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문화·민속/한국의 연극/한국의 신극/신극의 희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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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극의 희곡〔개설〕[편집]

新劇-戱曲〔槪說〕

희곡에는 무대에서 상연되는 극의 주제와 전체의 구조, 극의 양식 등이 나타나 있고 거기에서 등장인물의 성격과 인물 상호간의 관계, 인물들의 극 전체에서의 위치와 비중, 그것을 둘러싼 생활환경에 이르기까지가 설정되어 있다. 등장인물들은 작자의 지정에 따라 서로 만나면서 행동하고 생활하고 사건을 일으키며, 그것을 전개하고 종결시키고 관객의 마음에 하나의 감명을 주는 것이다. 희곡이란 한마디로 말하자면 '어떤 사람이 어떤 강렬한 욕망을 갖고 이를 충족시키기 위해 갈등·투쟁하는 모습을 관객에게 보일 목적으로 대사와 지문으로 써서 기록한 이야기'라고 규정할 수 있다. 희곡은 연극의 중핵(中核)이며, 기초구조이고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더구나 희곡에는 소설에 있어서와 같은 지문(地文:direction)이란 것이 없다. 작자는 결코 무대에 얼굴을 내놓지 않는다. 희곡에 전개되어 있는 사건과 행동에 대하여 작자가 의견을 덧붙이거나 보충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등장인물들이 나누는 대사(세리프)와 약간의 지문만으로 씌어져 있다. 희곡이란 그러한 까다로운 형식의 문학인 것이다.

대사와 지문[편집]

臺辭-地文

하나의 희곡을 들어 보기로 하자, 먼저 처음에 간단한 무대의 상황을 설명하는 문장(stage direction)이 있고 그 다음엔 바로 대사(세리프)가 시작된다. 지문이 있으며 대화는 그대로 계속된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희곡을 읽어가는 사이에 거기에서 지금 어떤 사건이 일어나고 있는가, 그 사건의 추이(推移)는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대사를 말하는 사람의 인품·나이·직업·버릇 등도 알 수 있고, 상대 인물과의 관계와 그것을 말하고 있을 때의 희로애락의 심리상태까지도 눈 앞에 떠오르는 것이다.

극작가는 일상생활에서 쓰여지는 평범한 언어를 소재로 하여 그것을 선택하고 정리하고 갈고 닦아서,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은 희곡의 대사로 만드는 것이다. 이렇게 표현하면 무엇인가 잘랐다가 폈다가 하는 기계적인 공작과 같이 들리겠지만 인간의 대화는 그 하나하나가 감정에 의하여 배접(背接)되어 있는 것이며, 희곡의 대사도 그 속에 어떤 감정이 리듬을 이루어 유동(流動)함과 같이, 즉 '갑의 대사가 을의 대사에 의하여 생겨나고 심리적 비약에 따른 언어의 암시적 효과가 극히 세밀하게 계산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관객은 그 언어에 매료되어 그 리듬을 타고 극적 상황에 동화되는 것이다.

인간의 움직임은 물론 대화만은 아니다. 걷는다든가, 악수를 한다든가, 서로 껴안는다든가, 친다든가, 웃는다든가, 운다든가 등 갖가지 동작을 한다. 희곡 가운데서도 그것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나 행동에 따른 인물의 아주 사소한 소리를 눈감아주지 않는다면 대부분은 대사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지문에 의하여 서술되는 부분은 어느 쪽이냐 하면 보족적(補足的)인 것이다.

배우는 종종 '지문은 방해물이다'라고 한다. 대사를 읽으면 전체적인 연결속에서 인물의 이미지는 충분히 파악할 수 있기 대문에 무리하게 지문에 의하여 자신의 상상력을 한정시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실 그럴 것이다. 그러나 희곡은 그와 같은 상상력이 풍부하고 뛰어나게 훌륭한 배우를 위해서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일반 독자의 편의를 생각한다면 최소한의 지문은 필요할 것이다.

희곡을 형식면에서 분석하면 대사(臺辭)와 지문으로 나뉜다는 것은 전술한 바 그대로이다. 다시 대화(또는 대사라고 해도 좋다)를 형식면에서 분류해 보면 다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즉 대화(dialogue), 독백(monologue), 그리고 방백(aside)이 그것이다. 일상생활에서 사람은 자주 혼잣말을 할 때가 있다. 희곡에서도 독백이 있다. 그것을 확장하여 속마음을 말하는 수단으로 독백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이것은 TV 드라마 등에서도 빈번히 사용되고 있다.

