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이동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문화·민속/한국의 연극/한국의 신극/아동극

위키문헌 ― 우리 모두의 도서관.

한국의 아동극〔개설〕

[편집]

韓國-兒童劇〔槪說〕

아동극의 개념

[편집]

兒童劇-槪念

아동극의 개념에 대해서는 역사적으로 몇 가지 견해가 있어 왔으나 현재는 '아동을 대상으로 한 극' 즉 아동들에게 보이는 것을 목적으로 한 극을 통틀어 '아동극(Juvenile drama)'이라고 부르며, 기획이나 연출을 누가 맡느냐에 따라 다음의 세 종류로 분류된다. 첫째, 어른이 연기하고 어린이를 관객으로 하는 형태, 둘째 어린이가 연기하고 어린이를 관객으로 하는 형태, 셋째 관객보다는 연기하는 어린이 스스로를 위한 극 등이다. 첫째의 경우는 성인들로 조직된 극단에 의해 공연되는 아동극 레퍼토리를 말하는 것으로 아동극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 제외되는 것이 보통이다. 둘째의 경우는 연기자가 아동들로 구성되었으나 기획·관리에서 연출에 이르기까지 전문가인 성인에 의해 이루어지는 전문적 형태의 극단이 공연하는 연극이다. 셋째의 경우는 전체적인 기획이나 연출의 극히 제한된 부분을 교사가 맡고 그 밖의 모든 것이 어린이들 자신의 손으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학교극이 그 대표적 형태이다.

한국 아동극의 배태기

[편집]

韓國兒童劇-胚胎期

한국의 성인문학(成人文學)에 있어서 희곡 부분이 가장 부진한 것처럼, 아동문학에 있어서도 아동극(희곡)부분이 가장 활발하지 못하며 역사도 짧다. 따라서 아동극은 전통으로 꼽을만한 것을 갖지 못했고, 아동극의 모태로서의 아동문학도 불모지나 다름이 없었다. 그러다가 19세기말 개화의 물결이 밀어닥치자, 이제까지 독립된 인간으로서의 대접을 받지 못하고 어른들의 종속물로서 살아온 아동들의 인격을 존중하려는 기운이 싹트기 시작했다. 1908년에는 최남선(崔南善) 주재로 잡지 <소년>이 창간되었고, 이광수는 '자녀중심론(子女中心論)'을 발표하여 어린이가 나라의 싹이며, 내일의 희망이라는 것을 계몽하였다.

그러나 본격적인 아동운동은 3·1운동이 일어난 뒤 도쿄 유학생들로 구성된 '색동회'가 설립되고 '어린이날'이 제정되면서 비롯된다. '색동회'의 중심 멤버였던 방정환(方定煥)은 <어린이>라는 아동잡지를 발행하였으며 여기에는 색동회 회원을 중심으로 한 소년운동자들이 동요·동화·동극 등을 발표하였는데, 이로써 아동문학은 틀이 잡히기 시작했다. 그때 발표된 최초의 아동극은 방정환의 <노래 주머니>(혹부리영감 이야기), 마해송(馬海松)의 <장님과 코끼리>, 신고송(申鼓頌)의 <요술모자> 등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아동극이 무대에 올려진 것은 1925년의 일로서 이 영광의 첫 무대는 중앙보육학원에 의해 이루어졌는데, 레퍼토리는 동아일보 현상 당선작인 윤석중(尹石重) 작 <올빼미 눈>이었다.

한국의 초기 아동극

[편집]

韓國-初期兒童劇

한국 최초의 아동극 공연이 있던 1925년에는 박팔양(朴八陽)·윤극영(尹克榮) 등을 중심으로 아동극단인 '달리아회'가 창립되었고 그 첫공연으로 박팔양 작사, 윤극영 작곡인 동요극 <여름 파랑새를 찾아서>가 지금의 대한공론사 홀에서 상연되었다. 1927년엔 경성보육학원에 의해 유인탁 번안·각색의 <콩이 삶아질 때까지>(보오카아 원작)가 인사동 소재 조선극장에서 상연되었으며, 1929년에는 정인섭(鄭寅燮)의 <허수아비>가 역시 경성보육학원에 의해 상연되었다. 그 후에 발표된 중요한 작품을 살펴보면 연성흠(延星欽)의 <사자와 호랑이>, 정인섭의 <체기통>, 최경화의 <모기와 거미>, 모기윤(毛麒允)의 <꽃피어라>, 홍은표의 <잃어버린 인형> <쌍무지개> <돌다리> <순사와 인형> <아이들의 사철> <눈보라> <비오는 항구> <새 봄> <열세 동무> <낡은 피아노>, 이주훈의 <새길>, 김송(金松)은 <은촉새> 등이 있었다. 방송동극으로는 김진수(金鎭壽)의 <산타클로스> <세 발 자전거> <진달래 꽃이 피는 동네> 등이 방송되었다. 이 무렵에 활약한 아동극단으로는 홍은표가 중심이 된 '백양회'가 있다. 이 시기의 아동극은 교회나 보육학교에 의해 산발적으로 상연되어 수적으로 미약하였고 대개의 경우 작품(희곡)의 발표로 그치는 형편이었다.

