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문화·민속/한국의 연극/한국의 신극/신극의 연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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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극의 연출〔개설〕[편집]

新劇-演出〔槪說〕

독일어 사전을 찾아보면 연출이란 프랑스어에서 전화된 말로서 무대 감독이라고 번역되어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무대감독이란 영어의 'stage manager'(또는 stage director)의 직역으로 무대 공작원(舞臺工作員)의 통솔자, 상연 당일의 무대진행 감독자를 의미한다. 연출이란 신극 초기 일본의 오사나이(小山內薰)를 번역·창안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중국에서는 도연(導演)이라 쓰고 있다.

연출이란 한 연극의 예술적 기획자, 사상적 통일자, 기술적 통괄자의 일을 의미한다. 한마디로 말하면 극작가가 제출한 희곡을 받아서, 이것을 배우의 육체를 통하여 무대예술로 만드는 일이다.

연출자는 반드시 극작가일 필요는 없다. 그러나 극작가가 탐구하였던 같은 길을 탐구할 필요가 있다. 동시에 만일 모든 텍스트 레지스터, 대본의 수정을 가하는 경우에는 두뇌상의 조작만으로는 안 되며, 그 희곡의 문체를 손상함이 없이 생동하게 만드는 기술을 익히지 않으면 안 된다. 나무에 대를 접목시킨 것 같은 텍스트 레지스터만큼 관객을 혼란시키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또 연출자가 반드시 이론가일 필요는 없으나 자신의 연출체계를 해명시킬 뿐 아니라 희곡의 논리적 흐름(action)을 명확히 표현하고 극작가의 사상을 생기에 찬, 그 시대에 있어서의 산물로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질 필요가 있다. 다시 그 극작가에게 그와 같은 사고를 갖게 하고, 그 극작가의 사고방식에 입각하여 도출된 희곡의 사상이 어떠한 것인가를 이해하고, 또 그와 같은 작자와 희곡의 사상을 낳게 한, 그 작품이 태어난 사회적·역사적 여러 동인(動因)을 분명히 하고 거기에 입각하여 자신의 연출사상을 상연집단의 구석구석까지 명확하고 철저하게 주지시킬 논리적 명쾌함을 갖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희곡과 등장인물의 행동에 있어서의 논리적 일관성은 이것 없이는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연출자는 구태여 연기자일 필요도 없다. 연출자는 원칙적으로 해명(explanation)을 통하여, 한 사람 한 사람의 연기자를 납득시키고, 그 자발성에 의하여 연출자의 이미지에 접근시켜 갈 필요가 있다. 그러나 연출자가 연기자이기도 할 필요는 연기자의 모든 행동(연기)의 순간에 있어서, 불필요한 긴장이 신체의 모든 부분에 나타나지 않는가, 내적 자기지각(自己知覺)이 없는 외면적 연기가 신체의 어느 부분에서 발생하고 있지는 않는가 등의 잘못을 구체적으로 지적함에 있다. 예를 들면 무리한 발성(發聲)이 신체의 어느 부분을 부자연스럽게 경직시키는 가를 예리하게 찾아내는 능력을 가질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연출의 역사[편집]

演出-歷史

유럽 연극의 역사에서 연출이란 부분이 확립된 것은 19세기 후반이다. 물론 유럽에서도 원시적 미분화예술(未分化藝術:노래와 무용과 연극적 동작이 각각의 장르로 분화되기 이전의 종합예술 형식)에서는 살아 있는 인간이 서로 대화를 중심으로 하면서 어떤 때는 가면을 사용하여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의 역할을 하여 무엇인가를 연희(play)하고, 그것에 의하여 직접 보는 사람에게 직접적으로 호소하였던 것이지만 드디어 두 사람 이상의 등장인물 사이에 생동적인 관계가 형성될 때부터 연출이란 기능이 존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874년 독일의 작스 마이닝겐(Saxe Meiningen) 극단이 부분으로서의 연출을 확립했고, 그 이후의 근대극에서는 연극의 기본적 요소로서 희곡·연출·연기·관객이란 인식이 보편화되었던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연출이란 부문이 확립된 것은 신극이란 이름의 서구 근대극 형식이 일본을 통해서 받아들여진 시점에서 비롯되었다.

