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문화·민속/한국의 연극/한국의 신극/신극의 극단활동

위키문헌 ― 우리 모두의 도서관.

신극의 극단활동〔개설〕[편집]

新劇-劇團活動〔槪說〕

한국의 신극활동은 대체로 1908년에 신연극을 표방한 '원각사'로부터 비롯된다고 본다. 이로부터 지금까지 60여년 동안 수많은 신연극·신파극·신극의 단체들이 명멸하였다. 그 이합집산의 형태도 가지가지요, 그 목적이나 공연형식도 가지가지였다. 이것을 한국 연극인의 다양하고도 왕성한 예술적 의욕이라 해야 할지, 또는 조생모사(朝生暮死)의 일시적 충동에 너무도 급급하였다고나 해야 할는지에 대해서는 보는 이에 따라서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여기서는 비교적 생명이 길었던 여러 시대의 대표적 극단만을 취급키로 한다.

<金 義 卿>

원각사와 초기 신파극[편집]

圓覺社-初期新派劇

신소설의 작가로 유명한 이인직(李人稙)이 '아국연극(我國演劇)을 개량(改良)하기 위하야' 신연극(新演劇)을 원각사에서 상연한 것은 1908년 11월 15일의 일로서 그때의 작품은 그의 신소설 <은세계(銀世界)>를 각색한 것이다. 원각사에서는 그 후 <천인봉> <수궁가(水宮歌)> 등을 발표했으나 이들은 모두가 판소리를 개량한 정도에 머물렀으며 더욱이 이인직은 연극 개량에 실제로 참여하지는 않았다고 알려져 있다. 이 때문에 한국 신극의 원조(元祖)로 알려진 이인직이나 한국신(연)극의 효시로 알려진 '원각사'에 대해서 연극사적 논의가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이인직을 설득하여 원각사를 개관(開館)한 흥행사 김상천(金相天)·박정동(朴晶東) 등이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여 구극(舊劇)인 판소리를 개량코자 했다는 사실은 이들의 연극이 성공했건 안했건 부정할 근거가 없으며 이인직 역시 김상천·박정동 등의 설득에 찬동해 작품 <은세계>를 내놓았으니 그의 실제 연극 활동을 완전히 부인할 이유는 성립하기 곤란하리라고 생각된다.

신파극의 원조(元祖)라고 스스로 일컬은 임성구(林聖九)의 '혁신단(革新團)'은 1911년 초겨울 어느날 남대문 밖의 일본인 극장 어성좌(御成座)에서 <불효천벌(不孝天罰)> 외에 1편을 가지고 첫선을 보였다. 이 첫흥행은 실패했으며, 임성구는 이듬해 구정 초를 기하여 '연흥사(延興社)'에서 <육혈포강도(六穴砲强盜)>를 공연하여 대성황을 이루고 호평을 받았다. 이어서 혁신단은 <군인의 기질> <친구의 형 살해> 등을 비롯하여 <눈물> <장한몽(長恨夢)>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신파극들을 상연하였다.

임성구는 교육을 별로 받지 못했고 집안도 가난했으나 연극에 대한 열의는 대단하여 '외국의 연극장을 모방하여 될 수 있는대로 수천명을 수용할 만한 대극장'을 짓겠다는 원대한 뜻마저 품었었으나 1921년 35세의 젊은 나이로 타계(他界)하고 말았다.

혁신단 멤버로 활약하던 김도산(陶山 金永根)과 김소랑(小浪 金顯)은 1916년과 1918년에 각각 '신극좌(新劇座)'와 '취성좌(聚星座)'를 조직했다. 신극좌는 김도산이 사망하던 1922년까지 활동하였는데 특기할 것은 초기 키노 드라마인 활극조 연쇄극(活劇調 連鎖劇)에 능했다는 사실이다. 대연쇄 대활극 <시우정(是友情)> <형사고심(刑事苦心)> <의적(義賊)> 등은 김도산 일행의 장기인 아슬아슬한 격투장면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고 한다.

한편 김소랑은 그의 처이자 당시의 명여배우 마호정(馬豪政)을 부단장격으로 거느리고 무려 13년 간이나 취성좌를 이끌어 왔다. 주요 레퍼토리는 <야성(夜<野>聲)> <진중설(陣中雪)> <불여귀(不如歸)> 등 수십 편에 이르고 있는데 배우들이 매우 숙달하였고 능란하였으며 또한 무식한 말을 쓰지 않아 좋았다고 당시의신문들은 평가하고 있다. 아마도 신파 극단 중에서는 가장 세련된 공연을 보여주었던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혁신단'과는 다른 계열로는 윤백남(尹白南)의 '문수성(文秀星)'과 이기세(李基世)의 '유일단(唯一團)'이 있다.

윤백남은 조중환(一齋 趙重桓)과 같이 극단 문수성을 조직하고 1912년 3월 29일 '원각사'에서 비극 <불여귀(不如歸)>의 첫선을 보였다. 도쿄고등상업학교 출신인 윤백남은 '임성구 일파의 치열 난잡한 연극은 … 나라의 치욕'이며, 이를 '구축하는 의미에서 속히 정도의 연극'을 하기로 공언했다. 그러나 문수성의 이러한 취지는 당시 신파극의 문예성을 더해 주는데 도움이 되었으리라는 추측은 되나, 연극의 질에 있어서는 다른 신파극과 대동소이하였던 것 같다. 윤백남은 이후 4-5년 문수성을 계속 이어 갔으나 1916년에는 이기세 등과 '예성좌(藝星座)'를, 또한 1922년엔 '민중극단(民衆劇團)'을 창립했었다.

이기세는 도쿄물리학교를 졸업하고 보성학교(普成學校) 박물교사(博物敎師)로 있었으나 뜻한 바 있어 일본으로 연극수업을 하러 갔다 한다. 2년 후 그가 돌아와 고향인 개성(開城)에서 '유일단'을 창설했는데, 이때 그의 나이는 이미 45세였다. 창립공연은 1912년 11월 3일 '개성좌(開城座)'에서의 <처(妻)>라는 번안물이었다. 그 후 <불여귀> <장한몽> 등 신파극의 명작들을 상연했다. 일본 교토파(京都派) 연극을 배워 온 이기세의 유일단 연극은 연일 대성황을 이루었고, '기예의 숙달함과 언어행동의 고상함은 가히 연극계의 모범'이라는 평을 받았다. 이기세는 예성좌를 거쳐 1920년엔 '조선문예단(朝鮮文藝團)', 1921년엔 '예술협회(藝術協會)' 등을 조직했다.