무대에 인물이 한 사람밖에 등장하지 않는 독백극(mono­drama)이란 것이 있다. 체호프의 <담배의 해독에 대하여>는 유명한 독백극의 하나이며, 소극장 운동의 일환으로 공연된 <롤러 스케이트를 타는 오뚝이>와 <육교 위의 유모차> 등도 그것이다. 여기에서는 소위 대화라는 것은 없다. 독백의 연속이다. 그러나 관객을 향하여 말하는 단순한 독백은 아니다. 그 가운데서 자기 자신을 말하고 타인을 말하고, 또 눈에 보이지 않는 상대에게 말을 걸기도 한다. 그런 것들을 통하여 인간관계와 과거에 있었던 사건, 지금 여기서 진행되는 극적 상황이 구체적으로 형상화되어 드라마로서 묘사되는 것이다.

또 희곡 등에 자주 쓰여지는 수단으로, 무대 위의 다른 인물에게는 들리지 않는, 관객에 직접

말을 거는 방백이란 것이 있다. 그것은 사용방법에 따라서는 매우 효과적일 수도 있다.

방백의 효과를 최대한으로 이용한 실험적인 작품에 유진 오닐의 <기묘한 막간극>이란 것이 있다. 이 작품은 심층심리를 취급한 것이지만, 등장인물들에게 표면적 회화와 심층의 심리로부터 나오는 방백의 이중의 대화를 사용하여 특수한 효과를 거두고 있다.

독백과 방백은 근대극 이래 부자연스런 것이라 하여 한때 배척되었으나 연극 중에서의 자연스러움이란 무엇인가라는 것을 다시 한번 생각한다면, 반드시 절대로 배제해야만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등장인물[편집]

登場人物(Character)

일반적으로 희곡에 등장하는 인물은 몇 사람 또는 몇 십명이다.

셰익스피어극에서는 언제나 몇 십명이 등장하지만 라신과 입센의 연극에서는 등장인물이 겨우 5-6명이다. 작품이 다루고 있는 제재(題材)와 그것을 표현하는 수법에 의하여 달라진 것이다. 더욱이 셰익스피어에 있어서도 정말 극을 추진시키고 있는 것은 등장인물 가운데 몇 사람의 주요 인물이라고 할 것이다.

이들 인물들은 서로 사랑하고 미워하고, 서로 함께 활동하고 반발하며, 화해하고 투쟁함으로써 이야기를 전개하여 가는 것이나, 또 그렇게 하면서 각각 자기자신(성장 과정, 성격, 사상, 성벽)을 표현하여 갈 수밖에 없지만,무대 위에서 표현되는 한 사람의 언어와 행동에는 한계가 있다. 희곡의 인물은 특징이 두드러지고 성격이 분명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고금의 명작을 보면 로미오라든가, 햄릿이라든가, 아르파공이라든가, 노라라든가 언제나 그 시대에 살고 있었으리라고 생각되는 개성적인 인물로서 그 이미지가 분명히 부각되는 것이다.

이러한 전형적인 인물은 작자의 예리한 관찰과 면밀한 검토에 의하여 일상 접촉하는 인물들 가운데서 사회적 환경에 조응(照應)시키고 시대의 전형으로서 가공되어 창출되는 것이다. 전형적 인물과는 다른 의미의 유형적(類型的) 인물이란 것이 있다. 신극의 초기 단계에 전형성의 문제가 그릇 이해되어, 극의 등장인물들이 도덕적 입장에서 선인과 악인으로 구별되는 것이 그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상업적 멜로드라마에서 특히 심하여, 미모의 가련하고 선의에 찬 주인공이 탐욕적이고 사악하며 피도 눈물도 없는 악당에게 고통 당하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관객의 눈물을 쥐어짜는 것이다. 프롤레타리아 연극의 초기에도 약간은 이와 흡사한 경향이 있었다. 즉 자본가와 노동자의 대립, 모순이 유형적인 인물들에 의하여 유형적으로 처리된 것이 그것이다. 객관적 모순과 갈등이 하등의 내적 고민과 갈등 없이 주관적이고도 도식적(圖式的)으로 묘사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각각 장점도 결점도 가진 복잡하고 더구나 개성적인 존재이다. 그리고 그가 위치한 입장에 따라 그 복잡함 또한 그대로 그를 둘러싼 여러 조건과 작용하고 반작용하며 주위에 영향을 줌과 함께 그 자신도 영향을 받아 변화해 가는 그런 존재인 것이다. 희곡의 인물도 그런 복잡한 모습으로 그리고 변화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면 안 된다. 희곡의 인물은 결코 유형적이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희곡의 제약[편집]