1930년대 말부터 1945년 일제가 패망하기까지의 시기는 민족문화에 대한 압박이 한층 심해지고 한글의 사용을 금지하는 등의 횡포로 모든 민족문화활동이 정지되고 말았으며 그로 인해 그나마 명맥을 유지해 오던 아동극은 완전히 동면상태로 들어갔다.

광복 후의 한국 아동극

[편집]

光復後-韓國兒童劇

1945년 8월, 감격의 광복을 맞자, 아동예술연구단체인 '호동원'이 김영일(金英一)·최병화(崔秉和)·연성흠(延星欽) 등에 의해 조직되었고 그 활동의 일환으로 아동극단 '호동'이 창설되었다. 1946년에는 미국인 뢴돌프에 의해 시작된 <똘똘이의 모험>이 방송되었는데 이 작품은 인기가 높아 유호(兪湖)·김내성(金來成)·김영수(金永壽) 등이 릴레이식으로 집필, 상당히 오랫동안 방송되었다. 1949년에는 방기환(方基煥)의 동극집 <손목 잡고>가 출판되었는데, 이것은 최초의 동극집이었다. 1951년에는 아동극사상(兒童劇史上)의 최초로 최태호(崔台鎬)의 <걸레>, 강소천(姜小泉)의 <꽃과 나비>, 방기환의 <봄이 오면> 등이 국민학교 국정교과서에 수록되었으며, 그 후 주평(朱萍)의 <토끼이야기>, 금수현의 <흥부와 놀부> <낮과 밤> 등이 수록되었다. 1950년대 후반에서 70년대에 이르는 동안 <새벗> <학원> <새소년> <학생계> 등의 잡지와 방송을 통해 많은 작품이 발표되었고, 여러 권의 아동극집이 출판되었으나 실제로 무대에서 상연된 것은 드물었다. 1961년에는 '한국아동극연구회'가 조직되어(회장 조풍연) 아동극 발전을 위한 여러 가지 사업을 구상했으나 별 성과는 없었고 1962년에는 '한국아동극연구회'로 개편(회장 주평), 새로운 출발을 하였으며 <교육주보>에 의해 창설된 '전국아동극경연대회'를 계승하여 1972년까지 12회에 걸쳐 개최하였고 지방 여러 도시에 지부를 설치, 지방 어린이 문화 향상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962년에는 본격적인 아동극단 '새들'이 창단되어, 1973년 17회의 국내공연과 4차의 재일교포 위문 공연을 하였다. 1961년부터 KBS의 텔레비전 동극(童劇)이 수시로 방영(放映)되어 미약한 무대활동에 큰 도움이 되었다.

<朱

萍>

한국의 아동극단

[편집]

韓國-兒童劇團

6·25전쟁 후의 아동극단 활동으로는 1962년에 창립된 '새들'(대표 주평)을 비롯하여 1963년에 '동연(童演)'(대표 김순남), '신동(神童)'(대표 노덕준), 가극단 '때때'(대표 서빈) 등이 창립되었다. 1965년에 '작은 별'(대표 김문수) 등이 창립되었고 지방극회로는 부산의 '갈매기'(대표 이영준), '바다'(대표 천재동), 대구의 '능금'(대표 유재정), 수원의 '색동극회'(대표 수원문화원), 춘천의 '개나리'(대표 이현근), 대전의 '한밭연기실'(대표 아동극협회 대전지부) 등이 창립의 기치를 올렸다. 그 중 '새들'만이 17회의 창작극공연을 비롯하여 4차의 재일교포 위문공연을 하였을 뿐 기타 극회들은 대개가 2-3회의 공연을 하였을 뿐이고, 또 어떤 극회는 단 1회의 공연도 하지 못한 채 해산되고 말았다. 이러한 사실은 한국의 아동극운동이 얼마나 험난한 길을 헤치고 이루어져 왔는가를 말해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한국의 아동극 콩쿠르