서구 근대극이 첨단적인 극형식이라 생각한 개화초기의 지식인들은 우리의 전통적 극형식에 대하여는 거의 학문적 관심을 갖지 않은 채, 이를 목적론적으로 받아들여(그것도 일본식으로 변형된 서구 근대극을) 예술가적 자부심을 만족시킴으로써, 이후 전통극의 현대적 수용이라는 고통스런 과제를 남긴 것이다. 이것은 비단 연극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문화현상 일반에 모두 해당되는 문제이기도 하다.

한국의 전통극(가면극:탈출놀이)에서는 연출기능이 존재했는가, 또 존재한다면 누구였던가 등의 문제에 대해서는 아직 일반적으로 승인된 정설은 없으나 단편적으로 이에 대한 연구는 시도되고 있다.

즉 탈춤놀이에서의 잽이(풍물잽이:악사)가 연출자적 성격을 지닌 것이 아닌가, 또 꼭두각시놀이에서의 산받이(악사)가 그것이 아닌가 하는 논의들이 단편적으로 보고되고 있으나 섣부른 결론은 경솔한 추단이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 전통극에서의 연출의 의미와 그 기능의 수행을 누가 했느냐 하는 것은 전통극의 성격을 밝힘에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의 하나일 것이며, 전통극 해명의 한 단서가 될 수 있다.

연출자의 준비[편집]

演出者-準備 (director's prepare)

예술 작품의 창조는 항상 분석과 종합을 반복하면서 보다 높고, 보다 깊은 경지에로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희곡은 빙산(氷山)과 같은 것이란 비유가 있으나 희곡과 빙산과의 결정적인 차이는 극작가의 창조과정에는 확실히 수면 아래에 감추어진 부분이 있지만, 그것을 작품으로 제출할 때에는 극작가는 이 부분을 없애어, 말하자면 수면 위에 보이는 부분 이외는 나타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비유가 오해받기 쉬운 것은 희곡이 빙산이란 물리적 현상과 마찬가지로 이미 존재하는 것을 모두 해명해 주는 것이 연출자라는 미신과 같은 것이 일부 연기자 사이에 있었기 때문이다.

극작가는 수면 아래의 부분에서 출발하여 빙산을 만들어 간다. 희곡을 선택한 연극집단은 그 눈에 보이는 것만을 단서로 하여, 이른바 역산(逆算)과 같이 극작가가 감추어 놓은 수면 아래의 부분을 새롭게 발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연출가와 배우는 극작가가 표현한 그 이상의 것을 창출(創出)하여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빙산과는 다른 점은 여기까지 발굴시키면 빙산이 안정된다는 한계가 없기 때문이다. 밑이 깊으면 깊을수록 수면 윗부분이 안정되고 흘수면(吃水面)도 조금은 올라오는 것이다.

만일 대작의 희곡이라면 연출자의 준비기간은 적어도 반년이나 일년은 필요한 것이다. 연출가는 희곡에 대하여 작가가 탐구했던 것과 동일한 노고를, 반대로 주어진 희곡에서부터 탐구하여 가지 않으면 안 된다. 희곡이 중요하다고 하는 것은 이를 지칭하는 것이다. 더욱이 예술가는 언제나 희곡에 대해서나 자기 자신에 대해서나, 의문의 제기를 잊어서는 안 된다. 의문의 제기가 없을 때 예술은 죽고 말 것이다. 또 연출계획(directing plan)은 두뇌적 설계의 단계에서 멈추어서는 안 되며, 그 모든 것이 연출자의 마음의 눈에 세부적인 것에 이르기까지 역력히 떠올라야만 된다.