戱曲-制約

예술은 일반적으로 제약에 의하여 성립한다고 한다. 시조는 그 자수(字數)가 엄격히 제한된 단시형(短詩型)이지만 명작으로 일컬어지는 작품은 그 제약을 지키면서 매력이 넘치는 것이다. 희곡에도 여러 가지 제약이 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지문(묘사를 위한 서술식 문장)이 없다는 것도 그 하나이지만 또 하나는 희곡은 무대에 상연되어 기능을 다한다는 조건에서 시간적·공간적 기타 제약을 받는 것이다.

⑴ 시간적 제약(unit of time)-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하루저녁의 상연시간에 제한이 있다는 것, 더욱이 막이 열려 있는 사이에는 연극의 상연시간이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의 의미는 이야기의 내용이 너무 장기간 계속되거나, 때때로 단절되거나 하는 것은 인상을 산만하게 하기 때문에 피해야 한다는 것이다.

⑵ 공간적 제약(unit of place)-장면을 무사히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고 또 객석과 무대와의 거리가 일정하다는 것 등이다. 무대 기구의 발달에 의하여 전환은 어느 정도 용이하고 원활하게 행해지게 되었지만, 그래도 관객의 주의를 집중시키기 위하여서는 가능한 한 장면을 집약시켜야 할 것이다.

프랑스 고전극 등에서는 극히 엄격한 '3일치의 법칙'이란 것이 있었다. 시간은 1주야(一晝夜)에 일어난 사건, 장소는 서막(序幕)에서 종막(終幕)까지 동일 장면, 구성(Plot)은 간결하고 수미일관(首尾一貫)할 것 등이 그것이다. 셰익스피어의 발랄한 극작술은 이 '3일치의 법칙'에 대한 도전이었다고 한다. 셰익스피어의 발랄함은 하나의 매력이다. '3일치의 법칙'이 갖는 집약의미에도 버리고 싶은 것이 있다. 근대극 이후는 말하자면 이 두 개의 매력(서로 대립되는 연극 미학) 사이를 시계추와 같이 왕복하면서 새로운 극작술을 모색하여 왔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아서 밀러의 <세일즈맨의 죽음>은 대담한 시험이었으며 더구나 성공한 하나의 예이다. 무대는 로만가(家)의 거실과 이층과 정원이라는 하나의 동시무대이다. 시간은 전날 저녁 주인공 윌리가 세일즈의 여행에서 귀가한 때부터 시작하여, 다음날 하루 종일 그리고 그날 밤 윌리가 자살하기까지이다. 여기까지는 3일치의 법칙이 지켜지고 있다. 그러나 극이 진행됨에 따라 때때로 과거가 삽입된다. 또 장면도 사장실, 여행 중 묵었던 호텔, 레스토랑 등의 장면이 도구와 조명의 간단한 변화로 삽입되는 것이다.

입센에서의 과거는 오로지 등장인물들 사이의 대사로만 알 수 있지만, <세일즈맨의 죽음>에서는 로만가 사람들의 십수년에 걸친 역사가 같은 배우의 등장에 의하여 무대 위에 펼쳐지는 것이다. 이는 영화나 라디오 드라마 수법의 도입이라고 말하여지지만 극작술상의 큰 발견이라고도 할 것이다. 이러한 3일치의 법칙에 대한 의식적 파괴는 현대로 들어와서 독일에서 시도된 '서사극(敍事劇)'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결과로 볼 수 있으며, 이는 1930년대의 미국 극작가 손턴 와일더, 엘머 라이스 등에서 특히 현저한 바 있다.