이상 열거한 것 외에도 많은 신파 극단들이 있었지만, 그 대표자만 다를 뿐, 그 공연 내용은 별다른 것이 없었다.

신파극은 군사극·탐정극·계몽극·가정비극 등 주로 소박한 멜로드라마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들이나 당시 연극인들의 포부나 목적은 권선징악·풍속개량·민지개발·진충갈력 등 사회교육적인 의식이 투철한 것이었다고 자부하고 있다.

토월회[편집]

土月會

1923년 7월 4일, 한국연극계에는 이변이 일어났다. 도쿄유학생인 박승희(朴勝喜)·김기진(金基鎭) 등이 '토월회'라는 이름으로 <길식(吉植)>(박승희 작), <곰>(체호프 작), <오로라>(쇼 작), <기갈(飢渴)>(유진 필로트 작)의 4편을 조선극장(朝鮮劇場)에서 발표했다. '대중을 깨우치려면 연극이 가장 좋은 방도'라고 하여 전해에 도쿄에서 조직된 토월회가 1923년 여름방학을 이용하여 공연을 하게 되었으니 말하자면 이들은 연극을 하나의 방편으로 하여 계몽을 목표로 삼았던 것이며, 학생 민족운동의 일환으로서의 활동을 했던 셈이다. 그러나 경제적으로 크게 실패한 이들의 첫공연이나 이를 만회하기 위한 두번째의 공연인 <부활>(톨스토이) <알트 하이델베르크>(마이어펠스터 작) <채귀(債鬼)>(스트린드베리 작) 등에서 보여준 사실적 배경과 대본이 있는 연습에 의한 젊은이들의 정열적이면서도 신선한 무대는 당시의 연극 관객을 놀라게 하였다. 윤백남·이기세 등도 이미 그러했지만 이들 일군(一群)의 참신한 도쿄 유학생들은 그 가문과 교육적 배경으로도 재래의 연극관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계몽적 학생민족운동의 일환으로서의 연극행위가 토월회 연극의 동기였던만큼, 이 두번째의 공연이 끝나자마자 연극에서 손을 떼는 동지가 많았다. 원래 연극 지망생이었던 박승희는 극단으로서의 토월회를 맡기로 했다. 그러나 현실은 박승희에게 가혹하기만 했다. 박승희가 물려받은 3백석지기의 땅은 미구에 동이 났고, 무엇보다도 이들은 연극적 이상을 실현할 만한 능력이 없었다. 상연 작품은 점점 당시의 경제 조건과 관객에 영합하지 않을 수 없었으므로 점차 신파극적 성격을 닮아갔다.

1925년 3월 박승희는 광무대(光武臺) 극장과 1년 계약을 체결, <산 셔낭당> 등의 창작극 및 <춘향전> <장화홍련전> <추풍감별곡> 등의 한국 고전, <무정> <재생> <개척자> 등의 춘원(春園)의 소설을 각색·상연했다. 사흘마다 갈아대는 작품도 문제였으려니와 관객도 매일밤 50-60명 정도밖에는 들지 않았다.

이백수(李白水)·양백명(梁白明)·서월영(徐月影)·박제행(朴齊行)·윤성묘(尹星畝)·복혜숙(卜惠淑)·석금성(石金星) 등 수많은 연기자를 길러낸 토월회는 광무대 극장의 1년 계획을 다 마치지도 못하고 지방순회 공연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으며, 1928년 10월의 <이 대감 망할 대감> 등 수편의 재기 공연과 1929년에 유명했던 <아리랑 고개> 등의 재기하기 위한 공연의 노력도 헛되이 1930년의 지방공연 이후는 침묵 속으로 들어갔다. 일부 연극사에서는 박승희가 1932년에 조직한 태양극장(太陽劇場)을 토월회의 후신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태양극장은 오히려 신극사(史)의 한 페이지를 뜻있게 장식한 토월회의 명예를 지키기 위한 뼈아픈 전신(轉身)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토월회는 창립 이후 정통 신극의 기치를 높이 들고 한국 신극사에 새로운 전환점을 마련했으나 박승희가 회고하듯이 ① 돈이 없고, ② 극장이 없고, ③ 연극인다운 연극인이 적으며,

④ 일반의 이해와 동정이 적으며, ⑤ 무엇보다도 '모든 운동의 토대가 되는 일반 민중의 생활이 일정치 않고, 또 관객층의 중심이 되는 온갖 방면의 중산계급이 가속도로 몰락하는' 원인으로 인해서 마침내 상처투성이의 영광을 안고 쓰러졌다. 시대와 사회의 갈등이 심한 중에서 일본제국의 식민지로서 신음했던 당시의 한국의 상황에 대해서 우리는 깊이 음미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조선극예술연구회[편집]

朝鮮劇藝術硏究會

1931년 7월 8일 '…극예술에 대한 일반의 이해를 넓히고, 기성 극단의 사도(邪道)에 흐름을 구제하는 동시에 나아가서는 진정한 우리 신극을 수립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극예술연구회가 발족하였다. 윤백남·홍해성(洪海星)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소위 해외문학파 멤버들인데 창립동인은 김진섭(金晋燮)·유치진(柳致眞)·이헌구(李軒求)·서항석(徐恒錫)·윤백남·이하윤(異河潤)·장기제(張起悌)·정인섭(鄭寅燮)·조희순(曺喜淳)·최정우(崔珽宇)·함대훈(咸大勳)·홍해성(洪海星) 등 12명이었다. 1932년 제1회 실험무대는 고골리의 <검찰관>(홍해성 연출)으로 '근래에 볼 수 없었던 극단(劇團)의 경이'라는 평을 받았다. 극예술연구회는 당시 인텔리청년들의 자각적이면서도 창의적인 노력의 결정(結晶)으로 손색이 없었으며, 비평, 강연, 강습회, 전시회, 학교 연극 지원, 창작극의 본격화, 영화제작(주로 경제적 이유로), 낭독녹음(같은 이유로 컬럼비아 레코드사와 계약하여), 방송극 등 할 수 있는 최대의 노력을 다해 연극활동을 계속했다. 특히 기관지 <극예술>을 다섯 번이나 출판한 것은 이론적 연구태도를 단적으로 증명한다. 1938년 4월 조선총독부의 압력으로 해산될 때까지 번역극 19편(이 중 장막극 8편), 창작극 13편(이 중 장막극 6편)을 발표했다. 중요한 작품으로는 <토막(土幕)>(유치진 작), <무기와 인간>(쇼 작, 이상 1934년), <어둠의 힘>(톨스토이 작), <촌선생(村先生)>(이광래 작), <춘향전>(유치진 작, 이상 1936년) 등이다.