희곡 읽는 법[편집]

戱曲-法

희곡에 따라서는 한 번 읽어서 그 희곡의 주제가 분명하게 이해되는 작품도 있으나 근대극에 이르게 되면 희곡의 구조와 스토리의 전개가 극히 복잡하게 되어서 정성들여 읽지 않으면 포착할 수 없는 것도 있다. 하나의 희곡은 몇 개의 에피소드로 성립되어 있지만, 이 에피소드들을 잘 해독(解讀)함으로써 주요한 에피소드와 종속적 에피소드를 잘 분별하고, 나아가서 이들 에피소드가 어떻게 서로 얽혀서 그 희곡의 중심적 극의 흐름(action)을 잘 드러내고 있는가를 발견할 일이다. 이에 어떤 고전극과 같이 그 최후 도달점에서 희곡의 지도이념(theme)이 곧 분명해지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경솔하게 이것을 미리 결정하거나 또는 관념화하여 이 희곡의 주제를 규정해 버리는 것은 금물이다. 좋은 희곡이라면 그 희곡 가운데 전개되어 있는 인물과 인물의 상호 갈등(conflict)이 왜 일어났는가 하는 원인을 씌어져 있는 사건으로 명확하게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수면 아래의 부분을 발굴한다는 것의 제1작업은 이것을 가리킨다.

이렇게 하여 중심적인 스토리를 도출하는 것이 가능한다면 다시 한번 세부(디테일)의 점검에로 옮겨가, 분석·종합을 반복하면서 드라마의 구조를 분명히 파악한다.

희곡을 읽는다는 것은 그 현상면을 좇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행동이 전개되어 있는가를 해독(解讀)하는 것이다. 즉 희곡의 중점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거꾸로 언제나 세부에서부터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분석종합·종합분석의 보다 고차적인 것으로의 반복이 필요하다는 것에 희곡을 읽는 의미가 있다. 다시 말하면 거시적(巨視的)인 것과 미시적(微視的)인 것이 언제나 동시적으로 행해지는 조작을 통하여 희곡의 주요한 노선을 도출하는 것이 중요하다.

중심적 노선이 파악된다는 것은 어떠한 인물에 의하여 그 극의 흐름이 진행되는가, 그것을 방해하는 것은 어떤 인물에 의해서인가를 파악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고전희곡이라면 그 대립관계가 극히 명확한 것이 많겠지만 근대극으로 오면 그 인간관계도 복잡한 양상을 보이게 된다. 따라서 드라마가 갈등의 예술이라 불리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못하다는 것은 이런 의미이다. 행동과 반대행동이란 것을 일단 도출한다 해도 그것을 결코 도시적(都市的)으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희곡의 최종목표에로 향한 등장인물의 긴장관계에서 파악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인간관계의 전개방법·수단에 따라 그것이 드라마인가 코미디인가의 차이도 나타나게 될 것이다.

예컨대 같은 체호프(A. Chekhev)의 작품에서 <세 자매>가 드라마이고, <벚꽃동산>이 코미디라고 하는 것은 전자는 단지 세 자매들이 현실로부터의 탈출의욕을 맹렬히 불태우면서, 더욱이 종막에 가서 그 주거에서 쫓겨나면서도 탈출구가 없다는 비극적 결말을 도출하고 있다는 점에서 드라마라 하는 것이다. 이에 반해 <벚꽃동산>은 거기에서 탈출해가는 아아냐와 그것을 유도해 가는 트로피모프에 비해, 다른 사람들은 탈출구가 있고, 또 탈출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탈출구가 없다고 몸부림치는 점 때문에 코미디인 것이다. 물론 <벚꽃동산>이 코미디라는 이유는 타르튀프의 코미디라는 의미와는 매우 다르며, 이 추측이 비극인가 희극인가 하는 단정만은 엄중히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된다.