희곡의 구조[편집]

戱曲-構造

희곡은 몇 사람인가의 등장인물들의 행동과 말에 의하여 앞서 말한 바와 같은 갖가지 제약과 싸우면서 어떤 이야기를 전개하여 갈 뿐이나, 그것을 어떻게 전개하여 가는가가 바로 구조이다. 극작가의 입장에서 말한다면 구성이란 것이 될 것이다. 어떤 인물을 어디에서 등장시킬 것인가, 어디에서 퇴장시킬 것인가, 어떤 이야기를 어디에서 시킬 것인가, 복선(伏線)의 비밀을 어디에서 밝힐 것인가, 또 어떤 곳에서는 담담하게 말하고 어떤 곳에서는 격돌하고, 어떤 곳에서는 환희에 춤추고, 어떤 곳에서는 비탄에 빠진다. 이들 모두가 구성의 문제이다.

또 이야기에는 시초가 있고 중반이 있고 종결이 있지만 그것을 한편의 희곡에 어떻게 짜넣을 것인가, 이야기를 어디서 끝마칠 것인가 하는 것도 구성의 문제이다.

원래 문장법에는 '기승전결(起承轉結)'이란 말이 전해져 왔다. 이것은 희곡에도 적용되는 것이다. '기'는 이야기의 발단이며, '승'은 전개이고 그것이 더욱 높아져서 정점에 도달하여 반전되고, 그리고 종결로 된다.

프라이타크(Gustav Freytag)의 <극작법>에서 말하는 5부 3점이란 것도 동일한 의미이다. 5부란 소개·개점·절정·몰락·결말을 이른다.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도입부(exposition), 전개(complication), 위기(crisis), 절정(climax), 대단원(denouement)의 다섯 단계로 나누어진다.

이런 구성법을 취하면 극적 긴장은 대개 피라미드형(形)의 3각형으로 된다. 발단으로부터 서서히 고양되고(극적 긴장감이 높아지고), 정점에 도달하여 그로부터 하강해서 종말에 이른다는 구조이다. 이 구성법이 가장 안정된 구성이기 때문에 관객이 받아들이기 쉬운 형태일 것이다. 그러나 안정만이 좋은 것은 아니며, 오히려 불안정의 매력을 노리는 경우에 구성형태는 변해야 된다. 근대극 이후에는 3각형의 후반부는 급격한 몰락형으로 되어 있는 작품이 많으며, 어떤 경우에는 도중에서 딱 잘라진 형으로 된 작품도 있다.

이렇듯 희곡의 구성을 5개의 과정으로 나누는 것이 상식화되어 있지만 희곡이나 연극이 꼭 5분법 구성에 의해 지배받는 것은 아니며, 필요에 따라서는 종결부분이 서두에 오는 경우도 있다. 또 단막극 형식은 그 전체적 길이와 시간이 짧기 때문에 반드시 이 다섯 단계가 다 포함되는 것은 아니다. 내용이나 형식에 따라 어느 부분이 없거나 제한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장막극(長幕劇)의 경우는 현대사회가 복잡하고 모순에 차 있기 때문에 그것을 재현한 희곡도 또한 당연히 복잡한 구성이 되지 않을 수 없다.

막과 장[편집]

幕-場

셰익스피어는 이야기를 그 발단에서 종결까지를 사건 경과의 순서에 따라 몇 막, 몇 십장이라는 장면으로 배분하여 묘사하였다. 입센은 이야기의 종말에 가까운 곳에서 막을 열어, 이야기의 그때까지의 경과는 현실에서 진행되고 있는 드라마 중에서 서서히 밝혀지고 그것에 현실의 극적 긴장을 높이도록 작용하여, 절정(climax), 파국(catastrophe)으로 진행되어 가도록 희곡을 구성하였다. 때문에 입센에서는 장면은 적고(<인형의 집>은 3막, <갈매기>는 5막), 더욱이 각 막도 동일한 장면이든가 또는 그 속의 장면이 다른 것, 예를 들면 ○×○이라든가, ○×○○와 같은 배열로 무대의 톤을 조정하고 있는 것이다.

앞의 방법을 외연적(外延的)·전개적 수법이라고 본다면, 뒤의 것은 구심적·집약적 수법이라 할 수 있다. 뒤의 수법은 인생을 응축된 단면에서 본다는 방법이고, 앞의 것은 인생을 전체로 다이내믹하게 보이는 방법이다.

물론 장면의 수가 많다고 연극이 다이내믹하게 된다는 것은 아니다. 스트린드베리의 <다마스커스까지>는 십 수 장면을 표시하는 막을 하나하나 벗겨 가고, 또 하나하나 원래대로 되돌리는 방법으로 장면은 빠른 템포로서 변해가는 것이지만, 거기에서 공연되는 드라마는 인간 영혼의 불안이라든가, 영겁회귀적인 허무감인 것이다. 이와는 전혀 대조적 형식의 연극으로 우리의 전통극이 있다.