해체당한 극예술협회 회원들은 서항석·유치진을 중심으로 '연극을 전문으로 하는 단체'로서의 '극연좌(劇硏座)'를 조직했다. 이미 훈련을 거친 연구생 출신 멤버와 도쿄학생예술좌(東京學生藝術座)에서 돌아온 이해랑(李海浪)·이진순(李眞淳)·김동원(金東園, 당시 金東赫) 등의 가입으로 '극연좌'는 든든한 재출발을 하였다. 그러나 '극연좌'도 1년이 채 못 가서 더욱 가혹해진 일제의 탄압으로 해산되고 말았다.

신극에 대한 새로운 면모를 토월회가 섬광처럼 비추었다면 극예술연구회와 극연좌는 당시 한국의 연극이 성취할 수 있었던 최대의 소산을 캐어냈다는 점에서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공적을 쌓았다 할 것이다.

동양극장[편집]

東洋劇場

동양극장이 개관한 것은 1935년 11월 1일인데, 이때까지 초기 신파극은 꾸준히 발전하여, 소위 개량신파라는 말까지 나돌았다. 그러나 이들을 일일이 들어 설명할 여유가 없다. 또 30년대 초에 일시 맹렬하게 일어났던 '조선프롤레타리아 예술동맹(KAPF)' 산하의 경향극(傾向劇) 운동, 20년대 초에 시작하여 30년대 중반까지 활발한 움직임을 보였던 학생극에 관해서도 언급을 보류한다.

동양극장은 '젊은 세대를 모아 신극은 못될망정 신파로는 좀 청신하고 매력적인 것을 시켜볼 목적'으로 박진 등을 맞아 배우들을 모집하였다. 12월 15일 전속극단 '청춘좌(靑春座)'는 비극 <승방비곡(僧房悲曲)>(崔獨鵑 作)을 가지고 첫선을 보였고 1936년 9월 호화선(豪華船)은 이운방(李雲芳)의 <정의의 복수>로 출발했다. 1939년 동양극장도 결손으로 주인이 바뀌었는데, 이때 '청춘좌'·'호화선'의 전성기도 끝이 나, 배우들은 뿔뿔이 '아랑(阿娘)'이니 '고협(高協)'이니 하는 또다른 극단으로 헤어졌다.

동양극장은 소위 고등신파라고 자인하기도 했지만 당시의 대중의 인기는 대단하였다. 기생을 주인공으로 한 청춘좌의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임선규 작), 호화선의 <어머니의 힘>(이서구 작)은 동양극장의 대표작이었다. 동양극장은 상업연극의 전문극장으로서 '연극의 기업화를 입증한 것'과 많은 '신인을 양성하여…극계와 영화계에서 활약하게 한 것' 등이 그 공적이라 하겠다. 그런데 당시의 지식인이나 언론계 일부에선 이들의 대중적이고 교화적인 역할에 대하여 외면한 흔적도 없지 않다. 질적인 차이는 있지만 영국이나 프랑스의 가정비극 또는 대중극에 대한 서양인의 태도와는 여러 가지로 판이한 태도가 아닐까 한다.

1937년 중간극(中間劇)을 표방한 연학년(延鶴年) 주도의 '중앙무대(中央舞臺)'가 짧은 사기나마 존재하였고, 이 밖에도 이와 유사한 단체가 있었다.

1940년대부터 광복까지의 한국연극계는 그야말로 '혼돈과 침체와 무질서한 행동의 계속'이었는데 그도 그럴 것이 일본의 신체제운동에 의한 국민연극운동의 회오리바람이 강하게 불고 있었기 때문이다. 식민정치 하에서의 이 가혹한 시련은 더 이상 한국연극의 존재를 묵인할 수 없었던 것이다.

신극협의회(신협)[편집]

新劇協議會(新協)

광복과 함께 한국연극의 새아침도 밝았다. 그러나 광복과 자유의 환호는 너무도 빨리 좌우익 싸움의 민족적 신음으로 바뀌었다. 공산주의자들이 재빨리 조선연극동맹을 조직하고, 그 휘하에 극단 '청포도'를 비롯, '혁명극장', '민중극장', '독립극장', '비우극장', '서울예술극장' 등을 결속시킨 반면, 우익진영엔 극단 '민예(民藝)'만이 외롭게 그들과 대결하고 있었다. 1946년엔 이철혁(李喆爀)·이해랑·김동원·윤방일(尹芳一) 등이 극단 '전선(全線)'을 조직해서 여기에 대항했으며, 다시 1947년에는 이해랑·김동원·박상익(朴商翊) 등이 '극예술협회'를 조직, 유치진 작 <자명고(自鳴鼓)>를 상연했다. 1950년 이 극예술협회를 중심으로 '신극협의회(약칭 신협)'가 국립극장의 전속극단으로 결성되어, 유치진 작 <원술랑>이 개관 공연으로 막을 열었다.

'모든 신파적 요소를 제거하고 진정한 사실주의 연극'을 표방한 '신협(新協)'의 역사는 6·25전쟁 중에는 국방부 정훈국과 공군본부 소속으로서 연극을 계속, 환도 후에는 국립극장과의 복속(復屬)과 주도문제 등으로, 또는 한국 영화의 전성기를 맞는 50년대 말에는 연기자를 영화에 빼앗기는 등 갖가지 난관을 겪으며 현재까지에 이르고 있다. 광복 이후의 특히 1950년 이후의 한국연극의 대표적 극단으로서 '신협'의 발자취는 현대한국연극의 공과(功過)를 아울러 짊어지고 있는 느낌이 없지 않다. 1972년 5월의 제80회 공연 <다이얼 M을 돌려라>(F. 노트 작)의 재상연 이후 이제는 노쇠한 듯한 공허감마저 주는 듯하지만, 신협의 역사가 여기서 끝난 것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들이 다룬 작가만도 셰익스피어, 조우(遭遇), 장 폴 사르트르, 몰리에르, 실러, 테네시 윌리엄스, 아서 밀러, 유진 오닐, 헨릭 입센, 소포클레스, 에드워드 올비 등 주요 외국작가를 망라하고 있으며, 국내 작가로도 유치진(그의 대부분의 작품이 신협에 의해 상연되었다)·오영진(吳泳鎭)·임희재(任熙宰)·차범석(車凡錫)·하유상(河有祥) 등 중견작가를 망라하고 있다. 50년대 후반의 제작극회(制作劇會)와 60년대에 나타난 여러 아마추어 극단과는 달리, '신협'은 직업 극단으로서의 성격을 뚜렷이 하고 있다. 레퍼토리의 성격이나 공연방식도 실험적이거나 전위적인 요소가 배제된 철저한 직업극단적 매너로 일관되어 있다.