[편집]

韓國-兒童劇 concours

1960년 <교육주보>에서 '아동극경연대회'를 창설, 제1회 대회가 3월 4일에 개최되었는데, 19개 학교가 참가하여 성황을 이루었다. 이 대회는 주최자인 <교육주보>가 문을 닫는 등의 우여곡절 속에도 계속되었으며, 1964년부터는 '한국아동극협회'의 주관 아래 꾸준히 계속되어 12회(1972년)의 연륜을 쌓았으며, 매 대회마다 평균 15개 학교가 참가하고 있다. 지방의 아동극 콩쿠르로는 진주의 개천예술제 아동극 부문, <전남일보> 주최 호남예술제의 아동극 부문, 부산시 교육위원회의 부산아동극경연대회, 예총 밀양지부 주최 아랑제의 아동극 부문 등이 있다.

한국 학교극의 현황

[편집]

韓國學校劇-現況

아동들의 교과학습이나 정서를 함양하는 데 있어 학교극이 얼마나 효과적인가는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을 정도이지만, 현재의 실정은 이른바 콩나물 교실로 대변되는 심각한 교실난으로 학교극운동이란 엄두도 못낼 형편이며, 다만 교실사정이 좋은 사립초등학교와 일부 공립초등학교에 의해 겨우 학교극의 존재를 찾아볼 수 있는 정도이다. 사립의 영훈초등학교, 상명사대 부속초등학교, 운화초등학교, 공립의 봉래초등학교, 수송초등학교 등이 비교적 활발히 움직이고 있는 학교들이다. 이러한 학교극의 부진을 타개하는 데는 우선 교실난의 해소가 전제가 되며, 일개 교사나 아동극운동자의 힘으로 해결될 문제는 아니지만, 학교극이 아동극교육에 미치는 영향을 생각할 때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한국 아동극의 현황

[편집]

韓國兒童劇-現況

1920년대에 비롯되어 명목상 60년의 연륜을 가진 한국의 아동극운동은 다른 분야의 문화활동이 겪은 어려움 이상의 시련을 헤치고 몇몇 사람의 외로운 의욕만으로 이어져 왔다. 일제가 민족문화를 말살하기에 광분하던 8·15 전이나 광복 후와 6·25전쟁을 전후한 혼란기는 말할 것도 없고, 사회가 안정되기 시작하고 모든 분야가 자리를 잡기 시작한 1960년대에 와서도 아동극이 뿌리를 박고 성장할 소지는 마련되지 않았다. 1960년대에는 '새들'의 창단에 이어 전후 10여 개의 아동극단이 서울과 지방에서 조직되어 자못 활발히 전개되는 듯도 하였으나, 거의 2-3회의 공연을 끝으로 해산의 운명을 감수해야 했다. 무대와 관객과 연기자가 있어야 성립되는 연극활동이 아무 뒷받침 없는 소박한 의욕만으로 성장하기에는 너무나 힘이 들었던 것이다. 이러한 풍토는 80년대에 들어와 동랑청소년극단과 실험극장의 야심적 실천으로 인해 점차 자리를 굳혀나갔다. 동랑청소년극단은 85년에 이어서 86년에도 시리즈 공연으로 <꿈꾸는 별들>(윤대성 작·김우옥 연출)을 무대에 올려 중등학생들의 큰 호평을 받았다. 동랑청소년극단의 이러한 작업은 힘차게 지속될 것이고 또 지속되어가야 한다. 청소년들의 정서 함양을 위해서 연극이 가지는 기능은 크다. 그렇기 때문에 정부 차원에서 육성책을 강구하여야 할 것이다. 근자에 들어서서는 아동극도 상당한 세로 극장가를 점하기 시작했다. 이 아동극은 주로 인형극 형태와 어린이 뮤지컬 형태로 나뉘어지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아동극이 점차 상업성을 띠어가기에 그에 따른 관객동원의 어려움으로 역시 적은 경비로 상연할 수 있는 아동극 전용무대가 없는데서 생기는 문제이며, 아동극이 활발하게 공연되고, 입장료만 저렴하다면 아동극 공연에 소요되는 최소한의 경비가 염출될 정도의 관객동원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리하여 아동극이 어린이들 생활 속에 뿌리박게 된다면 사회의 인식도 절로 높아 가리라 생각된다.

어쨌든 한국 아동극의 당면과제는 아동극을 마음놓고 상연할 수 있는 전용무대를 갖는 일이며, 이 점에서 국립아동극장의 설립과 같은 근본적인 대책이 아쉽다.