.

이승규[편집]

李昇珪 (1939- )

충남 공주(公州) 출생. 중앙대학 연극영화과를 졸업하고 1965년 극단 '가교(架橋)' 창립동인으로 출발하여 십여년간 '가교'를 이끌었던 연출가이다. 동아연극상 신인연출상, 한국연극예술상 등의 수상 경력도 갖고 있는 그는 성극(聖劇)을 갖고 매년 전국 교도소를 순회공연하기도 한다. 그가 연출한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노부인의 방문> <불만의 도시> <방화범들> <실수연발> <유랑극단> <안티고네> <철부지들> <30일 간의 야유회> <시집가는 날> <아벨만의 재판> <끝없는 아리아> 등 20여편이며 기독교계통의 초청을 받아 <시집가는 날>을 가지고 동남아(4국) 순회공연도 가졌다. 또 성극을 가지고 전국 대도시에서 강습회를 가진 바 있다. 그의 연출은 매우 건실하며 정통적 수법을 추구하고 있다.

윤호진[편집]

尹浩鎭 (1948- )

연출가. 서울 출생. 홍익대학 정밀기계과 출신으로 동국대 대학원에서 연극을 수업했다. 실험극장 단원이며 1973년 <방화범>으로 데뷔한 그는 <수업> <여왕과 창녀> <두 사형집행인> 등을 연출하는 동안까지만 해도 별로 주목을 못 받다가 1976년 <그린 줄리아>로 각광을 받기 시작했고 1977년 남아공화국 작품으로서, 인종차별과 인권문제를 다룬 <아일랜드> 연출로 일약 스타덤에 오른 신예 연출가이다. 그는 이 작품으로 동아연극상의 연출상을 수상하였다. 한 작품을 가지고 매우 오랫동안 끈질기게 파고들고 있어서 젊은 연극인들 중에서도 가장 의식이 투철한 연출가로 불린다.

신극의 비평가〔개설〕[편집]

新劇-批評家〔槪說〕

한국 재래의 전통극이 조금씩 변화를 일으키기 시작한 것은 원각사(圓覺社) 시대였지만 신극의 출발은 1911년 말기부터였다. 그런데 신극이 시작되면서 동시에 연극 비평이 뒤따른 것은 아니고 약 십여 년이 지나서야 조금씩 싹트기 시작했다. 본격적인 연극 평론은 못되었고 극히 상식적인 연극론(演劇論)이 지상에 발표되었는데 1920년 5월 <동아일보(東亞日報)> 지상에 실린 윤백남(尹白南)의 <연극과 사회>라는 글 정도를 연극 비평의 효시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 전에도 연극에 관한 간단한 글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분량에 있어서나 질적인 면에서 <연극과 사회>만한 이론적인 글은 없었다. 윤백남의 글에 뒤이어 현철(玄哲)이 일본을 통해 간접으로 수용한 연극에 대한 일반론적인 글과 극평을 조금씩 쓰기 시작했고, 이는 김우진(金祐鎭)·김정진(金井鎭) 등 몇 사람에게 확대되었다. 그러나 1920년대는 우리나라 연극 비평의 초창기로서 전문적인 평론가가 없이 대체로 두서너 명의 극작가와 한두 신문기자가 인상적인 촌평에 그치는 글들을 썼었다. 그 중에는 김우진 같은 뛰어난 필자도 있었지만, 이는 오로지 그 한 사람에 그치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1930년대를 맞게 되는데, 이때부터야 겨우 연극 비평이란 분야의 중요성이 인식되어 젊은 문인들에 의해 단평이나마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이는 곧 해외문학파가 주동이 되었던 '극예술연구회(劇藝術硏究會)' 멤버들에 의한 것이었다. 극작가 유치진(柳致眞)을 비롯하여 서항석(徐恒錫)·이헌구(李軒求)·김광섭(金珖燮) 등 주로 외국문학을 전공한 문인들이 연극 평론을 담당하였다. 그러니까 본격적인 서구의 근대극이 출발함과 동시에 연극 비평도 초기 형태로서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극연(劇硏) 멤버들의 연극비평 작업도 10년을 가지 못했다. 왜냐하면 극연 멤버들의 대부분이 연극을 전문으로 하려는 사람들이 아니었던데다가 극연을 중심으로 한 신극 운동이 일제의 탄압에 의해 좌절되었기 때문이다. 단지 계속해서 연극을 한 유치진과 서항석이 연극비평을 전담하다시피 하였고 신진 극작가들이 간간히 비평활동에 참여하는 정도였다.