신협의 대중적 신뢰는 우리 신극사상 유례없는 관객동원수로서 인정된다. 때때로 30년대의 '극예술 연구회'와 '극연좌', 40년대의 '현대극장'의 직선적 후계자로서 극단 '전선' '극예술협회' '신협'이 흘러왔다고 말하지만, 30년대의 '극예술연구회'가 공연 외에 수없이 많은 문화적·계몽적 사업을 망라한 종합적 연극활동을 전개한 데에 반해, '신협'은 공연 일방가도를 철저히 걸어왔다고 하겠다.

국립극단[편집]

國立劇團

한국에 있어서의 최초의 국립극단은 '신협'이며, 이때에 또 하나의 국립 극단으로서 출발한 것이 '극협(劇協, 대표 이광래)'인데, 그 첫공연은 1952년 12월 피난지인 부산 동아극장에서의 <통곡(痛哭)>(유치진 작)이었다. 그러나 전쟁 중이라 국립극장이 임시나마 폐관된 상태여서 두 극단은 부득이 독자적인 공연활동을 할 수밖에 없었다. 1953년 정부는 제2대 극장장으로 서항석을 임명, 대구의 문화극장을 인수·경영토록 했다. 이 해 2월, <야화(野花)>(윤백남 작)로 재개관한 국립극장은 1957년 6월에 환도, 시공관에 여장을 풀고, 즉시 '신협' 및 1954년 12월에 발족한 극단 '민극(民劇, 대표 이원경)' 등을 통합, 새로운 국립극단을 조직했다. 이어 <신앙과 고향>(K. 쇤헤르 작), <발착점에 선 사람들>(이무영 작), <인생차압>(오영진 작), <딸들 자유연애를 구가하다>(하유상 작), <우물>(김홍곤 작), <가족>(이용찬 작), <시라노 드베르즈라크>(모리스 로스탕 작)를 공연했다. 그러나 하나의 단체로서 근 10여년을 운영해 온 '신협'과 '민극'을 두 공연 단위체로 하는 국립극단제도를 마련하고 이듬해 9월에는 '민극' '신협'이 합동하여 김동인 원작의 <대수양(大首陽)> 공연을 가졌다. 이후 '신협'과 '민극'은 따로따로 또는 합동으로 공연, 1962년 '국립극단'으로 개편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국립극단'은 계속해서 중후하고 온건한 레퍼토리를 발표했으며, 희곡 현상모집을 통해 하유상·김홍곤·이용찬·박동화·이석정·송일남·박만규·이재현·김병원·전진호·윤조병·오태석·김용락·이일룡 등 수많은 극작가를 발견해 내었다. '국립극단'은 국가예산으로 운영되므로 경제적 애로는 적다 하겠으나 우리의 연극 현실이 가지고 있는 물적·인적 결핍을 근원적으로 해소하지 못하고 있음은 가슴아픈 일이라 하겠다.

제작극회[편집]

制作劇會

1957년 한창 국산영화의 붐이 일어나던 무렵에 연극계의 저조현상(低調現狀)이 점차 높아졌는데, 주로 30대 전반의 젊은 연극인들이 일체의 낡은 형태의 극예술과 낡은 사고방식에 사로잡힌 극예술인들을 거부한다는 강력한 기치를 들고 '제작극회'를 조직, 창립공연 <사형수>와 제2회 공연 <청춘>(막스 할베 작)을 선보였다. 김경옥·최창봉·차범석·이두현·저동화·오사량·박현숙·최상현 등 발기 동인들은 지금까지의 타성과 안일에 빠진 기성 연극계에 대항하여 순수한 연극, 이념있는 연극에의 복귀를 선언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선언에도 불구하고 초기의 공연 성과는 너무도 빈약했다. 1960년 7월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존 오즈번 작)로부터 제작극회의 능력이 과시되는가 싶더니 1961년 4월 <껍질이 깨지는 아픔 없이는>(차범석 작)으로 제1기의 활동은 끝나고 말았다. 그 후 <산여인>(김경옥 작) 외에 몇 작품이 시도되었으나 초기의 성난 기백은 더 발견할 수 없었다. '제작극회'는 표방한 정신과 목표를 향해 발전을 거듭해 갔으나 웬일인지 활동이 갑자기 중단되어 버렸다. 그래도 50년대 말의 이 극단의 활약은 60년대의 새로운 아마추어 극단의 출현을 크게 자극한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실험극장과 60년대의 극단활동[편집]

實驗劇場-60年代-劇團活動

1960년 10월 연극을 직업으로 삼으려는 갓 대학을 졸업한 청년 11명이 '실험극장'의 창립을 선언했다. 그들은 순수한 아마추어로서 장차 한국의 민족극 수립에 역군이 될 자격을 갖추기 위한 도약 준비단계로서의 결집을 표방했다. 발기위원은 고천산·김의경·배병권·서동철·양태조·유달훈·이가하·이순재·최진하·황운철(황은진)·한경완으로 1960년 11월 27일 이오네스코의 <수업(授業)>으로 창립공연을 가졌다. 기술과 경험이 부족한 1-2회 공연에 이어, 제3회 공연 <다리에서의 조망>(아서 밀러 작)은 관객에게 퍽 감명을 주었으며, 1963년 10월의 <안티고네>(장 아누이 작), 1964년 5월의 <리어왕>, 동년 4월의 <갈대의 노래>, 그리고 1965년 6-7월에 6개의 단막극 공연(토요살롱, 대한공론사 3층)을 거쳐, 동년 11월 <안도라>(막스 프리시 작)에서 겨우 자리가 잡히기 시작했다. '실험극장'은 이후 계속해서 사회의식이 강한 일련의 작품 ―― <증인>(신명순 작), <아들을 위하여>(아서 밀러 작), <무익조>(김의경 각색), <사할린스크의 하늘과 땅>(이재현 작), <유다여 닭이 울기 전에>(오태석 작), <망나니>(윤대성 작), <허생전> 등 ―― 을 발표했다. 예이츠의 말대로 예술과 대중의 관계와 역관계는 연극예술의 요체(要諦)이다. 즉 예술성이 강하면 대중과 멀어지기 쉽고, 대중과 가까워지면 예술성과 멀어지기 쉽다. 이러한 균형을 위해 '실험극장'이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50년대의 '국립극단'('신협'과 '민극')의 연극은 기술적으로는 성공을 하였지만 관객을 흔들어 주는 연극의 힘, 인간의 내적 혁명이나 인간과 사회를 깨우치고 영혼을 흔드는 연극은 아니었다.

