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문화·민속/한국의 연극/한국의 신극/신극의 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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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극의 극장〔개설〕[편집]

新劇-劇場〔槪說〕

일반적으로 연극을 여러 가지 예술과 구별짓게 하는 것은 그것이 '극장의 예술'이라는 점이다. 극장은 유형·무형으로 된 일종의 집단사회로서 연극을 구성하는 여러 요소를 종합하는 장(場)이다. 연극은 문학·음악·무용 등의 종합예술이라고도 하는데 이러한 요소를 종합하는 장은 극장이다. 뿐만 아니라 근대의 극장은 조명·음향·동력·냉난방(冷暖房) 등 여러 가지 기계력을 종합적으로 이용하고 있다. 극장에서는 예술만이 아니라 정치·경제·종교·교육·도덕·과학 등 여러 가지 사회력이 집중한다. 그러므로 극장은 사회의 축도(縮圖)이다. 따라서 극장의 예술인 연극은 일반적으로 한 나라 문화의 첨단을 달린다고 할 수도 있다.

한국의 극장은 연극 자체가 오랫동안 미분화(未分化)된 상태에 있어서 극장에 있어서도 유럽제국의 경우에서처럼 특기할 만한 변천이나 발전을 보이지는 못하였다. 예컨대 우리의 전통적인 연극인 탈춤이나 산대(山臺)놀이 등의 가면극은 주로 옥외(屋外)에서 공연되었기에 극장이란 것을 가질 필요가 없었고, 이러한 경우로 연극이 '극장의 예술'이라는 관념에 관한한 우리로서는 다소 그 궤를 달리했다고 할 수 있다.

전문적인 실내극장이 본격적으로 사용된 것은 1902년에 '협률사(協律社)'가 최초의 영업적 극장으로 등장하였을 때부터이다. 그 후 1908년에 '원각사(圓覺社)'를 거쳐 새로운 연극(신파 및 신극)이 발전됨에 따라 유럽식 극장인 프로시니엄 무대의 출현을 보게 되었다.

연극의 새로운 흐름과 함께 세워진 이 극장들은 처음에는 연극의 공연을 위주로 하였으나 후에는 영화의 보급과 더불어 영화관으로 바뀐 것이 많았고 그 후부터는 영화관의 건립이 압도적으로 되었다.

8·15광복 전의 전문적인 연극극장으로는 '동양극장(東洋劇場)' 하나밖에 없었다. 후에 국립극장이 되었고, 또 바뀌어 국회의사당이 된 구 부민관(舊府民館), 전 국립극장·예술극장이었던 구 명치좌(明治座)는 당시의 대표적인 극장이자 영화관이었다.

광복 후 국내외 영화의 수요가 급격히 증가함에 따라 신축되는 영화관의 수도 대폭적으로 늘어났고 객석과 로비 등의 내부설비와 외관이 크게 현대화되었다. 그러나 연극 전용극장은 구 명치좌를 인수한 시공관을 국립극장과 병용하여 오다가 국립극장으로 전용한 것이 유일의 것이었으며, 1962년 설립된 드라마 센터의 출현으로 새로운 연극 극장의 형식을 선보였으나 연극 전용극장의 부족은 연극 침체의 한 원인이 되어 왔다.

중앙국립극장[편집]

中央國立劇場 우리나라의 연극문화 및 전통문화를 계승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국가의 재정원조로 창설, 운영되는 연극조직. 1949년 1월 '국립극장 설치령'이 공포되고 1950년 4월 30일 당시의 서울 부민관(府民館:전 국회의사당)을 이용해서 국립극장을 창설·개장(開場)했었다가 6·25전쟁 후에는 구 명치좌(舊明治座)를 사용하게 되었던 것이나 실연극장(實演劇場)으로서의 기능을 거의 갖추지 못한 점을 감안, 새로이 서울 장충단(奬忠檀)에 종합민족문화센터의 하나로 현대식 국립극장을 건축, 1973년 10월 17일 개관했다. 이 중앙국립극장의 부지(敷地)는 13,500평으로 건평은 지하 1층, 지상 4층, 도합 5000평이다. 신축된 극장은 대극장과 소극장이 있어 대극장인 경우 일반석 1,500석, 귀빈석 130석, 소극장은 일반석 300석이다. 무대의 넓이는 400평이며 무대는 회전무대이자 이동무대로 승강(昇降)이 가능하다. 무대는 또한 1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오케스트라 피트(orchestra pit)가 있다. 그 외의 시설로는 최신식 자동조정 조명장치가 있고 기타 중앙공급식 냉난방시설, TV중계장치, 분장실, 의상실, 장치실, 연습실이 완비되었다. 국립극장은 그 설립 취지상 순수무대예술만을 사업대상으로 한다. 그 대상은 전통예술로서 국극(國劇)·국악연주·고전무용·가면극·인형극·민속놀이를 대상으로 하고, 근대 예술로는 연극·오페라·발레·심포니 연주 등이 대상이다. 이 극장은 그 사업을 자체 공연, 대관사업(貸館事業), 시상제도의 실시, 연극연기자와 전통 예술계승자의 양성사업, 무대 예술에 관한 조사연구 사업, 무대 예술의 보급 및 선전과 국제 문화 교류사업 등으로 정했다. 전속단체로는 '국립극단' '국립국극단' '국립오페라단' '국립무용단'이 있다.