그리고 광복과 더불어 연극계가 좌우익(左右翼)으로 갈리면서 프롤레타리아 연극 이론이 제기되었고 이에 맞서 민족주의극 이론이 활발하게 대두되었다. 그러나 그런 연극논쟁도 불과 2, 3년 간에 걸친 것이었고, 정부 수립과 분단으로 해서 종결되었다. 6·25전쟁 이후 1950년대에는 주로 이해랑(李海浪)·이원경(李源庚) 등의 연출가와 김진수(金鎭壽)·이광래(李光來) 등 극작가, 그리고 평론을 전문으로 하는 오화섭(吳華燮)과 여석기(呂石基) 등이 연극평론을 썼었다. 그러나 연극계 자체가 침체하였던 것처럼 비평계도 쓸쓸한 것이었다. 1960년대는 50년대보다 약간 변화를 가져오는 시기였다. 평론을 전문으로 하는 여석기와 오화섭이 구미극 이론을 바탕으로 해서 본격적으로 연극 비평의 폭을 넓혀갔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전히 인상비평(印象批評)에서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1970년대에 와서는 많이 달라졌다. 새로이 연극비평을 전문으로 하는 신진들이 대거 등장함으로써, 연극계에 변화마저 일으켰던 것이다. 즉 대학에서 국문학, 영문학, 독문학 등을 전공하고 연극사, 민속학, 희곡론 등을 바탕으로 해서 본격적인 비평작업을 하는 이상일(李相日), 한상철(韓相喆), 이태주(李泰柱), 유민영(柳敏榮) 등이 70년대 초에 등장해서 각기 다른 개성을 가지고 연극평론의 지평을 확대해가고 있는 것이다.

때를 맞추어 60년대까지만 해도 연극평론을 위한 지면 제공에 인색했던 신문과 잡지들이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으며 거의 모든 월간잡지들이 연극 비평란을 두고 있을 정도이다.

70년대의 연극 붐과 때를 같이하여 이루어진 활발한 연극비평은 관객 확대에도 영향을 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연극 가이드 역할은 물론 연극 타락을 막는 제동적 장치 구실도 하고 있다.

비 평 가[편집]

오화섭[편집]

吳華燮 (1916-1979)

번역문화가·영문학자이며 연극비평가. 인천 출생. 일본 와세다 대학 문과, 동대학원을 졸업. 고려대·부산대 교수를 거쳐 연세대 교수로 재직했다. 영어 영문학회 회장, 한국 셰익스피어협회 이사 등을 역임하면서 많은 영·미 희곡을 번역하는 한편 연극비평도 썼다.

여석기[편집]

呂石基 (1922- )

경북 김천 출신. 일본 동경제대 재학중 광복을 맞아 경성대학 영문과를 졸업햇다. 소설을 전공하였으나 50년대 후반부터 연극비평을 쓰기 시작하여 6,70년 대에는 가장 많은 평론을 썼다. 특히 구미 현대극이 한국 신극에 미친 영향에 관한 연구에 중점을 두고 있는 그는 <20세기 문학론> <현대연극> <한국 연극의 현실> 등의 저서가 있다. 현재 고려대 명예교수로 재직중이다.

이두현[편집]

李杜鉉 (1924- )

연극학자·비평가. 함북 회령 출신. 서울대 사대 졸업. 미국 피바디 대학·가톨릭 대학에서 수업. 서울대 사대 교수로 재직. <한국신극사연구> <한국가면극> 등의 저서가 있으며, <산대도감극 성립에 대하여> <신라오기고> 등의 논문 등을 발표하는 한편 연극 비평을 써왔다.

이태주[편집]

李泰柱 (1934- )

연극비평가. 부산 출신. 서울대 영문과, 동 대학원 졸업. 연극 전문지 <드라마>를 통해 데뷔했다. 현재 단국대 교수로 재직중이다.

이상일[편집]

李相日 (1933- )

경남 충무 출생. 서울대 독문과 및 동 대학원 졸업. 독문학을 하다 민속학연구로 방향을 돌렸다. 70년대 초부터 연극비평을 쓰기 시작하였으며, <충격과 창조>란 저서가 있다.

한상철[편집]

韓相喆 (1935- )

서울 출신. 연세대 영문과 동 대학원 졸업. 영미 희곡 번역과 연극이론을 많이 소개했다.

유민영[편집]

柳敏榮 (1937- )

경기 용인 출신. 서울대 국문과 동대학원 졸업. 빈 대학을 졸업. <한국연극산고> <한국극단사> 등의 저서가 있다. 현재 정동극장 이사장으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