'실험극장'의 출발은 원래 이 '연극의 근원적인 힘'을 찾아 보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실험극장의 멤버들은 텔레비전과 영화에 쫓겨 여러 번 우왕좌왕하였고, 이 때문에 이들이 이상(理想)으로 그리던 연극이 다 성취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아직 이들이 활동을 계속하고 있으므로 성패를 논하기는 시기상조일지 모른다.

1963년 극단 '산하(山河)'는 초대 대표 오화섭·차범석·임희재·하유상·이기하·조천석 등이 참여하여 보다 전문적인 극단을 만들어 보려고 했다. 창립공연은 <잉여인간>(손창섭 원작이었고, 1972년 9월의 <키부츠의 처녀>(M. 베른시타인 작)로 현재까지 많은 공연을 한 바 있는 중견단체이다.

1966년에는 '자유극장'과 극단 '광장(廣場)'이 탄생했다. '자유극장'은 이병복(李秉福)과 김정옥(金正鈺)이 창단했는데 동년 6월 <따라지의 향연>(스칼페타 작)이란 소극(笑劇)으로 첫선을 보인 이래, 주로 프랑스 계통의 희극을 레퍼토리로 즐겨 다루고 있다. 1972년 9월 <따라지의 향연>을 재상연, 27회의 공연을 기록하고 있다. 특히 '자유극장'은 '카페 테아트르'라는 다방 겸 극장을 경영하면서 '살롱 드라마'라는 한국적인 새 장르의 극을 창조하고 있다.

극단 '광장' 역시 동년 6월에 <윈저의 명랑한 아낙네들>(셰익스피어 원작)을 가지고 첫선을 보였다. 노익장(老益壯)의 연출가 이진순은 거의 혼자서 이 극단을 끌어왔다. '도쿄학생예술좌'와 '극연좌'의 멤버였던 그는 역시 그의 세대의 호흡인 양 중후하고 고전적인 작품을 많이 다뤄 왔는데 F. 베데킨트, 체호프, 뒤렌마트, 도스토예프스키 등의 외국 작가, 그리고 고동률(高東栗)·이재현 등의 작품을 비롯한 창작극 공연에도 애를 많이 썼다. '광장'의 특색은 언제나 공연이 차분하고 고르며 실험적인 무대의 형상화가 간단없이 나타나곤 하는 것이라 하겠다.

1971년 2월, 이미 <고도를 기다리며> 등을 통해 단합실험을 끝마친 극단 '산울림'이 <뷔쉬에서 일어난 일>(A. 밀러 작)을 창립공연으로 발표했다. 황운헌·김진찬·임영웅·김성옥 등의 결합으로 출범한 '산울림'은 공연 때마다 그 진지한 무대로 박수를 받았다. 1972년 3월의 <부정병동(不貞病棟)>(김용락 작)으로 5회의 공연을 가진 <산울림>은, 그 후로도 참신하고 박력있는 현대작품을 많이 보여주었다.

극단 드라마센터[편집]

劇團 Drama Center

록펠러재단의 재정적 후원과 정부로부터 대지(서울특별시 중구 예장동 소재) 후원 및 유치진 자신의 사재로 건립한 극장인데, 1963년 4월 <햄릿>(셰익스피어 원작)으로 개관했다. '신협' 멤버와 당시 20대였던 유망주들을 한데 모아, 한국 국민 전체의 축복 속에 출발한 극단(劇團) '드라마센터'(Drama Center)는 창립 공연 이후 <밤으로의 긴 여로>(유진 오닐 작), <포기와 베스>(듀보스트 헤이워 원작), <한강은 흐른다>(유치진 작), <세일즈맨의 죽음>, <로미오와 줄리엣> 등 가작(佳作)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출발할 때의 이상(理想)과는 달리 경영난에 부딪혀 이듬해 1월에는 임시 휴관을 하기에 이르렀다. 극장을 가지고 있다는 호조건이 잘 살려지지 못해 고심하던 중, 1967년 유덕형의 귀국으로 점차 활기를 띠었다. 1970년 말에 발표된 <생일파티>(H. 핀터 작), 1971년 초의 <사랑(Luv)>(M. 쉬스갈 작) 등은 유덕형의 가작으로서 많은 관객이 동원되었다. 1971년 유치진은 '레퍼토리 극장 드라마센터'라고 명명했었다. 그러나 유치진의 개관 이래의 염원인 연극 상설극장의 꿈은 아직 이뤄지지 않고 있는 것 같다. 1972년 오태석 번안·연출의 <쇠뚜기 놀이>, 미국에서 연기수업을 하고 돌아왔던 오순택(吳純澤)과 영화배우 윤정희가 출연한 <로미오와 줄리엣>은 성과는 어찌 되었든 많은 논란을 일으킨 '드라마센터' 공연이었다.

<金 義 卿>

70년대의 극단 활동[편집]

70年代-劇團活動

1970년대는 극단사에 있어 여러 가지로 중요한 시기이다. 60년대가 소위 리얼리즘을 주조로 해 온 '신협(新協)'에 반기를 들고 부조리극 등 새로운 연극을 실험하면서 다양하게 연극운동을 펼쳤던 시대였다면 70년대는 각 극단들이 제각기 성격을 굳히면서 전문화의 길로 매진하는 시대라 볼 수가 있다. 또한 60년대가 동인극장시대(同人劇場時代)를 이루는 전후(戰後) 연극의 재건기였다고 한다면, 70년대는 동인극단들이 내외의 도전을 받으면서 직업화를 향해 몸부림치는 시대이기도 하다.