드라마[편집]

drama

'잘 만들어진 희곡'은 사건을 차차 재래의 기교로 얽어 짜면서 관객을 조바심나게 하고 이른바 클라이맥스(climax)로 뭔가 감동과 흡사한 것을 주며, 그리고 행복하고 아름답게 끝맺는 것이지만, 그것은 통속극이지 드라마는 아니다. 그 자체가 모순을 내포한 요소를 갖고 있는 생활 속에 어떤 자가 외부로부터 날아 들어와서 그 인간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간에 던진 파문이 인간 상호간의 긴장을 유발하고 그 긴장의 누적과 계속이 극한 지점까지 도달하여, 소위 발견과 급전(急轉)을 도출하고 그리고 최종 지점까지 몰아간다. 이와 같은 것을 드라마틱하다고 한다. 그리고 그와 같은 인간이 어떤 역사의 중하(重荷)에 대항하고 있는가가 작가의 예리한 눈을 통하여 선명하게 묘사되었을 때 그것이 드라마가 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고리키의 <밤주막>이란 희곡은 물 괸 웅덩이 속과 같이 서로 갈등관계에 있으면서

탈출하고자 하지만, 그 탈출이 거의 불가능한 지하생활자 속으로 루카란 망나니 순례자가 등장하는 데서 전개된다. 거기서는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진실이라고만 믿고 더욱이 그것이 어떻게도 되지 않는다고 체념하고 있는 사람들(예를 들면 모자상 보브노프) 속으로, 루카는 거짓이면서도 진실인 듯이 가장된 행동을 한다. 루카가 없다 해도 이 한푼도 없는 인간들을 착취하는 주막주인과의 대립을 중심으로 이 지하생활자 속에서 어떤 사건은 일어날 것이다. <밤주막>의 클라이맥스로 여겨지는 3막 종막(終幕) 부분에서 도둑인 와시카 페펠이 주막주인 코스트윌레프를 타살한 뒤, 정부였던 와시리사로부터 고발되고 그것이 연인 나타샤로부터는 두 사람이 공모했다고 오해받게 되는 유명한 종막은, 말하자면 이 희곡의 라이트 모티브의 정점이긴 하지만 위장된 클라이맥스이다. 만일 그것이 루카의 영향이라고 한다면, 2막(二幕)에서 페펠이 주막주인을 교살(絞殺)했을지도 모르는 위기가 루카의 기지(機智)에 의하여 일시 연기되었을 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희곡에서의 루카의 진정한 영향은 그가 모습을 감추고 나서부터 남아 있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하나 인간의 확인이라는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것도 사친이 루카에 대한 다른 여러 인물의 표면적인 비평을 부정한 후 일면 루카를 긍정하면서 다시 그 거짓을 폭로하여 부정하고, 그 위에서 루카의 인간을 존중한다는 휴머니즘을 상기함으로써 스스로의 속에서 잠자고 있던 인간의 확인에 도달한다. 이 과정에서 한 사람은 루카가 준 신기루가 사라지는데서부터의 스스로의 확인이, 자기를 부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데까지 몰아넣는다(배우). 또 한 사람은 자신 속에서 전설로 되어 있는 영광을 자신의 손으로 파괴함으로써 인간을 확인한다(남작). 또는 일한다는 것을 전근대적 경영주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한 사람은 오직 하나 평생동안 가장 소중히 여기고 있던 도구까지 잃어버리고 마는 데서 절망의 밑바닥에 있는 자신을 느끼고 어디에도 인간은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자물쇠 장사). 또 계율을 깨뜨린 이교도(달단인)도 있다. 이리하여 연쇄반응적으로 일어난 인간의 확인이 이 드라마의 발견이자 급전이며 동시에 희곡의 주제로서 도출된다.