우리의 전통극은 엘리자베스 왕조 연극 양식은 물론이고 근대극 이후 어떤 서구의 연극 형식과도 확연히 구별되는 형식적 특성을 가진다. 가장 뚜렷한 형식적 차이는 우선 서구 연극이 현실의 모사(模寫)적 환상(illusion)을 창출하기 위하여 특수한 연극 무대형식을 발전시켜 왔으나, 우리의 전통극은 특별한 양식이 필요없는 마당극 형식이라는 데에 있다. 서구 연극의 경우에도 원형무대가 없는 것은 아니나, 우리의 마당극과는 그 연극 미학적 특성이 전혀 별개의 것이다. 서구 연극의 경우 비록 원형무대형식이라 하더라도 일상적 현실을 무대 위에 모사적으로 형상화하여, 관객으로 하여금 환상에 빠져들게 (즉 感情移入:illu­sion)함으로써 무대와 객석이 분리된다는 그 본질에 있어서는 프로시니엄아치 무대형식과 차이가 없는 것이다. 이에 반하여 우리의 마당극의 경우는 첫째, 공연 장소가 제한을 받지 않으며 임의로 점령된 공간 이상의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둘째, 공연된 연극적 상황은 현실의 일상성을 모사적으로 재현한 것이 아니라, 현실의 핵심적 모순들을 의도적으로 재구성한 것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관객은 극적 현실에 동화되는 것이 아니라 극적 현실을 비판하게 되는 것이다. 현실을 모사하는 것이 아니라는 내용상의 차이와 마당극 형식이라는 외형적 차이에서 우리의 전통극에는 막과 장이라는 개념이 없다. 막이 시간의 비약과 장소의 차이를 표현하기 위하여 무대장치를 바꿀 필요에서 생긴 것이라면, 특별한 무대장치가 필요없이 대사 한마디로 극적 시간이나 공간이 변할 수 있는 마당극에서는 막과 장이란 개념이 애당초 필요없는 것이다.

주제[편집]

主題 (theme)

몇 사람의 인물이 등장하여 매력있는 대화를 나누고 행동하면서 하나의 이야기를 교묘한 극작술에 의하여 묘사하고 있다고 하자. 웃고 울며, 기대에 숨을 죽이게 되고, 무대상의 인물과 함께 손에 땀을 쥐면서 관객의 전신경은 무대에 쏠리게 된다.

그리고 보고 난 후 큰 감명을 받는다. 또는 때때로 그 감명이 뜻밖에 적고, 이 연극은 무엇을 노리고 관객에게 무엇을 호소하고자 하는가를 알 수 없는 경우도 있다.

그것은 주제가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주제란 그 작품의 모든 세부의 효과를 하나의 방향을 향하여 결합시키는 '붉은 실'과 같은 것이다.

셰익스피어는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봉건적 도덕에 도전하는 사랑을 묘사하였다. 입센은 <인형의 집>에서 남성이 만들어 놓은 갖가지 사회적 질곡으로부터의 여성해방을 묘사하였다. 아서 밀러는 <세일즈맨의 죽음>에서 미국 자본주의 사회에 있어서의 인간성의 왜곡과 파괴를 묘사하였다. 이들 작가들은 그것을 인간에 대한 한없는 애정과 비인간적인 것에의 심한 노여움으로 압축하여 묘사한 것이다.

즉 '붉은 실'이란 작자의 통찰이며, 현실과 대결하는 자세이고, 극작술의 기저(基底)에 있는 어떤 사상, 즉 인생관·세계관이라 해도 좋다. 작자의 그 시점(視點)으로 모든 세부가 명확해지고, 연계되고, 조립되어, 비로소 주제는 작품 전체에 일관되어서, 보는 자에게 확고한 감명을 주는 것이다.신극은 사회의 진실과 대면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모순이야말로 사회 발전의 원동력이고 사회는 변동하는 것, 역사적 법칙에 따라 발전하고 전화(轉化)하는 것이라는 인식에 입각하여 창작하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뜻있는 신극인은 그 신념에 입각하여 창작활동에 참가하고 있다. 이와 같은 연극은 주제가 명확하지 않으면 안 되고, 따라서 작자의 사상이 확고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