종래까지 우리 극단들이 기본적 이념으로 삼아온 '민족극 수립' '시대적 사명' 등의 캐치프레이즈 같은 것은 서서히 퇴조하고 오직 극예술의 본질과 상업성을 추구해 온 것이 바로 70년대의 대체적 경향이었다. 즉 60년대에 등장한 '실험극장' '동랑레퍼토리 극단' '산하' '민중극장' '가교' '자유극장' '광장' '여인극장' 등 10여 개의 극단들은 그 동안의 활동으로 대중에 대한 그 나름의 이미지를 심고 역량을 평가받음으로서 극단의 실력에 따라 고정관객을 확보하기에까지 이른 것이다. 더욱이 70년대는 경제성장에 따른 대중의 생활수준 향상과 영화·텔레비전 드라마 등 대중예술의 저질화와 경직화, 그리고 지식인들의 고급문화에의 갈증 등이 겹쳐져서 순수무대예술 쪽으로 대중이 몰려 관객이 급증한데다가 정부의 지원정책이 효과를 거두어 연극의 붐을 이룬 것도 그러한 경향을 크게 뒷받침했다. 물론 이러한 경향은 1970년대 중반 이후의 특징적 현상이며, 초반의 사정은 다르다. 70년대 초반은 60년대와 아무런 차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7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공연장이 명동의 국립극장과 드라마센터뿐이었고, 그 중에서 드라마센터는 학교용으로 쓰여짐으로써 오직 국립극장 무대만이 극단에 봄·가을로 대여되었기 때문에 10여 개 극단이 1년에 두서너번 공연하는데 그치곤 하였다. 따라서 극히 간헐적이고 연례행사적인 연극운동이었다.

그러다가 정부의 문예진흥 5개년 계획이 발표되고 극단과 극작가에 지원금을 주어지는 한편 충무로에 연극인 회관(演劇人會館)이 설치되고 매머드 국립극장이 개관함으로써 갑자기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이러한 외적 조건에 힘입어 기존 극단들의 공연 활동도 활기를 띠었고 새로운 극단들이 속속 등장하기 시작했다.

1973년 가을의 '민예극장(民藝劇場)'을 비롯하여 '사계(四季)', '현대극장(現代劇場)', '세대(世代)', '작업(作業)' 등 20여개 극단들이 새로 등장한데다가 주로 60년대에 활동하다가 휴면상태에 있던 극단들, 이를테면 '제작극회(制作劇會)'라든가 '성좌(星座)' 등 몇몇 극단이 재기함으로써 연극계는 문자대로춘추 전국시대를 맞는 것 같았다. 거기에다가 세실극장을 위시하여 실험극장 소극장, 3·1로 창고극장, 공간소극장 등이 생겨 공연장이 확대되어 극단 활동이 더욱 활기를 띠게 하였다. 이런 때 결정적으로 연극계에 커다란 전환점을 마련한 사건이 발생했는데, 그것은 바로 1975년 9월의 <에쿠우스> 열풍이었다. 1975년 9월 '실험극장'이 소극장 개관기념공연으로 무대에 올린 피터 세퍼의 <에쿠우스>가 장장 3개월이란 연극사상 최장기 공연과 관객 확보에 성공함으로써 연극계에 큰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그 전까지만 하여도 우리나라의 연극 고정관객은 여대생으로 이루어진 만여 명 내외였다. 그러나 '실험극장'의 <에쿠우스> 공연으로 관객은 일거에 3만여명으로 확대되었고, 관객층도 대학생에서 기성층으로까지 확산되어 갔다. 분명히 <에쿠우스> 선풍은 극단운동을 활성화시키는 데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이다. 더욱이 그것이 소극장 공연이었기 때문에 소극장 운동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대극단들에게는 직업화의 길을 가도록 하는 데 하나의 기념비적인 계기를 만들어 준 것이다. 그것은 '실험극장'이 우리나라에서 대표적인 극단으로 자리를 굳히는 구실도 해주었지만, 한 극단이 소극장을 통해서는 실험적이고 진지한 연극을 하고 대중극장을 통해서는 보다 상업적인 대중연극을 하는 이원화(二元化)의 길을 걷도록 하는 방법을 제시했다고 볼 수 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1970년대의 극단 활동은 전에 없이 활발했고 여러 가지 특징적 현상을 보여 주었다. 제도상으로 보더라도 동인제와 PD 시스템이라는 것이 잠시나마 병존했고, 많은 극단들이 등장해서 상업극과 순수극으로 갈라지며, 각 극단들은 그들나름의 개성을 굳히고 있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아르또 이후 소위 잔혹극(殘酷劇)·절대연극(絶對演劇), 동작 중심의 연극을 계속 실험해가고 있는 '동랑레퍼토리극단'이라든가 한국적 연극을 줄기차게 모색하고 있는 '민예극장', 이 땅에서 처음으로 청소년극장·어린이극장을 내건 '현대극장' 등은 이색적이다. 그리고 PD 시스템을 고집하고 있는 창고극장도 특이한 존재라 할 수 있다.

<柳 敏 榮>

중앙극단의 지방도시 공연[편집]

中央劇團-地方都市公演

70년대 극단 활동의 또 하나의 특징으로 중앙극단의 지방도시공연을 들 수 있다.

역사적으로 보면, 가면극·판소리·인형극 등이 각 지방에 고루 퍼져 있었고 개화 이후의 연극도 지방공연이 서울 못지않게 성황을 이루었을 뿐 아니라 지방에서 조직된 극단이 중앙으로 진출한 경우까지도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6·25 이후 영화·텔레비전 등의 보급으로 연극은 위축되어갔고, 연극전용 극장이 없는데다가 흥행이 안 됨으로써 연극의 지방순회 공연이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을 지양하려는 여러 가지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연극의 지방부재 현상은 좀체로 사라지지 않은 것이 현실이었다. 그러나 1975, 76년에 일어난 연극 붐은 지방으로까지 파급되어져 중앙의 인기 레퍼토리가 지방에서도 크게 히트하였고 여기 힘입어서 중앙극단의 지방공연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이와 같은 중앙극단의 활발한 지방공연은 물론 다행스런 일이지만, 지방연극의 참다운 발전을 위해서는 문제점이 없는 것도 아니다. 80년대에 들어서서는 미추의 창립공연과 함께 전국지방연극제가 전북 전주에서 열려서 지방연극에 활기를 주기도 했다. 지방연극제에서 최우수상을 받은 부산예술극장의 <노인, 새되어 날다>를 위시하여 목포극협이 <갯바람> 등의 독창적인 작품들을 내놓아 나름대로 지방연극의 방향을 설정해가고 있다.