주제의 발견[편집]

主題-發見

중심적인 노선과 희곡의 방향이 파악되면, 그 희곡의 구조 속에서 연출상의 중점을 어디에 둘 것인가의 설정이 필요하게 된다. 물론 드라마의 발견과 급전을 명확히 해야 할 필요는 말할 것도 없지만 이 강조점의 억제라는 것은 다시 한번 작은 부분의 강조점을 억제하고 그 누적 위에서 희곡의 가장 중요한 점을 통일된 총체로부터 파악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작은 부분이란 표현을 하였으나 장막(長幕) 희곡의 경우라면, 각 막에 있어서의 강조점, 각 막을 몇 개의 장면으로 구분한다면 그 하나하나의 장면의 강조점, 다시 세부의 강조점, 하나의 대사라고 하여도 한 센텐스 강조점, 구절의 강조점, 그리고 그것이 개개의 대사의 문제로 되면 당연히 그것이 언제·어디서·무엇을·누구에게·왜 말하고 있는가가 명백하게 되는 것이지만, 이런 것들이 분명하게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인간의 행동은 반드시 그가 처해 있는 환경과의 관련 속에서 언제·어디서라는 형태로 전개되어 간다. 즉 이 '언제' 속에는 그것이 어떠한 시대인가라는 것, 즉 역사의 문제가 포함되어 있다. 가령 <밤주막>이 발표된 1902년은 1905년의 제1혁명을 앞두고 계속된 경제공황과 그로부터 연유된 위기, 거기에 대한 로마노프 왕가 측의 맹렬한 탄압이 있고, 폐쇄된 환경의 지하실에는 직접 미치지 않지만 더욱이 그것이 경직화(硬直化)된 지상의 중하(重荷)로 인하여 더욱 고통스러워져 가고 있는 시기이다. 그것이 자유에의 열망이라는 주제를 도출해 내는 것이다.

여기까지 오면 당연히 그 희곡이 가진 템포·리듬을 어떻게 파악할 것인가 하는 것과의 관련이 드러난다. 잘 씌어진 희곡이라면 도입부에서 그 희곡의 고유한 템포·리듬을 분명히 알 수 있도록 씌어져 있다. 셰익스피어의 <햄릿>, 몰리에르의 <수전노>를 읽어 보면 알 수 있듯이 반드시 중요 인물이 등장하지 않는 도입부에서도 그 희곡 고유의 템포와 리듬이 분명히 느껴지도록 씌어져 있다.

배역의 결정[편집]

配役-決定 (casting)

이것도 연출자의 준비과정에서의 임무이지만 연출자가 합독(合讀)을 끝마치고 발표하는 것이 보통이다. 이 경우에 작은 배역까지 연출자의 이미지에 맞는 경우란 거의 없다. 문제는 무엇보다도 연기자 한 사람 한 사람의 가능성을 어떻게 도출하는가가 문제가 된다. 희곡의 흐름(action) 속에서 어떻게 각각 배역간의 상호관계를 파악하여 가는가라든가, 희곡이 구하고 있는 형식적 특성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특히 상승기에 있는 배우를 다소의 모험을 무릅쓰고라도 발탁할 것인가, 어느 정도의 연기력을 가지고 있는 배우를 조역(助役:assistant)으로서 책임지울 것인가 등 인원의 배치 여하가 연출의 성과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반드시 그 외양만으로 배역을 결정한다는 것은 반대로 실패의 원인이 될 때도 있다. 배역결정은 각기 그 집단이 현재 가지고 있는 능력과 그 능력에 대해 그 집단이 해야 할 과제와의 비교에서 깊은 고려와 명확한 통찰로써 결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희곡읽기[편집]

戱曲-(discuss)

연출설계를 구체화하는 제1보로서, 연출자는 희곡의 내용을 배우에게 있는 그대로 전하기 위하여 자신이 대본을 읽어 들려 줄 수 있는 능력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이 경우 연출자의 의도하는 바가 연기자에게 그대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장소를 선택하는 배려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배우에게 있어서 역과 대면할 때의 제1인상은 극히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좋든 싫든 간에 최후까지 배우의 연기형상에 지울 수 없는 인상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