드라마센터[편집]

Drama Center

한국연극연구소 소속 극장. 한국연극연구소는 1962년 유치진(柳致眞)에 의해 창립되었고 그 연구소는 드라마센터에 위치하고 있다. 한국연극연구소에는 연구소 이외에 드라마센터(극장), 서울연극학교, 드라마센터 도서관과 2개의 강당이 있다. 드라마센터의 무대는 주무대(主舞臺)와 측면무대(側面舞臺), 그리고 통로무대와 오케스트라 피트 등으로 구성되었다. 주무대는 전무대(前舞臺)와 후무대로 나뉘어져 있고 측면무대는 주무대의 양쪽에 계단으로 주무대와 연결되어 있으며 통로무대는 관객석을 세로로 지나간다. 통로무대와 전무대는 교량무대로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오케스트라 피트는 관객석 뒤에 반원형으로 구성되었으며 관객들의 휴식처로도 쓰인다. 주무대와 측면무대는 중세의 동시무대를 모방한 것이고, 전무대는 엘리자베스 왕조 시대 극장의 특징이었던 에이프런(apron)을 모방한 것이며, 후무대는 '사진틀 무대'이다.

또 교량무대는 가부키(歌舞伎)무대의 '하나 미치(花道)'에서 따온 것이다. 관객석은 그리스 고전극에서의 야외극장 형태인데 483석이다. 배우들의 등장과 퇴장을 위한 갱로(坑路)는 전무대에서 관객석 아래로 위치하여 특기할 만하다. 이 갱로의 장점은 배우들의 연기를 관객에게 접근시켜 영화의 클로즈업 수법과 같이 박력과 공감을 자아내게 하는 한편, 배우의 호흡을 관중의 호흡 속에서 나오도록 하는 데에 있다.

세종문화회관[편집]

世宗文化會館

서울특별시가 건설한 동양 최대의 종합예술전당. 대지 5,611평에 연건평 16,100평인 매머드 건물로, 4,200석의 객석, 500명이 동시 출연할 수 있는 500여평의 무대를 가진 대강당을 비롯해서 소강당·대회의장·소회의장·사무실·연회장·전시장 등과 부속시설로 구성되어 있다. 객석수에 있어 세계 제일일 뿐 아니라 세계 5대 파이프오르간의 하나라는 5억짜리 파이프오르간, 회전과 수평·수직 이동이 자유자재인 무대, 컴퓨터로 조정되는 조명장치, 장내 어느 곳이나 고르게 들리는 105세트로 된 스피커 장치 등 최신 설비를 갖춘 세계 유수의 회관이다. 1978년 4월 14일 개관한 뒤 4월 21일부터 7월 8일까지 세계 16개국의 41개 예술단체를 초청, 대대적인 개관 기념예술제전을 가졌는데, 중요한 것만 들어도 번스타인 지휘의 뉴욕 필하모니, 유진 오만디 지휘의 필라델피아, 자발리시 지휘의 일본 NHK 교향악단, 이탈리아 팔마 오페라단의 <아이다>, 오스트리아 오페라의 희가극 <박쥐>, 영국 로열발레단, 터키의 민속무용, 중국의 경극(京劇), 국내외 톱 클래스 솔리스트들의 연주회 등 사상 최대 예술행사였다.

연극의 무대로서는 4,200석의 대강당은 너무나 큰 감이 있으며 530석 규모의 소강당은 알맞을 것 같다. 어쨌든 장충동의 국립극장과 쌍벽을 이루면서 이 땅의 연극문화를 위한 귀중한 무대가 되어 왔다.

소극장과 소극장운동[편집]

小劇場-小劇場運動

소극장운동은 19세기 말 이래의 연극혁신운동의 하나로, 상업극장이나 궁정극장으로부터 연극을 해방하기 위한 운동이다. 극장도 창고 등을 개조하여 100명 정도가 수용될 수 있는 건물이면 족하고, 필요에 따라 홀이나 교회당을 빌려 쓰는 무형극장이라도 좋다. 이러한 소극장운동은 일반적으로 도시의 중산층 관객을 위한 주말예술 형식을 띠며, 관객의 저변을 확대하기 위해 관객을 찾아 나선다는 특징을 가진다. 신극사상(新劇史上) 본격적인 소극장운동의 시발은 1969년 4월, 자유극장 대표 이병복(李秉福)이 설립한 카페 테아트르(Cafe Theatre)가 문을 열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카페 테아트르는 1975년 11월 운영난으로 문을 닫았다.

그 후로 몇 개의 소극장이 나타났다가 사라졌으나 1977년 현재 국립극장 소극장과 드라마 센터를 제외하고도 연극인회관(1974 개관), 세실소극장(1976 개관), 창고극장(1976 개관), 실험극장 소극장(1975 개관), 민예소극장(1976 개관), 에저또포켓극장(1976 개관), 세실연극실험실(1976 개관), 중앙소극장(1975 개관)의 8개의 소극장이 개관하였다. 80년대에도 여전히 소극장을 중심으로 공연활동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소극장운동이 해를 거듭할수록 당초의 취지에서 벗어나 연극의 왜소화와 상업적 연극의 양산을 초래, 연극발전의 저해요소로 작용하고 있으므로 소극장운동의 득과 실을 평가해 볼 때가 되었다는 자성이 일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