민중극장[편집]

民衆劇場

70년대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는 극단의 하나가 '민중극장'이다. 1963년 1월 '민중 속에 뛰어들어가 민중과 더불어 호흡할 수 있는 연극을 모색' 하고 '위대한 연극유산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미래의 연극을 추구'한다는 선언문을 채택하며, 발족한 민중극장은 이근삼(李根三)·김정옥(金正鈺)·양광남(梁廣南) 등 주로 중앙대 교수진이 중심이 되었던 의욕적 극단이었다. 이들은 참신한 감각을 지니고 프랑스 계통의 희극과 이근삼의 창작 희극을 주로 초기에 공연하였다. 따라서 창립공연 <달걀>(마르쏘 작)을 비롯해서 <대머리 여가수> <별장 팝니다> <도적들의 무도회> 등 초기에 무대에 올린 작품들이 하나같이 프랑스 계통의 희극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민중극장'은 초기의 의욕과는 달리 60년대 후반에 와서 침체했고 결국 해산 상태에까지 이르렀다. 그런 '민중극장'을 70년대에 와서 연출가 이효영(李孝英)·정진수(鄭鎭守) 등이 다시 일으켰다. 그것이 1974년 겨울이었다. 조셉 헬러의 <우리는 뉴해이븐을 폭격했다>를 재출발점으로 하여 75년, 76년, 77년 등 매년 눈부신 활약을 거듭하였었다. 그런데 재흥된 '민중극장'은 초기의 희극 위주의 스피드나 감각보다 좀더 진지하고 사회성을 강하게 띠어가는 경향을 보이면서 흥미있으면서도 삶의 진지성을 담은 연극, 전문적인 연극, 내적 협동작업에 의한 연극을 내걸고 용산에 아담한 소극장을 마련하여 점차 창작극에 역점을 두어 70년대 연극을 이끌어갔다.

<柳 敏 榮>

창고극장과 극단 창고극장[편집]

倉庫劇場-劇團 '倉庫劇場'창고극장은 아리나스테이지형의 특수한 소극장으로서 당초 극단 '에저또'가 설립한 것이었다. 그러다가 정신과 의사 유석진(兪碩鎭) 박사가 인수하여 1976년 4월 22일 재개관한 것이다. 연중무휴 공연을 내걸고 나선 창고극장은 주로 대관을 위주로 했다. 소위 프로듀서 시스템이란 새로운 극단운영제도도 바로 이 극장에서 나타난 것이었다. 처음에는 오태석(吳泰錫)·이윤영(李允榮) 등 신진 연출가들을 기용하여 새로운 기획을 시도했으나 여의치 않았고, 개관 1년 동안 순전히 대관 위주로 하던 방식을 바꾸고 극단 '창고극장'을 발족시키기에 이르렀다.

그러니까 대관과 자체공연이라는 이중 운영으로 바꾼 것이다. 주로 연극 경험이 적은 젊은이들로 구성된 극단 '창고극장'은 성공적인 공연이 별로 없었다. 원로 연출가 이원경(李源庚)을 대표로 한 '창고극장'은 <사당(寺黨)네> 같은 수작(秀作)도 내놓았으나 번역극은 대체로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그러나 '창고극장'은 봄·가을의 시즌공연을 깼고 새로운 극단제도인 프로듀서 시스템을 시도하였으며, 창작극 시리즈와 같은 의욕적 연극운동을 전개한 본거지였던 것만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현대극장[편집]

現代劇場

'한국 연극의 전문화·직업화·과학화를 성취하고 한국을 표현할 수 있는 연극, 세계 무대에서 어깨를 겨눌 수 있는 한국연극의 창조에 매진'한다는 선언문을 내걸고 1976년 10월에 발족한 '현대극장'은 극작가 김의경(金義卿)이 대표이다. 소위 전문연극시대의 막을 연다고 자랑하고 나선 '현대극장'은 창립 레퍼토리를 이오네스코의 <막베트>로 잡고 화려한 테이프를 끊었다. 그들은 이어서 청소년극장과 어린이극장을 계획하여 <햄릿> <잔다르크> <보물섬> 등을 공연하는 한편 상업극을 표방, 에디트 피아프의 생애를 악극화(樂劇化)한 <빠담 빠담 빠담>을 무대에 올려 흥행면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매우 정력적인 활동을 벌이는 '현대극장'은 특히 청소년의 정서순화와 연극을 통한 어린의 정서교육을 표방, 기업으로부터 협조를 얻어 내기도 하였다. 발족된 지 채 3년도 안 됐을 때 '현대극장'은 이미 비교적 젊은 신인들로 구성된 단원들을 최대한 활용하여 다양한 공연활동을 벌였다. 레퍼토리도 셰익스피어의 비극에서부터 오닐, 그리고 이오네스코의 부조리극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선정한 것이 특징이다.

<柳 敏 榮>

민예극장[편집]

民藝劇場

1973년 가을 '진정한 민족극예술을 정립하기 위하여 한국적인 연극 특성을 모색'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연출가 허규(許圭)를 대표로 최불암(崔佛岩)·박규채(朴圭彩)·오승명(吳承明)·정현(鄭鉉)·유명옥(柳明玉) 등이 멤버가 되어 발족된 극단이 '민예극장'이다. 그런데 '민예극장'은 순전히 서양연극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해 온 이제까지의 우리 극대극을 매우 회의적인 눈으로 보는 허규의 철학을 그 정신으로 삼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창립공연을 김희창(金熙昌)의 <고려인 떡쇠>로 한 것에서부터 풍기는 냄새가 매우 짙다. 이들은 주체적 입장에서 서양연극도 수용하자는 것이고 그러려면 먼저 우리가 갖고 있는 연극유산을 계발하고 현대적 안목에서 재창조 작업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민예단원들은 부단한 전통극 워크숍을 통해 탈춤, 판소리, 인형극 등을 연구하고 익히는 훈련을 하였다. 그리하여 이들은 탈춤의 연희 형식을 빌려 <서울 말뚝이>와 같은 창작탈춤을 실험공연하였고, <허생전(許生傳)>과 같은 창작 인형극도 상연하였으며, 창극(唱劇)도 다른 각도에서 무대화 하였다. 이들은 또한 마당놀이의 가능성 모색, 굿의 연극적 기본분석, 전통음악을 연극에 접합시키는 일 등을 연구 실험해 왔다. 이상과 같은 제1차적 실험의 결정체가 바로 1977년 제1회 대한민국 연극제의 대통령상 수상작 <물도리동>(허규 작·연출)이었다.

서양의 때(垢)를 벗어 버리고 우리 고유의 극술을 개발하여 진정한 한국연극을 창조해 보겠다는 '민예극장'의 미래에 기대를 걸어볼 만하나 '민예극장'은 고차적인 지점에서 동서 연극을 만나게 해야 될 것 같다.

<柳 敏 榮>

80년대의 연극활동[편집]

80年代-演劇活動

1980년대 연극계는 급변하는 시대상황 속에서 내외적으로 변화가 눈에 띄게 나타났다. 1982년 공연법 개정으로 소극장과 극단이 우후죽순격으로 증가하여 50여 개 극단들이 경쟁적으로 공연활동을 벌였지만 문제작을 별로 남기지 못한 것이 단적인 예라고 볼 수 있다. 84년 제8회 대한민국연극제에서 공연된 창작희곡들은 예년에 비해 확실히 질적인 수준향상을 보여주었는데 작가들의 역사의식이나 현실의식이 심화되었고, 대상을 관조하는 시선이 객관성을 띠고있었다. 이 밖에 청소년연극으로는 인형극이 붐을 이루었는데 봄에 처음으로 서울국제인형극제가 열렸고, 가을에는 동숭동에 인형극 상설극장인 샘터, 파랑새 극장이 개관했다. 극단 '자유극장'이 창작극 <바람부는 날에도 꽃은 피네>로 한국 극단으로는 처음으로 낭시 세계연극제와 오키나와 연극제에 참가하여 호평을 받았다. 또 이현화 작·채윤일 연출의 <영점 구일칠>이 <신의 아그네스>의 기록을 깨고 최장기 공연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한편 87년 연극계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으로 6·29선언에 따른 민주화조치 이후 이제까지 금기시되었던 인권·정치소재의 연극들이 붐을 이루었던 것을 들 수 있다. 남아공화국의 인권문제를 다룬 <아일랜드>, 공연이 규제됐던 <밤> <똥바다>가 다시 무대에 올랐고, <고추먹고 맴맴 담배먹고 맴맴>과 같은 사회현실을 고발·풍자하는 내용의 작품들이 쏟아져 나왔으며 <더러운 손> <당통의 죽음> 등의 정치성향의 연극들도 선을 보였다. 그러나 이같은 성향의 작품들은 소수를 제외하고도 대부분 정치·사회의 구조적 파악에 미흡했으며 연극적 표현이 세련되지 못했다는 지적을 받았다.

<대통령 아저씨 그게 아니어요> <오장군의 발톱>, 광주항쟁을 다룬 <금희의 오월> 등 88년 연극계는 사회·정치적 격변과 서울올림픽 개최 등에 힘입어 큰 변화를 겪었다.

올림픽문화축전의 하나인 서울국제연극제에서는 그리스의 국립극단, 프랑스의 코미디 프랑세즈, 일본의 전통 가부키극단과 브라질의 마쿠나이극단이 초청되어 세계수준급의 무대를 국내에서 감상할 수 있었으며, 우리 연극을 세계적인 시각에서 성찰해보게 하는 기회를 주었다.

90년대의 연극활동[편집]

90年代-演劇活動

월간 <한국연극>에 따르면 한국연극협회 회원 단체들인 서울 극단들이 만든 창작무대는 94편이고 지역극단들의 무대까지 합치면 120여편으로 자료를 집계할 수가 있다. 여기에 비회원단체의 공연을 합하면 서울에서만 132개 이상의 창작극무대를 찾아낼 수가 있다. 번역극무대와의 비율도 60% 이상으로 번역극보다 창작극이 수적으로 많다. 이 숫자는 민예총 산하 단체들의 민족극무대는 포함하지 않은 숫자이므로 실제의 각종 창작극무대는 훨씬 더 많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창작극이 번역극에 비해 숫적으로 약세를 보이던 7, 80년대와 비교해 본다면 이러한 양적인 증가는 우선 우리 무대의 많은 변화를 얘기해 볼 수 있는 숫자다. 이들 창작극무대를 보면 형식면에서 일반적인 연극과 뮤지컬, 마당놀이, 신파극, 악극 등으로 대분할 수가 있고 이미 발표되었던 작품의 재공연이나 장기공연과 신작 창작극으로 구별해서 볼 수가 있다. 신작과 구작의 비율을 보면 대개 75% 정도로 신작이 훨씬 우세하다.

이러한 현상은 저작권 문제가 걸림돌이 되어 외국무대에서 화제가 된 작품들의 수입이 원활하게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는 이유도 있겠지만 우리 무대, 우리 작품에 대한 연극계 전반의 욕구가 그만큼 성숙했다고 풀어볼 수도 있다. 아무튼 소수의 극작가들이 많지 않은 신작을 내놓던 시절, 연극제를 중심으로 이뤄지던 창작극무대가 형성되던 시기 ―― 이 시기는 대개 80년대 중반까지로 볼 수 있다 ―― 에 비하면 극작가나 그들의 작품들은 양도 많아졌고 작가들의 연령의 폭도 넓어졌다. 젊은 작가들의 등장이나 활동량이 많아지고 있는 현상은 주목할 만하다.

따라서 이들 작품의 경향이나 표현언어들도 다양한 연령층의 작가만큼이나 다채롭고 그 수준도 가지가지로 들쭉날쭉이 심하다. 이러한 다양화 속에서 일부이지만 언어의 비속화나 감각적인 언어에 대한 취향 등이 많이 드러나 연극의 바른말 바로하기에 대한 욕구가 부족하다는 염려를 낳게 한다. 이러한 양상은 연극의 상업화에서도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이고, 관객의 취향이 그런 데에 있다고 생각하는 데에서도 기인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작가들의 글쓰기에서 뿐만 아니라 배우들의 말하기에서도 기묘하게 일그러진 어조를 택하는 이러한 풍조는 상당히 만연된 현상으로 드러나고 있다. 좋은 연극보기를 방해하는 이러한 비틀린 현상은 관객을 설득할 수 있는 바탕을 연극 스스로가 포기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90년대 창작극무대의 특징은 이러한 부정적인 요소에서 찾기보다는 다양해지고 폭이 넓어진 좋은 희곡과 그 무대들 속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